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토체스를 하며 배운 것

롤토체스에 빠져버렸다. 협곡엔 재능이 없고 체스를 좋아하던 사람도 아니었다. 롤토체스가 이렇게 재밌을 줄 몰랐다. 나는 지난 6개월 간 롤토를 500판을 넘게 한 것 같다.

게임을 플레이한 시간을 말할 때마다 인생을 허비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괜히 나는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었다고 강조한다. 이런 내 얘기를 듣던 상대방은 괜한 부연설명에 적잖이 당황해한다. 그럼 나는 더욱 변명처럼 들리는 구체적 설명을 덧붙인다. 단순히 게임이 재밌어서 추천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인생을 그만큼 할애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만큼 값어치가 있다고 설명을 한다.

구차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게임에 대한 태도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게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는 아직 혼란스럽다. 인간은 생산을 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게임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시간을 생산에 쓰지 않고 게임에 썼다는 것에 죄책감이 생기는 것이고, 지레 제발저려 생산에 도움이 된다고 변명을 해대는 것이다.

롤토는 생산적인 게임일까. 게임이기에 생산적일리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생산의 원리를 알려주었다.

사람개 in lolchess.gg

시즌 1은 골드1로 마무리했고
시즌 2는 플레1까지 찍었다.

나는 그렇게 게임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즌 2가 시즌 1보다 랭크가 올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공부도 하고 유튜브도 많이 본 것도 분명 도움이 되었겠지만, 게임을 학습하는 나만의 방법을 시도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그러니까 나는 게임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도 플레1밖에 못 갔으니 그냥 아주 게임상병신이다.

 

단계 1 –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는 멍청이

멍청이의 상태로 게임을 했다. 라운드 준비시간 30초 동안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멍하니 감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갑다. 싸우면 싸우는갑다. 이기면 와 이겼다 좋아하고, 지면 아 졌구나 안타까워한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에 대해 내가 관여하지 않고 관람만 한 것이다. 그래픽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있었다. 그러다가 시너지를 맞추고 챔프를 고르고 아이템 계획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뇌는 정지했다. 창고는 항상 꽉 채웠다. 왜냐면 계획이 없으니까. 뜨는대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선택을 하지도 못한 채로 수많은 패배만 맛보았다. (다른 아이디로) 100판 할 때까지는 실버 이상 오르지 못했던 것 같다.

뜨악!

 

단계 2 – 뭐라도 일단 정리하기 시작

하루는 잠이 안 오는 것이다. 롤토의 챔프들이 막 머릿속에서 시너지가 맞춰지느라. 그래서 폰에 적기 시작했다. 얘랑 얘랑 같이 들어오면 시너지가 어떻게 나올지를 계산했다. 며칠을 이 짓을 반복하니 시너지를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구글닥스를 하나 켜서 이것들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양이 많아지자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게임에 임하기 전에 내가 어떤 덱과 전략을 사용할지 정해야 하는데, 여전히 게임의 진행에 내가 반응하듯이 하려니까 이런 아카이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임을 진행하는 급박한 시간흐름 속에서 다른 도구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오픈북 테스트여도 책 읽을 시간이 없을 뿐더러 책 내용도 엉망인 것이다.

그래도 노트를 정리하는 데에 나름 몇 가지 규칙은 있다. 모든 챔프의 이름을 두글자로 줄여서 적는다. 내가 쓰는 것도 쉽지만 읽는 것도 쉽다. 가독성과 직관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lolchess.gg의 시뮬레이터로 조합을 만들어서 아카이빙해보았다. 오히려 더욱 보기 힘들었다.

 

단계 3 – 경험의 축적

바둑기사가 대국을 끝낸 뒤 복기를 하듯, 이 게임 또한 복기될 수 있다. 복기노트를 만들었다. 게임의 진행경과를 파악할 수 있도록 간단한 항목들을 기입하고, 무엇을 배웠는지 적는다. 너무 주절대거나 결론이 없으면 안된다. 복기의 과정을 어떻게 거치든 간결한 1줄 교훈으로 최종 정제한다.

교훈 중에는 너무 당연하고 기본적인 rule도 있었다. 이것마저 모른채로 게임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기를 하고 나서야 이런 기초적인 내용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란 놈에겐 정말 직관이란 게 없는걸까?

> 갖춰진 시너지 중에 약한 시너지가 있다면 버려라.
> 시너지에 집착해서 2성작을 등한시하지 마라
> 롤토는 강해지는 게임이지 시너지를 맞추는 게임이 아니다.

