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박 시간

쥐새끼도 코끼리도 모두 평생 15억 번의 심장이 뛴다. 작은 설치류는 빠르게 뛰는 심장 덕에 2년 만에 이 숫자에 도달하고, 느리게 뛰는 심장을 가진 코끼리는 60년을 살아간다. 작으면 대사율이 높아서 빠르게 뛰고, 크면 대사율이 낮으니 느리게 뛴다.

인간은?

인간은 80년 동안 30억 회 정도 뛴다. 하지만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면 절반 정도인 40년만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15억 회다. 그렇다. 심장이 15억 회 뛰면 죽는 것이 생명의 숙명이고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새로운 수명 계산법이다. 태어난 날로부터 몇 년 며칠을 살았는지 세는 것이 일반적 셈법이지만, 나는 거꾸로 계산하는 편이 더 멋진 방식이라고 생각해 왔다. 80년을 산다 치고 40년 남았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D-40살. (이러나저러나 40살이긴 하지만.)

시대를 잘 타고나서 1+1 생명 하나 더 얻은 셈이다. 15억 번 뛰었는데 15억 번 더 뛸 수 있다. 남은 15억 번은 하루에 10만 800회씩 차감. 매년 생일마다 3,679만 회씩 차감. 서서히 다가오는 필연적 사건을 매 순간 직시하게 된다.

 

나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국가에 7,358만 번의 심장박동을 바쳤다. 아침마다 구보, 일과 중엔 노동을 강요받았으니 9천만 번 이상의 심박을 뺏겼을 것이다.
대학에선 1억 4,700만 번의 심박시간을 보내고 졸업장을 받아냈다.
백수선고식(졸업)이 다가오는 게 무서워 3,300만 번의 심박은 호주 땅 위에서 뛰게 했다. 그중 554만 번은 창문도 없는 주방 안에서 뛰었다.
팬데믹 시절, 840만 번의 심박시간동안 자전거에 올라타 전국을 쑤시고 다녔는데, 실제로는 1,200만 번 정도 뛰었을 것이다.

지하방에서 탈출해 옥탑방에 들어가며 파란 벽지로 벽을 꾸몄다. 달빛이 유난히 밝게 베개를 비추었던 그 방에서 내 심장은 2억 2천만 번 뛰었다.

 

시간은 돈이고, 돈이 곧 시간이다. 시간을 써서 돈을 벌고, 돈을 써서 다시 시간을 벌어내야 하는 경제체제 위에선 심박시간 또한 화폐단위로 치환될 수 있다.

하루에 10만 800회를 뛰게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빅맥 하나를 먹으면 심장은 2만 번 뛸 수 있다. 세트로 먹으면 4만 번.

헛뛴 심박도 많다.
후회와 자책으로 뛴 심장은 2,000만 번
타인의 탐욕에 통제권을 이양했던 심장 500만 번
타인을 증오하고 험담하느라 뛴 심장도 500만 번
아무렇게나 배설해대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500만 번의 심박이 헌납되었다.

옳게 뛴 심박은 더 많다.
땅 끝까지 파고들듯 악으로 깡으로 뛰었던 심장은 5천만 번
간절히 바라며 심혈을 기울이며 뛰었던 심장도 5천만 번
다람쥐 쫓는 개처럼 온전히 몰입했던 심장도 5천만 번

내 심장 제대로 뛰게 하겠다고 타인의 피눈물이 대가로 치러지기도 했다.
내 쓰레기를 받아내는 데에 또 다른 누군가의 500만 심박이 사용됐고
여기가 아닌가벼? 삽질하는 데 동료의 2,000만 심박시간도 낭비시켰다.

유용한 쓸모의 존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익히느라 꽤 많은 심박시간을 썼다. 쓸모를 갖췄고, 여생 동안 뛸 15억 회의 심박활동에 필요한 칼로리를 공급하는 데는 큰 차질이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

 

심장에 필요한 연료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하지만 화폐를 더 벌어도, 시간을 더 벌어도, 잔여 심박 횟수를 늘릴 수는 없다.

몇 회를 뛰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뛰었는지를 신경 쓰며 살아야 미련도 후회도 안 남겠다. 남은 심박은 조금 덜 유용한 쪽으로 뛰게 하는 게 좋겠다.

지금까지 1,920만 번의 심박시간을 써서 1,300편의 영화를 봤다.
블레어윗치에 안 놀란 심장 삽니다.
스타트렉에 안 설레본 심장 삽니다.
원스에 뭉클해 본 적 없는 심장 삽니다.

남들 잘 때 깨어 250만 번을 뛰었던 고요한 새벽의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첫 키스의 잔상은 70만 번의 심박시간동안 유지되었다.
사랑에 실패해 찢어지듯 뛰었던 심장은 300만 번
고향을 회상하며 아련하게 젖어들었던 심장은 800만 번

남은 15억 회는 카이로스적 심장박동으로 더 많이 채워지면 좋겠다.

 

누군가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던 건
내 심장이 3억 번째쯤 뛰고 있을 때였는데,
2억 번쯤 더 뛰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이 파악돼서
깊은 상심과 통탄에 빠져 혼자 몰래 울었던 기억이 있다.

심장박동이 멎었다는 소식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황망하기 그지없고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앞으로도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다.

가장 최근의 소식은 석 달 전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벌써 내 가슴 위에 올라와 골골대고 있었다.
그렇게 녀석의 심장과 내 심장은 190만 번과 100만 번씩 맞대어 뛰었다.

