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달만에 7키로가 불었다. 이십대 초반에 근육이 하나도 없을 때보다 붙는 속도가 빠르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 되는 것 같다.

하나는 근성장의 원리를 이해한 덕분이다. 운동은 근성장을 지시하기 위한 자극제공일 뿐이고 실질적 근성장은 영양공급이 충분이 이뤄진 휴식기간에 이뤄진다. 이걸 안 이후로 운동을 악으로 하지 않게 되었다. 자극을 제대로 먹이는 데에 집중하고 잘 챙겨먹고 누워서 종일 유튜브나 책을 본다.

두번째 이유는 운동 말고 하는 게 없기 때문이다. 백수가 되니 하루에 운동만 세시간씩 조질 수 있다. 백수는 오늘도 느지막히 점심을 챙겨먹고 카페로 간다. 카페는 9시에 닫기 때문에 중간에 허기지지 않도록 견과류와 단백질음료를 챙겨간다. 공급이 끊기면 근성장기회의 낭비 혹은 근손실이다. 백수가 되었으니 지출을 줄여야 한다. 배낭을 짊어지고 3키로 남짓 거리를 걸어서 오간다. 50분 쯤 걸린다. 게을러서 하지 않는 유산소운동을 이걸로 떼우고 있다. 지방 연소 효과가 나오는 유산소운동은 심박이 110을 넘겨야 하는데 걷는 것 만으로는 90언저리를 오가는 것 같아 오늘은 조금 뛰어 보았다.

운동을 처음 배운 건 군대에서다. 과월호 잡지를 파는 상점에서 2000년대 초반에 나왔던 헬창잡지를 열권씩 사서 들고왔다. 그 책에서 나오는 운동방식이 요즘 나오는 정보와 다를 게 없다. 근육의 성장원리와 공략법은 백년 후에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일도 이처럼 변함없음 좋으련만,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현대인들은 따라가기 벅차다. 이런 시대에 운동은 더욱 매력적이다. 이만큼 정직하고 공평한 일도 없다. 노력을 들이는 만큼 기대한 만큼의 성과가 보장되는 운동. 이 매력에 빠져 백수가 일은 놓아도 운동은 놓지 않고 꾸준히 한다.

 

사진 기록 💪

내 성격을 아는 사람들이 나에게 한 조언은 한결같았다. 그냥 적당히 시키는 것만, 남들만큼만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 눈에 보이는 영역, 아니 조금 양보해서 내 손에 닿는 영역은 무조건 내 방식과 원칙대로 일이 돌아가야 했다. 어릴 때에도 새우깡 봉지를 세로로 찢거나 뒤집어서 뜯거나 뜯는 중에 삑사리가 나면 나는 나뒹굴며 통곡을 했고 그 새우깡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들었다.

성격을 바꾸려고도 노력해봤다. 하지만 예외를 용납하거나 원칙을 어기는 상황은 언제나 비극으로 귀결되었고,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원래 성격대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원칙은 나날이 빡빡해졌고, 나는 보통 이상의 꼰대가 되어간다.

새우깡을 어떻게 뜯어야 잘 뜯는 것인지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지적질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내게도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다. 돈벌기 위해 하는 일에 유쾌하고 말고를 따질 건 아니지만. 부양할 가족, 자식, 와이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지도 않고, 챙길 건 고양이 한 마리 뿐. 그래서인지 생계유지가 가능해진 시점 이후로는 일이 돈을 벌기 위한 행위가 아니게 된 것 같다. 일을 통해 자존감을 충족시키거나, 정체성을 찾으려 시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낙담에 빠져 좌절한다는 걸 이번 계기로 알게 되었다.

관계의 지속가능성은 계산이 가능하다. 40점 이하는 서로 손해보는 거래, 40~60점은 죽지 못해 사는 사이, 60~80점은 윈윈 관계의 파트너십, 80점 이상은 환상의 콤비. 이렇게 숫자로 딱 짚어낼 수 있다. 후하게 줘도 60점을 넘기진 못할 것 같다는 계산이 나오자 난 결별을 준비했다.

이별의 순간은 말처럼 쉽진 않다. 지난 금요일부터 닷새를 누워 지냈다. 짜장면도 탕수육도 치킨도 시켜먹었다. 담배도 폈다. 동굴이다.

이젠 이 곳이 동굴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동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된다는 것도 안다. 불안해하거나 미리 나오려고 해도 달라질 것 없다는 것도 안다. 나란 짐승은 일년에 열흘 정도는 동굴에서 시간을 보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냥 그렇게 동굴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스스로를 놓아두었다.

오늘은 동굴에서 나온 날이다. 몸무게가 2키로가 불었다. 일주일간 밀렸던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네 봉지 버렸고, 냉장고 청소를 했고, 대형폐기물 하나를 버렸고, 옷장의 규칙을 새로 만들었다.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고 새벽엔 쇠를 들었다.

어디든 상관없어. 목적지는 자전거 위니까!

자전거에 올라타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한 거야. 어딘가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된 자전거지만 때로는 자전거 그 자체만으로도 목적이 될 수 있지. 오늘은 그런 날이고, 그러니 어딜 가든 상관없어.

