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시발 살아서 무엇하나 80년 뒤 뒈져버리는데 뒈지는게 허무해서 씨라도 많이 뿌려볼까 한들 그자식들 또한 내가 아니며 나의 일부조차 안되기에 헛된 노력이다 세상에 책이라도 몇권 써놓고 가면 보람차려나 생각해봐도 30억년 뒤에는 태양이 너무 커져서 지구를 삼켜버릴 텐데 50억년뒤에는 지구를 먹어버린 태양조차 터져버릴 것이고 60억년 후에는 우리 은하가 안드로메다 은하와 충돌해서 모든게 혼란에 빠진다 빅뱅 이후로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멀어져 가고 있는데 우리 은하군은 다른 은하군과 멀어져 가므로 인력이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은하 자체의 인력도 줄어들어감으로 모든 개체들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인력이 줄어들게 되어 최소단위 원자, 그안의 양성자 중성자 까지 인력이 없어지게 된다 모든 것이 언제 존재했었냐는 증거도 못남기고 사라져버릴 것인데 이 내 짧은 인생 얼마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가 시발

 

—- 덧붙임 (2015.12.18) —-

사회에 나오기가 무서워 허무주의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이미지 공부를 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던 어제였습니다. 어젯밤 저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을 했습니다. 보는 것에 집착이 너무 심했던 요즘 꿈속에서도 무엇인가가 등장해서 보였습니다. 이제껏 본적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꿈속이 아니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인간의 시각능력으로는 볼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제가 보았던 그 풍경에는 거리에 상관없이 초점이 맞아있었습니다. 모든 눈알과 카메라에는 초점이 있어서 가까운 곳에 초점이 맞으면 멀리 있는 곳은 흐리게 보이고 먼 곳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운 곳은 초점이 안 맞게 됩니다. 제가 꿈에서 경험한 풍경에는 모든 곳에 초점이 다 맞아 있었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선명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야각 120도를 초월한 풍경이었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공간을 저는 시각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보았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알았다고 표현해야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보는 과정도 없었고 이미지를 읽는 과정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아무런 감각적 자극도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안에 있었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주 선명한 이미지로 저에게 다가왔을 뿐입니다. 봄과 동시에 이미지의 이미지를 느꼈고 물체의 상은 그 뒤에 저의 머릿속에 새겨졌습니다. 눈을 감고 상상력을 통해 본 꿈속의 세계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인 친구를 만났다. 모 회사의 인사부 행정직으로 6개월 째 일하고 있다는 그녀는 겨우 반년 만에 300명이던 직원의 수가 90명으로 줄어든 것에 허희탄식했다. 이제까지 해고당한 200명의 직원들을 생각만 하면 너무 미안하다며 특히 40~50대의 아저씨들은 이직할 곳도 마땅찮아 생각 날때마다 입맛이 씁쓸해진다고 했다. 내 친구가 직원들 월급을 챙겨주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해고통보를 날려야 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보람보다는 자책감을 많이 들게하는 나쁜 직장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런 일을 하는데도 돈을 많이 챙겨줘서 좋은 직장이라고도 했다.

직원들을 해고한 이야기를 계속 하다보니까 그들을 누가 해고시킨 것인지가 애매해졌다. 회사에서 잘려나간 직원이 불과 반 년 만에 200명. 설마 입사 6개월 경력밖에 없는 내 친구가 자른 것인가? 최후통첩을 날리고 직원들을 자른 것에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으니 정말 내 친구가 자른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 회사 안에 있지 않았더라도 200명의 직원들은 잘려질 운명을 갖고 있었으니 내 친구의 탓은 분명 아닐게다.

그럼 회사의 우두머리인 사장이 잘라낸 것인가? 회사의 직원들이 나가서 회사의 규모가 작아지면 가장 안타까워 할 사람은 사장이 아닌가. 또 잘라놓고 가장 미안해 할 사람또한 사장이다. 애플사를 설립했던 스티븐잡스는 직원들과 트러블이 생겨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니 기업에서 쫓아내는 사람이 사장이라고 말하면 안되겠다.

그럼 자른 사람은 없단 말인가? 잘린 사람은 수두룩한데 자른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Give and Take, 액션과 리액션, 작용과 반작용, 자극과 반응이라는 인과법칙을 기본으로 하는 많은 자연현상들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있으면 따라서 자른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자른 사람이 없나? 아무래도 자른 사람은 어디에도 안보인다!!