우리집 고양이는 심혈관계 유전병이 있어서 7억 번밖에 뛰지 못했다.
그마저도 분당 130번의 속도로 뛰었으니 내 심장이 3억 7천만 번 뛰는 시간밖에 살지 못했다.

 


50만 번의 심박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LLM과 계산놀이를 하다가
시계가 자정을 넘기더니 글이 이 모양이 되어버렸다.
이런 감상에 젖은 글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애초에 산출하려고 했던 재밌는 계산결과는 아래에 붙인다.

일평생 혈류 펌핑량 231,264,000 L
일평생 혈액 생성량 1,460 L
일평생 허파 호흡량 336,384,000 L
일평생 신장 여과량 4,20,4800 L
일평생 침샘 분비량 35,040 L
일평생 땀샘 분비량 23,360 L
일평생 섭취 음수량 58,400 L
일평생 소변 배출량 43,800 L
일평생 섭취 음식량 73,000 Kg
일평생 배변 배출량 4,380 Kg
일평생 손발톱 성장 33.6 m

방황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생긴다.

가슴 뛰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온 삶을 소명에 향하도록 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그 시작은 너무나 강렬하고 확실한 성공의 기세이기 때문에 발동시키기만 하면 그 끝엔 풍족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과정 또한 가슴 뛰며 매일이 즐거울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부터 그 상태가 되겠다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발동되지 않는다. 내 의식이 그렇게 단순하게 이뤄져 있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에 울림이 있어야 한다. 그 보다 깊은 아랫배에서 욱하고 올라와야 한다. 잠재의식에서도 갈망하면 자는 중에도 그것을 원하고 궁리하게 된다. 잠결에 해법을 생각해낼 정도로 그것을 열망해야 한다. 그것을 열망해야 한다. 열망해야 한다. 열망. 그렇다. 열망.

나는 열망하는 방법을 잊었다. 무엇을 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런 것인 줄로 알았다. 하고 싶은 것은 참고, 갖고 싶은 것은 미루고, 내 욕망보다는 상대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어른만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이고 지켜야 할 품위로 배웠다. 그렇게 나를 훈련시켰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책임과 의무 밖에 없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아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머리로만 생각한들 내면에서 반응이 전혀 생길 리 없었다.

 

◾열망하는 법을 되찾자. 마음이 가는 곳이 무엇이라도 있다면 그대로 직진해보자.

◾ 마음을 드러내보자. 마음을 글로 말로 표현해보자. 더 많은 사람에게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그대로 드러내보자.

◾ 마음을 다스려보자. Mind Routine을 통해 건강한 마음을 갖자. 긍정희망-마음이 열정-행동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행동이 의식을 만들기도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자.

쇠질

내 성격을 아는 사람들이 나에게 한 조언은 한결같았다. 그냥 적당히 시키는 것만, 남들만큼만 하라고 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다. 내 눈에 보이는 영역, 아니 조금 양보해서 내 손에 닿는 영역은 무조건 내 방식과 원칙대로 일이 돌아가야 했다. 어릴 때에도 새우깡 봉지를 세로로 찢거나 뒤집어서 뜯거나 뜯는 중에 삑사리가 나면 나는 나뒹굴며 통곡을 했고 그 새우깡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고 들었다.

성격을 바꾸려고도 노력해봤다. 하지만 예외를 용납하거나 원칙을 어기는 상황은 언제나 비극으로 귀결되었고, 그런 경험이 쌓일수록 원래 성격대로 일하게 되었다. 그렇게 원칙은 나날이 빡빡해졌고, 나는 보통 이상의 꼰대가 되어간다.

새우깡을 어떻게 뜯어야 잘 뜯는 것인지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에게 지적질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는 건 내게도 유쾌하지 않은 사건이다. 돈벌기 위해 하는 일에 유쾌하고 말고를 따질 건 아니지만. 부양할 가족, 자식, 와이프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지도 않고, 챙길 건 고양이 한 마리 뿐. 그래서인지 생계유지가 가능해진 시점 이후로는 일이 돈을 벌기 위한 행위가 아니게 된 것 같다. 일을 통해 자존감을 충족시키거나, 정체성을 찾으려 시도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못하면 남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수준의 낙담에 빠져 좌절한다는 걸 이번 계기로 알게 되었다.

관계의 지속가능성은 계산이 가능하다. 40점 이하는 서로 손해보는 거래, 40~60점은 죽지 못해 사는 사이, 60~80점은 윈윈 관계의 파트너십, 80점 이상은 환상의 콤비. 이렇게 숫자로 딱 짚어낼 수 있다. 후하게 줘도 60점을 넘기진 못할 것 같다는 계산이 나오자 난 결별을 준비했다.

이별의 순간은 말처럼 쉽진 않다. 지난 금요일부터 닷새를 누워 지냈다. 짜장면도 탕수육도 치킨도 시켜먹었다. 담배도 폈다. 동굴이다.

이젠 이 곳이 동굴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오래 걸리지 않아 동굴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게 된다는 것도 안다. 불안해하거나 미리 나오려고 해도 달라질 것 없다는 것도 안다. 나란 짐승은 일년에 열흘 정도는 동굴에서 시간을 보내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냥 그렇게 동굴에서 시간을 보내도록 스스로를 놓아두었다.

오늘은 동굴에서 나온 날이다. 몸무게가 2키로가 불었다. 일주일간 밀렸던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네 봉지 버렸고, 냉장고 청소를 했고, 대형폐기물 하나를 버렸고, 옷장의 규칙을 새로 만들었다. 하루 종일 집안일을 했고 새벽엔 쇠를 들었다.

