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 표준이 없던 세상에서>

19세기 어느 국경 기차역. 열차가 멈추자 승객들과 화물이 모두 내려집니다. 선로 폭이 달라 기차를 더 이상 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승객들은 플랫폼을 건너 다른 폭의 선로에 서 있는 열차로 갈아타고, 화물 상자들은 인부들이 일일이 나르고 옮깁니다. 표준 규격이 없던 시절, 나라와 지역마다 철도 레일 간격(궤간)이 달라 생긴 일상적인 광경입니다​. 영국의 기술자 스티븐슨이 정한 4피트 8½인치(약 1435mm) 궤간으로 달리던 열차가, 몇 km 밖 옆 나라에서는 5피트(1524mm) 궤간을 만나 더 나아가지 못하는 식이었죠. 철도를 처음 놓을 당시엔 각자 제멋대로였던 규격 때문에, 이렇게 국경이나 지역 경계마다 열차 환승과 짐 옮겨싣기가 벌어졌습니다. 상상만 해도 불편한 이 광경은, 실제로 한 세기 전 철도 여행자들이 겪던 혼란이었습니다.

표준 부재의 혼돈은 비단 철도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기계 부품 하나를 수리하려 해도 제조사마다 나사산의 굵기와 각도가 달라 맞는 나사를 찾기 힘들었습니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각 공장이나 기술자가 자기 기준대로 부품을 만들었고, 운 좋게 같은 회사 제품에나 통용되는 “사실상 표준”만 있었을 뿐입니다​. 예컨대 1841년 영국의 조셉 휘트워스 경이 세계 최초의 나사 규격을 제정하기 전까지, 나사산 각도와 간격은 제각각이라서 서로 다른 공장에서 만든 볼트와 너트는 맞물리지 않았습니다​. 마차 바퀴 간격, 철도 레일 폭, 심지어 나사의 크기까지 통일된 기준이 없던 시대, 사람들은 맞지 않는 부품과 도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습니다. 이런 불편과 비효율은 산업과 교통이 발전할수록 더욱 두드러졌고, ‘세상에 통용되는 약속’, 즉 표준화의 필요성을 점차 절감하게 만듭니다.

 

❚ 엇갈린 규격이 빚은 황당한 사례

표준이 서로 달라서 생긴 웃지 못할 사건들도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 철도에서는 앞서 묘사한 국경 환승 뿐 아니라, 경쟁사를 견제하려고 궤간을 고의로 어긋나게 정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19세기 미국 뉴욕주의 에 rie 철도는 아예 6피트(1829mm) 광궤로 선로를 깔면서 “남들이 우리 선로에 쉽게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속내를 밝혔습니다. 캐나다도 미국의 침공을 막겠다는 군사전략 이유로 5피트 6인치(1676mm) 폭을 채택해 미국 표준보다 넓게 깔았다고 전해집니다​. 일부러 표준을 어긋나게 만든 이들 사례는, 표준 차이가 교통을 불편하게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정치·경제적 무기로도 쓰였음을 보여줍니다.

여러 나라에서 제각기 사용했던 다양한 철도 레일 폭을 비교한 19세기 도식입니다. 번호 1은 가장 좁은 4피트 6인치, 6은 가장 넓은 7피트 궤간으로 영국과 미국, 러시아 등 폭이 제각각이었던 당시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철도마다 폭이 달라 연결 운행이 불가능하자, 서로 다른 궤간을 억지로 이어 주는 묘안들도 등장했습니다. 한 대의 객차에 두 가지 폭에 모두 맞는 바퀴를 다는 “절충 객차”가 고안되었고​, 심지어 바퀴 폭을 수동으로 조절할 수 있는 장치까지 발명되었지요​. 그러나 임시방편일 뿐이었습니다. 폭넓은 바퀴는 선로를 이탈해 열차 전복 사고를 일으켰고, 조절식 바퀴는 관리 불량으로 고장이 잦았습니다​.

