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에서 터득한 판타니 댄싱

마르코 판타니라는 라이더를 알게 된 이유는 단순히 그가 빡빡이이기 때문이다. 머리숱이 풍성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도 몇년 전부터 머리가 한웅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약을 추천했지만 나는 세월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라고 대꾸하며 무시했다. 그렇게 일말의 저항도 하지 않고 머리털의 절반을 떠나 보내었다. 보름 전 엄마는 아들의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이자 크게 놀라시었다. 당신의 자식도 당신만큼이나 늙고 있다는 것을 평소엔 의식하지 못했던 탓인지 꽤나 큰 충격을 받으시었다. 지난 주 미용실에 갔을 땐 계획에 없던 파마를 했다. 떠나고 나서야 허전함을 알게 된다는 말이 이런 걸 뜻하는 것일까.

대화의 주제로 탈모가 거론될 때마다 나는 대머리가 뭔 대수냐며 너스레를 떤다. 대머리가 되면 열 방출이 빨라지기 때문에 자전거를 더 잘탈 수 있는 공짜 튜닝이라고 농을 던진다. 상황을 희화시키고 억지 웃음을 짓는다고 해서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애써 외면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 시기를 조금이나마 늦추는 정도. 대머리가 되는 것은 남자라면 받아들여야 할 필연적 운명이다.

이러니 최근 판타니의 민머리가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나보다. 민망한 핑크색 저지, 귀걸이, 흉악하게 생긴 얼굴을 보았을 때 첫인상이 좋진 않았다. 코도 왠지 나의 것과 비슷한 모양이라 기분이 나빴다. 머리가 빠져서 대머리가 된 것일까, 머리가 빠지지 않았음에도 빡빡 민 것일까… 허튼 생각이 이어지다 문득 그의 댄싱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댄싱은 자전거탈 때 하지 말라는 짓들을 모두 모아놓은 모습이었다.

업힐에서 드롭바 잡지 마라.
케이던스 무겁게 타지 마라.
댄싱할때 자세 웅크리지 마라.

상식이 파괴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자세에 대해 훈수할 수 없다. 그가 세운 알페듀에즈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의 라이딩을 흉내냈다. 케이던스가 30아래로 떨어지도록 기어비를 무겁게 잡았다. 근육의 자극부위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드롭바를 잡고 궁디를 띄워 지긋이 누르고 돌렸다. 그가 이 자세로 타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리고베르토 우란의 햄스트링 활용 토크주행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해 우란의 것을 따라했다. 둘의 주법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판타니의 것이 무엇인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고개 두개를 넘겼다.

댄싱으로만 타는 세번째 고개를 맞이했을 때 알게 되었다. 그가 사용한 근육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근육이었다. 둔근이었다.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크고 긴 근육. 둔근을 사용하는 댄싱인 것이다. 이 댄싱은 콘타도르의 댄싱과 정반대에 놓여 있다. 이번에도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알아냈다. 궁디 뒤로 빼고 수평으로 밀어내기 주법을 댄싱화한 것이다. 똑같은 원리이지만 궁둥이를 들고 핸들의 포지션을 낮춤으로써 둔근의 자극이 극대화된다. 핸들이 아래로 내려가니 자세는 앞으로 꼬꾸라져 다리를 통해 전달되는 힘에 체중까지 실린다.

근육의 작용만 보자면 자전거 위에서 데드리프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팔로 당기고 오른다리로 민다. 왼팔로 당기고 왼다리로 민다. 당길 때는 광배근을 써서 과감하게 당길 수 있다. 다리에 가야할 대미지를 상체가 효과적으로 분담한다. 밸런스도 쉽다. 신체의 좌측과 우측이 한번씩 번갈아가며. 왼팔왼다리가 일할 땐 오른쪽은 아예 쉴 수 있다. 정말 단순하고 경쾌한 리듬이다.

흡사 무엇인가를 발로 밟아 고정시킨 뒤, 찢어버릴 각오로 당겨올리는 느낌이다. 예초기 시동거는 느낌이랄까. 우물에서 물 떠올리는 느낌이랄까. 뿌리채소를 수확하는 느낌이랄까. 물고기를 뜰채로 떠올리는 느낌이랄까. 꽉 끼는 청바지를 입는 느낌이랄까. 친구 발목을 잡고 가랑이 맛사지를 해줄 때의 느낌이랄까. 엑스칼리버를 뽑는 느낌이랄까. 내 몸은 이미 이 동작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주법에서의 페달은 밟는 게 아니다. 돌리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밀어내는 것에만 집중하면 다리의 관절 각도와 크랭크가 환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원운동으로 변환시켜준다.

자전거 위에서 우리의 신체는 갇힌다. 페달과 핸들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 몸을 말아넣어야 한다. 갇힌 상태에서 둔근을 활용해 기지개를 펴고 뻗어 나가는 듯한 동작. 흡사 새 생명이 알을 깨부수고 나오는 관경이다. 희열이 끓고 축복이 내리쬐며 갤러리는 환호한다. 생명력이 폭발하는 탄생의 순간. 나는 오늘 판타니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대머리가 되어도 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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