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의 패널토론 : 전 세계적인 요리사 3명은 한국에 무슨 이야기를 남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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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9일 롯데호텔에는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가 글로벌 리더스 포럼에 참여해 한자리에 모였다. “세계 3대 셰프에게 음식의 길을 묻다” 세션은 각 셰프들의 발표와 7명의 패널이 참여한 토론으로 진행되었다.

토론은 한 시간가량 진행되었으며 질문 중에는 패널이 직접 던진 질문도 있고 관객의 질문을 패널이 대신 전달한 것도 있다. 프랑스어, 스페인어, 영어, 한국어가 뒤섞여 진행되었던 만큼 모든 내용을 직역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통역된 내용을 토대로 본래의 단어나 구절에 얽매이지 않고 전체의 뜻을 살려 의역하였음을 밝힌다.

* 아래 내용을 보기 전에 셰프들의 발표내용(http://chefnews.kr/archives/1408)부터 읽기를 권한다.

 

  • 피에르 가니에르에게>>> 해외의 수많은 도시에서 레스토랑을 오픈하기 위해 다른 팀과의 협업이 필요했을 것으로 압니다. 그 과정에서 독창성과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하우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올해로 제가 64세입니다. 나이가 많은 편이지요. 제가 30년 동안은 한 곳에서만 식당을 운영했습니다. 런던에 처음으로 해외 레스토랑을 열었을 때 제 나이 54세였습니다. 제가 40세였을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내가 누구이고 어떤 요리를 하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이게 정립되는 데에는 많은 고민과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레스토랑 운영의 키 포인트는 협업입니다. 어디서 일하든지 팀원들과의 협업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피에르 가니에르만의 요리를 내어놓는 데 어떤 노하우가 있는지를 물어봅니다. 내 요리를 전달하려 하거나 내 이야기만 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함께 일하게 될 팀의 이야기를 듣고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에서는 롯데그룹과 일하고 있고 마찬가지로 오만하지 않은 자세로 많은 대화와 이해를 통해 서로를 알아갈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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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 레드제피에게>>> 덴마크는 혹독하리라 할 만큼 추운 겨울을 가지고 있고, 노마의 첫 시작 시점에는 그 방향이 메인스트림과 달랐습니다. 그런 제약이 많은 상황에서 목표를 확실히 설정할 수 있도록 영향을 준 덴마크의 문화는 무엇이었나요?

덴마크에는 북유럽의 개신교가 들어와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즐기는 것이라면 죄악으로 여기는 사회입니다. 음식이라도 정도를 넘어서 즐기게 되면 지옥에 간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그런 인식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개혁을 위해서는 장애물로 작용하는 것들입니다. 음식을 즐긴다던 지 음식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인생을 즐기는 모습을 비치기만 해도 ‘부르주아 놈’이나 ‘무지몽매한 놈’이라는 욕을 얻어먹습니다. 같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선(善)한 것이라 표현하면 받아들여지는 편입니다.

 

  • 르네 레드제피에게>>> 당신의 음식을 ‘그린 푸드’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동의하나요?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채소에 대한 이야기인가요? 그나저나 그린 푸드가 뭘까요? 지속가능성에 대한 질문이라 이해하고 답변하겠습니다.

저는 마케도니아의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척박한 곳이고 멀리서 수급한 음식들은 비쌌기 때문에 렌틸콩요리, 지역 채소를 활용한 스튜 요리를 주로 먹었습니다. 그런 어릴 적의 경험들의 노마의 방식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식당이라는 곳은 어떤 것보다 지속가능성이 떨어지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완전히 ‘그린’한 레스토랑이란 있을 수가 없고 그러려고 해도 지속가능성은 적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생존을 위한 기본 요소는 많지 않습니다. 노마는 인생을 즐기게끔 해주는 곳입니다. 노마는 가능한 범위 내에서 ‘그린하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식재료를 식당에서 100km 이상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급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얼만큼의 탄소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측정해주는 기관도 있습니다. 그 기관에서 노마에서 사용하고 있는 675가지의 원료를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다른 레스토랑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탄소배출량이 적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기후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요리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부분도 많으나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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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안 로카에게>>> 식당 평가의 등급은 어떤 것인가요? 정확히 평가될 수 있을까요?

랭킹이나 평가에 대해서 일방적인 방식으로 고려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레스토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리사는 야심 찬 사람일 수도 있고 불만족이 가득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면서 보다 나은 것을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랭킹이라는 것이 최우선 조건이 되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레스토랑은 지금까지 목적을 잘 달성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년대에 해외 여행을 많이 하면서 레스토랑을 돌아보고 “우리도 언젠가 저런 레스토랑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라는 꿈을 가졌고 지금은 그 꿈을 이뤘습니다. 일하는 과정이 즐겁고 사람들이 우리 음식을 먹으면서 즐거워합니다. 저에게는 이 자체가 마법과도 같은 생활입니다.

세계는 돕니다(변합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돕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에서 우리의 작은 세계를 건설했습니다. 우리가 가졌던 꿈을 이뤄냈습니다.

 

  • 르네 레드제피에게>>> 식당 평가의 등급은 어떤 것인가요? 정확히 평가될 수 있을까요?

어떤 평가 시스템이든지 완벽히 정확할 순 없습니다. 800명의 사람에게 평가를 부탁해서 종합한 결과 아닙니까? 대체로 얼토당토않은 결과가 나오지만 원래 인생이란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세계 최고의 레스토랑은 아예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건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랭킹이라는 것이 음식문화 자체를 근본부터 바꾼 것은 사실입니다. 노출도와 영향력이 아주 큽니다. 그것이 비록 잘못된 것일지라도 말이죠. 저희의 식당을 바꿨고, 마을을 바꿨고, 도시를 바꿨고, 덴마크도 바꿨습니다.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 평가에서 등급이 높았기 때문에 저 또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든 싫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조안 로카에게>>>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 당신과 같은 마스터셰프, 스타셰프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식은 코스요리가 아니라는 점 등, 서구 음식문화와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내건 식당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 발전적인 상황으로 이끌 수 있을까요?

발표에서 우리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선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창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요. 세계 최고 수준의 셰프들과 일하는 것, 품질을 높이는 것이 아직도 부족합니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그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기반 위에서 새로운 시도가 펼쳐져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을 갖춘 셰프를 양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입니다.

르네가 말한 것처럼 식당에 대한 평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 우리 식당이 하고자 하는 역할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 역할을 찾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의의를 가지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많이 일하고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 르네 레드제피에게>>>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 당신과 같은 마스터셰프, 스타셰프가 배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식은 코스요리가 아니라는 점 등, 서구 음식문화와 많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의 젊은 요리지망생들에게 한마디 이야기해주시죠.

마스터셰프나 스타셰프를 배출할 필요가 있다거나 한식이 서구음식과 다르다는 생각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뭘 하려는지 알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재발견해야 하는데, 이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했던 것처럼 나는 누구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 몸에 완전히 베어버려서 변화를 인지할 수도 없을 수준으로 체화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할 줄은 나도 몰랐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기절할 정도로, 녹초가 되어도 다시 일어나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했습니다.

질투가 샘솟는 순간, 내가 내 동료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 시점은 바로 성공을 할 수 없게 되는 순간입니다. 노마의 팀원들은 모두 20~30대의 사람들로 한 지역에서 살면서 서로를 응원하며 밀어줬습니다. 우리가 한 그룹으로 노력했고 개개인이 열심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 조안 로카에게>>> 음식에서 국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정체성이 없어지기도 하고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적인 방법으로 해외에 전달하는 것이 옳을지, 접목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음식문화를 해외에 전파한다는 것은 전통을 유지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을 유지함으로 그것이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퓨전도 가능하지요. 하지만 새로운 풍미를 들여오더라도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필요합니다.

