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몸매를 원하십니까?”

누구나 기억하는 광고 문구다. 제품을 팔지 말고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교과서적 가르침을 지켰다. 고객은 쇳덩이를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매를 구입하는 것이다. 쇳덩이라면 오만 원도 아깝겠지만, 건강한 몸매를 가질 수 있다면 오십만 원도 쓸 수 있다. 고객의 문제에서 출발해 제품으로 향하는 것은 판매의 기본이다. 모든 광고는 이 기본원칙을 준수해 만들어진다.

제품의 값어치는 고객 문제의 크기에 비례한다. 문제가 클수록 비싸게 팔 수 있다. 그래서 판매자는 고객이 문제를 크게 인식하도록 부추긴다. 작은 문제는 부풀리고 없는 문제도 만들어낸다. 불안을 조장하고 공포를 유발하는 판매 방식은 지푸라기도 십 억에 팔 수 있는 고급 기술이다. 사람을 물에 빠트린 뒤 지푸라기를 내밀면 된다. 지푸라기를 팔겠다고 사람을 물에 빠트리는 것도, 물에 빠졌을 때 십 억을 내고 지푸라기를 사는 것도 이 곳에선 정상이다. 건강한 시장에서 일어나는 합법적 거래다.

판매자는 모든 대화를 구매로 귀결시킨다. 나도 꽤 팔아본 사람인지라 그들의 공격 패턴을 훤히 읽을 수 있다. 판매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접근한다면 어디 한 번 지껄여 보란듯이 지켜본다. 그들이 아무리 다양하고 창의적인 공격을 펼쳐도 나의 방어는 한결같다.
“안사요”
모든 종류의 창을 막아내는 만능 방패다.

 

자전거를 타면서도 쉴 새 없이 공격받았다. 속도를 더 내고싶다 했더니 뭘 사야 한대, 삭신이 쑤신다 했더니 뭘 바꿔야 한대, 훈련을 제대로 하고싶다 했더니 또 뭘 사야 한대, 멀리 가려고 했더니 뭐가 필요하대, 자전거 얘기를 할 때마다 지갑을 열어래. 그래서 입 닥치고 가만 있었더니 먼저 다가와서 문제가 많대. 20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잘 탔다 했더니 자기가 볼 땐 너무 위험해서 곧 사고가 날거래. 이놈들이 나를 아주 물에 빠트리려고 작정했나보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유치한 수법이구먼.

“안사요” 방어모드로 일관했지만 이번 공격은 왠지 끊이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났다.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붇고 소금을 뿌릴 참이었다. 그러다 눈을 마주쳤다. 초점없는 광신도의 눈이었다. 판매자가 아니었다. 소비자였다. 딴에는 날 위한답시고 조언했지만 의도치않게 공격이 된 것이다. 이들은 진심으로 돈을 쓰는 게 이로운 것이라 믿고 있었다.

 

판매자를 대신해 서로 물에 빠트리고 돈을 안 쓰면 큰일난다고 호들갑떤다. 자본주의 피착취계급이 자가증식하는 신비로운 관경이다. 부익부빈익빈이 왜 갈수록 심해지는지에 대한 근본적 원인을 찾았다. 가난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나.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어떤 종교나 이념도 이정도의 전파력은 갖지 못했다.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디어환경에선 잘못된 신념이 더욱 빠르게 퍼진다. 자전거 레이스는 하덜 않고 경쟁적인 소비 레이스만 펼친다.

돈을 한 웅큼 쥔 채로 문을 박차고 들어와 “Shut up and take my money”라고 외치는 고객을 물에 빠트릴 필요는 없다. 더러운 작업은 하지 않고 신성한 구세주 역할만 하면 되니, 판매자는 신이 나서 고객의 엉덩이에 최고 호갱등급 도장 VVIP를 찍어 준다. 감격한 호갱은 펄쩍 뛰어올라 발로 박수를 치고 앞돌기를 한 뒤 착지와 동시에 넢죽 엎드려 절을 두 번 한다. 감격의 눈물을 닦으며 다음달 월급도 모조리 갖다 바치겠다 맹세하고 뒷걸음질치며 퇴장한다.

 

자전거 고객의 소비행태는 기존의 구매행동이론으론 설명되지 못한다. 기존 이론에선 상품을 보아야 구매의사가 생긴다고 전제한다. Attention Interest [발견>관심] 순서다. 1920년도에 정립된 구매행동이론 AIDMA도 2010년도 미디어 환경변화에 맞춰 개정된 AISAS도 모두 AI단계가 선행한다.

하지만 요즘 고객은 다짜고짜 ASS다. Action Search Share [구매결정>검색>자랑] 어떤 상품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기변 결심부터 한다. 돈이 생기는 족족 다 털어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상품을 검색해 예정된 소비를 하는 셈이다.

 

너무 소중한 나머지 제 구실을 못하는 제품들이 있다. 아껴 써야 하는 수첩, 비를 맞히면 안 되는 가방, 한 달째 비닐포장 뜯지 않은 새 차, 김치국물 한 방울 튀었다고 종일 기분이 우울해질 정도로 비싼 정장. 닳는 게 아까워서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는 명품 신발. 그런 신발을 신고 어떻게 달리겠는가? 달리는 게 목적이라면 닳아도 아깝지 않을 신발을 신어야 한다.

자전거도 너무 비싸면 제구실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자전거가 월급보다 비싸면 마음껏 밟을 수 없을 것이다. 난 월급이 작아서 중국산 가품을 타지만 대신 마음껏 찢어발길 수 있다. 자전거는 밟고 뜯고 비틀어 당겨서 밀고 던지고 엎어치듯 찢어발겨 타는 것이다. 타다 보면 기름때도 묻고 닳고 망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건 보물이 아니다. 탈 것이다.

 

돈이 썩어 남아서 자전거에 수천만원을 쓰건, 없는 잔고를 쥐어짜 장만하건, 미래를 저당 잡혀가면서까지 빚내 지르건,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나도 판매자들의 소비조장 공격이 달갑지 않듯이 내 자산운용 철칙을 알려주는 것도 상대방에겐 불쾌한 일일 것이다.

“정녕 당신의 인생이 자본주의 소비이념을 전파시키기 위한 숙주로 쓰이다 내팽개쳐져도 괜찮단 말입니까? 깨어나서 주체적 삶을 살아가십시오.”
라고 내 진심을 전하는 순간 그들은 나를 광신도 쳐다보듯 할 것이다. 이어서 나의 공격을 막아낼 만능 방패를 들어올릴 것이다.
“니는 니 대로 살아라(live) 내는 내 대로 살게(buy)”

 

같을 同, 좋을 好. 같은 걸 좋아해야 동호인인데 내가 자전거 쇼핑 동호회로 잘못 찾아왔나 싶다.

