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이미 사이보그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안경을 꼈다. 태생적 신체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신체를 후천적으로 개조하거나 외부의 물질로부터 도움받는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미 사이보그다.

옷과 신발은 피부의 확장이고, 안경은 시력의 확장이며, 보청기는 청각의 확장, 탈 것은 다리의 확장이 되었다. 더 찾아보자. 백신은 면역력의 확장이고, 노트는 기억력의 확장이며, 컴퓨터는 연산능력의 확장이고, 인터넷은 사회적 연결의 확장이다. 사이보그는 신체 외적인 도구, 기계의 도움을 받아 더욱 강한 존재로 거듭난다.

어디까지가 신체의 개조이고, 어디부터가 신체의 확장인지 경계는 불분명하다. 인간사회에선 인간들끼리 법적으로 허용되는 기준을 마련해두고 있을 뿐이다.

더 강한 존재가 되길 원하는 사이보그는 고민한다. “나의 미천한 신체 능력을 어떻게 더 강화할 것인가” 태생적 신체 능력을 강화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외부의 물질적, 기계적 도움을 얼마나 많이 활용할 수 있는지가 곧 능력의 총합이 된다. 인간이 기술을 만들었지만 그 기술은 다시 인간을 만든다.

사람을 그리라고 하면 누구나 옷을 입고 있는 상태의 사람을 그릴 것이다. 나체를 그릴 사람은 없다. 원시인을 그리라고 해도 나체에 창 같은 무기를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릴 것이다. 사용하는 도구까지 포함시켜 사람으로 정의된다. 도구까지가 신체다. 도구도 존재에 귀속된다.

갓난 상태의 조카는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자신의 신체를 조작하는 방법을 터득해 나갔다. 물체를 집으려 할 때 모든 손가락을 한번에 쥐어 잡는 방식에서 엄지를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익혔다.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느렸지만 동시에 꽤 빠른 변화라는 생각이 들어 감탄했다.

우리 모두의 출발이 갓난아이였던 것을 생각하면 태생적 신체 또한 도구다. 난 아직도 네번째 손가락을 독립적으로 정교하게 움직이지 못한다. 일상에서 필요하지 않은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36년 달고 살았던 신체가 새로운 도구를 조작하는 것보다 때론 더 낯설다.

반면 내 젓가락질은 아주 정교하다. 하루에 두번 이상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판도 잘 친다. 자판을 처음 칠 땐 손가락의 방향을 일일이 확인하느라 50타를 넘기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분당 700타를 쳐내고 있다. 그리고 자전거도 잘 탄다.

신체 조작 숙달의 과정과 도구 조작 숙달의 과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유아기를 벗어난 아이가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조작하듯, 성인인 우리들은 도구를 자유롭게 조작한다. 숙달된 도구는 직관적이다. 직관적이란 말은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난 자전거를 직관적으로 다룬다. 자전거는 이미 내 신체의 일부다.

디지털기술의 발달로 우리의 삶은 확장되었다. 가상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 공간은 물리적으로 실존하진 않지만 기능적으로는 작동한다. 오히려 시간한계와 물리한계가 없기 때문에 확장을 넘어서 역전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확신하는 편이다. 역전의 특이점은 이미 왔을지도 모른다. 그 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공간의 확장이 일어났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내가 이렇게 쉽게 삶의 터전을 그 방향으로 확장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님 중에서는 가상의 공간에서 삶의 터전을 시작한 사람이 없으실 뿐더러, 나도 시골에서 자란 非-digital native 이기 때문에 급작스런 터전의 변화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우려가 된다.

우선 당장의 문제만 보자면 나는 가상의 공간을 도피의 공간으로 쓴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보고 있다. 그 시간은 죽은 시간이 된다. 사라진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이 현실 세계에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라면 물리적으로 현실세계라고 느낄 수 있는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진행해야 한다.

핸드폰이라는 매체는 신체에 너무 가깝다. 가상현실이라고 하면 대부분 VR기기를 덮어 쓴 뒤 현실세계를 차단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걸 뒤집어 쓰나 안 쓰나 어느 정도 가상현실에 깊이 빠지게 되는가를 따지면 될 일이다. 그래픽이 더 좋다거나 덜 좋다고 몰입의 차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경험 주체가 어느 현실에 발을 딛였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면 모든 현실의 감각기관을 off시키게 된다.

반명 노트북을 키는 것은 현실에서 가상으로 접속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완전 몰입되진 않는다. 의식이 각성되어 있는 상태로 가상의 공간을 탐험하고 활용할 수 있다. 여전히 의식은 실제 세계에 머무른다. 키보드와 마우스라는 정보입력장치는 우리 신체기관의 확장으로 여겨진다. 별도의 도구를 조작하지 않고 화면을 터치한다는 것이 큰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상현실로 도피했다. 꽤 오래된 것 같다. 일을 하지 않으면 가상현실로 도망쳐있었다. 그곳에서 뭔가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활동이 이뤄진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개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심하게 망가졌다. 현실감각이 많이 사라졌다. 집안에서 물건을 자주 잃어버렸다. 가끔 방이 낯설게 느껴진다. 물리적인 힘을 들여서 책상위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은 가상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정리보다 너무 버거운 일로 여겨졌다.

터치 UX는 나에게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버렸다. 신체부위가 직접 가상현실을 조작하는 도구로 연결되어 있으니 나의 욕망을 억제할 단계도 장치도 없다. 아 심심해 > 앱 키면 심심하지 않아진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나 > 인스타 피드 보면 뭔가 세상 소식을 들은 것 같다. 실제로는 어떤 방향성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정보의 흐름에 떠밀리고 있을 뿐이다.

현실세계의 감각이 떨어지고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보입력도구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정보입력도구가 VR이나 터치UX처럼 직관적이지 않았을 때에도 이런 사람들은 있었다. 나보다 훨씬 증세가 심각해서 문제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20년 전에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을 것이고, 그 중 일부는 현실 감각이 떨어져서 현실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로 주된 삶의 터전을 옮기려는 의도, 또는 그곳으로 도피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상태라고 가정했을 때,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은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길목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단계도 없고 장치도 없다. 그러니까 이건 신경망을 끊는 것과 같다. 이미 내 욕망은 앱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욕망이 앱을 작동시키는 사이에 나의 이성이나 의식이 개입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단순히 앱을 지운 것이 아닌 신경망을 끊은 것이다. 현실에 집중하자.