목적지를 정한다는 것은 내게 큰 스트레스야. 마치 직장인이 점심메뉴를 정하는 것만큼이나 중대한 사안이거든. “어제 먹었으니까 안돼, 주말에 먹을거니까 안돼, 기름져서 안돼, 단백질 비중이 적어서 안돼….” 선택에 앞서 제거의 과정부터 거쳐야 하는 것도 마음을 어렵게 해.

선택이 어려운 이유는 선택지가 불만족스러워서가 아니야. 포기할 선택지가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선택의 만족도는 오히려 떨어지는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현상이 생겨. 단순히 아쉬운 마음을 넘어 무력함과 좌절을 느끼게 만들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까지 하게 되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문명의 혜택은 늘어도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야. 우리는 조상 대대로 불만족하는 욕망덩어리의 기질을 물려받았어.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고, 그것을 갖자마자 금새 흥미를 잃고 불만족하도록 디자인되어있어. 그래야 새로운 것을 다시 욕망할 수 있으니까. 이 기질은 DNA 깊은 곳에 새겨져 있어. 생존경쟁에선 불만종자들이 우월했고 대를 이을 확률이 높았거든. 하지만 때로는 조상들이 물려준 기질들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에는 도움되지 않을 때가 있어. 에너지를 장기간 저장시키는 시스템은 기근이 만연한 시대엔 필요했지만, 현대인에겐 탄수화물 중독과 비만이라는 부작용을 야기하는 것처럼 말이야.

선택지가 많지 않던 조상님들의 삶. 그리고 내 삶. 달라. 너무나 달라. 다르니까 다르게 해보기로 했어. 선택하지 않기로. ‘자전거를 끌고 나가 안장 위에 앉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의 기로란 대체로 둘 중 하나야. 그럼 왼쪽으로 갈 지, 오른쪽으로 갈 지만 정하면 되는 거거든. 어디든 상관없지 않겠어? 자전거 위에 앉아있는 건 매한가지니까.

갈림길에 도착해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그건 반길 일이야. 그 때 마음의 소리가 들리거든. 난 오늘 마음에 귀를 기울였더니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들리길래 바로 핸들을 꺽었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평소에 하던 것과 반대의 선택을 해보는 건 어때? 분명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거야. 난 오늘 평소와 반대의 선택을 했다가 실수로 한강을 건너버렸지만 말이야. 다리 위에서 안 죽으려고 시속 40으로 째느라 고생 좀 했지만 말이야. 라이딩이 끝나고 나니 분명 오늘 라이딩의 하이라이트는 그 때였단 생각이 들어.

‘불필요한 선택고민을 없애는 것’ 그것은 감사만족을 느끼는 마음의 기술. 건강한 마음으로 도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현대인에게 필요한 필수 소양.

 

주행 기록 🚴‍♀️

훌륭한 해법은
니일인지 내일인지 애매모호한
그 경계에서 탄생한다.

니일내일 분명히 갈리는 일들은
해법을 찾은 일들이라 협력이 필요치 않고
분업만 한다.

니일내일 애매모호한 일들은
혼자의 능력으론 해법을 찾지 못한 일들이라
짱구를 맞대 협력해야만 한다

니일내일 정해져 바쁘게 사는 와중에도
우리가 잠시라도 짬을 내어 만나야 하는 이유는
내 부족한 짱구로는 풀지못할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너무 바빠 조금의 시간도 내어줄 수 없다고 하니
그대 좋아하는 담배라도 배워볼까 고민이다

갈리는 일의 경계에선
선을 그어 잘라내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이지만
갈리지 않는 일의 경계에선
벽을 허물어 서로에게 영감이 되어주는 것이
서로를 쓸모있는 존재로 성장시키는 방법이다

허락없이 벽을 허무는 일이
보편적인 예의에 어긋난다는 것을 모르진 않지만

그대 나의 영감이듯
나 그대에게 할멈이고 싶다

그것은 영업·세일즈다.

드러커 할부지는 “마케팅은 영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마케팅의 목적은 고객창출이다. 고객창출엔 책임만큼의 권한도 함께 주어진다.
영업·세일즈의 목적은 판매촉진이다. 판매촉진엔 책임만 있고 권한이 없다.

영업·세일즈는 공급자주의에서 필요하던 역할이다. 만들어둔 상품 및 서비스의 재고를 처리하기 위한 활동. 판매만 되면 그만이라는 태도. 상품이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는지나 고객이 정말 필요한지 따지지도 않는다. 권한없이 책임만 강요받은 척박한 상황을 극복한 사람들이 써내려간 영업 분야의 책 대부분은 자화자찬 일기장이다. 에스키모인에게 냉장고를 판 사기꾼을 영웅으로 추대하는 사람들도 있다.

반면 마케팅은 소비자중심주의다. 만든 것을 팔자가 아니라, 애초에 팔릴 것을 만들자는 태도다. 그러려면 제품과 서비스의 기획에 관여할 권한이 주어져야 한다. 에스키모인에게 최적화된 식품저장고를 기획하고 개발하는 상식적인 활동이 마케팅이다.