당신과 나 사이에 라이딩의 즐거움이란 교집합이 존재하길 바랄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은 세가지로 분류된다. 생산자/유통자/소비자다. 생산자와 유통자는 돈을 벌어 승자가 되고, 소비자는 돈을 써서 패자가 된다. 그런데 이 게임의 룰을 소비자가 알게 되면 소비가 멈출 것이다. 소비=승리, 성공 이라는 이념이 만들어진다. 집단적 사기극이다. 진원지와 전파경로를 역학조사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전염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현대인의 대부분이 소비에 자의식이 지배당해 있는 건 당연한 결과다. 이런 가짜 이념에 자신도 당해 놓고 재전파하는 놈들이 제일 한심하다. 인생나락탕진을 flexing이라는 숭고한 가치를 가진 신조어로 탈바꿈 시킨 건 정말 감탄할 정도의 프로파간다 전략이다. 국가도 유동성확보와 경제성장을 견인하기 위해 거짓 이념을 설파하고 장려하는 지경이다.

 

광신도를 보면 무섭다. 그러다 측은하다. 그러다 한심하다.
소비자를 보면 한심하다. 그러다 측은하다. 그러다 무섭다.
좀비를 보면 무섭다. 무섭다. 무섭다.

무서우면 경계하게 된다. 제발 저에겐 전염시키지 말아주세요. 아무도 공격하진 않았다. 그치만 나는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방어 본능이다. 방어가 나의 우선조치다. 회피는 후속조치다.

 

이 상황은 진심 고통스럽다. 좀비 영화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다. 유일한 생존자로 남은 자와 같은 종류의 고통인 것이다.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다고 우리는 자살을 택하진 않는다. 유일한 생존자의 운명이 아무리 고단해도 좀비에 감염되길 택하지 않는다. 나는 소비자가 되길 원치 않는다.

우리는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시대에는 올바른 정보를 분간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 자전거 피팅에 대한 정보는 식품, 금융에 이어서 3번째로 쓰레기정보가 넘쳐나는 영역이 아닐까 싶다. 진짜 정보는 찾기 더욱 어려워진다.

피팅에 관해서도 여러 계파가 있다. 첫째, 절대피팅신봉자 혹은 만사피팅해결주의자다. 이들의 주장에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한마디 질문만 되물어도 자신의 모순에 스스로 막혀 벙어리가 된다. 그건 그저 광신이 아닌가 싶다. 둘째, 산업이다. 만사피팅해결주의자를 만드는 것이 산업이다. 산업이라 함은 생산자와 유통자를 함께 일컫는다. 이들은 모든 대화를 구입 혹은 교체로 귀결시킨다. 나는 의도를 전제에 깔고 접근하는 사람과는 대화하지 않는다. 결론이 바뀌지 않을 거라면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 셋째, 신체해부학주의자도 있는데 이들은 불필요할 정도로 전문적인 지식으로 오히려 편협하게 신체의 사이즈에만 집중한다. 필드에서의 라이딩을 고려하지 않은 물리치료사에게 조언을 듣고 싶진 않다. 피팅 가격은 또 제일 비싸요. 넷째, 프로선수들이다. 이들이 피팅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입장은 대부분 비슷하다. 각자의 주장이 서로의 주장을 보완하고 뒷받침한다. 그들의 주장엔 이론적 배경과 근거가 뒤따른다. 실제로 자신의 몸 혹은 동료의 몸에 실험했던 경험까지 있다. 처방은 절대적이지 않고 융통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는 것보다 많이 들었다. 피팅에 관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내가 filter-in 시킬 정보는 네 번째 부류의 것이다.

나는 자전거의 세팅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피팅’이라고 검색하면 자전거 세팅에 관련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다. 정상 범주에 들어가는 각 파츠의 위치나 신체관절의 각도를 맞추는 건 시간만 들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정확하진 않더라도 아주 모자라지도 않다. 하지만 그건 피팅이 아닌 세팅이다. 나는 세팅을 넘어선 피팅을 원한다. 내가 신청한 피팅이 세팅에 그칠까봐 난 그동안 피팅을 받지 않았다.

오늘 아이윌사이클링을 찾은 것도 세팅을 넘어선 피팅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팅을 넘어선 무릎통증의 근본적인 문제해결까지도 기대했다. 무릎통증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이론과 경험을 쌓기엔 충분한 시간이 없고, 그 과정에서 발생할 시행착오를 감당하기엔 건강에 위협이 가해질 우려가 있었다. 본격적인 시즌온에 앞서 오늘 딱 한시간만 써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박프로님과 나는 한시간 동안 신나게 웃고 떠들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박수를 쳤다.

 

세팅을 넘어선, 피팅을 넘어선, 통증해결을 넘어선, 라이딩코칭까지 받고 왔다. 자전거 세상의 새로운 차원을 발견했다.

들은 것, 해결한 것, 느낀 것 등, 내가 이해한 만큼만 나의 언어로 다시 써본다.

 

 

개요

자전거의 목적은 적은 힘으로 / 더 빠르게 / 더 멀리 가는 것이다. 이 세가지 조건을 충족시키는 것을 “주행효율”이라 부른다. 주행효율은 종합적인 결과다. 주행효율을 높이는 데에 수많은 요인들이 작용한다. 심폐능력, 근력, 근지구력, 페달링효율 등이다. 이런 요인들을 향상시키면 실력은 몇 배로 향상시킬 수 있다. 신체적인 것 이외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있지만 크지 않다. 기재의 업그레이드를 통해 향상시킬 수 있는 주행효율은 기껏해봐야 5% 내외다.

 

클릿과 페달

모든 피팅의 시작은 신발과 클릿에서 시작한다. 다른 지점을 잡아놔도 클릿이 조금만 변해도 모든 것이 틀어진다. 그래서 클릿부터 잡아야 한다.

Q. 오다리다. 큐팩터에 영향을 미치는가? >> 큰 영향 없다.

Q. 일단 큐팩터는 최대한 넓혀 놓았다. 그리고 발목을 사용하지 않도록 클릿은 약간 뒤로 위치시켰다. >> 잘했다. 큐팩터 최대한 넓혀두자. 이 신발은 엘리트들이 신는 신발이다. 바깥으로 웻지도 들어가있다. 다른 신발보다 1도 이상 세워져 있다. 엄청 큰 차이다. 그리고 클릿의 중앙점 위치가 다른 신발보다 절반가량 앞에 있다. 중간에 맞춰도 다른 신발 최대한 앞에 있는 것과 같은 위치인 것이다.

Q. 발볼 기준으로 맞추라는 식으로 절대공식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지금과 같은 요인들을 고려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 맞다. 신발마다 이렇게 차이가 큰데 클릿의 위치를 발 기준으로 잡을 수 없다. 그런 주장을 만든 사람은 한가지 신발만으로 테스트 했을 거다.

 

와트바이크

왼발이 더 강하다. 55%. 당기는 힘에는 차이가 없다. 밟는 힘에서만 차이가 난다. 이 차이는 토크형 주행으로 바꾸면 줄어든다. 토크형이 익숙한 것이다. 익숙하고 좋은 수치가 나오는 주법을 우선으로 세팅해야 한다.

