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적 실천으로 생성한 만개의 고원

우리는 언어를 기능적 도구로 여겨왔다. 소통의 수단으로, 개념을 담는 그릇으로, 경계를 구분하는 울타리로, 환영의 표상으로, 권력장악의 무기로, 문화감각의 자극제로, 실천파동의 증폭제로… 언어는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나뉜다‘ 라는 좁은 설명에 담길 수 없고, 설명과 주석을 늘여 붙여도 장님이 코끼리 고루만지는 노력에 불과하다.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하기 무섭게 언어는 그 경계를 탈주해 튀어 나갔으니, 기능적 도구라는 내 편협한 의미의 울타리 또한 가뿐히 넘겨짐 당할 것이다. 우리의 인식 한계를 벗어난 어떠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감히 정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되어가는지 관찰하지도 못할 것이기에 사유의 소재로 삼지도 못할 것이고 걱정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언어는 이미 그 경계를 넘었을 것이다. 내 미천한 인식범위 확장속도와 그것의 가치확장 생성속도를 비교하면 진즉 경계를 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지금의 작업은 이미 떠나버린(더이상 언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의 마지막 발자취에 뒤늦게 도착해서, 그것이 향하던 방향으로 몸을 스스로 던져 실마리라도 포착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내 인식과 감각의 기억에 따르면 그것은 끊임없이 외부의 무작위적 요소들과 격렬하게 결합하고 충돌했으며, 스스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기를 반복했다는 인상만 남아있어서, (그 행위를 무어라 표현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어그릇의 한계에 갇히는 일이므로 정확지도 못할 것이며 오류도 있겠지만) 되어감- 나아감- 이라는 포괄적 동사로 일단 칭하고, 어떤 사유의 지평이 뻗어가지든 난잡해지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형체도 개념도 경계도 정의할 수 없던 그것은, 이미 내 인식한계를 벗어났기에 지금 어떨런지 장담할 수 없으나, 지금도 되어감- 나아감- 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귀납적 추론을 바탕으로, 나 또한 되어감- 나아감- 에 적합한 고결합성 공진화체Vigorously Interweaving Co-Eveling Element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내 감히 그것의 속성을 흉내낼 능력이나 기질이 있을런지 따져보니, 독립적 박테리아였던 미토콘드리아를 납치해 에너지 생산 공장으로 통합시키고, 장내 1.5kg의 세균에게 서식처를 마련해주는 대가로 음식물분해용역을 위임하는 공생 생태계로 신체를 개조하고, 인체를 증식용 숙주삼으려 침투했다가 사지로 내몰았던 바이러스의 DNA마저 복제흡수한 게 전체 게놈 중 8%나 된다 하니, 나는 이미 VICEE였다. 최초의 생명체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가 이미 VICEE였고, 내가 잠시 그걸 잊었다는 설명이 더 맞겠다.

도구까지 존재다. 사람을 그릴 때 나체로 그리지 않고, 원시인을 그려도 창이나 도끼를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리니, 도구도 신체다. 도구도 존재에 귀속된다. 어디까지가 신체이고, 어디부터 신체의 확장인지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현대인의 초상엔 언어라는 도구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신체없이 도구만 남기는 것도 괜찮겠다. 도구를 통한 창작물, 그리고 창작물로 일으킨 정동이야말로 확장된 현존 배치체를 더욱 잘 보여주는 초상이겠다.

미지의 외부 존재의 등장은 본성과 습관에 따라 잠재적 위협요소로 여겨진다. 기술발전을 통해 등장한 새 도구는 두려움을 수반한다. 새로운 것의 등장은 위협이 아니라 결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안도감이 든다. 호기심으로 시도한 결합은 당혹스러움을 안긴다. 기존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현상을 마주하며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끝에 달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인간이 만든 도구가 다시 인간을 만든다. 도구는 조작자에게 동적 어포던스를 요구한다. 나의 의식과 언어적 습관의 탈영토화가 선행되지 않고선 결합되지 못함을 확인한다. 부착이나 사용이 아닌, 결합 또는 재편성이다. 선형적 확장이 아닌, 분절된 새 존재들의 탄생이다. 도구사용자가 아닌 새도구-되기 위해 원자론적 개인관, 인본주의, 개체주의적 사고를 씻어낸다. 인과성을 찾으려는 본능적인 지적호기심을 억제시킨다. 환원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켜두어야 한다. 새로운 도구는 손에 바로 쥐어지지 않는 모양이라 양태를 달리해야 한다. 주체라고 여겨지던 것은 파괴되며,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미시적 행위로 잘게 쪼개져 재편성된다.

