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 상관없어. 목적지는 자전거 위니까!

자전거에 올라타는 것만으로 목적을 달성한 거야. 어딘가를 가기 위한 수단으로 발명된 자전거지만 때로는 자전거 그 자체만으로도 목적이 될 수 있지. 오늘은 그런 날이고, 그러니 어딜 가든 상관없어.

목적지를 정한다는 것은 내게 큰 스트레스야. 마치 직장인이 점심메뉴를 정하는 것만큼이나 중대한 사안이거든. “어제 먹었으니까 안돼, 주말에 먹을거니까 안돼, 기름져서 안돼, 단백질 비중이 적어서 안돼….” 선택에 앞서 제거의 과정부터 거쳐야 하는 것도 마음을 어렵게 해.

선택이 어려운 이유는 선택지가 불만족스러워서가 아니야. 포기할 선택지가 여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선택의 만족도는 오히려 떨어지는 선택의 역설(the paradox of choice)현상이 생겨. 단순히 아쉬운 마음을 넘어 무력함과 좌절을 느끼게 만들고, 때로는 잘못된 선택까지 하게 되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문명의 혜택은 늘어도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야. 우리는 조상 대대로 불만족하는 욕망덩어리의 기질을 물려받았어.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고, 그것을 갖자마자 금새 흥미를 잃고 불만족하도록 디자인되어있어. 그래야 새로운 것을 다시 욕망할 수 있으니까. 이 기질은 DNA 깊은 곳에 새겨져 있어. 생존경쟁에선 불만종자들이 우월했고 대를 이을 확률이 높았거든. 하지만 때로는 조상들이 물려준 기질들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에는 도움되지 않을 때가 있어. 에너지를 장기간 저장시키는 시스템은 기근이 만연한 시대엔 필요했지만, 현대인에겐 탄수화물 중독과 비만이라는 부작용을 야기하는 것처럼 말이야.

선택지가 많지 않던 조상님들의 삶. 그리고 내 삶. 달라. 너무나 달라. 다르니까 다르게 해보기로 했어. 선택하지 않기로. ‘자전거를 끌고 나가 안장 위에 앉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기로.

선택의 기로란 대체로 둘 중 하나야. 그럼 왼쪽으로 갈 지, 오른쪽으로 갈 지만 정하면 되는 거거든. 어디든 상관없지 않겠어? 자전거 위에 앉아있는 건 매한가지니까.

갈림길에 도착해서도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면 그건 반길 일이야. 그 때 마음의 소리가 들리거든. 난 오늘 마음에 귀를 기울였더니 “돼지고기 김치찌개”가 들리길래 바로 핸들을 꺽었어.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다면 평소에 하던 것과 반대의 선택을 해보는 건 어때? 분명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거야. 난 오늘 평소와 반대의 선택을 했다가 실수로 한강을 건너버렸지만 말이야. 다리 위에서 안 죽으려고 시속 40으로 째느라 고생 좀 했지만 말이야. 라이딩이 끝나고 나니 분명 오늘 라이딩의 하이라이트는 그 때였단 생각이 들어.

‘불필요한 선택고민을 없애는 것’ 그것은 감사만족을 느끼는 마음의 기술. 건강한 마음으로 도시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현대인에게 필요한 필수 소양.

 

주행 기록 🚴‍♀️

이것은 꽃이 아니다
사업의 성과다

반기 거래액이 최고점을 갱신
감흥이 없다
숫자로 표현되는 사업의 성과
감흥이 없다

재미없는 기울기의 성장세로
예측 대로의 뻔한 미래가 찾아왔다고
모니터 너머의 직원에게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성과를 알렸다

이건 분명 축하할 일이고
뻔한 일도 아니라며
사업의 성과를 꽃으로 만들어왔다

무채색의 내 얼굴에도
화색이 돈다
꽃이 되어 나타난 녀석을 보니
실감이 난다
꽃과 함께 사진을 찍어 놓으니
감흥이 돈다

실제의 존재로 나타난 사업의 성과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차트의 뾰족한 꼭짓점은 참 못생겼던데
네모 안의 숫자는 참 못생겼던데
너 사실 이렇게 생겨먹었구나
너 예쁜 아이였구나

숫자는 날 스크루지로 만드는데
꽃은 날 시인으로 만드는구나

 

#일은지가다해놓고꽃은왜내가받아

#두명짜리회사

#작지만강한회사

#딴짓하는대표빼면사실상1인기업

#줄게없는나는답시라도쓴다

 

올 봄, 자전거 학원을 다녔다. 4주 짜리. 수강일기를 썼었다. 한데 모아 기록해둔다.

 

평로라에서 외전근 페달링 리듬 찾기 (학원 첫날)

제가 알던 페달링을 다 써봐도 그 리듬감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제까지 전 다른 걸 외전근 페달링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나봐요? 실망스럽진 않아요. 오히려 좋은 소식이죠. 그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걸 깨우치게 되면 제 실력은 또 얼마나 성장할까요? 벌써 설렙니다.

강습이 끝난 뒤 한시간 더 탔습니다. 말씀해주신 힌트들을 의식할수록 어색해졌습니다. 몸이 박자감을 찾기보단 독립적으로 동작하는 느낌. 머리로 안 찾아지니 몸으로 찾아보려 했습니다. 눈을 감고도 하늘을 보고도 땅을 보고도 해보았습니다. 탈진한 상태라면 무의식적으로 찾아내지 않을까 싶어 서너번 털어보기도 했습니다.

이게 맞는진 모르겠지만 비슷한 리듬을 찾은 것 같습니다.

힘의 타이밍. 제 몸의 느낌대로라면 무릎이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왔을 때부터 짧게 스트로크를 쳐야 했습니다. 12-5는 정말 찰나의 순간입니다. ‘12시부터 5시까지만 힘을 줘’라는 코딩이 작동할만큼의 제 하드웨어는 좋지 않습니다. 명령어를 바꿔보았습니다. ‘12시에서 짧게 툭툭’ 더 잘 작동하는 것 같습니다. 당기는 근육의 습관도 잠시나마 잊혀집니다.

힘의 시작점. 무릎의 위치. 제 습관대로의 페달링보다 무릎은 안으로 2~3cm 가량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외전근은 다리를 바깥으로 회전시킬 때 쓰이는 근육 너댓개를 묶어 부르는 것인데, 이름 그대로 바깥 회전이 일어나려면 시작점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힘의 방향. 외전근은 무작정 바깥으로만 빼는 줄 알았는데 안으로 넣었다가 밖으로 밀어내듯 밟았습니다. 수직보다 5도 정도의 작은 차이였지만 몸 바깥쪽 근육이 많이 개입하는 것 같았습니다.

무릎의 시작점과 벡터의 방향만 정해두니 새끼발가락에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갔습니다. 새끼발가락에 힘준다는 코딩도 안하는 게 나은 것 같습니다.

Q. 이게 제대로 찾은 것인지 그 리듬감만 비슷하게 흉내내기 위한 요령을 부린건진 모르겠습니다.

Q. 발목을 펴고 11-3시까지 앞으로 던지듯이 내미는 페달링은 무엇인가요? (둔근과 대퇴직근만 사용)

Q. 860칼로리밖에 안태웠는데 왜때문에 필드라이딩에서 1200태운만큼 힘들죠?

Q. 두시간 지났는데도 심장이 쿵쾅대는데 저 죽는건 아니죠?

 

클릿 압수 (학원 둘째 날)

오늘도 종일 외전근 시팅 리듬만 찾으려다 아무것도 못했다. 이걸 못하면 다음 진도를 나갈 수 없단다. 별 지랄을 다 했다. 당기는 근육의 관여를 줄여보자고 클릿도 압수당했다.

선생님을 퇴근시키고 혼자 돌리자니 오늘은 다른 회원이 없다.
나 하나 때문에 사장님이 퇴근 못하시는 것 같아 챙겨 나왔다.

나왔다.
나오니 나왔다.
필드에 나오니 리듬이 나왔다.

안장 코가 사타구니를 치고 사타구니는 다시 안장을 튕겨내는 이 리듬.

이 리듬. 나 안다. 아는 수준도 아니고 잘 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주 우수한 동작으로 우아하게 리듬에 변주까지 먹일 수 있다.

나 평생 이 리듬으로 타왔다. 세발자전거도 이렇게 탔던 것처럼 페달에 발만 올려도 이 리듬은 나온다.

평로라에서만 안 나온다.

 

당겨 올리는 페달링 연습 (학원 셋째 날)

■ 선생님 말씀

오늘은 당겨 올리는 것만 연습할 거에요. 직근이에요. 대퇴직근. 장요근과 대퇴직근으로 끄집어 올리세요.
프로 중에서도 직근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기량이 크게 차이납니다. 이게 필살기에요.
끝까지 끌어올려서 앞으로 밀어내는 것까지 얘 역할이에요. 뒤에서 앞으로 끌어 당기듯이 무릎으로 니킥 차듯이 당겨 올리세요.