표준이 통일되지 않은 채 땜질로 이어 붙인 교통망은 이렇게 위험천만하고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철도 못지않게 전력 분야도 한때 표준 부재의 혼돈을 겪었습니다. 오늘날 세계 각국은 대체로 두 가지 전기 주파수(미주 60Hz, 유럽 등 50Hz)로 양분되어 있지만, 19세기에는 이마저도 정해지지 않아 무려 16⅔Hz에서 133Hz까지 온갖 주파수의 전기가 쓰였습니다​. 예를 들어 1890년대 영국 코벤트리는 특이하게 87Hz 전기를 공급했는데, 이 도시만의 독자 주파수는 1906년까지 쓰이다 사라졌습니다​. 전구 불빛 깜빡임을 줄이려면 50Hz 이상이 좋고, 발전 효율로는 60Hz가 나은 등 장단점 논쟁이 이어지던 끝에 유럽은 독일 AEG사가 주도한 50Hz로, 북미는 웨스팅하우스사의 판단에 따라 60Hz로 표준이 잡혀 갔습니다​.

이렇게 역사적 타협으로 굳어진 두 전력 표준은 오늘날까지도 통일되지 않아, 세계 여행자들에게 돼지코 어댑터와 변압기 걱정을 남긴 숙제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전 세계에는 무려 15종류 이상의 서로 다른 전원 플러그 및 콘센트 규격이 쓰이고 있어, 국가 간 전기제품 호환에 큰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한 나라 안에서도 예외가 있는데, 일본은 지역에 따라 50Hz와 60Hz 전기가 공존하는 바람에 동일본과 서일본 사이에 전력 융통이 어려운 문제를 겪습니다. 표준 불일치의 충격파는 종종 황당한 실패 사례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1999년 NASA의 화성 기후 탐사선은 영영 화성 궤도에 진입하지 못하고 행방을 잃었습니다.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단위 계통 착오였습니다. 우주선 제작을 맡은 기업은 추진력을 파운드힘(영국식 단위)으로 계산해 데이터를 보냈는데, NASA 팀은 그 수치를 뉴턴(미터법 단위)으로 오인해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단위 환산을 빠뜨린 이 실수로 탐사선이 계획보다 훨씬 낮게 날아가 버렸고, 3억 달러에 달하는 우주선은 화성 대기권에서 불타 사라졌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1983년 캐나다의 여객기 한 대는 연료를 잘못 계산해 중간에 연료가 바닥나는 아찔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고기도는 다행히 기장이 글라이더 비행으로 기적의 착륙을 해내며 큰 참사를 면했는데, 이 사건은 연료 환산을 잘못한 정비사의 갤런-리터 착오 때문이라 해서 일명 “김리 글라이더(Gimli Glider)” 사건으로 불립니다. 이렇듯 국제적 약속이 통일되지 않으면, 때로는 수백억 원의 우주선이 사라지고 비행기가 하늘에서 멈춰 버리는 극단적인 결과까지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 대전환: 국제 표준을 향한 큰 걸음