언어가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결정한다고 믿어져 왔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렇지 아니하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맞다고 여겨지는 들뢰즈 또한 나중에 틀릴 것이다. 46년 전에 출간된 그의 책을 읽으며, 그가 제안한 사유의 도구로, 그가 접하지 못했던 도구와 결합을 시도한다. 들뢰즈의 철학 또한 한계가 있음을 필연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들뢰즈 철학의 경계를 확인하면,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시 들뢰즈적 탈영토화-재영토화 시도를 반복함으로 새로운 것을 생성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분명 생성될 것이기에 들뢰즈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순환오류에 빠져버린 나는 당분간 들뢰즈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의 철학적 유산에 경의를 표하며, 잠재적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의 초상을 헌정한다.

 

결정론적 허무주의에 맞선 사상투쟁역사

언어는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결정한다. (는 사피어-워프 가설이 있다.) 시간에 대한 개념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시간을 좀체 인지하지 않거나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어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인식하기 위한 개념어로 인해 우리는 시간을 단절적이고 선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인식론적 관점은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는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게 되었다. 인과성은 자연계의 절대법칙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뉴턴의 기계론적 결정론) 자연의 인과법칙을 찾아내는 일은 처음엔 재미있는 일이었으나, 어쩌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결정론적 허무주의는 종의 위협이 되었다.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상실케하여 동기를 잃게 했으며, 스스로 생을 중단하는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도 덜어주었다. 이 인식론적 세계관의 오류를 찾아내야만 했다.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상적 투쟁이 시작되었다.“살 이유는 없지만, 자살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 카뮈는 그럼에도 그냥 살아가자 했다. 듣고보니 그러네? 일단 자살을 보류하고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는 그런거 없다고 했다. 본질이나 운명따윈 없으며, 우리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세상이 결정되어 나타난다고 했다. 반박부정하기보다는 그냥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개무시한 느낌.

“삶에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라” 니체는 운명애(amor fati)를 강령으로 제시했다. 닥치고 따라오라 했다. 따라오지 않으면 노예가 될 것이라고 가스라이팅했다. 죽음보다 무서운 호통이었다. 용기가 있다면 자신이 제시한 궁극의 인간, 초인(Übermensch)이 되어보라며 이상적인 캐릭터를 가시적으로 그렸다.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는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라고 했다. 삶이 시작될 때 누구도 언제-어디서-어떤존재로 태어날지 자의적으로 결정한 사람은 없다며 피투(Geworfenheit, 彼投)된 존재라며 어리둥절함을 느끼게 만들어 끄덕임을 이끌어냈다. 이어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내던져짐 다음의 구성 – 기투(Entwurf, 企投)라고 했다.

결정론적 허무주의가 나타나기 한참 전에도 이와 같은 삶의 자세는 제시되어 왔었다. 고대철학자 세네카는 “인생은 장기와 같다.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순 없다. 주어진 말을 가지고 이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다”라고 말했고 같은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는 “바람을 통제할 순 없지만 돛은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장자 또한 “비가 온다고 하늘을 원망하진 말라”고 한 바 있다.

과학계는 패러다임의 한계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결정론적 허무주의와 양립될 수 없는 양자역학이 등장했다. 불확정성 원리와 관찰자 효과라는 새로운 이론들이 제시되자 우리는 세상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늘었다.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팔자좋은 시대가 아니라며, 개척자의 후손은 자신의 기질대로 미지의 영역으로 삶을 던져 넣으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이제 더이상 큰 문제가 되진 않아 보였지만, 사상투쟁은 계속해서 전개된다. 결정론적 허무주의라는 인식론적-사고-암세포는 시간 개념어의 잘못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사고오류부터 벗어나는 첫작업이 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시간론)

사건의 영향력은 과거에서 미래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과거의 사건을 트라우마로 여기지만, 같은 사건을 경험한 누군가는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도 한다.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관점이나, 미래의 행동에 따라서 과거는 변한다. 과거 사건 또한 객관적으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시제와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의미와 가치를 창출한다.