 

프레임, 피팅, 신체 특이성

프레임은 두 치수 작은 걸 타고 있다. 원래라면 피팅 자체가 안 될 정도다. 종아리가 긴 편이라 자전거를 타기에 좋은 비율이다. 이런 비율은 자주 보지 못했다. (립서비스였던 것 같다.) 이런 비율이라면 피팅을 폭넓게 소화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밟는 힘점이 다운튜브부터 시작되지 못한다. 안장을 조금 더 뒤로 빼서 큰 근육을 사용하게 만들어보자.

>> 나중에 프레임을 교체하게 된다면 이탈리아나 미국 브랜드는 피하는 것이 좋다. 싯튜브 각도가 세워진 편이라서 안 맞을 것이다.

>> 핸들바는 리치가 짧은 게 좋겠다.

>> 안장 높이는 5mm 낮추긴 하지만 코스에 따라 조정하면서 타시라.

 

호흡

작년의 호흡 왼(후)오왼오왼(후)오왼오왼(후)로 탔다. 왼발을 밟을 때 호흡을 맞추던 습관이 있어서 왼다리에만 무리가 갔고 왼다리만 성장했다. 이후 왼(후)오왼오(후)왼오왼(후)오왼오(후)로 바꿨다.

>> 페달링 타이밍에 호흡을 맞추면 편하긴 할텐데 좋은 방법은 아니다. 자주 쓰진 마라. 근력의 한계에 심폐능력이 갇히거나 반대로 심폐능력의 한계에 근력의 한계가 갇힐 수 있다. 산소를 충분히 흡입해야 젖산역치가 늦게 온다. 그리고 에너지로 전환한다. 뱉는 데에 집중해라. 뱉으면 들이쉬는 것은 자동이다.

>> 페달 몇 바퀴 돌릴 동안 천천히 4~5초 길게 다 뱉어라. 후~~~~~~ 길게 뱉어 줘라. 그럼 페달링과 호흡의 박자가 깨지게 된다. 지금 당장은 이 방식이 도움 될 거다.

 

무릎 통증

>> 관절이 아프다는 것은 관절에 연결된 수많은 근육에 의한 것이다.

 

나쁜 페달링 습관 교정

오른 다리가 올라올 때 안으로 모이는 습관 >> 외전근에 집중하면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케이던스 페달링을 할 때 발을 안으로 밀어 넣으려는 습관(노후된 스피드플레이 수평유격 없애려던 습관) >>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밀어 밟는 데에만 집중하면 된다. 발가락에만 집중하면 모든 것은 맞춰진다.

오른 발꿈치가 많이 내려가며 발목이 꺽이는 습관 >> 안장을 뒤로 빼고 토크형 외전근 주법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상사점이 너무 이르고 하사점이 너무 늦어서 오른다리 페달링 중 무릎이 꺽여버리는 현상 >> 돌리는 걸 의식해서 그렇다.

 

내전근과 외전근

근전환을 하지 않으면 한가지 근육만 사용해야 한다. 한 가지 근육으로는 성장할 수 있는 한계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무리가 온다. 그래서 절대 피팅은 없는 것이다. 근육의 효율, 페달링의 효율을 높일 수 있으려면 한 자전거 위에서도 다양한 주법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자세가 좋고, 이 각도여야 한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한계에 가두는 꼴이다.

클릿을 딛고 섰을 때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고 딛으면 무릎이 모이고 무릎 안 쪽의 내전근이 자극된다. 새끼발가락에 힘을 주고 딛으면 무릎이 벌어지고 바깥 쪽 외전근이 자극된다. 중간에 힘을 주면 대퇴직근 전체가 자극된다.

토크형주법에서는 5 : 2 : 3의 비율로 근육을 전환시키는 것이 좋다. 외전근을 많이 쓰는 것이다. 케던형 주법에서는 3 : 2 : 5의 비율이 좋다. 내전근을 더 많이 쓰는 것이다.

 

코어와 다리근육

전면코어는 앞에 보이는 복근이다. 안장 앞에 앉아서 움추리듯 자세를 취하면 자연스럽게 전면코어에 힘이 들어간다. 보디빌더 복근자랑 포즈처럼. 이 때의 페달링은 내전근위주로 당겨서 굴러가듯 이뤄진다. 다리와 복근을 이어주는 장요근이 페달링에 쓰이게 된다.

후면코어는 스쿼트 근육이다. 스쿼트 하는 것처럼 자세를 취하고 외전근을 주로 사용한다. 가장 큰 근육을 사용하기 때문에 장기간 지속시킬 수 있다.

 

페달링과 근육

월드클래스 선수들의 폼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자세를 찾아야 했다. 그 자세는 이미 몸이 알고 있었다. 몸이 아는 자세를 지워버리고 몸에 맞지 않는 자세로 타려고 했다. 그러니 2년을 타도 북악 기록을 겨우 1분 30초 밖에 못 줄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탔던 그 때, 오히려 더 효율적으로 주행했다.

굴려야 한다는 생각을 너무 의식적으로 할 필요가 없다. 안장 뒤에 앉아 후면코어를 사용하고 스쿼트하듯이 밀어내는 데 집중하면 큰 근육으로 12시부터 5시까지 힘을 줄 수 있다. 앞으로 당겨 앉으면 자연스럽게 밀어 밟는 구간은 줄어들고 작은 근육들로 당겨서 굴리는 페달링이 된다.

당기는 근육은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들이고 크기도 작기 때문에 오랫동안 무리하면 안 된다. 오금에 부상을 입으면 회복도 어렵다.

안장의 위치를 바꾸고 발의 어느 부분에 힘을 주는지만 생각하면 근육의 사용은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발목도 더 이상 접히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보통 토크형이 많다. 토크형이라고 토크만 타는 건 아니다. 비율의 조정이다. 토크형으로 70%를 타고 30%를 케이던스로 타라. 고속주행을 하거나 경사가 높은 업힐에서 케이던스형을 사용해 공력한다. 맞바람이나 약업힐, 장거리 주행에 토크형을 사용한다.

토크형 주법에서는 새끼발가락에 힘을 주고 외전근을 사용한다. 무릎바깥에서 골반 바깥으로 이어지는 근육에 무리가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을 주동근으로 쓴다. 이때 당기는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 미는 데에만 집중하면 몸은 자연스럽게 리듬을 찾는다. 바깥쪽 근육을 쓰기 때문에 몸이 좌우로 크게 흔들린다. 자연스러운 리듬이다. 바닥에서 샤카샤카 파워전달되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린다.

 

걱정과 우려가 사라졌다. 더 자신감 있게 밟을 수 있게 되었다. 더 강한 부하를 신체에 가할 수 있게 되었다. 더 강한 운동강도는 더 큰 성장을 견인할 것이다. 더 큰 성장을 이루면 5월엔 4.0watt/kg 가능할 것인가?