한국에서 대중적인 음식들이 해외로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지역에 가서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려는 사람은 언제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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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 레드제피에게>>> 음식에서 국경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정체성이 없어지기도 하고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한국적인 방법으로 해외에 전달하는 것이 옳을지, 접목하는 것이 좋을지, 의견이 듣고 싶습니다.

이 질문은 항상 거대합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사람들이 어떻게 한식을 더 사랑하게 할지에 대한 비법을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든 한식당은 있습니다. 심지어 덴마크에도 많습니다. 서양인의 시각에서 봤을 때, 한국 음식은 무엇인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가 궁금합니다.

한 나라의 음식문화를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힘듭니다. 한식 내에서도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이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이유도 그것이죠. 한국에 와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한식을 먹기 위해 어떤 종류의 한국 식당에 가야 하는지에 대해 인식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발효음식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키지요.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음식’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발효시킨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발효시키면 어떻게 되는지, 어떤 맛이 나는지, 발효음식을 서빙하는 음식점은 어떤 분위기인지, 이런 것들 것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 음식은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본 적은 많지만 명쾌한 정의를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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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요리사 3명은 한국에 무슨 얘기를 남겼나? –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가 한국에 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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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9일 롯데호텔에서는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가 글로벌 리더스 포럼에 참여해 한 자리에 모였다. “세계 3대셰프에게 음식의 길을 묻다”세션은 한식재단의 후원과 참여로 진행되었다. 그 내용이 한국의 식문화 발전, 더 나아가 한식의 세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에 기록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한다.

이틀간 진행되는 글로벌 리더스 포럼의 6가지 세션 중 하나로 ‘요리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에 주최측은 “요리는 삶의 방식이고 민족성의 중심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즐기는 문화적 수단이다”라고 말하며 “높은 경제력을 위해서 관광산업의 호황과 그를 뒷받침할 수준 높은 식문화가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 날 참석한 셰프들은 세계적인 식문화를 선두함으로 국가의 관광산업을 활성화에 식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냈으니, 셰프는 그저 요리를 하는 사람을 넘어 국가 경제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리더임이 자명해졌다.

이 세계적인 세 명의 셰프는 공통적으로 한식과 연관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먼저 분자요리계의 선구자로 불리며 “요리계의 피카소”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피에르 가니에르는 한국에 그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파리, 도코, 홍콩에 이어 네 번째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전통시장을 돌며 식자재를 파악할 정도로 한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 요리에 한식을 과감히 조화시킨 ‘김치 마멀레이드’, ‘쌀과 샴페인을 가미한 비스크’등을 선보이고 있다.

조안 로카의 레스토랑 ‘엘 세예 데 칸 로카’는 3형제가 운영하는 곳이다. 맏이는 요리를 맏고, 둘째는 와인을,막내는 디저트를 담당한다. 그의 주방은 물리학자나 화학자의 실험실에 가깝다. 전통적인 방식과 현대기술을 접목한 요리로 스페인 요리를 세계 최고 자리로 이끌어 놓았다. 그의 레스토랑에서는 한국의 된장과 간장으로 맛을 낸 양고기 요리와 파스타가 있다. 2009년 우연히 한국 장을 처음 접한 뒤 그 감칠맛에 매료돼 꾸준히 장을 이용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르네 레드제피의 노마(NOMA)는 북유럽 요리를 뜻한다. 노마는 세계적인 요리 트렌드가 ‘분자요리’의 흐름을 친환경적이교 재료 본연에 집중한 음식으로 돌려 놓은 곳이다. 작은 식당이 중소기업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는데 3개월 단위로 예약을 받는 자정은 개시 직후 마감이 된다. 8년 전에는 16명의 손님이 전무였지만 지금은 하루에 1500명이 찾는다. 이런 노마에서도 발효음식에 관심이 많아 한국에서 된장을 공수해 연구했으며 주방에 ‘발효 숙성실’을 만들어 견과류를 이용한 노마식 장을 제조해 만들고 있다.

세 명의 셰프가 각자 키노트 스피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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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에르 가니에르

한국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문화가 달랐고 식재료가 달랐고 소비자들의 성향이 달랐다. 오늘 이 자리는 내가 요리사로써 걸어온 길을 정리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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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요리와 일하는 모습을 사진 슬라이드로 넘겨 보여줬다.)

내 인생을 이렇게 사진으로 담아놓으니 자연 사진도 없고 바깥 활동하는 사진도 없다. 이게 바로 내가 걸어온 길이다. 나는 생업을 위해 요리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가업을 이어 받았다.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처음에 나는 요리가 즐겁지 않았다. 그 상황에 대해 질문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재미없던 10년이 지나갔다.

“정말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 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매년 똑같고 반복적인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것도 굉장히 멋진 수준이긴 했으니까. 그러던 중 한 칼럼을 읽음으로 ‘요리는 사람의 관계를 이어준다’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요리를 계속 해왔지만 정작 요리의 의미에 대해선 몰랐던 것이다.

b3나는 날렵하지도 않았고 기교가 많지도 않았으며 두뇌가 특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 에너지가 넘치기 시작했다. 1981년에 처음으로 나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 주변은 상업도시였고 생활형편이 넉넉치 않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명성을 가지기에 적합한 위치는 아니었으나 일을 열심히 할수록 현지인들은 오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

그렇게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엇인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예술을 하고 싶었다.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추천하기를 즐겨 했고, 추천한 메뉴를 먹겠다고 하면 주방으로 돌아오는 순간 또 마음이 바뀌어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곤 했다. 나는 요리하는 그 순간에 충실 하려고 한다. 메뉴는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성이며 그 당시의 열정을 요리로 담아내는 것이다.

부도가 나서 재산을 모두 잃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을 크게 하진 않았다. 부도의 원인이 내 요리 때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파리에서 식당을 열었고 큰 성공을 거뒀다. 식당을 런던에 열자는 무모한 계획도 진행했는데 이 또한 성공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불행인지 행복인지 모르겠다. 나는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장인이 되고 싶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제안과 도움을 받았고 지금까지 총 15개의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다.

해외의 레스토랑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팀원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외의 레스토랑에 전수할 수 있는 것은 요리 기술이나 재능이 아니다. 정신과 태도를 전수해야 한다.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 고객에게 충실하는 것, 이 정신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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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안 로카

우리(그는 계속해서 ‘나’가 아닌 ‘우리’로 표현했다.)가 사는 곳은 산악 지역이다. 인구가 9만명인 작은 도시이고 주로 노동자가 살고 있는 곳이다. 아버지는 스페인의 전통 음식인 카탈루니아 지역 음식(이하 카탈란)을 선보이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음식을 파는 일을 3대째 하고 있고 3형제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형제가 함께 일을 시작한 것은 26년째다.

우리가 하는 일은 꿈이라고 생각한다. 요리라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싶었다. 20년 동안 노력한 끝에 7년 전 새 장소로 이전했다.

요리사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항상 창의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상상력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 열정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창의성이다.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연구실을 만들었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창의그룹으로 계속 새로운 생각과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결과물들이 메뉴가 되기도 한다.

식당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인턴을 하러 온 사람도 있고 함께 일하려고 온 사람도 있다. 한국인 ‘최’도 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창의성을 불러일으켜주는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20명의 웨이터와 전문 셰프들로 팀이 이뤄져 있으며 15~17개 국적의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스탭’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2년 전부터는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을 휴식하기로 했다. 가끔은 점심시간 서비스를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창의적인 시도를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고, 결과물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서비스하는 시간 외에도 많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행을 아주 좋아한다.

