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은 세가지로 분류된다. 생산자/유통자/소비자다. 생산자와 유통자는 돈을 벌어 승자가 되고, 소비자는 돈을 써서 패자가 된다. 그런데 이 게임의 룰을 소비자가 알게 되면 소비가 멈출 것이다. 소비=승리, 성공 이라는 이념이 만들어진다. 집단적 사기극이다. 진원지와 전파경로를 역학조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전염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현대인의 대부분이 소비에 자의식이 지배당해 있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런 가짜 이념에 자신도 당해 놓고 재전파하는 놈들이 제일 한심하다. 인생나락탕진을 flexing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가진 신조어로 탈바꿈 시킨 건 정말 감탄할 정도의 프로파간다 전략이다. 국가도 유동성확보와 경제성장을 견인하기 위해 거짓 이념을 설파하고 장려하는 지경이다.

 

광신도를 보면 무섭다. 그러다 측은하다. 그러다 한심하다.
소비자를 보면 한심하다. 그러다 측은하다. 그러다 무섭다.
좀비를 보면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무서우면 경계하게 된다. 제발 저에겐 전염시키지 말아주세요. 아무도 공격하진 않았다. 그치만 나는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방어 본능이다. 방어가 나의 우선조치다. 회피는 후속조치다.

 

이 상황은 진심 고통스럽다. 좀비 영화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 유일한 생존자로 남은 자와 같은 종류의 고통인 것이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우리는 자살을 택하진 않는다. 유일한 생존자의 운명이 아무리 고단해도 좀비에 감염되길 택하지 않는다. 나는 소비자가 되길 원치 않는다.

문제는 페달이었다. 문제는 스피드플레이였다. 다 닳아버린 스피드플레이 페달을 누르려면 쇠구슬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누르는 느낌이다. 조금이라도 힘을 주는 각도가 쇠구슬의 정중앙을 벗어난다면 덜컥거리며 각도가 변하고 만다.

최근 주법을 다양화한다고 평지에서 4가지, 댄싱에서 3가지를 종류를 나눠 연습하던 것이 더욱 문제가 되었다. 주법을 다양하게 쓸수록 마모는 더 심해졌고 무릎에 가해지는 대미지도 커졌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았던 주법은 단 한가지 뿐이다. 평지에서 엄지발가락을 안쪽으로 밀면서 밟는 방법. 더이상 안으로 젖혀질 수 없을 정도로 바짝 밀어둔 상태로 꾸준히 밟기만 한다. 당기는 순간 덜컹거리기 때문에 꾸준히 밀어야 한다. 그래서 평지에서는 무릎이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이 페달링은 나의 주페달링이 아니다. 약간 팔자로 벌리고 지긋이 눌리듯이 밟는 것이 나의 주페달링이었다. 그 페달링은 쓰지 못하게 되었다. 쇠구슬 위에 올려져 좌우로 흔들리니까.

 

페달의 유격은 주행에 필요한 기능이다. 수평은 유지하며 뒷꿈치의 각도가 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노후한 스피드플레이는 왼쪽으로 기울고 오른쪽으로 기운다. 이런 유격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고 무릎에 대미지를 준다. 기우는 각도가 2도면 1.75cm만큼 무릎이 좌우로 흔들리고 5도면 4.36cm만큼 흔들린다. 정밀하게 세팅하기 위해서 각도가 있는 스페이서를 끼우기도 하는데, 노후된 페달 앞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진다.

단순히 무릎의 위치가 옮겨지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로 인해 무릎의 각도도 꺽이게 된다. 클릿에서 2도 차이가 나면 무릎에서는 4도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5도 차이가 발생하면 10도 차이가 발생한다. 1도의 차이를 추구하는 것이 피팅인데 이정도면 관절을 부수기 위해 작정한 수준이다. 무릎이 이정도만 아프고 끝나서 정말 다행이다.

스피드플레이는 플로팅이 있는 편이다. 꽉 조여져 있지 않다. 밀다가 당기면 털컹하면서 페달을 끌어 올린다. 플로팅 간격은 시간이 갈수록 넓어진다. 꾸준히 밀어 밟는 단순한 페달링이면 이런 플로팅이 크게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페달이란 무엇인가. 잡아주는 것이 본디 목적이다. 굴리는 페달링을 할 때나, 내전근-외전근을 전환할 때, 댄싱 근전환을 할 때마다 플로팅이 생긴다면 한 바퀴를 돌릴 때마다 무릎에 대미지를 주게 된다.