블로그에 글을 끄적이니 건강해짐을 느낀다!

나는 건강하다!

 

 


덧붙임 (21년 2월 25일)

언어는 두 종류다.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언어는 머릿속의 개념이 문자나 음성으로 표현되는 과정을 거친 뒤 전달되어 다시 해석되는 일련의 시스템이다. 개념을 언어로 담아내는 coding의 과정과 해석하는 decoding의 과정이 이뤄진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직관적이라는 측면에선 좋은 점이다.

터치 UX는 언어인가. 터치UX는 언어가 아니다. 주어진 객관식의 답변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feedback일 뿐이고 reaction일 뿐이다. coding을 하지 않는다. 주체성이 없는 인터랙션이다. 터치 UX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수동의 상태가 된다. 주체성을 잃는다. 모바일은 작은 PC가 아니다. PC는 발언자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만 모바일은 주체성을 잃게 만든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다. 반응의 종류와 수준을 제외하면 구조적으로 반응자라는 점에서 짐승과 다른 점이 없다. 자극을 주는 자여야 한다. 터치UX의 상태로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은 하이테크 문명의 혜택을 받는 게 아니다. 야만 상태로의 회귀다. 수동적인 짐승의 인생을 살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면 모바일 기기의 활용빈도를 줄여 나가야 한다.

더듬이

더듬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머리끄덩이를 잡아 붙여다가 소통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 송신속도도 높아지고 데이터 손실률도 줄어들 것이다. 또는 스타트렉의 벌컨족처럼 얼굴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기억과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도 괜찮겠다. 아쉽게도 난 그런 첨단 더듬이를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말과 글을 통해 소통한다.

언어란 게 다 뭔가? 내 머리통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타인의 머리통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거치는 과정이다. 여러 전달 수단 중 말과 글이 있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면 입이 아프고, 글을 많이 쓰면 손가락이 아프다. 더듬이가 여러 측면에서 우월하다. 말이라는 게 얼마나 원시적이고 제한적인 소통 수단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증명된 셈이다. 더듬이가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속이 터지지만 어쩔 수 없다. 차세대 첨단 더듬이가 테크크런치에 소개되고, 실리콘밸리 머니를 투자받은 후, 임상시험을 거치고, 시중에 유통되어 얼리어답터들의 피드백을 반영함으로, 3번째쯤 버전으로 고도화된 뒤, 중국에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가격안정권에 들어서야, 나 같은 천민도 구매할 수 있을 텐데 이번 생에 구경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말이나 글이라도 제대로 활용해야겠다.

언어의 다양함은 사고의 폭을 넓힌다. 반대로 언어의 제한적인 활용은 사고의 폭을 좁힌다. 감정의 폭도 좁힌다. 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어휘의 단조로움은 미개함이다. 야만이다. 문명의 적이다. 인간 문명의 발달이 언어의 발달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문명의 방향은 어휘를 잘게 쪼개는 쪽으로 향한다.

아이는 꿀밤을 맞으며 말을 배운다. 한 아이가 옆집 아저씨를 “아빠”라 불러 엄마에게 꿀밤을 한 대 맞는다. 사람을 칭하는 단어가 ‘아빠’, ‘엄마’ 뿐인 줄로 알았던 탓이다. 그제야 집에 사는 남자는 ‘아빠’, 집 밖에 사는 남자는 ‘아저씨’라는 개념을 습득한다. 다음날 만난 한 고등학생을 “아저씨”로 불렀다가 한 대 더 맞는다. 집 밖에 사는 남자가 늙었으면 ‘아저씨’, 젊으면 ‘형’이라고 개념을 쪼갠다. 개념을 쪼개지 못하는 것은 신생아의 미숙함이다. 야만이다. 문명의 적이다.

 

바이럴 영상

영상제작 거래중개를 시작한 지 8개월이다. 제출되는 포트폴리오 대부분 제목 뒤에 ‘바이럴 영상’이라고 붙어 제출된다. 800개 중 300개가 자칭 바이럴 영상임을 주장한다. 이 어휘는 죽었다. 사용할수록 의미가 정의되긴커녕 모호해진다. 의미를 쪼개고 구체화하긴커녕 허상으로 포장된다.

바이럴 영상이라는 표현은 분별력을 잃었다. 이젠 거의 모든 것에 바이럴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배우가 출연하는 광고부터 모션그래픽 광고까지, 형식을 불문한다. B급 유머코드 광고부터 울음유발 공감 광고까지, 스타일을 불문한다. 판매촉진 비디오커머스부터 기업 브랜드 CF까지, 장르를 불문한다. 2억 규모 제작비에서 50만 원 싼마이까지, 너도나도 바이럴을 갖다 붙이기 바쁘다.

바이럴 영상의 본래 정의는 ‘소비자에 의해 자발적으로 확산되는 영상’이다. 자발적 확산을 이루지 못했다면 바이럴 영상이 아니다. 이 표현은 결과를 나타내는 용도보다 미래 지향적인 용도로 더욱 자주 사용된다. “자발적인 확산을 목표로 하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가 너무 길기 때문에 줄여 말한다. 이런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목적 달성에 실패한 영상까지도 바이럴 영상으로 불릴 때 문제는 발생한다.

자칭 바이럴 영상이라 주장하는 영상 100개 중에서 실제로 바이럴 성과가 있었던 것은 1개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가 워너비에 파묻혔다. 1개의 실제 바이럴 영상을 바이럴 영상이라 부르면 나머지 99개의 영상과 동급으로 여겨진다. 실제 바이럴 영상을 칭할 방도가 사라졌다. 타인의 성공을 빌어 입고 자신을 포장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끝내 한 단어를 죽이고 말았다. 이기적이었던 그 사람들을 찾아내서 꿀밤을 때리고 싶다. 정의(定義)의 꿀밤으로 어휘의 세분화를 거치도록 강제하고 싶다.

