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박 시간

쥐새끼도 코끼리도 모두 평생 15억 번의 심장이 뛴다. 작은 설치류는 빠르게 뛰는 심장 덕에 2년 만에 이 숫자에 도달하고, 느리게 뛰는 심장을 가진 코끼리는 60년을 살아간다. 작으면 대사율이 높아서 빠르게 뛰고, 크면 대사율이 낮으니 느리게 뛴다.

인간은?

인간은 80년 동안 30억 회 정도 뛴다. 하지만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면 절반 정도인 40년만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15억 회다. 그렇다. 심장이 15억 회 뛰면 죽는 것이 생명의 숙명이고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새로운 수명 계산법이다. 태어난 날로부터 몇 년 며칠을 살았는지 세는 것이 일반적 셈법이지만, 나는 거꾸로 계산하는 편이 더 멋진 방식이라고 생각해 왔다. 80년을 산다 치고 40년 남았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D-40살. (이러나저러나 40살이긴 하지만.)

시대를 잘 타고나서 1+1 생명 하나 더 얻은 셈이다. 15억 번 뛰었는데 15억 번 더 뛸 수 있다. 남은 15억 번은 하루에 10만 800회씩 차감. 매년 생일마다 3,679만 회씩 차감. 서서히 다가오는 필연적 사건을 매 순간 직시하게 된다.

 

나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국가에 7,358만 번의 심장박동을 바쳤다. 아침마다 구보, 일과 중엔 노동을 강요받았으니 9천만 번 이상의 심박을 뺏겼을 것이다.
대학에선 1억 4,700만 번의 심박시간을 보내고 졸업장을 받아냈다.
백수선고식(졸업)이 다가오는 게 무서워 3,300만 번의 심박은 호주 땅 위에서 뛰게 했다. 그중 554만 번은 창문도 없는 주방 안에서 뛰었다.
팬데믹 시절, 840만 번의 심박시간동안 자전거에 올라타 전국을 쑤시고 다녔는데, 실제로는 1,200만 번 정도 뛰었을 것이다.

지하방에서 탈출해 옥탑방에 들어가며 파란 벽지로 벽을 꾸몄다. 달빛이 유난히 밝게 베개를 비추었던 그 방에서 내 심장은 2억 2천만 번 뛰었다.

 

시간은 돈이고, 돈이 곧 시간이다. 시간을 써서 돈을 벌고, 돈을 써서 다시 시간을 벌어내야 하는 경제체제 위에선 심박시간 또한 화폐단위로 치환될 수 있다.

하루에 10만 800회를 뛰게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빅맥 하나를 먹으면 심장은 2만 번 뛸 수 있다. 세트로 먹으면 4만 번.

헛뛴 심박도 많다.
후회와 자책으로 뛴 심장은 2,000만 번
타인의 탐욕에 통제권을 이양했던 심장 500만 번
타인을 증오하고 험담하느라 뛴 심장도 500만 번
아무렇게나 배설해대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500만 번의 심박이 헌납되었다.

옳게 뛴 심박은 더 많다.
땅 끝까지 파고들듯 악으로 깡으로 뛰었던 심장은 5천만 번
간절히 바라며 심혈을 기울이며 뛰었던 심장도 5천만 번
다람쥐 쫓는 개처럼 온전히 몰입했던 심장도 5천만 번

내 심장 제대로 뛰게 하겠다고 타인의 피눈물이 대가로 치러지기도 했다.
내 쓰레기를 받아내는 데에 또 다른 누군가의 500만 심박이 사용됐고
여기가 아닌가벼? 삽질하는 데 동료의 2,000만 심박시간도 낭비시켰다.

유용한 쓸모의 존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익히느라 꽤 많은 심박시간을 썼다. 쓸모를 갖췄고, 여생 동안 뛸 15억 회의 심박활동에 필요한 칼로리를 공급하는 데는 큰 차질이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

 

심장에 필요한 연료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하지만 화폐를 더 벌어도, 시간을 더 벌어도, 잔여 심박 횟수를 늘릴 수는 없다.

몇 회를 뛰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뛰었는지를 신경 쓰며 살아야 미련도 후회도 안 남겠다. 남은 심박은 조금 덜 유용한 쪽으로 뛰게 하는 게 좋겠다.

지금까지 1,920만 번의 심박시간을 써서 1,300편의 영화를 봤다.
블레어윗치에 안 놀란 심장 삽니다.
스타트렉에 안 설레본 심장 삽니다.
원스에 뭉클해 본 적 없는 심장 삽니다.

남들 잘 때 깨어 250만 번을 뛰었던 고요한 새벽의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첫 키스의 잔상은 70만 번의 심박시간동안 유지되었다.
사랑에 실패해 찢어지듯 뛰었던 심장은 300만 번
고향을 회상하며 아련하게 젖어들었던 심장은 800만 번

남은 15억 회는 카이로스적 심장박동으로 더 많이 채워지면 좋겠다.

 

누군가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던 건
내 심장이 3억 번째쯤 뛰고 있을 때였는데,
2억 번쯤 더 뛰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이 파악돼서
깊은 상심과 통탄에 빠져 혼자 몰래 울었던 기억이 있다.

심장박동이 멎었다는 소식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황망하기 그지없고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앞으로도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다.

가장 최근의 소식은 석 달 전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벌써 내 가슴 위에 올라와 골골대고 있었다.
그렇게 녀석의 심장과 내 심장은 190만 번과 100만 번씩 맞대어 뛰었다.

우리집 고양이는 심혈관계 유전병이 있어서 7억 번밖에 뛰지 못했다.
그마저도 분당 130번의 속도로 뛰었으니 내 심장이 3억 7천만 번 뛰는 시간밖에 살지 못했다.

 


50만 번의 심박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LLM과 계산놀이를 하다가
시계가 자정을 넘기더니 글이 이 모양이 되어버렸다.
이런 감상에 젖은 글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애초에 산출하려고 했던 재밌는 계산결과는 아래에 붙인다.

일평생 혈류 펌핑량 231,264,000 L
일평생 혈액 생성량 1,460 L
일평생 허파 호흡량 336,384,000 L
일평생 신장 여과량 4,20,4800 L
일평생 침샘 분비량 35,040 L
일평생 땀샘 분비량 23,360 L
일평생 섭취 음수량 58,400 L
일평생 소변 배출량 43,800 L
일평생 섭취 음식량 73,000 Kg
일평생 배변 배출량 4,380 Kg
일평생 손발톱 성장 33.6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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