12한국은 스페인과 공통점이 많다. 기온도 비슷하고 사람들과 성격도 비슷하다. 한국인은 따뜻하고 친절하다. 한국에 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가 붕어빵이었다. 붕어빵을 활용해 에피타이저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의 인상적인 경험을 담은 전채요리다. 손님들은 가보지 못한 한국이지만 우리가 가봤기 때문에 소개해드리고자 이 메뉴를 만들었다. 지구의 모습이 프린트 된 덮개를 씌우고 노래는 “We Are The World”를 틀어준다.

여행을 하는 중, 그 국가에서 느꼈던 풍미를 어떻게 음식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껏 한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보쌈도 큰 영감을 줬다. 한국의 전통 장이 사용되고 김치도 곁들여지기 때문에 인상적이었고 이를 담아낼 메뉴를 개발했다. 식용유를 사용해 밀가루 반죽을 튀겨내고 그 속에 튀긴 삼겹살, 김치, 장을 넣어서 보쌈처럼 쌓인 듯한 느낌으로 메뉴를 만들었다.

한국의 흑마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도 있다.

이건 한국인 ‘최’가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탕기계다. 우리는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편이다.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 게 아니라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지금 중탕기는 발효용으로 쓰고 있다.

b2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맛을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를 계속 찾아낼 수 있다. 5주동안 레스토랑을 닫고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38명의 스탭이 함께 갔다. 보고타, 멕시코시티 등 여러 도시를 거쳤는데 각 나라의 음식을 살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멕시코에서 자주 사용하는 옥수수라는 재료를 한국의 중탕기를 사용해 발효를 시킨 뒤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냈다. 한국과 멕시코에 가보지 않았다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어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여행은 중요하다.

한국의 쌀 뻥튀기도 인상적이었다. 스페인의 전통음식 카탈란에는 쌀을 이용한 요리가 많은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곡창지대에서 나는 쌀을 활용해 뻥튀기를 만들었고 요리를 얹어내는 받침으로 사용하기 적합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육지와 바다가 접해 있는 곳이다. 육해공이 한 접시에 담긴 조화로운 음식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돼지고기 위에 정어리 껍질을 덮었다. 생선처럼 보이지만 돼지고기다. 여기에 진한 향이 나는 간장을 소스로 사용했다.

이렇게 한국의 재료들이 스페인의 전통음식과 접목되고 있다. 여전히 이건 카탈란 전통음식이다.

한국의 음식은 굉장히 흥미롭고 가치가 높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정통성을 보다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이 창의적으로 찾아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잠재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높게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법을 더 다양화하고 현대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다. 그것이 음식을 국제화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잘 팔리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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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 레드제피

한국에서 초청을 4번 넘게 받았는데 이제서야 한국에 왔다. 그 동안 자식을 3명이나 낳느라 바빴다. 양해해달라. (객석 웃음) 청년기에 모두 축구선수나 아이돌 사진을 방에 걸어놓지 않나? 나는 알랭 뒤카스와 같은 요리사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고 자란 사람이다.

난 과거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 12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의 우리는 젊었고 이상주의자들이었다. 한 창고를 개조해 식당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의 경관, 덴마크의 문화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식사라는 경험과 시간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 순간을 맛볼 수 있게 하자. 그래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배들이 항상 했던 것처럼. 우리 정체성을 찾아서 음식에 담아내는 것을 하고 싶었다.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는 것은 서슴지 않았다. 항상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왜 이렇게만 해왔을까? 왜 여기서 벗어날 순 없을까? 틀을 깰 순 없을까? 다른 음식문화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많은 질문들보다 우선은 맛이 중요하다. 맛이 있다는 조건 하에 이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했다.

과거를 찾아내고 미래를 비추어보자는 것이 우리가 가졌던 사명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접시 위에 시공간과 경관을 담자는 의견에 회의감을 보였다. 아니, 거의 반발 수준이었다. 노마와 발음이 비슷한 ‘고래 음경’ 또는 ‘물개 생식기’로 이름을 바꿔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고래 음경을 먹어보긴 했지만 맛이 썩 나쁘진 않았다. (객석 웃음)

당시 비판하던 사람들의 의견은 이러하다. “왜 캐비어같이 인정받은 고급 음식을 등한시하고 생소한 음식을 찾으려 애쓰냐?” 당시 주변의 쟁쟁한 레스토랑을 보면 정통 프랑스 요리를 선보이고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음식이 있었다. 소소한 변화가 있을 뿐 서너 가지 주요 메뉴를 계속 복제해내는 곳들에 불과했다.

도심지에서 벗어나 요리를 하면 조금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도했지만 멸시는 계속되었고 실제로도 처음의 시도는 그렇게 괜찮지 않았다. 크렘블레에 와인을 넣는다든지, 화이트와인을 넣어야 할 곳에 사과발효주를 넣는다든지, 이런 시도들을 하면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

크렘블레가 지상 최고의 요리라 하더라도 그건 프랑스 요리이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현장성을 크렘블레에 담는 것은 무리였다. 그 실패가 노마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우리는 더 많은 생산자와 만나기 시작했다. 산타클로스와 똑같이 생겨서 클로스라고 불리는 농부아저씨, 깊은 수심에 직접 잠수해 성게를 캐어오는 잠수부를 만났다. 식당의 좌석이 반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노력은 계속했다.

기존에 배운 것들을 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 고집을 밀어붙였고 수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강인해졌다.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요리들이 탄생했다. 실험을 계속하면서도 우리는 스스로의 기준을 높여 잡았다. 일정 수준이 나올 때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했다.

10시계를 다시 오늘로 돌려보자. 그 당시 하나의 식당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100명의 직원이 있는 5개의 식당이 되었다. 박사학위를 딴 사람, 인류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음식을 배우기 위해 노마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서비스와 음식 준비를 도와주고 있지만 노마에도 실험을 전담하는 주방이 있다. 이 실험실을 우리는 ‘직감의 방’이라고 부른다. 이 방에서는 무조건 신메뉴만 생각하고 갖은 실험을 한다. 직감의 방에 들어가면 보통 99%의 실패를 맛본다.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해야 한다. 이 과정이 있기 때문에 발전을 할 수 있고 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 6년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공간이고, 지금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끝없이 푸쉬하고 있다.

최근에는 어떻게 곤충을 식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여러 문화권에서는 이미 영양이 풍부한 식재료로 이용되고 있다. 개미의 아삭한 식감을 알고 난 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왜? 하필 개미야?”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객석에 계신 분 중 꿀 드시는 분?

자 보다시피 모두 꿀을 먹는다. 사실 꿀은 벌의 토사물이다. 벌이 꽃의 수분을 빨아먹었다가 다시 토해내는 게 꿀이 아닌가. 새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미보다 훨씬 징그럽게 생겼다. 개미를 발견한 순간 “아, 우리는 바보가 아니었을까? 왜 개미를 먹을 생각을 못했지?” 항상 옆에 있던 개미였는데, 지역에 대해 놀라운 발견을 한 순간이었다.

b1노마에서는 발효음식도 연구하고 있다. 한국처럼 덴마크의 겨울은 무척 춥고 혹독하다. 5~6개월 동안 계속되는 겨울 동안 발효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발효가 있기에 빵, 와인 등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이니 발효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버려야만 했던 채소의 갖은 부분들은 육수로 끓여낼 수도 있고 식초에 절여 먹을 수도 있다. 발효를 이런 곳에 적용할 수 있다. 얼마 전 30년 된 4개의 컨테이너를 구입해 발효공간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음식을 썩히고 있다. 맥젓, 미소된장 등 모든 음식을 썩혀본다.