 

 

그제 저녁부터 배가 아팠다. 열도 조금 났다. 온 옆구리가 뻑적지근해지더니 골반을 움직이는 것도 불편해졌다. 통증은 우측 하복부로 집중되었다. 하루 반나절 정도에 걸쳐 통증은 심해졌다.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통증이라 검색을 통해 병을 찾아보았다. 충수염의 증상과 흡사했다. 흔히 맹장염으로 알려진 병이었다.

나는 충수염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이 병은 48시간 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터져버려 더 큰 문제로 번진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당일 수술을 하고 이틀간 입원을 한게 될 터이니,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모래도 새걸로 갈아주고 밥도 가득 채웠다. 물도 두통을 채워 두고 간식을 잔뜩 줬다. 배낭가방에 이틀간 지낼 수 있도록 물품을 쌌다. 그리고 아침 일찍 병원을 갔다.

 

오늘 만난 외과의사는 아주 특이한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정해둔 레퍼토리대로 진료가 이뤄져야만 했다. 의사가 권위적인 것은 알았지만 이 사람은 좀 달랐다.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 노트해둔 것을 보려고 휴대폰을 켰더니 휴대폰은 내려두고 자신이 물어보는 것에만 질문하라는 것이다. 불필요한 정보는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기실에 사람이 전혀 없는 이른 아침이었다. 시간을 어떻게 아껴 쓰는지는 각자의 몫이니까 내가 간섭할 순 없는 일이기에 그의 지시를 따랐다.

진단은 아주 전문적이었다. 내러티브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스크립트로서는 완벽했다. 진단 근거도 들어가 있으며, 의학적인 근거도 있고, 자신이 판단을 내리게 되는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투명하게 설명함으로 신뢰를 주기도 했다. 초음파 검사는 60%의 정확도로 병을 진단할 수 있고, 자기같은 전문가가 손으로 눌러서 검진하는 것을 이학적 검진이라 부르는데 85%의 확률로 병을 맞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간에 질문도 하나 던졌다. 85%의 확률이라는 것이 높은건지 낮은건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는 높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다. 60%와 비교하듯 물었으니 상대적으로 높다고 생각할 수 밖에. 틀린 답을 내기를 바라고 던진 질문이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지적함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자신의 권위는 높이는 대목이었다. “85%의 확률이라면 15%는 놓친다는 뜻입니다. 100명이면 15명 1,000명이면 150명의 환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충수염 환자를 5,000명을 수술했는데 그럼 750명의 환자를 놓친다는 뜻입니다.” 캬~ 다시 생각해도 감탄이 터져나오는 치밀한 스크립트다. 답변을 듣는 사람은 순식간에 멀쩡한 사람 750명의 배를 갈라버린 나쁜놈이 된다. 그저 배가 아파서 병원을 방문했던 환자는 민망함을 넘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그의 치밀한 스크립트에 오류가 발생했다. 내가 “사람 배때지를 칼로 째기에는 낮은 편인 것 같네요”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난 반응을 접하면 당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언짢아했다. 자신의 질문에 항상 ‘높다’라는 답변이 들어왔고 그에 대한 counter 대본만 있었는데, ‘낮다’라는 답변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 상황을 모면할 융통성이나 순발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화의 맥락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그는 스크립트를 그대로 읊었다.

 

스크립트 낭독이 끝난 뒤, 85%보다 정확도가 높다는 CT를 찍으러 갔다. 개인병원에는 CT기계가 없어서 인근 영상의학과를 다녀왔다. 사진이 잘나오려면 핏속에 어떤 액체를 섞어야 한다는데 혈관이 계속 터져버려 바늘을 네 번이나 꽂아야 했다. 팔에 구멍이 네 개 난 채로 다시 외과에 돌아오니 의사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미 영상은 컴퓨터로 받아본 상태고, 내가 이동하는 동안 또 스크립트를 준비해두었나보다.

이 의사는 결론부터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짜둔 내러티브와 극적인 연출포인트를 아주 중요시 여기는 듯 했다. “이건 게실이고요, 게실이 이런 상태인데요, 게실은 보통 이래요. 게실이 이렇게 되면 이런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건 충수인데요, 충수도 염증이 번진 상태에요. 그런데 여길 보면 공기가 들어가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막혔다기보다는 염증만 번진 상태인 거죠”

그가 준비한 4분간의 스크립트 낭독이 모두 끝나갈 때까지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설명만 있고 해석은 없었다. 답답했던 나는 중간에 껴들었다. “그럼 충수를 제거해야 하는 수준은 아니네요?” 그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며 양 손을 펼쳐 손바닥을 나에게 보였다. “의사가 말을 하면 좀 끝까지 들으세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나는 충수염인지 아닌지 빨리 말해줬음 좋겠는데. 아니 그러니까 충수염인지 뭔지 하는 병이 존재하는지도 나는 어제 처음 알았을 뿐이고, 지식을 전달해주는 건 좋은데, 당신이 말해주는 그런 요약된 지식은 이미 인터넷에서도 내가 다 보고 온건데. 스크립트 낭독자야 뭐야. 사람이 앞에 있으면 사람이랑 대화를 해야지. 오늘 입원을 해야 하는지, 내일 출근은 할 수 있는 건지, 병원비는 얼마 나올지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대본 읽는 기계야 뭐야.

그의 스크립트는 그의 입장에서는 완벽했을지 몰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상황에 대한 해석이 없다. so what이 빠져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당신 잘난건 알겠는데 나더러 어쩌라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되물으면 언짢아하니 물어볼 수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신 것만큼 상태가 나쁘진 않습니다.”, “이런건 좀 주의하셔야 합니다.” 와 같은 환자가 이해하기 쉬운 말은 그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진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백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기만족을 위해 쓰여진 대본이었다. 이 사람은 대화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통제집착이 심한 사람인데 의사는 오죽할까. 당신은 또 얼마나 피곤한 하루를 살아갈까. 환자란 자신이 명령에 의해 맨살을 보이는 존재이고, 자신은 그 살을 메스로 갈라도 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태도가 대화의 모든 문장에서 묻어났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4분간의 스크립트 낭독이 끝나자 약 처방을 해줄 테니 5일간 먹고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쫓겨났다. 두 번 혼이 났던 나는 시키는 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문 밖으로 나오고 세 걸음을 옮겼을 때, 뭔가 놓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다시 물었다. “저기요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네” “무탄고단 식단을 하는 게 이번 염증에 원인이 아닐까요?” “문제 없습니다”

so what이 결여된 그의 스크립트를 지적이라도 하듯 대화를 연장시켰지만 그는 눈도 마주치치 않은 채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도 모른 채로 살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의 식단을 보았다. 이틀 연속 식이섬유 하나도 없이 단백질만 먹은 기록이 있다. 장 내 변이 게실과 충수에 무리를 줄만했다. 게실염에 대해 찾아보았더니 지금과 같은 식이섬유 부족 식단이 주요 원인이 된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이 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총 세번이나 의사에게 전달하려고 했고 세번 모두 거절당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멸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가 우려하던 부작용은 여전히 가진 채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세상을 집어삼켰다. 돈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돈이 사람행세를 한다. 사람은 되려 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개인의 의지와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흐름의 방향에는 더욱 가속이 붙고 관성은 커진다. 패러다임 쉬프트의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한 두 건의 사건만으로 이 관성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나가자는 사람은 있어도, 자본주의를 엎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사람은 없다. 그만큼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위에 삶의 터전을 쌓아 올렸다.

