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getting hot.
Don’t get me wrong.
Get off at the next station.
She hasn’t got any excuse.

네개의 문장에 쓰인 동사는 모두 같다. Get. 하지만 의미는 모두 다르다. 한 단어의 뒤에 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의미가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한국어에서도 예를 찾을 수 있다.

사람을 때리다.
문자 한통 때리라.
아, 골때리네.

여기서도 ‘때리다’라는 동사는 여러가지 의미로 쓰였다. 이 동사 뒤에 ‘치다’, ‘보내다’, ‘아프게하다’라는 세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머리가 아파진다.

사실 기호의 뒷면에는 어느것도 없다. 기호는 양면이 아니다. 기호의 모습은 보이는 것 그대로이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기호의 의미가 때마다 달라지는 이유는 뒤에 여러가지 의미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기호들을 만나면서 조합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영상에서도 한 컷, 한 컷이 다른 컷들과 만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기호들은 서로 만나 연결되면서 문맥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의 2차원 선상에 올려놓아진다. 그리곤 해석을 기다린다.

기호들이 만나면서 생성되는 이미지들은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가 가능한지 알 수 없다. 한계를 보지 못할 정도로 광범위한 창작가능의 장이다.

인간들도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요소로 간주한다면, 인간들과 인간들이 만나서 생겨나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얼마나 또 많을까. 백명의 사람을 만나면 백개의 인간관계가 생겨나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새롭고 개성있는 색깔의 만남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인간관계에서는 이 이미지 생성의 가능성이 적절하게 대입되지 못하는 것 같다. 모든 인간관계가 전형적이다. 나는 아직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그 타인은 이미 나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결정해 놓았다.

철학을 철학하자. 너무 빡세다. 쉬었다 가야겠다.

난 철학도사도 아니고, 철학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뒤늦게 머리가 다 굵어지고 나서야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철학공부를 한다고 해서 모두 철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더라.

수천 년 간 인류가 발전시켜 온 생각의 역사를 몇 년 안에 배우려니 훑어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걸러내지도 못하고 우적우적 귀로 눈으로 처먹었다. 이것저것 다 옳은 말로 들린다. 살다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말들을 한참 듣다보니 내 머릿속엔 이은호는 어디로 가고 철학자들만 가득차서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20년간 생각 없이 살고, 2년간 군대에 있었다. 22년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생각’을 하려고 한다. 무리가 올 수 밖에.

철학은 ‘Learn to Unlearn’ 이라고 한다. 이미 배워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 중 틀렸거나 모순된 부분들을 제거하고 수정하기 위한 공부인 것이다. 들어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모순을 찾고 틀린 부분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결국엔 뒤늦게 시작한 철학과 주워들은 논리들, 그리고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나의 본능이 남게 된다.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인줄로 착각하고 떠들어대는 한마리의 동물이 남게 되겠지.

나의 생각을 하자.

 

—- 덧붙임 (2015.12.18) —-

평생을 ‘자아’ 없이 살았음을 반성하기 시작했다.그로부터 고작 5년이 지났을 뿐이다.

50, 촥, 촥, 51, 촥, 촥, 52, 촥, 촥…

문득 고등학교 때 줄넘기를 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점심시간에 줄넘기를 하곤 했다. 02년도 강서고등학교 2학년 4반 교실 뒤편에서 나는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던 2단 뛰기 50개를 성공한 뒤 쓰러져서 한동안 숨을 헐떡였다. 친구들은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며 대단하다는 존경심을 표하며 내가 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부축해주었다. 내가 50개 신기록을 세우면서 줄넘기는 반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친구들도 내 기록에 도전했지만 50개는 커녕 30개를 성공하는 친구도 없었다. 그 당시 옆 반의 한 친구가 유일한 경쟁상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친구는 2단 뛰기로는 내 기록을 깨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3단 뛰기로 11개를 성공해서 이목을 끌었다. 그것은 2단 뛰기 50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나는 무시했고 내가 줄넘기의 최강자라고 우겼다. 그렇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에서 2단 뛰기를 가장 잘하는 사나이가 되었다.

59, 촥, 촥, 60, 촥, 촥…

나는 이미 내가 세웠던 2단 뛰기의 기록 50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숨은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2단 뛰기의 최고신기록 보유자가 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내가 줄넘기 할 때마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던 서경진이라는 녀석이 갑자기 줄을 잡더니 필요 이상의 점프를 하며 2단 뛰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점프를 높게 하면 에너지 소비가 커서 20개도 채 못할 것이라고 떵떵거렸다. 그런 나를 무시하듯 20개를 거뜬히 넘기고 30개가 되어서야 콧소리를 조금 내면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서경진은 절대 내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붉어진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지지 않았다. 호흡도 규칙적으로 리듬감을 찾아갔다. 불안정한 점프였지만 사방팔방을 다 활보하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2단 뛰기를 성공해내고 있었다. 좀체 멈추지 않는 줄넘기 소리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경진이에게로 모였다.

