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요리 마스터가 요리에 대한 헌신과 전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MADfeed에 새로운 비디오가 올라왔다. 노마의 르네 레드제피와 스시 마스터 지로 오노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12분의 영상이다. 이 영상은 요리사뿐만 아니라, 한 분야에 매진해서 수련을 거듭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큰 귀감이 될 영상이다.

지로 오노는 아직도 나무 주판을 활용해 가격을 계산하고 있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손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의 중요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기계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이 손으로 해야 할 일을 예전만큼 중요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의 진보는 사람의 손을 통해 이뤄졌다.”

영상에서는 두 사람의 인터뷰와 르네의 식사 장면, 나레이션이 번갈아가며 나온다. 르네는 일본 초밥 장인의 고집과 외길인생 철학에 적잖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 “휴가를 가느니 차라리 일을 하고 말지, 휴가를 가면 하루도 안되어서 지루해질 거야”라는 대답을 들었을 때는 당혹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서양인에겐 ‘장인정신’이라 하는 것은 너무나 낯선 삶의 방식인 이유에서였을까.

“장인(master)이 되었다고 스스로 확신하게 되었을 때는 언제인가?”라는 르네의 질문에 지로는 “50세”라고 짧게 답했다. 이어서 “마스터는 기존의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장인의 정의를 덧붙였다. 지로의 아들 또한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함께 일하고 있는데 주방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장인과 기능공의 관계로 명확히 선을 긋는 것을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로의 아들은 “예전에는 그저 고집이 센 사람이라고 밖에 여기지 못했다. 인제야 이 사람이 정말 궁극의 경지에 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아버지를 따라잡기 위해 매일 수련하지만, 그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는 아버지는 또 저 멀리 가버린다” 라고 옆에서 거든다. 올해 나이 90세인 지로 오노는 아직도 매일 하루를 도전과 발전을 위한 날로 받아들인다.

일본 전통 초밥 세계에서는 제대로 된 초밥을 만들려면 20년을 배워야 한다는 정설이 있다. 이런 장인정신은 요리뿐만 아니라 일본의 보편적인 직업윤리로 꼽힌다. 일본을 경제대국과 기술대국으로 번영케 한 고유한 민족성을 꼽으라면 바로 장인정신일 것이다.

일본에는 창업한 지 백 년이 넘는 가게가 즐비하다. 몇 대째 가업을 이어서 전통을 지켜나가는 일본의 제조품은 전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장인정신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장인(master)은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얻었다고 해서 다른 직업으로 옮기지도 않는다. 직장을 자아실현이나 수행의 장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하는 일을 좋아해야만 한다. 일을 시작했다면 좋든 싫든 계속 전진해서 나갈 수 밖에 없다. 일이 나의 적성에 맞지 않다고 고민하는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든 전문가가 될 수 없다.” 지로 오노는 젊은 세대들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평정심을 잃지 않으며 자신만의 길을 감으로 궁극의 경지에 달한 장인, 지로 오노.
모두가 외면하는 길을 혼자 걸어감으로 세계 미식의 판도를 뒤엎은 르네 레드제피.

이 둘은 나이도, 요리분야도, 문화권도 다르지만, 음식을 더 맛있게 만들려는 집착과 헌신, 그리고 전념은 공통점이 아닐까. 이 장인정신은 비단 요리에서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모든 직업인이 갖춰야 할 삶의 태도가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고집스러운 두 사람의 인터뷰 영상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뉴욕에 된장 냄새가 진하게 퍼지고 있다. 냄새의 근원지는 한식당 최초의 미슐랭 스타를 받은 식당 ‘단지’, 김훈이가 오너셰프로 있는 곳이다. 그는 2014년도 마스터셰프 코리아 시즌3의 심사위원으로 초대되며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훈이는 본디 한식을 전공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요리를 전공한 사람도 아니다. 수학과 과학 성적이 좋아 명문대를 진학했고, 의사의 길을 순탄히 걷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요리를 처음 시작한 것은 31살이 되었을 때였다. ICC-International Culinary Center 9개월 단기간 코스로 급하게 시작했다. (당시는 FCI-French Culinary Institute로 불렸다) 당시 학교에 입학한 연도가 2004년이었으니 요리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미슐랭 스타를 받으며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요리사가 된 것이다. 그것도 미식의 수도로 불리는 뉴욕에서 쟁쟁한 식당들과의 경쟁을 이겨낸 쾌거이니 그 의미는 남다르다.

이런 김훈이는 현직 요리사뿐만 아니라, 요리를 공부하는 학생 그리고 앞으로 요리사로 전직을 꿈꾸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두말 할 것 없이 좋은 본보기가 된다.

셰프뉴스팀은 김훈이 셰프에게 화상통화를 요청했고, 기존에 대중매체에서는 깊이 있게 물어보지 않았던 ‘요리사로서의 김훈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요리사로 전업하던 과정과 그 과정에서 있었던 고민을 가감 없이 답해주었다.

| 의사에서 요리사로, 진로를 변경한 이유가 있었나요?

아마 용기가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했을 거에요.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의사가 아닌 다른 걸 찾기 시작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수학이랑 과학을 잘했어요. 과학고를 졸업해 UC버클리를 나왔거든요. 그러면서도 대학교 시절에는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었어요. 의사도 어머님이 해보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듣고 선택한 길이었고, 그렇게 10년 동안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만 했어요. 코네티컷 의과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한 후에 1년을 휴학했어요. 일단 진학하게 되면 6년 동안 쉬지 않고 내리 다녀야 했으니까……
1년을 쉬는 동안 “요리나 배워 볼까”라는 생각에 9개월짜리 코스를 다녔어요. 9개월 코스 다니고 나니까 3개월이 남잖아요? 그동안 Daniel에서 일하다가 정식 채용되면서 의사의 길을 포기했죠.

 

| 의사를 포기한 이유는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리를 선택하셨나요?

저는 진로를 선택할 때 ‘사람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싶다’라는 생각만으로 의사를 선택했어요. 학부 시절에 병원을 다닐 때는 분명 사람을 도와준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는데, 대학원 시절에 병원을 다니게 되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보다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을 더 많이 겪게 되더라고요. 불치병 환자라든지, 큰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만 봐야 하는 사람이라든지….

식당을 한다는 것은 매일 매일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저는 매일 매일 짧은 시간에 노력을 다해서 바로 바로 성과를 확인하는 일에 희열을 느끼고 있어요.

 

| 요리를 시작한 이후에 개인적인 변화가 생겼다면?

달라진 점은 무엇보다 잠을 잘 자요. 요리는 잘할 자신이 있으니까 온종일 육체노동을 해도 일을 마치고 퇴근할 때 기분이 좋아요. 사실 병원에서 퇴근할 때에도 기분이 좋긴 한데, 그건 하루를 보람차게 보냈기 때문에 기분이 좋은 것보다는 일로부터 해방되니까 기분이 좋은, 약간 다른 거잖아요? 요리를 시작한 이후에는 눕자마자 5분 만에 잠들어요. (웃음)

| 학교를 고를 때 기준이 있었나요?

주방에서만 사용하는 프랑스 표현들이 있어요. 그런 표현들을 알면 요리사들 사이에서 대화가 편해져요. 프랑스어로 ‘소테(sauté)’라고 말하면 다 알아들을 걸 다른 나라말로 하면 ‘기름을 조금만 부어서 센 불로 짧은 시간에 골고루 볶아내는 것’이라고 길게 설명해야 해요. 그리고 프랑스 요리 교육이 기술적인 것을 가르쳐주는 것 같지만 결국 재료에 대해 공부하게 돼요. 어떤 날은 감자 요리를 4~5가지 가르쳐주고 다음 날은 달걀로 몇 가지를 하는 식이에요. 한 재료에서 얼마나 다양한 요리가 나오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되죠. 재료를 이해해야 다른 계열의 요리를 더 쉽게 할 수 있어요. 한식도 마찬가지예요.

 

| 전직을 하던 시점, 요리를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서 모교를 어떻게 평가하세요?

“만약 내가 ICC를 안 다녔다면 과연 시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요. 학교에서 배우는 것과 식당에서 일하는 것의 차이가 너무 커요. 그래서 아무리 좋은 학교를 졸업했어도 일을 시작할 때에는 배웠던 것을 다 잊고 일을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해요. 학교에 다녔다는 것은 ‘칼은 제대로 잡을 줄 안다.’ 정도의 수준을 증명하는 최소한의 인증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9개월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니까 학교에서 인턴십을 꼭 하라고 당부했고, 몇 군데의 인턴십을 돌아다녔어요. 그러다 다니엘(Daniel)에서도 인턴십을 할 수 있었고 2주 동안 일하고 나니까 정식멤버가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오더라고요.

2005.11~2007.11 다니엘 주방에서, 우측에서 두 번째가 김훈이 셰프다.

2005.11~2007.11 다니엘 주방에서, 우측에서 두 번째가 김훈이 셰프다.

| 정말 좋은 제안이 들어왔었네요. 다니엘의 정규직과 오랜 준비를 해 온 의사의 길,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는 고민은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다니엘이 얼마나 굉장한 식당인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확실한 건, 그 식당에는 매일같이 10명 정도의 지원자가 걸어 들어와서 이력서를 내고 갔다는 거에요. 그 이력서들만 보더라도 10년의 요리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저는 무급인턴이었거든요. 10년 동안 열심히 배워서 다니엘에서 일하는 게 꿈이라는 걸 들었어요.

이전까지는 내가 아무리 요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해도 그 오랜 시간 공부해온 걸 포기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의학을 그만두는 게 좀 더 쉽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깝지 않았어요. 다니엘의 제안을 거절하는 게 더 아까웠던 거죠.

 

| ICC는 휴학기간에 취미 삼아 다니기엔 비싼 학교가 아닌가요?