 

  • 시작과 방향

이 모든 사건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돌도끼를 만들고, 바퀴를 만들고, 옷을 만들어 입으며 시작되었다. 만드는 행위가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었으니 인간은 만드는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도구를 가진 부족은 생존확률이 높아졌다. 만들지 못하는 부족은 자연 도태되었다. 살아남은 부족은 만드는 능력을 후대에 물려주었고, 후대는 다시 발전시키는 것을 반복하며 인간은 더욱 잘 만드는 존재로 거듭났다. 만드는 존재, 지금 경제가 가지고 있는 벡터의 시작이다.

만들어진 물건을 교환하며 경제가 생겨났다. 경제의 가장 작은 단위는 교환이며, 중간 단위는 시장이고, 가장 큰 단위가 경제다. 교환을 쉽게 하고자 조개 껍데기로 환산하던 약속이 발전해 돈이 되었다. 돈은 노동가치를 환산하는 사회적 약속이다. 만드는 데에 12시간 들어간 의자는 12시간 동안 포획한 생선과 같은 값어치를 가졌다. 노동이 있으면 돈을 벌어낼 수 있고, 돈이 있으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돈은 노동본위제다.

시장에서 살아남는 비결, 승리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고객 중심” 돈을 가진 자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하면 그만이다. 돈을 가진 자의 게으름과 탐욕을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하면 그만이다. 혁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도 공통점이 있다. 더 많은 양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효율적으로,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빠르게, 더 직관적으로, 더 편리하게, 더 쾌적하게,  더 더 더 더 더 뒤에는 무엇을 붙여도 맞는 말이 된다. 더 하기만 한다면 승리의 전략이 된다.

 

  • 최적화

경제에는 세 가지 구성원이 있다.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중간자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이어지기 어려우니 연결의 역할만 하는 중간자가 생겨났다. 재화시장에서는 유통업자라 불리고 서비스 시장에서는 중개업자라 불린다. 교환은 가치의 이전이다. 가치는 고유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교환이 이뤄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가치다. 가치의 차이를 통해 이익을 발생시키는 것이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높은 가치의 상품을 싸게 사거나 낮은 가치의 상품을 비싸게 팔면 이익이 남았다. 포장, 설득, 제안, 협상 능력이 생산능력보다 중요해졌다.

생산자와 중간자는 돈 맛을 봤다. 신이 나서 손을 잡고 춤을 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전만큼 팔리지 않았다. 필요에 대한 공급은 포화되었다. 욕망에 공급하니 조금 더 팔 수 있었다. 오래가지 않아 필요도 욕망도 포화되니 더이상 팔 것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은 더 더 더 관성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시장의 합인 경제는 더 더 더욱 그러했다. 국가도 나선다. 생산자, 유통자, 국가가 함께 손을 잡고 미친듯이 소비자를 만들어냈다.

모든 것이 포화되었다 싶으면 침체가 찾아왔다. 몇년 주기의 소침체, 기십년 주기의 대침체를 겪고 나면 경제는 다시 일어서서 가던 길을 갔다. 지구의 땅덩이는 좁고 인구는 무한정 늘어날 순 없으니, 소침체 대침체는 넘겨도 기백년 주기의 태침체는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드디어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나왔다. 실체는 없어도 거래가 가능하다는 주장. 어떤 상품도 서비스도 없다. 알맹이는 가라. 껍데기는 남고. 거래의 형식만 남겨라. 가상의 가치를 교환하자. 희망과 불안이란 감정에 팔자. 실존하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돈만 오가면 그만이니까. 금융시장 얘기다. 실존하지 않음에 거래는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물리적인 제약도 시간적인 제약도 없다. IT기술이란 부스터도 달았다. 거래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거래가능한 품목의 수량도 무제한에 가깝게 늘어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객단가*거래수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 비판

생산 도구로서의 인간 값어치는 하루가 다르게 무의미해진다. 결정된 미래이기에 이미 무의미해졌다는 미래완료시제를 써도 틀리지 않다. 생산성 측면에서 인간은 로봇에 한참 못미친다. 이 이유로 사람을 해고해도 비난받기는 커녕 우수한 경영자라고 상을 준다. 만 명의 일자리를 없앤 사람도 백 명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

유통업자와 중개업자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같다. 중간자는 곧 시장이 된다. 시장의 앞면엔 번영과 풍요가 그려져 있다. 뒷면엔 인간의 게으름과 탐욕이 그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모든 시장은 앞면의 모습으로만 보여지길 바란다. 활기 넘치는 건강한 시장의 모습이지만,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미친 자본의 사회를 가속화시키는 것도 시장이다. 연결이 조금만 천천히 되었다면 지금의 방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인류가 적응할 시간을 조금은 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의 의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돈의 의지로 돌아간다.

나에게도 다른 대책은 없다. 내일도 출근하면 돈이 시키는대로 직원의 생산성을 측정하고 평가해 키워내라고 닦달할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한없이 나이브하고 비생산적인 낭만주의자로 취급받겠지만. 빨리 이 자본주의 룰속에서 게임을 승리시킨 뒤에 여생을 보장할 만큼의 현금 다발을 쥐고 낭만을 찾아 세속을 뜨고 싶다. 낭만의 세계는 성과로 측정되지 않으니 낭만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 적어도 그 곳에선 미친 자본이 나의 의지와 판단을 조정하진 않을 것이다.

 

  • 그리고

게임의 룰이 그렇다. 이익을 조금 취하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익을 많이 취하면 나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쁜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룰에 따라 이겼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더군다나 개인의 안녕과 풍요, 가족의 안녕과 풍요를 위한 일이기에 선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으니 악한 것이다. 거래상대는 상대적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의 욕망, 이익추구, 이기심이 부딪혀가는 곳이라는 배웠기에 나쁜 것은 아니다. 한 건의 거래에도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잣대를 들이대면 이렇게 복잡해진다. 이곳엔 윤리가 없다.

가치판단이다.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대립하는 사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모순되는 가치관을 한 사람의 좁은 마음에 품어낼 순 없다. 누구든 치우친다. 치우친 상태로 대립하고 혼돈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것이 한낱 개인의 최선이다.

치우치면 편할 것을, 선택하면 편할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렇게 정리해보려고 글을 쓴다. 돈을 벌고자 한다면 부자의 가치관과 생각구조를 따르면 될 것이고, 다른 곳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것을 따르면 될 일이다. 선택한 사상 이외의 가치관은 배척하고 부정하면 될 일이다. 굳이 모순되는 가치관을 내가 다 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나는 선뜻 택하지 못한다. 모순만 발견했다. 나는 오늘도 치우치지 못했다.

