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는 것이 삶이다. 만드는 과정이 삶이다. 만든 결과물은 아니다. 결과물은 영원하지 않다. 결과물이 세상에 선보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무가치 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만들던 과정은 값지다.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만들기 위한 노력과 시도가 가장 고상하고 고결한 가치를 가지는 일이다.

내 삶을 값지게 보내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고 노력하는 시간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부터 해야 한다. 무엇을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목적과 수단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하면 결과물은 만들어진다.

생각은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아니, 지배를 받는다.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생각을 지속해야 하고, 올바른 생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달에 꽤 대단한 것을 만든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멘탈이 반질반질한 사람” 마음의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 위한 생각, 올바른 생각으로 하루를 가득가득 채워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반질반질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그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하니 그 사람의 마음이 날 때부터 티가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서 인지는 모른다. 대체로 마음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만들 수 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불안, 비관, 불신, 비난, 부정, 염세, 허무의 마음이 없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긍정, 희망, 변화, 흥미, 발전, 개선, 칭찬, 격려, 감사, 만족, 자존의 마음이 넘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된다. 한양에만 도착한다면 불완전한 탈 것이어도 괜찮다. 애초에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것은 없다. 인생은 항해이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의 연속이다. 완전해 보이는 탈것이라도 시대가 변하면 불완전한 탈것이 된다. 탈것이 아닌 목적지를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

꾸준히 하는 것만큼 강한 것도 없다. 빠르게 하거나 똑똑하게 하는 것으로 단기간에 성과가 나올 순 있다. 하지만 꾸준함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있다. 그 영역에 도달하기위해서는 믿음이 굳건해야 한다.

믿음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희망을 연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중간에 확인해야 한다. 중간 확인 없이 지켜지는 믿음은 믿음보다는 맹신이다. 꾸준함이 아닌 미련함이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불신이나 회의적인 태도와는 다른 현명함이다.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는 눈이다. 현명하고 의심많은 사람의 믿음은 좀체 쉽게 생기지도 않지만 한 번 생기면 굳고 단단해서 여간 흔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믿는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내가 이해한 세상이 실제 세상의 모습에 가깝고, 내가 찾아낸 공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는 선하고 이로운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는다.

모두 내던져진 사람들이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는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세상으로 내던지기를 반복하며 세상은 이렇게 내던져진 존재들로 벅적댄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놈들도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지만 같이 달리기나 할까? 뛰고나면 상쾌하거든. 같이 동물원 갈래? 대뜸 기린이 보고싶네. 아 조개구이 먹고싶다. 재미도 있고 맛도 있고 운치도 있는 조개구이. 우리 회사에 있는 인간 말종새끼 뒷담화 좀 들어줄래?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몰라도 된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안다고 해서 남은 인생 달라질 것 없다. 모른다고 해서 남은 인생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답도 없는 이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 각자의 인생이 갈피를 잡는다.

생은 어느 순간 강제로 종료된다. 나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이 종료된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깨달음으로 이 질문 자체가 내 삶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영문도 모른채 시작되어버린 이 삶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달리기가 개꿀맛. 달리고나서 먹은 밥도 개꿀맛. 이제 누워서 개꿀잠. 자기 전에 롤토체스 한 판 해야딩 히히

2010년의 생각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서 드디어 해방

가슴 뛰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온 삶을 소명에 향하도록 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그 시작은 너무나 강렬하고 확실한 성공의 기세이기 때문에 발동시키기만 하면 그 끝엔 풍족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과정 또한 가슴 뛰며 매일이 즐거울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부터 그 상태가 되겠다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발동되지 않는다. 내 의식이 그렇게 단순하게 이뤄져 있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에 울림이 있어야 한다. 그 보다 깊은 아랫배에서 욱하고 올라와야 한다. 잠재의식에서도 갈망하면 자는 중에도 그것을 원하고 궁리하게 된다. 잠결에 해법을 생각해낼 정도로 그것을 열망해야 한다. 그것을 열망해야 한다. 열망해야 한다. 열망. 그렇다. 열망.

나는 열망하는 방법을 잊었다. 무엇을 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런 것인 줄로 알았다. 하고 싶은 것은 참고, 갖고 싶은 것은 미루고, 내 욕망보다는 상대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어른만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이고 지켜야 할 품위로 배웠다. 그렇게 나를 훈련시켰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책임과 의무 밖에 없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아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머리로만 생각한들 내면에서 반응이 전혀 생길 리 없었다.

 

◾열망하는 법을 되찾자. 마음이 가는 곳이 무엇이라도 있다면 그대로 직진해보자.

◾ 마음을 드러내보자. 마음을 글로 말로 표현해보자. 더 많은 사람에게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그대로 드러내보자.