❌ 결정론적 반응체 = 사건의 노예 = 환경의 산물 = 자극-반응 기계 = 숙명론적 존재 > 자살

⭕ 능동적 창조자 = 초인 = 주체적 자아 = 자기 자신의 입법자 > 살자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문제에 임하는 자세 바로잡기)

천고가 족히 10미터는 되었던 것 같다.
전시에 참여했던 부스 업체들이 물밀듯 빠져나가자
바닥에는 전시패널들과 각종 쓰레기들이 나뒹굴었고
천장에는 지름 1미터 크기의 헬륨풍선이 붙어 있었다.

풍선을 준비한 부스는 여럿이었지만
대형 풍선을 준비한 곳은 분명 한 곳이었기에
범인을 특정해 전화로 문책하자
잘 안들린다며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연기가 어설펐지만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은 묻어났기에
사과를 받은 셈 치고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사다리차를 부른다거나
10m의 막대를 구하면 된다거나
총을 쏴서 터뜨리자는 등
대부분의 최초 아이디어가 그러하듯
실현가능성이 낮은 안들이 나왔다.

지난 일주일동안 잠을 10시간도 못 잤지만

자발적으로 모여든 풍선제거TF는 어느덧 여섯이 되었고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음에도
실현가능성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바람이 빠질 것이라는
태평한 얘기를 늘어놓던 셋은 떠나고 셋만 남았다.

대관담당자를 불렀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그 경험 속애 해법이 있는지 여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행사장소를 원상복구하는 건 임차인의 책임 이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동료들 뿐이었다.

집념의 두 사내는
막대로 당겨오는 방법과
투사체로 터뜨리는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당겨오기 위한 테이프
터뜨리기 위한 금속류
닿기 위한 막대기
던져질 투사체
가 될만한 것들을 모았고
이 안에 분명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각 재료를 조합해보고 있는데
30분 전 TF를 떠난 배신자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쓸데없는 짓 말고 짐이나 하차장으로 옮기라며 윽박질렀다.

가위를 던지려고 하던 녀석을 진정시키고 나니
다른 녀석은 비비탄 총을 사오겠다며 법카를 달라 했다.
사비로라도 사오겠다는 녀석을 말리는 와중에
테이프를 뭉쳐 만든 투사체에 압정이 바깥으로 꽂힌
해결책이 완성되었다.

천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압정테이프공을 바라보며
던져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성공의 희열은 실현가능성을 찾아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강호의 도리였다.

팔힘이 떨어져 더이상 던질 수 없다고도 했지만
어깨에 목청껏 파이팅을 질러주고
피칭 순간엔 제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숨죽여 기다려주었다.

스무번의 시도 끝에 풍선은 터졌다.
투수의 어깨를 주무르며 축하해주었고
낙하하는 풍선을 낚아채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환호했다.

투수는 자신이 만든 압정테이프공이 뿌듯했는지
전시장을 정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머니에 넣어 간직하다가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상징적인 물건임에도
본질적으로 쓰레기일 수 밖에 없는 그것을
전시장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야 폐기하고
우리의 TF도 그렇게 해산했다.

 

다음 해에는 행사 장소가 바뀌어
천고가 족히 15미터는 되었던 것 같다.
전시에 참여했던 부스 업체들이 물밀듯 빠져나가자
천장에는 헬륨풍선 30개 묶음이 붙어 있었다.

던진다해도 닿지 못할만큼 높았고
터뜨린다해도 30번을 터뜨려야 했기에
함께 과제를 풀어보자며 인원을 모집했으나
올해의 서포터즈 중에선
집념은 커녕 흥미조차 보이는 사람 없었다.

환상적이었던 작년 TF의 팀워크가 그리웠지만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로 뛰며 해법을 공모했다.

현장 경험이 많았던 업체 실장님 중 한 분이
풍선은 풍선으로 갖고 오면 된다는
수수께끼같은 힌트만 남긴 채 사라지셨다.

