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라는 커뮤니케이션은 보여주는 사람이 유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정보에 대한 편집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달에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광고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지게 되고 사람들이 수용할 한도를 넘어서게 되자 그 우위는 반전되었다.

보는 사람이 많은 정보들을 골라서 보게 되고, 유익하지 못한 것들을 골라내는 편집권을 가지게 되었다. 웹2.0이 나타난 시점을 기준으로 다양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한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 전세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광고기피증이라는 단어가 최근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심각성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기울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인지 기업과 고객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보하게 되었는데, 플랫폼을 통해서 기업과 고객이 더 밀접한 공간에서 더 집중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플랫폼의 예로는, 소개팅 주선자나 구인구직 사이트, 각종 fair 및 세미나, 또 최근에 세상의 흐름을 가장 많이 바꾼 애플의 앱스토어를 들 수 있다.

기존의 커뮤니케이션과 비교되는 플랫폼의 가장 큰 특징은 기업이 나서느냐, 고객이 직접 나서느냐는 점이다.

기존의 광고나 홍보 따위는 기업이 독자적으로 고객을 찾아나서는 과정이었다면, 플랫폼에서는 공통된 욕구를 가진 고객들이 서로 무리를 형성한 뒤 그 장소에 기업들이 찾아 드는 방식으로 플랫폼이 형성된다는 것이다.(이는 플랫폼 설립 순서에 따른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이 서로 부합하는 두 집단이 만나서 집중된 커뮤니케이션을 벌이는 곳이 플랫폼이다.

납품형 인간 [명사]

1. 방송이나 영상제작 업계에서 종사하며 제한기간안에 작품을 제작하여 납품하는 일장단에 맞춰 생활패턴이 결정지어지는 21C신인류의 한 형태. 대체로 게을러 터져서 일을 미루다 미루다 결국 납품기일 3일 전에 내리 밤을 새는 작업을 하곤 한다.

2. 3일 밤샘 작업을 하고 나서도 납품을 했다는 해방감에 술마시느라 하루 더 밤새는 사람. (유) PD, 방송인, 광고인, 프리랜서 듸자이너 등

 

내가 디지털영상을 배우는 학교엔 암실이 하나 있다. 흑백사진을 인화하는 곳이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필름 소비량은 줄어만 가는데 사진과에서도 배우지 않는 암실수업이 영상전공 학과에 떡하니 있다. 사진과에서 고지식한 교수 하나가 넘어왔는데 영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머라도 가르친다고 가르쳤던 게 검은 방에서 약품냄새 풀풀 풍겨가며 사진 현상하는 수업이었다.

DSLR 카메라의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암실수업은 필요한가? 난 필요 없다고 말해보겠다.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 우리 교수님께선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실 게 눈에 선하다. “사진이 발전해온 역사를 배우지 않고선 사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거나 “정성들여 사진을 한 장씩 인화해 본 사람만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디지털편집이 보급화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테이프 두 개를 동시에 기계 안에 넣고 복사를 했던 ‘리니어 편집’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컴퓨터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넌-리니어 편집’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에 비하면 너무 고생을 덜 한다는 이유였다. 고생을 하지 않는 편집,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태우지 않는 편집은 편집자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술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마 ‘오리지널’과 ‘본질’의 차이점을 오해하는데서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리지널’은 그야말로 시간상에서 앞서 존재했던 것들을 말하지만, ‘본질’은 그 사물의 존재의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이다. 위의 사람들은 두 개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고지식한 아저씨들을 보면서 원시인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구석기인들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차례대로 맞으면서 기술의 발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돌도끼를 쓰던 중, 청동도끼가 나오니 돌도끼를 버리고 쇠도끼가 나오니 청동도끼를 버렸다. ‘Orignal’이라는 단어에는 ‘기원이 되는’ 이나 ‘최초의’ 라는 좋은 뜻도 담겨 있으나 동시에 ‘구식의’라는 뜻도 함께 담겨있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새 기술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한 구식에 정을 떼질 못한다. 이유는 사실 기술이 너무 급속도로 발전하다 보니 자신들은 그 기술을 따라갈 자신이 없는 거다. 나이가 어린것들이 순식간에 배워버리는 그 기술이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정체는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상대적인 퇴보를 겪게 되니 난감하여 헛소리가 저도 모르게 세어 나오는 것이다.