알고 계신 것처럼 ICC는 비싸요. 학교 중에서 제일 비쌀 거에요. 9개월 코스에 한국 돈 4천만 원이 넘게 드니까. 근데 CIA는 2년을 다녀야 돼요. 학비만 따지면 7천만 원이에요. 거기에 생활비까지 따지면 훨씬 더 들어가죠. 다른 요리학교는 4년짜리라서 졸업할 때까지 학비만 1억 6천만 원이 들어요. 저는 시간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고 단기간에 집중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ICC를 선택한 거죠. 저에게는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게다가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 있잖아요? 이게 요리사에게 엄청난 메리트가 되거든요.

 

| 뉴욕 맨해튼은 요리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인가요?

맨해튼은 음식의 수도(Food Capital) 또는 식당의 수도(Restaurant Capital)라고 불려요. 10년 전부터 세계의 유명한 셰프들이 뉴욕에 다 모여들었어요. 그래서 경쟁도 심한데, 조엘 로부숑도 오픈했다가 얼마 전에 문 닫았고요, 알랭 듀카스도 왔다가 문 닫았어요. 뉴욕에서 식당을 성공시킨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이런 곳에서 요리를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중요하죠.

좋은 식당에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요리사로서 먹으러 다니는 것도 진짜 중요해요. 이건 투자에요. 맛이 없는 걸 먹어도 좋은 경험이 되는 거에요. 많이 먹어봐야 왜 맛이 있고 왜 맛이 없는지를 알아요. 저는 4살 때 한국에서 먹었던 맛을 잊고 있다가 30살에 요리를 시작하면서 그 기억이 떠올랐어요. 26년을 머릿속에 숨어 있던 게 나오더라니까요? 좋은 요리사가 되려면 끊임없이 먹어야 해요.

 

| 요리유학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충고가 있나요?

솔직히 대답해서 돈이 없으면 학교는 갈 필요 없어요. 제 주변의 요리사를 봐도 학교에 다닌 사람은 1/4밖에 안돼요. 진짜 요리를 잘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요리학교를 안 나온 사람들도 많아요. 요리학교에서 공부해서 졸업한 사람이랑, 좋은 식당에 들어가서 1년 동안 설거지부터 시작한 사람이랑 결국 똑같아요. 돈이 없다고 요리를 못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런데 말씀드린 것처럼 ICC는 아무런 요리지식도 없고 인맥도 없는 저에게 최고의 선택이었어요. 확실히 요리사로서 시작하거나 취업하는 데 도움이 되죠. 제가 ICC에서 돈을 받은 것도 아니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는 거에요.

 

| 본인이 졸업한 학교에서 수업을 열었다고 들었습니다. 교육에 뜻이 있으십니까?

올해부터 ICC에서 한식코스를 열었어요. 정규 과정은 아니에요.

제가 배울 때는 제 위에 있던 셰프들이 저에게 많은 것들을 던져줬어요. 여러 주방을 경험하고 여러 셰프를 만나면서 받은 다음에 나한테 맞는 것, 쓸 수 있는 것을 다시 뽑아내는 거에요. 그리고 저는 제 거를 다시 밑으로 전해줘야 해요. 식당에서 배우고 배운 걸 발전시키고 다시 물려줘야 요리 전체가 발전될 수 있어요. 저도 4명의 셰프에게 받은 것들을 더 좋은 것으로 물려주려는 과정에서 발전하고 있는 거고요.

제 식당에서는 레시피를 다 공개해요. 하루 도와주러 온 사람도 다 볼 수 있어요.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도 이메일로 다 보여줘요. 기사가 나가면 레시피도 같이 나가요. 한국에서는 레시피를 공개하지 않는 문화가 있는 데, 이건 큰 실수에요. 단지를 처음 열었을 때 만든 은대구 요리가 있는데 지금까지 6번의 변화가 있었어요. 바뀔 때마다 더 맛있게 바꿨죠. 그렇게 계속 바꿔야 요리가 발전돼요. 식당마다 똑같이 예전의 레시피를 가져다 쓰면 그게 맥도날드랑 뭐가 다르겠어요. 성공하는 식당들은 똑같은 요리를 하더라도 정기적으로 조금씩이라도 바꿔요. 레시피를 지키려고 고집하는 사람은 발전을 두려워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어서 [우리가 몰랐던 김훈이 #2] 뉴욕의 한식당 오너셰프, 스타셰프가 아닌 요리사로서의 김훈이를 만나다. 는 보름 후에 연재된다.

 

한국인으로서, 요리사로서 김훈이는 어떤 사람일까?

“외국 사람들이 한국 음식을 즐긴 후 오리지널이 무엇인지 궁금하도록 만들어야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에 가보고 싶도록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돈을 쓰는 건 재료와 직원, 이 둘 뿐입니다. 이 두 개는 못 아껴요. 이게 제 식당의 아이덴티티입니다.”

 

| 단지와 한잔,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 저는 3살부터 외국에서 살았습니다. 방학마다 한국에 갔었는데, 먹어본 음식들이 다 맛있어요. 요리를 시작한 이후에 다시 그 맛을 떠올렸습니다. 내 식당을 열 때는 한국 맛을 살리고 싶었어요. 단지는 한국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고 한잔은 한국 술 문화를 알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인가? 한국사람보다 외국인이 더 많이 찾아와요.

| 뉴욕에서의 요리 인생 중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 제가 다니엘에서 일할 때 이런 일이 있었어요. 송로버섯(트뤼프) 시즌이었어요. 하얀 송로버섯은 굉장히 비싸거든요. 그래서 서빙할 때마다 무게를 잽니다. 주방에서 나갈 때 재고, 손님 테이블에서 얇게 썰어준 다음에 또 재고. 근데 주방에 돌아오는 송로버섯의 모양이 이상했어요. 누가 콱 깨물어 먹은 것처럼. 사과 먹듯이 말이죠. 그래서 “누가 이렇게 했느냐”라고 하니까 서버가 “마사 셰프”라고 하더라고요. 주방에서는 다들 “술 취했나 보다”라며 웃어넘겼죠.
나중에 마사에서 일하게 됐고 그때 왜 그랬었는지 물었어요. 마사 셰프는 “송로버섯은 서양에서나 좋은 식재료다. 진짜 좋은 식재료는 아니다. 그걸 한 번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랬다”라고 했어요. 나름 의미 있는 행동이었죠. 당시에는 좀 웃겼지만.

| 다니엘과 마사에서의 경험들이 지금 요리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 마사 같은 경우 일단 의자에 앉기만 해도 50만 원이 넘을 정도로 비쌉니다. 아마 뉴욕에서 가장 비싼 식당에 속할 거에요. 마사는 일주일에 5일을 일본에서 직배송한 최고급식재료를 씁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퍼세는 토마스 캘러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잖아요. 그 레스토랑도 최고급 채소만 사용해요. 이 둘이 위치가 가까워서 서로 식재료를 교환해서 쓰기도 해요. 결국, 이 두 레스토랑에서 일했다면, 뉴욕에서 제일 좋은 식재료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이렇게 좋은 재료들을 쓰다 보니 재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한번 좋은 재료를 사용하다 보면 수준을 내릴 수가 없어요. 점점 욕심이 커집니다.

| 그렇다면 단지와 한잔의 식재료는 어떻습니까?

– 식당에 지불하는 음식값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죠. 분위기도 좋아야 하고 그릇도 비싼 걸 써야 하고, 공간도 충분히 넓어야 하고, 동네도 좋아야 하죠. 그런데 저는 제일 저렴한 접시를 씁니다. 와인 글라스는 5천 원짜리입니다. 천 냅킨 아니고 종이 냅킨을 씁니다. 동네도 비싼 동네가 아니에요.
제가 돈을 쓰는 건 재료와 직원, 이 둘뿐입니다. 이 두 개는 못 아껴요. 이게 제 식당의 아이덴티티입니다.
제가 두 번째 식당 ‘한잔’을 오픈하고 나서 1주일 안에 다니엘 블뤼, 페란 아드리아, 장 죠지가 다녀갔어요. 다니엘은 제가 그 식당에서 일했으니까 한 번 와봤다고 쳐도, 다른 셰프들이 왔을 때는 저도 놀랐어요. 요리사들에게는 좋은 재료가 무엇보다 중요하거든요. 좋은 재료를 쓴다는 소문이 나면 요리사들 사이에서는 인정(respect)받을 수 있어요. 어차피 모든 요리사는 뉴욕에 한 번씩은 들르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알고 찾아 왔나 봐요.

| 뉴욕에서 한국 식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구하나요?

– 5가지 식재료는 반드시 한국에서 가져옵니다. 된장, 고추장, 간장, 고춧가루, 참기름. 이 다섯 가지를 반드시 챙기는 이유는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음식이 저절로 맛있어지기 때문입니다. 장맛이 좋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단지를 열 때도 한국 음식이 일본 음식이나 프랑스 음식처럼 좋은 재료로 만들면 더 맛있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를 들어 마늘도 한국산과 최대한 비슷한 것을 써요. 뉴욕의 식당 대부분이 중국산 마늘을 씁니다. 중국산은 처음 4시간 동안은 향이 강한데, 나중에는 향이 없어져요. 우리 음식은 양념에 재우는 게 많잖아요. 김치찌개도 하루 지나면 더 맛있고, 양념 고기도 그렇고. 근데 중국산 마늘을 넣게 되면, 먹기 전에 한 번 더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한국산과 가장 비슷한 캘리포니아산 마늘을 사용합니다.

| 뉴욕에 있는 다른 한식당들 사정은 어떤가요? 한식이 보편화 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던데요.