현재 노마는 점심과 저녁 모두 만석이다. 2주 전 점심 웨이팅 리스트에 4000명이 이름이 올랐지만 40명 밖에 대접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 일을 이룰 수 있었나?”라는 질문을 주최측에서 했다. 창의성을 가지고 일을 하려 했다는 답변은 당연한 소리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음식 말이다. 이런 중요한 것을 놓치고 기존의 방식에 따랐다면 노마는 수많은 발견을 놓쳤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도 이 일을 했기에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셰프쟈켓과 앞치마를 매야 한다는 규율도 파괴했다. 편안하게 요리하고 손님은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주방에 일본, 호주, 한국사람이 더 많다. 현재 4명의 한국인이 함께 일하고 있다. 동료 중 데이비드 창 이라는 셰프가 있는데 이 사람의 독창적인 생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레스토랑의 메인 홀을 닫았다. 메인 홀에서 가장 많은 돈이 나왔는데 이걸 닫아버렸다. 셰프들에게 메인 홀은 끔찍한 곳이다. 대규모 연회를 매일같이 연달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메인 홀의 큰 테이블을 갖다 놓고 스탭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장소를 바꿨다. 노마가 계속 바뀔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질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높아졌다 식음료업계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가 있었기에 하버드를 나와서도 음식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도 생긴 것이다. 예전엔 학교를 중퇴했거나 범죄자들이 주방에서 일을 했다. 지금은 인간적인 존중이 있고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바꼈다.

코펜하겐은 음식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다. 음식 역사에서 소외된 곳이 부각되고 있다. 어느 논문에서 말하기를; 지난 5년간 덴마크의 관광산업이 12% 성장했는데 그 이유가 음식 덕분이라 했다. 이건 놀라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 많다만 막 걸음마는 뗀 단계이고 곧 청년기를 겪을 것이다. 노마도 훗날 지루한 어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질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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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가 만드는 진짜조리복 븟;BEUT 배세훈 대표를 만나다

길거리에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은 복합 문화의 메카, 새로운 식문화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는 식당들이 가장 먼저 생겨나는 곳, 이태원의 정은빌딩 5층의 한 작은 사무실에는 요리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한국 유일의 조리복 전문 제작사인 븟-BEUT 사무실이다. 븟은 순 우리말로 부엌을 뜻한다. 이곳에 들어와보면 여기가 부엌인지 옷을 파는 곳이 맞긴 한지 분간이 안 된다. 현관부터 빼곡히 수납된 조리복은 업무 공간을 침범해 천장까지 쌓여있고 3명의 직원은 조리복 담장으로 단절된, 구석의 어둡고 작은 공간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업무를 보고 있다.

반면 부엌과 부엌 맞은 편의 손님용 휴식공간은 꽤 쾌적하다. 200여 권에달하는 요리 서적, 음료는 셀프, 요리가 하고 싶을 땐 주방을 사용해도 된다. 요리사들의 열린 사랑방인 이곳에서는 격주로 현업 요리사를 초청해 강연도 진행한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뼛속까지 요리사, 하지만 지금은 요리가 아닌 조리복을 만들고 있는 븟 배세훈 대표. 그의 좌충우돌 창업기를 들어보았다.

| 고집불통 요리사 바라기와 부모님의 반대

15살, 요리에 빠져든 아들을 둔 부모님은 그저 재미 삼아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었고 어릴 때부터 항상 아버지를 따라 경찰관이 되겠다고 말하던 아들이 돌연 요리사가 되겠다며 진지하게 고백을 하니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요리학원을 다녔어요. 1년이 지나니까 안양에 처음으로 요리고등학교가 생기더라고요. 그 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1년을 꿇고 다시 조리고등학교에 입학하겠다, 부모님께 말씀 드렸죠. 그 때 진짜 어버지한테 맞아 죽을 뻔 했어요. 저희 아버진 합이 11단이시거든요”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고 대학교를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부모님과 타협하며 요리 공부를 계속했다. 요리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지만 부모님의 간섭이 따라 커졌다. 부모님은 25살까지 요리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면 요리를 그만 두라며 다른 일을 찾기를 강요했고 결국 끈질기게 아들의 약속을 받아낸다. 어려서부터 지병이 있던 건강히 넘기는 해가 없었던 아들이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직업인 요리사를 택한다는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5살이 되었지만 사회초년생이 무엇을 이루어 놓았을 리 만무하다. 인간의 삶에서 25살이라 함은 본래 본격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시작하는 시점이 아니던가.

“제가 할 줄 아는 것도 요리 밖에 없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요리였어요. 다른 걸 하겠다는 생각도 못 하겠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언젠가 요리로 인정받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제가 요리하는 것을 단 한 번도 응원해주신 적이 없었으니까요.”

항상 자신이 요리를 하겠다는 것에 반기를 드는 부모님 앞에서면 의기소침해졌다. 25살 청년 배세훈은 어머님과의 약속은 뒤로한 채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다.

| 호기심 많은 청년의 요리인생, 외국 문물과 장비병

그로부터 6년 동안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주방에서 일했다.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요리사를 만나봐도 공통적이었던 점은 하나같이 장비병에 걸려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도 장비 욕심이라면 뒤지지 않았다.

“좋은 칼이랑 좋은 장비를 갖고 싶은 건 모든 요리사들의 공통된 욕구죠. 그 때 하도 사모아서 지금도 집에 잔뜩 쌓여있어요. 제 주변엔 특히 매니아적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새 장비를 사오면 우와! 좋구나! 나도 가지고 싶다! 라면서 요리사들이 구경하러 모여들고 감탄하고 그러죠”

2012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오키친의 주방에 합류했다. 새로운 업장의 개업을 준비하던 팀이었는데 좋은 조리복을 한 번 맞춰 입어보자며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조리복인 셰프웨어(Chefware)를 맞춰 입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에는 감히 살 수 없었던 10만원이 넘는 조리복이었다.

“전에 입던 것보다는 나았지만 제 값어치는 전혀 못하는 옷이었어요. 게다가 외국인 체형에 맞춰져 있어서 사이즈도 다르고 태도 안나요. 제 키가 178인데 SS를 입어야 한다니까요. 멋은 둘째치고 기능적으로도 만족 못했어요.”

좋은 조리복에 대한 욕심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허탈함에 한동안 친구들끼리 만날 때마다 옷에 대한 불평을 이어갔다. 주변 요리사들도 불편함에 크게 공감했고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만들어보자” 라는 말을 쉽게 뱉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던 문제를 풀고 싶었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이었기에 발벗고 나서고 싶었다고 한다.

| 요리하는 사람에서 옷만드는 사람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그는 이내 옷 만드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첫 샘플을 만드는 데 샘플비로만 800만원을 썼어요. 지금이야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때 2~3벌 테스트하면 원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지만 처음 옷 나올 때까지 샘플을 50벌 만들었어요.”

뱉은 말을 주워 담지 못하고 개인 빚까지 내며 사업을 진행했지만 고민과 걱정은 날로 늘었다.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아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몸이 약한 그가 요리와 옷 만드는 일을 병행하다 보니 과로로 몸에 병이 다시 생겼다. 미국 생활도 이태리 생활도 1년을 채 넘기지 못한 것도 같은 지병 때문이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주방에서는 일을 못하고 잠시 쉬고 있던 때였어요. 건강 회복하려고 자전거를 가끔 탔는데 어느 날 크게 넘어지면서 어깨가 땅에 닿았어요. 쇄골 골절이었는데 병원에 2주 동안 입원했죠. 그런데 그거보다 더 심각한 게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교통사고가 났어요. 뒤차가 들이받아서 골절 치료용으로 대어놓았던 철판이 완전히 휘어버렸어요.”

너무 오랫동안 병가를 내어버린데다 무게가 있는 걸 들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다시 주방으로 돌아갈 순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을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사면초가라고 해야 할까.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디자인을 부탁하고 의류 수출을 하던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나마 회사 경험이 있던 부인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설립하고 올 해 2월 사무실까지 차렸다. 미국에서 MBA를 졸업한 친누나,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요리 공부를 시작했던 친구까지 합류했고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었다.