대체로 마케팅 부서와 영업 부서는 사이가 좋지 않다. 마케팅 부서는 영업부서를 보고 “우리는 스마트한 사무직인데 너네는 발로 뛰어라”고 폄하하고, 영업 부서는 “실적은 우리가 다 내는데 쟤네들은 그 돈으로 뻘짓한다”고 응수한다. 사측은 말리지 않는다. 싸움을 방조하는 것을 넘어 조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라서 싸우는 게 아니다. 같아서 싸운다. 둘 다 영업부서이기 때문이다. 수행하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오프라인 영업부, 매체 영업부, 디지털 영업부가 싸울수록 판매량은 늘어난다. 이곳엔 마케팅은 없고 영업만 있다.

시간은 흘러 기술이 진보했다. 디지털 세계로 사람들의 활동영역이 넓어졌고 언제나 그랬듯 사람의 발길이 닿는 곳에 시장이 들어섰다. 여기도 마케팅은 없고 영업만 있다. 콘텐츠 마케팅은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영업이다. 영업사원의 접객, 설명, 설득, 회유의 과정이 디지털-전단으로 만들어져서 복제되는 것이다. 퍼포먼스 마케팅은 디지털기술을 활용한 세일즈다. 기존의 영업사원이 하던 고객DB수집(타겟설정), 견적·제안(광고소재제작), LeadGen(전환), Closing(결제)을 최첨단 기술을 활용해 수행한다.

두 종류의 활동은 디지털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묶인다. 디지털 마케팅이라고 모두 영업·세일즈인 것은 아니다. 고객의 가치 창출은 고객의 수요, 필요, 욕구에서 나온다. 고객의 수요, 필요, 욕구를 파악하는 데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다면 마케팅이라고 할 수 있다. 드물지만.

영업·세일즈부서엔 책임만 주어지고 권한은 없다. 대체로 사측으로부터 좋은 대우를 받지 못한다. 영업·세일즈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자 사측에선 마케팅이라는 표현을 훔쳐 쓰기 시작했다. 이로써 현대인의 95%가 마케팅이 무엇인지 오해하게 되었다.

마케팅을 마케팅이라 부를 수 없게 되었지만, 마케팅이 아닌 다른 어휘를 쓸 수도 없다. 마케팅이 Martet + ing인데 어떻게 다른 걸 쓰나.

이렇게 우리는 마케팅이라는 어휘를 잃고 있다.

 

관련글 : 더듬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바이럴 영상의 죽음)

기업활동이라는 게 별것 없다. 문제를 찾아 푸는 일이다.

경쟁력이라는 게 별것 없다. 남들보다 문제를 잘 푸는 것이다.

조직이라는 게 별것 없다. 더 큰 문제를 풀려고 모인 여럿이다.

운영이라는 게 별것 없다. 이미 아는 문제를 빨리 많이 푸는 것이다.

전략이라는 게 별것 없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보려고 머리 쓰는 것이다.

고객이라는 게 별것 없다.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로 끙끙 앓고 있는 사람이다. (돈 주는 사람 아님.)

마케팅이라는 게 별것 없다. 문제 잘 푼다는 걸 고객에게 이해시키는 일이다.

비즈니스모델이라는 게 별것 없다. 문제를 풀어주니 고객이 너무너무 고맙다며 돈을 주고싶어 안달 났기 때문에 냉큼 받아내는 일이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심각하게 생각하던 나를 위해 정리)

 

— 덧붙임 —

문제해결 프레임워크를 이해하는 데에 2년 걸렸다. 익숙하게 활용하는 데에 2년 더 걸렸다.
가치의 창출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 5년 걸렸다. 가치를 창출하는 데에 2년 더 걸렸다.
고객 중심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에 7년 걸렸다.

“위 사람을 프로젝트 컨설턴트로 임명합니다”

세상에 없던 직업을 만들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광대한 산업 내에서 우리를 필요로하는 역할의 빈틈을 찾아냈다. 그 일을 43개월 동안 꾸준히 해오니, 어떤 일인지 조금 알 것 같다.

이젠 우리가 일하는 방식이 산업에서 지켜져야 할 표준이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믿을만한 파트너스 모여있어 제작업무 신임하니 고객응대 종일할수 있었다. 농담삼아 콜센터 돌린다고 얘기했지만 실제로는 연구소를 돌렸다. 기술은 없고 노가다만 할 줄 알아서 수천건의 거래를 복기하고 또 복기했다.

사고 터지는 게 안타까워 시작한 일이다. 수천만원의 비용과 두어달의 시간이 허비되는 걸 눈뜨고 지켜보기 힘들어 오지랖이 발동했다. 온갖 기업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구경하는 재미는 덤이다. 우리가 그동안 경험한 고객의 양은 세상 어떤 피디가 평생 겪을 수 없는 양이다. 경험이 경험으로만 그치지 않고 절차로 만들어질 수 있었다.

광고계엔 이런 말이 있다. “좋은 광고는 좋은 광고주가 만든다” 우리 회사엔 이런 말이 있다. “좋은 광고주는 내가 만든다” 우리가 찾아낸 표준 거래 절차로 산업의 비효율과 사고를 줄이고 있다. 표면적으론 그렇다. 실제론 의지를 심어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좋은 광고주는 공통적으로 프로젝트 완수를 향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의지는 고유하거나 독립적이지 않다.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의지도 만들어질 수 있다. 앞으로 닥칠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갈 수 있도록 프로젝트에 강한 의지를 심어 Deal Closing까지 이끌어내는 것이 이 일이다.