세상이 그러하듯 나 또한 카오스모스다. 괜찮다. 혼란과 대립이 존재하기에 당신은 균형의 상태다. 그저 엔트로피가 조금 높을 뿐이다.

 

— 덧붙임 —

생각숙제1 : 생산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무가치해진 시대, 인간의 가치는 0인가 null인가.

생각숙제2 : 비생산의 영역에서 인간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생각숙제3 : 노동은 이미 무의미해졌는데(미래완료), 왜 돈은 여전히 노동본위제일까?

 

— 덧붙임 210619 —

경제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다보니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였다. 정반대로 향하려는 가치 사이에서 고민했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 답을 주었다. 존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경제활동을 추구하면 된다.

나는 매체를 운영했다. 하루에 2만 명씩 들어왔다. 서버 전송 트래픽은 일 50기가에 달했다. 팬 수는 쌓여 7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다. TAT지수도 아주 높았고 좋/댓/공의 비율도 타 채널과 비교해 아주 높게 유지됐다. 핵심 독자 층이 어느 매체보다도 높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확보한 이 트래픽의 값어치가 대단히 가치있는 것인 줄 알았다. 트래픽 장사치였던 나는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을 속였다.

트래픽 측정 단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각각의 전환에 대한 값어치를 계산해보자. 일반적인 계산법이 없으니, 나의 지난 3년 경험을 토대로 상대 비교 공식을 마련해본다.

 

PV (Page View)

PV는 가장 낮은 트래픽 측정 단위이다. 한 페이지가 보여졌다는 조회 기록이다. 어떤 이는 2분 동안 정독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페이지에 들어오자마자 3초만에 나갔을 수도 있다. 또 해킹 로봇에 의해 공격 당해 증가하기도 한다.

1PV

좋아요 / ♡ / 공감

콘텐츠를 단순히 보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한 번의 클릭을 통해 자신의 감정반응을 남긴다. 10PV가 발생하면 그 중 1/10의 사람이 피드백을 남긴다. 10PV는 1좋아요와 맞먹는다.

10PV = 1좋아요

댓글 / 공유

댓글과 공유는 단순한 클릭 피드백보다 높은 단위이다. 텍스트를 입력해야 하고, 공유시 소개할 멘트를 새로 생각해야 한다. 피드백을 남기기 위해 더 큰 수고와 시간을 요한다. 10좋아요는 1댓글 혹은 1공유와 맞먹는다.

100PV = 10좋아요 = 1댓글(공유)

도달

Social Network Service는 네트워크 서비스다. 이름대로 연결을 촉진시키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들이 연결을 많이 발생시키기 위해 쓰는 전략으로 트래픽을 쪼개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PV보다도 낮은 단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미리보기 콘텐츠를 만들어 냄으로 콘텐츠의 목차를 만들어낸다. 세분화된 프리뷰 콘텐츠를 묶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빠르게 다수의 콘텐츠를 검토할 수 있도록 사용자 환경을 제공한다. 페이스북의 ‘도달’이 대표적이다. 자발적으로 퍼져나가는 아웃링크 콘텐츠는 도달>PV 전환비가 5:1 수준이지만, 광고 콘텐츠의 경우 100:1이하의 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평준화하기에는 너무 폭이 크지만, 트래픽 계산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 광고이기 때문에 조금 후하게 쳐서 10도달이 1PV와 맞먹는다 하겠다.

1,000도달 = 100PV = 10좋아요 = 1댓글(공유)

메시지

매체 운영자 혹은 콘텐츠 게시자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댓글 혹은 공유보다 높은 트래픽 단위이다. 댓글에 친구를 소환하거나 시덥잖은 농담을 남기는 것보다 적극적인 피드백이기 때문이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면 메시지의 비중이 아주 높을 것이다. 나는 콘텐츠 배포가 주요 활동인 매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메시지로의 전환은 낮은 편이었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100개의 댓글이 달리면 1개의 메시지가 왔다.

100,000도달 = 10,000PV = 1,000좋아요 = 100댓글(공유) = 1메시지

메일 / 전화문의

메일을 받았다면 메시지를 받는 것보다 10배 기쁜 일이다. 메시지는 SNS에서 연결을 늘리기 위해 마련해둔 여러 장치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증폭된 트래픽이기 때문이다. 페이지 관리자의 메시지 응답률 및 평균 응답시간을 노출시킴으로 메시지가 활성화되길 넛지 유도한다. 메일을 보낸다는 것은 이런 인위적인 공작활동과 상관없이 진정 연락하고 싶은 강한 의지가 있어서 연락하는 것이다. 메시지는 ‘하이, 헬로, 저기요’라고 구어체로 말을 해도 되지만, 메일은 자기소개와 함께 비즈니스 매너를 갖춰 맥락에 맞춰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역시 요구되는 시간과 노력 측면에서도 차이 난다. 전화문의는 메일과 거의 동일한 무게를 가진다. 나는 메시지 10개를 받으면 메일은 1통 정도 받았다.

1,000,000도달 = 100,000PV = 10,000좋아요 = 1,000댓글(공유) = 10메시지 = 1메일(전화)

대면 미팅

나는 매체를 운영함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도달되었다. 동시에 온갖 세상 뜨내기들과 연결되었다. 댓글도 보고, 메시지도 주고 받고, 메일도 주고 받고, 전화 통화도 온 종일 하는데, 실제로 쓸모있는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다. 직접 대면미팅으로 이어질 정도로 강한 관계는 없이, 상대가 별 생각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10초 만에 남긴 피드백에 내가 10분씩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 억울했다. 각 트래픽 마다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서 서로의 손을 쥐며 인사하고, 커피를 서로 사겠다며 다투는 정도의 인연은 10통의 메일 혹은 전화를 받으면 1회 발생했다.

10,000,000도달 = 1,000,000PV = 100,000좋아요 = 10,000댓글(공유) = 100메시지 = 10메일(전화) = 1미팅

 

따라서, 내가 당신을 만나 커피를 한 잔 마신다는 것, 그 관계는 페이스북에서 1천만 명에게 도달하고, 10만 명에게 따봉을 받는 것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

이 외에도 술자리를 갖는 관계의 무게 X10, 메말라빠진 디지털 시대에 쓰여진 아날로그 감성 손편지의 무게 X10,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는 관계의 무게 X10로 측정해보려고 했으나 무리수인 것 같아 그냥 관둔다.

 

난 3년간 매체를 운영했고, 3달 전부터는 거래 중개일을 하고 있다. 다시금 확인한다.

10만 개의 페이스북 좋아요 보다 10만원 짜리 거래 한 건이 훨씬 중요하다.

세계 최초의 박람회는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프랑스 파리에서는 세계 최초의 백화점 몽마르쉐가 개점한다. 같은 시기에 인간의 욕망은 규격화되고 체계화되었다. 산업 내에서 거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형태를 찾은 이 두 가지 포맷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로부터 165년이 지났다. 산업박람회가 위기란다. 이는 미디어의 위기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굳이 전시행사에 오지 않더라도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대체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보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전시 콘텐츠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많아서 생긴 문제다.