“첫 매출 냈을 때, 이상한 감정이 들었어요. 옷이 나왔다고 신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어떤 셰프님이 덥썩 사겠다며 8만원을 쥐어주고 옷을 가져가는 거에요.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기쁘기는 한데 이 돈을 받아야 하는 게 맞나? 요리사는 하루에 수백 개의 접시를 내면서도 음식값을 직접 받진 않잖아요. 그 날 저녁에 혼자 소주 마시면서 울었어요. 고생한 것도 기억 나고 이제는 내가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옷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건강이 약하고 사고까지 났던 것은 확실히 불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새옹지마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븟은 지금까지 23종의 상의 조리복, 9종의 하의 조리복, 11종의 앞치마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 국가대표 조리복 브랜드 븟-BEUT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생산된 조리복은 모두 가운사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가대의복, 졸업가운, 의사가운 등을 대량으로 만드는 복합 제조사인 가운사에서는 조리사의 하루 일과나 몸의 움직임 등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븟에서 만든 모든 조리복은 등판이 모두 쿨론 메쉬 소재로 되어 있다. 스포츠웨어에 주로 쓰이는, 바람이 잘 통하고 빨리 건조되는 기능성 소재이다. 땀을 많이 흘리고 더운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복이라면 당연히 이 소재가 쓰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뒤 기장도 길게 내려와있어서 쪼그려 앉아 물건을 꺼낼 때 뒤 허리살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트를 자주 해야 하는 조리사들이 휴대하기 편하도록 펜을 꽂는 위치도 섬세하게 조정했고 소매를 걷었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안감 마감 박음질처리가 되어있다. 목에 건 앞치마 목 끈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 패킹도 부착되어 있다. 실제로 주방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각해내지 못할 부분이다.

그가 가장 욕심을 낸 부분은 카라 부분이다. 모든 나라마다 그 나라의 조리복 브랜드가 하나씩 있기 때문에, 븟 조리복에는 한국적인 느낌을 담아내고 싶었다는 고집을 다시 보여주었다. 지금 가장 대표적인 조리복 모델에는 목 카라는 보기 좋게 오른쪽 어깨까지 뻗어나가 있지만 이 라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시도했던 샘플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실제 제작을 담당하는 공장에서는 븟 배세훈 대표의 깐깐함과 억척스러움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주문은 복잡하고 종류는 많은데 수량은 적다. 가장 많이 주문했을 때가 100장 밖에 되지 않으니 좋아할 리 없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대량생산되는 옷에 비하면 옷값이 비싼 편이다. 주문량이 많지 않아 제작단가가 워낙 높기 때문인데, 사정은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흑자는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한다.

“저는 요리사였던 사람입니다.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라 믿고 있고요. 그 마음을 저버리면 사업은 조금 더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을 버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고지식한 면이 적잖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고집이 지금까지의 쉽지 않은 창업과정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고 또 장인정신이 깃든 옷을 만들어 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그의 입에서 하루 동안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범주는 ‘요리, 요리사, 조리복’ 이 세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도 그는 사업가라기 보다는 요리사로 보인다. 요리를 직업 할 수는 없으니 요리사를 위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좋은 제품을 개발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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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진 요리의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어요” 장진모 셰프의 요리 인생

“Good food ends with good talk.” 좋은 음식은 좋은 대화로 끝난다. 조프리 네이어의 말이다. 지난 4일 만난 그와의 인터뷰는 시간가는 줄도 모른 채 예정 시간을 훌쩍 넘겼다. 아름다운 플래이팅과 다양한 조리법으로 유명하다던 그에 대한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그 수식어에 매달린 기대보다 그는 훨씬 더 솔직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진솔한 자신의 디시(dish)를 닮은 그, ‘AND 다이닝’의 장진모 셰프를 만났다.

| 무턱대고 시작된 요리 인생

“인터뷰이를 잘못 선택하신 것 같은데, 저 먹고 살려고 요리 시작했어요. (웃음) 외국에 유학을 갔다가 일이 조금 잘못 되어서 돈이 다 떨어진 거예요.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까 기술도 없고 영어도 잘못하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딱 두 가지더라고요. 하우스키퍼랑 접시닦이. 저는 접시닦이를 시작했고……. 무튼 접시닦이랑 키친핸드로 시작해서 어떻게 하다보니까 지금까지 요리사 생활을 하고 있네요. (웃음)”

요리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을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우스키퍼보단 접시닦이가 낫겠다 싶어 시작한 일이지만 비슷비슷하게 힘들더란다. 2008년 유학을 목적으로 캐나다로 워킹홀리데이에 나간 그의 첫 주방일은 그렇게 무턱대고 시작됐다.

“그전까지는 사실 요리사를 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전혀. 아예. 집에서 요리하는 게 좋지도 않았고 딱히 요리해본적도 없고, 라면도 잘 못 끓였어요. 지금도 라면은 잘 못 끓이지만 (웃음) 계란 후리이도 만날 태우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일하게 된 첫 레스토랑에서 요리사가 꽤 괜찮은 직업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장셰프의 첫 식당은 캐나다의 한 휴양지에 위치해 있었다. 시즌마다 스키를 즐기며 요리를 하러 오는 요리사들이 그는 꽤 부러웠다. 유학에 실패하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기 위해 여행을 떠나고 싶었던 그였다. 자유롭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던 요리사들은 꿈을 위한 수단이 됐다.

“유학이 잘 안되니까 목표가 쫌 없어졌어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을 많이 하면 목표를 다시 가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어쨌든 여행하면 사람이 쫌 변하니까. 그런 점에서 요리사가 꽤 괜찮아보였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굉장히 어처구니없는 얘기인데 (웃음) 당시에는 굉장히 좋아 보였어요. 그렇게 3년을 캐나다에서 더 있다가 진지하게 결정해야 할 순간이 왔다고 느꼈어요.”

“인생은 요리와 같다. 좋아하는 게 뭔지 알려면 일단 모두 맛부터 봐야 한다.”
– 파울로 코엘료, 「마법의 순간」

당시 그가 일하던 호텔 측에서는 본격적인 호텔 요리사로의 합류를 제안했다. 그러나 장셰프는 정중히 거절했다. 결정의 기로에서, 요리를 평생 업(業)으로 하려면 책에서만 보던 미슐랭 스타의 다이닝들을 한 번쯤은 직접 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식당들을 몇 군데 찾아다니긴 했어요. 일도 몇 번 했었고……. 그래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런 일이 왜 의미가 있는지, 내가 이 힘든 삶을 사는 게 의미가 있는 건지, 평생 이러고 살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약간은 있었어요. 계속 고민을 가지고 있었죠.”

그러던 그에게 길을 제시한 건 세계 최고의 식당 ‘노마(NOMA)’였다. 2010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북유럽 요리 식당 노마가 ‘더 월드 50 베스트 레스트런츠(The world’s 50 best restaurants)’ 1위를 차지했다. 제철 재료와 지역산 재료만을 사용한 요리, 그리고 허브와 버섯을 직접 재배하고 채집하는 요리사들, 기존 파인다이닝(fine-dining)의 틀을 완전히 깨버린 음식들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1위를 하던 해에 노마가 책을 발행했어요. 쿡북이 출시됐는데, 도대체 어떤 식당인가 궁금해서 책을 샀어요. 책을 폈는데 제가 생각하던 것이랑은 전혀 다른, 제가 생각하는 좋은 파인다이닝이랑은 완벽하게 다른 것들이 있었어요. 정제되지 않은 플레이트 업(plate up)과 이상한 부위를 사용해서 만든 요리 레시피들……. 제가 알던 파인다이닝의 기준이랑은 너무 다른 거예요.”

그 길로 그는 노마와 같은 음식의 정점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고민의 답을 찾기 위한 일이었다. 호주 맬번의 식당 ‘아티카(Attica)’가 그에게 그 답을 주었다.