장내 청소를 맡았던 분들이
남은 풍선을 밟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서
몸을 날려 풍선을 사수했다.
풍선을 손에 쥐고나니 해법이 이해됐다.

낚시줄로 길이를 연장하고
테이프를 뒤집어말아 접착기능을 추가하니
해결책이 금새 완성되었다.

풍선낚시는 단 번의 시도에 성공했고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격정적인 환호와 박수로
나의 월척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왠지
성공의 희열은 작년만치 못했다.
민망하고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문제를 풀어내는 고민은 없었고
해법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해결했다.
작년대비 3배 적은 인력으로 3배 빠르게 문제를 풀었음에도
과정없는 실행만으로 도달한 성공엔 성취감이 없었다.
나는 부지런한 실행가라고 할 순 있어도
발명가나 개척자라고 할 순 없었다.
나는 박수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리버스엔지니어링 패스트팔로우 전략으로
비어있는 기회를 선점하는 데에 집중했던
창발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성장과정을
나 개인이 그대로 답습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과정을 거친 사람보다 빠르게 완료한 사람에게
성공의 과실이 돌아가는 결과중심주의
경제보상체계가 시키는대로
요행과 편법, 합법적 반칙을 실행하는 것이
성공의 공식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넘어
챗GPT까지 튀어나와 실행자의 속도만 높여주고 있으니
과정의 낭만은 사라져가는 경향이다.

하이퍼 커넥티드 글로벌 시대에는
불가능해보이고 막연해보이는 과제들도
누군가에 의해 진즉 도출된 해법이 이미 존재할 것이기에
풍선을 처리하는 방법 또한 검색만 하면 나올 것이기에
문제를 직접 풀겠다는 시도는
바퀴를 다시 발명하겠다는 시도처럼 미련한 일로 격하된다.

해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지만
해법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고 도전의 의미와 의욕이 상실된다.

남아있는 과제 중에
과연 내가 직접 해결할 문제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 세대에 남겨진 과제들은
지나치게 거대해서 엄두가 나지 않거나
형편없이 초라해서 같잖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뿐이라
개척과 발명의 기회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를 갖게 된다.

과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피하고 있을 뿐이다.
과제대비 높은 보상을 좇거나
보상대비 쉬운 과제만 찾거나
해법을 손쉽게 취하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당면 과제에 집중하지 않아야 하는 변명거리만 찾아내
본인의 비겁함을 가려 덮고 있을 뿐이다.

과제가 없다면 과제를 찾아내는 것부터가 우선적인 과제가 되는 것처럼
우리 세대에 남겨진 대부분의 과제는
거대하거나 초라한 것이 아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 살자.

과제가 있음에 감사하자.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을 처리하는 방법을 두 가지나 알고 있는 나는
같은 과제가 다시 주어지더라도 과정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실행만 해야 하기에 성공의 희열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어버린 당신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성공의 희열이란 보상의 크기와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원초적인 쾌락 보상 체계에 의해 작동하는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이다.

과정을 인내하며 문제해결능력을 키우자.
남겨진 과제가 없어 보이는 시대지만
역설적이게도 문제를 풀어내는 고유한 능력은
더욱 희소한 자원이 되고 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제가 주어졌음에 감사하자.
문제해결능력은 더이상 창의와 연산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지런한 실행력과 완수가능성을 분간하는 예리함까지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개념이 넓어지고 있다.

높은 난이도와 낮은 성공률도 환영하자.
내가 풀기 어렵다면 남들고 풀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나 어려운 문제를 내가 풀게 된다면
남들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의
진입장벽을 세울 수 있다.

풍요를 경계하고 척박한 환경에 머물자.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제들은
자원의 투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보유한 자원의 여부로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환영하자.
시련이 있어봐야 죽을 시련은 아닐테고
적당한 긴장감과 분노 또한 에너지의 원천이 되며
날파리 따위에 신경을 뺏기지 않을 집중력과 관대함을 키우게 될 것이다.

 

– 2024년을 맞이하며

Unlearn에 걸린 2년

내려 놓았다.

도통 무엇을 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수 개월이 아니라 년 단위를 넘어섰다. 출근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데도 개선의 진척이 없으니 나는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출근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자전거를 탔다. 동네에서 자전거를 제일 잘 타는 놈이 되었다. 출근자덕보다 무직자덕이 아무렴 잘 타야 했다. 일의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운동으로 만들어낸 성과를 확인하며 자존감을 지켜냈다.