 

나는 문제를 다른 곳에서 찾느라 한참 헤맸다. 다른 사람들도 스피드플레이는 원래 그렇게 타는거라고 했기에 이것이 문제의 원인이 아닐 것이라 여긴 것도 잘못이다. 영상에 보이는 것보다 각도가 좀 더 심할 정도로 마모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올바른 무릎의 위치와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노력이 클수록 문제의 원인은 더욱 가려질 뿐이었다.

 

스피드플레이는 의도적으로 내구성이 부족한 제품을 만든다. 좌측의 제품은 어떤 것을 쓰더라도 스피드플레이 측에서 의도한 마모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좌우측이 플라스틱이기 때문이다. 최상급 제품은 모두 금속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페달과 클릿이 결착되기 위한 4가지 접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거했다. 가장 이상적인 제품은 오른쪽의 모습인 것이다.

최상의 제품을 만들어두고, 하위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다운그레이드해서 상품선택지를 늘리는 것은 일반적인 장사 방식이다. 하지만 스피드플레이는 지켜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적어도 고객의 무릎건강에 해가 될만큼의 다운그레이드는 하면 안 될 일이었다. 무게를 줄인다거나 구름성의 차이를 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돈을 많이 지불하지 않은 자는 무릎이 박살나 버려”라는 식의 상품군은 정말 비인륜적이다. 최소한 스포츠 산업이라는 바닥에서 장사를 하는 기업이라면 건강증진이라는 최우선 목표는 지키며 개별성을 추구해야 할텐데, 제 1전제를 어겼다. 돈을 버는 것이 산업의 1전제보다도 앞서버린 것이다.

스피드플레이라는 제품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잘 살려 제품군을 나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내구성에 따라 50,000키로를 타도 끄덕없는 제품, 20,000키로 이상을 탈 수 있는 제품, 10,000키로 이하 제품, 5,000키로 이하 제품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또는 한계파워에 따라 800W의 파워에도 끄떡없는 초강성제품, 600W의 파워를 잘 견디는 엔듀어런스제품, 400W 언더의 초보나 여성용 제품으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구름성에 따른 차이로도 구분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건 제품의 기술이나 기능에 관한 것이 아니다. 고객 설정과 상품화에 관한 지극히 마케팅적인 요소다. 석박사MBA 다 나온 애들이 머리맞댔을테니 이런 상품군 분류 기준이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팔면 안 팔리니까 채택되지 못한 것이다.

이들이 상품을 어떻게 나눴는지를 들여다보면 고객을 바라보는 관점까지 유추해볼 수 있다. 지금 상품군으로 보면 경량과 디자인이 기준이다. 경량이라는 요소는 선수에겐 성적과 직결되는 중요한 요소겠지만 동호인에겐 허영심 충족일 뿐이다. 츄파춥스 대가리 색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냔 말이다. 그런 방식으로 팔았는데 잘 팔린다는 것은 고객들도 딱 그정도 수준이라는 방증이기에 씁쓸해진다.

 

어떤 기업이든 이윤을 추구하고 매출을 극대화하기 위해 갖은 방식의 노력을 한다. 시장이 포화되면 과점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과점이 일어나면 재구매를 유도해 지속매출을 올릴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당연하다. 브라더에서 미싱을 너무 튼튼하게 잘 만들었더니 30년 동안 고장이 안나서 재구매가 일어나지 않았고 수리산업도 돌아가지 않았을 정도로 경제 성장과 유동성에 방해가 되었다. 이 실패 사례를 전세계 기업이 모두 배웠다. 제품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낮추거나 부품의 내구성이 의도적으로 낮추는 것은 필수 장사기술이 되었다. 좋은 마음으로만 장사해선 살아남지 못한다. 기술을 개발해야 할 제품생산자들이 거의 이상적인 제품을 개발하고 나니, 더이상 개발할 기술이 없어 결함을 개발하는 지경에 다다른 것이다.