■ 훈련 후 소감

당기는 근육 아예 쓰지 말란 사람도 있고 조금씩만 쓰란 사람도 있었는데 아니네? 오늘 두시간 동안 당기기만 했다.
고관절 주변 근육을 위주로 쓰니 무릎 주변 근육은 거의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따라서 무릎에 대미지도 없다.
선생님은 장요근과 복근이 당기면서 온몸이 웅크려지듯이 힘들거라 했는데 작년에 뺑뺑이 돌리면서 이 근육 자주 썻는지 몸에 전혀 무리 없고 너무 상쾌하다.
당기는 근육만으로는 평로라 시속 80 넘기기 힘들다. 케이던스도 높이기 어렵다. 그리고 다른 페달링으로 전환하기도 쉽지 않다. 얘는 얘만의 타이밍이 따로 있는 것 같다.

■ 짬내서 던진 막간 질문에 대한 답변

장요근은 자주 쓰면 안 되는 줄 알고 가끔씩만 20번 스트로크 치고 말았다고 했더니 할 수 있으면 얼마든지 계속 쓰라 하셨다.
모든 근육은 수축하면서 힘을 낸다. 그래서 관절을 뻗는 것보다 관절을 굽히는 힘이 더 세다. 온 몸을 굽히면서 니킥으로 당기는 페달링은 가장 큰 파워를 단기간에 뽑아낼 수 있다.
최대심박측정방식은 계단을 뛰어오르는 때 측정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니킥 댄싱으로 심박을 240까지 올렸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그만큼 온 몸의 에너지를 끄집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좋은 신호다.
3분 정도의 업힐 코스를 공략할 땐 밟는 페달링에서 당기는 페달링으로 점점 바꿔나가는 게 좋다. 큰 근육을 나중에 써서 마지막에 쥐어 짜는 것이 에너지를 모두 쏟아낼 수 있어 효율적이다.
평소에 훈련하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반대로 당기는 페달링을 먼저 써서 밟는 페달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다. 당기는 근육으로 젖산역치에 빠르게 다다른 후에 밟는 근육으로 지속지극을 주는 방식이다. 그렇다. 젖산역치 훈련이다.

■ 나의 상태 진단

당기는 페달링에선 파워밸런스 60:40 까지 커졌다. 오른다리에 비해 왼다리엔 자극이 많이 들어가지 않았다. 평소에 자주 사용한 것이다. 오른다리는 왼다리가 굴리는 페달링에 얹혀가듯 살아온지라 상사점에서 좌우로 흔들렸다.
왼쪽은 수직 직선운동이 이뤄지지만 오른다리는 11자로 움직이지 않았다. 오른허벅지가 근육량이 적어 얇은데도 싯포스트에는 더 가깝게 붙어 있었다. 선생님은 골반이 열리지 않은 것이라 말했다. 오른 골반만 열어야 했으나 그것은 무릎의 위치만 바꾼다고 열리는 것이 아니었다.

■ 처방

선생님도 이정도의 언밸런스는 본 적이 없다며 비장한 표정으로 이걸 고치는 게 가장 시급한 숙제라고 말씀해주셨다.
정 안 된다면 오른발에 스페이서를 넣자고 하셨다. 그럼 힘점을 더 이르게 줄 수 있어 근육의 개입을 조금 늘릴 수 있다고 했다. 이어서 그 방법은 최후의 처방인데다 근본적인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는 선택지라며 머리를 쥐어 뜯으셨다. (아… 선생님… 모발을 소중히…) 선생님의 모발건강을 위해 나는 이 숙제를 기필코 풀어야 한다.
외발페달링 훈련에 대해선 좋은 생각이 아니라 하셨다. 자세한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은 간다. 자전거는 몸이 대칭된 상태로 좌우가 번갈아가며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항상 말해왔던 사람이다.
우선의 처방으로 오른 골반만 살짝 뒤로 빼라고 했다. 골반을 뒤로 뺄수록 큰 근육을 사용하게 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골반을 살짝만 뒤튼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익숙한 자세를 지우는 의식을 지속하기도 어려웠다.
이윽고 골반을 틀어내는 요령을 찾았다. 왼손은 후드, 오른손은 바엔드를 잡았더니 어깨와 골반이 자연스레 뒤로 밀렸다. 확실히 오른다리가 페달링에 개입을 많이 한다. 밸런스 수치도 53:47 까지 줄어든다. 당분간은 일반 주행 자세에서도 이렇게 뒤틀어 잡아 교정해볼 계획이다.

■ 선생님의 화법에 대해

선생님의 수업을 세 번 들어보니 참 완곡한 표현이 잦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저는 그렇게 하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어요”는 경상도 선생님의 “시킨거나 똑바로 해라임마”에 맞먹는 피드백이다. “그래도 엄청 잘하고 있으신거에요.”는 경상도 말로 “이정도는 할 줄 알았다. 등신새끼야” 정도에 맞먹는 피드백이다. 서울살이 어언 10년. 나도 스윗한 서울남자의 표현을 어렴풋이나마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이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10점만점에 3점쯤 되는 것 같다. 박수를 열번 연속 치는 것은 5점 쯤 된다. 나는 평생 누가 나에게 박수를 열번 연속 쳐준 적이 거의 없다. 이 선생님이 나에게 쳐준 박수, 그 빠르고 경쾌한 박수소리를 들었을 땐 내가 자전거 천재인줄로 착각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이은호를 자전거학원에 수강하게 만든다.
박수는 생각보다 자주 터져나왔다. 나와 같이 수업을 듣는 50대 아저씨가 한 손을 놓아 물통을 꺼내 마시고 다시 꽂아넣는 것을 성공했을 때에도 박수를 열번 쳐주셨다. 같이온 다른 아저씨가 양손을 놓고 셀카를 찍었을 땐 스무번 쳐주셨다.
아… 이분은 서비스 마인드가 아주 훌륭하신 분이구나… 이분 자전거 안타고 장사 하셨으면 뭘 팔아도 꽤 많이 파셨을 것 같다.

 

 

채우려면 비우라 (학원 넷째 날)

난 몸이 나빠서 머리가 고생하는 타입. 그런데 머리가 좋지도 않음. 혼자 주법연구하고 유튜브보면서 배운 게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음. 소프트웨어가 엉망진창인 상태. 명령어들이 충돌을 일으키고 새로운 명령어는 실행되지도 않음.

나는 제대로 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동영상 찍어보면 전혀 다르게 타고 있음. 성립하지 않는 주법도 많고 비효율적인 주법을 몸에 익혀버린 탓에 결론적 연비가 나빠졌음.

다 버려야 함. 주법 많은 거 다 필요없음. 이소룡은 만가지 발차기를 연습한 놈은 하나도 안 무섭다고 했음. 그런데 한가지 발차기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은 무섭다고 했음.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함. 주법을 다양하게 구사할수록 조빱이란 게 쉽게 들통날 뿐. 다 버려도 됨. 만가지 주법 다 버려도 하나도 아깝지 않음.

망치를 들어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아야 함. 고통과 위험을 스스로 받아들여 극복하는 자-초인-이 되기 위해.

——— 기타학원에서(어렸을 때 호호깔깔 유모어집에서 읽은 구절) ———
기타 강습료가 얼마인가요?
> 십만원입니다.
저… 다른 곳에서 배운 적이 있는데 강습료를 절반으로 깍아주실 수 있나요?
> 그렇다면 이십만원입니다.
깍아주진 못할 망정 왜 두배가 돼요?
> 다른 곳에서 배우셨다면 잘못된 습관이 들어있을거에요. 잘못된 습관을 지우는 건 백지 상태인 사람을 가르치는 것보다 두배로 어렵습니다. 그러니 두배로 내셔야지요.
————————————————————————————————

스스로 백지의 상태가 되지 않으면 선생님은 올바른 가르침을 입력할 수 없음. 백지가 되지 않으면 수강료를 두배로 청구받게 될지도 모름. 이를 악물고 지워내야 함.

차사장님의 가르침, 친구의 훈수, 나름대로의 연구, 자덕유튜버의 자기주장, 다른 프로 선수의 설명, GCN콘텐츠, 이 모든 것을 버린다. 옳은거 틀린거 가리지 않고 모두 통째로 내다 버린다.

1. 모두 지운다.
2. 선생님이 “바로 그거에요” 라고 한 것만 남긴다.
3. 반복한다. 몸에 새긴다. 머리말고 몸에 새긴다. 머리로 이해하고 싶어지면 당장 생각을 멈춘다. 동작을 올바르게 수행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는다. 잘못된 습관을 덮어버릴 정도로 반복한다. 백지의 상태에서 학습하는 것보다 최소 다섯 배는 많이 반복해야 할 것.

…. 라는 각오로 학원에 갔는데
더이상 가르칠 게 없다며
평로라 거꾸로 타보라고 시키심
거꾸로 타지니까
댄싱까지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며
댄싱을 또 시키심
댄싱이 되니까
제일 가벼운 기어로 케이던스 50놓고 손놓고 타보라는
말도 안되는 서커스를 숙제로 내주심 ㅡㅡ;;;

종일 서커스 연습을 하다가 어느덧 열시가 되었고
여느날처럼 가파른 지하주차장 언덕을 오르는데
아니 이거 뭐야
왜 자전거가 저절로 올라가지
이상하다 싶어서 또 평지를 달리는데
어라 이상하다
자전거가 가만히 서있네
어허 거참 이상하다
자전거가 저절로 서서 가네
난 얹혀만 있고 얘가 자율주행을 하네
밸런스 미쳐따리 오져따리

자전거 SNS에 라이딩 로그를 남기곤 하는데 보는 사람 몇 없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아무렇게나 싸낸다.
지금까지 써오던 글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글을 써 본 것은 값진 경험이었다.
마음에 드는 대목들이 있어서 블로그에 복사기록한다.

