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대한 이야기

주관이 담긴 글의 첫 시작은 인용을 피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영향을 피한다는 것. 내 인생에서는 절대 불가능하겠지. 이 글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글이다. 마음이 허하기 보단 인생이 무의미하여 조금의 목적이라도 생길까 쓰는 그런 글. 좋은 글은 간결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담는다. 좋은 글에 평생 달하지 못하겠지만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래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채로 아무렇게나 떠도는 것을 볼 수 없으니. 무엇을 부여할까 생각해본다. 가벼운 이야기가 좋겠다. 심오한 것은 사실 알고 보면 가장 실 없고, 별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말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 말이란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것 중 하나니까, 적절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말하는 법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말 많은 사람들은 거의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어찌보면 가장 동정심이 드는 사람들 아닌가. 다양한 유형이 있을 수 있지. 첫째, 상황이나 상태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 둘째, 존재를 부각하거나 드러내야 하는 사람. 셋째, 지지와 칭찬, 애정 따위의 것들을 갈구하는 사람.

나는 마지막 유형의 인간을 가장 경멸하면서도, 내 존재가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증오가 향하는 것 역시 내 자신의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 그 치부가 그 사람의 모습으로 드러나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으면 답은 정해져 있다. 양육. 양육의 문제. 뻔하고 무책임한 이유지만 팔십의 인생이 십여년의 유아기로 결정된다는 데에는 살아갈수록 더 공감하게 된다. 미성숙한 단계, 다 자라지 못한 그 자리에 머물러서 끊임없이 지지와 애정을 바라는 존재.

상대의 눈을 딱 마주하고 팡하며 쏠 수 있는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 좋은걸 좋다, 필요한 것을 달라, 나는 이렇게 잘났다, 네가 싫다. 한 마디, 열 자 내외로 정리할 수 있는 게 마음이다. 좋으면서 싫다도 마찬가지. 복잡한 감정이라는게 대체 무엇인가, 다차원적인 인간이라는 게 존재하느냔 말이다. 말 많은 자들은 타인의 미움을 두려워하여 직격탄을 팡 날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무 의미 없는 이 글이 길어지는 이유도 그러하다. 매해 신년에 세우는 한 해 목표는 몇 년째 ‘관용(寬容)’이다. 네가 하는 이야기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하고 서고 싶지만 사실은 네가 나다. 너와 너의 말을 관용한다는 것은 나와 나의 말을 관용한다는 것이다. 관용의 이유는 단순하다. 너를 밀어냄으로써 나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의 관용은 내가 너와 같은 미성숙의 단계에서 벗어나야 가능할 것임을 알고 있다.

 

— 덧붙임 —

이렇게 재밌는 글을 써놓고,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어 지워 버리겠단다. 그래서 내가 대신 올린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