– 한국 식당들 거의 다 잘되는 것 같아요. 한인타운도 있고, 외국인도 많이 찾고. 미국 사람들은 고기 굽는 식당이 정통 한식당이라고 생각해요. 이 점이 미국인과 잘 맞거든요. 여기 사람들은 2차, 3차 문화가 없습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2~3시간은 기본이에요.
우선 식당 바에서 칵테일 한 잔하고, 테이블에 앉아서는 밥을 먹고, 끝나면 디저트나 위스키를 먹어요. 모든 소셜(Social)활동을 한 식당에서 하는 문화죠. 한국 식당 대부분은 고기를 구우면서 그게 해결되거든요. 이야기하면서 먹을 수 있는 그런 식당이 잘 됩니다.
우리 집은 고기를 굽진 않아요. 아마도 ‘한국 장을 어떻게 변형하길래 뉴욕 사람들이 좋아할까?’라는 호기심으로 오는 것 같아요.

| 한식을 요리하는 셰프로서 어떨 때 가장 만족하시나요?

– 문화를 알리고 싶은 사람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오리지널을 찾아가 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스페인 음식을 먹었다면 ‘스페인에 가서 진짜를 먹어보고 싶다.’ 이렇게 해야죠.
보통 제 주변인들은 한국에서 한식을 경험한 후에 한국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을 가보고 싶게 만드는 것. 또는 한국에서 음식을 먹고 사람을 알고 문화와 역사를 알게 되고 한국 사람들을 훨씬 더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성공이라고 봅니다. 음식이라는 문화가 갖는 장점이죠.

| 한국에서의 생활이 길진 않았는데, 한국을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됐나요?

– 누군가를 왜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대답 못 해요. 내 와이프니까 사랑하고. 내 고향이니까 한국을 사랑한 거죠. 내가 아무리 미국 시민이어도 피가 한국사람이고 생긴 것도 그렇잖아요. 내 아들도 한국에 2주밖에 있지 않았지만, 한국사람이에요.
아마 한국에서 계속 살았으면 오히려 애정이 없었을 수도 있어요. 외국에서 늘 한국 문화를 그러워했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한국 방송 보려면 2달 걸렸어요. 비디오로 나오는 걸 봤으니까. 아마 그때부터 사랑한 것 같아요.

| 요리사로서 성공하는 기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 개인적인 성공 목표는 내 식당, ‘단지’를 여는 것이었습니다. 사장으로서 성공은 장사가 잘되는지 아닌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요리사로서의 성공은 내 요리를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있는지가 중요한 거죠. 요리사로서 자기 요리를 보여주고 돈을 번다는 게 진짜 쉽지 않아요. 자기 식당을 열지 않는 이상 어느 요리사건 자기 위에 누군가가 있게 되어있어요. 그거는 보스의 요리를 하는 거지 내 요리를 하는 건 아니거든요.

| 후배 요리사들에게 조언 부탁합니다.

-제일 중요한 거는 사고방식. 우리 식당에도 자리 구하러 많이 옵니다. 근데 대부분의 요리사가 자기가 아는 것을 보여주려고 해요. 일단 식당에 들어가면 내가 이미 배운 것은 여기랑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배우러 왔기에 가르쳐 달라고 해야 하는 거죠. 이런 사고방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뽑히고 싶은 급한 마음은 이해해요. 근데 보통 셰프들은 그런 거 잘 안 보거든요. 새로운 식당을 가면 머리를 비우고 배우면 됩니다. 스펀지처럼 말이죠. 사실 배운 것 다 머리에 남아있거든요.
식당마다 학교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 다음 스텝의 성공은 무엇일까요. 단지나 한잔을 확장할 계획이 있나요?

– 다른 식당을 또 오픈해야죠. 단지나 한잔은 콘셉트도 다르고 음식도 달라요. 단지는 5년 전의 내 이미지에요. 5년 전으로 돌아가 같은 식당을 열고 싶지 않아요. 한잔을 오픈한 이후 저도 많이 성장했거든요.
식당을 열 때 자기 자신을 보면서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누군지 식당이 보여줘야 해요. 그래서 다음 식당을 열면 단지나 한잔이 아닌 그때 모습이 담긴 음식점을 열겁니다.

 

김훈이 셰프. 그에게 요리사라는 직업은 이러하다.

“세상에 요리사처럼 행복한 일은 또 없어요. 손님이 행복해하고 ‘잘 먹고 갑니다’라고 말할 때 그간의 고생이 보상받는 느낌입니다.”

“제가 프랑스 요리에 된장을 조금 썼다고 해요. 그럼 그게 한식인가요? 프랑스 음식인가요? 사람들은 음식을 규정하려고 해요. 기존의 틀에 끼워 맞춰 이해하려고 하는 거죠.”

그 요리는 ‘ㅍ(PIEUP)’의 요리라는 설명 이외에는 불가능하다고 이상필 셰프는 말한다. ‘그럼 ㅍ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요리’라며 이미 많은 요리사가 입을 모아 말했던 진부한 모범답안을 내어놓는다. 같은 질문을 계속 던져도 명쾌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속이 답답해진다. 요리사에게 왜 자신의 색깔을 고집하는 것이 중요한지, 요리사의 독창성이 음식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증은 번진다.

그의 요리인생 13년을 듣다 보니, 그가 찾고자 하는 ‘ㅍ(PIEUP)’의 요리가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 요리사로서 전혀 남들과 다르지 않았던 경력을 가진 그가, 자신만의 요리를 찾아내기 위해 대면했던 세상은 어땠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서툴고 대책 없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또 멀고 험난할지를 걱정하며 이상필 셰프를 소개한다.

 

| 문제아 날라리, 담배 연기 사이로 요리의 길을 보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배우고 일진 친구들과 어울리던 덩치 큰 불량학생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체격 좋은 학생을 발견한 태권도 선생님은 그를 도장으로 데려가 운동을 가르쳐주며 “내가 시키는 대로 운동하면 점심만 먹고 집에 갈 수 있게 해줄게. 대회 나가서 금메달까지 따오면 학교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안 나와도 돼.”라는 말로 꼬드겨 운동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배운 운동은 주먹질로 이어졌고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하고 만다. 실제로 그 짧은 시간 안에 금메달을 따긴 했으니, 금메달을 따면 학교를 안 나와도 된다는 태권도 선생님의 약속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험하게 다루다 부상으로 이어져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학교는 그만둘 생각으로 다른 진로를 찾던 참이었다. 어느 날 밤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우는 데, 연기 사이로 요리학원 간판이 보였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격증 두 개만 있으면 대학은 간다더라.”

그 길로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요리학원에 등록했으나 난생처음으로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역량의 사람들을 만나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레시피도 안보고 저걸 다 만들지? 나랑 나이도 같은데?” 선천적인 체격의 우월함으로 다소 유리한 상황에서 타인과의 경쟁에서 매번 이겨 왔던 이 청년은 요리도 경쟁시합으로 여겼다. 속에서 화가 치밀었고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요리는 그런 전투적인 마음으로 해선 안 되는 것이라며 주변에서 만류했다. 당신은 요리에 재능이 없으니 일찍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진심 어린 충고도 들었다.

요리를 배우던 중, 가세가 기울어 학원비를 내기도 녹록지 않았다. 장롱 속 모셔두었던 금붙이를 내다 팔아 학원비를 충당했고 스무 두 살이 되도록 군대까지 미루며 한 길 요리만 팠다. 전국규모의 요리기능대회에서 수상하며 인정받을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만족감이 들었던 시절도 잠시,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이 새로운 요리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 책은 자연을 접시에 그대로 담아내는 요리사 미셸 브라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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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와 접시를 자신보다 더 아낀다는 미셸 브라의 저서 ‘Essential Cuisine’

“그 전에 배웠던 요리는 하는 법은 똑같이 정해져 있었어요. 고기는 가운데에, 가니쉬는 뒤에, 소스를 앞쪽으로 보기 좋게 흘러내리도록… 한 순간에 이런 스탠다드들이 다 깨져 버렸어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가르치지도 않는, 아니 본인도 본 적이 없는 책을 들고 다니는 학생이 달갑지 않았다. 그 책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질문만 많아지고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으니 선생님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가르치는 것이나 똑바로 하라는 호통과 함께 그 책은 물이 흥건한 주방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원래대로의 코스를 밟았다면 호텔에서 충분한 월급을 받으면서 서른에 대리를 달고 마흔에 과장을 달았겠죠. 대학교로 가서 석, 박사 코스를 밟았다면 교수가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겠죠.”

세계 무대로 진출할 꿈이 생긴 젊은 요리지망생에게 이제껏 해왔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작게만 보였다. 속으로는 자신의 큰 야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언젠가 앞지를 것이라는 독한 마음을 품고 주변에서 뭐라 하든 상관치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든 살이 되어서도 젊은 요리사들과 경합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죽기 직전의 모습까지 다 그려놓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 “저는 10년 전의 호날두입니다. 당신은 퍼거슨입니다. 저를 영입하시겠습니까? ”

2006년, 허허벌판 사막 위에 도시를 짓겠다며 전 세계의 자본이 중동으로 투자되던 시점이었기에 호텔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도 급격히 늘었다. 중동의 한 호텔에서 한국인 요리사를 8명 채용한다는 공고가 떴고, 한국인 요리사 50명이 단체로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한국인 요리사 50명은 면접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대기하는 중이다. 하나같이 정장을 빼어 입었는데 마지막 번호를 받은 지원자는 급하게 온 것을 티라도 내려는 것인지 혼자 조리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서야 선배의 추천을 받아 잠시 외출 나온 것이라고 변명한다.

모든 지원자에게 간단한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에 이 마지막 번호를 받은 지원자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청년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기본 조건인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대답은커녕 질문도 이해하지 못해 기회가 물 건너가는 듯했다. 이 청년은 대답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 외치며 한 층을 떠들썩하게 돌아다닌 후 급조한 통역관을 통해 다짜고짜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저는 10년 전의 호날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퍼거슨입니다. 지금 저를 사면 싸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년 뒤에? 아무도 나를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할걸?”