몇 사람들은 이 일을 하러 왔다가도 금새 떠났다. 진짜 콜센터로 생각하는 사람은 내보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가장 처음 팀을 꾸렸던 권프로와 이프로만 남았다. 다시 둘이 되었는데 회사는 더 잘 돌아간다. 결국 이 일에 진심인 사람만 남았다. 권프로는 나를 위해서 일하는 건 아닐 것이다. 산업 내에서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두 명 짜리 회사면 뭐 어떤가. 물리적인 일터는 4평짜리 사무실이지만 실질적인 일터는 3000억의 산업이다.

매니저로 시작한 직함을 작년엔 코디네이터로 바꿨다. 이젠 프로젝트 컨설턴트로 바꾼다. 세어보니 권프로가 230건을 했고 이프로는 130건을 했다. 내가 만든 직업이라 앞에 수석을 붙이고 싶었지만, 양으로 밀리니 명분이 적다. 그냥 둘 다 컨설턴트 하기로 했다. 나 스스로 임명할 순 없어서 친정 식구에게 임명식을 도와달라 했다.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 졸업식 이후로 꽃 선물을 처음 받아봤는데 기분이 꽤 괜찮았다.

올 봄, 자전거 학원을 다녔다. 4주 짜리. 수강일기를 썼었다. 한데 모아 기록해둔다.

 

평로라에서 외전근 페달링 리듬 찾기 (학원 첫날)

제가 알던 페달링을 다 써봐도 그 리듬감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제까지 전 다른 걸 외전근 페달링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나봐요? 실망스럽진 않아요. 오히려 좋은 소식이죠. 그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걸 깨우치게 되면 제 실력은 또 얼마나 성장할까요? 벌써 설렙니다.

강습이 끝난 뒤 한시간 더 탔습니다. 말씀해주신 힌트들을 의식할수록 어색해졌습니다. 몸이 박자감을 찾기보단 독립적으로 동작하는 느낌. 머리로 안 찾아지니 몸으로 찾아보려 했습니다. 눈을 감고도 하늘을 보고도 땅을 보고도 해보았습니다. 탈진한 상태라면 무의식적으로 찾아내지 않을까 싶어 서너번 털어보기도 했습니다.

이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비슷한 리듬을 찾은 것 같습니다.

힘의 타이밍. 제 몸의 느낌대로라면 무릎이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을 때부터 짧게 스트로크를 쳐야 했습니다. 12-5는 정말 찰나의 순간입니다. ‘12시부터 5시까지만 힘을 줘’라는 코딩이 작동할만큼의 제 하드웨어는 좋지 않습니다. 명령어를 바꿔보았습니다. ‘12시에서 짧게 툭툭’ 더 잘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당기는 근육의 습관도 잠시나마 잊혀집니다.

힘의 시작점. 무릎의 위치. 제 습관대로의 페달링보다 무릎은 안으로 2~3cm 가량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외전근은 다리를 바깥으로 회전시킬 때 쓰이는 근육 너댓개를 묶어 부르는 것인데, 이름 그대로 바깥 회전이 일어나려면 시작점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힘의 방향. 외전근은 무작정 바깥으로만 빼는 줄 알았는데 안으로 넣었다가 밖으로 밀어내듯 밟았습니다. 수직보다 5도 정도의 작은 차이였지만 몸 바깥쪽 근육이 많이 개입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릎의 시작점과 벡터의 방향만 정해두니 새끼발가락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습니다. 새끼발가락에 힘준다는 코딩도 안하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Q. 이게 제대로 찾은 것인지 그 리듬감만 비슷하게 흉내내기 위한 요령을 부린건진 모르겠습니다.

Q. 발목을 펴고 11-3시까지 앞으로 던지듯이 내미는 페달링은 무엇인가요? (둔근과 대퇴직근만 사용)

Q. 860칼로리밖에 안태웠는데 왜때문에 필드라이딩에서 1200태운만큼 힘들죠?

Q. 두시간 지났는데도 심장이 쿵쾅대는데 저 죽는건 아니죠?

 

클릿 압수 (학원 둘째 날)

오늘도 종일 외전근 시팅 리듬만 찾으려다 아무것도 못했다. 이걸 못하면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없단다. 별 지랄을 다 했다. 당기는 근육의 관여를 줄여보자고 클릿도 압수당했다.

선생님을 퇴근시키고 혼자 돌리자니 오늘은 다른 회원이 없다.
나 하나 때문에 사장님이 퇴근 못하시는 것 같아 챙겨 나왔다.

나왔다.
나오니 나왔다.
필드에 나오니 리듬이 나왔다.

안장 코가 사타구니를 치고 사타구니는 다시 안장을 튕겨내는 이 리듬.

이 리듬. 나 안다. 아는 수준도 아니고 잘 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주 우수한 동작으로 우아하게 리듬에 변주까지 먹일 수 있다.

나 평생 이 리듬으로 타왔다. 세발자전거도 이렇게 탔던 것처럼 페달에 발만 올려도 이 리듬은 나온다.

평로라에서만 안 나온다.

