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좀적 실천으로 생성한 만개의 고원

우리는 언어를 기능적 도구로 여겨왔다. 소통의 수단으로, 개념을 담는 그릇으로, 경계를 구분하는 울타리로, 환영의 표상으로, 권력장악의 무기로, 문화감각의 자극제로, 실천파동의 증폭제로… 언어는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나뉜다‘ 라는 좁은 설명에 담길 수 없고, 설명과 주석을 늘여 붙여도 장님이 코끼리 고루만지는 노력에 불과하다.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하기 무섭게 언어는 그 경계를 탈주해 튀어 나갔으니, 기능적 도구라는 내 편협한 의미의 울타리 또한 가뿐히 넘겨짐 당할 것이다. 우리의 인식 한계를 벗어난 어떠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감히 정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되어가는지 관찰하지도 못할 것이기에 사유의 소재로 삼지도 못할 것이고 걱정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언어는 이미 그 경계를 넘었을 것이다. 내 미천한 인식범위 확장속도와 그것의 가치확장 생성속도를 비교하면 진즉 경계를 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지금의 작업은 이미 떠나버린(더이상 언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의 마지막 발자취에 뒤늦게 도착해서, 그것이 향하던 방향으로 몸을 스스로 던져 실마리라도 포착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내 인식과 감각의 기억에 따르면 그것은 끊임없이 외부의 무작위적 요소들과 격렬하게 결합하고 충돌했으며, 스스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기를 반복했다는 인상만 남아있어서, (그 행위를 무어라 표현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어그릇의 한계에 갇히는 일이므로 정확지도 못할 것이며 오류도 있겠지만) 되어감- 나아감- 이라는 포괄적 동사로 일단 칭하고, 어떤 사유의 지평이 뻗어가지든 난잡해지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형체도 개념도 경계도 정의할 수 없던 그것은, 이미 내 인식한계를 벗어났기에 지금 어떨런지 장담할 수 없으나, 지금도 되어감- 나아감- 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귀납적 추론을 바탕으로, 나 또한 되어감- 나아감- 에 적합한 고결합성 공진화체Vigorously Interweaving Co-Eveling Element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내 감히 그것의 속성을 흉내낼 능력이나 기질이 있을런지 따져보니, 독립적 박테리아였던 미토콘드리아를 납치해 에너지 생산 공장으로 통합시키고, 장내 1.5kg의 세균에게 서식처를 마련해주는 대가로 음식물분해용역을 위임하는 공생 생태계로 신체를 개조하고, 인체를 증식용 숙주삼으려 침투했다가 사지로 내몰았던 바이러스의 DNA마저 복제흡수한 게 전체 게놈 중 8%나 된다 하니, 나는 이미 VICEE였다. 최초의 생명체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가 이미 VICEE였고, 내가 잠시 그걸 잊었다는 설명이 더 맞겠다.

도구까지 존재다. 사람을 그릴 때 나체로 그리지 않고, 원시인을 그려도 창이나 도끼를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리니, 도구도 신체다. 도구도 존재에 귀속된다. 어디까지가 신체이고, 어디부터 신체의 확장인지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현대인의 초상엔 언어라는 도구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신체없이 도구만 남기는 것도 괜찮겠다. 도구를 통한 창작물, 그리고 창작물로 일으킨 정동이야말로 확장된 현존 배치체를 더욱 잘 보여주는 초상이겠다.

미지의 외부 존재의 등장은 본성과 습관에 따라 잠재적 위협요소로 여겨진다. 기술발전을 통해 등장한 새 도구는 두려움을 수반한다. 새로운 것의 등장은 위협이 아니라 결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안도감이 든다. 호기심으로 시도한 결합은 당혹스러움을 안긴다. 기존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현상을 마주하며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끝에 달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인간이 만든 도구가 다시 인간을 만든다. 도구는 조작자에게 동적 어포던스를 요구한다. 나의 의식과 언어적 습관의 탈영토화가 선행되지 않고선 결합되지 못함을 확인한다. 부착이나 사용이 아닌, 결합 또는 재편성이다. 선형적 확장이 아닌, 분절된 새 존재들의 탄생이다. 도구사용자가 아닌 새도구-되기 위해 원자론적 개인관, 인본주의, 개체주의적 사고를 씻어낸다. 인과성을 찾으려는 본능적인 지적호기심을 억제시킨다. 환원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켜두어야 한다. 새로운 도구는 손에 바로 쥐어지지 않는 모양이라 양태를 달리해야 한다. 주체라고 여겨지던 것은 파괴되며,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미시적 행위로 잘게 쪼개져 재편성된다.

