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물질적 풍요는 충족되지 못했을 때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 또한 결여되어 있을 경우 좇게 되는 것이다. 예술적 창조성은 내면에서 분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양한 경험은 배움을 갈망하는 자가 원하는 것이다. 욕구가 없는 내 인생은 갈 곳을 잃었다.

욕구가 없는 내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 욕망의 대상을 가지는 것이다. 2. 역할을 통해 의무와 책임에 구속되는 것이다. 3. 내면의 창조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4. 가장 순수한 내 모습을 찾는 것이다.

직업이란 종종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단순히 여겨지고 있지만, 어쩌면 이 네 가지, 순수한 욕구를 일깨우는 일이다.

나는 나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수록 나의 추악함에 실망하고 경명감을 느낀다. 인간은 아름답지 않으며, 나는 그 인간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한,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은 별종인 셈이다. 인간적이지 않으며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지만 전혀 그렇지도 않은, 그저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먹고, 보고, 반응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에 그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지만 그 이상의 존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도망쳤다. 기계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도망쳤고, 생존의 위협에서 도망쳤다. 월세 30만 원짜리 지하방에서 도망쳤고, 싫은 놈들로부터 도망쳤다. 싸움과 분쟁이 있으면 도망쳤으나 내가 간 곳에 평화와 이상이 있는 곳 또한 아니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달린 적도 있었으나, 이내 달성하고 지루해져 탈출하고자 안달이 난다.

기계단계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기계로서의 인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기계 내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켰다. 기계적 인간 단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정교하게 기계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해진다 한들 일련의 자극-반응 과정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천천히 우연적으로 일어나던 반응이 더욱 빠르고 실수없이 일어나는 쪽으로 인간이 향해가고 있다면, 아마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일 것이다.

그렇다고 경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계적으로 계산된 쾌락 알고리즘이 나에게도 장착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미녀를 마주하거나, 동물을 만지거나, 새로운 풍광을 보고, 음악을 듣고, 스토리를 듣는다. 특정한 감정을 활성화하는 자극들은 도처에 널려있기 때문에 손만 뻗으면 언제나 취할 수 있다.

미션 달성을 통한 만족감, 성취감은 그보다 더욱 크다. 나는 사회적 관계에서 이런 성취를 느끼지도 않고, 창작물을 통해서 느끼지도 못한다. 두 목표는 내가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나의 욕구가 향할 곳을 찾지 못했다는 혼란스러움을 고백한 바에 따르면, 나는 성취를 통한 쾌락도 충족이 어려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쉽고 빠르게 성취를 느낄 수 있는 인스턴트 성취를 좇는다. 게임이다. 미션이 주어지고, 단시간에 몰입 가능하며, 내 노력에 의해 결과가 결정되고, 성취를 통해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 정신적 쾌락이 엄청나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것이 쾌락이 아니라, 어떤 숭고한 가치는 있을까? 과연 있을까? 이렇게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그런 가치가 있을까?

 

— 덧붙임 (21.02.24) —

이놈의 허무주의가 또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네. 이 에너지를 추구와 탐구를 향하게 해야 한다. 이놈에게 잠식당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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