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getting hot.
Don’t get me wrong.
Get off at the next station.
She hasn’t got any excuse.

네개의 문장에 쓰인 동사는 모두 같다. Get. 하지만 의미는 모두 다르다. 한 단어의 뒤에 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의미가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한국어에서도 예를 찾을 수 있다.

사람을 때리다.
문자 한통 때리라.
아, 골때리네.

여기서도 ‘때리다’라는 동사는 여러가지 의미로 쓰였다. 이 동사 뒤에 ‘치다’, ‘보내다’, ‘아프게하다’라는 세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머리가 아파진다.

사실 기호의 뒷면에는 어느것도 없다. 기호는 양면이 아니다. 기호의 모습은 보이는 것 그대로이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기호의 의미가 때마다 달라지는 이유는 뒤에 여러가지 의미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기호들을 만나면서 조합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영상에서도 한 컷, 한 컷이 다른 컷들과 만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기호들은 서로 만나 연결되면서 문맥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의 2차원 선상에 올려놓아진다. 그리곤 해석을 기다린다.

기호들이 만나면서 생성되는 이미지들은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가 가능한지 알 수 없다. 한계를 보지 못할 정도로 광범위한 창작가능의 장이다.

인간들도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요소로 간주한다면, 인간들과 인간들이 만나서 생겨나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얼마나 또 많을까. 백명의 사람을 만나면 백개의 인간관계가 생겨나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새롭고 개성있는 색깔의 만남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인간관계에서는 이 이미지 생성의 가능성이 적절하게 대입되지 못하는 것 같다. 모든 인간관계가 전형적이다. 나는 아직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그 타인은 이미 나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결정해 놓았다.

내가 디지털영상을 배우는 학교엔 암실이 하나 있다. 흑백사진을 인화하는 곳이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필름 소비량은 줄어만 가는데 사진과에서도 배우지 않는 암실수업이 영상전공 학과에 떡하니 있다. 사진과에서 고지식한 교수 하나가 넘어왔는데 영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머라도 가르친다고 가르쳤던 게 검은 방에서 약품냄새 풀풀 풍겨가며 사진 현상하는 수업이었다.

DSLR 카메라의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암실수업은 필요한가? 난 필요 없다고 말해보겠다.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 우리 교수님께선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실 게 눈에 선하다. “사진이 발전해온 역사를 배우지 않고선 사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거나 “정성들여 사진을 한 장씩 인화해 본 사람만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디지털편집이 보급화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테이프 두 개를 동시에 기계 안에 넣고 복사를 했던 ‘리니어 편집’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컴퓨터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넌-리니어 편집’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에 비하면 너무 고생을 덜 한다는 이유였다. 고생을 하지 않는 편집,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태우지 않는 편집은 편집자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술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마 ‘오리지널’과 ‘본질’의 차이점을 오해하는데서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리지널’은 그야말로 시간상에서 앞서 존재했던 것들을 말하지만, ‘본질’은 그 사물의 존재의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이다. 위의 사람들은 두 개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고지식한 아저씨들을 보면서 원시인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구석기인들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차례대로 맞으면서 기술의 발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돌도끼를 쓰던 중, 청동도끼가 나오니 돌도끼를 버리고 쇠도끼가 나오니 청동도끼를 버렸다. ‘Orignal’이라는 단어에는 ‘기원이 되는’ 이나 ‘최초의’ 라는 좋은 뜻도 담겨 있으나 동시에 ‘구식의’라는 뜻도 함께 담겨있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새 기술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한 구식에 정을 떼질 못한다. 이유는 사실 기술이 너무 급속도로 발전하다 보니 자신들은 그 기술을 따라갈 자신이 없는 거다. 나이가 어린것들이 순식간에 배워버리는 그 기술이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정체는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상대적인 퇴보를 겪게 되니 난감하여 헛소리가 저도 모르게 세어 나오는 것이다.

청동기인들은 새로 나온 쇠도끼를 보고 ‘이것이야 말로 도끼의 진정한 완성형’이라는 생각을 했다. 돌도끼는 도끼의 오리지널이긴 했지만, ‘날카롭고’, ‘단단하고’, ‘사용하기 편한’ 도끼의 본질에는 전혀 거리가 있었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필름 사진기가 사진의 역사에서 오리지널이긴 하겠지만, ‘선명하고’, ‘사용이 편하고’, ‘셔터스피드가 빠르고’, ‘색감이 좋고’ 등의 사진이 지향하는 목적까지 발전하기엔 한계가 있는 기계라는 것이다.

