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생성과 창조의 철학자. 그는 너무 낙관적이야. 좋은 것과 재밌는 것들이 잔뜩 만들어질 거라고 얘기했지. 하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진창일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어. 결과주의자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지금의 인류로까지 진화해오는 과정에선 수많은 돌연변이들이 탈락했던 것처럼, 무엇이 생성되고 창조되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실패들이 나타나고 탈락이 발생하게 돼. 그래서 생성과 창조를 한다는 것은, 그보다 수천 수만배의 실패와 탈락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해.
철학과 사상은 옳거나 바르거나 아름다워서 선택되는 것이 아니야. 철학과 사상은 하나의 콘셉이라고 말할 수 있지. 철학자들은 저마다의 언어로 세상을 인식하고 정의하고 구분한 다음 역학관계를 풀어낼 공식을 만들어내. 그들이 제안한 콘셉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인식되는데, 그 인식의 틀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지 바른지 아름다운지 또한 결정된다고 말할 수 있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세상을 살아갈 방식을 주체적으로 스스로 결정했다고 믿고 있지만, 인식의 틀을 배우는 순간부터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또한 결정되어 주입된다고 볼 수 있어.
척학은 진리를 말하는 학문이 아니라, 채택되는 콘셉에 가까워. 철학공부를 한답시고 철학자들이 써낸 문장을 달달 외거나 주석을 달고 있는 학계에 있는 사람들도 철학을 하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 실제로 철학을 했던 사람, 역사적으로 철학사의 획을 그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광인들이야. 기존의 인식체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을 만큼의 파괴적인 사유의 틀을 제시하지. 그런 광기가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주었지. 그러니 철학을 미치광이가 제안한 재밌는 콘셉 정도로 생각하자고. 권위와 위력이란 후대 현대인들이 부여해준 것들일 뿐이니까.
그렇다면 들뢰즈의 철학은 왜 현대인들에게 각광받게 된 것일까? 실리적으로 이득을 가져다 주는 사상이기 때문이야. 그 콘셉을 접하게 되면 풍족해지거나 번영을 누리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채택된 것이지. 생성과 창조의 철학은 급속도로 기술이 발전하는 시기에 적합한 사상이야. 생체적으로는 원시인과 다를 게 없는 인간을 생산에 도움되는 요소로 바꾸어내기 위해 필요했던 사상이기도 하고. 이 사상 덕분에 인간은 과거의 인간에 비해 가소성, 결합성, 액체성, 탄력성이 좋아졌어. 생산성이 높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에, 생성적이고 창조적인 인류를 만들어야 했고, 들뢰즈의 철학이 채택된 거라고 볼 수 있겠지.
들뢰즈의 철학엔 윤리적 공백이 있어. 물론 재밌는 콘셉을 제안하는 것까지만 역할이기 때문에, 콘셉의 위험성에 대한 검열이나 자기비판까지 요구할 순 없지. 전쟁을 끝내기 위해 발명된 기관총과 핵폭탄이 더 큰 전쟁을 일으켰던 것처럼, 제안된 콘셉이 어떤 작용을 통해 어떤 세상을 만들어내게 될지는 콘셉제안자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 현대사회는 개인에게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을 요구하고 있어. 빠르게 실패하라거나, 리스크를 감수하고 도전하라고 하거든. 본성에 반하는 방향으로 우리를 내모는데, 본성을 극복해내고 천성과 반대로 행동할 수 있는지에 따라서 현대사회에 적합한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의 태생적인 부분을 부정하면서 현대사회를 살아가야 하지.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이 같은 답을 할 거야. “생성과 창조를 해야 하니까” 대부분 생성과 창조를 항시적 참이고 궁극적 선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 이상 질문을 하진 않아. 생성과 창조를 왜 해야 하지? 진보와 혁신이니까? 그렇다면 진보와 혁신은 항시적 참이고 궁극적 선인가? 우리가 받아들인 기술발전시대의 보편인식콘셉에는 이미 생성과 창조와 진보와 혁신을 진선미로 여기도록 전제되어 있지. 이 콘셉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도덕률 또한 함께 내재되는 것이지.
그런데 지금 꼴을 봐. 생성과 창조를 얼마나 해댔으면 쓰레기가 저렇게까지 많아졌어. 기온은 걷잡을 수 없게 오르고 있고, 물가에 세웠던 문명은 모두 잠기기 직전이야. 뭐, 크게 호들갑 떨 일은 아닐 수도 있어. 그렇게 되어 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니까.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대처하기에 당황하고 있지만, 다만 확실한 것은 인간은 언제나 그랬듯 해답을 찾을 거야. 문제가 생겨나는 속도가 빨라지고 종류도 다양해지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는 것보다 풀어내는 기술 발전의 속도가 더욱 빠를 것이라고 긍정하고 있지.
이것이 내가 바라보는 현대야. 이런 거시적인 흐름 속에서 개인은 잠시 살다 가는거야. 불평도 아니고 문제정의도 아니야. 실존적 주체로서 그저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있을 뿐이지. 중세에 태어나서 왕에 조아리고 사는 것보단 나은 시대고, 근대에 태어나서 전쟁통을 겪는 것보다도 아무렴 낫지. 우리는 모두 언제-어디서-어떤 형태로 존재하게 될지를 결정하지 못한 채로 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들이야. 현대에 내던져진 이상, 아주 짧은 시간 살다 죽는다는 것이 결정된 이상, 내 의식이 생겨나기 전부터 이어져왔던 거시적인 변화와 발전은 내 의식이 사라진 뒤에도 계속 될거야.
다만, 현대는 생성과 창조만을 향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라 개인을 신경써주지도 않을 뿐더러, 권한은 빼앗아가고 책임은 개인한테 떠미루는 경향이 있으니, 다들 너무 상처들 받지 말고 잘 살아 가자고.
—
피로하다현대사회 지겹다들뢰즈 그래서 쓴 <앙띠 천개의 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