19세기 중엽 이후 산업과 교통의 규모가 커지면서, 혼돈을 종식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표준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우선 철도에서는 궤간 통일을 위한 결단이 내려졌습니다. 영국은 1846년 “철도 규격법(Gauge Act)”을 제정해 잔존하던 브루넬식 광궤를 금지하고 새 노선은 모두 스티븐슨 표준궤로 깔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기존 광궤 노선들은 점차 개량되었고, 마침내 1892년 마지막 남은 7피트 광궤 선로마저 단 한 주말 사이에 표준궤로 바꾸는 역사적 대공사가 단행됩니다​. 이 주말 동안 영국 남서부의 철도 노동자들은 밤낮없이 레일을 뜯어 옮기고 차량 차륜을 교체하여, 월요일 아침 해가 뜰 무렵에는 모든 열차가 하나의 표준 선로 위를 달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미국 남부에서도 1886년 5월 말 사흘간에 걸친 ‘궤간 대이동’이 실시되어, 1만 마일이 넘는 선로의 간격을 일제히 5피트에서 4피트 9인치로 좁히는 신공을 이뤄냈습니다​. 각 지역이 제각기 깔았던 철길을 하나로 맞추는 이 거대한 작업들은 당대 언론이 “남부에서 가장 시끄러운 36시간”이라고 묘사할 만큼 분주한 일이었지만, 이후 철도 물류와 여행의 비약적 발전을 가져온 값진 투자였습니다. 전기의 세계에서도 표준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에디슨의 직류(DC)와 테슬라-웨스팅하우스의 교류(AC) 중 어느 쪽이 전력 표준이 될지 1880년대에 치열한 전류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에디슨은 경쟁을 위해 공개 감전 실험까지 벌이며 AC의 위험성을 주장했지만, 송전 거리가 길고 변압이 자유로운 AC의 우세를 꺾지 못했습니다. 결국 교류식 110~120V 전력망이 미국 도시들을 채우며 표준으로 자리 잡았고, 에디슨이 남겨놓은 직류 전력망은 점차 도태되었습니다. 그래도 뉴욕 등 일부 도시는 20세기 내내 직류 배선을 유지하여, 한때 어떤 건물에는 콘센트마다 AC용과 DC용이 따로 있는 진풍경도 나타났습니다. 똑같이 생긴 플러그라도 구멍마다 다른 전기가 나와, 부지런한 입주민들은 가정용 전열기구를 콘센트 잘못 꽂았다가 태워먹는 해프닝도 일어났습니다​. 오랜 시간 공존하던 두 표준은 마침내 2007년에서야 완전히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그 해 뉴욕에서 에디슨 시절부터 125년간 이어지던 마지막 직류 전기 공급마저 역사의 스위치를 내리며 도시 전체가 교류 120V 단일망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전력 표준화의 승자가 정해지기까지 한 세기가 넘는 시행착오와 투자, 그리고 몇 번의 경제적 충격이 뒤따랐지만, 그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안정적인 전국 전력망과 글로벌 호환 전기제품 시대를 누리고 있습니다.

한편 도로교통 분야에서도 흥미로운 표준화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계 대부분 국가들은 자동차 주행 방향을 우측 통행으로 표준화했지만, 영국을 비롯한 일부 국가는 좌측 통행을 고수해왔습니다. 1967년 스웨덴은 주변국과의 교류와 안전을 위해 대담한 결정을 내립니다. “Dagen H”로 불린 그 역사적인 날, 전국의 자동차들이 일제히 도로 반대편으로 옮겨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혼란을 줄이려고 일요일 새벽 한동안 모든 차량 운행을 금지하고 도로 표지판을 교체했으며, 라디오 방송으로 “이제 우측으로”를 누차 알렸습니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스웨덴은 좌에서 우로 국가 표준을 바꾸는 데 성공했고, 이후 아이슬란드 등 몇 나라가 이 대이동을 따라 했습니다. 물론 영국, 일본 등 오늘날까지 좌측을 고수하는 곳도 있어 전 세계 도로 표준이 완전히 하나로 통일된 건 아니지만, 이런 사례들은 생활 속 표준을 바꾸는 일이 얼마나 큰 사회적 노력과 비용을 필요로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 기업과 표준의 전쟁: 승자와 패자