이걸 계획적 구식화라고도 부른다. 한 때 앱손은 프린터를 엄청 싸게 팔았는데 그 프린터에서 작동하는 카트리지가 프린트를 몇 장 못 뽑도록 해둔 것이 들통나서 질타를 받았다. 프린터를 구매한 사람은 잉크 값으로 몇 배나 많은 돈이 유지비로 나가야 했다. 애플도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면 오래된 기종은 속도가 느려지게 만든 것이 들통나서 고소당했고 패소한 사례는 익히 알려져 있다. 대량생산 시대에서 대량소비의 시대로, 대량소비에서 대량폐기의 시대가 되었다. 폐기되지 않으면 소비될 수 없고, 소비될 수 없으면 생산할 수 없다. 공급이 포화된 시장에서 기업이 생존하기 위해 취해야 할 필수 생존전략. ‘폐기는 생산에 선행한다’ 두 수 앞을 내다본 똑똑한 생산자들의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고 싶다.

꼴사납지만 나따위가 뭘 어쩌겠는가. 다운그레이드를 통한 제품군의 확장, 괜찮단 말이다. 계획적 구식화를 통해 재구매와 총매출을 늘리겠다는 전략, 이것도 괜찮단 말이다. 판매자는 고객을 조삼모사 원숭이 취급하고, 원숭이는 어느 쪽도 이득이 아닌 선택지를 골라놓고 이득을 보았다고 착각하는 것도 좀 한심하지만 그것까지도 괜찮다 이거다. 고객이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갈 수 밖에 없는 지경으로 만들어 지속적인 고정매출을 장기화시키는 것도 괜찮다 이거다. 21세기의 식민지화는 이런 식인데 나따위가 뭘 어쩌겠는가. 이것까진 자본주의 경제체제 속에서는 정상이란 말이다. 그래야 더 큰 돈이 돌고, 경제의 규모도 커지고, 미세먼지도 많아지고, 태평양 쓰레기섬도 커지고 하는거니까. 괜찮다 이거다. 이렇게 돌아가는 게 세상인데 나따위가 뭘 어쩌겠는가.

 

다 괜찮은데 스피드플레이는 안 괜찮단 말이다.

로드자전거의 클릿페달 시장은 3개 업체가 과점하고 있다. 여기도 계획적 구식화는 반영되어 있다.

Look은 원조라는 Legacy를 내세워 최상위 고객을 타겟층한다. 이런 고객은 Luxury 고객으로 분리되기 때문에 가성비는 잘 따지지 않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Loyalty가 높아서 쉽게 이탈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내구성이 나쁜 클릿을 만든다. 지우개라고 욕을 먹으면서도 내구성을 높이지 않는다. Look 고객들은 5개씩 쌓아두고 쓰면 되니까. 기술이 없거나 적절한 신소재가 없어서도 아니다. 고객이 만족하는 선에서 최대한의 매출을 추구하고 있을 뿐이다.

시마노는 지불능력이 부족하거나 가격민감성이 높은 고객을 위해 자신들의 기술력중 일부만 반영하거나 다운그레이드시킨 제품군을 출시한다. 듀라에이스는 너무 비싸다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고객을 위해 울테그라와 105가 출시되어 있다. 시마노가 제일 양반이다. 그래서 시마노로 갈아탔다. 조삼모사 원숭이는 가성비충이라 105를 골랐다.

스피드플레이의 계획적 구식화는 안 괜찮단 말이다. 어느 분야에서든 지켜져야 할 1전제는 있다는 것이다. 스포츠산업이라면 건강증진이란 말이다. 왜 내 무릎을 박살내면서까지 재구매를 유도하냔 말이다. 당신들은 내구성이 구리니까 5,000km마다 페달을 교체해야한다는 안내를 해야했다. 하지만 너네는 영구히 사용할 수 있다고 개구라를 쳤지. 철학도 신념도 없는 기업. 자본주의에 기생하고 있을 뿐이다. 너네같은 기업은 그냥 사라져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멸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가 우려하던 부작용은 여전히 가진 채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세상을 집어삼켰다. 돈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돈이 사람행세를 한다. 사람은 되려 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개인의 의지와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흐름의 방향에는 더욱 가속이 붙고 관성은 커진다. 패러다임 쉬프트의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한 두 건의 사건만으로 이 관성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나가자는 사람은 있어도, 자본주의를 엎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사람은 없다. 그만큼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위에 삶의 터전을 쌓아 올렸다.