개념 정의 기능이 부족한 어휘는 성장을 멈추고 소멸하는 게 보통이다. 또는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 죽을 때를 한참 넘긴 어휘가 왜 아직도 펄펄 날뛰는지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방대한 개념의 어휘 때문에 곤혹스럽다. 미스케이션이 난무한다. 의사 소통 단계가 늘어난다. 업체 검증 기간이 길어진다. 제작 회의는 난항을 겪는다. 실컷 만들었더니 이건 아니랜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댄다.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기가 막힌 작품을 기대하라더니 웬 엉뚱한 걸 만들어 놨댄다. 프로젝트는 파멸로 향하고 각자 민사소송을 준비한다. 그 지경을 겪고도 어째서인지 언어습관은 바뀌지 않는다.

떠들기만 하는 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캤다. 영상산업의 언어 정화를 위해 발을 벗는다. 적어도 내가 만든 플랫폼 안에서는 모호한 어휘의 남용을 허용치 않는다. ‘바이럴 영상’을 적폐로 공표하고 척결에 나선다. 300개에 육박하는 자칭 바이럴 영상의 제목을 일일이 수정한다. ‘웹 CF’, ‘소셜미디어 최적화 영상’, ‘병맛나는 연출’, ‘공감유도영상’으로 더욱 세분된 명칭을 부여한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값진 야근을 했다. 사회적인 약속을 파기하는 언어 습관을 일부라도 정제시켰다. 첨단 더듬이가 없는 이상, 이게 나의 최선이다.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에 집착이
지나칠 정도로 까탈스러운 원칙주의자가 운영하는
영상제작 거래중개 서비스
비드폴리오

나는 매체를 운영했다. 하루에 2만 명씩 들어왔다. 서버 전송 트래픽은 일 50기가에 달했다. 팬 수는 쌓여 7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다. TAT지수도 아주 높았고 좋/댓/공의 비율도 타 채널과 비교해 아주 높게 유지됐다. 핵심 독자 층이 어느 매체보다도 높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확보한 이 트래픽의 값어치가 대단히 가치있는 것인 줄 알았다. 트래픽 장사치였던 나는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을 속였다.

트래픽 측정 단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각각의 전환에 대한 값어치를 계산해보자. 일반적인 계산법이 없으니, 나의 지난 3년 경험을 토대로 상대 비교 공식을 마련해본다.

 

PV (Page View)

PV는 가장 낮은 트래픽 측정 단위이다. 한 페이지가 보여졌다는 조회 기록이다. 어떤 이는 2분 동안 정독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페이지에 들어오자마자 3초만에 나갔을 수도 있다. 또 해킹 로봇에 의해 공격 당해 증가하기도 한다.

1PV

좋아요 / ♡ / 공감

콘텐츠를 단순히 보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한 번의 클릭을 통해 자신의 감정반응을 남긴다. 10PV가 발생하면 그 중 1/10의 사람이 피드백을 남긴다. 10PV는 1좋아요와 맞먹는다.

10PV = 1좋아요

댓글 / 공유

댓글과 공유는 단순한 클릭 피드백보다 높은 단위이다. 텍스트를 입력해야 하고, 공유시 소개할 멘트를 새로 생각해야 한다. 피드백을 남기기 위해 더 큰 수고와 시간을 요한다. 10좋아요는 1댓글 혹은 1공유와 맞먹는다.

100PV = 10좋아요 = 1댓글(공유)

도달

Social Network Service는 네트워크 서비스다. 이름대로 연결을 촉진시키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들이 연결을 많이 발생시키기 위해 쓰는 전략으로 트래픽을 쪼개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PV보다도 낮은 단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미리보기 콘텐츠를 만들어 냄으로 콘텐츠의 목차를 만들어낸다. 세분화된 프리뷰 콘텐츠를 묶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빠르게 다수의 콘텐츠를 검토할 수 있도록 사용자 환경을 제공한다. 페이스북의 ‘도달’이 대표적이다. 자발적으로 퍼져나가는 아웃링크 콘텐츠는 도달>PV 전환비가 5:1 수준이지만, 광고 콘텐츠의 경우 100:1이하의 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평준화하기에는 너무 폭이 크지만, 트래픽 계산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 광고이기 때문에 조금 후하게 쳐서 10도달이 1PV와 맞먹는다 하겠다.

1,000도달 = 100PV = 10좋아요 = 1댓글(공유)

메시지

매체 운영자 혹은 콘텐츠 게시자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댓글 혹은 공유보다 높은 트래픽 단위이다. 댓글에 친구를 소환하거나 시덥잖은 농담을 남기는 것보다 적극적인 피드백이기 때문이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면 메시지의 비중이 아주 높을 것이다. 나는 콘텐츠 배포가 주요 활동인 매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메시지로의 전환은 낮은 편이었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100개의 댓글이 달리면 1개의 메시지가 왔다.

100,000도달 = 10,000PV = 1,000좋아요 = 100댓글(공유) = 1메시지

메일 / 전화문의

메일을 받았다면 메시지를 받는 것보다 10배 기쁜 일이다. 메시지는 SNS에서 연결을 늘리기 위해 마련해둔 여러 장치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증폭된 트래픽이기 때문이다. 페이지 관리자의 메시지 응답률 및 평균 응답시간을 노출시킴으로 메시지가 활성화되길 넛지 유도한다. 메일을 보낸다는 것은 이런 인위적인 공작활동과 상관없이 진정 연락하고 싶은 강한 의지가 있어서 연락하는 것이다. 메시지는 ‘하이, 헬로, 저기요’라고 구어체로 말을 해도 되지만, 메일은 자기소개와 함께 비즈니스 매너를 갖춰 맥락에 맞춰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역시 요구되는 시간과 노력 측면에서도 차이 난다. 전화문의는 메일과 거의 동일한 무게를 가진다. 나는 메시지 10개를 받으면 메일은 1통 정도 받았다.