그렇게 이상필 셰프가 처음 해외로 떠난 곳이 중동 카타르의 리츠칼튼 호텔이다. 배짱 좋게 뱉은 말과 강렬한 눈빛으로 면접관을 사로잡아 해외의 주방에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생각만큼 만만하진 않았다.

타지에서는 모든 것이 서툴고 힘들었다. 견습생이란 언제나 불려다니기에 바쁜 인력이어서, 담배를 필 짬이 잠시라도 생기면 밀렸던 담배와 앞으로 못 피게 될 것까지 감안해 3~4까치를 줄줄이 태웠다. 그의 승부욕은 화를 불렀다. 견습생 사이에서 지기 싫어하는 독한 녀석으로 인식이 굳었다. 겉으로는 씩씩한 척을 했지만, 숙소에 돌아오면 외로움에 못 이겨 혼자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다.

“매일같이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루하루 참으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새 휴일이 찾아오고, 그러다 한, 두 달씩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걸 깨닫는 거죠. 어차피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배우는 것이라도 제대로 배워가자는 마음에 노트를 사서 채워 넣기 시작했어요.”

중동 카타르 리츠칼튼 호텔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상필 셰프

중동 카타르 리츠칼튼 호텔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이상필 셰프

그런데도 밀려 들어오는 주문을 빼내는 데에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말로 이해가 안되면 그림으로 그려서 이해했다. 모든 메뉴를 그려넣고 아이디어 스케치와 레시피를 뒤죽박죽 섞으며 노트를 채워나갔다. 요리사는 기본기가 충실해야 한다는 정석적인 배움을 받아들이고 수련의 시간으로 여겼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프랑스 주방으로 들어가 굳은 일을 뺏어 맡으며 프랑스 요리의 기본기도 수련했다.

 

| 멘토이자 인생 동반자로 세계적인 셰프 상훈 뒤샹브르를 지목하다.

그가 ‘ㅍ’PIEUP(피읖) 이라는 특이한 아이콘을 가지게 된 데에는 상훈 뒤샹브르(Sang hoon deguimbre)의 영향이 컸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셰프로 꼽는 상훈 뒤샹브르는 한국인이지만 벨기에에서 자랐고 레르 뒤 땅(L’air Du Temps)의 셰프이다. 둘의 첫 만남은 2011년이었다. 서울고메의 연사자로 초청받은 상훈 뒤샹브르가 한국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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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뒤샹브르 셰프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으나 5살에 벨기에로 입양되어 세계적인 요리사가 되었다. 미슐랭 별 둘을 받은 식당(L ‘Air du Temps)을 운영한다.

이상필 셰프는 오래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고집이 분명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자신의 요리를 꿋꿋이 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요리에 자신의 고집을 부릴 수 있다니, 새로운 관점이었다. 동질감을 느꼈고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깟게 뭔데 세계적인 요리사와 동질감이 드네 마네야? 그 사람은 너를 알지도 못하잖아.”

동료의 비아냥거림을 한 귀로 흘려 듣고 주방에 사정해서 조퇴한 후 행사장을 찾았다. 운 좋게도 5분의 시간을 얻어 한 잔의 커피를 대접할 수 있었다. 요리사진과 포트폴리오가 들어있는 USB와 이력서를 건넸다. 짧은 시간 동안 친절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내고 싶었어요. 선망하던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영상으로 본 그 사람이 내가 그리던 사람이 맞는지, 5분 동안 받은 느낌이 사실과 다름없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근무하던 호텔주방으로 돌아와 대책없이 사표를 던졌다. 상훈 뒤샹브르 셰프는 아무런 답을 주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사표를 던져버렸다. 뒤늦게 답장이 돌아왔다.

“비자는 못 내준다. 여행자 보험을 들려면 네가 알아서 내라. 법적으로 따지면 무허가노동이니 돈도 줄 수 없다. 대신 레스토랑 위에 있는 작은 방은 내어 줄 수 있다. 정 오고 싶으면 와라.”

무턱대고 다시 올라탄 두 번째 외국행 비행기,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낯선 땅에 발을 디뎠고 공항에는 상훈 셰프가 마중 나와 있었다. 단 5분간의 만남이 전부였던 견습생을 배웅하기 위해 세계적인 셰프가 마중을 나오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따뜻한 포옹 뒤에 헤드셰프가 핸들을 잡은 자동차의 조수석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시내로 향했다. 한 시간쯤 지나 도착한 곳은 숙소가 아닌 주방이었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겠다고 하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뜸 앞치마와 칼 한 자루를 던져 주는 게 아닌가. 이내 레시피가 적힌 종이도 던져졌다. “30분” 별다른 설명도 없이 미션은 시작되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배웅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 쓸만한 녀석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데려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시험에서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3개월 동안 레르 뒤 땅에서 일할 수 있었죠. 그저 동질감을 느끼고 선망하던 셰프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자신의 색을 찾기 위해 떠난 여정은 쉽지 않았다. 요리학원 선생님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이 내던졌을 때부터 타지의 고향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 견습생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밤낮으로 경쟁할 때까지 쉽지 않았다.

“저는 쭉 왕따였어요. 카타르에서 일할 때에도 동양인인데다 영어도 잘 못했기 때문에 주방에서 일만 죽어라 했었는데 여기서도 팀원들과 친해질 겨를은 없었어요. 배우러 왔는데 주방에서 일하다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이 훌쩍 가잖아요?”

경쟁심에 긴장감이 맴돌던 팀원들과 함께 친해질 수 있었더 계기는 풋살 경기에서 첫 골을 넣었을 때였다. 처음으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환호했다. 인간적인 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던 주방에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타인의 체온, 그 때 머리 속에 들었던 생각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오늘 오후에 장사 진짜 즐겁게 할 수 있겠구나.”

벨기에 레르 뒤 땅 근무시절의 이상필 셰프와 그의 멘토 상훈 뒤샹브르

벨기에 레르 뒤 땅 근무시절의 이상필 셰프와 그의 멘토 상훈 뒤샹브르

벨기에의 3개월 체류 기간 무임금 스타지 생활의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그는 사진을 한 장 남겼다. 돈을 챙겨주지 못했으니 책이라도 한 권 준다며 상훈 뒤샹브르 셰프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 2권 중 한 권을 이상필 셰프에게 선물했다. 셰프에게 직접 책을 선물 받은 사람은 아마 자신이 처음일 것이라며 뿌듯해 한다.

그리고 셰프에게 CDP(Chef De Party)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는 추천서를 받았다. 이후 자신의 요리를 찾기 위해 한국의 호텔과 레스토랑, 싱가포르의 조엘 로부숑(Joel Robuchon)과 잔(Jaan)을 거쳐 여정을 계속 이었다. 32살까지 배움을 목적으로 스타지 여행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자금 부족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온 때가 올해 1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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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의 요리 색을 찾다. ㅍ(PIEUP) 다이닝의 시작

이상필 셰프는 자신만의 요리를 설명할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 ‘ㅍ(PIEUP)’이라는 신조어를 붙인다.

“제 요리를 본 사람들은 꼭 이 이야기를 해요. 어디선가 너의 냄새가 난다. 그것이 뭔지를 잘 설명하진 못하더라도 저만의 특별한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거예요.”

팝업 레스토랑 ㅍ(PIEUP) 의 요리들

팝업 레스토랑 ㅍ(PIEUP) 의 요리들

이상필 셰프는 84년생 쥐띠, 올해 32살이다. 2015년 한 해도 스타지 투어를 할 계획이었으나 인연이 닿아 3~4월 두 달간 서대문구 부암동의 ILOT에서 자신의 이니셜 ‘ㅍ(PIEUP)’ 을 내건 팝업 레스토랑을 선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요리를 선보이는 이상필 셰프의 각오는 가볍지 않다.

“내가 제일 기본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각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있잖아요? 이탈리아 음식이 최고라거나, 부모님이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는 등. 저는 제가 한 요리가 제일 맛있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선보인다는 것은 곧 ‘손님만족에 깃댄 자기만족’이라고 표현한다.

이상필 셰프가 요리를 만들 때 중요시하는 것 중 가장 우선 적인 세 가지는 ‘맛있을 것’, ‘손님을 배려할 것’, ‘놀라움을 선사할 것’이다. 다이닝 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한국에서 두, 세 번째의 조건이 9가지 요리가 나오는 코스요리를 먹는 경험의 가치를 설명해줄 수 있을 듯하다.

“많은 사람이 좋은 음식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식재료의 맛을 잘 살려야 한다는 것을 꼽아요. 식재료의 맛을 가장 잘 살리려면 식재료를 그냥 날것으로 먹으면 돼죠. 요리사는 재료의 본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식재료의 맛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죠.”

이상필 셰프는 2월 중순부터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팝업레스토랑을 준비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한계를 맞닥뜨렸다. 9가지 코스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엔 하나의 기성품도 쓰지 않았고, 도움받을 유통업자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불은 2개밖에 없었고 접시를 데울 워머가 없어 피자 굽던 화덕으로 접시를 데운다. 7명이 모인 팀원은 불과 2주 만에 4명의 핵심멤버만 남았다. 한계는 계속 맞닥뜨리는 것이며 자신은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피자 굽던 화덕을 접시 워머로 쓴다 (좌) / 9코스 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는 모두 100여 가지가 넘는다 (우)

피자 굽던 화덕을 접시 워머로 쓴다 (좌) / 9코스 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는 모두 100여 가지가 넘는다 (우)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흔치 않다고 생각해요.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도요. 저는 치열하게 기본기를 닦았고, 또 저만의 색깔을 찾아 나가고 있어요. 앞으로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요리하고 싶어요”.