기계뿐만이 아니다. 파피루스나 대나무 또는 천 쪼가리 위에 글을 썼던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의 책이 ‘기록을 남기기 위한’ 책의 의도나 목적에 가깝다.

성냥보다는 라이터가, 소보다는 트랙터가, 연필보다는 샤프가, 짚신보다는 나이키가,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이, 삽보다는 포크레인이, 디스켓보다는 CD나 USB가, 편지보다는 e-mail이, 브라운관보다는 LED가 제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술이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너무나 명백하게 역사적으로 남겨진 사실들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은 발전되었고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은 기술은 개발되지도 않았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했고, 자유로운 인간은 더욱 기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인간과 기술은 뗄 레야 뗄 수가 없다.

한참을 글을 쓰다 보니 나는 얼핏 기술 예찬론자처럼 보인다. 기술의 장점만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기술도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위에 나열한 것들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구식의 것을 도태되게 만든 최신기술의 선두주자’ 쯤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술들이 가지는 한 가지 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효율’이다.

효율이 대량생산체제를 만들어서 실업자를 무지막지하게 쏟아냈다. 효율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도록 하였고 일부 인간은 비인간적인 계산기로 만들고 일부의 인간들은 낙오자로 만들어냈다. 효율성을 지향하는 기업이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린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효율에서 나온 것이며, 효율은 기술이 지향하며 달려가는 종착역이다.

인간의 손을 통해서 실현되지만, 전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기술은 인간의 친구인가? 적인가? 기술이 앞으로도 계속 효율을 따지며 자가발전 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정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 인정해야 할 암흑시대의 임박이다.

글을 쓰는 중에 글의 의도가 많이 바뀌어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되었다. 시간도 늦었고 어딜 손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글은 이만 줄인다.

애초의 의도는 ‘기술은 발전하는 만큼 교육자는 퇴보한다.’는 의도였다.

몇일 전에 썼던 글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예술도 발전한다.’ 와 대칭되는 글이다.

20100614 새벽

50, 촥, 촥, 51, 촥, 촥, 52, 촥, 촥…

문득 고등학교 때 줄넘기를 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점심시간에 줄넘기를 하곤 했다. 02년도 강서고등학교 2학년 4반 교실 뒤편에서 나는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던 2단 뛰기 50개를 성공한 뒤 쓰러져서 한동안 숨을 헐떡였다. 친구들은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며 대단하다는 존경심을 표하며 내가 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부축해주었다. 내가 50개 신기록을 세우면서 줄넘기는 반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친구들도 내 기록에 도전했지만 50개는 커녕 30개를 성공하는 친구도 없었다. 그 당시 옆 반의 한 친구가 유일한 경쟁상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친구는 2단 뛰기로는 내 기록을 깨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3단 뛰기로 11개를 성공해서 이목을 끌었다. 그것은 2단 뛰기 50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나는 무시했고 내가 줄넘기의 최강자라고 우겼다. 그렇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에서 2단 뛰기를 가장 잘하는 사나이가 되었다.

59, 촥, 촥, 60, 촥, 촥…

나는 이미 내가 세웠던 2단 뛰기의 기록 50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숨은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2단 뛰기의 최고신기록 보유자가 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내가 줄넘기 할 때마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던 서경진이라는 녀석이 갑자기 줄을 잡더니 필요 이상의 점프를 하며 2단 뛰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점프를 높게 하면 에너지 소비가 커서 20개도 채 못할 것이라고 떵떵거렸다. 그런 나를 무시하듯 20개를 거뜬히 넘기고 30개가 되어서야 콧소리를 조금 내면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서경진은 절대 내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붉어진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지지 않았다. 호흡도 규칙적으로 리듬감을 찾아갔다. 불안정한 점프였지만 사방팔방을 다 활보하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2단 뛰기를 성공해내고 있었다. 좀체 멈추지 않는 줄넘기 소리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경진이에게로 모였다.