◾ 마음을 다스려보자. Mind Routine을 통해 건강한 마음을 갖자. 긍정희망-마음이 열정-행동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행동이 의식을 만들기도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자.

다시 만들자. 만들기를 계속 하자. 의식을 깨워두자.

언젠가부터 나를 만들지 않고 있다. 성장하지 않고 있다. 능력이 계발되지 않고 있다. 근 몇 년간 집중력을 잃었다. 나는 집중력과 문제해결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최소 1년 반 정도는 이 능력들이 제대로 활용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 잘난 능력도 퇴화하고 있을 것이다.

매체가 많아졌고 받아들이는 정보도 많아졌다. 수동적인 정보소비 환경에 놓이자 나는 정보의 소비자가 되었다. 외부자극-반응기계가 되었다. 능동적으로 정보를 탐색하는 방법은 잃어버렸다. 피드에 줄지어 소비되길 기다리는 정보들을 소비하고 반응할 뿐이었다. 주체성을 잃었다. 주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소비습관만이 아니다.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일과 사건에 대해 그저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기계일 뿐이다.

기계나 동물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동물과 인간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생물학적으로 별 다를 게 없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 또한 정도의 차이일 뿐 명확한 기준이 없다. 주체성. 주체성을 구분 기준으로 놓는다면 명확해진다. 현대 인류의 대부분 9할 이상이 동물로 분류될 것이다. 그렇다 나도 인간이었다가 짐승이었다가를 반복한다. 짐승의 상태로부터 벗어나자. 인간의 상태를 추구하자. 의식을 깨어두자.

내가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냈을 때에는 모두 각성상태에서 이뤄졌다. 모든 감각이 깨어있는 상태,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Stay Awake도 한참이나 잊고 살았다.

성과는 행동의 결과다. 행동은 생각의 결과다. 생각은 태도의 결과다. 태도는 감정의 결과다. 감정이라는 것을 쉽게 여길 수 없다. 주체성이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감정에 지배를 당한다. 감정이 무너지면 태도가 올바르지 않고, 태도가 올바르지 않으면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무감만 부여하니 실행될 리 만무하다. 그런 속이 텅 빈 실행은 에너지도 없을뿐더러 성과가 날 리 없다.

모멘텀을 왜 잃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분명 어떤 계기나 사건이 있었겠지.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수십 혹은 수백 가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비겁한 자가 된다. 설령 원인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내 삶이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 외부의 원인에 의해 반응하는 기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좋은 원인이 있을 때 좋은 결과가 되고, 나쁜 원인이 있을 때 나쁜 결과가 된다면 나는 그 인과관계에서 무엇을 했는가? 자유의지는 있었는가? 주체성은 있었는가? 그것은 짐승의 상태인가 인간의 상태였는가? 중요한 것은 원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원인이 되는 것.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곧 나 스스로가 사건이 되고, 계기가 되려는 태도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원인이다. 내가 계기다. 나의 태도, 나의 생각, 나의 행동, 나의 성과를 통해 세상은 반응한다. 내가 원인이다.

성인이 된 직후, 난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다. 내 몸속에 그와 관련된 것이 있다면 다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도 모자라 주변 사람들의 믿음마저 틀렸다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신론자라는 타이틀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신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의 무신無神이긴 하지만, 신이 있건 말건 무신 상관이냐는 무신無信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여 반신反神론자나 불신不信론자로 불러 달라 했다.

그리곤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논리를 챙겨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세계관을 선택하는 것인 줄로 알았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나는 당연히 과학의 편에 서야 한다고 믿었다. 과학은 세상의 거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만, 종교의 관점으로는 모순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게 나의 근거였다.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다르니, 종교인과의 세상 이해 방법에 대한 논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된 적이 없다. 나도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 외엔 별 목적도 없었다. 내뱉은 이야기가 서로의 고막까진 닿았을까? 주워들었던 논증을 더듬거리며 끄집어낼 뿐이었다.

 

난 오래 지나지 않아 반신론자가 아닌 불가지론不可知論자가 되기로 했다. 겸손해졌다기보다는 허무함이 들어서였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말을 함으로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없기에 침묵해야 했다. 세상의 방대함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 하찮은 존재였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하찮은 나 따위가 감히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내가 가졌던 믿음에 대해서도 의심해보았다. 아구가 좀 잘 맞아 떨어졌을 뿐이지, 과학 또한 상당 부분 가설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세상은 제한적임에도, 그마저도 불확실한 감각기관에 의존해 읽어 들이고 있었다. 세계관에 대한 고집은 자연스럽게 꺾였다.