 

라이더 정보 : https://www.strava.com/athletes/30110228


상암뱅뱅 * 10

지도를 보고 뱅뱅을 찾았다. 뱅뱅은 무정차구간이다. 뱅뱅을 찾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한바퀴를 크게 그릴 수 있는 곳을 우선 찾는다. 우측통행을 하는 도로에서 좌회전은 신호를 받아야 하지만 우회전은 신호와 상관없이 언제든 가능하다. 경로상에 삼거리나 횡단보도가 있어도 무정차에 방해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지나가거나 속도를 늦춰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사거리가 있다면 정차해야 하기 때문에 뱅뱅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무정차뺑빼이 구간은 총 열아홉 개로 다음과 같다. 성산, 상암, 상암롯데, 하노이*, 망월, 대덕, 향동, 정발산, 호수공원청평지, 경복, 백범, 효창, 운양, 용산, 고양종운, 광명스피돔*, 아라*, 올공, 공항로* (*표시는 이미 알려진 곳들)

새로 찾은 뱅뱅 중 하나를 조질 작정이었다. 노면이 마른 아침에 나가려 했으나 새벽에 잠이 안오는 것이었다. 새벽에 나가면 차량이 없어서 뱅뱅을 만끽하기엔 더할나위없이 좋다. 세바퀴만 돌리려고 나갔다가 열바퀴를 돌리고 말았다.

워밍업없이 무리했더니 근육이 다 찢어진 것 같다. 적당한 자극은 근육의 성장을 견인하지만, 과도한 자극은 근육의 파열을 야기한다. 사흘 정도는 걷지도 못할 것 같다.

20년 8월 16일

 

대덕뱅뱅 * 5 + 2

안녕~ 친구들!
아무도 안가본 뱅뱅을 찾아서 소개하는 RBTC(Robin’s Bangbang Training Club) 로빈 아저씨야~
오늘 소개할 코스는 대덕뱅뱅이야.

대덕뱅뱅은 고양시 덕양구 덕은동-대덕동에 걸쳐서 새로 만들어지고 있는 아파트단지도로를 타기 위해서 만들어진 코스야. 아파트단지는 22년 11월에 완공된다고 하니 내후년 가을까지는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그런 코스라고 봐.

다만 공사중이다보니 오가는 대형 트럭이나 공사차량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 언제 어떤 공사 때문에 뱅뱅을 돌리지 못하게 될지 사전에 전혀 예상할 수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해.

이런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코스를 추천하는 이유는 완전한 무정차 코스이기 때문이야.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 지점이 딱 두 곳 밖에 없고 이마저도 코너링을 과격하게 하면 브레이크 밟지 않고 통과할 수 있어. 평속에 환장하는 친구들이라면 정말 혹할만한 부분 아니겠어?

코스의 시작과 끝은 4시야. 5시부터 8시까지 약 1.9km의 구간이 공사중인 아파트단지의 주요 통행로이자 대덕뱅뱅의 메인 스프린트구간이야.

9시와 1시에는 20m짜리 깔딱고개가 있는데 탄력받아서 단숨에 넘어가버려야 해. 탄력을 잃고 평속 25이하로 떨어지게 되면 딱 기운이 빠져버리니까 기왕이면 평지에서 힘을 아끼더라도 고개를 넘는데 사력을 다하길 추천해. 그래야 뭔가 코스를 돌린다는 느낌이 들거야.

어이어이, 뱅뱅코스에 웬 20m짜리 언덕이 두개나 있냐며 불평할 평속충 친구들, 실망하진 마라구. 이 언덕을 넘어도 평속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 말이야. 내리막에서 페달을 밟지 않으면 40Km까지 속도가 오르는 완만한 경사가 펼쳐지기 때문에 오르막에서 감속한만큼 그대로 보상받을 수 있거든.

한바퀴 돌리면 5.7km에 약 11분 정도 소요되니까 한시간동안 5바퀴를 무정차로 돌린다는 목표를 세우면 같은 코스를 돌면서도 시간가는 줄 모르게 한계까지 밀어붙일 수 있을거야.

저녁 8시까지는 퇴근차량과 현장철수차량이 꽤 있었는데 9시가 지나면서 이동량이 현저히 줄었다는 점 참고하길 바라.

그리고 메인 스프린트 구간을 제외하곤 시골길 중에서도 상태가 꽤 안 좋은 편이니 홀, 자갈, 흙더미, 공사잔해는 조심해야 해.

9시 방향에 미친 흑구 한마리가 갑자기 뛰쳐나와 추격전을 펼칠 수도 있으니 물리지 않게 조심하라구.

아저씨는 대덕뱅뱅에 별 네개반 줄 수 있어.

카본 하이림이 수명을 다해서 뱅뱅에 맛들이자마자 싸구려 알루휠로 타야하지만, 대신 변명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다운그레이드라고 무조건 나쁜점만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지 뭐. 하하.

다음에 또 보자구.
요호호~

20년 9월 1일

 

개화뱅뱅 * 10

난 뱅소남! 뱅뱅을 소개하는 남자!
오늘 소개할 코스는~
바로바로바로~
개화뱅뱅!

지도에서 중식도 모양 찾아봐. 거기가 거기야. 개화뱅뱅. 제일 서쪽에 있어.

여기 도착하면 기억할 거 단 하나. 철조망을 오른쪽에 둔다. 그것 말곤 없어. 그러고 계속 돌아. 한바퀴 3.65km 평속 32로 달리면 7분쯤 나오니까 페이스 조절에 참고하시고.

그나저나 코스가 왜 저렇게 생겼냐. 저 꼬부라진 손잡이 모양. 지상철이 지하철이 되는 지점이야. 개화역은 9호선의 시작역이야. 개화역 빼곤 다 지하에 있지. 지하철과 경주하는 무한도전 같은 건 하지 말고. 걘 곧바로 땅굴로 사라질 거거든.

원래는 다른 뱅뱅을 가려했는데 오늘 하늘이 미쳤지 뭐야. 안되겠다. 하늘 많이 보이는 데서 돌려야겠다. 그래가지고 일이고 뭐고 내팽겨치고 여기 오게 된거야. 그래 맞아. 뱅소남은 하늘 보는 거 좋아해. 무일푼으로 스무일곱에 서울에 올라와서 지하방에 살….

됐고. 오늘은 조망권에 대한 얘기를 하러 온게 아니라서 말이야. 오늘은 말이야. 10바퀴를 돌리기로 작정해서 말이야. 나름대로의 전략을 짰단 말이야. 그 전략이 뭐냐면 말이야.

강약중중약 중약중중중

아~ 아주 도움되었어. That helped alot. 뱅소남이 자전거를 16년을 탔어도 한시간 넘게 무정차로 꾸준히 밟아본 적이 많이 없단 말이지. 그런데 해냈단 말이지. 그것도 아주 거뜬히.

회복과 전념의 계획이 구분되어 있는 상태로의 라이딩은 뭐랄까, 아주 안정적이야. 페이스오버라거나 중도포기라거나 잠시라도 멘탈이 흔들려서 타기 싫어져버리는 그런 나태의 마음이 조금도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해진 느낌이랄까. 처음 돌아보는 코스인데도 두려움이나 의심은 전혀 없이 오로지 질주와 완주를 향해서만 온 정신과 체력이 일치합동협력한 상태. 솔직히 10분짜리 업힐을 타도 중간에 아 시바 때려칠까 생각이 다섯번 드는데 오늘은 한번도 그런 마음이 안들었단 말이지. 그래서 더욱 뿌듯하단 말이지.

아, 쫌 아쉬운것도 있다! 시멘트 길이야. 약 65프로가 시멘트 길이야. 아스팔트도 있는데 거긴 또 과속방지턱이 6개 있네. 중간에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홀 3개 있다. 오늘은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물도 다섯 곳 있더라. 피치못할 감속구간은 두 곳 이다.

그래서~
뱅소남은~
개화뱅뱅에~
별점~
두구두구두구~~~
3.5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뱅소남은 고기 먹으러 갈게!
모두 즐뱅!

20년 9월 3일

 

국회뱅뱅 * 11

뱅린이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도 새로운 뱅뱅을 찾아 수도권 방방곡곡 헤집고 다닌 저는 뱅뱅매니아, 뱅마닙니다.

오늘 방역당국은 코로나 재확산을 억제하고자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를 일주일간 연장하기로 발표했죠. 이런 시기엔 떼라이딩보단 한적한 곳에서 솔뱅을 돌리는 것이, 나라의 방침에 협조하는 일이고 곧 애국의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다녀온 곳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한바퀴에요. 줄여서 국회뱅뱅이라 부를게요. 국회뱅뱅은 국회의사당 정문에서부터 출발해요.

국회뱅뱅은 이제껏 소개한 뱅뱅 중에서 가장 길이가 짧아요. 2.46km밖에 안돼요. 37km/h로 달리면 한바퀴 4분컷. 얼마나 짧은지 열바퀴 돌리려다 실수로 한바퀴를 더 돌려버렸어요.