 

  • 시작과 방향

이 모든 사건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돌도끼를 만들고, 바퀴를 만들고, 옷을 만들어 입으며 시작되었다. 만드는 행위가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었으니 인간은 만드는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도구를 가진 부족은 생존확률이 높아졌다. 만들지 못하는 부족은 자연 도태되었다. 살아남은 부족은 만드는 능력을 후대에 물려주었고, 후대는 다시 발전시키는 것을 반복하며 인간은 더욱 잘 만드는 존재로 거듭났다. 만드는 존재, 지금 경제가 가지고 있는 벡터의 시작이다.

만들어진 물건을 교환하며 경제가 생겨났다. 경제의 가장 작은 단위는 교환이며, 중간 단위는 시장이고, 가장 큰 단위가 경제다. 교환을 쉽게 하고자 조개 껍데기로 환산하던 약속이 발전해 돈이 되었다. 돈은 노동가치를 환산하는 사회적 약속이다. 만드는 데에 12시간 들어간 의자는 12시간 동안 포획한 생선과 같은 값어치를 가졌다. 노동이 있으면 돈을 벌어낼 수 있고, 돈이 있으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돈은 노동본위제다.

시장에서 살아남는 비결, 승리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고객 중심” 돈을 가진 자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하면 그만이다. 돈을 가진 자의 게으름과 탐욕을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하면 그만이다. 혁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도 공통점이 있다. 더 많은 양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효율적으로,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빠르게, 더 직관적으로, 더 편리하게, 더 쾌적하게,  더 더 더 더 더 뒤에는 무엇을 붙여도 맞는 말이 된다. 더 하기만 한다면 승리의 전략이 된다.

 

  • 최적화

경제에는 세 가지 구성원이 있다.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중간자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이어지기 어려우니 연결의 역할만 하는 중간자가 생겨났다. 재화시장에서는 유통업자라 불리고 서비스 시장에서는 중개업자라 불린다. 교환은 가치의 이전이다. 가치는 고유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교환이 이뤄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가치다. 가치의 차이를 통해 이익을 발생시키는 것이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높은 가치의 상품을 싸게 사거나 낮은 가치의 상품을 비싸게 팔면 이익이 남았다. 포장, 설득, 제안, 협상 능력이 생산능력보다 중요해졌다.

생산자와 중간자는 돈 맛을 봤다. 신이 나서 손을 잡고 춤을 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전만큼 팔리지 않았다. 필요에 대한 공급은 포화되었다. 욕망에 공급하니 조금 더 팔 수 있었다. 오래가지 않아 필요도 욕망도 포화되니 더이상 팔 것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은 더 더 더 관성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시장의 합인 경제는 더 더 더욱 그러했다. 국가도 나선다. 생산자, 유통자, 국가가 함께 손을 잡고 미친듯이 소비자를 만들어냈다.

모든 것이 포화되었다 싶으면 침체가 찾아왔다. 몇년 주기의 소침체, 기십년 주기의 대침체를 겪고 나면 경제는 다시 일어서서 가던 길을 갔다. 지구의 땅덩이는 좁고 인구는 무한정 늘어날 순 없으니, 소침체 대침체는 넘겨도 기백년 주기의 태침체는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드디어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나왔다. 실체는 없어도 거래가 가능하다는 주장. 어떤 상품도 서비스도 없다. 알맹이는 가라. 껍데기는 남고. 거래의 형식만 남겨라. 가상의 가치를 교환하자. 희망과 불안이란 감정에 팔자. 실존하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돈만 오가면 그만이니까. 금융시장 얘기다. 실존하지 않음에 거래는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물리적인 제약도 시간적인 제약도 없다. IT기술이란 부스터도 달았다. 거래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거래가능한 품목의 수량도 무제한에 가깝게 늘어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객단가*거래수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 비판

생산 도구로서의 인간 값어치는 하루가 다르게 무의미해진다. 결정된 미래이기에 이미 무의미해졌다는 미래완료시제를 써도 틀리지 않다. 생산성 측면에서 인간은 로봇에 한참 못미친다. 이 이유로 사람을 해고해도 비난받기는 커녕 우수한 경영자라고 상을 준다. 만 명의 일자리를 없앤 사람도 백 명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

유통업자와 중개업자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같다. 중간자는 곧 시장이 된다. 시장의 앞면엔 번영과 풍요가 그려져 있다. 뒷면엔 인간의 게으름과 탐욕이 그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모든 시장은 앞면의 모습으로만 보여지길 바란다. 활기 넘치는 건강한 시장의 모습이지만,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미친 자본의 사회를 가속화시키는 것도 시장이다. 연결이 조금만 천천히 되었다면 지금의 방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인류가 적응할 시간을 조금은 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의 의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돈의 의지로 돌아간다.

