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어를 기능적 도구로 여겨왔다. 소통의 수단으로, 개념을 담는 그릇으로, 경계를 구분하는 울타리로, 환영의 표상으로, 권력장악의 무기로, 문화감각의 자극제로, 실천파동의 증폭제로… 언어는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나뉜다‘ 라는 좁은 설명에 담길 수 없고, 설명과 주석을 늘여 붙여도 장님이 코끼리 고루만지는 노력에 불과하다.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하기 무섭게 언어는 그 경계를 탈주해 튀어 나갔으니, 기능적 도구라는 내 편협한 의미의 울타리 또한 가뿐히 넘겨짐 당할 것이다. 우리의 인식 한계를 벗어난 어떠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감히 정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되어가는지 관찰하지도 못할 것이기에 사유의 소재로 삼지도 못할 것이고 걱정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언어는 이미 그 경계를 넘었을 것이다. 내 미천한 인식범위 확장속도와 그것의 가치확장 생성속도를 비교하면 진즉 경계를 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지금의 작업은 이미 떠나버린(더이상 언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의 마지막 발자취에 뒤늦게 도착해서, 그것이 향하던 방향으로 몸을 스스로 던져 실마리라도 포착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내 인식과 감각의 기억에 따르면 그것은 끊임없이 외부의 무작위적 요소들과 격렬하게 결합하고 충돌했으며, 스스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기를 반복했다는 인상만 남아있어서, (그 행위를 무어라 표현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어그릇의 한계에 갇히는 일이므로 정확지도 못할 것이며 오류도 있겠지만) 되어감- 나아감- 이라는 포괄적 동사로 일단 칭하고, 어떤 사유의 지평이 뻗어가지든 난잡해지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형체도 개념도 경계도 정의할 수 없던 그것은, 이미 내 인식한계를 벗어났기에 지금 어떨런지 장담할 수 없으나, 지금도 되어감- 나아감- 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귀납적 추론을 바탕으로, 나 또한 되어감- 나아감- 에 적합한 고결합성 공진화체Vigorously Interweaving Co-Eveling Element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내 감히 그것의 속성을 흉내낼 능력이나 기질이 있을런지 따져보니, 독립적 박테리아였던 미토콘드리아를 납치해 에너지 생산 공장으로 통합시키고, 장내 1.5kg의 세균에게 서식처를 마련해주는 대가로 음식물분해용역을 위임하는 공생 생태계로 신체를 개조하고, 인체를 증식용 숙주삼으려 침투했다가 사지로 내몰았던 바이러스의 DNA마저 복제흡수한 게 전체 게놈 중 8%나 된다 하니, 나는 이미 VICEE였다. 최초의 생명체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가 이미 VICEE였고, 내가 잠시 그걸 잊었다는 설명이 더 맞겠다.
도구까지 존재다. 사람을 그릴 때 나체로 그리지 않고, 원시인을 그려도 창이나 도끼를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리니, 도구도 신체다. 도구도 존재에 귀속된다. 어디까지가 신체이고, 어디부터 신체의 확장인지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현대인의 초상엔 언어라는 도구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신체없이 도구만 남기는 것도 괜찮겠다. 도구를 통한 창작물, 그리고 창작물로 일으킨 정동이야말로 확장된 현존 배치체를 더욱 잘 보여주는 초상이겠다.
미지의 외부 존재의 등장은 본성과 습관에 따라 잠재적 위협요소로 여겨진다. 기술발전을 통해 등장한 새 도구는 두려움을 수반한다. 새로운 것의 등장은 위협이 아니라 결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안도감이 든다. 호기심으로 시도한 결합은 당혹스러움을 안긴다. 기존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현상을 마주하며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끝에 달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인간이 만든 도구가 다시 인간을 만든다. 도구는 조작자에게 동적 어포던스를 요구한다. 나의 의식과 언어적 습관의 탈영토화가 선행되지 않고선 결합되지 못함을 확인한다. 부착이나 사용이 아닌, 결합 또는 재편성이다. 선형적 확장이 아닌, 분절된 새 존재들의 탄생이다. 도구사용자가 아닌 새도구-되기 위해 원자론적 개인관, 인본주의, 개체주의적 사고를 씻어낸다. 인과성을 찾으려는 본능적인 지적호기심을 억제시킨다. 환원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켜두어야 한다. 새로운 도구는 손에 바로 쥐어지지 않는 모양이라 양태를 달리해야 한다. 주체라고 여겨지던 것은 파괴되며,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미시적 행위로 잘게 쪼개져 재편성된다.
언어가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결정한다고 믿어져 왔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렇지 아니하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맞다고 여겨지는 들뢰즈 또한 나중에 틀릴 것이다. 46년 전에 출간된 그의 책을 읽으며, 그가 제안한 사유의 도구로, 그가 접하지 못했던 도구와 결합을 시도한다. 들뢰즈의 철학 또한 한계가 있음을 필연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들뢰즈 철학의 경계를 확인하면,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시 들뢰즈적 탈영토화-재영토화 시도를 반복함으로 새로운 것을 생성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분명 생성될 것이기에 들뢰즈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순환오류에 빠져버린 나는 당분간 들뢰즈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의 철학적 유산에 경의를 표하며, 잠재적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의 초상을 헌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