표준화의 역사는 기업 간 경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한 기업이 자기 기술을 업계 표준으로 만들면 시장을 장악하지만, 그 싸움에서 지면 막대한 손실을 입기 마련입니다.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가 197080년대의 비디오테이프 포맷 전쟁입니다. 일본 소니의 Betamax와 JVC의 VHS라는 두 규격이 가정용 비디오 시장의 표준 자리를 놓고 격돌했죠. 소니는 뛰어난 화질의 베타맥스 규격을 내세웠지만 최대 녹화시간이 1시간 남짓으로 짧았고, JVC의 VHS는 화질은 약간 떨어져도 23시간 녹화가 가능해 소비자들의 실용적 요구를 충족시켰습니다. 결국 VHS 진영이 전 세계 전자회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시장을 석권하면서, 1980년경에는 북미 시장 점유율의 60%를 VHS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소니 베타는 1980년대 후반에는 미국 VCR 시장의 10%도 안 되는 처참한 점유율로 밀려났고, 1988년 소니가 결국 자사 VCR에 VHS를 채택하며 사실상의 패배 선언을 했습니다​.

두 규격의 물리적 크기부터 다를 정도로 서로 호환되지 않는 표준 경쟁이었고, 결국 더 개방적이고 사용 시간도 길었던 VHS가 글로벌 가정용 비디오테이프 표준을 차지했습니다​. 소니 입장에선 자사가 개발한 기술을 남들이 쓰지 못하게 꽁꽁 쥔 전략이 실패로 돌아간 셈입니다. 반대로 JVC는 VHS를 경쟁사들도 채택하도록 열어두는 개방 전략으로 승기를 잡아, 한동안 “VHS만 빌려주는” 비디오 대여점이 세계 곳곳에 생길 정도의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기술적으로 우월해도 표준 경쟁에서 지면 시장에서 사라진다는 교훈을 남긴 이 포맷 전쟁 이후에도, 소니는 2000년대에 이르러 블루레이 vs HD-DVD 디스크 표준 경쟁에서 명예 회복을 하며 끝내 승리하기도 했습니다.

업계 표준을 선점하기 위한 기업들의 치열한 물밑 다툼은, 컴퓨터 분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80년대 개인용 컴퓨터(PC) 초창기에는 애플, 코모도어, IBM 등 각 회사가 서로 다른 규격의 컴퓨터와 운영체제를 내놓아 소비자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IBM이 개방형 아키텍처의 IBM-PC를 발표해 사실상 표준 플랫폼이 되자 판도가 바뀌었습니다. 수많은 클론(clone) PC 제조업체들이 등장해 호환 기종을 쏟아내며 PC 시장은 표준화된 HW/SW 환경으로 급속히 통합되었습니다. 덕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OS와 인텔 CPU 같은 일부 기업은 이 표준 생태계의 승자로 막대한 영향력을 얻게 되었죠. 한편으로 초기 PC 시장을 주도했던 IBM은 자신이 만든 표준을 남들도 자유롭게 쓰도록 허용한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PC 사업 주도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 사례는 공유 표준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보여줍니다. 기술을 독식하기보다 업계 표준을 함께 만들어가는 전략이 장기적으로 더 큰 시장을 형성하고 참여자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표준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은 진행 중입니다. 스마트폰만 보더라도, 한때 제조사마다 제각각이던 충전기 단자가 이제는 거의 USB 타입-C로 수렴했습니다. 이는 유럽연합이 “모든 휴대폰에 충전기를 단일 규격으로 맞추라”고 압박하며 업계에 표준 채택을 이끈 결과였습니다. 예전엔 휴대폰을 바꾸면 충전기도 새로 사야 했지만, 이제 브랜드가 달라도 같은 선으로 충전할 수 있게 되어 소비자 편의와 전자폐기물 감축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쟁과 협력 속에서 표준은 끊임없이 진화하며, 시장의 게임체인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 국제 표준화 기구의 탄생과 권위

