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단단한 확신, 냉정한 시선.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내뱉었다.
“스승님, 실존주의는 철학이 아닙니다.”
스승은 눈썹을 살짝 올렸다.
“그것은 단순한 감정입니다. 두려움, 허무, 불안.
그 감정에 휩싸인 채 쏟아낸 글들을 철학이라 부르는 것이 맞습니까?
그것이 논리적인 사고의 역사, 의식의 확장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것은 철학이 아니라 한 시대의 감상주의적 반응일 뿐입니다.
멀지 않은 미래에 분명 철학사에서 밀려나게 될 겁니다.”
제자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포스트모더니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이 아니라 정치적 도구입니다.
해체, 상대주의, 권력 구조의 전복—
이 모든 것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조작된 것 아닙니까?
철학이란 사유의 자유로움을 지향해야 하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오히려 사유를 억압하고,
의심의 자유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스승은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그리고 아주 깊게.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잠시 바라보았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제자는 스승의 침묵을 지켜보며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나 스승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철학, 그 야만적이고도 치열한 것
“그래서?”
제자는 당황했다.
스승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철학이란 무엇이냐?”
제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스승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철학이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네 말대로라면, 불안과 허무를 논하는 철학은 철학이 아니다.
그럼 고통과 욕망을 다룬 철학도 철학이 아닐까?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된 중세 철학은?
사회적 불만에서 태어난 계몽주의는?
혁명적 열망이 깃든 마르크스주의는?
네 기준대로라면,
우리가 철학이라 부르는 것 중 과연 몇 개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제자는 입을 열었으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스승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철학이란 무엇이냐?
논리적 개념을 정리하고, 사유를 확장하는 것이 철학이냐?
그렇다면 현실과 맞닿아 있지 않은 철학은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이냐?”
제자는 움찔했다.
“네가 철학을 정의하는 순간,
철학은 이미 너를 벗어나 있다.
철학이 논리의 틀 안에서만 머문다면,
그것은 단지 사전적 정의를 위한 지적 놀이에 불과하다.
철학이 감정과 현실에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 있는 사유가 아니라 죽어버린 언어일 뿐이다.”
제자는 손을 움켜쥐었다.
철학은 ‘도구’가 아니다
스승은 다시 걸었다.
제자는 따라 걸으며 이를 악물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적 도구라고 했나?
그렇다면 철학이 정치와 전혀 무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너는 철학이 현실에서 분리된 초월적인 것이라 믿는가?”
제자는 주먹을 꽉 쥐었다.
스승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이봐라, 네가 지금 하고 있는 것.
너는 철학이 무엇인지 정의하려 하고 있고,
네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을 철학에서 제거하려 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이 비판하는 태도다.”
제자의 얼굴이 굳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유의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맞붙어 싸우는 가장 원초적인 방식이다.
철학을 논리로만 보려 한다면,
그 순간 너는 철학을 죽이는 것이다.”
스승은 멈춰 섰다.
제자는 숨을 들이켰다.
철학은 언제나 살아 있다
“실존주의가 감정에 빠진 사유라 했나?”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실존주의는 감정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철저히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두려움을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허무를 논리적으로 해부하고,
인간 존재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것을 감정의 나열이라 부른다면,
네가 생각하는 철학은 단지 ‘언어의 조합’일 뿐이겠지.”
제자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적 도구라고 했나?”
스승은 한 발 다가갔다.
“그래, 맞다.
철학은 언제나 정치적 도구로 쓰여 왔다.
그렇다면 그것을 부정해야 하는가?
철학은 현실을 바꾸는 힘이다.
그 힘을 외면하는 순간, 철학은 그냥 박물관에 전시된 낡은 골동품이 된다.”
스승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자를 바라보았다.
“철학은 살아 있다.
살아 있는 철학은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
정치와 분리되지 않는다.
철학이 현실과 싸우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철학의 죽음’이다.”
제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처음으로, 철학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