청동기인들은 새로 나온 쇠도끼를 보고 ‘이것이야 말로 도끼의 진정한 완성형’이라는 생각을 했다. 돌도끼는 도끼의 오리지널이긴 했지만, ‘날카롭고’, ‘단단하고’, ‘사용하기 편한’ 도끼의 본질에는 전혀 거리가 있었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필름 사진기가 사진의 역사에서 오리지널이긴 하겠지만, ‘선명하고’, ‘사용이 편하고’, ‘셔터스피드가 빠르고’, ‘색감이 좋고’ 등의 사진이 지향하는 목적까지 발전하기엔 한계가 있는 기계라는 것이다.

기계뿐만이 아니다. 파피루스나 대나무 또는 천 쪼가리 위에 글을 썼던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의 책이 ‘기록을 남기기 위한’ 책의 의도나 목적에 가깝다.

성냥보다는 라이터가, 소보다는 트랙터가, 연필보다는 샤프가, 짚신보다는 나이키가,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이, 삽보다는 포크레인이, 디스켓보다는 CD나 USB가, 편지보다는 e-mail이, 브라운관보다는 LED가 제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술이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너무나 명백하게 역사적으로 남겨진 사실들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은 발전되었고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은 기술은 개발되지도 않았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했고, 자유로운 인간은 더욱 기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인간과 기술은 뗄 레야 뗄 수가 없다.

한참을 글을 쓰다 보니 나는 얼핏 기술 예찬론자처럼 보인다. 기술의 장점만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기술도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위에 나열한 것들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구식의 것을 도태되게 만든 최신기술의 선두주자’ 쯤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술들이 가지는 한 가지 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효율’이다.

효율이 대량생산체제를 만들어서 실업자를 무지막지하게 쏟아냈다. 효율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도록 하였고 일부 인간은 비인간적인 계산기로 만들고 일부의 인간들은 낙오자로 만들어냈다. 효율성을 지향하는 기업이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린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효율에서 나온 것이며, 효율은 기술이 지향하며 달려가는 종착역이다.

인간의 손을 통해서 실현되지만, 전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기술은 인간의 친구인가? 적인가? 기술이 앞으로도 계속 효율을 따지며 자가발전 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정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 인정해야 할 암흑시대의 임박이다.

글을 쓰는 중에 글의 의도가 많이 바뀌어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되었다. 시간도 늦었고 어딜 손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글은 이만 줄인다.

애초의 의도는 ‘기술은 발전하는 만큼 교육자는 퇴보한다.’는 의도였다.

몇일 전에 썼던 글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예술도 발전한다.’ 와 대칭되는 글이다.

20100614 새벽

사람은 말을 할 줄 안다. 언어가 생기고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그것은 인간의 문명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인간은 더욱 언어를 활용했고 넓어진 추상언어와 개념언어들, 다양해진 내적표현들로 하여금 인간은 더욱 다양하고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와 반대의 경향을 자주 느낀다. 말을 하기 때문에 생각이 제한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사람들은 말을 너무 쉽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따라서 생각한다. 이것은 제대로 된 프로세스가 아니다. 생각의 결과를 말로 표현해야 할 것인데, 말이 너무 익숙해버린 나머지 말을 하면서 생각을 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언행일치를 하지 못한다.

인간은 주체성이 있다. 인간에게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시간개념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되자 인간은 자신의 삶이란 개념까지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의 자아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자신은 누구인가 어떠한 삶을 살다가 죽을 것인가 라는 고민에 빠지게 된 건 인류의 역사에서 정말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와 반대의 경향을 자주 느낀다. 인간이 주체성있게 삶을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나 사회가 너무 기반이 탄탄하게 다져져 있는 상황이라 인간은 그 환경에서 주체성을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인간은 주체적이지 못한 상태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야 하는 상황에 빠져있다.

인간은 행동을 너무 쉽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한 행동에 따라서 자신의 삶이 결정되어진다. 이것은 제대로 된 프로세스가 아니다. 자신의 목표를 지향하며 행동을 해야 할진데, 행동이 너무 성급한 나머지 자신의 삶의 가치나 삶의 방향이 별 생각없이 했던 행동에 의해 결정된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생각해봄 없이 산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나 가치가 미약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