나에게도 다른 대책은 없다. 내일도 출근하면 돈이 시키는대로 직원의 생산성을 측정하고 평가해 키워내라고 닦달할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한없이 나이브하고 비생산적인 낭만주의자로 취급받겠지만. 빨리 이 자본주의 룰속에서 게임을 승리시킨 뒤에 여생을 보장할 만큼의 현금 다발을 쥐고 낭만을 찾아 세속을 뜨고 싶다. 낭만의 세계는 성과로 측정되지 않으니 낭만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 적어도 그 곳에선 미친 자본이 나의 의지와 판단을 조정하진 않을 것이다.

 

  • 그리고

게임의 룰이 그렇다. 이익을 조금 취하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익을 많이 취하면 나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쁜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룰에 따라 이겼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더군다나 개인의 안녕과 풍요, 가족의 안녕과 풍요를 위한 일이기에 선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으니 악한 것이다. 거래상대는 상대적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의 욕망, 이익추구, 이기심이 부딪혀가는 곳이라는 배웠기에 나쁜 것은 아니다. 한 건의 거래에도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잣대를 들이대면 이렇게 복잡해진다. 이곳엔 윤리가 없다.

가치판단이다.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대립하는 사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모순되는 가치관을 한 사람의 좁은 마음에 품어낼 순 없다. 누구든 치우친다. 치우친 상태로 대립하고 혼돈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것이 한낱 개인의 최선이다.

치우치면 편할 것을, 선택하면 편할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렇게 정리해보려고 글을 쓴다. 돈을 벌고자 한다면 부자의 가치관과 생각구조를 따르면 될 것이고, 다른 곳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것을 따르면 될 일이다. 선택한 사상 이외의 가치관은 배척하고 부정하면 될 일이다. 굳이 모순되는 가치관을 내가 다 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나는 선뜻 택하지 못한다. 모순만 발견했다. 나는 오늘도 치우치지 못했다.

세상이 그러하듯 나 또한 카오스모스다. 괜찮다. 혼란과 대립이 존재하기에 당신은 균형의 상태다. 그저 엔트로피가 조금 높을 뿐이다.

 

— 덧붙임 —

생각숙제1 : 생산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무가치해진 시대, 인간의 가치는 0인가 null인가.

생각숙제2 : 비생산의 영역에서 인간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생각숙제3 : 노동은 이미 무의미해졌는데(미래완료), 왜 돈은 여전히 노동본위제일까?

 

— 덧붙임 210619 —

경제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다보니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였다. 정반대로 향하려는 가치 사이에서 고민했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 답을 주었다. 존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경제활동을 추구하면 된다.

스타트업이란 무엇인가?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쓰여진지 3년이 채 되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2007년도 이후에야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신조어는 네이버 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오픈사전에서 3줄의 짧은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조금 더 많은 설명을 담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스타트업을 보통 ‘창업’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거나, 기존의 ‘벤처기업’이라는 단어와 혼용하거나, ‘IT업계 초기기업’으로 가두어 지칭하곤 한다. 유사한 듯 보이는 이 세 단어는 스타트업의 뜻과 의미를 잘 표현하지 못하며 많은 오해를 불러낸다. 언어가 사회적 약속이라는 전제하에, ‘창업’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식당 창업을 떠올리게 하고, ‘벤처기업’은 왠지 정부로부터 벤처기업 인증을 받아야 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초기기업’이라고 부르면 설명하는 내용이 제한적이다.