과속방지턱이 대여섯개 있었던 것 같고, 두 개의 코너가 있는데 브레이크를 잡지 않아도 약간의 감속만으로 진입할 수 있어요.

오늘은 별점부터 줄까요?
빠밤-
5.0 드리겠습니다!

국회뱅뱅은 여의도 가장 서쪽 도로인 여의서로를 달리는 게 메인인 코스인데요, 여기 줄지어 있는 나무들은 벚꽃이에요. 여의서로라고 검색하면 벚꽃 핀 풍경만 나올거에요. 벚꽃축제 기간엔 차량을 통제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4월에만 사람들이 몰리고 그 외의 기간엔 아무도 찾지 않죠.

이렇게 좋은 코스를 8명 밖에 타지 않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요. 길 예쁘죠. 완전 무정차죠. 도심지에 있죠. 차없죠. 사람없죠. 자전거도 없어요. 있는 건 나무랑 의경이에요. 둘다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서있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국회의사당 주변에 의경아저씨가 많다고 겁낼 필요가 없어요. 군인들은 하달받은 명령대로만 움직이거든요. “난봉꾼이 나타나면 잡아와”라는 지시를 받았다면 저를 제재했겠지만 그들은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어요. 추측컨대 “가만히 서있어”라는 지시를 받은 것 같아요. 자유를 만끽하는 민간인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부러움이란 감정을 읽을 수 있었어요. 그들이 저를 의식하는만큼 저는 더 열심히 달렸어요.

아직 뱅뱅을 돌려보지 않은 뱅린이가 있다면 뱅뱅은 체력으로 타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멘탈로 타는 거에요. 특히 솔뱅은 더욱 그래요. 솔뱅의 목표는 내가 정하고 내가 달성해요. 지금 당장 마주할 한시간 동안 “나는 쉬지않고 몇 W를 유지할 수 있는가.” 또는 “평속을 몇 km/h이하로 안 떨어뜨릴 수 있는가.” 이런 간단하고 단순한 목표를 세우는 거에요.

중요한 점은 충분히 달성가능한 목표를 세우는 거에요. 쉬운 목표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점진적으로 높여야 해요. Winning Habit을 위해서에요. 승리의 습관. 너무 쉬운 목표를 세우는 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목표를 너무 쉽게 달성했다면 남은 구간의 페이스를 올리거나 바퀴수를 추가하면 그만이거든요. 내가 세운 목표를 초과달성함으로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확인하는 게 중요해요.

그래서 흔히들 말하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표현도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이 악물고 근성으로 이겨내는 혹독한 느낌이 아니거든요. 경쟁이라는 프레임에서 완전 벗어나야해요. 솔뱅은 그 무엇과도 경쟁하지 않아요.

저는 알아요. 일년에 만키로를 탄 사람을 이길 수 없단 걸.
저는 알아요. 타고난 사람은 따로 있단 걸.
저는 알아요. 제 자전거 구린거.
저는 알아요. 초기화돼서 세달 전보다 훨씬 못타는거.
저도 알고 모두가 아는 현실을 외면한 채로 이상을 추구하진 말아요.
나를 고려하지 않은 채로 외부의 기준에 따라 목표를 세우진 말아요. 비현실적인 목표를 세워서 실패한 경험이 쌓이면 Losing Habit이 생기거든요. 이내 포기를 쉽게 생각하게 될거에요. 어느 순간 시도도 하지 않고 “난 안될거야” 생각하게 될거에요. 생각이 습관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아요.

솔뱅을 돌리다보면 이런 생각이 순서대로 들거에요.

아직 1/5밖에 못 돌았네
아직 1/3밖에 못 돌았네
아니벌써 1/2이나 돌았네
이거웬걸 1/3만 더 돌면 되네
아아십네 1/5밖에 안남았네
와따야마 벌써 다 탔네?

솔뱅의 매력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제자리를 도는 게 무의미하다 생각할지 몰라도, 돌려본 사람은 다 알아요.

그 모든 바퀴가 다 다르다는 걸.

무정차로 꾸준히 뱅뱅을 돌릴 동기는 꾸준한 진척을 지켜보는 데서 와요. 하지만 길이가 너무 긴 코스는 진척이 너무 더뎌서 잡생각이 날 수 있어요.

국회뱅뱅은 한바퀴의 길이가 짧은 만큼 멘탈 변화의 단계가 빨리 찾아와요. 멘탈이 흔들릴 여지조차 주지 않고 어느새 성공은 코앞에 다가와있죠. 별점 만점을 주면서까지 뱅린이에게 추천하는 이유에요.

20년 9월 4일

 

망원트랙 * 100

안녕하세요, 뱅뱅에 미친남자 미치뱅입니다.
여러분 BBTC라는 클럽을 들어보셨나요? 수도권에서 돌릴 수 있는 뱅뱅코스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훈련하는 클럽입니다. BangBang Training Club. 어제 만들어진 클럽이라 다들 처음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뱅뱅을 탐사하고 있지만 제 라이딩 기록은 live feed에서 한 번 보여진 뒤 휘발됩니다. 정보를 기록하고 조회하기 편하도록 분류하는 archiving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이 클럽에 제가 찾은 뱅뱅 코스정보를 정리해둘 계획입니다. 올 가을까지 약 20여개의 수도권 뱅뱅을 탐사하는 것을 목표로 두고 있습니다.

저 미치뱅, 지금은 뱅뱅만 돌리지만 두어달 가지 않아 흥미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단기과몰입형인 저, 제가 잘 압니다. 하지만 제게 뱅뱅현타 찾아오더라도 뱅뱅 탐사 프로젝트의 성과는 길이길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잘 정리된 코스 정보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호인 뿐만 아니라 후대의 자덕들에게도 라이딩의 새로운 면면을 찾을 수 있는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제 뱅뱅탐사의 가장 큰 동기이며 그것만으로 충분한 보상입니다.

아무쪼록 오늘은 망원트랙에 다녀왔습니다. 일년 전부터 벨로드럼을 타보고 싶었으나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에 자전거를 탈 수 있는 트랙이 떡하니 있었습니다. 비록 경사가 없는 평지 트랙이었지만 제가 원하던 무정차 뺑뺑이를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곳은 망원유수지체육시설 또는 망원유수지공원으로 불립니다. 유수지라함은 홍수가 발생했을 때 하천 수위를 일시적으로 낮추기 위해 빗물을 옮겨담아두는 인공 저수지를 말합니다. 유수지시설은 평소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기에 이렇게 근린체육시설로 활용하거나 주차장으로 씁니다. 다만 5~10월에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비 때문에 주차장은 폐쇄됩니다.

망원동은 본디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굽이쳐 흐르던 한강을 직선화하기 위해 높은 제방을 쌓고 복개하여 만들어낸 땅입니다. 고도가 낮다보니 비가 올 때마다 물난리가 났고 73년에 유수지가 만들어진 후에야 사람들이 터를 잡기 시작했다 합니다. 그 전에는 둑방 판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니 난지 쓰레기섬과 함께 서울 최대의 슬럼가였던 곳입니다. 너무 충격적인 사실이기도 하고 조금 찝찝하단 생각이 들어서 제가 좀 딴데로 샜습니다. 죄송합니다. 코스 소개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번 코스의 이름은 뱅뱅이 아닌 트랙입니다. 뱅뱅은 연구하고 탐사해서 찾아내야 하는 것이고 트랙은 애초에 달리기 위해 만들어진 길입니다. 뱅뱅과 트랙은 회전방향도 다릅니다. 뱅뱅은 신호정차를 피하기 위해 시계방향으로 돌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트랙은 시계반대방향으로 돕니다. 제가 탐사할 20개의 코스 중 유일하게 CCW(Counter Clock Wise)로 돌릴 수 있는 곳입니다.

달리기를 CW로 돌릴 때와 CCW로 돌릴 때를 비교했더니 CCW방향이 200미터 기준으로 1초 가량 더 빨랐다는 실험결과를 어릴 적 호기심천국에서 보았던 것 같습니다. 오른팔을 크게 흔들 수 있는 왼쪽 커브가 오른손잡이에게 편하다거나, 심장이 왼쪽에 있어서라거나,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지만 어떤 것도 확실하게 증명되진 못했습니다. 어쨋거나 저쨋거나 많은 선수들이 왼쪽으로 도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국제육상연맹은 1913년부터 뺑뺑이는 왼쪽으로 돌아라고 명문화했습니다.

사족동물이나 자전거도 왼쪽으로 돌려야 성적이 잘 나오는지까진 모르겠으나 관객이 있을 경우 골인지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지나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에 경마장이나 경륜장이나 다른 각종 대회장도 자연스럽게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도 좀 TMI네요. 코스 소개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망원트랙은 세 줄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가장 가운데는 달리기용, 중간은 인라인스케이트용, 가장 바깥은 자전거용입니다. 꽤 넓습니다. 달리기 트랙을 돌면 한 바퀴 400미터입니다. 바깥쪽 자전거 트랙으로 돌리면 460미터입니다. 오늘은 무정차 100바퀴를 돌려 46키로를 탔습니다. 비오는 날 커브에 접어들 때 슬립나지 않을지 걱정했으나 바닥의 접지력은 좋았습니다.