난 검증되지 않은 것을 추종했고 맹신해왔다. 종교를 극복한 게 아니었다. 과학과 이성을 그 대상으로 택해 종교 삼은 것이었다. 타인을 비방하는 데 바빴던 나는 정작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삶에 대한 성찰이나 감사함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내가 비방하던 이들보다 나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생긴 신념의 공백 상태는 다행히도 금세 다시 채워졌다. 먼저 살다간 분들이 샘플 삼을만한 신념을 책에 많이 남겨둔 덕이다. 적극적으로 복제하기도 하고 나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신념은 다시 내뱉기도 하면서. 그리고 깨달았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살아갈 태도라는 것을.

 

핸들을 잡지 않은 인생은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다. 결국 내가 잡아야 할 핸들이지만, 가끔 겁이 난다. 핸들을 잡으면 피곤해도 졸 수 없고, 신경 써야 하는 게 어찌 그리 많은지. 주행 경험도 없을뿐더러, 사고가 났을 때의 책임을 생각하면 사는 게 너무 버겁다.

신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주변에서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주워 담기도 한다. 내가 과학을 기반으로 한 atheist의 논리를 주워 담았던 것처럼.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부모, 선배, 친구, 소속된 사회에 제 핸들을 떠넘긴다.

나약해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가 내 인생의 핸들을 잡아주길 바라는 것. 나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는 것. 책임을 떠넘기면 당장은 홀가분하지만 이내 손해 보는 장사라는 것을 깨닫는다. 책임과 권한은 언제나 쌍으로 붙어 다니기에 권한도 함께 넘어간 탓이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내 삶의 통제권을 타인에게 이양하는 셈이다.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든 치열한 시대에, 핸들을 선뜻 잡아주겠다고 나타난 사람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독재자의 야욕, 자본의 탐식, 절제 없는 욕망 따위의 것들이 아니고서야 타인의 핸들에 관심 가질리 없다. 한 번 타인에게 넘긴 핸들은 다시 되찾아오기가 어렵다. 권한도 책임도 없는 평안한 상태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다.

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삶의 통제권과 책임을 모두 내가 쥐게 된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겁도 났다. 이제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 사고를 고용주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역시나 무겁다. 그런데 묘하게 안정감이 든다.

그러니까네, 사람은 사람의 한계를 규정짓는다 이거지. 한계를 이미 규정지어 놓은 인간이 어떻게 그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겠냔 말이지.

자신의 한계를 이미 규정해 놓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뭐냐면, 그 한계보다 뛰어난 사람은 사람으로 안보고 신과 같은 존재로 취급해버리고 마는거지. 자신도 그렇게 뛰어날 수가 있는데. 더 열심히 할수도 있고 더 많은 발전을 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러니까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쉽게 예를 들어가꼬, 자 보제이.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한계, 그기 뭐이꼬. 내가 생각할땐 일주일에 20시간 공부다. 20학점 듣는게 학교에서 최고로 많이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학점 수준이거든. 그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일주일에 20시간 공부라고 그어 뿌는기다.

일주일에 씨바 시간이 얼마나 많노 24*7은 얼마고 일주일에 148시간 아니가. 그 중에 묵고 자고 빼도 80시간은 안남나. 그서 영화보고 친구 만나도 40시간은 안되나. 왜 공부 못하는데 40시간 동안. 아니 씨바 진짜 마음먹고 공부할라치면 영화안보고 친구 안만나면 일주일에 80시간 공부 안되겠냐 이말이다.

근데 아무도 그래 안한다. 20시간이 한계다. 20시간 공부하고 나면 너나 나나 다 퍼져가지고 일어나도 못한다. 이래가 되긋나.

그런놈들이 대학졸업하고 나면 일주일에 40시간 일하는거 존내 힘들어한다. 노동자 인권보장인가 뭔가 들먹거리 가믄서 최대근무시간 계속 낮추고 있제, 그게 또 사람의 한계를 규정하는기라. 일주일에 40시간 넘게 일하는 놈은 신이라 신. 미친 일중독자로 취급하는기라. 내보다 50살 밖에 안많은 우리 할아버지도 하루종일 밭에 나가고 논에 나가서 농사짓고 일했는데 인간의 한계가 50년만에 딱 절반으로 줄어뿟다. 일안하고 공부안하면 딱히 할것도 없는 놈들이 꼭 딱 그만치만 할라고 졸라 떠들어 댄다이.

진짜 할라고 마음있는놈은 안시키도 다 하고 하지말래캐도 더 한다칸다.

지가 지 발에 족쇄 채우고, 지가 지 손에 수갑 채우는 기다.

근데 암만 남이 머라 해봐야, 그 한계 못 무너뜨린다. 지가 알아야 된다. 근데 니 그거 아나, 코끼리 어째 길들이는지. 코끼리를 어릴때 새끼때부터 발에다 족쇄를 채아가 나뭇기둥에다 묶어놓거든, 그럼 처음에는 벗어날라고 지랄 염병을 틀다가도 몇일 지나고 나면 족쇄가 차였을 때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돼. 그 다음부터는 나뭇기둥 자체가 필요없다. 족쇄만 채워 놓으면 꼼짝 안하고 얌전해진다. 도망 절때 안간다. 다 커서 성인코끼리 되제. 몸무게 한 5톤 이래 나가제. 그래도 족쇄 채우면 도망 못가는 줄로 안다.

