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가 족히 10미터는 되었던 것 같다.
전시에 참여했던 부스 업체들이 물밀듯 빠져나가자
바닥에는 전시패널들과 각종 쓰레기들이 나뒹굴었고
천장에는 지름 1미터 크기의 헬륨풍선이 붙어 있었다.

풍선을 준비한 부스는 여럿이었지만
대형 풍선을 준비한 곳은 분명 한 곳이었기에
범인을 특정해 전화로 문책하자
잘 안들린다며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연기가 어설펐지만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은 묻어났기에
사과를 받은 셈 치고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사다리차를 부른다거나
10m의 막대를 구하면 된다거나
총을 쏴서 터뜨리자는 등
대부분의 최초 아이디어가 그러하듯
실현가능성이 낮은 안들이 나왔다.

지난 일주일동안 잠을 10시간도 못 잤지만

자발적으로 모여든 풍선제거TF는 어느덧 여섯이 되었고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음에도
실현가능성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바람이 빠질 것이라는
태평한 얘기를 늘어놓던 셋은 떠나고 셋만 남았다.

대관담당자를 불렀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그 경험 속애 해법이 있는지 여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행사장소를 원상복구하는 건 임차인의 책임 이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동료들 뿐이었다.

집념의 두 사내는
막대로 당겨오는 방법과
투사체로 터뜨리는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당겨오기 위한 테이프
터뜨리기 위한 금속류
닿기 위한 막대기
던져질 투사체
가 될만한 것들을 모았고
이 안에 분명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각 재료를 조합해보고 있는데
30분 전 TF를 떠난 배신자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쓸데없는 짓 말고 짐이나 하차장으로 옮기라며 윽박질렀다.

가위를 던지려고 하던 녀석을 진정시키고 나니
다른 녀석은 비비탄 총을 사오겠다며 법카를 달라 했다.
사비로라도 사오겠다는 녀석을 말리는 와중에
테이프를 뭉쳐 만든 투사체에 압정이 바깥으로 꽂힌
해결책이 완성되었다.

천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압정테이프공을 바라보며
던져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성공의 희열은 실현가능성을 찾아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강호의 도리였다.

팔힘이 떨어져 더이상 던질 수 없다고도 했지만
어깨에 목청껏 파이팅을 질러주고
피칭 순간엔 제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숨죽여 기다려주었다.

스무번의 시도 끝에 풍선은 터졌다.
투수의 어깨를 주무르며 축하해주었고
낙하하는 풍선을 낚아채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환호했다.

투수는 자신이 만든 압정테이프공이 뿌듯했는지
전시장을 정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머니에 넣어 간직하다가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상징적인 물건임에도
본질적으로 쓰레기일 수 밖에 없는 그것을
전시장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야 폐기하고
우리의 TF도 그렇게 해산했다.

 

다음 해에는 행사 장소가 바뀌어
천고가 족히 15미터는 되었던 것 같다.
전시에 참여했던 부스 업체들이 물밀듯 빠져나가자
천장에는 헬륨풍선 30개 묶음이 붙어 있었다.

던진다해도 닿지 못할만큼 높았고
터뜨린다해도 30번을 터뜨려야 했기에
함께 과제를 풀어보자며 인원을 모집했으나
올해의 서포터즈 중에선
집념은 커녕 흥미조차 보이는 사람 없었다.

환상적이었던 작년 TF의 팀워크가 그리웠지만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로 뛰며 해법을 공모했다.

현장 경험이 많았던 업체 실장님 중 한 분이
풍선은 풍선으로 갖고 오면 된다는
수수께끼같은 힌트만 남긴 채 사라지셨다.

장내 청소를 맡았던 분들이
남은 풍선을 밟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서
몸을 날려 풍선을 사수했다.
풍선을 손에 쥐고나니 해법이 이해됐다.

낚시줄로 길이를 연장하고
테이프를 뒤집어말아 접착기능을 추가하니
해결책이 금새 완성되었다.