담배 연기 사이로 요리학원 간판을 보며 급히 시작한 요리였지만 어느새 그 각오와 목표는 세계 수준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세상도 5년 이내로 ‘ㅍ(PIEUP)’을 인정하고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호언장담에는 가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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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스토랑 ㅍ(PIEUP)

– 페이스북 : https://www.facebook.com/pages/Restaurant-by-ㅍ-PIEUP/1629948817234014
– 전화: 010-3391-8139, 02-379-4003

지난 16일 발행된 박찬일 셰프의 칼럼 ‘해외유학 가야하나, 말아야하나(바로가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것이었다.

“이왕 요리 유학을 가겠다면 디저트를 전공하라. 한국의 양식당 사회에서 빵과 과자는 저평가되어있다.  빵과 과자도 고급식당의 시스템에 맞게 실력을 갖춘 이는 아주 드물다. 즉, 테이블로 서빙하는 디저트는 봉지에 넣어 판매하는 빵 과자와는 다르다. 서양의 최고급 식당은 이 분야의 실력자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다. 식당의 품격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과연 한국의 디저트문화는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세프뉴스는 페스트리 셰프로 활동하고 있거나 경력을 준비하고 있는 네 명의 젊은이를 불러 모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은호(이하 ) 반갑습니다. 바쁜 와중에도 참여해 주신 점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번에 여러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눌 셰프뉴스의 이은호입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눠볼 이야기는 페스트리 셰프에 대한 전체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현재 하는 일에 대한 부분과 앞으로 전문적인 요리사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내용, 한국에서 페스트리 셰프로 남기 위한 이야기 등을 솔직하게 나눠보길 바랍니다. 우선, 자기소개 부탁하겠습니다.

박준완 (이하 ) 현재 페이스북에서 ‘도와줘요 달쉐프’ 페이지를 운영하고 있고요, 아프리카티비(Afreeca Tv)에서도 디저트 방송을 하는 중이에요. 나이는 27세이고요. 요리를 한 지는 6년이 되었고, 페스트리를 시작한 지는 3년 정도 된 거 같네요. 호주에서 일하다가 올해 7월에 들어왔어요. 원래 건축과 학생이었는데 웨이터로 일하다가 주방에 자리가 비어서 일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요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서승덕 (이하 ) 24살입니다. ‘화수목’이라는 업장에서 장진모 셰프와 일했었습니다. 현재는 내년에 오픈할 레스토랑 작업에 참여하고 있어요. 저도 건축을 전공했다가 1년 뒤 요리학과로 넘어왔습니다.

윤아영 (이하 ) 요리를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된 것 같아요. 물론 처음에는 요리할 생각이 없었는데, 요리학원에 다니고, 이태원 업장에 나가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미술을 전공했는데, 입시를 준비하면서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던 미술을 접고, 조리학과로 입학하게 됐습니다.

류영희 (이하 ) 요리를 시작한 지는 3년 정도 됐어요. 예전에 일하던 업장에서는 다이닝 코스도 길고 페스트리 파트도 따로 두는 곳이었는데 당시 자리가 비어서 일을 시작했어요. 그때부터 디저트 분야를 맡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후 지금 일하는 TocToc에서도 디저트를 주로 맡아서 일하게 됐습니다.

 

우선 용어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요. 디저트 셰프, 파티셰, 페스트리 셰프 등 여러 가지로 쓰이는 데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할까요?

보통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파티셰로 이야기하자면 빵을 만드는 블랑제(boulage), 초콜릿을 다루면 쇼콜라티에(chocolatier), 아이스크림 등 차가운 음식은 글라시에(glacier) 등으로 나눠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파티셰들이 다 하는 일이죠. 저 같은 경우에는 빵은 잘 못 해요(웃음).

 

| 디저트를 다루게 된 계기

다들 어떤 계기로 지금의 일을 하게 됐나요?

건축을 전공했지만, 양식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업장에 웨이터로 일하다가 주방에 자리가 생기자 요리에 흥미를 느꼈고, 돈을 모아 호주로 가서 배울 생각을 했습니다. 호주에 르 꼬르동 블르(Le Cordon Bleu)가 있다는 걸 알고 갔습니다. 뭐 영어도 안되는 상황이니, 주방 청소부터 했죠. 근데 처음에 간 업장에서 페스트리 셰프를 한국분이 하고 있더라고요. 그분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자연히 관심도 생기고 자리가 생겨서 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원래 단것도 좋아했고요. (웃음)

건축학과를 전공했었어요. 사실 지금 일을 하기 전에 마술도 했었고, 여러 가지 했었는데 재미를 못 느끼면서 학교만 다니다가 2년 동안 파스타 집에서 일했던 경험도 있네요. 2년 후에 학교에 복학했는데, 그때 학교에 강사로 오신 분이 지금 롯데호텔의 제과장으로 계신 분이셨어요. 그때 존경하던 셰프님들을 봤을 때 느껴지는 아우라를 처음으로 경험했죠. 아시잖아요? (웃음) 이후 2년 반 동안 마카롱을 만들면서 여러 가지 디저트를 공부했어요. 그러던 차에 우연히 ‘화수목’이라는 업장에서 페스트리 파트를 맡게 됐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요리를 한 건 아니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미술을 했었는데, 입시를 준비하면서 흥미를 잃었어요. 마침 집 근처에 요리학원이 딱 생기더라고요. 예전부터 만드는 걸 좋아하다가 한번 다녀볼까 해서, 다녔는데 조리학과로 진학하게 됐어요. 업장에서의 경험이 많은 건 아니에요. 이태원 레스토랑에서도 일해보고 했지만, 제과제빵에 더 흥미를 느껴서 지금 업장(Dessertree)에서 1년 가까이 일하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고2 때까지 공부를 엄청나게 열심히 했어요. (웃음) 근데 열심히 했지만, 공부만 하기는 싫었어요. 대학을 남들과 똑같이 다니고 졸업하는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아빠가 원래 식당과 레스토랑을 운영하셨고, 주방에서 일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조리 과를 가기로 마음을 먹고 전문학교에서 서양조리 과를 전공했어요. 2년 다니다가 취업을 해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원래 디저트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컬리나리아(culinaria 12538)에 자리가 생겨 콜드파트에서 일하게 됐어요. 이후에 톡톡(TocToc)이라는 레스토랑이 오픈한 지 2주 정도 됐을 때 셰프님의 블로그를 통해서 열정을 봤고, 바로 자리 있는지 물어보고 면접을 통해 일하게 됐습니다.

 

| 페스트리 셰프만의 차별성

그렇군요. 다들 나름의 계기가 있었고, 현재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네요.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들이 일하는 다이닝에서 만들어지는 디저트와 디저트 전문점에서 만들어지는 제품과의 차별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플레이팅 된 케이크도 원래 단품에서 시작된 거잖아요? 다이닝에서 나오는 케이크이나 카페에서 파는 케이크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다이닝에서는 ‘케이크를 플레이트 위에 해체한다’고 말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네요. 어울리는 소스와 같이 나가느냐의 차이로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서 케이크에 들어가는 재료가 많이 있는데 보통 디저트 플레이팅을 할 때는 그것을 다 분해해서 먹기 좋고 예쁘게 하는 방식으로 나가는 게 다르다고 생각해요.

 페스트리셰프의 포지션을 따로 두는 곳이 한국에서는 많이 없다고 들었어요. 코스로 제공되는 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디저트가 식사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야 해서 어느 정도의 디저트 물량이 정해져 있잖아요? 하지만 단품으로 판매하는 레스토랑에서는 판매되는 양을 예측하기가 어려워서 디저트 종류도 많이 늘리지 못해요. 그런 상황에서 빵하고 디저트만 만든다면 오픈 전에 물량을 맞추긴 쉽거든요, 다른 포지션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일의 양이 적은 거죠. 그러면 남는 시간에 주방에서 다른 파트의 일을 도와 주워야 하는 게 한국 레스토랑의 현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른 포지션보다 멀티 플레이가 요구되는 것 같아요. 나중에 경력을 쌓아 다른 업장에서 일하게 될 때에도 페스트리 파트만 두는 곳은 없어서, 다른 파트의 일도 할 줄 알아야 할 텐데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되겠죠.

외국도 사실 비슷해요. 알라카르트(à la carte) 같은 경우도 주문이 들어오는 경우 바로 내줘야 해서 포지션이 있어야 하지만, 디저트 셰프들은 준비시간 이후에는 할 게 없어요. 그래서 가운데 비는 시간에는 주방으로 나가서 도와줘야 합니다. 실제로 다른 주방일도 할 줄 아느냐고 물어보는 보스들도 많고요.

멀티가 돼야 하는구나(웃음)

 

| 우리나라에서의 페스트리 셰프

이전에 박찬일 셰프님이 셰프뉴스에 기고하신 글이 있는데, 말미에 조언을 하셨어요. 그중에 ‘한식을 하라’, 그리고 ‘디저트를 하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연계해서 우리나라 실정에 대해 더 얘기해볼까요.

제가 일하는 디저트리는 디저트 레스토랑이고 할 수 있어요. 명함에도 ‘Gastronomic Dessert’라고 적혀 있어요. 손님들 중에는 디저트 카페인줄로 오해하고 찾아오는 분들이 많아요. 일반적인 카페는 음료가 주가 되고 머핀이나 빵이 곁들어지는 형태잖아요? 근데 우리는 디저트를 전문적으로 하는 샵이라서 음료는 주된 메뉴가 아니에요. 그리고 예전과 달리 디저트가 각광을 받으면서 디저트 자체가 주목되고 있는 느낌이에요. 남자분들이 혼자서 찾아오는 경우도 늘고 있어요.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식사하고 나서도 따로 디저트를 위해 찾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어요. 정말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네, 많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요. 확실히 3년 전이랑 다르게 변하고 있어요.