다시 만들기 : 내가 원인(cause)이다 & Stay Awake

다시 만들자. 만들기를 계속 하자. 의식을 깨워두자.

언젠가부터 나를 만들지 않고 있다. 성장하지 않고 있다. 능력이 계발되지 않고 있다. 근 몇 년간 집중력을 잃었다. 나는 집중력과 문제해결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최소 1년 반 정도는 이 능력들이 제대로 활용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 잘난 능력도 퇴화하고 있을 것이다.

매체가 많아졌고 받아들이는 정보도 많아졌다. 수동적인 정보소비 환경에 놓이자 나는 정보의 소비자가 되었다. 외부자극-반응기계가 되었다. 능동적으로 정보를 탐색하는 방법은 잃어버렸다. 피드에 줄지어 소비되길 기다리는 정보들을 소비하고 반응할 뿐이었다. 주체성을 잃었다. 주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소비습관만이 아니다.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일과 사건에 대해 그저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기계일 뿐이다.

기계나 동물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동물과 인간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생물학적으로 별 다를 게 없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 또한 정도의 차이일 뿐 명확한 기준이 없다. 주체성. 주체성을 구분 기준으로 놓는다면 명확해진다. 현대 인류의 대부분 9할 이상이 동물로 분류될 것이다. 그렇다 나도 인간이었다가 짐승이었다가를 반복한다. 짐승의 상태로부터 벗어나자. 인간의 상태를 추구하자. 의식을 깨어두자.

내가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냈을 때에는 모두 각성상태에서 이뤄졌다. 모든 감각이 깨어있는 상태,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라는 Stay Awake도 한참이나 잊고 살았다.

성과는 행동의 결과다. 행동은 생각의 결과다. 생각은 태도의 결과다. 태도는 감정의 결과다. 감정이라는 것을 쉽게 여길 수 없다. 주체성이 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감정에 지배를 당한다. 감정이 무너지면 태도가 올바르지 않고, 태도가 올바르지 않으면 올바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무감만 부여하니 실행될 리 만무하다. 그런 속이 텅 빈 실행은 에너지도 없을뿐더러 성과가 날 리 없다.

모멘텀을 왜 잃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분명 어떤 계기나 사건이 있었겠지. 하지만 중요하지 않다.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수십 혹은 수백 가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원인을 찾으려고 하는 순간 비겁한 자가 된다. 설령 원인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내 삶이 변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생 외부의 원인에 의해 반응하는 기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좋은 원인이 있을 때 좋은 결과가 되고, 나쁜 원인이 있을 때 나쁜 결과가 된다면 나는 그 인과관계에서 무엇을 했는가? 자유의지는 있었는가? 주체성은 있었는가? 그것은 짐승의 상태인가 인간의 상태였는가? 중요한 것은 원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원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결과를 불러올 원인이 되는 것. 원인을 찾는다는 것은 곧 나 스스로가 사건이 되고, 계기가 되려는 태도가 사라졌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원인이다. 내가 계기다. 나의 태도, 나의 생각, 나의 행동, 나의 성과를 통해 세상은 반응한다. 내가 원인이다.

하노이 라이딩

하노이,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채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다 관두고 떠날 작정이었다. 그러니 하노이가 어떤 곳인지, 어디 붙어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뜬지 20분만에 결제는 완료되었다. 출국일을 사흘 앞두고야 그곳이 베트남의 수도라는 걸 알게 되었다.

혼자 떠나본 해외 여행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만족스러운 여행의 조건으로 도시의 매력도 중요하겠지만 여행자의 마음상태는 더욱 중요한 것 같다.
내 인생에 아무런 변화가 없던 지난 겨울은 참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내가 잔인할 정도로 가학적인 사람이란 것도 깨닫게 해주었다.
난 정체(停滯:발전없이 한자리에 머무는 상태)가 발견될 때마다 윽박지르고 채찍질하는 사람이었다. 이 방식은 좋은 방식이 아닐 뿐더러 좌절한 사람에겐 더욱이 부적절한 처방이다. 그걸 알면서도 난 습관을 고치지 않았다. 지난 겨울 난 정체했고 좌절에 빠졌다. 가학의 대상이 누군지 따지지않고 처방은 예외없이 이루어졌다. 이윽고 자기파괴가 시작되었다. 정체를 벗어나긴 더욱 어려워졌고 처방은 잔혹하게도 멈추지 않았다.
그 상태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난 미지의 도시에 몸을 던졌고 하노이는 날 품었다. 종일 걸었고 종일 구경했고 종일 멍때렸고 종일 스쿠터를 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마지막 날이다. 비가 왕창 내렸고 난 스쿠터를 타고 온 도시를 구석구석 조지고 다녔다.

20년 봄, 자기파괴로부터 벗어나게 해준 첫째가 하노이고 둘째는 자전거다. 하노이에서 돌아온 직후 나는 미친듯이 자전거를 탔다.
정체된 일과 커리어는 내버려두고 클릿을 꽂았다. 반백수의 상태로 자전거만 탔다. 다소 인위적이고 인스턴트적인 응급처방이었지만 자전거는 분명 결여되어있던 성취감을 공급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수단이었다.
20년 여름, 나는 지금 완전히 회복했다. 주당 50키로도 못타고 있는 라이딩 로그가 회복의 증거라는 점은 조금 안타깝지만.

