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하는 것만큼 강한 것도 없다. 빠르게 하거나 똑똑하게 하는 것으로 단기간에 성과가 나올 순 있다. 하지만 꾸준함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있다. 그 영역에 도달하기위해서는 믿음이 굳건해야 한다.

믿음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희망을 연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중간에 확인해야 한다. 중간 확인 없이 지켜지는 믿음은 믿음보다는 맹신이다. 꾸준함이 아닌 미련함이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불신이나 회의적인 태도와는 다른 현명함이다.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는 눈이다. 현명하고 의심많은 사람의 믿음은 좀체 쉽게 생기지도 않지만 한 번 생기면 굳고 단단해서 여간 흔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믿는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내가 이해한 세상이 실제 세상의 모습에 가깝고, 내가 찾아낸 공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는 선하고 이로운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는다.

나는 미디어 전공자이다. 비가시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미디어로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사업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가치의 유무는 그 자체로 고유하게 평가할 수 있지만, 쓸모의 유무는 철저하게 시대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경제체제 속에서 어떤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흑자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그 능력이 아무리 고상해도 존재할 수가 없다. 결국 이루어낼 수 없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가치만이 지속될 수 있고 이루어질 수 있다. 쓸모를 충족시키지 못한 가치는 안타깝지만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거래를 하기로 했다. 거래가 모여 시장이 되고, 시장이 모여 산업이 되고, 산업이 모여 경제가 된다고 했으니 최소 단위인 거래를 깨우쳐야겠다. 거래를 단기간에 가장 많이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래보다 더 작은 단위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신뢰였다.

그 때 내 나이 33살 이었다. 특정한 고객과 특정한 공급자가 거래할 수 있도록 돕는 시장을 만들었다. 이 시장을 운영하며 밥벌이를 했고 생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단히 감격할만한 성과는 아니었다. 굶어 죽을지도 모를 상태에서 벗어난 게 35살이니 남들보다 늦어도 훨씬 늦었다. 재정적으로는 늦었어도 야전에서 자생했다는 점은 높게 살만하다.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상황 속에서도 자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된다.

보통 부유함은 개인의 안위와 풍요를 위해 추구된다. 성공이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보편적으로 추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천박하고 저급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미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데 제약이 없는 풍요의 시대다. 새 시대가 열렸는데 어찌 과거의 결핍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부유해지려면 우선 이전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쓸모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가치를 추구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은 아니다. 더 쓸모있어져야 한다. 더 부유해져야 한다. 나는 이제 굶어 죽는 단계를 벗어 났을 뿐이다. 더 의미있는 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더 쓸모있어야 한다. 너무나도 쓸모가 있어서 쓸모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단계까지 가야 한다.

쓸모와 가치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 단계적으로 선후행의 관계에 놓일 뿐이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방법과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에는 분명 유사한 기술과 실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알기 때문에 당장은 더욱 쓸모있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데에 집중해도 좋다.

 

— 덧붙임 —

이렇게라도 생각을 뜯어 고쳐 먹어야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모두 내던져진 사람들이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는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세상으로 내던지기를 반복하며 세상은 이렇게 내던져진 존재들로 벅적댄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놈들도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지만 같이 달리기나 할까? 뛰고나면 상쾌하거든. 같이 동물원 갈래? 대뜸 기린이 보고싶네. 아 조개구이 먹고싶다. 재미도 있고 맛도 있고 운치도 있는 조개구이. 우리 회사에 있는 인간 말종새끼 뒷담화 좀 들어줄래?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몰라도 된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안다고 해서 남은 인생 달라질 것 없다. 모른다고 해서 남은 인생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답도 없는 이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 각자의 인생이 갈피를 잡는다.

생은 어느 순간 강제로 종료된다. 나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이 종료된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깨달음으로 이 질문 자체가 내 삶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영문도 모른채 시작되어버린 이 삶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달리기가 개꿀맛. 달리고나서 먹은 밥도 개꿀맛. 이제 누워서 개꿀잠. 자기 전에 롤토체스 한 판 해야딩 히히

2010년의 생각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서 드디어 해방

운동을 쉬면 퍼포먼스가 떨어진다. 꾸준히 하면 오르고 멈추면 떨어진다. 이 컨디셔닝의 공식이 얼마나 정직한지 오늘날 운동생리학자들은 이를 수치화해서 정확하게 예측해낸다. 강도,빈도,지속시간 세 요소를 측정해 총 운동성과를 수치로 나타내기도 하고 각 요소의 비중이 얼마나 다른지 분석해 성과마다의 특성을 회귀도출하기도 한다.