업장이 많이 변하지 않고 있는 점에 공감이 되는 것 같아요. 디저트리(Dessertree) 같은 경우는 디저트를 주로 하니까 잘 갖춰진 면이 많자나요? 파코젯라는 장비도 있고, 오븐도 많고. 근데 아직 오븐이나 장비가 갖춰지지 않은 업장이 많은 것 같아요. 페스트리만을 위한 주방이나 구조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거죠.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머랭을 말리려고 오븐을 쓰던 중에 메인 요리 주문이 들어오면 바로 머랭을 빼고 오븐을 양보해야 했었어요.

근데 이제 조금씩 업장에서도 변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정식당도 이번에 리뉴얼하면서 그 구조를 갖췄다고 하더라고요. 박찬일 셰프님의 말처럼 디저트 셰프들이 전문화된 분야로 인정받고 더 확장되는 분위기는 느낍니다.

근데 우리 디저트 시장이 작을 뿐이지 일하는 사람들의 실력은 뛰어나거든요? 해외에서 대회를 열면 항상 상위권에 랭크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다들 외국으로 나가서 일하고 있어요.

맞아요. 우리나라에 잘하는 분들이 진짜 많은 것 같아요. 근데 사실 그런 분들이 와서 일할 곳이 많지는 않아요. 그래서 외국 나가서 일하고 그러더라고요. 좋고 안 좋기의 문제라기보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무래도 문화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아직 우리는 한 상 문화이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같아요. 근데 우리는 한번 커지기 시작하면 빨리 크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마카롱 같은 경우도 그랬고, 에클레어(Eclair)도 최근에 유행이 잘되고 있잖아요.

 

| 페스트리 셰프의 허와 실

아무래도 외국 문화다 보니 국내에 정착되면서 변하는 게 있겠죠? 실제 파티셰 모습과 비치는 모습과의 차이가 좀 있나요?

친구 중에 한 명이 제가 템퍼링(Tempering : 온도조절을 통해 카카오 버터 안에 들어 있는 지방산들을 서로 붙여 결정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 이런 말을 했어요. “어묵 만드는 일하고 뭐가 다르냐”고. 정곡을 찌른거죠.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하게 보일 뿐이에요.

맞아요. 힘들어요. 여자 같은 경우에는 환상이 많은 것 같아요. 뭔가 아기자기하고 예뻐 보이고 쉽게 보이거든요. 특히 제가 일하는 곳은 오픈되어서 처음 보면 쉽게 보여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손님들이 보는 1층에서는 예쁘게 플레이팅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진짜 작업은 지하 작업장에서 하거든요.

그거는 보여주기 위한 쇼-베이킹(show- baking)이죠. 뒤에서는 밀가루 포대 나르면서 땀흘리는데(웃음)

낑낑대면서 설탕 옮기고, (웃음) 근데 디저트를 시작하면서 느꼈지만 정말 위험한 작업들이 꽤 있거든요? 특히 카라멜라이징을 되게 많이 하거든요. 온도가 180℃ 정도 되는 설탕은 뜨거운 물에 데는 것과 달라요. 물에 적시면 안 되고 바로 병원에 가야 돼요. 잘못하면 피부에 완전히 달라붙거든요.

진짜 위험하죠. 예전에 같이 일하던 헤드셰프가 실수로 녹여놓은 설탕을 물인 줄 알고 옮기다가 손에 쏟았어요. 그래서 손 전부에 화상을 입은 것도 봤어요.

일반인이 갖는 환상 때문에 주방을 소재로한 드라마를 잘 안 보는 편이에요. 말한 것처럼 위험한 작업이라든지, 힘든 일을 처리하는 건 안 나오잖아요. 게다가 여자 한 명에 다 남잔데, 다 키도 크고 잘생긴 줄 안다는 거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 (웃음)

 

| 어떻게 해야 좋은 페스트리 셰프가 될 수 있는가?

좋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좋은 페스트리 셰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제 막 시작하는 여러분이 현장에서 느꼈던 바를 기초로 이야기 해 볼까요?

저는 좋은 셰프가 되는 것과 일을 잘하는 셰프가 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유명한 디저트 셰프들도 나눠보면 만능으로 모든 디저트를 다 잘 다루는 분이 있는 반면에 레스트랑 안에서 메뉴 구성 같은 자신만의 철학을 잘 담아내는 셰프도 있잖아요. 어떤 셰프가 되고 싶은지 먼저 기준을 잘 선택해야 할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다른 셰프님과 얘기를 하는게, 디저트만 하던 데서 일하던 분이 레스토랑에서 일해도 잘할 거라 봐요. 비록 완성도가 높진 않지만, 일반적으로 디저트 전반을 다룰 줄 알고 난 이후에 다름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또 장기적으로 생각해보면 레스토랑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몸값을 올린다는 개념으로. 홀에서도 일해보는 식으로 말이죠.

그래서 앞에서 말씀하신 다른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앞으로 더욱 전문적이고 차별적인 페스트리 셰프가 되려면 다른 식재료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죠. 더욱이 요즘에는 식재료에 대한 경계가 뚜렷하게 갈리는 것 같진 않아요. 그래서 디저트를 한다고 한정된 식재료만 사용하는 시대는 지난 것 같아요.

 다른 요리를 알아야 한다는 의견에는 공감하지만 디저트 셰프가 되고 싶다면 일단은 혼자서 해보고 연구해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일단 디저트를 다루는 식재료 종류가 많잖아요? 설탕이나 소금이 그렇고, 소스도 그렇고요. 알면 알수록 할 게 많은데, 그런 부분들은 그냥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배워가야 할 부분이겠죠.

네. 이 정도로 모든 대화는 마무리하겠습니다. 참여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에 멋진 활약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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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 이은호

패널

박준완 – 아프리카tv와 페이스북 채널(도와줘요 달셰프) 운영
윤아영 – Dessertree 소속
류영희 – TocToc 소속
서승덕 – 전)화수목 소속, 레스토랑 오픈 준비

정리/사진 이인규

 

아주 오래 전, 원시 인류에게 식사라는 행위는 생명을 연명하기 위한 영양소 섭취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 인류에게는 하루 세 끼의 식사가 정기적으로 이뤄지면서 의식이자 생활로 자리잡았다. 이를 넘어서서 식사는 자기만족을 위한 사치이자 문화적인 활동으로, 예술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요리가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음식은 그저 먹고 맛만 있으면 된다는 주의가 한국에선 더욱 다수의 지지를 얻을 것이다. 다른 예술 작품도 많은데 왜 음식으로까지 예술을 해야 하냐며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의견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고 드는 것은 아니다. 이찬오 셰프의 요리를 보면 그런 생각이 한 풀 꺽일 것을 알기에 그저 그의 화려한 음식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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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_Shore 2_Morning6_Hope 7_Springrain

이런 작품들이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훑어 내리고 있자면 마치 미술관에 온 느낌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요리-예술작품에 댓글로 자신의 감상평을 올려 공유한다.

수려한 외모에 화려한 경력, 비쥬얼 좋은 그의 요리들, 대중 매체를 통해 그는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포장되어야 할 사람보다는 오히려 포장지를 벗겨버려야 할 사람이다. 그 화려함 뒤에 영글어 있는 고독한 영혼, 무쇠의 뿔처럼 강인했던 사나이의 인내, 세상 풍파를 다 헤치며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간 백전노장(百戰老將) 이찬오 셰프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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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각적인 충격이 그를 요리로 이끌다.

이찬오 셰프를 요리사나 예술가로 소개하고 싶지만 누구나 그를 처음 만나면 운동선수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떡 벌어진 어깨에 넓은 이마, 큰 입과 호탕한 웃음. 테스토스테론 충만해 보이는 이 남자는 수영을 하던 운동선수였고 18살에 호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진 요리와는 전혀 친분도 없던 사람이었다. 집안에 손을 벌리기가 싫어 생활비를 벌겠다며 접시를 닦기 시작한 게 식당과 맺은 첫 인연이었다. 몇 년을 주방 일손으로 보냈으나 요리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집세를 못 내서 쫓겨났던 적이 있어요. 헤드 셰프의 집에서 일주일 정도 얹혀 살았거든요. 집안에 요리책이 많길래 한 권 꺼내 들었는데, 아! 충격이 어마어마한거에요. 찰리 트로터(Charlie Trotter)의 책이었어요. 그 시각적인 경험은 평생에서 가장 충격적이었어요. 요리가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구나!”

그 때 나이 21살, 책 한 권을 펼침으로 인생의 출발점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다음 날 출근길에 공원에 들려 휴대폰을 멀리 집어 던졌다. 자신의 결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피곤하게 속박하는 사람이었다.

“전 그냥 요리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책 보고 하루 종일 요리하다가 저녁에 다시 책보면서 잠들었으니까요. 인생에 빈틈이 없이 요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어요. 요리, 요리, 요리, 요리, 요리. 일주일에 침대에서 잔 날이 한 번도 없었어요. 만날 소파에서 책 보다 잠드니까.”

그 당시 이찬오 셰프가 받았던 돈은 1주일에 700불, 방세와 식비, 교통비를 빼면 300불이 남았다. 거기서 책을 두 권 사면 100불이 남는다. 그 돈을 두 번 모아,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식사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식당으로 출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요리책을 보다 잠이 든다. 휴대폰도 없이 이 생활을 4년 했다.

“호주에서는 실력이 있으면 인정 받아요. 저는 또 운동을 한 사람이잖아요. 그 때는 체력이 지금보다 더 좋았거든요? 제가 남들보다 단 한 가지도 꿇리지 않는 거에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제가 휘어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어요.”

세 번째 식당이었던 펠로(PELLO)에 들어가면서 수셰프(Sous Chef)가 되었으나 이내 펠로가 새로운 지점을 열게 되면서 새 지점의 헤드셰프(Head Chef)까지 오르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요리를 시작한 지 불과 만 3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휘하에 13명의 요리사를 거느렸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매일 같이 자신이 만들고 싶은 파격적인 메뉴를 진두지휘했다.