비오는 날이었음에도 트랙엔 6명 정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맑은 날 저녁에 평속 30이상으로 달리면 보행자 분들과 위험한 상황이 수차례 발생할 것 같습니다. 나 운동 좀 하자고 시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진 않아 일부러 비오는 날 탔습니다. 비오는 날 타기엔 더없이 좋은 코스인 것 같습니다. 마침 자전거에 진흙도 많이 묻어있던 터라 일거양득으로 세차도 할 수 있었습니다. 트랙에 고인 물은 맑디 맑은 빗물이었습니다. 80바퀴쯤 돌리니 물통에 물이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입을 좀 열고 탔더니 앞바퀴가 뿌려 올리는 물방울로 갈증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90바퀴째부턴 쿨다운하려고 페이스를 늦췄는데 어두운 수풀 속에서 원숭이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상하다, 이런 곳에 짐승이 있을 리가 없는데… 생각하며 91바퀴째 같은 지점을 지났습니다. “우.. 우욱!! 우꺅!!!!!” 이번엔 분명히 들렸습니다. 뭐지? 92바퀴째 그 소리는 더욱 크고 선명해졌고 개체수는 추정컨대 3마리 쯤으로 늘어났습니다. 94바퀴째 정체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를 응원해주는 여성분들이었습니다. 오밤중 불꺼진 유수지 공원에서 빗속을 가르는 라이더의 수중투혼은 흔히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나봅니다. 그들의 나이대를 짐작해보았습니다. 조금도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저는 여고생 여대생 아줌마를 불문하고 원숭이 소리를 내는 여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짐승이 아닐거란 생각에 일단 안심한 저는 어두운 수풀 지점을 지날 때마다 스프린트 댄싱을 쳐서 더욱 큰 환호를 유도했습니다. 응원해주는 고릴라 무리가 있었던 덕에 마지막까지 페이스를 늦추지 않고 무정차 100바퀴를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제가 말이 유난히 많은 것 같습니다.
빨리 별점 매기고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4.5입니다.
모두 즐뱅하세요.

그리고 혹시 망원트랙을 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셨다면
방문객이 적은 시간대에 찾아가시길 추천드리며
고릴라를 조심하세요.

20년 9월 7일

 

목운트랙 * 32

“좋은 뱅뱅있으면 소개시켜줘” 좋뱅소TV의 조퐝메이입니다.

오늘 다녀온 곳은 목동 종합운동장 트랙입니다. 별점 4.5입니다.

체크포인트는 북문에서 시작합니다. 야구장과 주경기장 두 개를 묶어서 바깥으로 돌립니다. 자전거 타라고 만들어놓은 길은 아닙니다. 코로나 때문이겠지만 차량이 없어서 지금 가면 달리기 딱 좋습니다. 완전 무정차코스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코너링이 익숙해지면 감속하지 않으면서 페달을 종일 굴릴 수 있습니다.

한 바퀴가 1.09Km입니다. 33km/h 놓고 타면 한바퀴에 딱 2분 걸립니다. 2분으로 30바퀴 돌리면 1시간 무정차 훈련이 가능해집니다. 이 계산을 기준으로 32바퀴 돌려 1시간을 채웠습니다.

과속방지턱이 9개쯤 됩니다. 가쪽으로 붙어서 가면 충격을 덜 받을 수 있습니다. 잘 닦여진 아스팔트 위에서 과감한 코너링을 할 때 바닥에 달라붙는 맛이 좋은 코스입니다. 길 옆에는 평지와 높이가 같은 대리석 연석이 있는데 코너링을 한 뒤 연석을 살짝 밟고 다시 도로로 들어오면 마치 F1레이싱카의 코너링을 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멋짐이 막 넘쳐 흐르기 때문에 또 힘을 내서 돌릴 수 있게 됩니다. 한 바퀴의 3/4지점에 5미터 정도의 완만한 언덕이 있습니다.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고 탄력으로 넘겨버리는 것이 페이스 유지에 도움되므로 댄싱을 치거나 외전근 밀어내기로 꾹꾹 밟아 올라가면 좋습니다. 이 오르막이 있기에 오히려 지루함이 줄어들고 몸이 코스에 따라 리듬감있게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지 실감이 안나는 분들을 위해, 한 바퀴를 돌릴 때 페달을 열심히 굴리는 것 외에 해야 하는 것들을 순서대로 나열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코너에서 아웃인으로 과감하게 눕히기
코너에서 파워높여 튕겨나오듯 인아웃하기
맨홀피하기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아웃인을 대비해 가쪽으로 연석밟고 달리기
아웃인아웃 코너안쪽 과감하게 찍기
코너에서 잃은 속도 다시 올리기
물마시기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댄싱으로 업힐 공략하기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S커브 감속없이 아웃인인아웃으로 빠져나오기
연석에 살짝 올라탔다가 도로로 복귀하기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내리막길 에어로 모드로 바람 가르기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연석 살짝 올라타기
과속방지턱 살살 피해넘기
골인지점까지 라스트 스프린트

2분이 채 안되는 시간에 위 내러티브가 쉴새없이 채워집니다. 이런 것들을 신경쓰지 않고 타면 그냥 지겨운 뺑뺑이입니다.

하지만 F1카레이서가 모든 코너링에 최선을 다하듯 온 신경을 곤두세워 최적의 경로로 지나가겠다는 목표를 설정하면 더욱 재밌게 탈 수 있고 과속방지턱도 더이상 장애물이 아닌 공략대상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20년 9월 8일

 

경복뱅뱅 * 10

뱅뱅오타쿠 오타뱅의 “오늘도 탄다 뱅뱅!”
오늘 다녀온 코스는 경복궁 열바퀴입니다.

지금까지 총 10개의 뱅뱅을 돌아보았습니다. 이로써 뱅뱅탐사 시즌1이 종료되었습니다. 시즌2는 할지말지, 한다면 언제할지, 기약 없습니다. 10뱅의 요약은 <아래>에 붙여 정리합니다.

가는 길에 홍제동을 지나다 가파른 언덕을 만났습니다. 근래에 평지만 뺑뺑 돌다가 만난 언덕, 얼마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댄싱을 조졌는데 와 이게 바로 자전거의 맛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즌1 종료를 단호하게 결심했습니다.

줄창 뱅뱅만 타니까 솔직히 이제 뱅뱅 재밌는 줄 모르겠습니다. 콘셉도 다 떨어지고 남아있는 아이디어도 억지노잼입니다. 콘셉만 잘 정해지면 글이 술술 나오는데 콘셉이 어설프니까 글도 잘 안나옵니다. 오타뱅은 뭐고 오타쿠는 또 뭡니까. 개연성도 없고 파생되는 것도 없고 언어유희도 아니고 해석할 것도 없고 반전도 없고 그냥 마 억지콘셉인겁니다.

오타뱅 아니고 안타뱅입니다. “안탈란다 뱅뱅따위” 돈나오는 일도 아닌데 저도 마 대충 아무말이나 지껄이고 빨리 누워 잘랍니다. 여러분도 이런 뻘글은 그만 읽으시고 우리집 고양이 사진이나 감상하시고 생업으로 돌아가 현실세계에 집중하십시오. 스트라바는 인생의 낭비입니다.

경복궁에 도착했을 때 저에겐 두 가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 시즌1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유종의 미를 거두자. 둘, 컨디션도 안 좋은데 어차피 시즌 끝난 마당에 대충 타다 집에 가자. 두번째 마음에 가까웠습니다. 레임덕이 온 거지요.

한시간 무정차를 채우려면 15바퀴를 돌려야 하는데 10바퀴만 돌리고 돌아왔습니다. 저녁에 혼자 피자를 한판 다 처먹지만 않았어도 더 열심히 탈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좀 더 열심히 탔다면 뱃속에 있던 피자가 다 튀어나왔을 것 같습니다.

청와대 앞길이 24시간 개방된 것은 2017년도 부터입니다. 50년만의 개방이라 합니다. 그 전엔 일과시간에만 통행할 수 있었답니다. 개방되었어도 경비원 많습니다. 총들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자전거로 뺑뺑이 돌지마라고는 안 합니다.

완전 무정차구간이고 전구간 자전거도로가 있습니다. 평점 4.0드립니다.

6시부터 시작입니다. 11시까지 약오르막이고 12시까지 급격한 언덕이 있습니다. 1시부터 다운힐이 시작되어 50키로까지 올라갑니다. 탄력을 유지해 40키로를 유지하다 체크포인트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급격한 오르막에서 탄력을 유지해 30키로로 넘길지, 전체적인 페이스를 고르게 분배해 25키로로 넘을지에 따라 경복뱅뱅을 돌리는 리듬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다운힐에서 페이스를 늦춰 주행한다면 효율적인 주행에는 도움될겁니다. 하지만 다운힐에서 얻은 속도를 에어로 자세로 바람을 가르며 45키로를 유지하며 최대한 버텨보는 것도 꽤 재밌습니다.

< 아 래 >
아라뱅뱅 4.46km 8:16 32.4km/h 224W 1.5
용산뱅뱅 6.51km 11:42 33.4km/h 215W 2.5
상암뱅뱅 5.22km 8:22 37.5km/h 256W 3.5
서식뱅뱅 3.12km 5:17 35.4km/h 220W 3.5
대덕뱅뱅 5.72km 10:35 32.5km/h 225W 4.5

개화뱅뱅 3.65km 6:21 34.6km/h 273W 3.5
국회뱅뱅 2.46km 3:59 37.1km/h 272W 5.0
망원트랙 0.46km 0:45 37.1km/h 280W 4.5
목운트랙 1.09km 1:45 37.5km/h 287W 4.5
경복뱅뱅 2.61km 4:15 36.9km/h 249W 4.0

20년 9월 10일

 

“건강한 몸매를 원하십니까?”