성장의 속도란 어느 정도 달성한 후로는 그 속도와 기울기가 점차 완만해진다. 정비례해서 계속 증가할 순 없다. 정말 일분일초의 낭비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쏟아놓는 인간의 최선의 노력까지 쥐어짜내고 전세계인이 주목하는 상황에서 정신력까지 극도로 끌어올려 초월적인 능력까지 발휘하는 올림픽리스트의 신기록이 한계라고 한다면 그것에 근사해질수록 차이는 작아진다. 이 상태에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들이부어도 성장은 이뤄지지 않고 현상유지만 할 수 있다. 노력과 성과가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

그래서 정체기를 만나면 재미가 없다. 더 나아져야 재미를 느끼는데 열심히 해도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니 외적동기와 내적동기가 모두 상실된다. 계단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믿어서 조금은 버틸 수 있지만 한동안 지나도 그 성장마저 보이지 않는다면 노력대비 성장은 불가하고 심지어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도 퍼포먼스는 오히려 하락하는 경우도 가끔 발생한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역치값은 계속 높아지기 때문에 성장을 이끌기 위해 들여야 하는 점진적으로 과부하의 정도는 계속 커지기만 한다.

온 종일 운동만 하는 전문스포츠맨이 아닌 우리들은 생업을 꾸리느라 운동빈도가 뜸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퍼포먼스의 한계치가 빠르게 찾아온다. 게다가 추워지는 겨울이면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생기니 좋은 변명거리 삼아 운동을 쉬고, 어김없이 초기화가 진행된다.

초기화가 있기에 급진적인 성장의 기울기와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자기효능감을 반복해서 느낄 수 있다. 한 종목의 달인이 되어버리면 성장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 종목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거의 모든 종목을 다 섭렵해버려 성장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운동하는 것만으로 다시 가파른 성장을 할 수 있다. 초기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제로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얼마나 다행인 것인가.

초기화를 받아들일 때 초기화 전의 최대 퍼포먼스를 기준으로 잡으면 안 된다. 그건 작년의 최대치였다. 그 결과는 4,000키로의 라이딩 마일리지라는 인풋이 있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아웃풋이었다.

아예 운동을 하기 전의 시점을 제로점으로 잡자. 너무 처음보다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즈음, 그러니까 자전거라면 클릿슈즈를 처음 꽂던 시점, 달리기라면 런닝팬츠를 처음 산 시점 정도가 되겠다.

인간은 본디 학습에 재미를 느낀다. 모르는 정보를 아는 것도 그 정보를 통해 내 사냥실력이 늘어는 것도 재미를 느낀다. 그렇게 배움에 재미를 느낀 조상들만 살아남아서 700만년동안 대를 이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움이 재미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현대 교육 때문이다. 배움을 교육과 학습으로 구분해보자. 사전적 정의는 다르지만 나는 이 둘을 능동수동으로 구분한다. 학습주체가 능동적이면 학습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교육이다. 교육은 선생이 있어야하고 학습은 스스로가 선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배움은 본디 재밌는 것이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전공은 다양해져서 사람마다 배움의 성과가 덜나오는 분야를 재미없게 느낄 뿐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잘 맞는 분야를 찾기만 한다면 누구나 배움에서 재미를 느낀다.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아이들도 공부엔 집중 못하지만 게임엔 누구보다 집중을 잘한다. 공부는 적성에 맞기 어렵지만 게임은 누구에게나 적성이 잘 맞다. 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문제일 뿐. 게임이 적성에 잘 맞는 이유는 그렇게 디자인되었기 때문이다. 게임기획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재미를 느끼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연구해 게임의 요소로 구현해낸다. 그리고 그 요소 중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가 배움과 성장이다. 재미있을 수 밖에 없도록 겨냥해서 디자인했으니 재미가 없을 수 없을 수 밖에.