자른 회사는 있는데 자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가 잘랐지 어떤 사람이 자른 것은 아니다. 잘린 사람들도 ‘여보, 나 회사에서 잘렸어. 엉엉’ 이라고 말하지 ‘여보, 인사과장 그새끼가 마침내 나를 잘라버렸어’ 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내 친구가 자른 것은 아니지만 내 친구의 직위인 인사과 행정직이 자른 것은 맞다. 그 회사 사장은 자르고 싶지 않아지만 사장이라는 자리가 직원들을 쳐낼 수 밖에 없었다. 기업의 조직적 체계가 기업원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 목적으로 기업에 들어갔던 신입사원들도 기업이라는 조직에 흡수되고 자부심을 느끼며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입사하는 순간부터 명함에는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회사의 이름이 더 화려하게 나온다.

분명 회사를 세운 것은 사람들인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회사라는 조직의 구성원이나 일부 부품 따위로 취급되고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이라는 체계에 이끌려 다니게 된다.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따위가 이성이나 감성이 있을리가 없고 인간과의 정이 통할리도 없다.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를 빌려 존재하는 기업체는 냉철하게 자신의 번식과 생존만을 목표로 인간을 동력원 삼아 부피를 키워간다. 어쩌면 SF영화에서 벌어질 법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과 같은 일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덧붙임 (2015.12.18) —–

2010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 진출하는 게 겁이 났던 나머지 이렇게 변명의 글을 쓰곤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 도피를 목적으로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죠.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철학이라는 말만 꺼내도 내가 사주팔자 점집을 차릴 작정을 한걸로 오해를 해서 이상하게 쳐다보곤 한다. 그런 친구들도 10여 년 전에는 지독한 철학자였다. 모든 사람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다. 자신의 자아를 깨닫고 ‘나는 누구이며, 내가 살고 있는 우주는 어디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들을 던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을 찾지 못한 단기 철학자들은 모두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풀지 못해 포기한 ‘존재의 이유’라는 문제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명쾌한 해답을 일찍이 내놓았다.

‘존재의 이유’나 ‘왜 사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 가정을 꾸려 후손을 잘 기르고 싶다든지 연봉을 5천만원정도 주는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서라든지 장원급제하여 가문의 영광이 될 것 이라는 대답들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답들은 자신들의 꿈이자 인생계획일 뿐이지 정답이 아니다. 게다가 본인이 세상에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도 될 수 없다.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개인의 존재이유를 넘어서 세상 만물의 존재이유까지 물어보는 질문이다.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답 중에서 틀린 답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살기위해 산다.’라는 동어반복적인 답만이 남는다.

쇼펜하우어는 ‘살기위해 산다.’라는 것을 ‘will to live’(생의지)라고 말했다. ‘will to live’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의 원천이다. ‘will to live’가 사람을 하루세끼 밥을 먹게 만들고 짝을 맺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생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의지에 의해서 행동한다는 것을 부정할지도 모른다. 이는 개념의 혼동이 있기 때문인데, 흔히 ‘의지’라는 단어는 뇌의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사전에서는 자신의 의도를 입각하여 자기결정을 하는 목적을 추구하는 작용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쇼펜하우어가 말한 ‘will to live’는 이보다 좀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의지를 뜻한다. 그것에는 우리의 이성이 개입되지 않는다.

생의지는 뇌가 계산한 결과가 아니고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생의지는 내 몸속 100조 개의 세포 안의 유전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전인자가 달성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종족 보존이다. 인간이 종족 보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고 이성을 만나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헌데 인간이 귀찮다고 식음을 미루고 짝을 맺지 않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문제점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 몸속의 유전인자는 쾌락이라는 당근을 줘서 사람을 조종한다. 인간의 미각 구조는 이 쾌락원칙을 철저히 따르기 때문에 대체로 몸에 필요한 음식은 맛이 좋고 몸에 해로운 음식은 맛이 없다.

인간의 모든 욕구의 바탕에는 생의지가 넓게 깔려있다. 그리고 그 생의지 위에는 고차원적인 욕구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있다. 이 피라미드는 하위단계에 있는 결핍욕구와 그 위에 있는 성장욕구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위단계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상위단계의 욕구를 추구하지 못한다.