누구나 기억하는 광고 문구다. 제품을 팔지 말고 고객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교과서적 가르침을 지켰다. 고객은 쇳덩이를 사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몸매를 구입하는 것이다. 쇳덩이라면 오만 원도 아깝겠지만, 건강한 몸매를 가질 수 있다면 오십만 원도 쓸 수 있다. 고객의 문제에서 출발해 제품으로 향하는 것은 판매의 기본이다. 모든 광고는 이 기본원칙을 준수해 만들어진다.

제품의 값어치는 고객 문제의 크기에 비례한다. 문제가 클수록 비싸게 팔 수 있다. 그래서 판매자는 고객이 문제를 크게 인식하도록 부추긴다. 작은 문제는 부풀리고 없는 문제도 만들어낸다. 불안을 조장하고 공포를 유발하는 판매 방식은 지푸라기도 십 억에 팔 수 있는 고급 기술이다. 사람을 물에 빠트린 뒤 지푸라기를 내밀면 된다. 지푸라기를 팔겠다고 사람을 물에 빠트리는 것도, 물에 빠졌을 때 십 억을 내고 지푸라기를 사는 것도 이 곳에선 정상이다. 건강한 시장에서 일어나는 합법적 거래다.

판매자는 모든 대화를 구매로 귀결시킨다. 나도 꽤 팔아본 사람인지라 그들의 공격 패턴을 훤히 읽을 수 있다. 판매 의도를 가진 누군가가 접근한다면 어디 한 번 지껄여 보란듯이 지켜본다. 그들이 아무리 다양하고 창의적인 공격을 펼쳐도 나의 방어는 한결같다.
“안사요”
모든 종류의 창을 막아내는 만능 방패다.

 

자전거를 타면서도 쉴 새 없이 공격받았다. 속도를 더 내고싶다 했더니 뭘 사야 한대, 삭신이 쑤신다 했더니 뭘 바꿔야 한대, 훈련을 제대로 하고싶다 했더니 또 뭘 사야 한대, 멀리 가려고 했더니 뭐가 필요하대, 자전거 얘기를 할 때마다 지갑을 열어래. 그래서 입 닥치고 가만 있었더니 먼저 다가와서 문제가 많대. 20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잘 탔다 했더니 자기가 볼 땐 너무 위험해서 곧 사고가 날거래. 이놈들이 나를 아주 물에 빠트리려고 작정했나보다. 뻔히 들여다보이는 유치한 수법이구먼.

“안사요” 방어모드로 일관했지만 이번 공격은 왠지 끊이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났다.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붇고 소금을 뿌릴 참이었다. 그러다 눈을 마주쳤다. 초점없는 광신도의 눈이었다. 판매자가 아니었다. 소비자였다. 딴에는 날 위한답시고 조언했지만 의도치않게 공격이 된 것이다. 이들은 진심으로 돈을 쓰는 게 이로운 것이라 믿고 있었다.

 

판매자를 대신해 서로 물에 빠트리고 돈을 안 쓰면 큰일난다고 호들갑떤다. 자본주의 피착취계급이 자가증식하는 신비로운 관경이다. 부익부빈익빈이 왜 갈수록 심해지는지에 대한 근본적 원인을 찾았다. 가난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나. 인류 역사상 존재했던 어떤 종교나 이념도 이정도의 전파력은 갖지 못했다. 개인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디어환경에선 잘못된 신념이 더욱 빠르게 퍼진다. 자전거 레이스는 하덜 않고 경쟁적인 소비 레이스만 펼친다.

돈을 한 웅큼 쥔 채로 문을 박차고 들어와 “Shut up and take my money”라고 외치는 고객을 물에 빠트릴 필요는 없다. 더러운 작업은 하지 않고 신성한 구세주 역할만 하면 되니, 판매자는 신이 나서 고객의 엉덩이에 최고 호갱등급 도장 VVIP를 찍어 준다. 감격한 호갱은 펄쩍 뛰어올라 발로 박수를 치고 앞돌기를 한 뒤 착지와 동시에 넢죽 엎드려 절을 두 번 한다. 감격의 눈물을 닦으며 다음달 월급도 모조리 갖다 바치겠다 맹세하고 뒷걸음질치며 퇴장한다.

 

자전거 고객의 소비행태는 기존의 구매행동이론으론 설명되지 못한다. 기존 이론에선 상품을 보아야 구매의사가 생긴다고 전제한다. Attention Interest [발견>관심] 순서다. 1920년도에 정립된 구매행동이론 AIDMA도 2010년도 미디어 환경변화에 맞춰 개정된 AISAS도 모두 AI단계가 선행한다.

하지만 요즘 고객은 다짜고짜 ASS다. Action Search Share [구매결정>검색>자랑] 어떤 상품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로 기변 결심부터 한다. 돈이 생기는 족족 다 털어버리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상품을 검색해 예정된 소비를 하는 셈이다.

 

너무 소중한 나머지 제 구실을 못하는 제품들이 있다. 아껴 써야 하는 수첩, 비를 맞히면 안 되는 가방, 한 달째 비닐포장 뜯지 않은 새 차, 김치국물 한 방울 튀었다고 종일 기분이 우울해질 정도로 비싼 정장. 닳는 게 아까워서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지는 명품 신발. 그런 신발을 신고 어떻게 달리겠는가? 달리는 게 목적이라면 닳아도 아깝지 않을 신발을 신어야 한다.

자전거도 너무 비싸면 제구실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 자전거가 월급보다 비싸면 마음껏 밟을 수 없을 것이다. 난 월급이 작아서 중국산 가품을 타지만 대신 마음껏 찢어발길 수 있다. 자전거는 밟고 뜯고 비틀어 당겨서 밀고 던지고 엎어치듯 찢어발겨 타는 것이다. 타다 보면 기름때도 묻고 닳고 망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건 보물이 아니다. 탈 것이다.

 

돈이 썩어 남아서 자전거에 수천만원을 쓰건, 없는 잔고를 쥐어짜 장만하건, 미래를 저당 잡혀가면서까지 빚내 지르건,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다. 나도 판매자들의 소비조장 공격이 달갑지 않듯이 내 자산운용 철칙을 알려주는 것도 상대방에겐 불쾌한 일일 것이다.

“정녕 당신의 인생이 자본주의 소비이념을 전파시키기 위한 숙주로 쓰이다 내팽개쳐져도 괜찮단 말입니까? 깨어나서 주체적 삶을 살아가십시오.”
라고 내 진심을 전하는 순간 그들은 나를 광신도 쳐다보듯 할 것이다. 이어서 나의 공격을 막아낼 만능 방패를 들어올릴 것이다.
“니는 니 대로 살아라(live) 내는 내 대로 살게(buy)”

 

같을 同, 좋을 好. 같은 걸 좋아해야 동호인인데 내가 자전거 쇼핑 동호회로 잘못 찾아왔나 싶다.

당신과 나 사이에 라이딩의 즐거움이란 교집합이 존재하길 바랄 뿐이다.

마르코 판타니라는 라이더를 알게 된 이유는 단순히 그가 빡빡이이기 때문이다. 머리숱이 풍성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도 몇년 전부터 머리가 한웅큼씩 빠지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약을 추천했지만 나는 세월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라고 대꾸하며 무시했다. 그렇게 일말의 저항도 하지 않고 머리털의 절반을 떠나 보내었다. 보름 전 엄마는 아들의 두피가 훤히 들여다보이자 크게 놀라시었다. 당신의 자식도 당신만큼이나 늙고 있다는 것을 평소엔 의식하지 못했던 탓인지 꽤나 큰 충격을 받으시었다. 지난 주 미용실에 갔을 땐 계획에 없던 파마를 했다. 떠나고 나서야 허전함을 알게 된다는 말이 이런 걸 뜻하는 것일까.

대화의 주제로 탈모가 거론될 때마다 나는 대머리가 뭔 대수냐며 너스레를 떤다. 대머리가 되면 열 방출이 빨라지기 때문에 자전거를 더 잘탈 수 있는 공짜 튜닝이라고 농을 던진다. 상황을 희화시키고 억지 웃음을 짓는다고 해서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에 애써 외면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그 시기를 조금이나마 늦추는 정도. 대머리가 되는 것은 남자라면 받아들여야 할 필연적 운명이다.

이러니 최근 판타니의 민머리가 더욱 강렬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졌나보다. 민망한 핑크색 저지, 귀걸이, 흉악하게 생긴 얼굴을 보았을 때 첫인상이 좋진 않았다. 코도 왠지 나의 것과 비슷한 모양이라 기분이 나빴다. 머리가 빠져서 대머리가 된 것일까, 머리가 빠지지 않았음에도 빡빡 민 것일까… 허튼 생각이 이어지다 문득 그의 댄싱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댄싱은 자전거탈 때 하지 말라는 짓들을 모두 모아놓은 모습이었다.