 

| 프랑스 정통 요리를 배우다.

4년의 전력질주 후에도 그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돈을 조금 더 벌긴 했으나 모인 돈은 없었다. 남는 돈이 있으면 더 좋은 파인다이닝 식당을 찾아 밥을 먹는데 쓰는 사람이었다.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뭐, 그냥 그렇네”, “이건 나도 하겠네” 정도로 평가하고 다녔었는데, 시드니에 있는 빌슨스(Bilson’s)라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완전 깨졌어요. SMH 모자3개(호주의 미슐랭) 받은 곳이었는데, 그 때의 충격이 찰리 트로터 책만큼이나 충격적이었어요.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음식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는 거 있죠.”

한 권의 책이, 한 접시의 요리가 얼마나 큰 충격을 줄 수 있는지 필자와 같은 일반인이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거나 위엄이 넘치는 그 한 접시 요리가 그의 인생에 기로가 되었고, 그 접시 앞에서 ‘프랑스에 가서 정통 파인다이닝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번에도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바로 다음 주부터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카페로 출근한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피곤하게 속박하는 사람이었다.

“호주는 기본 시급이 세잖아요. 한 시간 일하면 17불 벌 수 있거든요? 아침 6시부터 11시까지 브런치 카페에서 계란 굽고 빵 굽다가 조리복 입은 채로 버스타고 제 식당으로 12시까지 출근하는 거죠. 6개월 동안.”

살 책을 안 사고 먹을 음식을 안 먹으며 돈을 모으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프랑스 땅에 도착했으나 호주에서의 경력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24살 어린 나이에 헤드셰프라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청년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고, 어렵게 Comis Chef(영어권에서는 Apprentice에 해당하는 최하위 직급)로 들어가게 된다.

“구시대적인 방식이죠.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요. 식당 용어로는 브레이크다운(Break-Down)이라 부르는 건데, 저도 제 후배들이 백지 상태가 아니면 가르쳐주기 싫거든요. 아니, 가르쳐주려고 해도 다른 색을 입혀줄 수가 없어요.”

배움을 위해 갔던 것이니 직급이 낮아진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매번 자신의 생각을 담아 창작 요리를 하던 사람이 그 폭발적인 욕구를 잠재우고 살아야 하는 것이 더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이 식당에서 미치광이(그의 표현을 빌어) 셰프의 히스테리와 신경질적인 성격을 버텨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찬오 셰프를 제외하곤 모든 스태프는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됐다. 자연스럽게 빈 자리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불려나갔고 주방의 중심 역할에 가까워졌다. 1년이 되는 날 셰프는 이찬오 셰프에게 제안한다. “수셰프로 들어와라.”

“모든 것이 보상 되는 시점이었어요. 그 동안 악으로 독으로 버텼어요. 하루에 최소 16시간씩 일하고 돈도 없어서 거지같이 살았는데, 프랑스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었어요. 프랑스까지 왔는데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잖아요. 그게 드디어 증명된거죠. 해냈다!”

그는 이 1년의 기간이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증오의 시간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시간만큼 요리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시간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정통 프랑스 요리의 원칙을 배울 수 있었던 배움의 시간,
공든탑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기를 수 차례 반복한 수행의 시간,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수 백 번 각오를 다잡으며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해 낸 인내의 시간.

 

| 마라톤 코스를 전력질주하기, 완주 후 쉼 없이 다시 달리기.

이찬오 셰프의 과감하고 성급한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듣는 사람의 숨이 다 가빠질 정도다. 마치 42.195Km의 마라톤 코스를 100m 달리기 하듯이 전력질주 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제서야 마라톤 코스의 마지막에 다다랐구나 싶을 때쯤, 새로운 달리기가 또 시작된다.

수셰프로 와달라는 제안을 보기 좋게 거절하고 향한 곳은 네덜란드의 헤이그(Hague). 요리사 친구가 있어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그 도시에 들렸다. 5년의 긴 요리 인생도 되돌아볼 겸, 곧 군대도 가야 하니 휴식을 할 참이었다. 마음속의 로망이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가보고 유럽의 파인다이닝 식당 투어나 해볼 참이었다.

“스타타그(Statig)! 도착해서 시내 구경 하고 있었는데 스타타그라는 레스토랑에 셰프 구한다고 써있는 거에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아무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 장소가 꽂힐 때도 있잖아요. 문 열고 들어갔다가 그 날부터 바로 헤드 셰프로 일하게 됐어요.”

1년 동안 억눌렸던 창작욕구를 마음껏 터뜨렸고, 아시안-프렌치 요리로 매일 같이 파격적인 메뉴를 선보였다. 네덜란드 현지 사람들이 맛보지 못했던 식재료도 등장했다. 불고기 양념, 미역, 미소된장. 이찬오 셰프는 6개월 만에 헤이그에서 선정한 TOP20 레스토랑 반열에 스타타그의 이름을 올려놓는다.

“마누(이찬오 셰프의 영어이름)는 모짜르트 같이 요리하는 사람”

“누구의 요리도 마누의 것이 아니며, 마누의 요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비평가들의 극찬이 끊이지가 않았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리뷰를 받는다는 만족감이 컸다. 지난 5년 동안의 모든 고생이 보상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악바리처럼 살았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답했다.

“나와의 싸움이고, 내가 기대하던 싸움이었어요. 제가 동경하던 사람들을 목표로 세우고 닮거나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거에요. 고든 램지를 닮고 싶은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코 피어 화이트는 33살에 처음으로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고 하던데 나도 33살에 미슐랭 받아야지. 마코도 했는데 마누가 못할 건 뭐 있냐고.”

참 피곤한 삶의 방식임을 본인도 인정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에 불만족하는 것, 끊임없이 더 높은 목표를 새로 세우는 것,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어떤 힘든 상황도 이겨내고 마라톤 코스를 전력질주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 순수함을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

로네펠트 티하우스의 정원에 들어서면 입구가 어디인지 찾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 편에 보이는 건물의 기괴한 분위기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2층의 식당이 나온다. 1층은 이찬오 셰프가 작업실로 쓰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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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실을 보면 비로소 이찬오 셰프의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토록 험난하고 역경 가득했던 요리 인생을 산 이찬오 셰프가 지금과 같이 정갈하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된다.

지금의 이찬오 셰프의 삶은 예전처럼 그렇게 요리로 가득 차있지는 않다. “이제는 좀 일주일에 3일만 일하고 싶어요.”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지만 그 속에는 삶의 여백을 음악과 예술로 채우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아버지는 조각가, 어머니는 재단사, 동생은 보석세공사, 그리고 예술을 하는 친구들이 항상 옆에 있었다. 빈틈없이 빡빡했던 요리 인생 아래에도 예술이라는 문화적인 코드가 깊이 깔려있었고 그의 요리에 꾸준히 베어 나오고 있다.

“요리를 통해서 요리의 영감을 받으면 결국 요리로 결론지어져요. 요리, 요리, 요리, 계속 맴돌 뿐이라 생각해요. 제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그냥 요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영감 받으려고 해요. 미술, 음악, 패션, 색채, 일상, 사건 등에서 영감을 받아서 요리를 하게 되면 결과물이 달라요. 그래서 요즘은 무의미한 요리 공부는 안 하려고 해요.”

그럼과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것은 ‘순수’라는 감성이라고 한다. 순수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절제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아 항상 마음을 훈련한다고 한다. 그가 요리를 시작하게 된 것이 화려한 요리의 인상이라는 출발역이었다면 종착역은 조금 다른 듯 하다.

 

| 기억으로의 식사, 그것의 극대화

10383829_332439513579660_8193658162488249903_o“파인 다이닝은 그냥 배 채우려고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좋은 시간을 보내거나 특별한 날을 축하하기 위해서 간단 말이에요. 그 시간에 걸맞는 음식이 있어야 하거든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수프나 파스타를 먹어야 할 게 아니라, 그 특별한 시간을 강렬하게 기억에 남길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한 거에요.”

그는 기억에 강렬하게 오랫동안 남길 수 있는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음식 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 분위기, 음악, 개인적으로 가지는 식사의 의미 등등이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상상에 빠지듯이 음식을 보면서도 상상할 수 있잖아요? 맛과 향, 분위기, 특별한 시간이라는 요소들이 더해지면 감정이 극대화되는 거에요.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거죠. 왜 특별한 음식을 먹은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랑 주변 사람들과 나눈 대화, 그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이 떠오르는 거.”

음식의 본질은 먹어서 없애는 것이고 기억의 본질은 오랫동안 남는 것이다. 이찬오 셰프의 요리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자 하는 음식이다.

요리사라는 사람들은 본디 창조하는 것을 좋아한다. 짧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탄생시키고 즉각적인 결과를 보는 것, 이 작업을 하루에 수십 번 반복하는 요리사는 예술가와 닮은 점이 많이 있다. 창작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 끝나지 않은 그의 달리기, 또 한번의 마라톤을 준비하며

그는 한국의 다이닝 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비 성향이 달라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파인 다이닝이 무엇인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 그 이유다.