풍선낚시는 단 번의 시도에 성공했고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격정적인 환호와 박수로
나의 월척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왠지
성공의 희열은 작년만치 못했다.
민망하고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문제를 풀어내는 고민은 없었고
해법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해결했다.
작년대비 3배 적은 인력으로 3배 빠르게 문제를 풀었음에도
과정없는 실행만으로 도달한 성공엔 성취감이 없었다.
나는 부지런한 실행가라고 할 순 있어도
발명가나 개척자라고 할 순 없었다.
나는 박수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리버스엔지니어링 패스트팔로우 전략으로
비어있는 기회를 선점하는 데에 집중했던
창발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성장과정을
나 개인이 그대로 답습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과정을 거친 사람보다 빠르게 완료한 사람에게
성공의 과실이 돌아가는 결과중심주의
경제보상체계가 시키는대로
요행과 편법, 합법적 반칙을 실행하는 것이
성공의 공식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넘어
챗GPT까지 튀어나와 실행자의 속도만 높여주고 있으니
과정의 낭만은 사라져가는 경향이다.

하이퍼 커넥티드 글로벌 시대에는
불가능해보이고 막연해보이는 과제들도
누군가에 의해 진즉 도출된 해법이 이미 존재할 것이기에
풍선을 처리하는 방법 또한 검색만 하면 나올 것이기에
문제를 직접 풀겠다는 시도는
바퀴를 다시 발명하겠다는 시도처럼 미련한 일로 격하된다.

해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지만
해법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고 도전의 의미와 의욕이 상실된다.

남아있는 과제 중에
과연 내가 직접 해결할 문제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 세대에 남겨진 과제들은
지나치게 거대해서 엄두가 나지 않거나
형편없이 초라해서 같잖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뿐이라
개척과 발명의 기회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를 갖게 된다.

과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피하고 있을 뿐이다.
과제대비 높은 보상을 좇거나
보상대비 쉬운 과제만 찾거나
해법을 손쉽게 취하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당면 과제에 집중하지 않아야 하는 변명거리만 찾아내
본인의 비겁함을 가려 덮고 있을 뿐이다.

과제가 없다면 과제를 찾아내는 것부터가 우선적인 과제가 되는 것처럼
우리 세대에 남겨진 대부분의 과제는
거대하거나 초라한 것이 아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 살자.

과제가 있음에 감사하자.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을 처리하는 방법을 두 가지나 알고 있는 나는
같은 과제가 다시 주어지더라도 과정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실행만 해야 하기에 성공의 희열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어버린 당신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성공의 희열이란 보상의 크기와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원초적인 쾌락 보상 체계에 의해 작동하는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이다.

과정을 인내하며 문제해결능력을 키우자.
남겨진 과제가 없어 보이는 시대지만
역설적이게도 문제를 풀어내는 고유한 능력은
더욱 희소한 자원이 되고 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제가 주어졌음에 감사하자.
문제해결능력은 더이상 창의와 연산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지런한 실행력과 완수가능성을 분간하는 예리함까지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개념이 넓어지고 있다.

높은 난이도와 낮은 성공률도 환영하자.
내가 풀기 어렵다면 남들고 풀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나 어려운 문제를 내가 풀게 된다면
남들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의
진입장벽을 세울 수 있다.

풍요를 경계하고 척박한 환경에 머물자.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제들은
자원의 투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보유한 자원의 여부로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환영하자.
시련이 있어봐야 죽을 시련은 아닐테고
적당한 긴장감과 분노 또한 에너지의 원천이 되며
날파리 따위에 신경을 뺏기지 않을 집중력과 관대함을 키우게 될 것이다.

 

– 2024년을 맞이하며

내려 놓았다.