“(아티카에서 일하기)전까지만 해도 저는 10만원 내고 코스 중간에 하나로 감자 3알 먹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감자 3알, 싸잖아요. 저도 쉽게 요리할 수 있어요. 근데 10만원 코스 중간에 감자를 주고 먹으라는 거예요. 도저히 납득이 안됐던 거죠. 근데 그게 아티카에 있으면서 납득이 됐어요.”

‘아티카(Attica)’는 셰프가 직접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자연의 식재료를 최대한 부각하는 대표적 자연주의 식당이다. 꾸준히 ‘더 월드 50 베스트 레스트런츠(The world’s 50 best restaurants)’에 이름을 올려왔으며 올해 호주 최고의 레스토랑(Australian Gourmet Traveller Restaurant Awards)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런 ‘아티카(Attica)’에서 짧지만 강렬했던 경험은 그의 요리 철학에 주축을 완성했다.

| 자연주의 그리고 농장에서 식탁까지, Farm to table(FTT)의 세 가지 의미

“아티카에서 쓰는 풀 중에 펄슬린(purslane)이라는 풀이 있어요. 우리나라 말로는 쇠비름이라는 풀이에요. 쇠비름은 우리나라에서나 호주에서나 잡초에요. 흔히 양의 먹이로 쓰이죠. 이 펄슬린을 아티카에서는 식재료로 썼어요. 어느 날 펄슬린을 다듬다가 양이 모자란 거예요. 부족하다 말했더니 앞에 길가에 직접 나가서 뽑아 오면 된다고 했죠.”

‘아티카(Attica)’가 직접 빌린 주립 식물원의 땅 일부를 갈아내고 텃밭을 일구면서 자연주의에 대한 이해를 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의 특수성, 그 지역만이 가지는 땅의 맛. 그는 땅이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직감했다.

“땅을 잘 관리하지 않으면 식재료에서 나야하는 맛이 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대표적인 경우가 허브에요. 우리나라 허브들은 대부분 수경재배(흙을 사용하지 않고 물과 수용성 영양분으로 만든 배양액 속에서 식물을 키우는 방법)를 하니까 땅에서 키운 외국의 허브만큼 그 맛이 잘 나지 않는 거죠. 개인 성향이긴 하겠지만 저는 잘 키운 스테비아(허브의 한 종류)가 푸아그라보다 좋다고 믿어요. 잘만 키우면 풀도 굉장히 놀라운 맛을 가질 수 있어요.”

이를 위해 장셰프는 레스토랑과 지역 내 농장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생태계 구축을 말했다. 농부가 스스로 욕심을 가지고 농작물을 재배하면 레스토랑은 거기서 좋은 식재료를 얻는다. 그로 인해 레스토랑의 수익이 오르면 그 증가분을 다시 농부에게 돌려주고 농부는 다시 그 돈을 일정 부분 투자해 더욱 좋은 재료를 생산하는 선순환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로컬음식하면은 단순히 지역의 농산물을 쓰는 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우리 논, 땅에서 나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근데 과연 그럴까요? 예를 들면 한국에서 딱새우라고 부르는 새우가 있어요, 외국이름은 랑구스틴(langoustine). 한국의 딱새우는 큰 걸 받아봤자 덴마크 지방의 랑구스틴이랑 크기와 맛이 비교할 수 없어요. 제가 과연 한국의 딱새우가 외국의 랑구스틴보다 맛있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절대 아니에요. 심지어 덴마크에서 냉동으로 들어오는 냉동 새우가 한국의 생 새우보다 훨씬 맛있어요. 아예 재료의 질 자체가 달라요.”

자연주의 음식으로 유명한 그가 지역음식(로컬퀴진, local cusine)을 고집할 때는 그 지역의 ‘특수성’이 빛을 바랄 때다. 단순히 그 지역의 농수산물을 쓴다고 해서 로컬퀴진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그는 강조했다.

“우리 동네에서만 나는 것, 예를 들면 더덕은 프랑스에는 없죠. 도라지 역시 프랑스에는 없죠. 오미자도 아시아권에는 있지만 프랑스에는 없죠. 프랑스에 가서 한국에서 수입한 더덕요리를 제가 먹을까요? 한국에서는 푸아그라나 트러플을 먹어본 적도 없고 만들지도 않잖아요. 푸아그라나 트러플이 맛있다고 해서 프랑스 사람이 한국에 와서 푸아그라랑 트러플 먹으려고는 하지 않겠죠. 한국이 가지고 있는 한국만의 특수성, 그게 그 지역에서 의미라고 봐요.”

요리는 인간의 역사와 공존해왔다. 인간만이 하는 창작 예술이자 문화로서 요리는 그 인류가 살아온 그 땅의 독특한 맛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장셰프의 진정한 요리의 의미는 그것이었다.

“팜투테이블(Farm to table)에서 마지막으로 셰프가 할 일은 그 식재료가 땅에 있을 때에 그 느낌을 손님에게 잘 전달을 하는데 있어요. 손님에게 그 특별함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그 의미가 자연스럽게 전달되어야 해요. 손님은 먹고 즐기러 식당에 온 것이지 셰프의 강연을 들으러 온 게 아니란 말이죠.”

그는 손님들이 음식을 먹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바뀌게 하는 것이 셰프가 할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자신은 테크닉이 부족한 요리사라 요리에 많은 손을 대지 않는다고 농담조로 말했다. 장셰프는 요리를 복잡하게 하는 테크닉보다 손님에게 무엇을 전달할 것이냐에 대한 셰프만의 분명한 기준을 가지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자연주의 음식에선 셰프인 내가 그 음식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고요, 그 다음에 내가 생각한 것을 손님한테 어떻게 전달할 건가가 두 번째 문제입니다. 내가 이걸 어떻게 전달할거다를 결정했을 때, 이 결정을 손님들이 테이블 위에서 복잡한 설명 없이 자연스럽게 납득하게 요리를 만드는 게 세 번째 문제죠. 그 다음이 요리에요. 쿠킹은 그 다음 번의 문제인거죠.

| 틀에 갇히지 않으려는 긴장과 노력

사실 셰프는 누구보다 창의성이 중요한 직업이다. 그러나 이를 가장 쉽게 망각하는 직업 중 하나이기도 하다. 매일 매일 나가는 똑같은 메뉴를 쉴 새 없이 만들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 자리에서 멈추게 된다. 스스로가 만든 틀 속에 새로운 생각을 쫒아 내고 갇히는 셈이다.

“기본적으로 요리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일관된 방향성과 기준이 이해에서 오는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클래식을 좋아하는데, 베토벤이 교향곡 1악장에 1번부터 9번까지를 만드는데, 4번쯤 가서 연구를 더해서 5번을 만들지는 않았을 거예요. 교향곡에 대한 이해가 있었죠. 그 이해를 바탕으로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거예요.”

요리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그에 대해 이해하는데 다른 셰프들과의 교류가 중요하다고 그는 말했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다른 셰프들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그를 통해 새로운 외식 트렌드나 요리의 방향을 이해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열리는 유명 외식 컨퍼런스에 참가하기도 하고 해외 컨퍼런스를 영상으로 찾아보기도 한다. 또 학교를 그만두기 전에 공학을 전공했었다는 그는 요리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조금 독특한 자신만의 방법을 말했다.

“원래 공대를 다니다가 중퇴했어요. 공학을 전공하다보니 아무래도 논문 보는 게 익숙해서, 궁금한 것이 생기면 조리책보다 관련 논문을 찾아 읽는 편이죠. 예를 들면 태운야채와 발암물질 관계에 대해서 문제에 부딪혔을 때 야채를 태운 것에 대한 발암물질 보고서나 연구논문들을 찾아요.”