 

당겨 올리는 페달링 연습 (학원 셋째 날)

■ 선생님 말씀

오늘은 당겨 올리는 것만 연습할 거에요. 직근이에요. 대퇴직근. 장요근과 대퇴직근으로 끄집어 올리세요.
프로 중에서도 직근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기량이 크게 차이납니다. 이게 필살기에요.
끝까지 끌어올려서 앞으로 밀어내는 것까지 얘 역할이에요. 뒤에서 앞으로 끌어 당기듯이 무릎으로 니킥 차듯이 당겨 올리세요.

■ 훈련 후 소감

당기는 근육 아예 쓰지 말란 사람도 있고 조금씩만 쓰란 사람도 있었는데 아니네? 오늘 두시간 동안 당기기만 했다.
고관절 주변 근육을 위주로 쓰니 무릎 주변 근육은 거의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무릎에 대미지도 없다.
선생님은 장요근과 복근이 당기면서 온몸이 웅크려지듯이 힘들거라 했는데 작년에 뺑뺑이 돌리면서 이 근육 자주 썻는지 몸에 전혀 무리 없고 너무 상쾌하다.
당기는 근육만으로는 평로라 시속 80 넘기기 힘들다. 케이던스도 높이기 어렵다. 그리고 다른 페달링으로 전환하기도 쉽지 않다. 얘는 얘만의 타이밍이 따로 있는 것 같다.

■ 짬내서 던진 막간 질문에 대한 답변

장요근은 자주 쓰면 안 되는 줄 알고 가끔씩만 20번 스트로크 치고 말았다고 했더니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계속 쓰라 하셨다.
모든 근육은 수축하면서 힘을 낸다. 그래서 관절을 뻗는 것보다 관절을 굽히는 힘이 더 세다. 온 몸을 굽히면서 니킥으로 당기는 페달링은 가장 큰 파워를 단기간에 뽑아낼 수 있다.
최대심박측정방식은 계단을 뛰어오르는 때 측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니킥 댄싱으로 심박을 240까지 올렸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만큼 온 몸의 에너지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신호다.
3분 정도의 업힐 코스를 공략할 땐 밟는 페달링에서 당기는 페달링으로 점점 바꿔나가는 게 좋다. 큰 근육을 나중에 써서 마지막에 쥐어 짜는 것이 에너지를 모두 쏟아낼 수 있어 효율적이다.
평소에 훈련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반대로 당기는 페달링을 먼저 써서 밟는 페달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당기는 근육으로 젖산역치에 빠르게 다다른 후에 밟는 근육으로 지속지극을 주는 방식이다. 그렇다. 젖산역치 훈련이다.

■ 나의 상태 진단

당기는 페달링에선 파워밸런스 60:40 까지 커졌다. 오른다리에 비해 왼다리엔 자극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에 자주 사용한 것이다. 오른다리는 왼다리가 굴리는 페달링에 얹혀가듯 살아온지라 상사점에서 좌우로 흔들렸다.
왼쪽은 수직 직선운동이 이뤄지지만 오른다리는 11자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허벅지가 근육량이 적어 얇은데도 싯포스트에는 더 가깝게 붙어 있었다. 선생님은 골반이 열리지 않은 것이라 말했다. 오른 골반만 열어야 했으나 그것은 무릎의 위치만 바꾼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 처방

선생님도 이정도의 언밸런스는 본 적이 없다며 비장한 표정으로 이걸 고치는 게 가장 시급한 숙제라고 말씀해주셨다.
정 안 된다면 오른발에 스페이서를 넣자고 하셨다. 그럼 힘점을 더 이르게 줄 수 있어 근육의 개입을 조금 늘릴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그 방법은 최후의 처방인데다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선택지라며 머리를 쥐어 뜯으셨다. (아… 선생님… 모발을 소중히…) 선생님의 모발건강을 위해 나는 이 숙제를 기필코 풀어야 한다.
외발페달링 훈련에 대해선 좋은 생각이 아니라 하셨다. 자세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자전거는 몸이 대칭된 상태로 좌우가 번갈아가며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항상 말해왔던 사람이다.
우선의 처방으로 오른 골반만 살짝 뒤로 빼라고 했다. 골반을 뒤로 뺄수록 큰 근육을 사용하게 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골반을 살짝만 뒤튼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익숙한 자세를 지우는 의식을 지속하기도 어려웠다.
이윽고 골반을 틀어내는 요령을 찾았다. 왼손은 후드, 오른손은 바엔드를 잡았더니 어깨와 골반이 자연스레 뒤로 밀렸다. 확실히 오른다리가 페달링에 개입을 많이 한다. 밸런스 수치도 53:47 까지 줄어든다. 당분간은 일반 주행 자세에서도 이렇게 뒤틀어 잡아 교정해볼 계획이다.