도통 무엇을 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수 개월이 아니라 년 단위를 넘어섰다. 출근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데도 개선의 진척이 없으니 나는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출근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자전거를 탔다. 동네에서 자전거를 제일 잘 타는 놈이 되었다. 출근자덕보다 무직자덕이 아무렴 잘 타야 했다. 일의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운동으로 만들어낸 성과를 확인하며 자존감을 지켜냈다.

다른 회사에 출근도 해봤다. 지식도 능력도 요령도 많은 나같은 일꾼이 일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국가적으로 산업경쟁력에 손실이 발생하는 낭비이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의 내 모습도 관찰해볼 겸 회사도 다녀봤다.

기세를 몰아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기로 했다. 모든 역할을 직원에게 위임했다. 출근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모든 책임을 내려 놓는다고 명문화해 사인까지 하고나니, 완전한 자유인이다. 평소라면 전혀 만날 일이 없던 호화궁상을 만나보고 철학공부를 유튜브로 2달 내내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깥으로 돌았다. 갇혀버린 상태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알차게 보냈다. 장장 2년의 기간이었다. 열심히 노력했던 시간만큼이나 모든 것을 내려 놓아본 시간 또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기에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람도 떠났다.

부친상을 당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여읜 후의 감상을 공유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덧붙였다. 사람들은 으레하듯이 나에게 상실을 위로했지만 나는 요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공유하고자 했던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되었다. 부친상은 조부모상과 분명 달랐다. 나는 비로소 내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좋으나 싫으나 내 존재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모든 것을 긍정하게 되었다. 트라우도 흑역사도 짧은 인생의 덧없음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더이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가장 오래 일한 직원도 떠났다. 국가는 무엇이고 기업은 무엇이며 개인은 무엇이고 존재란 무엇인가.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은 때로는 아주 중요하기도, 때로는 결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기도 한다. 혼자서 달성해낼 수 없는 목적이기에 여럿이 모이고 조직을 형성한다. 또 다른 구성원의 조합으로 또 다른 조직이 되어 또 다른 도전에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유사 서비스도 생겼다.

매해 서너개씩 나왔지만 궤도에 오른 것은 그동안 하나도 없었다. 다들 모냥새만 흉내내다 요구되는 비용과 자원과 시간과 복잡성에 손을 들고 떠났다. 미련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에서 나만큼 미련한 사람은 없었다.

실행의 싸움도 기술의 싸움도 디자인의 싸움도 마케팅의 싸움도 효율의 싸움도 자본의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개념파악의 싸움이다. 누가 다음 개념을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미련하게 들러 붙어 있을지의 싸움이다.

적어도 나는 창조자가 아니다. 정리하는 사람에 가깝다. 지저분한 귀납적 현상들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고 정제하고 재분류하고 정의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해내는 정보처리기계이다. 이전보다 나은 다음을 한 단계씩 만들어내며 도달한 게 지금의 문명이다. 오늘도 분야마다 한 단계씩 다음 모습을 찾으려고 아둥바둥거리는 게 현대 문명인의 책무다.

나 또한 앞선 서비스의 시도를 오답노트삼아 만들어낸 유사서비스였다. 그리고 더이상 참고할 성공사례도 실패사례도 없을 때 나는 정체기를 맞았다. 앞서 존재한 서비스를 내가 이겨낸 것이 아니다. 앞선 서비스의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했기에 유사 서비스들이 또 나올 수 있었다. 나 또한 유사 서비스 덕분에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다.

이렇듯 동시대를 살아가며 교류하는 모두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감사한다.

인간이라는 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니다. 내 생의 시작과 끝은 이미 정해졌다. 거기엔 내 의지가 개입할 여지도 없었다. 자의적인지 타의적인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내가 결정할 수 있고 집중해야 하는 문제는 내가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 지에 대한 것이다.