구정에 귀국하고 나니 코로나가 창궐해 전 지구가 떠들썩해졌다. 한동안은 꿈도 꾸지 못할,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도 모를, 해외여행의 마지막이 하노이였다니. 시간이 지날수록 하노이의 기억은 더욱 특별하게 여겨진다.
지난 주엔 연남동에 있는 베트남 콘셉의 카페를 20분이나 들여 찾아갔다. 현지에서 먹었던 에그커피가 아니었다. 전혀 달랐다. 공통점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제멋대로의 액체를 5,000원 내고 먹다 반을 남겼다.
도시 하노이로부터 받았던 마음의 안식을 미각경험를 통해 조금이나마 회상하고자 했던 나의 바람은 완전 짓뭉개졌다. 서울사람들의 현대적 관습대로 솔직한 피드백은 숨겼다. 잘 마셨단 거짓말을 던졌다.
다시 돌아온 차엔 불법주차 딱지가 붙어있었다.

하노이에 다시 갈수도 없거니와 그리워하는 것마저 허락지 않으니 나의 마음은 일종의 실연 상태에 빠졌다.
어제 스트라바 피드에서 우연히 발견한 ‘하노이라이딩’은 그 이름만으로 내 마음에 적셔들었다. 20년도에 내가 제일 좋아한 두 가지가 모두 들어가있는 이름.
하노이에서 스쿠터를 탄 기억은 자전거를 탄 기억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아이레벨, 주행경로, 흘러가는 풍경의 속도까지 거의 흡사하다. 그날의 기억을 살짝 조작해보니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탔던 것 같기도 하다.
조작된 기억이 아주 흡족하기에 같은 이름의 파일이 이미 있습니다. 기존 파일을 덮어쓰시겠습니까? 네네. 아무렴요. 그렇게 해주세요.

하노이에서의 마지막날엔 비가 왕창 내렸고 난 자전거를 타고 온 도시를 구석구석 조지고 다녔다.
어제 스트라바 피드에서 우연히 발견한 ‘하노이라이딩’은 그 이름만으로 내 마음에 적셔들었다. 20년도에 내가 제일 좋아한 두 가지가 모두 들어가있는 이름.
설명할 수 없고,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이끌림에 오후 8시 정모 장소에 덜컥 참석해버렸다.

‘하노이라이딩’은 하늘공원 노을공원 라이딩의 줄임말이었다. 오늘은 샤방이라 1회전만 가볍게 돌린 후 편의점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고 예상치못한 선물도 받게되어 민망함과 감사함을 표했으며 이젠 낯선 사람들을 만나도 꽤나 여유로운 척 할 수 있게 된 스스로를 대견하다고 칭찬한 뒤 15키로만 타고 집에 돌아가기엔 쫄쫄이를 꺼내입은 수고에 비해 운동성과 회수가 경제적이지 못하단 판단에 서오릉을 찍고 집에 돌아오던 중 하늘에서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다.

하노이에서의 마지막날 자전거 탈 때도 오늘처럼 비가 내렸다.
그토록 고맙고 그리웠던 하노이가 오늘 여기 있다. 코로나도 자가격리도 다 이겨내고 와주었구나. 난 오늘 하노이라이딩을 했다.

 

 

 

 

 

 

 

 

 

자전거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쓸모를 위해 살았다. 이젠 진절머리가 난다.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어라. 더 큰 영향력을 가져라. 산업을 성장시켜라. 경쟁해라. 승리해라. 승리에 만족하지 말고 압도해라. 내가 요구받은 그대로 남에게도 강요했다. 회유, 협박했다. 쓸모에 도움되지 않는 당신의 가치관을 박살내고 이념을 주입했다. 당신을 생산기계로 만들어야 쓸모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니 나로썬 불가피했다. 나덕에 당신도 조금은 쓸모있는 존재가 되지 않았느냐. 사과하진 않겠다.

미안하다. 용서해달라. 나도 이 모든 것에 진절머리가 난다.

난 쓸모에 지쳤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것에 빠지는 것이다. 자전거보다 더 쓸모없는 게 어디 있느냐. 나는 여지껏 찾지 못했다.

차나 오토바이에 비하면 자전거는 운송수단으로서의 값어치가 전혀 없다. 오늘 내가 먹은 소고기 값보다 기름값이 더 적게 치일 것이다. 인간 신체능력만 활용해 스스로自 돌아가는轉 수레車는 엔진과 모터의 효율이 높아질수록 쓸모가 없어진다. 어제보다 오늘 더 쓸모없고 내일은 더욱더 쓸모없는 게 자전거다.

원시적인 동력원을 사용하는 자전거지만 요즘엔 최첨단의 기술이 사용된다. 최첨단의 기술을 활용한 원시회귀라. 마음에 든다. 쓸모없어지기 위해 최첨단의 기술까지 동원한다니. 나도 더 격렬하게 나의 신체능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운동효율을 극한으로 높여 최대심박으로 최대파워로 최장시간동안 쓸모없는 발길질을 해야겠다.

자전거야. 너와 내가 협력해 이루어낸 최선의 결과를 보아라. 고작 여기서 저기로 옮겼을 뿐이다.

쓸모없어지는 너가 마냥 안쓰럽진만은 않다. 우린 동병상련한 사이다. 이 사회는 더이상 인간에게도 쓸모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중들이 받아들이기 힘들 사실이기에 굳이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인간은 생산수단으로써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 로봇의 높은 생산성으로 만들어진 잉여자원을 기본소득으로 분배받았음에도 좋다며 헤죽거리고 있다.