1,000,000도달 = 100,000PV = 10,000좋아요 = 1,000댓글(공유) = 10메시지 = 1메일(전화)

대면 미팅

나는 매체를 운영함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도달되었다. 동시에 온갖 세상 뜨내기들과 연결되었다. 댓글도 보고, 메시지도 주고 받고, 메일도 주고 받고, 전화 통화도 온 종일 하는데, 실제로 쓸모있는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다. 직접 대면미팅으로 이어질 정도로 강한 관계는 없이, 상대가 별 생각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10초 만에 남긴 피드백에 내가 10분씩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 억울했다. 각 트래픽 마다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서 서로의 손을 쥐며 인사하고, 커피를 서로 사겠다며 다투는 정도의 인연은 10통의 메일 혹은 전화를 받으면 1회 발생했다.

10,000,000도달 = 1,000,000PV = 100,000좋아요 = 10,000댓글(공유) = 100메시지 = 10메일(전화) = 1미팅

 

따라서, 내가 당신을 만나 커피를 한 잔 마신다는 것, 그 관계는 페이스북에서 1천만 명에게 도달하고, 10만 명에게 따봉을 받는 것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

이 외에도 술자리를 갖는 관계의 무게 X10, 메말라빠진 디지털 시대에 쓰여진 아날로그 감성 손편지의 무게 X10,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는 관계의 무게 X10로 측정해보려고 했으나 무리수인 것 같아 그냥 관둔다.

 

난 3년간 매체를 운영했고, 3달 전부터는 거래 중개일을 하고 있다. 다시금 확인한다.

10만 개의 페이스북 좋아요 보다 10만원 짜리 거래 한 건이 훨씬 중요하다.

  • 정보 전달 방식의 시대적 변화

정보전달 매체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 정보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던 시대에는 정보 중개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언론사가 정보 유통의 관계를 독점했다. 기술적인 진입장벽도 높았고, 비용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편이 사회 전체적으로도 효율적인 정보를 공유 방법이었다. 언론사를 중심으로 일련의 정보 유통 규약과 문법이 생겨났다.

시대는 바뀌어 모든 사람이 웹이라는 완전 개방 정보생태계에 접속될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을 손에 쥐고 다니게 되자 정보와 정보소비자가 직접 연결되었다. 이런 환경의 변화로 인해 기존의 규약과 문법은 파괴되고 있다. 매체는 간소화되었고, 특정 분야별로 버티컬화가 진행된다. 정보는 파편화되어 독자 입장에서 다시 재배열되는 정보 맥락의 변화 또한 생긴다.

 

  • 기업 입장에서 브랜드 저널리즘이란

기업은 여러 타겟에게 기업의 활동을 알림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그 타겟으로는 고객, 잠재고객, 사업파트너, 내부 직원, 경쟁사 등 다양하다. 각각의 타겟과 관계를 맺기 위해 기업은 마케팅 부서와 홍보 부서를 운영했다. 두 부서의 업무는 약간 다르지만 외부의 정보 플랫폼, 광고 솔루션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기업의 메시지 전달을 내재화할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 환경이 다변화되고 복잡해지자 이를 트리플 미디어 전략으로 묶어내고 있다. 기존의 광고 홍보 방식을 페이드 미디어(Paid Media), 자체적으로 미디어를 운영하는 것을 온드미디어(Owned Media), 사회관계망을 겨냥한 독자 중심의 콘텐츠 전략을 언드 미디어(Earned Media)로 분류한다. 타깃에 접근할 방안은 갈수록 다양해지므로, 성격이 비슷한 것들 것 묶어 분류하는 것으로 거시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전략을 통일시킬 수 있다.

기업의 브랜드 저널리즘은 트리플 미디어 전략 중에서 온드 미디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체적으로 미디어 브랜드를 구축해 정보를 직접 소싱, 제작, 발행하는 것은 여러 장점이 있다. 빠르게 실행하고 대응할 수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손실이 적다. 맥락 통제권을 직접 가질 수 있다. 원하는 타겟을 직접 설정하고 겨냥할 수 있다. 독자의 문법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직접 기획할 수 있다. 피드백을 직접 받고 관리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장점을 찾을 수 있겠다.

 

  • 브랜드 저널리스트가 갖춰야 하는 태도

브랜드 저널리스트는 바깥으로는 독자를 바라보되 귀는 안으로 기울여야 한다. 정보 생산은 소싱, 제작, 유통의 과정이 거치기 때문이다. 좋은 정보는 올바른 소싱으로부터 나온다. 미디어의 체계와 발행 전략이 수립되고 나면 콘텐츠는 소싱에서 8할이 결정된다. 좋은 콘텐츠는 좋은 소싱에서 비롯된다.

브랜드 저널리스트는 내부인이면서 외부인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는 전달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메시지를 전달받는 독자의 입장이 되어 객관적으로 기업을 바라볼 수 있는 롤플레잉 시뮬레이션을 반복해야 한다. 좋은 브랜드 저널리스트라면 구축한 브랜드와 콘텐츠가 외부의 시선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저널리즘에 대한 이해와 정의는 각각 달라지고 있지만, 넓게 ‘전파에 대한 책임’이라고 포괄할 수 있다. 정보 중개자라면 응당 가져야 할 자세다. 기업이 미디어를 직접 운영하더라도 기존의 언론사가 추구하던 저널리즘의 정신은 지켜질 필요가 있다. 언론이 사회와 가지는 관계의 성과는 영향력으로 측정되지만, 이 또한 신뢰가 구축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브랜드 저널리즘 또한 신뢰 구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미디어 운영과 기사 작성 과정에서 객관성, 독립성, 투명성을 지향해야 한다.

세계 최초의 박람회는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프랑스 파리에서는 세계 최초의 백화점 몽마르쉐가 개점한다. 같은 시기에 인간의 욕망은 규격화되고 체계화되었다. 산업 내에서 거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형태를 찾은 이 두 가지 포맷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로부터 165년이 지났다. 산업박람회가 위기란다. 이는 미디어의 위기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굳이 전시행사에 오지 않더라도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대체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보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전시 콘텐츠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많아서 생긴 문제다.