언어가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결정한다고 믿어져 왔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렇지 아니하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맞다고 여겨지는 들뢰즈 또한 나중에 틀릴 것이다. 46년 전에 출간된 그의 책을 읽으며, 그가 제안한 사유의 도구로, 그가 접하지 못했던 도구와 결합을 시도한다. 들뢰즈의 철학 또한 한계가 있음을 필연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들뢰즈 철학의 경계를 확인하면,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시 들뢰즈적 탈영토화-재영토화 시도를 반복함으로 새로운 것을 생성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분명 생성될 것이기에 들뢰즈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순환오류에 빠져버린 나는 당분간 들뢰즈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의 철학적 유산에 경의를 표하며, 잠재적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의 초상을 헌정한다.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문제에 임하는 자세 바로잡기)

천고가 족히 10미터는 되었던 것 같다.
전시에 참여했던 부스 업체들이 물밀듯 빠져나가자
바닥에는 전시패널들과 각종 쓰레기들이 나뒹굴었고
천장에는 지름 1미터 크기의 헬륨풍선이 붙어 있었다.

풍선을 준비한 부스는 여럿이었지만
대형 풍선을 준비한 곳은 분명 한 곳이었기에
범인을 특정해 전화로 문책하자
잘 안들린다며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연기가 어설펐지만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은 묻어났기에
사과를 받은 셈 치고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사다리차를 부른다거나
10m의 막대를 구하면 된다거나
총을 쏴서 터뜨리자는 등
대부분의 최초 아이디어가 그러하듯
실현가능성이 낮은 안들이 나왔다.

지난 일주일동안 잠을 10시간도 못 잤지만

자발적으로 모여든 풍선제거TF는 어느덧 여섯이 되었고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음에도
실현가능성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바람이 빠질 것이라는
태평한 얘기를 늘어놓던 셋은 떠나고 셋만 남았다.

대관담당자를 불렀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그 경험 속애 해법이 있는지 여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행사장소를 원상복구하는 건 임차인의 책임 이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동료들 뿐이었다.

집념의 두 사내는
막대로 당겨오는 방법과
투사체로 터뜨리는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당겨오기 위한 테이프
터뜨리기 위한 금속류
닿기 위한 막대기
던져질 투사체
가 될만한 것들을 모았고
이 안에 분명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각 재료를 조합해보고 있는데
30분 전 TF를 떠난 배신자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쓸데없는 짓 말고 짐이나 하차장으로 옮기라며 윽박질렀다.

가위를 던지려고 하던 녀석을 진정시키고 나니
다른 녀석은 비비탄 총을 사오겠다며 법카를 달라 했다.
사비로라도 사오겠다는 녀석을 말리는 와중에
테이프를 뭉쳐 만든 투사체에 압정이 바깥으로 꽂힌
해결책이 완성되었다.

천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압정테이프공을 바라보며
던져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성공의 희열은 실현가능성을 찾아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강호의 도리였다.

팔힘이 떨어져 더이상 던질 수 없다고도 했지만
어깨에 목청껏 파이팅을 질러주고
피칭 순간엔 제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숨죽여 기다려주었다.

스무번의 시도 끝에 풍선은 터졌다.
투수의 어깨를 주무르며 축하해주었고
낙하하는 풍선을 낚아채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환호했다.

투수는 자신이 만든 압정테이프공이 뿌듯했는지
전시장을 정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머니에 넣어 간직하다가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상징적인 물건임에도
본질적으로 쓰레기일 수 밖에 없는 그것을
전시장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야 폐기하고
우리의 TF도 그렇게 해산했다.

 

다음 해에는 행사 장소가 바뀌어
천고가 족히 15미터는 되었던 것 같다.
전시에 참여했던 부스 업체들이 물밀듯 빠져나가자
천장에는 헬륨풍선 30개 묶음이 붙어 있었다.