로봇이 생산의 주체요, 인간은 잉여다. 할아버지는 16시간, 아버지는 12시간, 난 6시간 일한다. 자식이 태어나면 3시간만 일할 것이다. 생산은 로봇이 도맡고 인간은 철학 문화 예술 따위나 즐기게 될 것이다. 새로운 일상이다. 난 자전거를 통해 미래인류의 삶을 앞당겨 즐기고 있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 쓸모없었다.
내일 쉬고 주말에도 최선을 다해 격렬하게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이다.

가민을 주머니에 넣었다.

숫자를 보지 않기로 했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본 풍경들. 이전에 느낀 감정들. 라이더 이은호는 다시 깨어났다. 몇 달 동안 숫자에 묻혀 사느라 잊고 있었다.

모든 숫자엔 의도가 들어가있다.

속도는 더 빠르게
파워는 더 높게
심박은 더 가쁘게
거리는 더 멀리
밸런스는 더 동일하게
평활도는 더 균일하게
주행시간은 더 오래
주행빈도는 더 자주

사실 숫자는 잘못 없다. 해석하는 사람의 잘못이다. 숫자는 그저 보여줬을 뿐이다. ‘더더더더’ 를 붙여 해석한 건 나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난 너를 주머니에 넣었고, 오늘 저물어가는 저 해와 함께 너의 역할 해임식을 거행할 것이다.

숫자가 나의 라이딩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겠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유치한 게이미피케이션. 실존하지도 않는 허무하고 과장된 목표를 백개씩 만들어 사람을 옥죈다.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겠다. 설계된 사육을 당하지 않겠다.

스트라바는 나를 위한 서비스가 아니다. 선수 또는 선수를 꿈꾸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나도 선수가 된 것 마냥 세상을 다 씹어먹을 각오로 클릿을 꽂아넣곤 하지만 매일 그럴 순 없다.

가민을 켜고 스트라바에 로그를 올린다는 것 때문에 나의 저녁 라이딩이 레이싱이 되어선 안 될 일이다. 숫자로 타는 자전거는 분명 새로운 세계였지만 내 자전거 세계의 전부가 될 순 없다.

오래 탈 필요도 땀흘릴 필요도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땀띠나는 심박계를 찰 필요도 쫄쫄이를 입을 필요도 없다. 장갑도 안끼고 헬멧도 안썼다. 클릿슈즈도 벗고 빤쓰도 벗고 타려다가 참았다.

오늘도 느긋한 마음에 낙조를 보러 나온 것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전거를 되찾기 위함이다.

랜스 암스트롱도 한쪽 부랄을 잃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마실라이딩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랜스 형은 요즘 자전거를 좀체 안 탈런지, 샤방 마실 즐길런지, 존나 빡세게 로라 굴릴지 대뜸 궁금하다. 이 글 본다면 오랜만에 카톡 한 통 해주길 바란다.

 

 

 

충수염이 아닌건 다행이지만 생각할수록 열받네?

그제 저녁부터 배가 아팠다. 열도 조금 났다. 온 옆구리가 뻑적지근해지더니 골반을 움직이는 것도 불편해졌다. 통증은 우측 하복부로 집중되었다. 하루 반나절 정도에 걸쳐 통증은 심해졌다.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통증이라 검색을 통해 병을 찾아보았다. 충수염의 증상과 흡사했다. 흔히 맹장염으로 알려진 병이었다.

나는 충수염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이 병은 48시간 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터져버려 더 큰 문제로 번진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당일 수술을 하고 이틀간 입원을 한게 될 터이니,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모래도 새걸로 갈아주고 밥도 가득 채웠다. 물도 두통을 채워 두고 간식을 잔뜩 줬다. 배낭가방에 이틀간 지낼 수 있도록 물품을 쌌다. 그리고 아침 일찍 병원을 갔다.

 

오늘 만난 외과의사는 아주 특이한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정해둔 레퍼토리대로 진료가 이뤄져야만 했다. 의사가 권위적인 것은 알았지만 이 사람은 좀 달랐다.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 노트해둔 것을 보려고 휴대폰을 켰더니 휴대폰은 내려두고 자신이 물어보는 것에만 질문하라는 것이다. 불필요한 정보는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기실에 사람이 전혀 없는 이른 아침이었다. 시간을 어떻게 아껴 쓰는지는 각자의 몫이니까 내가 간섭할 순 없는 일이기에 그의 지시를 따랐다.

진단은 아주 전문적이었다. 내러티브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스크립트로서는 완벽했다. 진단 근거도 들어가 있으며, 의학적인 근거도 있고, 자신이 판단을 내리게 되는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투명하게 설명함으로 신뢰를 주기도 했다. 초음파 검사는 60%의 정확도로 병을 진단할 수 있고, 자기같은 전문가가 손으로 눌러서 검진하는 것을 이학적 검진이라 부르는데 85%의 확률로 병을 맞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간에 질문도 하나 던졌다. 85%의 확률이라는 것이 높은건지 낮은건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는 높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다. 60%와 비교하듯 물었으니 상대적으로 높다고 생각할 수 밖에. 틀린 답을 내기를 바라고 던진 질문이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지적함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자신의 권위는 높이는 대목이었다. “85%의 확률이라면 15%는 놓친다는 뜻입니다. 100명이면 15명 1,000명이면 150명의 환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충수염 환자를 5,000명을 수술했는데 그럼 750명의 환자를 놓친다는 뜻입니다.” 캬~ 다시 생각해도 감탄이 터져나오는 치밀한 스크립트다. 답변을 듣는 사람은 순식간에 멀쩡한 사람 750명의 배를 갈라버린 나쁜놈이 된다. 그저 배가 아파서 병원을 방문했던 환자는 민망함을 넘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그의 치밀한 스크립트에 오류가 발생했다. 내가 “사람 배때지를 칼로 째기에는 낮은 편인 것 같네요”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난 반응을 접하면 당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언짢아했다. 자신의 질문에 항상 ‘높다’라는 답변이 들어왔고 그에 대한 counter 대본만 있었는데, ‘낮다’라는 답변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 상황을 모면할 융통성이나 순발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화의 맥락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그는 스크립트를 그대로 읊었다.