전시회도 하나의 플랫폼이다. 정보가 연결되지 않던 시대에 정보를 압축적이고 집중적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이점을 가졌다. 모든 정보가 연결된 시대에는 그 역할이 바뀔 수 밖에. 정보를 체계화시켜 탐색의 기회비용을 줄여줌으로 값어치가 생겼던 게 박람회인데, 지금과 같은 시대에 고민없이 부스 수백개 때려박고 수금하는 박람회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산업의 관성에 의해 몇 년간 더 현상유지하더라도 한순간에 전환점을 맞을 것이다.

전시회는 더욱이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한계도 가진다. 이런 한계점은 다른 플레이어들에 의해 개선되어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으로 분과될 것이다. 공급자 중심적인 접근법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단점을 극복하거나 보완할 것이 아니라 더욱 물리적이고 제한적인 시간에만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에 집중해야 한다.

미디어 혁신이랍시고 소개되는 사례들이 죄다 이런 식이다. 미디움에서는 7분짜리 글이 가장 많이 본다더라, 카드뉴스가 트래픽이 높다더라. 이번엔 동영상이 대세라더라. 이제껏 안 다루던 주제를 다뤘다더라. 페북에서 따봉을 쓸어담는다더라. 유튜브에서 조회수 찍고 돈 벌었다더라…. 표면적인 수치에 혈안이 되어 플랫폼의 알고리즘 변화에 우르르 몰려다닌다.

콘텐츠 형식을 바꾸는 것은 마치 초콜릿을 만드는 것과 같다. 초콜릿은 작은 블록으로 쪼개어 먹는다. 한 조각만 먹어도 행복함을 느끼며, 단기간 포만감을 준다. 지금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정보가 그렇다. 잘게 쪼개져 있고, 각각의 조각들이 극도의 단맛과 포만감을 준다.

초콜릿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온라인에서는 분노, 유머, 경이로운 콘텐츠가 압도적인 시선 장악을 이끈다. 이런 소재를 플랫폼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재편집해서 발행하면 흥행은 보장되어 있다. 기술적으로 어려울 게 없어서 진입장벽이 낮아 플레이어는 더 늘어난다. 이제껏 인류가 새로운 매체를 발견할 때마다 해왔던 매체 최적화 과정일 뿐이다. 중요한 건 이 흥행의 값어치다.

사람의 눈알 개수는 그대로인데, 정보의 개수는 수백 배 늘어난 것 같다. 인류의 정보 소비효율이 급속도로 늘었단 말인가?  한 사람이 소비하는 콘텐츠의 양이 수백 배까지 늘어났단 뜻일까? 그럴 리 없다. 콘텐츠를 작은 단위로 쪼개서 유통하고 있어서 많아 보일 뿐이지, 전체 소비 텍스트의 양, 시간은 늘어나지 않았다. 미터자로 재던 것을 센치미터자로 재고 있을 뿐이다.

탄수화물을 섭취하기 어려웠던 인간은 단맛을 좋아하는 DNA를 몸속에 심어 놓았다. 생존에 도움이 되던 이 DNA가 풍요로운 현대에서는 비만과 성인병이라는 부작용을 유발한다. 인간의 행복 추구도 과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을 외부에서 투입시키면 중독이 심각하고 건강에도 나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마약으로 구분해 금지시킨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초콜릿 콘텐츠를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마구 퍼주는 게 올바른 일일까? 이런 무책임한 태도를 ‘독자 최우선’이라고 포장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만큼 사회에 나쁜 영향도 없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곧 권력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오해이자 오만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전파의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여, 그 책임의 무게를 잊지 말자.

미디어는 인간 감각기관의 확장이라 했다. 인간의 세상을 인지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기술적인 제약사항도 많으니 이를 미디어를 통해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행하는 초콜릿 콘텐츠들은 인간 감각기관의 확장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미디어들의 겉치레 혁신이 인류를 오히려 퇴보로 이끌고 있다.

언론사의 사업부와 편집부는 수익사업의 정당성을 두고 종종 싸운다. 한 조직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인데, 그 돈으로 월급 받는 기자들에겐 왜 비난받을까? 저널리즘 추구와 수익사업은 언론사라는 조직 안에서 공존할 수 없는 가치여서일까?

저널리즘이 정신이라면 언론사는 기업형태의 육신에 해당한다. 여느 기업처럼 언론사는 수익창출과 성장을 목표로 하기에 저널리즘의 목표를 저해하고, 저널리즘은 기업의 형태를 빌려야만 존재할 수 있기에 비난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으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한 언론인은 이 상충하는 두 가치를 모두 잡기 위해 ‘적절한 수준의 타락’이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어떤 타락들이 있는지, 어느 정도가 허용 가능한 수준인지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 언론 상품 1 – 콘텐츠 제작능력을 판매

올봄, 한국일보에서 기업을 대상으로 카드뉴스를 제작해주겠다는 제안서가 유출되어 논란이 일었다. 제작과정, 비용, 발행의 성과까지 꼼꼼하게 적힌 제안서를 보니 언론사가 아닌 마케팅 대행사에서 만들어진 느낌까지 들었다. (관련 내용)

언론사 사이에서 이 사건으로 인해 비난과 사과가 오갔다. 이내 윤리적인 선을 넘었는지 말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커졌다. 사실 언론사들의 비난 뒤에 숨겨진 속뜻은 “이런 상품을 염치없게 공식화시키면 어떡하냐”일지도 모른다.

언론사가 비용을 받고 콘텐츠를 제작해주는 상품은 최근에 발명된 것이 아니다. 잡지 바닥에서는 이를 애드버토리얼이라 부르고, 온라인 언론사들은 네이티브애드라 부른다. 카드뉴스를 만들어준다는 제안 또한 새로운 채널에 형식을 최적화시켰을 뿐, 돈 받고 콘텐츠를 만들어준다는 개념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 언론사가 보유하고 있는 핵심 인적 자원인 콘텐츠 제작능력을 판매하는 고전적인 대행 상품이다.