다른 회사에 출근도 해봤다. 지식도 능력도 요령도 많은 나같은 일꾼이 일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국가적으로 산업경쟁력에 손실이 발생하는 낭비이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의 내 모습도 관찰해볼 겸 회사도 다녀봤다.

기세를 몰아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기로 했다. 모든 역할을 직원에게 위임했다. 출근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모든 책임을 내려 놓는다고 명문화해 사인까지 하고나니, 완전한 자유인이다. 평소라면 전혀 만날 일이 없던 호화궁상을 만나보고 철학공부를 유튜브로 2달 내내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깥으로 돌았다. 갇혀버린 상태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알차게 보냈다. 장장 2년의 기간이었다. 열심히 노력했던 시간만큼이나 모든 것을 내려 놓아본 시간 또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기에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람도 떠났다.

부친상을 당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여읜 후의 감상을 공유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덧붙였다. 사람들은 으레하듯이 나에게 상실을 위로했지만 나는 요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공유하고자 했던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되었다. 부친상은 조부모상과 분명 달랐다. 나는 비로소 내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좋으나 싫으나 내 존재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모든 것을 긍정하게 되었다. 트라우도 흑역사도 짧은 인생의 덧없음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더이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가장 오래 일한 직원도 떠났다. 국가는 무엇이고 기업은 무엇이며 개인은 무엇이고 존재란 무엇인가.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은 때로는 아주 중요하기도, 때로는 결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기도 한다. 혼자서 달성해낼 수 없는 목적이기에 여럿이 모이고 조직을 형성한다. 또 다른 구성원의 조합으로 또 다른 조직이 되어 또 다른 도전에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유사 서비스도 생겼다.

매해 서너개씩 나왔지만 궤도에 오른 것은 그동안 하나도 없었다. 다들 모냥새만 흉내내다 요구되는 비용과 자원과 시간과 복잡성에 손을 들고 떠났다. 미련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에서 나만큼 미련한 사람은 없었다.

실행의 싸움도 기술의 싸움도 디자인의 싸움도 마케팅의 싸움도 효율의 싸움도 자본의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개념파악의 싸움이다. 누가 다음 개념을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미련하게 들러 붙어 있을지의 싸움이다.

적어도 나는 창조자가 아니다. 정리하는 사람에 가깝다. 지저분한 귀납적 현상들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고 정제하고 재분류하고 정의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해내는 정보처리기계이다. 이전보다 나은 다음을 한 단계씩 만들어내며 도달한 게 지금의 문명이다. 오늘도 분야마다 한 단계씩 다음 모습을 찾으려고 아둥바둥거리는 게 현대 문명인의 책무다.

나 또한 앞선 서비스의 시도를 오답노트삼아 만들어낸 유사서비스였다. 그리고 더이상 참고할 성공사례도 실패사례도 없을 때 나는 정체기를 맞았다. 앞서 존재한 서비스를 내가 이겨낸 것이 아니다. 앞선 서비스의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했기에 유사 서비스들이 또 나올 수 있었다. 나 또한 유사 서비스 덕분에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다.

이렇듯 동시대를 살아가며 교류하는 모두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감사한다.

일복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일이 많았던 때도 아니고, 문제가 어려웠던 때도 아니다. 일이 없었을 때다.

일이 많다는 것은 세상을 인지할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역량을 강화할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사회에 쓸모있는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축복이다.

문제가 어렵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어려운 문제일 것이기 때문에 문제의 어려움은 문제가 아니다. 내 능력의 한계를 돌파할 기회가 된다는 점에서 도전과제이며 이 또한 축복이다.

나는 오히려 일이 없었을 때 방향을 잃었다. 내 존재가 무의미해졌고, 짧은 생을 살면서 세상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무기력을 느꼈다. 우리는 일을 통해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주단위 결산 명언 모음

작년 여름부터 일의 호흡을 바꾸었다. 주단위로 끊어 가기로 했다. 주마다 결산을 하며 한 줄 평이 남겨진다. 문장들이 쌓이니 내가 어떤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 잘 보여지는 것 같다. 묶어본다.