 

스크립트 낭독이 끝난 뒤, 85%보다 정확도가 높다는 CT를 찍으러 갔다. 개인병원에는 CT기계가 없어서 인근 영상의학과를 다녀왔다. 사진이 잘나오려면 핏속에 어떤 액체를 섞어야 한다는데 혈관이 계속 터져버려 바늘을 네 번이나 꽂아야 했다. 팔에 구멍이 네 개 난 채로 다시 외과에 돌아오니 의사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미 영상은 컴퓨터로 받아본 상태고, 내가 이동하는 동안 또 스크립트를 준비해두었나보다.

이 의사는 결론부터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짜둔 내러티브와 극적인 연출포인트를 아주 중요시 여기는 듯 했다. “이건 게실이고요, 게실이 이런 상태인데요, 게실은 보통 이래요. 게실이 이렇게 되면 이런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건 충수인데요, 충수도 염증이 번진 상태에요. 그런데 여길 보면 공기가 들어가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막혔다기보다는 염증만 번진 상태인 거죠”

그가 준비한 4분간의 스크립트 낭독이 모두 끝나갈 때까지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설명만 있고 해석은 없었다. 답답했던 나는 중간에 껴들었다. “그럼 충수를 제거해야 하는 수준은 아니네요?” 그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며 양 손을 펼쳐 손바닥을 나에게 보였다. “의사가 말을 하면 좀 끝까지 들으세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나는 충수염인지 아닌지 빨리 말해줬음 좋겠는데. 아니 그러니까 충수염인지 뭔지 하는 병이 존재하는지도 나는 어제 처음 알았을 뿐이고, 지식을 전달해주는 건 좋은데, 당신이 말해주는 그런 요약된 지식은 이미 인터넷에서도 내가 다 보고 온건데. 스크립트 낭독자야 뭐야. 사람이 앞에 있으면 사람이랑 대화를 해야지. 오늘 입원을 해야 하는지, 내일 출근은 할 수 있는 건지, 병원비는 얼마 나올지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대본 읽는 기계야 뭐야.

그의 스크립트는 그의 입장에서는 완벽했을지 몰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상황에 대한 해석이 없다. so what이 빠져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당신 잘난건 알겠는데 나더러 어쩌라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되물으면 언짢아하니 물어볼 수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신 것만큼 상태가 나쁘진 않습니다.”, “이런건 좀 주의하셔야 합니다.” 와 같은 환자가 이해하기 쉬운 말은 그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진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백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기만족을 위해 쓰여진 대본이었다. 이 사람은 대화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통제집착이 심한 사람인데 의사는 오죽할까. 당신은 또 얼마나 피곤한 하루를 살아갈까. 환자란 자신이 명령에 의해 맨살을 보이는 존재이고, 자신은 그 살을 메스로 갈라도 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태도가 대화의 모든 문장에서 묻어났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4분간의 스크립트 낭독이 끝나자 약 처방을 해줄 테니 5일간 먹고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쫓겨났다. 두 번 혼이 났던 나는 시키는 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문 밖으로 나오고 세 걸음을 옮겼을 때, 뭔가 놓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다시 물었다. “저기요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네” “무탄고단 식단을 하는 게 이번 염증에 원인이 아닐까요?” “문제 없습니다”

so what이 결여된 그의 스크립트를 지적이라도 하듯 대화를 연장시켰지만 그는 눈도 마주치치 않은 채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도 모른 채로 살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의 식단을 보았다. 이틀 연속 식이섬유 하나도 없이 단백질만 먹은 기록이 있다. 장 내 변이 게실과 충수에 무리를 줄만했다. 게실염에 대해 찾아보았더니 지금과 같은 식이섬유 부족 식단이 주요 원인이 된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이 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총 세번이나 의사에게 전달하려고 했고 세번 모두 거절당했다.

앱 삭제(유튜브, 롤토모바일, 고급유머, 인스타)와 가상현실에 대한 고찰

디지털기술의 발달로 우리의 삶은 확장되었다. 가상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 공간은 물리적으로 실존하진 않지만 기능적으로는 작동한다. 오히려 시간한계와 물리한계가 없기 때문에 확장을 넘어서 역전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확신하는 편이다. 역전의 특이점은 이미 왔을지도 모른다. 그 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공간의 확장이 일어났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내가 이렇게 쉽게 삶의 터전을 그 방향으로 확장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님 중에서는 가상의 공간에서 삶의 터전을 시작한 사람이 없으실 뿐더러, 나도 시골에서 자란 非-digital native 이기 때문에 급작스런 터전의 변화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우려가 된다.

우선 당장의 문제만 보자면 나는 가상의 공간을 도피의 공간으로 쓴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보고 있다. 그 시간은 죽은 시간이 된다. 사라진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이 현실 세계에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라면 물리적으로 현실세계라고 느낄 수 있는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진행해야 한다.

핸드폰이라는 매체는 신체에 너무 가깝다. 가상현실이라고 하면 대부분 VR기기를 덮어 쓴 뒤 현실세계를 차단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걸 뒤집어 쓰나 안 쓰나 어느 정도 가상현실에 깊이 빠지게 되는가를 따지면 될 일이다. 그래픽이 더 좋다거나 덜 좋다고 몰입의 차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경험 주체가 어느 현실에 발을 딛였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면 모든 현실의 감각기관을 off시키게 된다.

