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상 전쟁은 쉬지않고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 전에 일어났던 전쟁에서도 국가는 개인을 전쟁의 도구로 필요했겠지요. 2차 세계대전을 겪은 인류는 이전에는 하지 않던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존적 고뇌. 전쟁의 도구로 쓰여지던 이전 시대의 개인들은 그런 시대와 환경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과거의 전쟁이야기들은 영웅서사나 운명론적 이야기에 그쳤다고 봅니다. / 과거의 전쟁은 대부분 영토 전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발생한, 문명의 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던 사건이라고 볼 수 있죠. 기술이 발전한 만큼 당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의식 수준 또한 높아졌을 것입니다. 지식과 감각이 더욱 정교해졌고, 의식의 수준 또한 확장되었을 것입니다. 이전에 생각하지 못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게 되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정치에 대해서, 경제에 대해서, 사랑이라는 관계에 대해서도 더 깊이있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저는 구분해보고 싶습니다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기, 근대의 끝자락이자 현대의 시작점입니다. 시대의 분기점. 그 전까지(근대까지)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믿어왔습니다. 이성과 합리성이 진보를 가져올 것이라고 믿어왔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져온 것은 전쟁이었습니다. 나치는 생산성이 떨어지는 인간을 구분해 과학과 의학을 근거삼아 소멸시켰습니다. 전체주의는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적합한 개인을 만들어냈습니다. 말, 행동, 생각을 통제하는 시대였습니다. 이제까지 믿어왔던 인간 존재의 정의는 더이상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후로 인간은 도구로 전락하고 풍요는 늘어감에도 인간성은 소멸되어가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폐허로 변해버린 세상 앞에서, 이제까지 믿어왔던 것들이 틀렸었다는 것을 의심하는 것을 넘어, 인정해야만 했지요.
전통도 무너졌습니다. 사회의 위계 구조가 변하고, 종교는 선택사항이 되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선언 이후로 현대인은 각자 삶의 토대를 세워야 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 의미를 각자 찾아내야 했습니다. 세계는 무질서했고, 그런 시대적 환경 속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삶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간에게 본질이란 없구나. 세상이란 것도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구나. 이토록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한 것이 세상이구나. 개인은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토대없는 시대에 주어진 자유는 고통스럽습니다. 아무 선택도 하지 않는 선택은 차마 선택할 순 없습니다. 이제는 의식이라는 것이 생겨버렸기 때문입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면, 개인은 그저 국가의 전쟁도구로 쓰여진다는 것을, 기계의 부품으로 사용된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니나는 주체적으로 국가에 맞섭니다. 상식에 맞서고, 권력에 맞섭니다. 다수의 보편성에 따르지 않고 맞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no라고 말하는 용기?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죽음일 것입니다. 자비를 구하면 여생을 수용소에서 보내는 정도로 양형받을 순 있겠지요. 알 수 없습니다. 불확실한 시대입니다. 나치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할 때 총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그 사람이 재판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가 사악한 괴물일 거라는 기대와 달리, 너무나도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히려 법과 질서를 중요시하는 모범적인 공무원이었습니다. 그의 잘못은 단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순응했다는 것입니다. 비판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순응해야 하는가?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는가? 지금이야 나치에 부역한 자들을 처형하는 것이 보편도덕이며 니나의 삶의 태도가 이상적이라는 데에 모두가 동의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보편도덕은 정반대였고 오히려 니나만 비정상으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현대로 접어들며 개인에게 윤리적 책임까지 떠넘겨집니다. 나치가 패배하지 않았다면,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사형판결이 나지 않았다면, 지금 열리고 있는 재판의 모습도 달랐을 지 모릅니다. 여의도에 가서 의원을 체포하라는 부조리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휴게소로 빠져 라면을 먹는 판단, 실탄이라도 빼고 가서 시늉만 하는 판단, 경찰이 대통령을 체포하도록 대문을 열어주는 판단, 어떤 판단이 옳을지 그를지, 사건이 발생한 후에 댓글로 의견을 남기기란 쉽습니다. 수백만의 시위군중 속에 응원봉 하나를 보태는 것도 쉽습니다. / 하지만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상황 속에 놓여 선택을 강요받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렵고 고통스럽습니다. 개인의 삶이 죽거나 살거나의 극단적 갈래로 나뉘는 선택지 앞에서 선택을 강요받을 때, 성공하면 혁명이고 실패하면 반역이 될 선택지를, 불확실함을 감수하고 주체적으로 소신을 지킨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니나와 같이 관습을 따르지 않고 주체적으로 토대를 꾸려나갈 용기있는 현대 인간상. 과거에도 지금도 아주 소수이겠지요. 반대로 “학교가서 선생님 말 잘들어라, 집에가면 엄마 말 잘 들어라.” 순응하는 도덕을 선택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날의 보통 사람들 다수는 보편도덕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또는 세상이나 삶에 대해서 생각 자체를 꺼버리거나, 선택 자체를 피하는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선택하지 않는다면 책임지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순응, 주체, 회피라는 세 가지 도덕 중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저자는 주체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모험을 해야 한다고. 고통과 격정이 따를지라도 자신만의 모험에 자신을 던져 넣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제서야 삶이 주어진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관습으로 묶어둘 수 없는 실존적 현대인의 모범적인 인간상, 그 이상적 인간상이 니나라는 인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니나에 비하면, 니나를 관찰하고 이야기하는 슈타인과 이야기를 따라가는 언니는 순응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 나의 감각은 완전히 분해되었다. 덮였던 봉인은 떨어져나갔다. 나는 살고 있다. 백 배나 진정으로 살고 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지는 나를 다시 받아들였다. 니나는 얼음같이 차가운 냇물 속에 손을 담그고 물을 떠마시기를 좋아했다. 나는 니나를 따라했다. 이 물은 무슨 맛이던가? 아, 생의 냄새다.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생의 냄새다. 』 – 195p
슈타인이 나나에게 청혼한 다음날의 일기입니다. 니나와 삶을 맞대기로 약속한 것만으로 그는 다시 태어남을 느낍니다. 의학계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심장이나 뇌파의 운동정도에 따라 구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문장으로 삶과 죽음을 구분합니다. 저자의 눈에는 분명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자가 구분되어 보였을 것이고, 그들에게 생을 부여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숨이 붙어있지만 죽은 것과 다르지 않는 그들도 삶 속에서 강렬한 긍정을 찾아내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 회색 궤짝들 외에 아무것도 없는 빈방이 갑자기 매우 아늑하게 느껴졌다. … 방이 아늑하다고 하니 기뻐. … 나는 지난 10년 동안 한번도 아늑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어. 물론 그전에도 잘은 모르지만 거의 없었을 거야. 아늑한 기분을 자주 체험해 보고 싶어. 그러나 내 운수에는 그런 게 없을 거야. 』 – 206p 『 그러나 또한 나도 모르게, 니나와 함께 한 이 날 이후부터는 아늑하게 느끼는 일이 어려워지리라 생각했다. 』 – 207p
주체의 삶에는 대가가 따릅니다. 세상의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는 무지의 평안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매 순간 부조리와 불확실함이 우리를 덮치고, 평안과는 영원한 작별을 고해야 합니다. 불안은 기본정서가 되어 고통과 격정이 뒤따르고, 보편도덕은 더이상 우리의 선택을 대신해주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가지 않은 황량한 길 위에서 홀로 삶의 토대를 세워야 하고, 유난하다 여겨지는 선택들에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운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숨쉬는 것과 살아있는 것이 다르듯이, 진정한 삶은 그 고통마저도 온전히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 앞에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한가운데 – 루이제 린저> 를 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