이렇듯 나라 안팎으로 표준화의 중요성이 커지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표준을 만들기 위한 움직임도 본격화되었습니다. 20세기 초반부터 각 분야별로 국제기구들이 생겨났는데, 예를 들어 1865년 국제 전신 연합(ITU), 1906년 국제 전기기술 위원회(IEC)가 설립되어 통신과 전기 분야 표준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 표준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1926년에는 여러 나라 표준단체들이 모여 국제표준협회(ISA)를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세계대전으로 ISA 활동이 중단되었지만, 전쟁 직후인 1946년 런던에 25개국 대표들이 모여 새 출발을 논의했습니다​. 이 회의에서 탄생한 조직이 바로 우리가 아는 **국제표준화기구(ISO)**입니다. 1947년 2월 23일 정식으로 문을 연 ISO는 출발 당시부터 “어느 한 국가의 기관이 아니라, 각국 표준단체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독립적인 비정부 국제기구”라는 위상을 갖추었습니다​. 영어로 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이라 약칭이 I.O.S.가 될 법하지만, ISO는 불어, 러시아어 등 각 언어마다 다른 약어 대신 그리스어 ‘ίσoς(isos, equal)’에서 딴 ISO를 공용 명칭으로 정했습니다. 말 그대로 모든 나라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표준화 기구임을 이름에 담은 것이지요.

ISO가 지금까지 권위 있는 국제표준의 대명사로 자리한 비결은, 바로 광범위한 참여와 투명한 합의 과정에 있습니다. 현재 ISO에는 세계 167개국 표준기구가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고, 전문 분야별로 800여 개 이상의 기술위원회(TC)가 구성되어 활동합니다​. 각국의 산업계·학계 전문가들이 모여 표준 초안을 만들고 수년에 걸쳐 토론과 투표를 거쳐 국제표준을 확정하면, 회원국들은 이를 자국 표준으로 받아들이거나 참고하게 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ISO 국제표준은 산업 제품의 상호 호환성을 높이고, 무역에서 기술장벽을 허무는 글로벌 약속으로 기능합니다. ISO의 영향력은 일상 속 보이지 않는 곳에서 거대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예를 들어 전 세계 신용카드의 크기는 모두 동일합니다. 비자, 마스터카드, 심지어 각국의 주민등록증, 여권까지도 가로세로 몇 mm 규격이 딱 정해져 있어 지갑에 쏙 들어가죠. 이 카드 크기와 두께, 마그네틱 선의 위치 등은 ISO/IEC 7810이라는 국제표준에 근거한 것이어서, 어느 나라 ATM 기기든 전세계 카드가 공통으로 들어가 읽힐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이메일에 쓰는 국가 도메인 “.kr”, “.jp”나 올림픽 경기 때 등장하는 나라 약칭(대한민국 KOR, 일본 JPN 등)도 ISO 3166 국가코드 표준에서 정한 것입니다. 이처럼 ISO가 정한 규격과 코드들은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 공통언어가 되어, 기술과 생활의 기반체계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 생활을 바꾼 숨은 표준들

우리 주변에는 표준의 힘으로 가능해진 발명품과 편리한 생활상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컨테이너 박스입니다. 오늘날 거대한 화물선에 실린 직육면체 상자들이 항구에 쌓여 있는 풍경은 익숙하지만,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나라마다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라 물류 효율을 높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1950년대 말 미국 사업가 말콤 맥클린이 주도하고 ISO 기술위원회가 표준화 작업을 이끌면서, 전 세계가 동일한 크기의 규격화된 컨테이너를 도입하게 됩니다​. 20피트, 40피트로 대표되는 이 강철상자 표준(ISO 668 등)이 정착하자, 배-기차-트럭을 바꾸어 실어 나르더라도 컨테이너째로 신속히 옮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적과 하역에 드는 시간이 획기적으로 줄고 인건비와 파손·도난이 급감하며 물류비가 크게 낮아졌습니다​. 그 결과 전 세계 무역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글로벌화의 견인차가 되었고, 소비자는 이전보다 훨씬 저렴한 운송비로 수입 제품을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표준 규격으로 제작된 컨테이너 상자들이 항만에 빽빽이 쌓여 있습니다. 컨테이너의 크기, 재질, 적재방법, 잠금장치 위치까지 ISO 기술위원회가 모든 면을 표준화한 덕분에, 어느 나라 항구나 화물열차든 이 상자들만 있으면 물류를 척척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컨테이너 표준 도입은 전 세계 해운 물류비를 65% 이상 절감시켰고, 무역장벽을 허물어 지구촌을 하나의 시장으로 묶어냈습니다​. 21세기 전자상거래 시대에 우리가 클릭 한 번으로 해외 상품을 주문하고 몇 주 내 집 앞에서 받아볼 수 있는 것도, 알고 보면 반세기 전 이 컨테이너 표준이 가져온 혁신에 기댄 것입니다.