그런 게임에서도 초기화 개념은 있다. 육성과 성장에 한계를 느끼는 것을 알게 되자 게임 기획자들은 한 캐릭터를 계속 성장시키기보다 매 게임마다 반복성장시키기로 했다. 매판 1렙부터 새로 키워야 하는 롤은 매판 짜릿해 최고야 늘 새로워. 성장을 통한 만족감이 가장 특화된 게임은 idle장르다. 자원을 캐서 그 돈으로 업드레이드하고 효율을 높여 다시 자원을 더 모으길 반복하는, 또는 전투력을 키우길 반복하는 이런 유형의 게임은 게임의 작동원리가 어느 정도 파악되기 시작한 순간 재미가 없어진다. 게임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눈에 들어오는 순간 현타가 오더라.

직선적인 게임 진행방식을 정기적으로 초기화시켜 같은 게임도 새로운 게임이 되는 것이다. 열배나 많은 세계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콘텐츠로 열 번을 반복시킬 수 있으므로 생산성도 좋다. 모두 초기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라이트유저는 세계에 발을 담궈본 것만으로도 충족시키고, 헤비 유저는 초기화를 반복하며 열배의 플레이타임을 즐겨도 만족스럽게 게임할 수 있다. 이전과 똑같은 반복을 하게 된다면 재미가 없겠지만 이전에 어렵게 깬 것을 쉽게 깨부수게 되면서 자기효능감을 느낀다. 1.5배 정도 강해지게 해주는 것만으로 엄청 만족스러워진다. 환생 개념도 초기화고 부케 생성도 초기화고 시즌제로 돌리는 것도 초기화다.

초기화를 시킨 다음엔 게임의 양상이 달라진다. 성장결과의 정도가 아니라 성장의 기울기, 즉 성장의 속도에 재미를 느끼게 된다. 초기화도 반복하다보면 초기화를 극복하는 데에도 속도가 붙는다. 초기화를 극복하는 데 처음에는 3주가 걸렸다면 그 다음 초기화극복엔 보름밖에 걸리지 않고 그 다음엔 열흘 정도면 본격적인 운동강도를 받아낼 정도의 몸 상태가 준비될 것이다. 잔차 타는 사람들은 이걸 몸이 올랐다고 표현하더라.

그러니 초기화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초기화가 없다면 우리는 성장 기울기가 완만해져버린 영역 속에서 아무리 과부하를 먹여도 보상은 조금밖에 못 얻는, 게임을 할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장의 연속이다.
내 삶에 생기를 다시 불어넣기 위해 지난 5개월 유산소를 끊었었다.
게을러서 안 뛴게 아니라니까요?

가슴 뛰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온 삶을 소명에 향하도록 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그 시작은 너무나 강렬하고 확실한 성공의 기세이기 때문에 발동시키기만 하면 그 끝엔 풍족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과정 또한 가슴 뛰며 매일이 즐거울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부터 그 상태가 되겠다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발동되지 않는다. 내 의식이 그렇게 단순하게 이뤄져 있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에 울림이 있어야 한다. 그 보다 깊은 아랫배에서 욱하고 올라와야 한다. 잠재의식에서도 갈망하면 자는 중에도 그것을 원하고 궁리하게 된다. 잠결에 해법을 생각해낼 정도로 그것을 열망해야 한다. 그것을 열망해야 한다. 열망해야 한다. 열망. 그렇다. 열망.

나는 열망하는 방법을 잊었다. 무엇을 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런 것인 줄로 알았다. 하고 싶은 것은 참고, 갖고 싶은 것은 미루고, 내 욕망보다는 상대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어른만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이고 지켜야 할 품위로 배웠다. 그렇게 나를 훈련시켰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책임과 의무 밖에 없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아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머리로만 생각한들 내면에서 반응이 전혀 생길 리 없었다.

 

◾열망하는 법을 되찾자. 마음이 가는 곳이 무엇이라도 있다면 그대로 직진해보자.

◾ 마음을 드러내보자. 마음을 글로 말로 표현해보자. 더 많은 사람에게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그대로 드러내보자.

◾ 마음을 다스려보자. Mind Routine을 통해 건강한 마음을 갖자. 긍정희망-마음이 열정-행동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행동이 의식을 만들기도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자.