71, 촥, 촥, 72, 촥, 촥…

경진이는 그렇게 첫 도전에서 74개의 기록을 세웠다. 나는 그 당시 너무 충격이 컸던지 코웃음이 나왔다. 줄넘기에선 나를 능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을 거라 자부했는데 너무나 쉽게 깨지고 말았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서경진은 줄넘기의 신이다. 인간의 한계는 50개이고 신의 한계는 75개쯤 되나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 하면서 나는 인간으로서 2단 뛰기의 최고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74, 촥, 촥, 75, 촥, 촥…

그 이후로 내가 줄넘기 할 때 시선을 주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다.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줄넘기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렇게 경진이의 기록을 넘어섰다. 줄넘기의 신을 능가했다. 신의 한계인 75개도 넘었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83, 촥, 촥, 84, 촥, 촥…

나는 이미 내 몸의 한계를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산소 공급이 많이 안되는지 팔 끝이 저려오기 시작했고, 눈 앞도 차츰 캄캄해져 갔다. 이제껏 오래달리기를 할 때에도 줄넘기를 할 때에도 이렇게 힘들어본 적은 없었다. 내 몸의 모든 부분들이 고통을 부르지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턱을 처들려 졌다. 거울 위에 적혀있는 ‘투지’와 ‘집념’이 눈에 들어왔다.

89, 촥, 촥, 90, 촥, 촥…

10개만 더 하면 100개다. 벌써부터 나의 뛰는 폼은 서경진이 뛰던 폼보다 훨씬 불안정해져 있었다.

92, 촥, 촥, 93, 촥, 촥…

단 몇 개만 더하면 100개를 성공할 수 있고 세자리 숫자라는 값진 의미의 신기록이 된다. 나는 숨을 참았다. 눈도 감았다. 입도 다물었다.

97, 촥, 촥, 98, 촥, 촥, 99, 촥, 촥, 100!

줄넘기가 나의 발아래를 빠져나가자마자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100개를 성공했다! 나는 인간의 한계도 넘었고 신의 한계도 넘은 2단 뛰기에 있어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강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고등학생 때 고작 50개를 해놓고 저질렀던 서툰 오만을 나는 반성했다. 그럼과 동시에 더 이상의 최고기록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또 확신했다.
한참을 숨을 고른 뒤 여전히 쓰러진 채로 외쳤다. 누군가와 이 희열을 공유하고 싶었다.

“관장님!! 헉, 헉, 100개 했습니다! 100개! 헉헉.”

관장님이 대답했다.

“뭐.”

관장님은 내가 그렇게 열심히 2단 뛰기 신기록을 세우는 동안 신경을 쓰지도 않으셨나보다.

“헉헉헉. 2단 뛰기 백개 했습니다! 백개!”

관장님이 대답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어리둥절해 했다. 관장님은 2단 뛰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으신 것일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왜 모르시는 걸까. 관장님은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오시더니 다시 말씀했다.

“열심 해라, 열심. 막 300개도 하고 그래야 된다. 초딩들 300개 막 쉽게 한다. 열심 해라.”

내가 몇권의 속독책을 읽은 결과 모든 속독법 책에서 말하는 바는 같은 내용이었다. 빨리 읽으면 좋은 이유를, 그리고 빨리 읽을 수 있는 요령들을 많이 소개해놓았다.

나는 그 요령들을 제대로 연습하지 않아 완전히 속독법을 습득할수는 없었으나 문자를 빨리 읽는 새로운 개념과 방법들을 아는 것만으로 독서속도를 세배나 증가시킬 수가 있었다. 읽는 속도는 세배 빨라졌지만 독서의 깊이또한 두배나 깊어졌다. 속독법을 익힘으로 책과 친해지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가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가나다라를 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글을 읽는 속도가 향상되어 왔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한번 분석해보자.

우리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들어갈 즈음부터 글을 배우게 된다.

처음에 ㄱㄴㄷㄹ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한 어린아이는 가나다라처럼 자음과 모음이 합쳐져 소리를 낼 수 있다는걸 배우며, 그 형태소들이 모여 단어를 만든다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단어를 이해한 학생은 문장 문단의 개념까지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나비라는 단어를 말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보도록 하자.