내가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작게나마 내 방식으로 돌아가는 더 나은 세상을 일궈 냄으로 내 존재 가치를 만들어낸다. 생물학적 욕구인 행복, 쾌락, 고통회피, 안위를 충족되는 환경이 건강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태생적 동물 욕구만을 위해 사는 것은 저급한 일이다. 나는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사유를 하고 작은 세상을 설계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꾸준히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만들기 위해서 지금의 세상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인식은 관점의 문제다. 만든다는 것은 곧 바꾼다는 의미다. 무엇을 바꿀지 바라보기 가장 좋은 것은 비판적인 시각이다. 세상의 변화는 이상적인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향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 어렵다. 대체로 직전 세대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한 단계만 나아갈 뿐이다. 한 번에 열 단계를 건너 뛰어 이루려고 시도해 성취한들 그것 또한 바로 다음 단계다.

이전 시대엔 기근, 가난, 전쟁, 불균형, 비효율, 단절의 문제가 있었다. 인류는 그 문제를 풀었다. 이미 풀어진 문제에 붙들려 있을 필요는 없다. 인간 유전자 구조가 모두 파악되고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여겨왔던 정신노동력은 인공신경망에 의해 추월 당한 지금 생체적인 한계의 극복은 무의미해졌다. 공급이 소비를 넘어서서 기본권이 보장된 시대에 부의 축적이나 사치를 추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소비기계로 전락해버리게 된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세상에도 문제는 존재한다. 모든 문제가 사라지면 인간은 그저 사육당하는 개체가 되어버린다. 인간 스스로가 이룩한 문명에 의해 스스로 사육당하는 짐승의 상태로 회귀하게 된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개척하는 역할과 구축하는 역할을 맡을 기회는 적어진다. 비극이다. 하지만 이 비극 또한 문제다.

다음 단계의 세상에 도달하면 문제가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앞으로도 꾸준히 비극이 발생할 것이란 사실은 얼마나 다행이고 희망적인 일인가.

우리는 만족을 모른다. 강하게 열망하던 대상도 소유하게 되면 흥미를 잃는다. 강하게 추구하던 목표도 달성하게 되면 만족감은 급격하게 추락한다.

우리는 이런 성향 때문에 만성적 불만족에 시달린다. 이미 가진 것과 이룬 것을 보는 것으로는 만족감이 충족되지 못한다. 열망은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해 생긴다. 이미 가진 것에 대해서는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성향 덕분에 인간이라는 종은 위대한 문명을 이룩했다. 개인은 불안과 권태에 고통받지만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고 변화를 만들기 위해 쉴새없이 움직일 수 있다.

인간은 세 가지 의지를 가지고 있다. 생존의지, 증식의지, 개선의지다. 생의지가 있어야 일단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생존의지는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다. 증식의지가 있어야 대를 잇고 다음 세대가 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또한 거의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다. 증식의지가 있기에 개척을 했고, 지구를 다 개척하고 나니 인류는 화성으로 가겠다고, 미시의 세계로 가겠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개선의지가 있기에 그 모든 일을 해낸다. 개선의지는 인간만 가진 고유한 의지다. 개선의지가 있기 대문에 더 나은 세상을 추구하고, 기술과 문명을 발전시킨다. 개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그저 짦은 시간 살아 숨쉬다 생을 마감하는 생물학적인 존재들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만드는 것이 삶이다. 만드는 과정이 삶이다. 만든 결과물은 아니다. 결과물은 영원하지 않다. 결과물이 세상에 선보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무가치 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만들던 과정은 값지다.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만들기 위한 노력과 시도가 가장 고상하고 고결한 가치를 가지는 일이다.

내 삶을 값지게 보내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고 노력하는 시간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부터 해야 한다. 무엇을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목적과 수단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하면 결과물은 만들어진다.