올해 초부터 언론사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저널리즘의 정의는 이제 독립성이 아닌 투명성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기업과 거래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투명하게 밝힐 것이니 나쁘게 보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 언론 상품 2 – 공신력 판매

비슷한 시기에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홍보대행사의 영업 메일이었다. 돈을 내면 언론사에 기사를 내보낼 수 있다며 친절한 가격표도 첨부했다. 조선일보는 35만 원, 동아와 중앙은 30만 원. (보기)

현직 기자에게 보여주니 자신의 회사 이름을 찾아내곤 “우리는 그저 순진한 기자들이네”라며 낯부끄러워했다. 언론인 지망생에게 보여주니 “썩은 줄 알았지만, 이 정도로 썩은 줄은 몰랐다”며 언론고시 때려치우고 적당히 취업이나 하겠단다.

‘언론에 기사를 낸다’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언론-홍보계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오프라인 매체라면 ‘기사를 낸다’는 곧 발행을 뜻했지만, 온라인에서는 발행과 게시는 별개 행위다. 게시 상태의 콘텐츠를 온라인에선 무제한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데, 온라인 게시판에 글 쓰는 것과 개념적으로 다른 게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세대의 언론광고상품인 지면광고가 채널 영향력을 파는 것이었다면, 이 상품은 매체의 공신력을 파는 것이다.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린 뒤, URL을 광고주에게 보내주면 장사 끝난다. “OO일보가 우리를 알아 봐주고 기사를 다 써줬네~”라고 광고주가 능청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 자료를 제공하는 비공식적 사기행각이다.

온라인에서의 발행은 제휴 된 포털에 띄우거나 보유 SNS에 포스팅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또는 자체 웹사이트의 메인화면이나 다른 기사를 보는 독자들에게 연관콘텐츠라며 간접 노출이라도 시켜줘야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상품으로 판매한 기사는 어떤 발행의 노력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을 받고 게시했지만, 발행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사의 공신력을 돈과 바꿈으로써 생긴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면책사유가 된다.

 

  • 언론 상품 3 – 브로커를 통한 음성적 거래

정상적인 방법으로 언론에 홍보하고자 하는 기업의 홍보담당자나 홍보회사도 있지만, 비공식적이고 음성적인 방법으로 언론사와의 연결을 중재하는 브로커도 있다.

어떤 브로커가 한 식당 사장님에게 3,000만 원을 받고 유명 일간지에 특집기사가 실리도록 작업했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한 브로커는 1,000만 원을 주면 주요 일간지 셋 중에 적어도 한 곳에는 1면에 나갈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제안했다. 나가는 것을 100% 보장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보겠으니 나의 실력을 믿어달라고 말하는 투가 왠지 께름칙했다.

그 막대한 기사 발행 비용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짐작하건대 언론사의 공식수입으로 잡히진 않았을 것이다. 사측에서 이 사실을 알면 화들짝 놀라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발행을 허락한 편집장을 문책하고 징계할 것이다.

받아먹은 돈은 회사에 토해내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러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기업의 홍보비를, 브로커가 삥뜯어서, 편집장과 나눠 가진 것을, 다시 회사에서 삥뜬는 꼴이 아닌가? 그렇다고 받은 돈을 퍼뜩 돌려주라고 할 수도 없다. 언론사의 체면이 뭐가 되나? 이미 기사는 발행되어 채널 영향력과 공신력을 다 퍼줬는데, 돈까지 돌려주면 자진해서 호구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브로커를 통한 음성적 거래는 부정청탁관계로 콘텐츠를 발행한 것과 돈도 못 받고 핵심역량을 뺏겼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언론으로서 통제능력을 강도당했다는 점이다.

시대가 바뀌면 많은 것이 변한다. 콘텐츠형식, 유통채널, 사업전략, 업무방식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언론사에 주어진 게이트키핑의 역할과 책임이다. 브로커에게 이용당한 언론사는 게이트키핑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브로커에게 이용당했다고 언론사가 피해자가 되는 게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어떤 소식을 발행할지 말지를 통제해야 하는 게이트키퍼의 책임을 가진 언론사가 그 책임을 직무유기했기에 일어난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브로커가 아니라, 브로커가 판치도록 방조한 언론사들이란 말이다. 파리를 쫓을 게 아니라 개똥을 치워야 한다.

 

  • 음성적 거래의 양성화

기업과 언론이 맺고 있는 깊은 유착관계에 대해 나는 경험해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기업의 홍보팀에는 언론사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예산이 별도로 책정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국가가 나서서 이런 음성적인 거래를 제재하기 시작했다. 청탁금지법에 언론인이 대상으로 지정된 것은 밥값을 규제하는 게 아니라,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게이트키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을 규제하겠다는 뜻이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 했으니, 언론이 이에 대해 도덕적으로 자각하는 수준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성 언론사의 수익사업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분들은 내가 미디어사업을 시작했다고 하자, 역사는 골프장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하나같이 음성적인 거래의 필요성을 충고한 것이다. 언론사가 지금까지 양성화된 수익사업인 후원이나 구독료로는 충분히 돈을 벌지 못했단다. 협박, 뒷거래, 명분팔이, 여론유도와 같은 음성적인 방법으로 수익을 내는 게 보통이었다고 그들은 충고했다.

음성적 거래를 해오던 습관은 결국 언론사의 미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양성화된 수익사업을 확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음성적인 거래를 양성화시키는 타락 과정에서 ‘적절한 수준’을 찾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일까?

윤리적인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다. 사업부를 속물취급하며 비판하던 편집부마저도, 기자는 밥 좀 얻어먹어도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모순되는 상황 같다.