그리고 몇 교훈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알려주는 듯한 명언처럼 나왔는데 꽤 마음에 든다.

> 이기고 싶다면 매드무비를 꿈꾸지 마라.
> 가지기 위해선 비워라
> 더 유동적으로, 더 융통성있게
> 계획이 없다면 지금의 최선만 생각해라.

이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롤토체스가 어떤 게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복기할 내용이 너무 많다보니 부담스럽고 몇 판은 빠트리게 되었다. 그래서 양식을 간소화시켰다. 기록만 남기는 데에 집중하고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다른 곳에 적기로 했다. LOG를 검토하고 정리하는 것은 게임이 끝나고 여유가 있을 때 몰아서 하면 되니까.

 

단계 4 – 나만의 시너지북 만들기

내가 직접 전략을 개발하는 것보다 세계적인 랭커들이 개발한 전략이 더 강하고 승률도 높았지만, 왠지 남이 개발한 것을 베껴 쓰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난 실력을 키우고 싶은데 컨닝만 하고 있는 느낌이란 말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달랐던 것 같다. 유튜버들이 새로 발견한 덱을 소개할 때면 3~4명의 덱이 겹치는 판도 허다했다. 게임을 꼭 승리하기 위해서만 하는 것인가. 나는 배움의 과정이 즐겁다는 뜻을 나이를 먹을수록 이해하게 된다.

롤토를 배워가면서 가장 재밌었던 때가 이 때다. 시너지북을 만들 때. 롤체지지 족보를 그대로 가져와서 구글닥스에 옮겼다. 그리고 Ctrl+C,V를 통해서 카드 형태의 시너지 묶음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조합을 개발하고 연구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그나마 쓸만했던 재밌게 연구했던 덱이 깔끔세나덱과 시너지천국덱(지옥타일한정)이다. 강하고 완벽한 덱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덱이 엄청 좋았으면 나도 꿀빨아서 랭크가 더 올라갔겠지.

하지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랭크 위치도 아니오, 이번 게임의 승패도 아니다. 게임이라는 비생산적 행위를 하면서도 생산적인 결과물을 냈다는 뿌듯함에 도취되어 있는데 더이상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단계 5 – 아이템

시너지를 한참 연구하고나니 시너지로 게임의 승패가 갈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코스트 유닛이 얼마나 많은지, 2성작이 얼마나 되었는지, 아이템이 적절히 사용되었는지의 요인들도 중요했다. 중요함을 비교하자면 일반적으로 시너지가 가장 덜 중요하고 아이템이 제일 중요했다. 시너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아이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롤체지지 시뮬레이터에 들어가서 챔프마다 가장 효율이 좋은 아이템을 다 끼워넣은 뒤에 캡쳐해서 저장해두었다. 그리고 아이템들간의 시너지도 중요했기 때문에 아이템의 조합을 미리 묶어보는 시도도 해보았다.

 

단계 6 – 몰빵형 설계

위 과정을 거치면서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덱 전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떤 덱으로 갈지는 아이템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 챔프도 시너지도 바꿀 수 있는데 아이템은 못 바꾸기 때문이다.

시너지는 시너지일 뿐 조합이 아니다. 조합이라 함은 싸움을 더 잘하는 팀이 좋은 조합인 것이다. 그래서 시너지 정보는 제거해버렸다.

연구를 마치며

게임은 너무 어렵다. 나는 게임을 너무 못한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도 플레1밖에 못 갔으니 그냥 아주 게임상병신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롤토는 너무 재밌다. 히히

연구의 결론은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는 데에 다다랐다. 위에 연구한 것들 외에도 게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너무 많다.연구 과정을 통해 시도되었던 보조도구들은 게임에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 그리고 머리를 써야 하는데 두뇌 밖에 있는 보조도구로 게임을 하려 하니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두뇌 밖에 있는 어떤 보조도구에 의존하려는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이 구글닥스에 안 들어간다. 복기도 안한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 다시 멍청이의 상태로 게임을 할 때도 있다. 그것도 뭐 나름 재밌다. 유행하는 덱을 따라해도 재밌고, 자다가 생각난 나만의 전략을 실험하다가 쓰디쓴 패배를 맛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게임이니까 재미가 있고 재미있으려고 게임을 한다.

 

이야기의 끝을 재미가 아닌 생산으로 맺어보자면 ;

난 이 연구 과정을 통해 여러 연구 방법을 익혔다. 복기를 한다거나, 설계의 방법론을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낸 과정은 게임이 아닌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프로젝트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강한 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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