생각은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아니, 지배를 받는다.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생각을 지속해야 하고, 올바른 생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달에 꽤 대단한 것을 만든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멘탈이 반질반질한 사람” 마음의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 위한 생각, 올바른 생각으로 하루를 가득가득 채워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반질반질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그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하니 그 사람의 마음이 날 때부터 티가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서 인지는 모른다. 대체로 마음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만들 수 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불안, 비관, 불신, 비난, 부정, 염세, 허무의 마음이 없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긍정, 희망, 변화, 흥미, 발전, 개선, 칭찬, 격려, 감사, 만족, 자존의 마음이 넘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된다. 한양에만 도착한다면 불완전한 탈 것이어도 괜찮다. 애초에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것은 없다. 인생은 항해이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의 연속이다. 완전해 보이는 탈것이라도 시대가 변하면 불완전한 탈것이 된다. 탈것이 아닌 목적지를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

꾸준히 하는 것만큼 강한 것도 없다. 빠르게 하거나 똑똑하게 하는 것으로 단기간에 성과가 나올 순 있다. 하지만 꾸준함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있다. 그 영역에 도달하기위해서는 믿음이 굳건해야 한다.

믿음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희망을 연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중간에 확인해야 한다. 중간 확인 없이 지켜지는 믿음은 믿음보다는 맹신이다. 꾸준함이 아닌 미련함이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불신이나 회의적인 태도와는 다른 현명함이다.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는 눈이다. 현명하고 의심많은 사람의 믿음은 좀체 쉽게 생기지도 않지만 한 번 생기면 굳고 단단해서 여간 흔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믿는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내가 이해한 세상이 실제 세상의 모습에 가깝고, 내가 찾아낸 공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는 선하고 이로운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는다.

나는 미디어 전공자이다. 비가시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미디어로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사업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가치의 유무는 그 자체로 고유하게 평가할 수 있지만, 쓸모의 유무는 철저하게 시대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경제체제 속에서 어떤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흑자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그 능력이 아무리 고상해도 존재할 수가 없다. 결국 이루어낼 수 없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가치만이 지속될 수 있고 이루어질 수 있다. 쓸모를 충족시키지 못한 가치는 안타깝지만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거래를 하기로 했다. 거래가 모여 시장이 되고, 시장이 모여 산업이 되고, 산업이 모여 경제가 된다고 했으니 최소 단위인 거래를 깨우쳐야겠다. 거래를 단기간에 가장 많이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래보다 더 작은 단위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신뢰였다.

그 때 내 나이 33살 이었다. 특정한 고객과 특정한 공급자가 거래할 수 있도록 돕는 시장을 만들었다. 이 시장을 운영하며 밥벌이를 했고 생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단히 감격할만한 성과는 아니었다. 굶어 죽을지도 모를 상태에서 벗어난 게 35살이니 남들보다 늦어도 훨씬 늦었다. 재정적으로는 늦었어도 야전에서 자생했다는 점은 높게 살만하다.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상황 속에서도 자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된다.

보통 부유함은 개인의 안위와 풍요를 위해 추구된다. 성공이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보편적으로 추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천박하고 저급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미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데 제약이 없는 풍요의 시대다. 새 시대가 열렸는데 어찌 과거의 결핍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부유해지려면 우선 이전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쓸모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가치를 추구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은 아니다. 더 쓸모있어져야 한다. 더 부유해져야 한다. 나는 이제 굶어 죽는 단계를 벗어 났을 뿐이다. 더 의미있는 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더 쓸모있어야 한다. 너무나도 쓸모가 있어서 쓸모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단계까지 가야 한다.

쓸모와 가치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 단계적으로 선후행의 관계에 놓일 뿐이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방법과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에는 분명 유사한 기술과 실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알기 때문에 당장은 더욱 쓸모있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데에 집중해도 좋다.