던진다해도 닿지 못할만큼 높았고
터뜨린다해도 30번을 터뜨려야 했기에
함께 과제를 풀어보자며 인원을 모집했으나
올해의 서포터즈 중에선
집념은 커녕 흥미조차 보이는 사람 없었다.

환상적이었던 작년 TF의 팀워크가 그리웠지만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로 뛰며 해법을 공모했다.

현장 경험이 많았던 업체 실장님 중 한 분이
풍선은 풍선으로 갖고 오면 된다는
수수께끼같은 힌트만 남긴 채 사라지셨다.

장내 청소를 맡았던 분들이
남은 풍선을 밟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서
몸을 날려 풍선을 사수했다.
풍선을 손에 쥐고나니 해법이 이해됐다.

낚시줄로 길이를 연장하고
테이프를 뒤집어말아 접착기능을 추가하니
해결책이 금새 완성되었다.

풍선낚시는 단 번의 시도에 성공했고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격정적인 환호와 박수로
나의 월척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왠지
성공의 희열은 작년만치 못했다.
민망하고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문제를 풀어내는 고민은 없었고
해법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해결했다.
작년대비 3배 적은 인력으로 3배 빠르게 문제를 풀었음에도
과정없는 실행만으로 도달한 성공엔 성취감이 없었다.
나는 부지런한 실행가라고 할 순 있어도
발명가나 개척자라고 할 순 없었다.
나는 박수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리버스엔지니어링 패스트팔로우 전략으로
비어있는 기회를 선점하는 데에 집중했던
창발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성장과정을
나 개인이 그대로 답습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과정을 거친 사람보다 빠르게 완료한 사람에게
성공의 과실이 돌아가는 결과중심주의
경제보상체계가 시키는대로
요행과 편법, 합법적 반칙을 실행하는 것이
성공의 공식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넘어
챗GPT까지 튀어나와 실행자의 속도만 높여주고 있으니
과정의 낭만은 사라져가는 경향이다.

하이퍼 커넥티드 글로벌 시대에는
불가능해보이고 막연해보이는 과제들도
누군가에 의해 진즉 도출된 해법이 이미 존재할 것이기에
풍선을 처리하는 방법 또한 검색만 하면 나올 것이기에
문제를 직접 풀겠다는 시도는
바퀴를 다시 발명하겠다는 시도처럼 미련한 일로 격하된다.

해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지만
해법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고 도전의 의미와 의욕이 상실된다.

남아있는 과제 중에
과연 내가 직접 해결할 문제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 세대에 남겨진 과제들은
지나치게 거대해서 엄두가 나지 않거나
형편없이 초라해서 같잖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뿐이라
개척과 발명의 기회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를 갖게 된다.

과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피하고 있을 뿐이다.
과제대비 높은 보상을 좇거나
보상대비 쉬운 과제만 찾거나
해법을 손쉽게 취하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당면 과제에 집중하지 않아야 하는 변명거리만 찾아내
본인의 비겁함을 가려 덮고 있을 뿐이다.

과제가 없다면 과제를 찾아내는 것부터가 우선적인 과제가 되는 것처럼
우리 세대에 남겨진 대부분의 과제는
거대하거나 초라한 것이 아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 살자.

과제가 있음에 감사하자.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을 처리하는 방법을 두 가지나 알고 있는 나는
같은 과제가 다시 주어지더라도 과정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실행만 해야 하기에 성공의 희열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어버린 당신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성공의 희열이란 보상의 크기와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원초적인 쾌락 보상 체계에 의해 작동하는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이다.

과정을 인내하며 문제해결능력을 키우자.
남겨진 과제가 없어 보이는 시대지만
역설적이게도 문제를 풀어내는 고유한 능력은
더욱 희소한 자원이 되고 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제가 주어졌음에 감사하자.
문제해결능력은 더이상 창의와 연산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지런한 실행력과 완수가능성을 분간하는 예리함까지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개념이 넓어지고 있다.

높은 난이도와 낮은 성공률도 환영하자.
내가 풀기 어렵다면 남들고 풀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나 어려운 문제를 내가 풀게 된다면
남들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의
진입장벽을 세울 수 있다.

풍요를 경계하고 척박한 환경에 머물자.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제들은
자원의 투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보유한 자원의 여부로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환영하자.
시련이 있어봐야 죽을 시련은 아닐테고
적당한 긴장감과 분노 또한 에너지의 원천이 되며
날파리 따위에 신경을 뺏기지 않을 집중력과 관대함을 키우게 될 것이다.