맨 처음 ‘나비’라는 단어를 해체하여 ㄴ+ㅏ + ㅂ+ㅣ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분석한 뒤 ‘ㄴ’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ㅏ’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를 떠올린다음 여러번 시도 끝에 “느으아아뷔이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다.

글에 조금 더 익숙해진 아이라면 ‘나비’라는 단어는 나+비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식한다. ‘나’라는 형태소가 ㄴ+ㅏ 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과정은 생략하게 된다.

학교를 계속 다녀 ‘나비’라는 단어를 여러번 마주쳤을 경우 그 학생은 ‘나비’라는 단어를 보고 습관처럼 ‘나비’라고 말할수가 있다. 또 학생이 ‘나비’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경우 머릿속에는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의 이미지가 떠올라 문자로이루어진 단어와 음성발음과 머릿속에 떠오른 나비가 같다는걸 이해할 수 있다.

단어를 많이 알면서 또 글을 많이 접한 사람은 단어 뒤에 일정한 형태의 조사가 온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알고있다. ‘나비를’, ‘나비가’, ‘나비도’ 와 같이 단어와 조사의 결합형태까지 한번에 인식할수 있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단어를 인식하는 정도나 단어 뒤에 붙는 조사나 접미사들을 한꺼번에 인식할 수 있는 정도에 도달하면 글공부를 그치게 된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인간이 한 번에 인식할 수 있는 문자양의 최대단위가 단어라고 단정지은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석한 우리들은 그 이상의 독해능력을 키우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

문장의 형식을 여러가지로 나눌 수가 있지만 대부분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한글의 큰 틀은 S+O+V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단어+조사,접미사’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단계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것이 문장의 형태를 분석하고 그 안에 들어가는 성분을 유추해낼 수 있는 정도이다. 이전 단계에서는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눈으로 읽어나가지만, 이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면 문장 전체구조를 먼저 파악한 후 그 안에 어떤 단어들이 있는지 인식하고 머릿속에서 문장의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하게 된다.

이 단계까지 올라가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과 많은 연습이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문장의 패턴을 많이 분석하여 알고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한데 문장을 주어와 목적어, 수식어로 나누어 인식하던지 또는 적당한부분을 너댓마디 정도로 끊어서 인식하는 연습을 하는게 우선이다.

창의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수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속독이 있다.

문장을 한번에 인식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 다음과제는 문단을 한번에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지에 오른 속독법은 이것 말고도 꽤 많다.

  • 좌우로 눈알을 굴리는 안구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
  • 두줄씩 또는 서너줄씩 한번에 읽는 것
  • 한페이지를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대각선으로 읽는 것
  • 정 중앙에 세로로 한번 그어내려 읽는 것
  • 두괄식과 미괄식 형식의 글이 많은것을 이용하여 앞 뒷부분만 읽는 골라읽기
  • 페이지를 아예 사진으로 찍어버리는 포토리딩

이 정도의 속독법을 익히게 되면 200페이지 책 한권을 30분안에 독파할 수 있고, 포토리딩을 마스터 한 사람은 5분만에 한권을 다 읽는다. 1분에 10만개의 단어를 읽어버리는 수준이다. 제대로 단련된 속독법은 읽는 속도는 물론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 또한 천천히 읽는것보다 훨씬 이해도가 높다.

나는 창의력이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라서 책에서 소개된 위의 속독법 보다도 효과적인 방법을 창안해내어 더 높은 경지의 책읽기 방법을 터득하였는데, 그것은 목차만 보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3일 전 나는 책 제목만 보고 책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도서관에 가서 뱀처럼 책장사이를 기어다니며 3일만에 도서관에 있는 책의 1/3을 다 봐버렸다.