전시회도 하나의 플랫폼이다. 정보가 연결되지 않던 시대에 정보를 압축적이고 집중적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이점을 가졌다. 모든 정보가 연결된 시대에는 그 역할이 바뀔 수 밖에. 정보를 체계화시켜 탐색의 기회비용을 줄여줌으로 값어치가 생겼던 게 박람회인데, 지금과 같은 시대에 고민없이 부스 수백개 때려박고 수금하는 박람회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산업의 관성에 의해 몇 년간 더 현상유지하더라도 한순간에 전환점을 맞을 것이다.

전시회는 더욱이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한계도 가진다. 이런 한계점은 다른 플레이어들에 의해 개선되어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으로 분과될 것이다. 공급자 중심적인 접근법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단점을 극복하거나 보완할 것이 아니라 더욱 물리적이고 제한적인 시간에만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에 집중해야 한다.

접속 중심 구도에서 기업의 성공은 시장에서 그때그때 팔아 치우는 물건의 양보다는 고객과 장기적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점점 좌우된다. 상품과 서비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데 유념해야 한다. 산업 시대에는 소비자에게 상품을 팔면서 무료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되고 있다. 요즘은 후속 서비스를 통해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겠다는 계산으로 상품을 아예 공짜로 제공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소비자의 의식도 소유에서 접속으로 서서히 기울 것이다. 값싼 내구재는 여전히 시장에서 거래되겠지만 가전 제품이라든지 자동차나 집 같은 고가품은 공급자에 의해 소비자에게 단기 대여, 임대, 회원제 같은 다양한 서비스 계약의 형태로 제공될 것이다.

앞으로 25년 정도만 지나면 소유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구태의연하다는 인식이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서 일반화될 것이다. 소유는 모든 것이 휙휙 바뀌는 풍토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느려터진 생각이다. 사람들은 물적 자산이나 재산을 일정 기간 이상 보유하는 것이 이롭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소유를 한다. <가진다>, <보유한다>, <축적한다>는 생각은 그 동안 금과옥조로 떠받들어졌다. 하지만 과학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경제 활동이 어지러울 만큼 빠르게 진행되는 세상에서 소유에 집착하는 것은 곧 자멸하는 길이다. 주문 생산이 일반화되고 끊임없는 혁신과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지며 제품의 수명이 점점 단축되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퇴물이 된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변화 밖에 없는 세상에서, 소유하고 보유하고 축적하는 태도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

접속의 시대를 지배하는 경영학적 전제는 시장의 시대를 지배하던 전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새로운 세계에서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고 판매자와 구매자는 공급자와 사용자로 바뀐다. 사실상 모든 것이 접속된다.

완전히 성숙한 시장 경제에서도 아직 상업성은 주기적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판매자와 구매자는 잠깐 만나서 상품과 서비스의 인도 조건을 협의하지만 그 다음에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나머지 시장은 시장과 상업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문화적 시간-상품화되지 않은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접속 관계에 치우친 하이퍼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우리의 시간이 거의 모두 상품화된다. 가령 소비자가 자동차를 살 때 그가 자동차 판매상과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똑 같은 자동차를 임대의 형태로 빌릴 경우 사용자와 공급자의 관계는 지속되며 계약 기간 동안에는 중단되지 않는다. 공급자는 소비자와의 <상품화된 관계>를 선호한다. 얼마든지 갱신할 수 있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영속적인 교분을 맺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임대, 가입, 등록, 수임료 등을 통해 이런저런 형식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모든 시간은 영리적 시간이 되어버린다. 문화적 시간은 기울고 인류는 영리적 고리를 통해서만 문명을 지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탈근대 사회의 위기이다.

네이버도 윙버스를 인수해 윙스푼으로 운영하다 13년 12월 18일 서비스 종료.

Yelp는 12년 IPO 했지만, 15년 5월 8일 M&A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왜 다 망하나.

 

  1. 날것의 정보 자체가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

백종원 아저씨가 2010년에 쓴 책 <초짜도 대박 나는 전문식당>에서는 상권을 3가지로 나눈다. 1차 상권은 걸어서 갈 수 있는 지역을 뜻한다. 2차 상권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동네를 이동하는 정도다. 3차 상권은 미디어에 나온 소식을 듣고 도시를 이동하는 정도다. 서비스가 전국구를 대상으로 하려면 아주 극단적으로 로컬한 정보를 다루거나 3차 상권에 대한 정보를 다뤄야 한다. 이 상권 구분은 장사하는 사장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만, 각 상권 고객마다 필요로 하는 정보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게 내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부분이다.

한국 도시의 음식점들은 고밀도로 밀집해 있으므로 아무리 데이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모은다 한들, 1차 상권에서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보다 나은 경험을 제공할 수 없다. 가로수길이 흥했다가 2년 만에 죽고 경리단길이 또 떴다가 식어가는 변화는 얼마나 빠르며 한 지역 내에서도 개폐업은 얼마나 잦은가. 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2010년도 올라웍스에서 내어놓은 스캔서치의 사용자 경험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손바닥만한 아이폰 안에서 재현되는 virtual layer에 published된 정보는 2~3개의 상점이지만, 두 눈으로 실제 세계를 맞이하면 50개의 간판을 읽을 수 있다. ‘후보 식당의 리스트 확보’라는 가장 우선적인 사용자 경험단계에서 큰 실망을 안겨준다.

식당정보서비스는 모바일기기에서 실행되는 앱서비스가 출시되기 전에도 ‘맛집추천’이라는 키워드로 네이버에 검색하면 104개의 맛집소개 플랫폼들이 나왔을 정도로 많았다.(자체조사, 2011년) 블루리본서베이는 10년째 식당정보를 묶어 책으로 발간하고 있으니 식당정보서비스는 새로운 서비스라고 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 어떤 디바이스를 통해 전달되는지완 상관없이 제공되는 정보의 종류들은 대충 이러하다. 식당의 이름, 식당의 위치, 식당의 사진, 음식 사진, 메뉴명, 음식가격, 연락처, 비전문가나 전문가의 리뷰…. 이러한 정보들은 사람들의 발길을 움직이게 하거나 지갑을 열게 만들 수 없다. 데이터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생성해낼 수 없다. 3차 상권 사람들이 이 정보들을 보고 식사 경험까지 이어지도록 유도하기에는 너무나 생기가 없는, 발굴 상태 그대로의 static 정보다.