그는 여럿 논문을 통해 나타난 연구 결과들을 자신의 기준에 맞춰 나름의 답을 찾는다. 이때 중요한 것은 역시 셰프 자신만의 기준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 결론은 태운 야채는 발암물질이에요. 그래도 저는 써요. 레몬에 2급 발암물질이 들어 있어요. 휴대폰 역시 발암물질이에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 대기권에서 엄청난 발암물질을 흡수해요. 기준점을 정확하게 놓는 거죠. 내가 먹는 음식이 어느 정도의 발암물질을 가지고 있고, 그 정도가 서울에서 생활했을 때 일상 시에 흡수하는 발암물질보다 과량에 해당하는 것인 아니면 적당한 선인지. 적당한 선이면 쓰는 거죠. 개인에 따라 그래도 안 먹는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어요. 괜찮아요, 그렇지만 그때도 기준은 있어야 해요.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요리의 기준이라는 걸 중요하다고 믿어요.”

 

| 두 발짝 내딛기 위한 한 발짝의 양보

인터뷰가 거의 끝나갈 때쯤 장셰프는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며, 이 이야기는 꼭 실어줬으면 좋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식상할 것 같았던 이 이야기는 까보니 가장 필요하고 절실한 이야기였다.

“어린 친구들이 많이 혼동해요. 이 요리가 지금 뜨는 것 같으니깐 저렇게 하면 유명해지는 것 같고, 이건 구식의 방법이니까 피하고 최근 핫한 요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되고 등등……. 근데 사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에요. 중요한 건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좋은 요리를 하기 위해서 어떤 방식으로 오래 고민해야하고, 또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요리를 하기 위해서 그 중간의 과정들을 어떻게 오래 배워나가는가에 대한 부분이에요.”

장진모 셰프에게 조언을 얻고자 연락하는 셰프 지망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는 “그 접시를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담나요?”라고 했다. 보여 지는 것에 현혹되는 것, 장셰프는 후배들이 그것을 가장 경계했으면 했다.

“좋은 요리사로 성장하는 데에는 중요한 몇 단계가 있어요. 첫 번째로는 ‘위생’을 잘 배우는 것, 두 번째는 나중에 내 음식을 하기 위해서 지금 당장 해야 할 요리를 내 손으로 직접 재현시킬 수 있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선 일을 열심히 해야죠. 오늘 만든 요리에서 조금 더 고급 요리로 넘어가는 것보다, 오늘보다 내일 브뤼누아즈(brunoise, 야채를 1/8 인치(3mm) 정도의 작은 주사위 모양으로 써는 것)를 더 잘 써는 게 조금 더 중요할 때가 있어요. 근데 요즘은 대부분 그 시기를 안 거치고 싶어 해요.”

그가 호텔에서 일할 때였다. 첫 날, 과일을 깎고 있었는데 셰프가 와서 말했다. “너 왜 이렇게 느려.” 화가 났다고 했다. 정말 열심히 깎고 있었고 어떻게 이것보다 더 빨리 깎을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6개월 지나고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더 빠르게 되더란 말이죠. 그때 알았어요. 열심히 하면 좀 더 나아지는구나. 나는 이게 최대한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다음 단계에 나아지는 게 있구나. 이 과정을 거쳐야, 내가 셰프가 되어 다른 요리사들을 이끌 때 그 사람들이 많든 적든 이 안에서 일을 어떻게 분배하고 요리사들이 얼마 정도의 시간 내에 어느 정도의 일을 해줘야 되는지를 알게 되요.”

셰프가 가지고 있는 생각, 좋은 맛에 대한 고민, 그리고 그걸 만들어 내기 위한 수많은 작업. 오래 열심히 일하고 많이 고민하는 후배 요리사가 많았으면 하는 바람을 그는 전했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 다이닝계에는 영혼도, 기술도 없는 정체성 없는 요리들만 남을 거라는 걱정도 함께.

| 함께한다는 것

“국내 다이닝 업계가 사실 적잖게 힘들어요. 적자보시는 분들도 많고 적자보시지 않더라도 대규모의 흑자 보시는 분들은 몇 없어요. 굉장히 힘든 상황을 거치고 있죠. 요리사가 박봉을 받고도 쉬는 날도 없고 한 이유는 아직 업계가 미성숙하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다이닝 업계가 제대로 설 거라는 그런 소망은 갖고 있어야 해요. 서로 같이 발전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잖아요. 직원 복지 같은 부분들은 프렌차이즈나 호텔이 먼저 좋아지고 다이닝이 늦어요. 그치만 요리는 다이닝이 먼저 좋아지고 호텔이 따라오는 부분이 있죠. 서로 간에 잘해줄 수 있는 영역이 있고 분명 좋게 영향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점이 있어요.”

한 잔에 5,000원~6,000원 하는 커피가 이제는 한국 소비자들에게 자연스럽다. 처음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제는 자연스러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커피 산업이 강요가 아닌 물흐르듯한 트렌드의 형성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갔기 때문이다. 장셰프는 매우 초창기지만 한국의 다이닝계에도 손님들의 인식이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시점이 중요해요. 셰프들이 이 가격이 맞다고 강요하는게 아니라 유화적으로 나가는 디시(dish)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손님들에게 인식시켜야하는 것 같아요. 근데 이건 저 혼자 열심히 한다고 바뀌지 않아요. 각자 맡은 영역에서 잘 해내야죠. 그래서 셰프들 서로 간에 보완점이 있고 또 그것이 각자가 존재하는 의미라고 봐요. 공통된 이해를 갖고 공감대를 찾으면 분명히 바뀔 거라고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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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의 요리 철학이 궁금하다.” 대한민국의 숨어있는 셰프를 세프뉴스가 직접 찾아나섭니다.
취재문의 lik@chef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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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전사고로 한 팔 잃은 요리사, 로봇팔을 얻은 후 3년 간의 이야기

2011년 몬타나주의 한 야산에서 에듀라도 가르시아Eduardo Garcia는 하이킹을 하고 있었다. 미동없는 곰 한마리가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가지고 있던 칼로 곰을 찌르는 그 순간,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이미 상황은 벌어진 뒤였다. 2,400볼트가 흐르는 전선에 감전되어 죽은 곰에 몸에는 전류가 아직 흐르고 있었다. 가르시아는 정신을 잃으며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의 눈 앞에는 검게 재가 되어버린 왼손이 보였다.

왼손을 절단해야만 했다. 주요 근육들과 말단 신경이 모두 손상을 입었다. 가르시아는 삶의 희망을 놓지 않았다. “내 육신의 수명은 조금 줄어들었겠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며, 먹을 수도 있고, 요리도 할 수 있어.” 큰 사고를 겪고 난 후 당연하게 누렸던 것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 가르시아의 부모는 아이가 보이지 않으면 주방으로 향했다. 아이는 항상 주방에 있었다. “15살, 돈을 벌려고 피자를 만들어 팔았어요. 야외로 나가 사냥하고 요리하는 것을 좋아했죠. 그럴 때마다 요리는 제 삶의 숙명이라 느껴요.” 그에게 요리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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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열정과 의지를 감전 사고가 꺾을수 없었다. 가르시아는 쇠고리 의수를 착용하고 퇴원 후 5일 만에 주방으로 복귀했다. 왼손이 없으니 무거운 물건을 들 수도 없었다. 예전엔 눈감고도 하던 양파썰기가 절벽을 오르는 일만큼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가르시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한 손으로 스테이크를 굽거나 살사 소스를 젓는 일을 맡았다. 새 의수와 함께 예전에 쉽게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다시 처음부터 새롭게 배워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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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에 소개된 에듀라도 가르시아의 로봇 의수 착용 모습

지난해 9월, 그는 ‘터치바이오닉스Touch Bionics‘와 ‘어드벤스드암다이나믹Advanced Arm Dynamics‘의 두 회사로부터 새로운 로봇 팔을 얻게 됐다. 근육의 움직임을 소프트웨어로 분석하는 ‘미오엘렉트릭Myoelectric‘이라는 신기술이 적용된 로봇 팔이었다. 로봇 팔은 무려 25가지의 근육의 움직임을 구별해낼 수 있으며 용도에 따라 달린 손의 형태도 교체할 수도 있다. 하지만 힘과 속도, 민첩성이 부족했다. 부족한 부분이 보이기 시작하니 더 필요한 부분도 생겼다. “전동칼갈이가 달려 있으면 어떨까? 모니터로 알림을 보내주는 세균감지센서는?” 그의 호기심은 한쪽 팔을 잃은 셰프들을 위한 로봇 팔 개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당시 가르시아는 수많은 미디어를 통해 소개됐다. 일명 ‘바이오닉셰프Bionic Chef로 생체공학 셰프 혹은 인조인간 셰프라는 뜻이다. 기존에도 로봇의수(義手)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어떤 직업보다 손이 필수적인 셰프의 로봇 팔 개발은 세계적으로 더욱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았다.