생리적 욕구, 안전과 안정 욕구, 사랑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 존경 욕구, 자기실현 욕구의 단계로 쌓여있는 욕구위계 피라미드는 Abraham Harold Maslow가 발견해 낸 모델로 에피쿠로스가 나눈 3단계의 생존, 성욕, 성취욕보다 더 정밀하다.

maslow

생리적, 안전, 사랑, 존중 에 대한 욕구는 결핍욕구로 이 욕구가 기본적으로 충족되어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해지게 되면 우리는 더 발전하고자 하는 성장욕구를 추구하게 된다. 먼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야만 알고 싶어 하는 욕구와 자아를 실현코자 하는 욕구, 그리고 심미적 욕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생의지는 피라미드의 아래단계에 있는 결핍욕구에 더 가깝다고 단정 지을 지도 모르나 단순히 생의지가 하위단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생의지는 모든 욕구에 넓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생의지는 모든 인간행동의 원천이다. 생의지는 인간의 생존에 관여하여 안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사랑을 받아 종족을 번식하고자 하는 욕구도 가지게 하며 훌륭한 사람이 되어 훌륭한 개체로 진화하고자 하는 욕심도 만들어 낸다. 더 나아가 자아를 실현하는 것 또한 자신의 객체를 인식하고 주체로서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생의지는 모든 욕구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생의지는 인간이 가지는 모든 욕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욕구들 중에 아주 강력하고 원초적인 것이 있다면 생존욕구 다음으로 성욕을 들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종족보존을 위해 자연적으로 왕성한 성욕을 가지게 된다. 성욕이 없는 존재는 일찍이 대가 끊기고 멸종하였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는 성욕이 왕성하다.

인간 또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동성동본간의 결혼과 근친상간을 금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관습적인 규제가 아니었다. 근친상간을 하면 기형아를 낳고 열등한 2세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친지를 사랑하지 않고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만들 수 없는 이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인간은 본인과 다른 형질의 가진 이성에게 끌리게 된다.

우리는 흔히 난자에 1등으로 도착하는 정자가 수정에 성공한다고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자 한마리가 난자에 1등으로 도착해도 바로 문이 열리지 않고 100마리쯤 둘러싸인 이후에야 문을 열어 단 한 마리의 정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최근 보고된 사실이다. 1등으로 도착한 정자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난자는 100마리의 정자를 모두 둘러본 뒤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와 다른 형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정자를 받아들이는 선별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원생동물의 하나인 짚신벌레가 있다. 꼭 짚신마냥 생긴 짚신벌레는 날씨가 좋은 한여름에는 아메바와 같이 몸이 갈라짐으로써 번식을 한다. 그러나 가을이 찾아와 쌀쌀한 바람이 불어 올 때면 두 놈이 슬쩍 만나 도둑 키스를 한 번 하고, 살그머니 헤어진다. 하등한 종족 주제에 무슨 꼴불견이냐고 하겠지만 겨울이 닥쳐오면 짚신벌레 키스의 신비가 드러난다.

날씨가 사나워지면 스스로 몸이 갈라져 태어난 홀아비의 새끼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죽어 버리는데 키스를 통해 태어난 후손들은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많은 수가 생존한다. 짚신벌레는 키스만 한 것이 아니라 두 몸이 합치는 동안 개개의 이질적인 염색체의 일부를 교환함으로써 생존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 볼수가 있는데 서로 다른 형질을 가진 부모가 낳은 혼혈아는 성장과정에서 인종차별을 받기는 하나 결국에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가 있었다.

생의지는 인간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인간은 의지라는 것에 영혼이 저당 잡힌 존재라고 해도 문제가 없겠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생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 만물이 존재하게 만들어 준 진리보다 더 높은 진리라고 할 수 있겠다.

얼마 전에는 쓰촨성 지진이 일어나면서 3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진은 남아시아 대륙판이 유라시아 대륙판을 밀어 올려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은 대륙이동설을 알고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위치도 알고 있었음에도 대비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진이 일어나기 몇 일전 개구리들이 힌트를 줬다고 한다. 쓰촨성 부근에 있는 모든 개구리가 튀어나와 온 도로를 덮었고 차에 밟히면서도 어디론가 황급히 이동하였다는데, 동물들은 이런 본능이 있어 지진을 알아채고 대피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진이 일어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지진이었기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에겐 애석하지만 하늘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 인간의 무지는 무척 슬픈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은 재앙이 너무나 많은 나라라서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면 큰 이슈거리도 되지 않는다. 매번 일어나는 일본의 대지진은 일본의 건축력을 발달시켜 주었다. 우리나라 또한 매년 여름에 태풍은 찾아오는 것이라 당연히 여기고 철저한 대비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났다며 불평하는 일이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홍수가 들일이 없는 높은 곳에 집을 짓고 바람이 불면 덤덤하게 테이프를 창문에 바른다. 그리곤 어떤 영화를 보며 태풍을 보낼지를 고민한다. 반면 미련한 사람들은 TV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에 호들갑을 떤다. 100년만의 폭설이니 50년만의 대지진, 30년만의 무더위라는 등등 말이다. 어떤 이들은 지구가 멸망할거라며 마당에 소금을 뿌리고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