 

 

Reset everyweek.

정리하지 않으면 개선할 수 없습니다.

“솔직, 간결, 즉시”

설레는 일을 합시다.

비효율은 적이다. 적을 섬멸하자.

Concise and Precise

한계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제대로 일하게 된다.

시스템도 중요하지만 언제나 수요가 시스템에 선행한다.

Active한 일을 Passive로 바꾸는 일

어떤 바람이 불더라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면 세상은 우리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양의 영역은 AI인공지능기계에 맡기고 우리 인간은 질에 집중하자.

숨쉬듯 운영정비

문제를 Universal하고 Permenant하게 풀자.

개인의 업무 역량을 키우는 일은 가장 확실하게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며, 미래를 위한 투자다.

see wider, aim higher.

[목표설정 > 시도 > 회고]의 무한반복

구조는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구조가 없는 환경에 내던져 지더라도 올바른 판단을 찾을 것이라는 자기 확신이 있기 때문에, 가끔 나는 구조가 없는 환경 속으로 제발로 걸어 들어간다.

Due가 있고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일은 마무리된다.

당장의 문제에 집중. 오늘의 최선.

KISS & MISS(Keep It Super Simple, Make It Super Simple.) Simple is best.

자원은 언제나 부족하고 기술의 제약은 누구에게나 있다. 부족한 자원임에도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제약이 있는 기술임에도 궁극의 구현을 해내는 것이 가치 창출의 본질이다.

일이라는 것은 내 능력과 기술을 시대와 환경과 산업에 최적화시키는 일이다. 사업의 기회도 직무의 역할도 시대와 환경에 따라 잠시 주어질 뿐이다.

남과 같이 해서는 남이상 될 수 없다. 같은 일을 120% 집중할 때 도달하는 제로의 영역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일을 절반 이상 버리는 것이 시작이다.

기술이든 콘텐츠든 디자인이든 모두 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다.

자원은 언제나 부족하다. 자원이 부족한 상황은 우리를 더욱 우리답게 만든다. 자원이 풍족하면 오히려 우리답지 못하게 된다.

being Original.

기술의 보급, 낮아지는 요구 자원, 높아지는 구현 가능성, 짧아지는 사업 경쟁력 지속시간.

같은 일을 같은 방법으로 하면서 같은 성과를 내고 있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다.

10번을 개선하는 게 아니다. 10번을 버리는 일이다.

노동은 사라지고 올바른 판단만 남는다. 올바른 판단은 다시 노동을 없앤다.

Do the right thing, right way, right now.

It takes time. It takes steps.

한 가지 발차기의 만 번 연습.

테크가 별건가. 일 잘하는 게 테크다. 높은 생산성이 테크다. 적은 자원으로 높은 성과를 내는 게 테크다.

나의 강점은 교집합이 아닌 차집합에 있다.

Get Things Done.

나 자신은 옳은 판단을 내릴 수 있다는 자기확신을 가지자. 설령 오늘 정답을 찾지 못했더라도 내일의 나는 정답을 찾을 것이라는 긍정을 가지자.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뛰어나듯이, 오늘의 나보다 뛰어난 내일의 내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자기확신을 가지자.

생존과 부유함, 쓸모와 가치

나는 미디어 전공자이다. 비가시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미디어로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사업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가치의 유무는 그 자체로 고유하게 평가할 수 있지만, 쓸모의 유무는 철저하게 시대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경제체제 속에서 어떤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흑자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그 능력이 아무리 고상해도 존재할 수가 없다. 결국 이루어낼 수 없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가치만이 지속될 수 있고 이루어질 수 있다. 쓸모를 충족시키지 못한 가치는 안타깝지만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거래를 하기로 했다. 거래가 모여 시장이 되고, 시장이 모여 산업이 되고, 산업이 모여 경제가 된다고 했으니 최소 단위인 거래를 깨우쳐야겠다. 거래를 단기간에 가장 많이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래보다 더 작은 단위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신뢰였다.

