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리기 위한 티켓팅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얻게 될까? 이 질문은 틀렸다. 바꿔보자.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버리게 될까? 조금 더 지금 상황에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 나는 무엇을 취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다. 도피여행이다.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고 했으니 어느 쪽이건 지금은 버리는 데에 집중하자.

 

지난 해 가을, 부모님을 데리고 스위스에 갈 뻔했다. 어른이 되고 나니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졌고 나도 그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딱히 싫지 않다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처리하는 것이 어른의 자세였다. 내가 시작한 계획이지만 내가 갈망한 여행은 아니었다. 부모님도 자식이 보내주는 여행에 함께하고 싶어 응했을 뿐이었다. 둘 다 스위스에 이상과 환상이 없었으므로 여행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번 여행은 자의적이고 독립적이다. 완전히 독립적일 순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그러하다. 이번 여행의 시작ㅡ티켓의 구입ㅡ부터 인과관계를 끊어내려고 했다. 나는 여행지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 채 티켓을 샀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별다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일단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 여행이 내 일상과 관련된 모든 인과관계에서 독립적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자식의 의무를 저버리기 위해 설 연휴를 끼웠다는 점에서 여전히 독립적이지 못하지만.

 

나란 인간의 문제는 무엇일까? 추구의 열정이 사라진 문제일까? 무념 상태의 지속이 문제일까? 염세적이고 허무한 관점이 문제일까? 부수고 다시 세우는 폭력성이 문제일까? 불만족과 본능적 개선의지가 문제일까? 환경을 원망하는 태도가 문제일까? 지금도 끊임없이 문제만 찾는다. 문제를 찾으려는 습관이 문제일까? 이런 나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옆에선 뻔히 보이지만 정작 자신만 못 보는 그런 멍청한 상태에 빠져버렸다. 훈수를 두는 이가 있더라도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무엇이 옳은 훈수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요 몇 년 새 나의 생각 체계엔 오류가 발생했다.

내가 추구하는 상태는 얼마나 가치 있는가? 짐승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짧고 허무한 시간을 살아가는 중에 조금의 가치라도 찾아보려고 발버둥친다. 없는 것에 비하면 무한에 가깝지만, 무한하고 절대적인 가치에 비하면 제로에 가깝다. 내 인생은 무한하면서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 인생은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무한한 가치가 있다. 그제 본 영화 애드아스트라는 이 안건을 우주와 인간사회의 대비함으로 다룬다. 영화는 “나가봐야 별 거 없어. 진정한 가치는 네 곁에 있었잖아. 바보야.”라는 나이브한 결론을 맺으며 끝난다. 허무주의에 빠진 우울증 환자들의 자살촉진 트리거로 원망받지 않을 유일한 스토리라인 이었을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의 생각은 극중 주인공처럼 비합리적인 과정으로 결론에 도달해선 안 된다.

 

인간의 삶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은 여럿이다. 난 그 중 신, 우주, 시간 세가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나, 신은 인간의 한계를 알려주고 오늘의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선과 덕을 제시한다. 추구해야 할 지향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둘, 우주는 무기력을 안겨준다. 알면 알수록 정복할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고, 심지어 제대로 지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각하게 해준다. 개척자였던 우리 조상님들의 DNA를 물려받은 우리들은 무기력을 느끼게 된다. 셋, 나는 시간을 평면적이며 선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영상편집기의 타임라인이나 프로젝트 일정관리양식이 내 시간 인식의 관점이 되었다. 관점이 좁으니 좁은 세상을 산다. 시간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시간에 통제당한다. 시간을 인식할 때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는데 미래의 과거인 현재는 왜 이렇게 아득바득해야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고 허무함을 느꼈다.

셋 중에서 삶에 도움되는 것은 종교다. 불행하게도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나는 줄곧 좇는 대상 없이 쫓기면서만 살았다. 무기력과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내 나이 올해 36이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흐른 내 인생은 2/5가 훌쩍 지났다. 난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내 인생의 대부분 결정되어 있다는 허무함에 사로잡힌다. 내 인생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작다. 태어나는 나라도, 시기도, 인종도, 신체도, 부모도, 친지도, 어릴 적 친구도, 어릴 적 선생님도, 유년기에 영향을 미친 모든 성장환경을 나의 의지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채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다. 1/5정도의 기간 동안 받은 영향으로 4/5가 결정되는 것이 싫어서 아득바득하며 벗어나고 싶어했다. 남들은 1/5은 자식으로, 2/5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3/5는 부모로 산다.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그 트랙을 나는 벗어나려고 시도해보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때가 좋았다. 자의식이 없던 어린 상태가 행복했다. 가라고 해서 갔던 학교가, 학교에서 가니까 따라간 수학 여행이, ‘이거 한 뒤, 저거 해라’고 알려주고 지시해준 커리큘럼이 좋았다. 편했다. 행복하거나 편한 것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다. 불행과 불편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반대의 극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도피의 대상과 추구의 대상이 설정되는 과정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생각을 멈추면 될 것이고,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마약에 빠지면 그만이며, 인생의 목적이 편의라면 누워서 종일 잠만 자면 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행복, 쾌락, 편의와 같은 곳에 두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비참한 일이다. 차라리 평생 이 허무함에 몸서리치는 편이 낫겠다. 조금의 가치라도 찾으려고 시도라도 하는 게 낫겠다. 비참해질 순 없으니까.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답은 없으니까.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허무함으로 가득 찬 박스에 머리통을 스스로 처박은 다음 펑펑 슬퍼하는 행위다. 그러니 생각을 멈추고 일단 몸뚱이를 움직여야 한다.

 

어떤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어떤 상태는 취해야 한다는 강박. 그것은 지난 10년간 나를 지배한 생각이다. [광신이 되지 않고 의심해야 한다. 속단하지 않고 충분한 정보를 우선 확보하라. 대중이 되는 것은 비문명과 야만의 상태로 퇴화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정보를 처리할 능력을 갖추라. 소비자가 되지 말고 생산자가 되어라. 원망하는 자가 아닌 관용을 베푸는 자가 되어라. 남들만큼 하지 말고 최고효율의 방법론을 활용하라.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이익을 취하지 말고, 이익이 발생하는 구조를 만들어라. 감사함의 크기를 키워라….] 내 속에 있는 강박은 수도 없이 많다. 레이 달리오가 말한 것처럼 이런 원칙들을 세워나가는 것이 정말 옳은 방법일까? 좋은 방법론인 것을 분명하지만, 지금 나에게 옳은 처방인지를 의심한다.

나는 꽤 많은 직업을 경험했다. [요리를 했고, 영상판에서 일했고, 게임회사에 들어가고 싶었고, 남들처럼 대기업에도 취업해보고 싶었다. 해외에서 사는 게 어떨지 생각해봤다. 마케팅 회사에서 일했고, 기자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행사기획자로 꽤 큰 성취를 느꼈으며, 시키는 거 다 하는 대행업도 했고, 광고일, 기획일, 중개일, 사장노릇도 하고 있다.] 나의 2/5파트를 회고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겪었던 다른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존재가 되었을까? 아니다. 명함이 바뀐다고 나의 존재가 바뀌지 않듯이, 내 직업이나 환경적 상태가 나의 존재를 정의하지 않는다.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상태가 나라는 존재다. 내 인생 2/5는 어떤 상태를 지향하며 산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미완성인 상태로 남는 것이다.

 

어디로 가든 옳은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몸뚱이를 움직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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