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멸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가 우려하던 부작용은 여전히 가진 채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세상을 집어삼켰다. 돈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돈이 사람행세를 한다. 사람은 되려 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개인의 의지와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흐름의 방향에는 더욱 가속이 붙고 관성은 커진다. 패러다임 쉬프트의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한 두 건의 사건만으로 이 관성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나가자는 사람은 있어도, 자본주의를 엎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사람은 없다. 그만큼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위에 삶의 터전을 쌓아 올렸다.
이 모든 사건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돌도끼를 만들고, 바퀴를 만들고, 옷을 만들어 입으며 시작되었다. 만드는 행위가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었으니 인간은 만드는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도구를 가진 부족은 생존확률이 높아졌다. 만들지 못하는 부족은 자연 도태되었다. 살아남은 부족은 만드는 능력을 후대에 물려주었고, 후대는 다시 발전시키는 것을 반복하며 인간은 더욱 잘 만드는 존재로 거듭났다. 만드는 존재, 지금 경제가 가지고 있는 벡터의 시작이다.
만들어진 물건을 교환하며 경제가 생겨났다. 경제의 가장 작은 단위는 교환이며, 중간 단위는 시장이고, 가장 큰 단위가 경제다. 교환을 쉽게 하고자 조개 껍데기로 환산하던 약속이 발전해 돈이 되었다. 돈은 노동가치를 환산하는 사회적 약속이다. 만드는 데에 12시간 들어간 의자는 12시간 동안 포획한 생선과 같은 값어치를 가졌다. 노동이 있으면 돈을 벌어낼 수 있고, 돈이 있으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돈은 노동본위제다.
시장에서 살아남는 비결, 승리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고객 중심” 돈을 가진 자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하면 그만이다. 돈을 가진 자의 게으름과 탐욕을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하면 그만이다. 혁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도 공통점이 있다. 더 많은 양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효율적으로,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빠르게, 더 직관적으로, 더 편리하게, 더 쾌적하게, 더 더 더 더 더 뒤에는 무엇을 붙여도 맞는 말이 된다. 더 하기만 한다면 승리의 전략이 된다.
경제에는 세 가지 구성원이 있다.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중간자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이어지기 어려우니 연결의 역할만 하는 중간자가 생겨났다. 재화시장에서는 유통업자라 불리고 서비스 시장에서는 중개업자라 불린다. 교환은 가치의 이전이다. 가치는 고유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교환이 이뤄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가치다. 가치의 차이를 통해 이익을 발생시키는 것이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높은 가치의 상품을 싸게 사거나 낮은 가치의 상품을 비싸게 팔면 이익이 남았다. 포장, 설득, 제안, 협상 능력이 생산능력보다 중요해졌다.
생산자와 중간자는 돈 맛을 봤다. 신이 나서 손을 잡고 춤을 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전만큼 팔리지 않았다. 필요에 대한 공급은 포화되었다. 욕망에 공급하니 조금 더 팔 수 있었다. 오래가지 않아 필요도 욕망도 포화되니 더이상 팔 것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은 더 더 더 관성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시장의 합인 경제는 더 더 더욱 그러했다. 국가도 나선다. 생산자, 유통자, 국가가 함께 손을 잡고 미친듯이 소비자를 만들어냈다.