 

— 덧붙임 —

이렇게라도 생각을 뜯어 고쳐 먹어야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모두 내던져진 사람들이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는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세상으로 내던지기를 반복하며 세상은 이렇게 내던져진 존재들로 벅적댄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놈들도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지만 같이 달리기나 할까? 뛰고나면 상쾌하거든. 같이 동물원 갈래? 대뜸 기린이 보고싶네. 아 조개구이 먹고싶다. 재미도 있고 맛도 있고 운치도 있는 조개구이. 우리 회사에 있는 인간 말종새끼 뒷담화 좀 들어줄래?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몰라도 된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안다고 해서 남은 인생 달라질 것 없다. 모른다고 해서 남은 인생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답도 없는 이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 각자의 인생이 갈피를 잡는다.

생은 어느 순간 강제로 종료된다. 나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이 종료된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깨달음으로 이 질문 자체가 내 삶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영문도 모른채 시작되어버린 이 삶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달리기가 개꿀맛. 달리고나서 먹은 밥도 개꿀맛. 이제 누워서 개꿀잠. 자기 전에 롤토체스 한 판 해야딩 히히

2010년의 생각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서 드디어 해방

운동을 쉬면 퍼포먼스가 떨어진다. 꾸준히 하면 오르고 멈추면 떨어진다. 이 컨디셔닝의 공식이 얼마나 정직한지 오늘날 운동생리학자들은 이를 수치화해서 정확하게 예측해낸다. 강도,빈도,지속시간 세 요소를 측정해 총 운동성과를 수치로 나타내기도 하고 각 요소의 비중이 얼마나 다른지 분석해 성과마다의 특성을 회귀도출하기도 한다.

성장의 속도란 어느 정도 달성한 후로는 그 속도와 기울기가 점차 완만해진다. 정비례해서 계속 증가할 순 없다. 정말 일분일초의 낭비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쏟아놓는 인간의 최선의 노력까지 쥐어짜내고 전세계인이 주목하는 상황에서 정신력까지 극도로 끌어올려 초월적인 능력까지 발휘하는 올림픽리스트의 신기록이 한계라고 한다면 그것에 근사해질수록 차이는 작아진다. 이 상태에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들이부어도 성장은 이뤄지지 않고 현상유지만 할 수 있다. 노력과 성과가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

그래서 정체기를 만나면 재미가 없다. 더 나아져야 재미를 느끼는데 열심히 해도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니 외적동기와 내적동기가 모두 상실된다. 계단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믿어서 조금은 버틸 수 있지만 한동안 지나도 그 성장마저 보이지 않는다면 노력대비 성장은 불가하고 심지어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도 퍼포먼스는 오히려 하락하는 경우도 가끔 발생한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역치값은 계속 높아지기 때문에 성장을 이끌기 위해 들여야 하는 점진적으로 과부하의 정도는 계속 커지기만 한다.

온 종일 운동만 하는 전문스포츠맨이 아닌 우리들은 생업을 꾸리느라 운동빈도가 뜸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퍼포먼스의 한계치가 빠르게 찾아온다. 게다가 추워지는 겨울이면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생기니 좋은 변명거리 삼아 운동을 쉬고, 어김없이 초기화가 진행된다.

초기화가 있기에 급진적인 성장의 기울기와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자기효능감을 반복해서 느낄 수 있다. 한 종목의 달인이 되어버리면 성장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 종목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거의 모든 종목을 다 섭렵해버려 성장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운동하는 것만으로 다시 가파른 성장을 할 수 있다. 초기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제로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얼마나 다행인 것인가.

초기화를 받아들일 때 초기화 전의 최대 퍼포먼스를 기준으로 잡으면 안 된다. 그건 작년의 최대치였다. 그 결과는 4,000키로의 라이딩 마일리지라는 인풋이 있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아웃풋이었다.

아예 운동을 하기 전의 시점을 제로점으로 잡자. 너무 처음보다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즈음, 그러니까 자전거라면 클릿슈즈를 처음 꽂던 시점, 달리기라면 런닝팬츠를 처음 산 시점 정도가 되겠다.