오늘날 환경운동가들은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이산화탄소량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데, 사실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져서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온도가 높아져서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는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가 따뜻해지는 것은 인간의 탓이 아닌 지구의 운명에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가 따뜻해지면 바다가 넓어져서 땅이 잠기기는 하겠지만 따뜻하고 비옥한 토지도 늘어나 풍요로워 질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은 물에 잠기는 땅만을 강조하며 객관적이지 못한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환경운동가들은 과학적이지 못하고 객관적이지 못하며 감정적이다. 그런 환경운동가들에게 모든 자연현상은 불안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오늘도 내일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게 된다. 100년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고 200년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니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마땅하다. 빙하기가 있었던 적도 있는데 조금 춥다고 난리를 쳐서야 되겠는가? 사실 지구의 10억년 역사동안 이렇게 평화롭고 안정적인 적도 없었을 건데 말이다.

우린 이런 당연한 일들에 대해서 실망도 하고 분노도 치밀었다가 좌절하기도 한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믹스가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 하루에 열쇠를 두 번씩 잃어버렸다가 두 번을 찾아낸다. 열쇠가 어디론가 숨어서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사실 지갑은 무생물이라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열쇠가 어디론가 숨어있어 내가 화가 난 것은 맞지만, 나의 화를 돋우기 위해 열쇠가 숨바꼭질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잠금장치를 전자식으로 바꾸어 열쇠가 필요 없어졌다. 문명의 발달은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나의 분노를 줄여주었다. 문명의 혜택에 감사를 느낀다.

이와 같은 이치로 태풍 또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곯려주려는 속셈은 없다. 단순한 에너지의 순환일 뿐이다. 쓰촨성 아래의 땅덩이가 제 위에 사람들이 버글거리니 귀찮아서 몸부림을 친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진동이 이는데 마침 사람이 그 위에 살림을 꾸린 것이다.

인간은 이를 잘 이해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녀야 마땅하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와 전통, 문화를 너무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미련을 가진다. 본인이 자신의 발에 족쇄를 채웠다면 그에 따른 피해가 생겼을 땐 스스로 책임져야 마땅하겠다.

한 사람의 인생은 주사위놀이보다는 장기판에 가깝다. 포가 왜 하나를 건너뛰어야만 이동할 수 있고 차는 왜 수직으로밖에 못 움직이는 지에 대해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이 너무나 당연한 룰에 대해 불평을 하게 될 경우 인간은 불행해지게 된다. 세네카는 장기판의 룰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 항의 없이 최후의 장군을 받아들였다. 장기판 위에서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수들이 존재한다. 예측하지 못한 수를 통해 자신의 말이 먹히게 된다면 슬프고 억울하여도 받아들여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대처할 수가 있고 또 말이 먹히더라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장기를 잘 두는 고수처럼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최악의 수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사람은 말을 할 줄 안다. 언어가 생기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그것은 인간의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인간은 더욱 언어를 활용했고 넓어진 추상언어와 개념언어들, 다양해진 내적표현들로 하여금 인간은 더욱 다양하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와 반대의 경향을 자주 느낀다. 말을 하기 때문에 생각이 제한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은 말을 너무 쉽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따라서 생각한다. 이것은 제대로 된 프로세스가 아니다. 생각의 결과를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인데, 말이 너무 익숙해버린 나머지 말을 하면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언행일치를 하지 못한다.

인간은 주체성이 있다. 인간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시간개념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자 인간은 자신의 삶이란 개념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자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누구인가 어떠한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인가 라는 고민에 빠지게 된 건 인류의 역사에서 정말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와 반대의 경향을 자주 느낀다. 인간이 주체성있게 삶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나 사회가 너무 기반이 탄탄하게 다져져 있는 상황이라 인간은 그 환경에서 주체성을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주체적이지 못한 상태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에 빠져있다.

인간은 행동을 너무 쉽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따라서 자신의 삶이 결정되어진다. 이것은 제대로 된 프로세스가 아니다. 자신의 목표를 지향하며 행동을 해야 할진데, 행동이 너무 성급한 나머지 자신의 삶의 가치나 삶의 방향이 별 생각없이 했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봄 없이 산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가 미약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