 

– 2024년을 맞이하며

Unlearn에 걸린 2년

내려 놓았다.

도통 무엇을 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수 개월이 아니라 년 단위를 넘어섰다. 출근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데도 개선의 진척이 없으니 나는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출근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자전거를 탔다. 동네에서 자전거를 제일 잘 타는 놈이 되었다. 출근자덕보다 무직자덕이 아무렴 잘 타야 했다. 일의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운동으로 만들어낸 성과를 확인하며 자존감을 지켜냈다.

다른 회사에 출근도 해봤다. 지식도 능력도 요령도 많은 나같은 일꾼이 일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국가적으로 산업경쟁력에 손실이 발생하는 낭비이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의 내 모습도 관찰해볼 겸 회사도 다녀봤다.

기세를 몰아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기로 했다. 모든 역할을 직원에게 위임했다. 출근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모든 책임을 내려 놓는다고 명문화해 사인까지 하고나니, 완전한 자유인이다. 평소라면 전혀 만날 일이 없던 호화궁상을 만나보고 철학공부를 유튜브로 2달 내내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깥으로 돌았다. 갇혀버린 상태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알차게 보냈다. 장장 2년의 기간이었다. 열심히 노력했던 시간만큼이나 모든 것을 내려 놓아본 시간 또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기에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람도 떠났다.

부친상을 당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여읜 후의 감상을 공유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덧붙였다. 사람들은 으레하듯이 나에게 상실을 위로했지만 나는 요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공유하고자 했던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되었다. 부친상은 조부모상과 분명 달랐다. 나는 비로소 내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좋으나 싫으나 내 존재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모든 것을 긍정하게 되었다. 트라우도 흑역사도 짧은 인생의 덧없음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더이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가장 오래 일한 직원도 떠났다. 국가는 무엇이고 기업은 무엇이며 개인은 무엇이고 존재란 무엇인가.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은 때로는 아주 중요하기도, 때로는 결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기도 한다. 혼자서 달성해낼 수 없는 목적이기에 여럿이 모이고 조직을 형성한다. 또 다른 구성원의 조합으로 또 다른 조직이 되어 또 다른 도전에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유사 서비스도 생겼다.

매해 서너개씩 나왔지만 궤도에 오른 것은 그동안 하나도 없었다. 다들 모냥새만 흉내내다 요구되는 비용과 자원과 시간과 복잡성에 손을 들고 떠났다. 미련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에서 나만큼 미련한 사람은 없었다.

실행의 싸움도 기술의 싸움도 디자인의 싸움도 마케팅의 싸움도 효율의 싸움도 자본의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개념파악의 싸움이다. 누가 다음 개념을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미련하게 들러 붙어 있을지의 싸움이다.

적어도 나는 창조자가 아니다. 정리하는 사람에 가깝다. 지저분한 귀납적 현상들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고 정제하고 재분류하고 정의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해내는 정보처리기계이다. 이전보다 나은 다음을 한 단계씩 만들어내며 도달한 게 지금의 문명이다. 오늘도 분야마다 한 단계씩 다음 모습을 찾으려고 아둥바둥거리는 게 현대 문명인의 책무다.

나 또한 앞선 서비스의 시도를 오답노트삼아 만들어낸 유사서비스였다. 그리고 더이상 참고할 성공사례도 실패사례도 없을 때 나는 정체기를 맞았다. 앞서 존재한 서비스를 내가 이겨낸 것이 아니다. 앞선 서비스의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했기에 유사 서비스들이 또 나올 수 있었다. 나 또한 유사 서비스 덕분에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다.

이렇듯 동시대를 살아가며 교류하는 모두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감사한다.

끊임없는 비극이 발생할 것이라는 희망

인간이라는 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내 생의 시작과 끝은 이미 정해졌다. 거기엔 내 의지가 개입할 여지도 없었다. 자의적인지 타의적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가 결정할 수 있고 집중해야 하는 문제는 내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에 대한 것이다.