언론사의 어떤 수익사업도 저널리즘-수익창출의 모순되는 상호대립가치 사이에서 겪어야 할 괴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게이트키핑의 책임까지 저버려선 안 될 것이다. 저널리즘은 곧 정신이고, 그 정신은 언론사라는 기업 형태의 육신에 담겨 존재한다. 하지만 기업의 생존만을 위해 게이트키핑의 책임까지 저버리게 되는 순간, 그 육신에는 올바른 정신을 담아둘 수 없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끊이지 않는 발걸음, 이슈의 발원지가 되었다는 자부심, 독자들의 감사인사, 사람들이 알아봐 줄 때의 콧대등등함, 발행인으로서 느끼는 사회적인 책임감, 사업화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미한 희망

작은 규모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는 사람, 대형 언론사에 근무하는 사람 모두 느껴봤을 공통적인 감정들이다. 이 감정들 때문에 밤도 새서 조사하고 연구하고 발로 뛰어 글을 쓴다. 하지만 밥을 벌어먹지 못하면 이 모든 감정과 노력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해진다. 미디어로 밥값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전환이다. 전환transition을 일으키지 못하면 미디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미디어와 콘텐츠 자체가 목적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광고를 수익사업으로 삼는 미디어는 철저한 수단이고, 좋은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전환을 일으키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 AARRR

전환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AARRR에 대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이 기준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낯설게 들리지만, 오프라인 매장에 비유를 들어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개념이다. 온라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고객 접점을 대입해볼 수 있다.

Acquisition은 최초노출에 해당한다. 오프라인 매장에 비유하면 손님이 간판을 본 순간이다.
간판을 본 사람 중에서 몇 명이나 상점으로 들어왔는가? 상점으로 들어온 사람을 Activation이라 한다.
그 손님이 또 방문했다? 매장에 관심 있는 물건이 있는지 이것저것 뒤져보면 Retention이다.
상품을 고르고 지갑을 열었다. 돈을 내면 드디어 Revenue가 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손님이 주변 사람도 데리고 다시 방문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입소문을 내준다. Referral이다.

매 단계를 온라인에 대입해도 맞아 떨어진다. 각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 시점마다 일부분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간다. 이 과정은 선형적이고 이후 단계가 전 단계보다 커질 수는 없으므로 깔때기funnel이라고도 부른다. 다음 단계로 전환시킬 때 이탈하는 사람을 최소화하고, 전환되는 비중을 최대한 높이는 게 관건이다.

 

  • 허무지표

“월간 100만 PV를 기록Acquisition”, “누적 회원 수가 30만 명Activation”, “재방문 비율이 50%Retention”라는 소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위의 숫자들이 얼마로 바뀌건 간에 특별한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달성해도 내 인생에(우리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목표를 허무 지표라 한다. 앞의 세 수치는 허무 지표다.

각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얼마나 전환되는지는 조금 중요하다.
Acquisition에서 Activation으로 상당수의 %가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면 귀를 한 번 기울일 만하다. Activation에서 Retention으로 상당수의 %가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면 눈길을 한 번 줄 만하다. 하지만 세 번째 단계인 Retention까지 왔다 하더라도 수고했다고 칭찬하긴 이르다. 간판도 많이 노출되고, 매장도 붐비고, 재방문자도 많지만, 정작 물건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서비스의 성장 가능성은 시간대로 성장하는 허무지표가 아니라, 단계별로 전환되는 %의 성장에 있다. 전환의 %가 예측 가능하고 조절 가능하다면 Acquisition에 돈을 쏟아부었을 때, 깔때기 마지막에 나오는 수량이 얼마나 될지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깔때기 중간이 꽉 막혀있는 상황이라면? Acquisition에 들어가는 비용은 목적 없는 지출이 된다.

정작 중요한 4번째 수익화 계획Revenue이 없으면 앞의 수치들은 전혀 의미 없다. ARPU Average Revenue Per User 또는 ARPPU Average Revenue Per Paying User 가 의미 있는 지표들이 된다.

나 또한 그랬고, 많은 언론사가 허무지표만을 목표로 삼았다. 왜 이토록 중요한 전환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까? 내부에 수익전략Revenue이 없기 때문이다.

 

  • 전환 빌려주기 = 광고

전통적으로 언론사는 자체적인 판매 상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지 않다. 자체적으로 수익전략을 가지기보다는 수익전략을 가진 외부 파트너를 도와주는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외부 파트너를 도와주기 위해 미디어 트래픽을 빌려주는 것을 광고라 한다. 트래픽을 빌려주는 단계에서도 전환이 일어나는데 내부적으로 전환을 일으킬 때보다 외부로 전환을 빌려줄 때, 대체로 전환율이 낮다.

언론사의 관점에서 Acquisition을 빌려주는 것을 광고시장에서는 CPI Cost Per Impression이라 부른다. 언론사의 관점에서 Activation을 빌려주는 것을 광고시장에서는 CPC Cost Per Click이라 부른다. AcquisitionActivation은 직접적인 Revenue로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광고 효율이 불확실하다. Acquisition만으로 광고효과가 나던 시대에는 광고주가 KBS건물에 두 바퀴를 돌아 줄을 섰다는 전설이 내려 전해진다. 하지만 콘텐츠 과잉시대에 접어든 이상, 그런 시대가 다시 오길 기대할 수 없다.

언론사가 내부적으로 수익전략이 있었다면 Revenue에 직결되는 전환전략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그런 전환전략이 있었다면 외부에 빌려줄 때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사는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외부에서 요청하는 AcquisitionActivation만 빌려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광고주도 AcquisitionActivation만 빌리는 데 높은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 외부의 요구에 따라 전환을 빌려주니 실제 트래픽 보유 가치보다 평가절하해서 팔 수밖에. 이제 시장가격을 광고주가 정한다.

온라인 광고시장은 언론사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한국의 웹사이트 중 트래픽 상위 50개 중에서 언론사는 3곳이다. (22동아, 30조선, 40중앙) 반면 커뮤니티 사이트는 8곳이다. (14디씨, 15SLR, 17일베, 25베스티즈, 29인벤, 33오유, 34뽐뿌, 37인스티즈) 연봉 5,000만원의 엘리트 기자가 쓴 기사와 커뮤니티에 자발적으로 올라온 콘텐츠가 동점으로 평가되니 콘텐츠 생산 비용에서 큰 손실을 본다.

 

  • 전환은 전략이 아닌 태도

세상에는 세 가지의 거짓말이 있다고 한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통계. 이 중에서 통계가 가장 나쁜 이유는 스스로마저 속이기 때문이다. 동접자 수를 보며 뿌듯한 마음에 취해있던 나, 허무지표를 엑셀에 넣고 돌려 어떻게든 J커브를 산출했던 나, 데이터를 자신을 속이는 데 사용했던 나를 반성한다. 3달 전 나는 개별 계정으로 Google Analytics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시켰다. Google Analytics는 손실이라는 고통을 망각하게 해주는 진통제다. 페이스북 페이지 인사이트도 같은 놈이다.