그 때 내 나이 33살 이었다. 특정한 고객과 특정한 공급자가 거래할 수 있도록 돕는 시장을 만들었다. 이 시장을 운영하며 밥벌이를 했고 생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단히 감격할만한 성과는 아니었다. 굶어 죽을지도 모를 상태에서 벗어난 게 35살이니 남들보다 늦어도 훨씬 늦었다. 재정적으로는 늦었어도 야전에서 자생했다는 점은 높게 살만하다.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상황 속에서도 자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된다.

보통 부유함은 개인의 안위와 풍요를 위해 추구된다. 성공이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보편적으로 추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천박하고 저급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미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데 제약이 없는 풍요의 시대다. 새 시대가 열렸는데 어찌 과거의 결핍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부유해지려면 우선 이전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쓸모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가치를 추구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은 아니다. 더 쓸모있어져야 한다. 더 부유해져야 한다. 나는 이제 굶어 죽는 단계를 벗어 났을 뿐이다. 더 의미있는 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더 쓸모있어야 한다. 너무나도 쓸모가 있어서 쓸모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단계까지 가야 한다.

쓸모와 가치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 단계적으로 선후행의 관계에 놓일 뿐이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방법과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에는 분명 유사한 기술과 실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알기 때문에 당장은 더욱 쓸모있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데에 집중해도 좋다.

 

— 덧붙임 —

이렇게라도 생각을 뜯어 고쳐 먹어야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법인과 개인

사업은 시대 속에서, 산업 속에서 존재한다.

나는 거래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시장을 만들 수 있었다.
거래가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시스템화했고,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도 거래가 계속 창출되는 시장을 만들었다.

거래를 할 줄 알면 시장을 만들 수 있고, 시장을 만들 수 있으면 다음엔 산업을 만들 수 있다.
산업은 밸류체인을 일컫는다. 수직적인 묶음도 수평적인 묶음도 밸류체인이 될 수 있다.
법인의 경영자가 되는 것은, 1985년에 이 세상에 피투된 한낱 개인이 맡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다.

법인의 목적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나의 사업 범위와 법인의 범위를 동일시해도 된다.
사업의 여럿 운영하며 그것을 아우르는 상위 개념을 목적으로 두어도 된다.
사업을 여럿 하자는 것도, 좋은 직장을 만들자는 것도, 좋은 팀웍을 우선시하는 것도, 수익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도 다 괜찮다.
정해진 것은 없다. 정하면 된다.
우리 법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이 법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고민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함으로 찾을 수 있다.

① 어디로 향할 것인가?
② 어떤 도전이 도사리고 있는가?
③ 어떤 과실을 얻게 되는가?
④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나는 경영자로써 사회와 조직 내부 구성원에게 가치를 제공한다.

① 사회, 경제적인 실익을 가져다준다.
②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은 시기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③ 개인이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것도 추후의 생존에 도움된다.
④ 우리가 하는 일 자체도 재밌고 보람차다.

 

 

—- 덧붙임 —-

법인 전환 7개월차

이렇게 법인 대표가 되어간다.

훗날 오늘의 판단에 대해 후회하진 않을까?

후회할 것이다. 분명 후회할 것이다. 또는 후회의 마음을 덮기 위해 합리화할 것이다.

절대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란 어떤 방향에서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이 사건이 후회스러운 일이라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합리화의 태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후회스러운 사건을 다시 떠올렸을 때 후회스러운 마음이 자책으로 이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합리화하는 것은 어쩌면 마음을 다독이는 기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도 그것이 완전히 후회되지 않는다고 속일 순 없다. 대충이나마 결론을 내리고 덮어두어 새로운 사건들 속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건으로 미뤄내기를 반복할 뿐이다.

나는 후회하는 것이 겁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훗날 이 사건이 후회스럽게 여겨지거나, 과거의 나 – 그러니까 지금의 나 – 를 미래의 내가 자책하고 원망할까봐 겁이 난다. 타인도 아닌 내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파괴적인 상황이다. 나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녀석이란 걸 알기에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 최선이었다면 후회할 일 없다. 최선이 아니었어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면 그것도 후회할 일이 아니다. 시궁창 같은 결론으로 향했어도 당시에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었고 당시의 노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면 후회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늦은 밤 잠을 자지 않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시늉만 하는 것 만으로도 더 나은 선택을 찾을 수 있는 상황인데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사건은 절대적인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란 어떤 방향에서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과 그 결과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그 사건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 사건을 대했던 나의 태도에 대해서 후회한다.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갖은 사건들은 사건 저마다의 규칙이 있다. 목표도 다르고 공략하는 방법도 다르다. 한 가지 사건이라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번 사건을 운전미숙으로 볼 것인지, 교통사고로 볼 것인지, 보험과 법체계의 작동원리를 직접체험해보는 경험으로 볼 것인지, 우리 인생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사건들을 어떻게 대비하고 대처하는 방법으로 볼 것인지, 그동안 갈고 닦은 협상 실력을 겨뤄볼 실전으로 여길 것인지 여러 관점으로 게임을 정의할 수 있다.