내가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작게나마 내 방식으로 돌아가는 더 나은 세상을 일궈 냄으로 내 존재 가치를 만들어낸다. 생물학적 욕구인 행복, 쾌락, 고통회피, 안위를 충족되는 환경이 건강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태생적 동물 욕구만을 위해 사는 것은 저급한 일이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사유를 하고 작은 세상을 설계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만들기 위해서 지금의 세상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인식은 관점의 문제다. 만든다는 것은 곧 바꾼다는 의미다. 무엇을 바꿀지 바라보기 가장 좋은 것은 비판적인 시각이다. 세상의 변화는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향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 어렵다. 대체로 직전 세대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 단계만 나아갈 뿐이다. 한 번에 열 단계를 건너 뛰어 이루려고 시도해 성취한들 그것 또한 바로 다음 단계다.

이전 시대엔 기근, 가난, 전쟁, 불균형, 비효율, 단절의 문제가 있었다. 인류는 그 문제를 풀었다. 이미 풀어진 문제에 붙들려 있을 필요는 없다. 인간 유전자 구조가 모두 파악되고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여겨왔던 정신노동력은 인공신경망에 의해 추월 당한 지금 생체적인 한계의 극복은 무의미해졌다. 공급이 소비를 넘어서서 기본권이 보장된 시대에 부의 축적이나 사치를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소비기계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세상에도 문제는 존재한다. 모든 문제가 사라지면 인간은 그저 사육당하는 개체가 되어버린다. 인간 스스로가 이룩한 문명에 의해 스스로 사육당하는 짐승의 상태로 회귀하게 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개척하는 역할과 구축하는 역할을 맡을 기회는 적어진다. 비극이다. 하지만 이 비극 또한 문제다.

다음 단계의 세상에 도달하면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앞으로도 꾸준히 비극이 발생할 것이란 사실은 얼마나 다행이고 희망적인 일인가.

우리는 불만종자다.

우리는 만족을 모른다. 강하게 열망하던 대상도 소유하게 되면 흥미를 잃는다. 강하게 추구하던 목표도 달성하게 되면 만족감은 급격하게 추락한다.

우리는 이런 성향 때문에 만성적 불만족에 시달린다. 이미 가진 것과 이룬 것을 보는 것으로는 만족감이 충족되지 못한다. 열망은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해 생긴다.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성향 덕분에 인간이라는 종은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다. 개인은 불안과 권태에 고통받지만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쉴새없이 움직일 수 있다.

인간은 세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생존의지, 증식의지, 개선의지다. 생의지가 있어야 일단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생존의지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다. 증식의지가 있어야 대를 잇고 다음 세대가 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또한 거의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다. 증식의지가 있기에 개척을 했고, 지구를 다 개척하고 나니 인류는 화성으로 가겠다고, 미시의 세계로 가겠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개선의지가 있기에 그 모든 일을 해낸다. 개선의지는 인간만 가진 고유한 의지다. 개선의지가 있기 대문에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고,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킨다. 개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그저 짦은 시간 살아 숨쉬다 생을 마감하는 생물학적인 존재들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만들기 위해 생각을, 생각하기 위해 마음을

만드는 것이 삶이다. 만드는 과정이 삶이다. 만든 결과물은 아니다. 결과물은 영원하지 않다. 결과물이 세상에 선보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무가치 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만들던 과정은 값지다.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만들기 위한 노력과 시도가 가장 고상하고 고결한 가치를 가지는 일이다.

내 삶을 값지게 보내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고 노력하는 시간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부터 해야 한다. 무엇을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목적과 수단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하면 결과물은 만들어진다.

생각은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아니, 지배를 받는다.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생각을 지속해야 하고, 올바른 생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달에 꽤 대단한 것을 만든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멘탈이 반질반질한 사람” 마음의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 위한 생각, 올바른 생각으로 하루를 가득가득 채워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반질반질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그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하니 그 사람의 마음이 날 때부터 티가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서 인지는 모른다. 대체로 마음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만들 수 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불안, 비관, 불신, 비난, 부정, 염세, 허무의 마음이 없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긍정, 희망, 변화, 흥미, 발전, 개선, 칭찬, 격려, 감사, 만족, 자존의 마음이 넘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목적지가 없다면 크루저를 타도 표류다. 목적지가 있으면 뗏목을 타도 항해다.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된다. 한양에만 도착한다면 불완전한 탈 것이어도 괜찮다. 애초에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것은 없다. 인생은 항해이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의 연속이다. 완전해 보이는 탈것이라도 시대가 변하면 불완전한 탈것이 된다. 탈것이 아닌 목적지를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

믿음

꾸준히 하는 것만큼 강한 것도 없다. 빠르게 하거나 똑똑하게 하는 것으로 단기간에 성과가 나올 순 있다. 하지만 꾸준함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있다. 그 영역에 도달하기위해서는 믿음이 굳건해야 한다.