모든 것이 포화되었다 싶으면 침체가 찾아왔다. 몇년 주기의 소침체, 기십년 주기의 대침체를 겪고 나면 경제는 다시 일어서서 가던 길을 갔다. 지구의 땅덩이는 좁고 인구는 무한정 늘어날 순 없으니, 소침체 대침체는 넘겨도 기백년 주기의 태침체는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드디어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나왔다. 실체는 없어도 거래가 가능하다는 주장. 어떤 상품도 서비스도 없다. 알맹이는 가라. 껍데기는 남고. 거래의 형식만 남겨라. 가상의 가치를 교환하자. 희망과 불안이란 감정에 팔자. 실존하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돈만 오가면 그만이니까. 금융시장 얘기다. 실존하지 않음에 거래는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물리적인 제약도 시간적인 제약도 없다. IT기술이란 부스터도 달았다. 거래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거래가능한 품목의 수량도 무제한에 가깝게 늘어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객단가*거래수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생산 도구로서의 인간 값어치는 하루가 다르게 무의미해진다. 결정된 미래이기에 이미 무의미해졌다는 미래완료시제를 써도 틀리지 않다. 생산성 측면에서 인간은 로봇에 한참 못미친다. 이 이유로 사람을 해고해도 비난받기는 커녕 우수한 경영자라고 상을 준다. 만 명의 일자리를 없앤 사람도 백 명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
유통업자와 중개업자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같다. 중간자는 곧 시장이 된다. 시장의 앞면엔 번영과 풍요가 그려져 있다. 뒷면엔 인간의 게으름과 탐욕이 그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모든 시장은 앞면의 모습으로만 보여지길 바란다. 활기 넘치는 건강한 시장의 모습이지만,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미친 자본의 사회를 가속화시키는 것도 시장이다. 연결이 조금만 천천히 되었다면 지금의 방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인류가 적응할 시간을 조금은 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의 의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돈의 의지로 돌아간다.
나에게도 다른 대책은 없다. 내일도 출근하면 돈이 시키는대로 직원의 생산성을 측정하고 평가해 키워내라고 닦달할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한없이 나이브하고 비생산적인 낭만주의자로 취급받겠지만. 빨리 이 자본주의 룰속에서 게임을 승리시킨 뒤에 여생을 보장할 만큼의 현금 다발을 쥐고 낭만을 찾아 세속을 뜨고 싶다. 낭만의 세계는 성과로 측정되지 않으니 낭만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 적어도 그 곳에선 미친 자본이 나의 의지와 판단을 조정하진 않을 것이다.
게임의 룰이 그렇다. 이익을 조금 취하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익을 많이 취하면 나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쁜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룰에 따라 이겼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더군다나 개인의 안녕과 풍요, 가족의 안녕과 풍요를 위한 일이기에 선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으니 악한 것이다. 거래상대는 상대적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의 욕망, 이익추구, 이기심이 부딪혀가는 곳이라는 배웠기에 나쁜 것은 아니다. 한 건의 거래에도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잣대를 들이대면 이렇게 복잡해진다. 이곳엔 윤리가 없다.
가치판단이다.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대립하는 사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모순되는 가치관을 한 사람의 좁은 마음에 품어낼 순 없다. 누구든 치우친다. 치우친 상태로 대립하고 혼돈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것이 한낱 개인의 최선이다.
치우치면 편할 것을, 선택하면 편할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렇게 정리해보려고 글을 쓴다. 돈을 벌고자 한다면 부자의 가치관과 생각구조를 따르면 될 것이고, 다른 곳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것을 따르면 될 일이다. 선택한 사상 이외의 가치관은 배척하고 부정하면 될 일이다. 굳이 모순되는 가치관을 내가 다 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나는 선뜻 택하지 못한다. 모순만 발견했다. 나는 오늘도 치우치지 못했다.
세상이 그러하듯 나 또한 카오스모스다. 괜찮다. 혼란과 대립이 존재하기에 당신은 균형의 상태다. 그저 엔트로피가 조금 높을 뿐이다.
— 덧붙임 —
생각숙제1 : 생산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무가치해진 시대, 인간의 가치는 0인가 null인가.
생각숙제2 : 비생산의 영역에서 인간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생각숙제3 : 노동은 이미 무의미해졌는데(미래완료), 왜 돈은 여전히 노동본위제일까?
— 덧붙임 210619 —
경제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다보니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였다. 정반대로 향하려는 가치 사이에서 고민했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 답을 주었다. 존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경제활동을 추구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