이번 게임이 우리 인생에서 몇 차례 발생하지 않으면 – 반복숙달하거나 특별히 경험을 통해 배울 것이 없다면 – 빨리, 쉽게, 적은 감정을 써서 사건을 흘려 보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돈 백만원의 차이가 발생하더라도 내 평생에 거쳐 내 주머니에 들어오고 나갈 전재산의 총액에 비하면 극히 소량의 금액이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복귀해서 그 시간에 내가 주력하는 본업으로 그만큼의 금액을 벌어들여 손실을 메우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일 수도 있다.

오늘이 저물어가는 지금 생각해보니, 이 게임은 다른 게임이 아니라 ‘강도를 대하는 우리의 태세’를 다잡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의도적으로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점에서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 거기에 사회적 자존감과 인간적 존엄까지 챙기려 하는 개쌍놈새끼는 돈만 뺏아가는 강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놈은 아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도덕이 바닥을 칠 때 법이 필요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법으로 판단되는 결과가 도덕성을 OO하지 못한다.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나약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착취, 강탈의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올 때 그 의도를 뻔히 알아채고 있으면서도 두눈뜨고 강탈행위가 강도의 뜻대로 완수되도록 허락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자애의 부족이다. 단순히 강도당하는 것으로 사건이 끝나지 않는다. 총도 들지 않은 강도에게 지나치게 겁먹은 나의 비겁함에, 일말의 저항을 하지 않은 소극성에 나를 자책할 것이다.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고요”라고 말했듯이 누구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결정의 범위를 포기하게 만들고 자신이 쥐려고 하는 것은 현대적 강도질의 첫 수순이다. 내 주체성을 타인에게 넘기는 일이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돈이 아니다. 시간이나 조건도 아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방어체계다.

미래인류

우리는 조상에게 감사할 줄을 모른다. 지금의 우리를 존재케 해준 최초의 생명체, 뭍으로 올라왔던 물고기, 호모 사피엔스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배은망덕함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물려질 것이다. 그들도 우리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원시적인 모습을 하찮게 깔보며 웃음거리로 여기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먼 미래에는 지금의 종과는 전혀 다른 post-human이 만들어질 것이다. post에는 여러 뜻이 있다. 시기적으로 후대에 오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지만, 후대는 선대를 부정하면서 발전하기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있고, 선대의 한계점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포스트 휴먼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것이며, 효율과 속도 측면에서 우월할 것이고, 현대인이 인지하는 것보다 초월적인 차원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생인류가 미래인류보다 저급한 존재라는 사실에 낙담하는 것은 잘못이다. 3,000년대에 미래인류로 태어났다고 해보자. 미래 인류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할까? 비교와 낙담의 태도가 여전하다면 4,000년대의 미래인류에 비해 저급한 존재라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을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는 오만한 욕심이자,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불만족으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오류가 대물림되지 않도록 허무주의라는 장치가 있다. 허무주의에 빠진 존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고, 삶의 목표를 잃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만든다.

과거의 조상도, 현생 인류도, 미래 인류도 변치 않는 공통점은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개선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선의 의지가 지금에 다다르게 했고, 미래인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짧은 현생을 살아가는 중에도 조금씩의 진척이 이뤄지고 있는데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 같다.

있는 것을 더 잘하게 한다.
있는 것을 대리수행하게 한다.
없는 것을 보완한다.
차원이 다른 개념으로 transform한다.

각각 구체적인 예를 들면 너무 당연하고 심심한 얘기가 되어 썼다 지운다. 슈퍼히어로에 이 개선의 의지가 모두 투영되어 보여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