■ 선생님의 화법에 대해

선생님의 수업을 세 번 들어보니 참 완곡한 표현이 잦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저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는 경상도 선생님의 “시킨거나 똑바로 해라임마”에 맞먹는 피드백이다. “그래도 엄청 잘하고 있으신거에요.”는 경상도 말로 “이정도는 할 줄 알았다. 등신새끼야” 정도에 맞먹는 피드백이다. 서울살이 어언 10년. 나도 스윗한 서울남자의 표현을 어렴풋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이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10점만점에 3점쯤 되는 것 같다. 박수를 열번 연속 치는 것은 5점 쯤 된다. 나는 평생 누가 나에게 박수를 열번 연속 쳐준 적이 거의 없다. 이 선생님이 나에게 쳐준 박수, 그 빠르고 경쾌한 박수소리를 들었을 땐 내가 자전거 천재인줄로 착각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이은호를 자전거학원에 수강하게 만든다.
박수는 생각보다 자주 터져나왔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50대 아저씨가 한 손을 놓아 물통을 꺼내 마시고 다시 꽂아넣는 것을 성공했을 때에도 박수를 열번 쳐주셨다. 같이온 다른 아저씨가 양손을 놓고 셀카를 찍었을 땐 스무번 쳐주셨다.
아… 이분은 서비스 마인드가 아주 훌륭하신 분이구나… 이분 자전거 안타고 장사 하셨으면 뭘 팔아도 꽤 많이 파셨을 것 같다.

 

 

채우려면 비우라 (학원 넷째 날)

난 몸이 나빠서 머리가 고생하는 타입. 그런데 머리가 좋지도 않음. 혼자 주법연구하고 유튜브보면서 배운 게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음. 소프트웨어가 엉망진창인 상태. 명령어들이 충돌을 일으키고 새로운 명령어는 실행되지도 않음.

나는 제대로 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영상 찍어보면 전혀 다르게 타고 있음. 성립하지 않는 주법도 많고 비효율적인 주법을 몸에 익혀버린 탓에 결론적 연비가 나빠졌음.

다 버려야 함. 주법 많은 거 다 필요없음. 이소룡은 만가지 발차기를 연습한 놈은 하나도 안 무섭다고 했음. 그런데 한가지 발차기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은 무섭다고 했음.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함. 주법을 다양하게 구사할수록 조빱이란 게 쉽게 들통날 뿐. 다 버려도 됨. 만가지 주법 다 버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음.

망치를 들어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야 함. 고통과 위험을 스스로 받아들여 극복하는 자-초인-이 되기 위해.

——— 기타학원에서(어렸을 때 호호깔깔 유모어집에서 읽은 구절) ———
기타 강습료가 얼마인가요?
> 십만원입니다.
저… 다른 곳에서 배운 적이 있는데 강습료를 절반으로 깍아주실 수 있나요?
> 그렇다면 이십만원입니다.
깍아주진 못할 망정 왜 두배가 돼요?
> 다른 곳에서 배우셨다면 잘못된 습관이 들어있을거에요. 잘못된 습관을 지우는 건 백지 상태인 사람을 가르치는 것보다 두배로 어렵습니다. 그러니 두배로 내셔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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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백지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선생님은 올바른 가르침을 입력할 수 없음. 백지가 되지 않으면 수강료를 두배로 청구받게 될지도 모름. 이를 악물고 지워내야 함.

차사장님의 가르침, 친구의 훈수, 나름대로의 연구, 자덕유튜버의 자기주장, 다른 프로 선수의 설명, GCN콘텐츠, 이 모든 것을 버린다. 옳은거 틀린거 가리지 않고 모두 통째로 내다 버린다.

1. 모두 지운다.
2. 선생님이 “바로 그거에요” 라고 한 것만 남긴다.
3. 반복한다. 몸에 새긴다. 머리말고 몸에 새긴다. 머리로 이해하고 싶어지면 당장 생각을 멈춘다. 동작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는다. 잘못된 습관을 덮어버릴 정도로 반복한다. 백지의 상태에서 학습하는 것보다 최소 다섯 배는 많이 반복해야 할 것.

…. 라는 각오로 학원에 갔는데
더이상 가르칠 게 없다며
평로라 거꾸로 타보라고 시키심
거꾸로 타지니까
댄싱까지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댄싱을 또 시키심
댄싱이 되니까
제일 가벼운 기어로 케이던스 50놓고 손놓고 타보라는
말도 안되는 서커스를 숙제로 내주심 ㅡㅡ;;;

종일 서커스 연습을 하다가 어느덧 열시가 되었고
여느날처럼 가파른 지하주차장 언덕을 오르는데
아니 이거 뭐야
왜 자전거가 저절로 올라가지
이상하다 싶어서 또 평지를 달리는데
어라 이상하다
자전거가 가만히 서있네
어허 거참 이상하다
자전거가 저절로 서서 가네
난 얹혀만 있고 얘가 자율주행을 하네
밸런스 미쳐따리 오져따리

5년 전, 요리사를 위한 구인구직 서비스를 기획했다. 요리를 위한 매체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럴싸한 계획이라 생각했다. 경쟁 서비스는 17년 전에 만들었으므로 내가 새로 만들면 당연히 더 나을 것이고 사람도 끌어모을 수 있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서비스를 제대로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게임을 접었다. 싸우기도 전에 졌다. 링 위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최근 구인구직 서비스를 하나 더 기획했다. 어느정도 윤곽이 보이자 서비스를 공개하기 부끄러웠다. 이 서비스 또한 링 위에 올리지 않았다. 5년 전 발생한 사건과 너무 흡사해서 스스로 놀랐다. 나는 이 분야에서 하나도 나아지지 못했구나. 생산의 결과는 공정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므로, 같은 공정을 거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또한 유추 가능하다. 이번 복기는 내가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공정에서의 잘못들을 되돌아보기 위한 복기이다.