71, 촥, 촥, 72, 촥, 촥…

경진이는 그렇게 첫 도전에서 74개의 기록을 세웠다. 나는 그 당시 너무 충격이 컸던지 코웃음이 나왔다. 줄넘기에선 나를 능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을 거라 자부했는데 너무나 쉽게 깨지고 말았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서경진은 줄넘기의 신이다. 인간의 한계는 50개이고 신의 한계는 75개쯤 되나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 하면서 나는 인간으로서 2단 뛰기의 최고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74, 촥, 촥, 75, 촥, 촥…

그 이후로 내가 줄넘기 할 때 시선을 주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다.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줄넘기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렇게 경진이의 기록을 넘어섰다. 줄넘기의 신을 능가했다. 신의 한계인 75개도 넘었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83, 촥, 촥, 84, 촥, 촥…

나는 이미 내 몸의 한계를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산소 공급이 많이 안되는지 팔 끝이 저려오기 시작했고, 눈 앞도 차츰 캄캄해져 갔다. 이제껏 오래달리기를 할 때에도 줄넘기를 할 때에도 이렇게 힘들어본 적은 없었다. 내 몸의 모든 부분들이 고통을 부르지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턱을 처들려 졌다. 거울 위에 적혀있는 ‘투지’와 ‘집념’이 눈에 들어왔다.

89, 촥, 촥, 90, 촥, 촥…

10개만 더 하면 100개다. 벌써부터 나의 뛰는 폼은 서경진이 뛰던 폼보다 훨씬 불안정해져 있었다.

92, 촥, 촥, 93, 촥, 촥…

단 몇 개만 더하면 100개를 성공할 수 있고 세자리 숫자라는 값진 의미의 신기록이 된다. 나는 숨을 참았다. 눈도 감았다. 입도 다물었다.

97, 촥, 촥, 98, 촥, 촥, 99, 촥, 촥, 100!

줄넘기가 나의 발아래를 빠져나가자마자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100개를 성공했다! 나는 인간의 한계도 넘었고 신의 한계도 넘은 2단 뛰기에 있어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강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고등학생 때 고작 50개를 해놓고 저질렀던 서툰 오만을 나는 반성했다. 그럼과 동시에 더 이상의 최고기록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또 확신했다.
한참을 숨을 고른 뒤 여전히 쓰러진 채로 외쳤다. 누군가와 이 희열을 공유하고 싶었다.

“관장님!! 헉, 헉, 100개 했습니다! 100개! 헉헉.”

관장님이 대답했다.

“뭐.”

관장님은 내가 그렇게 열심히 2단 뛰기 신기록을 세우는 동안 신경을 쓰지도 않으셨나보다.

“헉헉헉. 2단 뛰기 백개 했습니다! 백개!”

관장님이 대답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어리둥절해 했다. 관장님은 2단 뛰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으신 것일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왜 모르시는 걸까. 관장님은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오시더니 다시 말씀했다.

“열심 해라, 열심. 막 300개도 하고 그래야 된다. 초딩들 300개 막 쉽게 한다. 열심 해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시발 살아서 무엇하나 80년 뒤 뒈져버리는데 뒈지는게 허무해서 씨라도 많이 뿌려볼까 한들 그자식들 또한 내가 아니며 나의 일부조차 안되기에 헛된 노력이다 세상에 책이라도 몇권 써놓고 가면 보람차려나 생각해봐도 30억년 뒤에는 태양이 너무 커져서 지구를 삼켜버릴 텐데 50억년뒤에는 지구를 먹어버린 태양조차 터져버릴 것이고 60억년 후에는 우리 은하가 안드로메다 은하와 충돌해서 모든게 혼란에 빠진다 빅뱅 이후로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멀어져 가고 있는데 우리 은하군은 다른 은하군과 멀어져 가므로 인력이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은하 자체의 인력도 줄어들어감으로 모든 개체들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인력이 줄어들게 되어 최소단위 원자, 그안의 양성자 중성자 까지 인력이 없어지게 된다 모든 것이 언제 존재했었냐는 증거도 못남기고 사라져버릴 것인데 이 내 짧은 인생 얼마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가 시발

 

—- 덧붙임 (2015.12.18) —-

사회에 나오기가 무서워 허무주의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이미지 공부를 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던 어제였습니다. 어젯밤 저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을 했습니다. 보는 것에 집착이 너무 심했던 요즘 꿈속에서도 무엇인가가 등장해서 보였습니다. 이제껏 본적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꿈속이 아니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인간의 시각능력으로는 볼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제가 보았던 그 풍경에는 거리에 상관없이 초점이 맞아있었습니다. 모든 눈알과 카메라에는 초점이 있어서 가까운 곳에 초점이 맞으면 멀리 있는 곳은 흐리게 보이고 먼 곳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운 곳은 초점이 안 맞게 됩니다. 제가 꿈에서 경험한 풍경에는 모든 곳에 초점이 다 맞아 있었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선명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야각 120도를 초월한 풍경이었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공간을 저는 시각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보았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알았다고 표현해야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보는 과정도 없었고 이미지를 읽는 과정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아무런 감각적 자극도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안에 있었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주 선명한 이미지로 저에게 다가왔을 뿐입니다. 봄과 동시에 이미지의 이미지를 느꼈고 물체의 상은 그 뒤에 저의 머릿속에 새겨졌습니다. 눈을 감고 상상력을 통해 본 꿈속의 세계는 아직도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