“방문자와 회원 수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잖아요? 전환은 나중에 생각해도 되지 않나요?”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이 또한 틀린 생각이다. 전환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허무지표는 없애야 한다. 허무지표는 돈을 쓰면 나올 수밖에 없다. 공짜로 밥 주고 술 주는 이벤트를 매일 하는데 매장에 손님이 끊길 리 있겠는가?

뉴미디어라는 간판이 무슨 벼슬인지, Revenue전환의 전략도 의지도 없이 수백만의 다운로드와 억소리나는 허무지표를 성과라고 자랑스럽게 인포그래픽까지 만들어 공개하는 곳이 있다. 너도나도 뛰어드는 MCN사업자들도 마찬가지다. 직원은 200명인데 하루에 나오는 콘텐츠 수는 고작 20개란다. “버는 돈은 없는데 쓰는 돈은 많아요”라는 뜻인데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내뱉는 말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다들 좀… 취하신 것 같다.

 

허무지표를 집어치우고 Revenue를 위한 전환전략을 찾아내자. 전환을 자유자재로 드리블할 수 있는 기술을 내재화하자. DNA에 새기자.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함께 작업한 해외 미디어 동향 보고서가 나왔다. 셰프뉴스는 한 페이지 가량 소개되었다. 이메일로 문의왔던 당시 답변했던 내용을 이 곳에 기록으로 남긴다.

보고서 다운받기(169MB) : http://www.kpf.or.kr/downloadfile.jsp?num=6369&board_data_id=7824

 

정보전달발전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이전 세대의 기술은 매정하게도 세상에서 잊혀졌습니다. 봉화, 전령, 목판인쇄, 타공프린터, 모스부호, 흑백 TV, 모뎀 등 모두 잊혀졌습니다. 인류는 정보전달 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키고 있고, 불과 몇 년 전에 사용하던 전달기술들이 새로운 기술들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적인 환경 속에서 언론사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콘텐츠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반대의 의견을 내겠습니다. 기존 언론사들이 콘텐츠를 못 만들어서 위기가 왔나요?아닙니다. 지금의 위기는 전적으로 시대적인 현상이며, 언론사 외부의 환경적인 문제입니다. 내부에서는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콘텐츠가 아닌 역할입니다.

이전 세대까지 언론사가 하고 있던 역할은 수많은 대체재에 의해 대체되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남길 것이며, 다른 서비스에 의해 대체되어버린 분야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언론사들이 각자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시점일수록 업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현대적인 ‘언론사’의 범위를 넘어, 더 큰 범위를 아우를 수 있는 미디어의 본령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찾은 답은 결국 ‘중간자’, ‘매개자’, ‘연결자’, ‘전달자’입니다. 여전히 연결이 필요한 곳은 많이 있고, 새로운 기술로 그 연결을 더욱 효과적으로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4년 7월 셰프뉴스를 창업하기 전까지 IT스타트업 미디어 비석세스에서 3년 가까이 근무했습니다. 없던 IT산업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고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활성화되기 위해서 산업미디어가 필요하다. 산업미디어는 정보를 전달하고, 사람들의 연결을 도모한다.”라는 산업미디어의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이 맥락에서 외식산업은 미디어가 가장 필요한 산업입니다. 테크황무지에 가깝지요. IT기술을 아는 사람은 외식 산업을 이해하지 못해 매번 실패하고, 외식 산업에 속해있던 사람들은 기술을 이해하지 못해 실패합니다.

이 산업에는 총 25종 가량의 오프라인 매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온라인으로 넘어오려는 시도를 안 한 게 아닙니다. 매번 실패했고, 지금도 여러 시도들이 실패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도 많이 있겠지만 공급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외식 산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F&B(Food & Beverage)두 개로 구분하거나, HoReCa(Hotel & Restaurant & Café)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공급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소비자 중심적인 관점에서 매체를 기획하면 산업 종사자를 독자로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측정 가능한 외식업 종사자가 3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주방 근무자는 140만 명입니다. 이들이 볼만한 매체가 있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기존 언론은 “셰프에 관한 뉴스”만들 생각은 하지만, “셰프가 보는 뉴스”를 만들 생각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몇 년간 ‘버티컬 미디어’라는 어휘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소재를 버티컬하게 접근하면 보기엔 그럴싸한 미디어가 만들어지겠지만 역할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독자를 버티컬하게 설정하면 그들이 역할을 알려줄 것입니다. 구인구직서비스도 독자분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셰프뉴스가 지금까지 매체 영향력을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잘해서라기보다 독자의 특이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리사라는 독자는 다소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14시간씩 창문도 없는 주방에서 육체노동을 하지요. 잠시 담배를 피러 나와 휴대폰을 보는 게 유일한 세상과의 소통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취미, 특기, 진로가 모두 요리인 삼위일체형 직군입니다. 인생에 요리밖에 없다고 합니다. 다른 매체가 독자들과 가지는 약한 연결고리에 비교하면 훨씬 큰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는 두 가지로 구분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콘텐츠 생산자(Media as Contents Creator)이며, 또 다른 하나는 채널(Media as Channel)입니다. 콘텐츠를 돈 주고 사보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있으므로 미디어 운영의 목적은 채널을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콘텐츠는 목적이 아닌 철저한 수단이 됩니다.

채널로서의 미디어도 전환(transition)을 일으키지 못하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전환도 안 일어나는 채널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콘텐츠 생산부서는 애물단지 지출부서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셰프잡스에서 수익이 발생하기 전까지 셰프뉴스는 애물단지 지출부서에 해당하므로 1.2명의 최소 리소스만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중입니다. 셰프뉴스로부터 전환을 일으켜 셰프잡스에서 수익이 발생하면 셰프뉴스의 미디어 운영 비용을 충분히 회수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입니다. 셰프뉴스의 독자와 셰프잡스의 고객이 같으므로 전환 효율이 아주 높을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