 

복기를 하기에 앞서서, 복기에 대한 생각부터 정리한다. 복기는 보통 같은 종류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때 적용하면 좋은 패턴 파악 방법이다. 게임이나 운동에 적용하기 좋다. 형식이 제거된 게임의 규칙이란 대체로 단순해서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목적지와 그 경로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업은 상대적으로 복합적이다.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그 원인이 다양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따라서 복기를 하더라도 정확한 원인이나 개선방향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해석하려고 하더라도 내가 개입되었던 사건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또한 현재의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에 따라, 현재의 결정이 옳다고 판단내리기 위해 과거를 해석하는 관점에 투영되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과관계를 파악하려는 태도는 불가지론에 어긋나며, 복기를 통해 큰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성급한 결론 도출로 이어지거나 사소한 사안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려는 중요도 파악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사업을 되돌아볼 때에는 복기를 하더라도 구체적인 결론을 찾아내진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접근해야 한다. 결론을 찾지 못하더라도, 절차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세상은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에 성급한 체계화와 규격화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복기의 틀은 마련되어야 한다. 과정으로서의 복기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해법을 찾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내공이 더 쌓인 나를 위해서라도 틀에 맞춰 사태를 객관화시켜야 한다. [문제정의/개선]의 2가지 구성이 일반적이겠다.

 

확장과 초심의 문제

한 번 형성된 서비스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변경되긴 어려웠다. 덕지덕지 붙이는 것도, 억지로 늘여 넓히는 것도 올바른 운영방식이 아니었다. 특정 고객의 수요를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공급자와 연결하는 서비스의 콘셉이 바뀔 수 없었다. 그래서 확장 계획을 성급하게 몇 가지 생각했다. 에딧폴리오(구인구직) 에딧팜(직접공급) 하지만 이 두 계획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결에 맞지 않았다. 한 그릇에 담기지 않았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서비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지금껏 3년 8개월 동안 축적한 경험과 경쟁력이 신사업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접근이였다. 실행되더라도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 비드폴리오의 초심은 아래 세 글에 잘 쓰여져 있다. 초심을 지키면서, 산업 내에서의 역할을 지키면서, 중개자의 철칙을 지키면서도 서비스를 확장할 방법은 나온다. 까다로운 조건이 설정되어 오히려 더욱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비드폴리오 창업 동기 (파트너스 편지) http://vidfolio.kr/?p=6251

비맴심서(比買心書) – 비드폴리오 매니저가 갖춰야 할 마음가짐 http://vidfolio.kr/?p=7483

영상제작 거래중개서비스를 창업한 8개월의 기록https://leeunow.mycafe24.com/?p=781

 

내가 만든 세상에 스스로 갇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가진 것이 세상에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욱 깊게 들여다보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잘 만들었다고 만족스러울 때면 멋드러진 이름을 붙이고 흐뭇해했다. 그럴수록 애착이 생기고 이것은 어떤 의미인지 곱씹어보며 자화자찬을 내뱉으며 구성원의 공감을 억지로 이끌어냈다. 그럴수록 내가 만든 세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 가진 것에서부터 생각하는 잘못. 나의 solution은 고작 수단일 뿐인 기능이나 필요에 따라 형성된 절차들일 뿐이었다. 생각의 출발은 고객이어야 하고 생각의 끝도 고객으로 향해야 한다.

 

목표 동기화의 문제

추상적인 미션은 있으나 구체적인 목표가 가시화되지 않았다. 실행 계획들이 미션에 전혀 일치하지 않음에도 수행하는 이유는 alignment를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한참이나 진행된 후에야 많이 어긋나있음을 알게 되었다.

>> 목표를 가시화해야 한다. 가시화란 눈앞에 선히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구체적이어야 한다. 숫자로 표현되면 가장 구체적이다.

 

필요 역량의 파악 문제

모른다는 것은 두 가지다. 알지 못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뉜다. 온라인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온라인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번 실패를 통해 기획자, CPO, 디자이너, 코더의 역할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 (당연하게도) 필요한 역량을 끌어오거나 직접 갖추어야 한다. 필수조건이다.

 

투자(도전)에 대한 태도 문제

7년 전, 사업을 시작할 때 보험이 될만한 장치나 완충지대가 없었다. 나는 쫄보 기질이 강했다. 때문에 리스크 최소화의 태도로 사업에 임했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적은 보상을 확보하는 low risk low return을 불가피하게 택했다. 이런 태도가 장기화된 습관이 되었다.

>> 이런 궁상맞은 태세는 적은 비용으로 실패의 경험을 사는 데에는 적합하겠지만, 어느 정도 여건이 갖춰진 뒤에는 리스크를 감안하는 도전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 위험감수와 비용절감은 다른 것이다. 제프 베조스는 누구보다 큰 위험을 감당하지만 여전히 문짝책상을 쓴다.

 

필요 역량의 공급 문제

‘자원을 적게’라는 것이 우선 조건으로 걸리다보니 선택지가 좁아졌다. 쉽고 빠르게 결과를 낼 수 있는 솔루션이라는 방법을 우선 결정했다. 그리고 구인구직 사이트를 기획했다. 그리고 시장이 받아들이기를 기도했다. 시장이 원한다고 믿으며 그 증거를 수집했다.