셰프들이 아무리 장비를 좋아한다고 해도, 세상 어느 셰프도 가르시아만큼 비싼 장비를 갖춘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오래 가지 않았다. 무려 $150,000(한화 약 1억5000만원)에 달하는 조리도구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의수(義手)는 너무 비싸서 보험회사의 보상 대상도 아닌데다가, 팔을 잃은 사람만을 위한 장비를 만든다는 것은 사업성이 전혀 없었다. 그때 가르시아는 자신이 로봇공학자가 아니고, 미디어의 관심이 역시 자신의 행복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요리사의 본분에 충실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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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tana Mex의 홍보영상 – 제한적인 신체 조건에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요리할 수 있는 기계 의수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고 지금은 로봇 팔이 아닌 쇠고리 팔이 달려 있다. 쇠고리 팔로 요리하기가 여전히 쉽지는 않다. 얼마 남지 않은 근육으로 쇠고리를 움직여야하는 데다 무게도 엄청나서 야채를 씻으려면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다. 하지만 그는 긍정적이다. “떼었다 붙일 수도 있죠, 원한다면 휘스크나 주걱을 꽂아 쓸 수도 있어요. 펄펄 끓는 물에 집어 넣을 수도 있고, 손가락을 자를 염려도 없죠. 1억5 천만 원짜리 로봇팔을 달고 있으면 아무 일도 못 했을거에요.”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려고 많은 시간을 쓴 만큼 그에게 인생은 짧다. 그는 자신이 절실히 원했던 것은 요리였으며, 요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이제는 안다. “저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요리를 할 뿐입니다. 제가 어떤 방식으로 당근 껍질을 벗기고, 얼마나 힘들게 파스타를 삶아내는지 누가 상관해요? 중요한 것은 제가 만든 음식이 얼마나 맛있냐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소스와 향신료를 판매하는 식품업체인 ‘몬타나맥스Montana Mex‘의 공동창업자이자 여전히 여행과 사냥, 아웃도어 스포츠와 요리를 즐기는 요리사다. 왼손을 잃은 지 3년,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의 삶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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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프는 왜 그 멍청한 모자를 쓰는 것일까?

밥을 먹다 문득 둘러본 주방에 셰프들은 오늘도 바쁘다. 조리대 앞에 선 그 기세등등한 풍채가 우아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구경하다보면 한참이다. 우뚝 선 흰모자들이 오르락 내리락. 신나는 구경이다. 갑자기 냉장실로 향하던 한 셰프가 움푹 몸을 숙인다. 주방과 냉장실 사이 낮은 천장에 그 긴 모자가 걸리지 않도록 살금살금 지나간다. 셰프들은 왜 저런 모자를 쓰는걸까? 출발은 거기에서, 오늘은 셰프의 그 요상한 모자에 대한 이야기다.

셰프의 모자, 일명 토크Toque의 기원은 영국 헨리 8세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헨리 8세는 요리에 관한 내용과 순서 등을 메모하여 식탁 위에 놓고 그 순서대로 음식을 즐겼다. 이처럼 요리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의 식탁에 어느 날 올라온 스프 한 그릇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스프에서 나온 머리카락 한 가닥은 다혈질이었던 헨리 8세의 심기를 단단히 건드렸고 왕실 요리사는 그 자리에서 참수형에 처해진다. 그때부터 왕실 요리사들은 의무적으로 모자를 써야했다. 나중에 가서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 외무장관 샤를 탈레랑Charles Talleyrand의 개인 요리사가 흰색 모자를 주방의 위생과 청결에 필수 요소로 주장하면서 오늘날 토크가 탄생했다는 설(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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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 : saveurpassion.over-blog.com

토크의 어원은 아랍어의 ‘둥근 모자’라는 데서 시작되었으며 좁은 챙의, 또는 챙이 없는 모자를 의미한다. 셰프의 모자가 토크라 불리기 전에 프랑스에서는 ‘나이트캡casque a meche’ 또는 ‘스타킹 모자’라고 불렀다고 한다. 토크는 셰프들의 모자뿐만 아니라 오랜 세기동안 무슬림 신자들, 교황의 모자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됐고 오늘날에는 승마(乘馬) 모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셰프들은 주방 위생 관리를 위해 왜 두건도 아닌 헤어 네트도 아닌 왜 챙없이 위로 우뚝 솟은 토크를 택한 것일까? 한 요리사는 토크와 머리 사이의 텅 빈 공간 때문에 주방의 그 엄청난 열기로부터 머리만은 시원하게 유지할 수 있다면서, 그래서 셰프들이 토크를 쓰는 거라면서 농담을 던졌다. 정말 그럴까?

미국의 명문 요리학교 ICE(Institution of Culinary Education)의 마이클 레이스코니스Michael Laiskonis 셰프는 “토크는 주방에 있는 다른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나타내는 표식”이라 말했다. 실제로 고전 프랑스 요리의 아버지라 불리며 1800년대 가장 명성을 떨쳤던 셰프 중 한명인 마리 앙뚜앙 까렘Marie-Antoine Careme, 1784~1833은 18인치(45.72센티미터)나 되는 토크를 쓰기도 했다. 한때 서울 시내의 한 호텔 식당에는 70센티미터의 토크도 있었다. 주방은 엄격한 위계질서가 자리 잡은 곳이다. 칼, 포크 등 ‘흉기’를 들고 불과 씨름하는 전장에 군기는 당연하다. 군기를 잡으려면 명확한 계급 구별이 필수다. 그 표현의 용도로 우뚝 선 토크가 사용된 것이다.

토크의 또다른 흥밋거리는 모자의 주름 수다. 토크의 주름 역시 주방에서 요리사의 계급과 기량을 표현하는 것인데, 이는 마리 앙뚜앙 까렘이 썼다는 100개의 주름이 잡힌 토크에서 유래했다. 과거에는 셰프가 달걀로 할 수 있는 요리의 개수와 동일하게 토크의 주름을 잡았다. 달걀은 가격면에서나 영양면에서 최고의 재료이고, 다양한 조리 방법으로 어느 식사 메뉴나 코스에 적용되는 가장 훌륭한 레시피 주제이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에 들어서 토크는 또다른 혁명을 맞이한다. 필연적인 레스토랑 산업의 번영과 함께 부엌은 점점 더 커지고 셰프의 일과 장비는 점점 더 복잡해졌다. 토크 역시 그에 발맞춰 셰프가 전공하는 요리마다 다양한 형태로 탈바꿈했다.

옷에는 혼이 깃든다고 했다. 토크는 음식에 대한 열정, 셰프의 그 마음과 역사를 함께 해왔다. 최고의 접시를 위한 셰프들의 우뚝 선 토크의 행진을 앞으로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