업힐에서 드롭바 잡지 마라.
케이던스 무겁게 타지 마라.
댄싱할때 자세 웅크리지 마라.

상식이 파괴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자세에 대해 훈수할 수 없다. 그가 세운 알페듀에즈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그의 라이딩을 흉내냈다. 케이던스가 30아래로 떨어지도록 기어비를 무겁게 잡았다. 근육의 자극부위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드롭바를 잡고 궁디를 띄워 지긋이 누르고 돌렸다. 그가 이 자세로 타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해하기 어려웠다. 리고베르토 우란의 햄스트링 활용 토크주행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해 우란의 것을 따라했다. 둘의 주법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판타니의 것이 무엇인진 찾아내지 못했다. 그렇게 고개 두개를 넘겼다.

댄싱으로만 타는 세번째 고개를 맞이했을 때 알게 되었다. 그가 사용한 근육은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근육이었다. 둔근이었다. 우리 신체 중에서 가장 크고 긴 근육. 둔근을 사용하는 댄싱인 것이다. 이 댄싱은 콘타도르의 댄싱과 정반대에 놓여 있다. 이번에도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알아냈다. 궁디 뒤로 빼고 수평으로 밀어내기 주법을 댄싱화한 것이다. 똑같은 원리이지만 궁둥이를 들고 핸들의 포지션을 낮춤으로써 둔근의 자극이 극대화된다. 핸들이 아래로 내려가니 자세는 앞으로 꼬꾸라져 다리를 통해 전달되는 힘에 체중까지 실린다.

근육의 작용만 보자면 자전거 위에서 데드리프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오른팔로 당기고 오른다리로 민다. 왼팔로 당기고 왼다리로 민다. 당길 때는 광배근을 써서 과감하게 당길 수 있다. 다리에 가야할 대미지를 상체가 효과적으로 분담한다. 밸런스도 쉽다. 신체의 좌측과 우측이 한번씩 번갈아가며. 왼팔왼다리가 일할 땐 오른쪽은 아예 쉴 수 있다. 정말 단순하고 경쾌한 리듬이다.

흡사 무엇인가를 발로 밟아 고정시킨 뒤, 찢어버릴 각오로 당겨올리는 느낌이다. 예초기 시동거는 느낌이랄까. 우물에서 물 떠올리는 느낌이랄까. 뿌리채소를 수확하는 느낌이랄까. 물고기를 뜰채로 떠올리는 느낌이랄까. 꽉 끼는 청바지를 입는 느낌이랄까. 친구 발목을 잡고 가랑이 맛사지를 해줄 때의 느낌이랄까. 엑스칼리버를 뽑는 느낌이랄까. 내 몸은 이미 이 동작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 주법에서의 페달은 밟는 게 아니다. 돌리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밀어내는 것에만 집중하면 다리의 관절 각도와 크랭크가 환상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원운동으로 변환시켜준다.

자전거 위에서 우리의 신체는 갇힌다. 페달과 핸들이라는 좁은 공간 안에 몸을 말아넣어야 한다. 갇힌 상태에서 둔근을 활용해 기지개를 펴고 뻗어 나가는 듯한 동작. 흡사 새 생명이 알을 깨부수고 나오는 관경이다. 희열이 끓고 축복이 내리쬐며 갤러리는 환호한다. 생명력이 폭발하는 탄생의 순간. 나는 오늘 판타니로 다시 태어났다. 이제 대머리가 되어도 여한이 없다.

 

두바퀴를 돌고나니 제자리다.
돌고 도는 자전거가 무슨 의민가 싶어 한동안 누워 하늘을 보았다.
서울의 하늘은 밝았다. 내 자전거의 전조등도 저 밝음에 조금을 보태고 있으리라.

완전 진 벚꽃과 반쯤 진 벚꽃 아래에서 계절의 변화를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보냈던 봄이다. 작년에도 맞았던 여름이다.
돌고 도는 것은 내 자전거만이 아니다.

밀었다 당겼다
뻗었다 접었다
올렸다 내렸다
잡았다 놓았다
가볍게 무겁게
빠르게 느리게
이렇게 굴리고 저렇게 굴리고
굴리는 방법이 다 달라도
세 개의 동그라미는 제자리에서 돌아갈 뿐이다

자전거는 유난히 잘 돈다
돌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여서일까
제 존재의 숙명대로 그저 하염없이 돌기만 한다

내 인생에서 아직 한바퀴를 돌려보지 못한 것은 내 인생 뿐이다
그것말곤 모든 것이 돈다
끊임없는 순환이다

채우면 비워야 하고
비우면 다시 채운다
찾아오면 떠나고
떠나면 찾아온다
올라가면 떨어지기 마련이고
바닥을 치면 올라갈 일만 남는다

두바퀴를 돌고나니 제자리다.
돌리고 돌려서 제자리에 온것이
느닷없이 낯설게 느껴진 연유를 모르겠다
굴림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서울의 하늘은 밝았다.

누군가의 낙선
누군가의 작별
누군가의 발암
그들의 사건도 저 밝음에 조금을 보태고 있을까

그대들도 처음 돌려보는 인생이겠지만
자전거는 한번쯤 타봤을 터이니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믿어주길 바란다

일 보고 집에 오니 8시다. 밥 먹으니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었다. 이 때는 운동하기 적합하지 않다. 식사 후 3시간은 지나야 운동하기 적합하다. 고등학교 때 아침먹은 직후인 1,2교시는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잤다. 쉬는 시간에 빵하나 처먹으면 또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되어 3,4교시를 잤다. 점심시간에 밥 묵고 5,6교시를 잤다. 그 뒤에 달리기를 하고 와서 피곤해서 잤다. 저녁 묵고 야자시간에 잤다. 독서실 가면 휴게실에서 온게임넷 스타리그 보면서 컵라면 하나 말아먹고 또 잤다. 다 부교감신경 때문이었다. 아무튼 오늘도 그놈의 부교감신경이 활성화된 탓에 밥 먹고 바로 잤다. 밤 10시가 되어서 정신이 들었다. 할머니의 걱정대로 소가 되어 있진 않았다. 난 소띠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무렴 상관없는 일이다. 옷을 챙겨입고 하늘-노을 공원을 조지러 갔다.

 

너무 늦은시간이라 그런지 공원 샤따 내렸다. 2분 30초짜리 업힐 연속 열개 타면서 다리를 함 조져볼까 했는데 아쉬운대로 중간길 언덕을 탔다. 오히려 1분 30초 짜리 업힐이라 인터벌에 더 적합했다. 좋다. 오늘은 이걸로 10바퀴다.

 

 

▣ 인터벌 한사이클

정방향 24미터 오르막 1:30 > 0:40 쉬고
역방향 17미터 오르막 0:50 > 2:30 쉬고

 

▣ 심박 해킹의 개요

내 최대 심박은 191이 아니었다. 심박을 올리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찾아냈다. 케이던스가 아니었다. 호흡도 아니었다. 근력이다. 호흡이 가빠지면 심박이 따라 올랐기 때문에 심-폐를 묶어 생각했다. 그것이 고정관념. 난 여태 심박에 큰 무리를 준 적이 없었나 보다. 무리를 주는 방법도 몰랐다. 항상 다리가 먼저 털리거나 숨이 턱까지 차올라 목구멍이 따가워졌으니까. 근력-심박-호흡 중에서 호흡이나 근력의 한계에 갇혀 심박은 제대로 일한 적이 없는 것이다. 심박의 능력을 최대로 발동시키는 것은 간단한 원리였다. 무산소 상태에서 근력을 최대한 끌어다 쓰는 것이다.

무산소 상태에서 빠르고 강하게 근육을 탈진시킬수록 심박에 강한 구조요청신호가 전달된다. 구조요청신호가 강할수록 심박은 급발진한다. 문제는 어떻게 다리가 털리지 않고 더 많은 에너지를 순간적으로 소진하는지다. 40초 동안 시팅으로 500와트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정도 빠워는 내모메 무리데스. 근전환을 해도 30초만에 다 털린다. 가장 큰 근육인 둔근과 외전근을 써도 400을 넘기지 못한다. 다리가 다 털려 일을 하지 않으니 심박에게 요청신호를 보내지도 않는 것이다. 더욱 폭넓은 근육의 동시사용이 필요하다.

 

▣ 심박 해킹 매뉴얼

15초 무릎치기내전근댄싱으로 600와트 낸다.
20초 무릎치기외전근댄싱으로 500와트 낸다.
10초 외전근시팅으로 400와트 낸다.
나머지 시간은 어떤걸로든 전환시켜 침을 질질 흘리며 300와트 이상 유지시킨다.