>> 정반대의 순서로 접근했다. [시장의 수요 > 수요의 서비스화 > 서비스의 수행]의 순서로 전개되어야 올바른 서비스의 기획이다.

 

공정의 문제

나는 꽤 훌륭한 기획자라고 자부하지만 웹 기획의 영역에선 얘기가 달랐다. 웹 기획자의 영역에서 보자면 3개월차보다도 못할 것이다. 웹 기획의 분야에서 올바른 공정은 따로 있으나 나는 알지 못했다. 백지의 PPT를 켜서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만으로 서비스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총체적인 서비스는 여러 기능과 시스템이 통합되어 제공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프론트 이지만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겉모습만 흉내내어 만들어낸 서비스는 경쟁력이 있을 리 없으며 ‘영원한 베타’ 정신과 정반대로 향하는 것이다.

>> 끊임없는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 [현상 및 현황파악 > 착상의 파편 기록 & 정제 > 기획(실현계획수립) > 실행] 네 단계를 거치도록 기획의 절차를 마련했다. 오래 걸리더라도 이 과정을 거쳐야 올바른 제품을 만들 수 있다.

>> 첫 삽 뜨기 전에 설계도부터, 악셀 밟기 전에 네비부터, 칼 들기 전에 레시피부터

 

공정이 해답이라 생각하는 문제

생산성을 10배 높이는 과정에서 공정과 방법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루틴한 업무들은 공정을 개선하거나 루틴한 절차를 만들어내면서 운영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재미를 보다보니 만능해결책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갈수록 공정과 방법론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집착이 커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공정과 방법론을 시도했으므로 약간의 성과는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가 0으로 수렴해가고 있었고 더 이상 시스템에 의존하는 태도로는 혁신은 커녕 개선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실전에 뛰어들기 무서워 대타를 내보내는 비겁한 태도다. 공정이나 절차를 통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분야도 있겠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 땐 공정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공정을 파괴하고 기존의 방법을 버리면서 개선이 일어난다. 이 몹쓸 태도는 나의 의식의 전원을 꺼버린다. 동물적인 감각을 아예 잃어버렸다.

 

분류집착

분류를 잘한다고 사용성이 좋아지진 않는다. 분류를 하는 입장의 사람은 명확한 개념의 구분이나 더욱 상세한 구분, 범주의 레벨조정 등을 신경쓰지만 그런 요인을 신경쓸수록 실제 사용자의 직관성과는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 분류불안있는 분류병자 정신차려. MECE는 도구이지 만능이 아니야.

 

MVP와 Prioritize

MVP를 겨냥하지 않았다. 기획자의 스위치를 켜면 망상이 시작되고 5개월은 족히 걸릴만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그리고 있었다.

>> 책임감이라곤 1도 없는 겁쟁이 기획자가 실언하도록 허용하지 말아라.

>> Prioritize는 하던 방식으로 하면 된다. “Reset Everyday, Reset Everyweek.”

 

합리적인 당나귀는 굶어죽는다

언젠가부터 일은 하지 않고 옳은지 그른지 판단만 한다. 하루 종일 생각을 하고 하루 종일 정리하고 하루 종일 판단을 내려도 한 발짝도 나는 나아가지 않았더라.

>> 복기도 이정도면 과한 것 같다.

 

몰입 가능한 환경의 조성 문제

몰입할 대상이 없었다. 시스템화와 위임을 너무 지향한 나머지 내가 풀어야 할 문제도 모두 넘기게 되었다. 내가 넘겨버린 문제를 구성원이 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그들이 풀거나 풀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넘기는 것이 문제였다. 문제를 넘기고나니 나에겐 더 이상 문제가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어떤 문제도 없는 삶은 비참했다. 존재의 가치를 잃었다. 몰입의 대상이 없는 삶. 허무함과 우울함이 밀려왔다. 무엇이 문제인지 당시엔 몰랐다. 

>>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었던 경험을 되돌아보면 모두 초 과몰입 상태에 빠졌었다. 몰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내기는커녕 올바른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비단 사업뿐만 아니라, 앨범을 만들어내는 뮤지션에게서도, 기록을 갱신하는 운동선수에게서도,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는 학자에게서도 몰입의 상태가 발견된다. 나는 과몰입을 통해 자아를 잊어버릴 지경에 다다를 때에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다. 자아를 상실할 정도로 대상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팀으로 일한다면 팀 전체의 자아가 망각시켜야 한다.

 

인사의 문제

사람을 고치려고 한 문제. 문제를 특정한 사람의 특정한 요인으로 정의하는 문제.

>> 기계의 문제는 깊이 들여다보아도 된다. 깊이 들여다볼수록 좋다. 모든 행위를 미분하고 작동원리를 파악해 오류를 수정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사람은 깊이 들여다보면 안 된다. 깊이 들여다본다고 타인을 고칠 수 없다. 오히려 한 걸음 두 걸음 열 걸음 물러서야 한다. 열 걸음 쯤 물러서서 우리가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우선 확인해야 한다.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면 부딪히더라도 어깨를 부딪히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다.

>> 노동이 사라진 시대, 판단만 남은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역량 평가가 아닌 케미다.

>> <구심점>으로 추가 심층 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