우리는 조상에게 감사할 줄을 모른다. 지금의 우리를 존재케 해준 최초의 생명체, 뭍으로 올라왔던 물고기, 호모 사피엔스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배은망덕함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물려질 것이다. 그들도 우리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원시적인 모습을 하찮게 깔보며 웃음거리로 여기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먼 미래에는 지금의 종과는 전혀 다른 post-human이 만들어질 것이다. post에는 여러 뜻이 있다. 시기적으로 후대에 오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지만, 후대는 선대를 부정하면서 발전하기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있고, 선대의 한계점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포스트 휴먼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것이며, 효율과 속도 측면에서 우월할 것이고, 현대인이 인지하는 것보다 초월적인 차원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생인류가 미래인류보다 저급한 존재라는 사실에 낙담하는 것은 잘못이다. 3,000년대에 미래인류로 태어났다고 해보자. 미래 인류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할까? 비교와 낙담의 태도가 여전하다면 4,000년대의 미래인류에 비해 저급한 존재라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을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는 오만한 욕심이자,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불만족으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오류가 대물림되지 않도록 허무주의라는 장치가 있다. 허무주의에 빠진 존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고, 삶의 목표를 잃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만든다.

과거의 조상도, 현생 인류도, 미래 인류도 변치 않는 공통점은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개선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선의 의지가 지금에 다다르게 했고, 미래인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짧은 현생을 살아가는 중에도 조금씩의 진척이 이뤄지고 있는데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 같다.

있는 것을 더 잘하게 한다.
있는 것을 대리수행하게 한다.
없는 것을 보완한다.
차원이 다른 개념으로 transform한다.

각각 구체적인 예를 들면 너무 당연하고 심심한 얘기가 되어 썼다 지운다. 슈퍼히어로에 이 개선의 의지가 모두 투영되어 보여지는 것 같다.

내 성격을 아는 사람들이 나에게 한 조언은 한결같았다. 그냥 적당히 시키는 것만, 남들만큼만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 눈에 보이는 영역, 아니 조금 양보해서 내 손에 닿는 영역은 무조건 내 방식과 원칙대로 일이 돌아가야 했다. 어릴 때에도 새우깡 봉지를 세로로 찢거나 뒤집어서 뜯거나 뜯는 중에 삑사리가 나면 나는 나뒹굴며 통곡을 했고 그 새우깡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들었다.

성격을 바꾸려고도 노력해봤다. 하지만 예외를 용납하거나 원칙을 어기는 상황은 언제나 비극으로 귀결되었고,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원래 성격대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원칙은 나날이 빡빡해졌고, 나는 보통 이상의 꼰대가 되어간다.

새우깡을 어떻게 뜯어야 잘 뜯는 것인지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지적질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내게도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다. 돈벌기 위해 하는 일에 유쾌하고 말고를 따질 건 아니지만. 부양할 가족, 자식, 와이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지도 않고, 챙길 건 고양이 한 마리 뿐. 그래서인지 생계유지가 가능해진 시점 이후로는 일이 돈을 벌기 위한 행위가 아니게 된 것 같다. 일을 통해 자존감을 충족시키거나, 정체성을 찾으려 시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낙담에 빠져 좌절한다는 걸 이번 계기로 알게 되었다.

관계의 지속가능성은 계산이 가능하다. 40점 이하는 서로 손해보는 거래, 40~60점은 죽지 못해 사는 사이, 60~80점은 윈윈 관계의 파트너십, 80점 이상은 환상의 콤비. 이렇게 숫자로 딱 짚어낼 수 있다. 후하게 줘도 60점을 넘기진 못할 것 같다는 계산이 나오자 난 결별을 준비했다.

이별의 순간은 말처럼 쉽진 않다. 지난 금요일부터 닷새를 누워 지냈다. 짜장면도 탕수육도 치킨도 시켜먹었다. 담배도 폈다. 동굴이다.

이젠 이 곳이 동굴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동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된다는 것도 안다. 불안해하거나 미리 나오려고 해도 달라질 것 없다는 것도 안다. 나란 짐승은 일년에 열흘 정도는 동굴에서 시간을 보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냥 그렇게 동굴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스스로를 놓아두었다.

오늘은 동굴에서 나온 날이다. 몸무게가 2키로가 불었다. 일주일간 밀렸던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네 봉지 버렸고, 냉장고 청소를 했고, 대형폐기물 하나를 버렸고, 옷장의 규칙을 새로 만들었다.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고 새벽엔 쇠를 들었다.