“일식집 최고급 코스 60만원짜리를 먹으면 무엇이 나올 지 상상되죠? 고급 중식도 몇 십 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먹으면 뭐가 나올지 대충 안단 말이에요. 그럼 양식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그냥 파스타 나오고 스테이크 나올 걸로 기대해요. 거기에 몇 십 만원 쓰겠단 생각을 못하는 거죠. 그 스탠다드부터 깨져야 돼요.”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이면 좋겠냐는 질문에 일관적인 대답을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술적인 요리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지만, 다시금 자신을 피곤할 정도로 속박하는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셰프가 될 거에요. 목표는 크게 가져야 해요. 그런데 이런 목표는 속으로만 계속 되 뇌여요. 밖으로 말하면 진짜 지켜야 하니까요.(웃음)”

웃음이 섞인 그의 대답에선 눈치를 보거나 겸손하고자 하는 가식도 없이 당당하게 답변이 나왔다. 경솔하다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그토록 고독하고 다사다난했던 요리-인생마라톤을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에 불만족하면서 높여 세운 목표 덕이었으리라. 이찬오 셰프는 자신을 이끄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증명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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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에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은 복합 문화의 메카, 새로운 식문화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는 식당들이 가장 먼저 생겨나는 곳, 이태원의 정은빌딩 5층의 한 작은 사무실에는 요리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한국 유일의 조리복 전문 제작사인 븟-BEUT 사무실이다. 븟은 순 우리말로 부엌을 뜻한다. 이곳에 들어와보면 여기가 부엌인지 옷을 파는 곳이 맞긴 한지 분간이 안 된다. 현관부터 빼곡히 수납된 조리복은 업무 공간을 침범해 천장까지 쌓여있고 3명의 직원은 조리복 담장으로 단절된, 구석의 어둡고 작은 공간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업무를 보고 있다.

반면 부엌과 부엌 맞은 편의 손님용 휴식공간은 꽤 쾌적하다. 200여 권에달하는 요리 서적, 음료는 셀프, 요리가 하고 싶을 땐 주방을 사용해도 된다. 요리사들의 열린 사랑방인 이곳에서는 격주로 현업 요리사를 초청해 강연도 진행한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뼛속까지 요리사, 하지만 지금은 요리가 아닌 조리복을 만들고 있는 븟 배세훈 대표. 그의 좌충우돌 창업기를 들어보았다.

| 고집불통 요리사 바라기와 부모님의 반대

15살, 요리에 빠져든 아들을 둔 부모님은 그저 재미 삼아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었고 어릴 때부터 항상 아버지를 따라 경찰관이 되겠다고 말하던 아들이 돌연 요리사가 되겠다며 진지하게 고백을 하니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요리학원을 다녔어요. 1년이 지나니까 안양에 처음으로 요리고등학교가 생기더라고요. 그 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1년을 꿇고 다시 조리고등학교에 입학하겠다, 부모님께 말씀 드렸죠. 그 때 진짜 어버지한테 맞아 죽을 뻔 했어요. 저희 아버진 합이 11단이시거든요”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고 대학교를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부모님과 타협하며 요리 공부를 계속했다. 요리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지만 부모님의 간섭이 따라 커졌다. 부모님은 25살까지 요리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면 요리를 그만 두라며 다른 일을 찾기를 강요했고 결국 끈질기게 아들의 약속을 받아낸다. 어려서부터 지병이 있던 건강히 넘기는 해가 없었던 아들이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직업인 요리사를 택한다는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5살이 되었지만 사회초년생이 무엇을 이루어 놓았을 리 만무하다. 인간의 삶에서 25살이라 함은 본래 본격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시작하는 시점이 아니던가.

“제가 할 줄 아는 것도 요리 밖에 없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요리였어요. 다른 걸 하겠다는 생각도 못 하겠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언젠가 요리로 인정받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제가 요리하는 것을 단 한 번도 응원해주신 적이 없었으니까요.”

항상 자신이 요리를 하겠다는 것에 반기를 드는 부모님 앞에서면 의기소침해졌다. 25살 청년 배세훈은 어머님과의 약속은 뒤로한 채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다.

| 호기심 많은 청년의 요리인생, 외국 문물과 장비병

그로부터 6년 동안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주방에서 일했다.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요리사를 만나봐도 공통적이었던 점은 하나같이 장비병에 걸려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도 장비 욕심이라면 뒤지지 않았다.

“좋은 칼이랑 좋은 장비를 갖고 싶은 건 모든 요리사들의 공통된 욕구죠. 그 때 하도 사모아서 지금도 집에 잔뜩 쌓여있어요. 제 주변엔 특히 매니아적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새 장비를 사오면 우와! 좋구나! 나도 가지고 싶다! 라면서 요리사들이 구경하러 모여들고 감탄하고 그러죠”

2012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오키친의 주방에 합류했다. 새로운 업장의 개업을 준비하던 팀이었는데 좋은 조리복을 한 번 맞춰 입어보자며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조리복인 셰프웨어(Chefware)를 맞춰 입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에는 감히 살 수 없었던 10만원이 넘는 조리복이었다.

“전에 입던 것보다는 나았지만 제 값어치는 전혀 못하는 옷이었어요. 게다가 외국인 체형에 맞춰져 있어서 사이즈도 다르고 태도 안나요. 제 키가 178인데 SS를 입어야 한다니까요. 멋은 둘째치고 기능적으로도 만족 못했어요.”

좋은 조리복에 대한 욕심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허탈함에 한동안 친구들끼리 만날 때마다 옷에 대한 불평을 이어갔다. 주변 요리사들도 불편함에 크게 공감했고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만들어보자” 라는 말을 쉽게 뱉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던 문제를 풀고 싶었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이었기에 발벗고 나서고 싶었다고 한다.

| 요리하는 사람에서 옷만드는 사람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그는 이내 옷 만드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첫 샘플을 만드는 데 샘플비로만 800만원을 썼어요. 지금이야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때 2~3벌 테스트하면 원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지만 처음 옷 나올 때까지 샘플을 50벌 만들었어요.”

뱉은 말을 주워 담지 못하고 개인 빚까지 내며 사업을 진행했지만 고민과 걱정은 날로 늘었다.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아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몸이 약한 그가 요리와 옷 만드는 일을 병행하다 보니 과로로 몸에 병이 다시 생겼다. 미국 생활도 이태리 생활도 1년을 채 넘기지 못한 것도 같은 지병 때문이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주방에서는 일을 못하고 잠시 쉬고 있던 때였어요. 건강 회복하려고 자전거를 가끔 탔는데 어느 날 크게 넘어지면서 어깨가 땅에 닿았어요. 쇄골 골절이었는데 병원에 2주 동안 입원했죠. 그런데 그거보다 더 심각한 게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교통사고가 났어요. 뒤차가 들이받아서 골절 치료용으로 대어놓았던 철판이 완전히 휘어버렸어요.”

너무 오랫동안 병가를 내어버린데다 무게가 있는 걸 들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다시 주방으로 돌아갈 순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을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사면초가라고 해야 할까.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디자인을 부탁하고 의류 수출을 하던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나마 회사 경험이 있던 부인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설립하고 올 해 2월 사무실까지 차렸다. 미국에서 MBA를 졸업한 친누나,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요리 공부를 시작했던 친구까지 합류했고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었다.

“첫 매출 냈을 때, 이상한 감정이 들었어요. 옷이 나왔다고 신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어떤 셰프님이 덥썩 사겠다며 8만원을 쥐어주고 옷을 가져가는 거에요.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기쁘기는 한데 이 돈을 받아야 하는 게 맞나? 요리사는 하루에 수백 개의 접시를 내면서도 음식값을 직접 받진 않잖아요. 그 날 저녁에 혼자 소주 마시면서 울었어요. 고생한 것도 기억 나고 이제는 내가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옷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건강이 약하고 사고까지 났던 것은 확실히 불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새옹지마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븟은 지금까지 23종의 상의 조리복, 9종의 하의 조리복, 11종의 앞치마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 국가대표 조리복 브랜드 븟-BEUT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생산된 조리복은 모두 가운사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가대의복, 졸업가운, 의사가운 등을 대량으로 만드는 복합 제조사인 가운사에서는 조리사의 하루 일과나 몸의 움직임 등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븟에서 만든 모든 조리복은 등판이 모두 쿨론 메쉬 소재로 되어 있다. 스포츠웨어에 주로 쓰이는, 바람이 잘 통하고 빨리 건조되는 기능성 소재이다. 땀을 많이 흘리고 더운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복이라면 당연히 이 소재가 쓰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뒤 기장도 길게 내려와있어서 쪼그려 앉아 물건을 꺼낼 때 뒤 허리살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트를 자주 해야 하는 조리사들이 휴대하기 편하도록 펜을 꽂는 위치도 섬세하게 조정했고 소매를 걷었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안감 마감 박음질처리가 되어있다. 목에 건 앞치마 목 끈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 패킹도 부착되어 있다. 실제로 주방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각해내지 못할 부분이다.

그가 가장 욕심을 낸 부분은 카라 부분이다. 모든 나라마다 그 나라의 조리복 브랜드가 하나씩 있기 때문에, 븟 조리복에는 한국적인 느낌을 담아내고 싶었다는 고집을 다시 보여주었다. 지금 가장 대표적인 조리복 모델에는 목 카라는 보기 좋게 오른쪽 어깨까지 뻗어나가 있지만 이 라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시도했던 샘플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실제 제작을 담당하는 공장에서는 븟 배세훈 대표의 깐깐함과 억척스러움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주문은 복잡하고 종류는 많은데 수량은 적다. 가장 많이 주문했을 때가 100장 밖에 되지 않으니 좋아할 리 없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대량생산되는 옷에 비하면 옷값이 비싼 편이다. 주문량이 많지 않아 제작단가가 워낙 높기 때문인데, 사정은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흑자는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한다.

“저는 요리사였던 사람입니다.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라 믿고 있고요. 그 마음을 저버리면 사업은 조금 더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을 버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고지식한 면이 적잖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고집이 지금까지의 쉽지 않은 창업과정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고 또 장인정신이 깃든 옷을 만들어 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그의 입에서 하루 동안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범주는 ‘요리, 요리사, 조리복’ 이 세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도 그는 사업가라기 보다는 요리사로 보인다. 요리를 직업 할 수는 없으니 요리사를 위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좋은 제품을 개발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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