반명 노트북을 키는 것은 현실에서 가상으로 접속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완전 몰입되진 않는다. 의식이 각성되어 있는 상태로 가상의 공간을 탐험하고 활용할 수 있다. 여전히 의식은 실제 세계에 머무른다. 키보드와 마우스라는 정보입력장치는 우리 신체기관의 확장으로 여겨진다. 별도의 도구를 조작하지 않고 화면을 터치한다는 것이 큰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상현실로 도피했다. 꽤 오래된 것 같다. 일을 하지 않으면 가상현실로 도망쳐있었다. 그곳에서 뭔가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활동이 이뤄진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개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심하게 망가졌다. 현실감각이 많이 사라졌다. 집안에서 물건을 자주 잃어버렸다. 가끔 방이 낯설게 느껴진다. 물리적인 힘을 들여서 책상위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은 가상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정리보다 너무 버거운 일로 여겨졌다.

터치 UX는 나에게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버렸다. 신체부위가 직접 가상현실을 조작하는 도구로 연결되어 있으니 나의 욕망을 억제할 단계도 장치도 없다. 아 심심해 > 앱 키면 심심하지 않아진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나 > 인스타 피드 보면 뭔가 세상 소식을 들은 것 같다. 실제로는 어떤 방향성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정보의 흐름에 떠밀리고 있을 뿐이다.

현실세계의 감각이 떨어지고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보입력도구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정보입력도구가 VR이나 터치UX처럼 직관적이지 않았을 때에도 이런 사람들은 있었다. 나보다 훨씬 증세가 심각해서 문제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20년 전에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을 것이고, 그 중 일부는 현실 감각이 떨어져서 현실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로 주된 삶의 터전을 옮기려는 의도, 또는 그곳으로 도피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상태라고 가정했을 때,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은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길목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단계도 없고 장치도 없다. 그러니까 이건 신경망을 끊는 것과 같다. 이미 내 욕망은 앱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욕망이 앱을 작동시키는 사이에 나의 이성이나 의식이 개입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단순히 앱을 지운 것이 아닌 신경망을 끊은 것이다. 현실에 집중하자.

블로그에 글을 끄적이니 건강해짐을 느낀다!

나는 건강하다!

 

 


덧붙임 (21년 2월 25일)

언어는 두 종류다.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언어는 머릿속의 개념이 문자나 음성으로 표현되는 과정을 거친 뒤 전달되어 다시 해석되는 일련의 시스템이다. 개념을 언어로 담아내는 coding의 과정과 해석하는 decoding의 과정이 이뤄진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직관적이라는 측면에선 좋은 점이다.

터치 UX는 언어인가. 터치UX는 언어가 아니다. 주어진 객관식의 답변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feedback일 뿐이고 reaction일 뿐이다. coding을 하지 않는다. 주체성이 없는 인터랙션이다. 터치 UX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수동의 상태가 된다. 주체성을 잃는다. 모바일은 작은 PC가 아니다. PC는 발언자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만 모바일은 주체성을 잃게 만든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다. 반응의 종류와 수준을 제외하면 구조적으로 반응자라는 점에서 짐승과 다른 점이 없다. 자극을 주는 자여야 한다. 터치UX의 상태로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은 하이테크 문명의 혜택을 받는 게 아니다. 야만 상태로의 회귀다. 수동적인 짐승의 인생을 살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면 모바일 기기의 활용빈도를 줄여 나가야 한다.

버리기 위한 티켓팅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얻게 될까? 이 질문은 틀렸다. 바꿔보자.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버리게 될까? 조금 더 지금 상황에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 나는 무엇을 취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다. 도피여행이다.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고 했으니 어느 쪽이건 지금은 버리는 데에 집중하자.

 

지난 해 가을, 부모님을 데리고 스위스에 갈 뻔했다. 어른이 되고 나니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졌고 나도 그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딱히 싫지 않다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처리하는 것이 어른의 자세였다. 내가 시작한 계획이지만 내가 갈망한 여행은 아니었다. 부모님도 자식이 보내주는 여행에 함께하고 싶어 응했을 뿐이었다. 둘 다 스위스에 이상과 환상이 없었으므로 여행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번 여행은 자의적이고 독립적이다. 완전히 독립적일 순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그러하다. 이번 여행의 시작ㅡ티켓의 구입ㅡ부터 인과관계를 끊어내려고 했다. 나는 여행지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 채 티켓을 샀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별다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일단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 여행이 내 일상과 관련된 모든 인과관계에서 독립적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자식의 의무를 저버리기 위해 설 연휴를 끼웠다는 점에서 여전히 독립적이지 못하지만.

 

나란 인간의 문제는 무엇일까? 추구의 열정이 사라진 문제일까? 무념 상태의 지속이 문제일까? 염세적이고 허무한 관점이 문제일까? 부수고 다시 세우는 폭력성이 문제일까? 불만족과 본능적 개선의지가 문제일까? 환경을 원망하는 태도가 문제일까? 지금도 끊임없이 문제만 찾는다. 문제를 찾으려는 습관이 문제일까? 이런 나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옆에선 뻔히 보이지만 정작 자신만 못 보는 그런 멍청한 상태에 빠져버렸다. 훈수를 두는 이가 있더라도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무엇이 옳은 훈수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요 몇 년 새 나의 생각 체계엔 오류가 발생했다.