인간은 본디 학습에 재미를 느낀다. 모르는 정보를 아는 것도 그 정보를 통해 내 사냥실력이 늘어는 것도 재미를 느낀다. 그렇게 배움에 재미를 느낀 조상들만 살아남아서 700만년동안 대를 이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움이 재미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현대 교육 때문이다. 배움을 교육과 학습으로 구분해보자. 사전적 정의는 다르지만 나는 이 둘을 능동수동으로 구분한다. 학습주체가 능동적이면 학습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교육이다. 교육은 선생이 있어야하고 학습은 스스로가 선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배움은 본디 재밌는 것이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전공은 다양해져서 사람마다 배움의 성과가 덜나오는 분야를 재미없게 느낄 뿐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잘 맞는 분야를 찾기만 한다면 누구나 배움에서 재미를 느낀다.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아이들도 공부엔 집중 못하지만 게임엔 누구보다 집중을 잘한다. 공부는 적성에 맞기 어렵지만 게임은 누구에게나 적성이 잘 맞다. 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문제일 뿐. 게임이 적성에 잘 맞는 이유는 그렇게 디자인되었기 때문이다. 게임기획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재미를 느끼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연구해 게임의 요소로 구현해낸다. 그리고 그 요소 중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가 배움과 성장이다. 재미있을 수 밖에 없도록 겨냥해서 디자인했으니 재미가 없을 수 없을 수 밖에.

그런 게임에서도 초기화 개념은 있다. 육성과 성장에 한계를 느끼는 것을 알게 되자 게임 기획자들은 한 캐릭터를 계속 성장시키기보다 매 게임마다 반복성장시키기로 했다. 매판 1렙부터 새로 키워야 하는 롤은 매판 짜릿해 최고야 늘 새로워. 성장을 통한 만족감이 가장 특화된 게임은 idle장르다. 자원을 캐서 그 돈으로 업드레이드하고 효율을 높여 다시 자원을 더 모으길 반복하는, 또는 전투력을 키우길 반복하는 이런 유형의 게임은 게임의 작동원리가 어느 정도 파악되기 시작한 순간 재미가 없어진다. 게임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눈에 들어오는 순간 현타가 오더라.

직선적인 게임 진행방식을 정기적으로 초기화시켜 같은 게임도 새로운 게임이 되는 것이다. 열배나 많은 세계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콘텐츠로 열 번을 반복시킬 수 있으므로 생산성도 좋다. 모두 초기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라이트유저는 세계에 발을 담궈본 것만으로도 충족시키고, 헤비 유저는 초기화를 반복하며 열배의 플레이타임을 즐겨도 만족스럽게 게임할 수 있다. 이전과 똑같은 반복을 하게 된다면 재미가 없겠지만 이전에 어렵게 깬 것을 쉽게 깨부수게 되면서 자기효능감을 느낀다. 1.5배 정도 강해지게 해주는 것만으로 엄청 만족스러워진다. 환생 개념도 초기화고 부케 생성도 초기화고 시즌제로 돌리는 것도 초기화다.

초기화를 시킨 다음엔 게임의 양상이 달라진다. 성장결과의 정도가 아니라 성장의 기울기, 즉 성장의 속도에 재미를 느끼게 된다. 초기화도 반복하다보면 초기화를 극복하는 데에도 속도가 붙는다. 초기화를 극복하는 데 처음에는 3주가 걸렸다면 그 다음 초기화극복엔 보름밖에 걸리지 않고 그 다음엔 열흘 정도면 본격적인 운동강도를 받아낼 정도의 몸 상태가 준비될 것이다. 잔차 타는 사람들은 이걸 몸이 올랐다고 표현하더라.

그러니 초기화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초기화가 없다면 우리는 성장 기울기가 완만해져버린 영역 속에서 아무리 과부하를 먹여도 보상은 조금밖에 못 얻는, 게임을 할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장의 연속이다.
내 삶에 생기를 다시 불어넣기 위해 지난 5개월 유산소를 끊었었다.
게을러서 안 뛴게 아니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