어디든 상관없어. 목적지는 자전거 위니까!

자전거에 올라타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한 거야. 어딘가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된 자전거지만 때로는 자전거 그 자체만으로도 목적이 될 수 있지. 오늘은 그런 날이고, 그러니 어딜 가든 상관없어.

목적지를 정한다는 것은 내게 큰 스트레스야. 마치 직장인이 점심메뉴를 정하는 것만큼이나 중대한 사안이거든. “어제 먹었으니까 안돼, 주말에 먹을거니까 안돼, 기름져서 안돼, 단백질 비중이 적어서 안돼….” 선택에 앞서 제거의 과정부터 거쳐야 하는 것도 마음을 어렵게 해.

선택이 어려운 이유는 선택지가 불만족스러워서가 아니야. 포기할 선택지가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선택의 만족도는 오히려 떨어지는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현상이 생겨. 단순히 아쉬운 마음을 넘어 무력함과 좌절을 느끼게 만들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까지 하게 되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문명의 혜택은 늘어도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야. 우리는 조상 대대로 불만족하는 욕망덩어리의 기질을 물려받았어.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고, 그것을 갖자마자 금새 흥미를 잃고 불만족하도록 디자인되어있어. 그래야 새로운 것을 다시 욕망할 수 있으니까. 이 기질은 DNA 깊은 곳에 새겨져 있어. 생존경쟁에선 불만종자들이 우월했고 대를 이을 확률이 높았거든. 하지만 때로는 조상들이 물려준 기질들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에는 도움되지 않을 때가 있어. 에너지를 장기간 저장시키는 시스템은 기근이 만연한 시대엔 필요했지만, 현대인에겐 탄수화물 중독과 비만이라는 부작용을 야기하는 것처럼 말이야.

선택지가 많지 않던 조상님들의 삶. 그리고 내 삶. 달라. 너무나 달라. 다르니까 다르게 해보기로 했어. 선택하지 않기로. ‘자전거를 끌고 나가 안장 위에 앉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의 기로란 대체로 둘 중 하나야. 그럼 왼쪽으로 갈 지, 오른쪽으로 갈 지만 정하면 되는 거거든. 어디든 상관없지 않겠어? 자전거 위에 앉아있는 건 매한가지니까.

갈림길에 도착해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그건 반길 일이야. 그 때 마음의 소리가 들리거든. 난 오늘 마음에 귀를 기울였더니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들리길래 바로 핸들을 꺽었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평소에 하던 것과 반대의 선택을 해보는 건 어때? 분명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거야. 난 오늘 평소와 반대의 선택을 했다가 실수로 한강을 건너버렸지만 말이야. 다리 위에서 안 죽으려고 시속 40으로 째느라 고생 좀 했지만 말이야. 라이딩이 끝나고 나니 분명 오늘 라이딩의 하이라이트는 그 때였단 생각이 들어.

‘불필요한 선택고민을 없애는 것’ 그것은 감사만족을 느끼는 마음의 기술. 건강한 마음으로 도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현대인에게 필요한 필수 소양.

 

주행 기록 🚴‍♀️

훌륭한 해법은
니일인지 내일인지 애매모호한
그 경계에서 탄생한다.

니일내일 분명히 갈리는 일들은
해법을 찾은 일들이라 협력이 필요치 않고
분업만 한다.

니일내일 애매모호한 일들은
혼자의 능력으론 해법을 찾지 못한 일들이라
짱구를 맞대 협력해야만 한다

니일내일 정해져 바쁘게 사는 와중에도
우리가 잠시라도 짬을 내어 만나야 하는 이유는
내 부족한 짱구로는 풀지못할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너무 바빠 조금의 시간도 내어줄 수 없다고 하니
그대 좋아하는 담배라도 배워볼까 고민이다

갈리는 일의 경계에선
선을 그어 잘라내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이지만
갈리지 않는 일의 경계에선
벽을 허물어 서로에게 영감이 되어주는 것이
서로를 쓸모있는 존재로 성장시키는 방법이다

허락없이 벽을 허무는 일이
보편적인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그대 나의 영감이듯
나 그대에게 할멈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