그렇게 한계 근처에도 안가본 새끼들이 계속 안된다 안된다 해대라. 그게 진짜 안되는기다. 그게 그냥 금마들의 한곈기다.

얼마 전에는 쓰촨성 지진이 일어나면서 3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진은 남아시아 대륙판이 유라시아 대륙판을 밀어 올려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은 대륙이동설을 알고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위치도 알고 있었음에도 대비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진이 일어나기 몇 일전 개구리들이 힌트를 줬다고 한다. 쓰촨성 부근에 있는 모든 개구리가 튀어나와 온 도로를 덮었고 차에 밟히면서도 어디론가 황급히 이동하였다는데, 동물들은 이런 본능이 있어 지진을 알아채고 대피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진이 일어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지진이었기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에겐 애석하지만 하늘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 인간의 무지는 무척 슬픈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은 재앙이 너무나 많은 나라라서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면 큰 이슈거리도 되지 않는다. 매번 일어나는 일본의 대지진은 일본의 건축력을 발달시켜 주었다. 우리나라 또한 매년 여름에 태풍은 찾아오는 것이라 당연히 여기고 철저한 대비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났다며 불평하는 일이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홍수가 들일이 없는 높은 곳에 집을 짓고 바람이 불면 덤덤하게 테이프를 창문에 바른다. 그리곤 어떤 영화를 보며 태풍을 보낼지를 고민한다. 반면 미련한 사람들은 TV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에 호들갑을 떤다. 100년만의 폭설이니 50년만의 대지진, 30년만의 무더위라는 등등 말이다. 어떤 이들은 지구가 멸망할거라며 마당에 소금을 뿌리고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

오늘날 환경운동가들은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이산화탄소량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데, 사실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져서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온도가 높아져서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는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가 따뜻해지는 것은 인간의 탓이 아닌 지구의 운명에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가 따뜻해지면 바다가 넓어져서 땅이 잠기기는 하겠지만 따뜻하고 비옥한 토지도 늘어나 풍요로워 질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은 물에 잠기는 땅만을 강조하며 객관적이지 못한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환경운동가들은 과학적이지 못하고 객관적이지 못하며 감정적이다. 그런 환경운동가들에게 모든 자연현상은 불안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오늘도 내일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게 된다. 100년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고 200년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니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마땅하다. 빙하기가 있었던 적도 있는데 조금 춥다고 난리를 쳐서야 되겠는가? 사실 지구의 10억년 역사동안 이렇게 평화롭고 안정적인 적도 없었을 건데 말이다.

우린 이런 당연한 일들에 대해서 실망도 하고 분노도 치밀었다가 좌절하기도 한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믹스가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 하루에 열쇠를 두 번씩 잃어버렸다가 두 번을 찾아낸다. 열쇠가 어디론가 숨어서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사실 지갑은 무생물이라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열쇠가 어디론가 숨어있어 내가 화가 난 것은 맞지만, 나의 화를 돋우기 위해 열쇠가 숨바꼭질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잠금장치를 전자식으로 바꾸어 열쇠가 필요 없어졌다. 문명의 발달은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나의 분노를 줄여주었다. 문명의 혜택에 감사를 느낀다.

이와 같은 이치로 태풍 또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곯려주려는 속셈은 없다. 단순한 에너지의 순환일 뿐이다. 쓰촨성 아래의 땅덩이가 제 위에 사람들이 버글거리니 귀찮아서 몸부림을 친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진동이 이는데 마침 사람이 그 위에 살림을 꾸린 것이다.

인간은 이를 잘 이해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녀야 마땅하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와 전통, 문화를 너무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미련을 가진다. 본인이 자신의 발에 족쇄를 채웠다면 그에 따른 피해가 생겼을 땐 스스로 책임져야 마땅하겠다.

한 사람의 인생은 주사위놀이보다는 장기판에 가깝다. 포가 왜 하나를 건너뛰어야만 이동할 수 있고 차는 왜 수직으로밖에 못 움직이는 지에 대해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이 너무나 당연한 룰에 대해 불평을 하게 될 경우 인간은 불행해지게 된다. 세네카는 장기판의 룰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 항의 없이 최후의 장군을 받아들였다. 장기판 위에서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수들이 존재한다. 예측하지 못한 수를 통해 자신의 말이 먹히게 된다면 슬프고 억울하여도 받아들여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대처할 수가 있고 또 말이 먹히더라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장기를 잘 두는 고수처럼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최악의 수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