 

  1. 괜찮았던 서비스들

한국에선 쓸 수 없는 서비스지만, Yelp의 사용자 만족도는 어찌 그렇게나 좋았는가? 2013년 가을, 촌놈이 미국 땅을 처음 밟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거긴 땅이 넓어서 1차상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 동부(뉴욕)는 한국의 서울처럼 지하철도 있고 마천루가 빼곡한 도심지가 컸지만, 샌프란시스코의 다운타운은 서울 강남역-역삼역 사이의 테헤란로 거리 정도가 전부였다. 숙소가 있던 서니베일, 40분 걸리던 도심지, 그 외에도 팔로알토와 산호세를 매일같이 옮겨 다니며 끼니를 해결해야 했으니, 동네마다 먹을만한 식당을 헤맬 때 yelp에서 제공하는 저런 static한 정보들도 가뭄에 단비같이 느껴졌다. 밥을 먹으려면 어차피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으니 안 쓸 이유가 없었다. 아침을 제외하고 하루에 2번, 보름 동안 30번 yelp의 도움을 받았다. 확보된 데이터도 많고 음식 범주도 넓어 새로운 음식을 explore하는 데 더없이 좋은 서비스였다. 한국의 서비스보다 어뷰징 이슈가 적어 정보신뢰도 또한 높았다. 별 4개짜리를 받은 식당이 실망을 안겨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위시랜드는 2011년도부터 사업을 시작했는데 공격적인 영업력으로 서울지역의 50개 식당과 계약을 맺었다. 앱에서 보이는 식당 리스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 뚜렷한 편집(또는 선별)기준이 좋았다. “연인과 함께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 파트너사와 미팅을 잡아도 가오가 떨어지지 않는 곳, 오랜만에 가족끼리 근사하게 식사할 곳”을 찾는 사람이 2인 기준 4~10만 원 사이에서 식사할 수 있는 식당들이었다. 상권으로 구분하면 3차 상권 중에서 특정 목적을 가진 고객만으로 더 좁힌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제품은 누구를 위한 제품도 아니다”라는 교과서에 나오는 말씀segmentation을 잘 따랐다.) 이 고객의 가장 우선적인 사용자 경험인 ‘후보 식당의 리스트 확보’를 훌륭하게 충족시켰다. 나는 여길 통해 예약을 3번 정도 했다. (위시랜드 통해서 예약하면 30% 할인받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조건은 소셜커머스와 같은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해부터 제휴업체 확장을 위해 샤브샤브집, 쇠고기구이집등을 무리하게 집어넣으면서 나에겐 그 리스트들이 무의미해졌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확장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엔 지금만큼 파인다이닝 시장이 크지 않았다. 위시랜드는 2년 전 서비스를 종료했다.

 

  1. 왜 돈을 못 버나.

식당에 대한 정보, 먹을 것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나 넘쳐난다. 페이스북에도 하루에 몇 번씩, 인스타그램에는 종일 먹고 마셨다는 소식이 원치 않는데도 보인다. 대중매체에서는 방송과 기사가 앞다투어 먹거리에 대한 정보를 쏟아낸다. 내가 원하면 블로그를 찾거나 친구에게 물어보거나 수많은 앱 서비스에서 리스트를 받아볼 수 있고, 책을 사도 되고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거나 직장 동료들끼리 리스트를 공유하기도 한다.

식당정보서비스를 ‘정보플랫폼’이라고 정의할 때, 정보 자체가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데 그러기 힘들다. 그 이유를 정보 자체에서 찾으면 안된다. 누구도 정보를 독점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그 이유다. 모든 종류의 식당정보가 서로의 경쟁 상대가 된다. 경쟁앱 뿐만 아니라, 새로 출간되는 책도, 생생정보통도, 생활의 달인도, 블로거도 경쟁 상대가 된다. 앱 정보가 부족한 시대라면 모를까, 정보가 넘쳐나서 다른 정보들을 제치고 턱 밑에까지 정보를 밀어 넣어줘야 겨우 정보를 받아먹는 정보과잉시대에는 정보독점을 하겠다는 목표 자체가 잘못된 설정이다. (최근 앱서비스 대다수는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긁어모아crawling서 빅데이터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재정렬된 것이기 때문에 이 목표를 지향하진 않을 것이다.)

이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정보를 독점하지 못하면 플랫폼이 수익전략을 구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보를 독점하면 상위노출, 순위조작의 고전적인 방법으로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지만, 대체재가 넘쳐나는 지금 봉이 김선달식 전략이 먹힐 리 없다.

 

  1. 그럼 돈을 어떻게 벌까?

‘미디어가 돈 벌기 힘든 이유’와 공감대가 생긴다. 콘텐츠를 생산해도 재화로 교환할 수 없다. 정보이용자가 많아도 직접 돈을 내진 않는다.

돈을 ‘어떻게’보다 돈을 ‘어디서’부터 고민해보자. 고객이 누구인지부터 설정해보자. ①식당주인에게 받을 것인가? ②식당에 가는 손님에게 받을 것인가? ③아니면 이 두 집단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는 제 3자에게서 받을 것인가?

미디어에선 기본적으로 ③번 고객에 해당하는 광고주에게 돈을 받는다. 정보과잉시대라 광고효율과 광고비가 낮아지고 있다. 예전엔 ②번에 해당하는 독자에게 유가지로 돈을 받았지만, 지금은 선물을 얹어주며 공짜로 보라 해도 구독률이 떨어지는 현상을 막기가 힘들다. ①번에게 돈 받고 홍보기사 쓰는 건 누구나 아는(?) 업계의 비밀(?)이었으나 강도질도 금고에 돈이 있을 때 수익이 나는 법이다. SK최회장이 언론사에 삥뜯기기보단 커밍아웃을 택한 최근의 사건은 이 수익모델이 앞으로 더욱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복선이 될 것이다.

옐프는 ①번을 택해 sponsor마크 붙이고 상위에 노출시켜 주었다. Yelp의 시도는 네이버에 검색되던 104개의 맛집추천 플랫폼과 같이 작동하지 않았다. 식당 사장님들을 잘 사기쳐설득해 노출강화 광고상품을 팔았다 한들 플랫폼 신뢰도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사용자 경험을 저해한다. 광고한 식당은 ‘우리 가게 장사 안되니까 좀 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꼴이 되고 만다.

Open Table은 ②번 고객에게 돈을 받는다. 엄밀히 말하면 돈나오는 구멍은 ①번과 ②번 사이에 있는 관계에서다. 예약과 결제과정을 대행할 수 있어야 중간자가 수수료를 청구할 명목과 권리가 생기는데 Open Table에선 이것이 작동한다. ‘pay first, eat later’이라는 캠페인이 먹힌다. 파인다이닝 식당 중에서 예약은 무조건 open table로만 받는 곳도 많다. 이곳은 식당정보제공은 뒷전이고 포스기를 제공해서 고객(식당)의 사용경험개선, 손님의 예약과 결제를 포함해 관련된 모든 활동을 한 큐에 지원하고 있다. 한국은 노쇼에 대한 이슈가 이제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달엔 조선일보에서 천박한 시민의식 훈계하듯 1면에 기사를 냈고, 최근 셰프님들 노쇼 때문에 얼굴이 늙어간다며 연합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윙스푼도 옐프도 ①번과 ②번 사이에 있는 관계를 잡진 못했다.

이도 저도 못했다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④번을 누구보다 빨리 찾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