믿음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희망을 연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중간에 확인해야 한다. 중간 확인 없이 지켜지는 믿음은 믿음보다는 맹신이다. 꾸준함이 아닌 미련함이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불신이나 회의적인 태도와는 다른 현명함이다.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는 눈이다. 현명하고 의심많은 사람의 믿음은 좀체 쉽게 생기지도 않지만 한 번 생기면 굳고 단단해서 여간 흔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믿는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내가 이해한 세상이 실제 세상의 모습에 가깝고, 내가 찾아낸 공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는 선하고 이로운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는다.

생존과 부유함, 쓸모와 가치

나는 미디어 전공자이다. 비가시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미디어로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사업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가치의 유무는 그 자체로 고유하게 평가할 수 있지만, 쓸모의 유무는 철저하게 시대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경제체제 속에서 어떤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흑자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그 능력이 아무리 고상해도 존재할 수가 없다. 결국 이루어낼 수 없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가치만이 지속될 수 있고 이루어질 수 있다. 쓸모를 충족시키지 못한 가치는 안타깝지만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거래를 하기로 했다. 거래가 모여 시장이 되고, 시장이 모여 산업이 되고, 산업이 모여 경제가 된다고 했으니 최소 단위인 거래를 깨우쳐야겠다. 거래를 단기간에 가장 많이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래보다 더 작은 단위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신뢰였다.

그 때 내 나이 33살 이었다. 특정한 고객과 특정한 공급자가 거래할 수 있도록 돕는 시장을 만들었다. 이 시장을 운영하며 밥벌이를 했고 생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단히 감격할만한 성과는 아니었다. 굶어 죽을지도 모를 상태에서 벗어난 게 35살이니 남들보다 늦어도 훨씬 늦었다. 재정적으로는 늦었어도 야전에서 자생했다는 점은 높게 살만하다.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상황 속에서도 자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된다.

보통 부유함은 개인의 안위와 풍요를 위해 추구된다. 성공이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보편적으로 추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천박하고 저급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미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데 제약이 없는 풍요의 시대다. 새 시대가 열렸는데 어찌 과거의 결핍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부유해지려면 우선 이전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쓸모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가치를 추구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은 아니다. 더 쓸모있어져야 한다. 더 부유해져야 한다. 나는 이제 굶어 죽는 단계를 벗어 났을 뿐이다. 더 의미있는 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더 쓸모있어야 한다. 너무나도 쓸모가 있어서 쓸모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단계까지 가야 한다.

쓸모와 가치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 단계적으로 선후행의 관계에 놓일 뿐이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방법과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에는 분명 유사한 기술과 실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알기 때문에 당장은 더욱 쓸모있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데에 집중해도 좋다.

 

— 덧붙임 —

이렇게라도 생각을 뜯어 고쳐 먹어야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피투(Geworfenheit, 彼投)

모두 내던져진 사람들이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는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세상으로 내던지기를 반복하며 세상은 이렇게 내던져진 존재들로 벅적댄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놈들도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지만 같이 달리기나 할까? 뛰고나면 상쾌하거든. 같이 동물원 갈래? 대뜸 기린이 보고싶네. 아 조개구이 먹고싶다. 재미도 있고 맛도 있고 운치도 있는 조개구이. 우리 회사에 있는 인간 말종새끼 뒷담화 좀 들어줄래?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몰라도 된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안다고 해서 남은 인생 달라질 것 없다. 모른다고 해서 남은 인생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답도 없는 이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 각자의 인생이 갈피를 잡는다.

생은 어느 순간 강제로 종료된다. 나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이 종료된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깨달음으로 이 질문 자체가 내 삶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영문도 모른채 시작되어버린 이 삶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달리기가 개꿀맛. 달리고나서 먹은 밥도 개꿀맛. 이제 누워서 개꿀잠. 자기 전에 롤토체스 한 판 해야딩 히히

2010년의 생각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서 드디어 해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