내가 추구하는 상태는 얼마나 가치 있는가? 짐승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짧고 허무한 시간을 살아가는 중에 조금의 가치라도 찾아보려고 발버둥친다. 없는 것에 비하면 무한에 가깝지만, 무한하고 절대적인 가치에 비하면 제로에 가깝다. 내 인생은 무한하면서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 인생은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무한한 가치가 있다. 그제 본 영화 애드아스트라는 이 안건을 우주와 인간사회의 대비함으로 다룬다. 영화는 “나가봐야 별 거 없어. 진정한 가치는 네 곁에 있었잖아. 바보야.”라는 나이브한 결론을 맺으며 끝난다. 허무주의에 빠진 우울증 환자들의 자살촉진 트리거로 원망받지 않을 유일한 스토리라인 이었을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의 생각은 극중 주인공처럼 비합리적인 과정으로 결론에 도달해선 안 된다.

 

인간의 삶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은 여럿이다. 난 그 중 신, 우주, 시간 세가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나, 신은 인간의 한계를 알려주고 오늘의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선과 덕을 제시한다. 추구해야 할 지향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둘, 우주는 무기력을 안겨준다. 알면 알수록 정복할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고, 심지어 제대로 지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각하게 해준다. 개척자였던 우리 조상님들의 DNA를 물려받은 우리들은 무기력을 느끼게 된다. 셋, 나는 시간을 평면적이며 선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영상편집기의 타임라인이나 프로젝트 일정관리양식이 내 시간 인식의 관점이 되었다. 관점이 좁으니 좁은 세상을 산다. 시간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시간에 통제당한다. 시간을 인식할 때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는데 미래의 과거인 현재는 왜 이렇게 아득바득해야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고 허무함을 느꼈다.

셋 중에서 삶에 도움되는 것은 종교다. 불행하게도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나는 줄곧 좇는 대상 없이 쫓기면서만 살았다. 무기력과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내 나이 올해 36이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흐른 내 인생은 2/5가 훌쩍 지났다. 난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내 인생의 대부분 결정되어 있다는 허무함에 사로잡힌다. 내 인생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작다. 태어나는 나라도, 시기도, 인종도, 신체도, 부모도, 친지도, 어릴 적 친구도, 어릴 적 선생님도, 유년기에 영향을 미친 모든 성장환경을 나의 의지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채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다. 1/5정도의 기간 동안 받은 영향으로 4/5가 결정되는 것이 싫어서 아득바득하며 벗어나고 싶어했다. 남들은 1/5은 자식으로, 2/5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3/5는 부모로 산다.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그 트랙을 나는 벗어나려고 시도해보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때가 좋았다. 자의식이 없던 어린 상태가 행복했다. 가라고 해서 갔던 학교가, 학교에서 가니까 따라간 수학 여행이, ‘이거 한 뒤, 저거 해라’고 알려주고 지시해준 커리큘럼이 좋았다. 편했다. 행복하거나 편한 것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다. 불행과 불편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반대의 극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도피의 대상과 추구의 대상이 설정되는 과정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생각을 멈추면 될 것이고,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마약에 빠지면 그만이며, 인생의 목적이 편의라면 누워서 종일 잠만 자면 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행복, 쾌락, 편의와 같은 곳에 두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비참한 일이다. 차라리 평생 이 허무함에 몸서리치는 편이 낫겠다. 조금의 가치라도 찾으려고 시도라도 하는 게 낫겠다. 비참해질 순 없으니까.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답은 없으니까.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허무함으로 가득 찬 박스에 머리통을 스스로 처박은 다음 펑펑 슬퍼하는 행위다. 그러니 생각을 멈추고 일단 몸뚱이를 움직여야 한다.

 

어떤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어떤 상태는 취해야 한다는 강박. 그것은 지난 10년간 나를 지배한 생각이다. [광신이 되지 않고 의심해야 한다. 속단하지 않고 충분한 정보를 우선 확보하라. 대중이 되는 것은 비문명과 야만의 상태로 퇴화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정보를 처리할 능력을 갖추라. 소비자가 되지 말고 생산자가 되어라. 원망하는 자가 아닌 관용을 베푸는 자가 되어라. 남들만큼 하지 말고 최고효율의 방법론을 활용하라.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이익을 취하지 말고, 이익이 발생하는 구조를 만들어라. 감사함의 크기를 키워라….] 내 속에 있는 강박은 수도 없이 많다. 레이 달리오가 말한 것처럼 이런 원칙들을 세워나가는 것이 정말 옳은 방법일까? 좋은 방법론인 것을 분명하지만, 지금 나에게 옳은 처방인지를 의심한다.

나는 꽤 많은 직업을 경험했다. [요리를 했고, 영상판에서 일했고, 게임회사에 들어가고 싶었고, 남들처럼 대기업에도 취업해보고 싶었다. 해외에서 사는 게 어떨지 생각해봤다. 마케팅 회사에서 일했고, 기자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행사기획자로 꽤 큰 성취를 느꼈으며, 시키는 거 다 하는 대행업도 했고, 광고일, 기획일, 중개일, 사장노릇도 하고 있다.] 나의 2/5파트를 회고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겪었던 다른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존재가 되었을까? 아니다. 명함이 바뀐다고 나의 존재가 바뀌지 않듯이, 내 직업이나 환경적 상태가 나의 존재를 정의하지 않는다.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상태가 나라는 존재다. 내 인생 2/5는 어떤 상태를 지향하며 산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미완성인 상태로 남는 것이다.

 

어디로 가든 옳은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몸뚱이를 움직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