조금만 더 갈고 닦은 후에 전국의 각 도서관들만 찾아다니며 도서관 입구에 앉아 도서관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독서법을 깨우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미지 공부를 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던 어제였습니다. 어젯밤 저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을 했습니다. 보는 것에 집착이 너무 심했던 요즘 꿈속에서도 무엇인가가 등장해서 보였습니다. 이제껏 본적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꿈속이 아니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인간의 시각능력으로는 볼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제가 보았던 그 풍경에는 거리에 상관없이 초점이 맞아있었습니다. 모든 눈알과 카메라에는 초점이 있어서 가까운 곳에 초점이 맞으면 멀리 있는 곳은 흐리게 보이고 먼 곳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운 곳은 초점이 안 맞게 됩니다. 제가 꿈에서 경험한 풍경에는 모든 곳에 초점이 다 맞아 있었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선명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야각 120도를 초월한 풍경이었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공간을 저는 시각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보았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알았다고 표현해야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보는 과정도 없었고 이미지를 읽는 과정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아무런 감각적 자극도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안에 있었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주 선명한 이미지로 저에게 다가왔을 뿐입니다. 봄과 동시에 이미지의 이미지를 느꼈고 물체의 상은 그 뒤에 저의 머릿속에 새겨졌습니다. 눈을 감고 상상력을 통해 본 꿈속의 세계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인 친구를 만났다. 모 회사의 인사부 행정직으로 6개월 째 일하고 있다는 그녀는 겨우 반년 만에 300명이던 직원의 수가 90명으로 줄어든 것에 허희탄식했다. 이제까지 해고당한 200명의 직원들을 생각만 하면 너무 미안하다며 특히 40~50대의 아저씨들은 이직할 곳도 마땅찮아 생각 날때마다 입맛이 씁쓸해진다고 했다. 내 친구가 직원들 월급을 챙겨주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해고통보를 날려야 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보람보다는 자책감을 많이 들게하는 나쁜 직장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런 일을 하는데도 돈을 많이 챙겨줘서 좋은 직장이라고도 했다.

직원들을 해고한 이야기를 계속 하다보니까 그들을 누가 해고시킨 것인지가 애매해졌다. 회사에서 잘려나간 직원이 불과 반 년 만에 200명. 설마 입사 6개월 경력밖에 없는 내 친구가 자른 것인가? 최후통첩을 날리고 직원들을 자른 것에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으니 정말 내 친구가 자른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 회사 안에 있지 않았더라도 200명의 직원들은 잘려질 운명을 갖고 있었으니 내 친구의 탓은 분명 아닐게다.

그럼 회사의 우두머리인 사장이 잘라낸 것인가? 회사의 직원들이 나가서 회사의 규모가 작아지면 가장 안타까워 할 사람은 사장이 아닌가. 또 잘라놓고 가장 미안해 할 사람또한 사장이다. 애플사를 설립했던 스티븐잡스는 직원들과 트러블이 생겨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니 기업에서 쫓아내는 사람이 사장이라고 말하면 안되겠다.

그럼 자른 사람은 없단 말인가? 잘린 사람은 수두룩한데 자른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Give and Take, 액션과 리액션, 작용과 반작용, 자극과 반응이라는 인과법칙을 기본으로 하는 많은 자연현상들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있으면 따라서 자른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자른 사람이 없나? 아무래도 자른 사람은 어디에도 안보인다!!

자른 회사는 있는데 자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가 잘랐지 어떤 사람이 자른 것은 아니다. 잘린 사람들도 ‘여보, 나 회사에서 잘렸어. 엉엉’ 이라고 말하지 ‘여보, 인사과장 그새끼가 마침내 나를 잘라버렸어’ 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내 친구가 자른 것은 아니지만 내 친구의 직위인 인사과 행정직이 자른 것은 맞다. 그 회사 사장은 자르고 싶지 않아지만 사장이라는 자리가 직원들을 쳐낼 수 밖에 없었다. 기업의 조직적 체계가 기업원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 목적으로 기업에 들어갔던 신입사원들도 기업이라는 조직에 흡수되고 자부심을 느끼며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입사하는 순간부터 명함에는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회사의 이름이 더 화려하게 나온다.

분명 회사를 세운 것은 사람들인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회사라는 조직의 구성원이나 일부 부품 따위로 취급되고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이라는 체계에 이끌려 다니게 된다.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따위가 이성이나 감성이 있을리가 없고 인간과의 정이 통할리도 없다.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를 빌려 존재하는 기업체는 냉철하게 자신의 번식과 생존만을 목표로 인간을 동력원 삼아 부피를 키워간다. 어쩌면 SF영화에서 벌어질 법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과 같은 일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덧붙임 (2015.12.18) —–

2010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 진출하는 게 겁이 났던 나머지 이렇게 변명의 글을 쓰곤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 도피를 목적으로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