미국에서도 이 신조어에 대한 정의가 정확하게 굳어지지 않아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의 창업자인 폴 그래이엄은 스타트업을 ‘성장‘(한글 번역본 by 윤치형님)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페이팔의 창업자인 피터티엘은 둘도 없는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린스타트업의 저자인 에릭 리스는 스타트업 기업이 가지는 네 가지 속성을 설명하고 있으며, 에릭리스의 스승인 스티브 블랭크는 조금 더 도식화된 설명을 덧붙여 분석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 신조어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쿼라(Quora), 리서치게이트(ResearchGate)를 통해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듯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아직 정의가 확실히 굳어지지 않은, 살아있는 단어이다. 수많은 정의가 공존하는 시점에서 비석세스는 직접 그 뜻과 의미를 찾아 나서기로 했고, 지난 2달에 걸쳐 30여 명의 스타트업 업계 종사자, 멘토들에게 영상인터뷰를 진행했다.

beSUCCESS 근무 당시 제작한 영상 : http://besuccess.com/2014/02/what-is-a-startup/

— 덧붙임 —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이다. 독일의 언어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의미의 집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집도 없고 약속도 없는 상태. 많은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대~충 뜻과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명료하고 흔들리지 않는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이 될 단어에 대한 약속과 의미의 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기 위한 논란은 계속 되고 있다.
의미 정의의 중요성은 모두가 깨닫고 있는 듯.
오해가 없으면 새로운 해석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의미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스타트업에 대한 의견.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인 친구를 만났다. 모 회사의 인사부 행정직으로 6개월 째 일하고 있다는 그녀는 겨우 반년 만에 300명이던 직원의 수가 90명으로 줄어든 것에 허희탄식했다. 이제까지 해고당한 200명의 직원들을 생각만 하면 너무 미안하다며 특히 40~50대의 아저씨들은 이직할 곳도 마땅찮아 생각 날때마다 입맛이 씁쓸해진다고 했다. 내 친구가 직원들 월급을 챙겨주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해고통보를 날려야 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보람보다는 자책감을 많이 들게하는 나쁜 직장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런 일을 하는데도 돈을 많이 챙겨줘서 좋은 직장이라고도 했다.

직원들을 해고한 이야기를 계속 하다보니까 그들을 누가 해고시킨 것인지가 애매해졌다. 회사에서 잘려나간 직원이 불과 반 년 만에 200명. 설마 입사 6개월 경력밖에 없는 내 친구가 자른 것인가? 최후통첩을 날리고 직원들을 자른 것에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으니 정말 내 친구가 자른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 회사 안에 있지 않았더라도 200명의 직원들은 잘려질 운명을 갖고 있었으니 내 친구의 탓은 분명 아닐게다.

그럼 회사의 우두머리인 사장이 잘라낸 것인가? 회사의 직원들이 나가서 회사의 규모가 작아지면 가장 안타까워 할 사람은 사장이 아닌가. 또 잘라놓고 가장 미안해 할 사람또한 사장이다. 애플사를 설립했던 스티븐잡스는 직원들과 트러블이 생겨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니 기업에서 쫓아내는 사람이 사장이라고 말하면 안되겠다.

그럼 자른 사람은 없단 말인가? 잘린 사람은 수두룩한데 자른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Give and Take, 액션과 리액션, 작용과 반작용, 자극과 반응이라는 인과법칙을 기본으로 하는 많은 자연현상들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있으면 따라서 자른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자른 사람이 없나? 아무래도 자른 사람은 어디에도 안보인다!!

자른 회사는 있는데 자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가 잘랐지 어떤 사람이 자른 것은 아니다. 잘린 사람들도 ‘여보, 나 회사에서 잘렸어. 엉엉’ 이라고 말하지 ‘여보, 인사과장 그새끼가 마침내 나를 잘라버렸어’ 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내 친구가 자른 것은 아니지만 내 친구의 직위인 인사과 행정직이 자른 것은 맞다. 그 회사 사장은 자르고 싶지 않아지만 사장이라는 자리가 직원들을 쳐낼 수 밖에 없었다. 기업의 조직적 체계가 기업원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 목적으로 기업에 들어갔던 신입사원들도 기업이라는 조직에 흡수되고 자부심을 느끼며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입사하는 순간부터 명함에는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회사의 이름이 더 화려하게 나온다.

분명 회사를 세운 것은 사람들인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회사라는 조직의 구성원이나 일부 부품 따위로 취급되고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이라는 체계에 이끌려 다니게 된다.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따위가 이성이나 감성이 있을리가 없고 인간과의 정이 통할리도 없다.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를 빌려 존재하는 기업체는 냉철하게 자신의 번식과 생존만을 목표로 인간을 동력원 삼아 부피를 키워간다. 어쩌면 SF영화에서 벌어질 법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과 같은 일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덧붙임 (2015.12.18) —–

2010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 진출하는 게 겁이 났던 나머지 이렇게 변명의 글을 쓰곤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 도피를 목적으로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