또 다른 숨은 표준의 예로, 디지털 통신 규약을 들 수 있습니다. 전 세계 인터넷을 움직이는 수많은 기술 표준들은 주로 IEEE, IETF, W3C 같은 국제단체에서 개발해온 것들입니다. 와이파이(IEEE 802.11 시리즈) 덕분에 우리는 카페에서 제조사 불문 어떤 기기로든 무선 인터넷을 쓸 수 있고, HTML과 TCP/IP 표준 덕에 지구 반대편 서버의 웹페이지도 내 PC와 스마트폰 화면에 똑같이 나타납니다. 만약 제조사마다 다른 방식으로 인터넷을 만들었다면, 삼성폰으로는 애플 웹사이트에 접속 못 하는 식의 끔찍한 불편이 생겼을 겁니다.

다행히도 기술 표준의 합의가 이뤄진 덕분에 오늘날 인터넷은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되었고, 그 위에서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세계적 서비스도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 속 사소한 물건 하나에도 표준의 영향은 숨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일 쓰는 A4용지는 어디서나 같은 크기입니다. 이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종이 규격 표준이 국제 ISO 표준(ISO 216)으로 자리잡으면서, 전 세계 문서용지 크기가 A4, A3 등의 체계로 통일된 덕분입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누리는 이 A4 용지 한 장에도 표준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것이죠. 또 집안의 전구 소켓 규격, 가구 조립용 육각 렌치와 나사 규격, 카메라의 JPEG 사진 파일과 MP3 음악 파일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들이 없었다면, 현대 생활은 지금처럼 편리하고 풍요롭지 못할 것입니다.

 

❚ 맺으며: 보이지 않는 표준의 위대함

오늘날 우리는 세계 어디를 가도 익숙한 환경을 접합니다. 해외 호텔 방에 들어가면 침대 매트리스부터 화장실 수세식 구조까지 낯설지 않고, 국제공항 곳곳의 픽토그램 표지판은 언어 장벽 없이 이해됩니다. 이런 공통된 환경 뒤에는 수많은 국제표준의 역할이 숨어 있습니다. 표준은 마치 공기와 같아서 평소엔 의식되지 않지만, 없으면 당장 불편과 혼란을 느끼게 되는 존재입니다. 각 나라와 기업들이 때로는 치열하게 경쟁하고 협상하며 만들어온 이 약속들이 쌓여, 오늘의 글로벌 일상이 가능해졌습니다. 국제 표준화의 역사는 곧 협력과 통일의 역사입니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어가는 사회에서는 반드시 표준이 필요하며, 인류는 그 지혜를 찾아냈습니다.

앞으로도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등장할 때마다 표준화의 도전은 계속될 것입니다. 전기자동차의 충전 규격 통일이나, AI 윤리의 표준, 디지털 화폐의 국제 기준 등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습니다. 표준 경쟁에서 앞서나가려는 움직임과 모두에게 이로운 합의를 끌어내려는 노력이 교차하겠지요. 분명한 것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혼돈을 넘어 번영으로 가는 길목마다 언제나 표준화가 있었고, 그것이 우리 삶을 한 단계 편리하게 도약시켰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해도, 표준은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숨은 건축가입니다. 오늘도 그 표준 덕분에 지구 반대편에서 생산된 제품을 문제없이 쓰고 있는 우리 모두가, 어쩌면 표준화 시대의 가장 큰 수혜자인지도 모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