이러면 10회전을 하면서도 1:30동안 350와트 이상 낼 수 있다. 젖산이 쌓이려고 할 때 쯤 휴식기에 접어드니 다리가 털리지 않는다.
15-20-10을 똑같이 한 이후 200와트로 설설 탔더니 구조요청신호가 끊겨 심박이 170까지만 올라간 뒤 멈췄다. 심박이 오르는 동안 계속 산소부족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 주법의 개선 – 무릎치기 댄싱

온몸의 근육을 단기간에 최대한 활용하는 댄싱이다. 어떤 강좌나 댄싱분석영상에서도 본적이 없어서 내멋대로 이름을 붙였다. 핸들바에 무릎을 찍는다는 느낌으로 당기다가 발견했는데 내 잔차는 프레임이 작아서 실제로 무릎이 바탑에 닿는다.
자세는 스프린터의 라스트 댄싱과 콘타도르의 업힐댄싱의 중간이다. 스프린터의 라스트댄싱만큼 무게중심은 앞으로 이동하지만 콘타도르의 업힐만큼 상체는 곧게 펴고 발목은 세운다. 스프린터의 댄싱보다 햄스트링, 내전근을 덜 쓰고 대둔근과 외전근을 약간 더 자극한다.
물론 여기서도 당겨서 무릎을 치는 모션을 우선시할 것이냐, 발끝을 세워 찍어 누르는 모션을 우선시할 것인지에 따라서 근전환이 2가지로 가능하다. 당겨서 무릎을 칠 때 평소의 주법에선 안 쓰는 근육을 더 많이 쓴다. 더 많은 종류의 근육을 쓰기 때문에 순간 파워도 더 높다. 안쓰던 근육이기 때문에 먼저 털어버리는 게 좋다.

 

▣ 무릎치기 댄싱에 대해 끊이지 않는 찬사

이 댄싱은 상사점과 하사점이 2시 8시로 바뀐다. 그러므로 중력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 상사점에서의 무효성도 없고 하사점에서의 정체도 없다. 상사점에선 앞으로 차는 모션, 하사점에선 뒤로 긁어 당기는 모션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회전운동이 자연스럽다. 토크 유효성이 93%까지 나온다.(평균대비 +13%) 온 근육이 템포를 찾았고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이미 다음 모션을 준비하고 있다. 상체의 위아래 흔들림도 적어진다. 닭대가리마냥 눈알 높이가 고정되어 손떨방 모드가 작동된듯 시야도 맑아진다.

자전거 탈 때 동원되는 근육의 종류가 10개, 최대효율이 100%라고 했을 때 ;
무릎치기내전근댄싱 8종 80%
무릎치기내전근댄싱 5종 70%
외전근시팅 3종 50%
내전근시팅 4종 30%
정도의 느낌이다. (인체해부학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든 수치적 비교를 해보려고 함. 정확할 리 없음)
이 방법이 지금의 나로선 심박에 가장 강한 구조요청신호를 보내는 방법.

 

▣ 다시, 심박 해킹

근력 > 심박 > 호흡 순이었다.
근력을 쓰고난 후 30초 뒤에 심박이 반응한다.
심박이 벌컥댄 후 30초 뒤에 호흡이 반응한다.
근력을 써서 체내에 저장된 산소를 소진해버리면 가리느까 심박이 추가적인 산소를 지원하기 위해 혈액공급을 늘리는 것이고, 순환이 빨라진 혈류 속 산소량이 적어지니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다.

한심할 정도로 느린 반응이다. 힘을 쓰기 시작한 뒤 1분이나 걸려서 지속적인 상태유지를 위한 모드에 접어들게 된다니. 아쉽지만 이 메커니즘은 내가 조정할 수 있는게 아니다. 중추신경계 방화벽은 꽤나 튼튼하다. 중추신경계 해킹법을 터득한 놈들이 있다한들 살아남지 못해 대가 끊겼겠지.

심박을 해킹했다고 표현했지만 설레발친거고 공략일 뿐이다.

 

▣ 마무리

업힐을 오르기 전에 체내 산소를 미리 공급해둔답시고 호흡을 과하게 마셨던 것은 다 헛짓이었다.

심박 170으로 탄 것과 220으로 탄 것의 퍼포먼스 차이는 오늘 없었다. 당연하지. 오르막 다 오르고 내리막에 접어들 때가 되어서야 220까지 올랐다. 이 모드를 어떤 구간에 적용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퍼포먼스의 차이를 알아 보려면 5분짜리 업힐 시작지점에서 적용해봐야 한다.

10회전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로누적을 감안하면 회복기간 단축에는 확실히 도움된 것 같다.

심박을 높이는 방법을 찾은 것은 기쁜 일이지만 심박이 높은 것 자체는 좋은 일이 아니다. 미겔 인두라인의 심장은 일반인의 두배 크기였고 그의 심박은 1분에 28번 뛰었다. 일반인은 65bpm 나는 50bpm 말은 48bpm이다. 그는 심박을 높이지 않고도 경쟁자를 압도할 수 있었다. 심박이 높다는 말은 그만큼 심박출량이 낮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또는 부정맥이 의심되기도 한단다. 다음주엔 병원에 한 번 가봐야겠다.

 

▣ 숙제

1. 근력을 쓴 직후 심박의 반응을 앞당기거나 심박이 벌컥댄 후 호흡의 반응을 앞당기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젖산역치를 몇초나마 더 미룰 수 있지 않을까.

2. 산소가 공급되지 않은 상태에서 소진시킬 수 있는 에너지 총량은 어떻게 키우는가? 어떤 트레이닝이 요구되는가?

강변북로 도로변에 짐승한마리가 보였다. 차를 바로 세우진 못했다. 그 짐승이 염소인지 개인지도 확실히 몰랐다. 염소여도 말이 안 되고 개여도 거기 있어선 안 될 상황이었다. 근처 한강공원에 차를 대고 찾아 나서니, 강아지 한마리가 내려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니 저도 다가오다 막상 겁이 나는지 멈춰서 고개를 휙 돌렸다. 무섭다는 것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너가 무서우면 나도 다가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개가 놀라 차도로 뛰어들면 큰일이었다. 조심히 한 발씩 뗀다. 꼬리를 흔들면서도 궁댕이 방향을 튼다. 도망갈 준비를 하는듯 나와 뒤를 번갈아 본다. 녀석이 망설이는 사이 손에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냅다 목덜미를 잡았다.

깨갱 소리와 함께 배를 까보였다. 오줌이 질질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를 공격하지 마세요. 이렇게 오줌도 못가리잖아요.”라는 뜻이었다. 뜻을 알았지만 솔직히 개 드러웠다. 진정시키기 위해 궁댕이를 팡팡쳤다. 먼지가 온데 날렸다. 그러고보니 궁디팡팡은 고양이용인데 강아지는 어떻게 만져야 하더라. 머리도 만지고 턱도 만지고 발도 만지고 배도 만졌다. 귀가 앞으로 접히고 턱 주름이 흐물거리는게 똥개는 아닌 것 같고 리트리버인 것 같다. 강아지 특유의 뽀얀 냄새는 나지 않고 개 냄새가 지독했다.

바닥에 내려놓아도 졸졸 뛰어온다. 5분만에 새주인이 되었다. 강변북로에서 발견됐으니 이름은 강북이라 했다. 엎드려 안으면 오줌이 묻을 것 같았다. 개들은 눕혀 안기는 걸 안 좋아하지만 강북이는 아랑곳않았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새 잔다. 쭈끌쭈글한게 너무 예쁘다. 배가 빵빵하고 뜨거웠다. 잃어버린 것인지 버려진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강북이의 바깥생활은 오늘이 첫날이었으리라 추측했다.

120에 전화해서 유기견 구호후속조치를 안내받았다. 민원을 접수해주셨다. 그러곤 연락이 없었다. 다시 전화했더니 민원이 처리중이며 해당부서로 전달은 되었다고 했다. 나 지금 추운 겨울에 개 데리고 한강공원에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니 자기도 잘 모르겠단다. 당신 이름이 뭐요 했더니 담당부서로 직접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준다. 담당부서에 연락했더니 민원내용은 이미 들었다더라. 왜 연락을 안주고 마냥 기다리게 하냐 했더니 처리 중이었다더라. 언제 오냐 했더니 그건 잘 모르겠단다. 당신 이름이 뭐요 했더니 아무 말이 없더라. 당신들 일처리를 내가 못믿겠으니 내가 직접 보호소에 배달하겠다 했다. 그제서야 근처 제휴되어있는 동물병원을 알려준다고 했다. 강북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네 다리를 쭉 펴더니 기지개를 한 번 하곤 그 자세로 계속 잤다.

도시에서 대형견을 키우는 게 걱정됐을까. 리트리버 새끼를 2주차에 분양받고 2달차에 버린 것이 아닐까. 이빨이 나기 시작하자 이것저것 물어뜯는 게 감당이 안 된 것일까. 산책중 실종된 것은 아닐까. 이렇게 느린 개를 잃어버릴 수 있었을까. 강북이가 그 가파른 담벽을 스스로 올라갔을까. 왜 목줄은 없었을까. 밥은 실컷 먹이면서 왜 씻기진 않았을까. 씻겨놓으면 키우는 개인줄 알고 구조되지 못할까봐 그랬을까. 강변북로에서 개를 던지고 간 것이라면 뒷차는 못봤을까. 강북이를 본 차량은 족히 5백대가 넘었을 것인데 우리 말고는 신고가 없었을까. 강북이는 나를 통해 구조된 것일까, 나를 통해 두번 유기당한 것일까. 나는 직접유기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뿐인가. 인간을 위해 개량된 종이 어찌 인간에게 버림받게 되었을까. 보호소에서 안락사당하기까지의 20일, 그 사이에 강북이는 새 주인을 찾을까. 47%의 확률로 생을 마감할까. 대형견이라 그보다 더 힘들까. 이 사실을 알고도 나는 왜 다른 방안이 떠오르지 않을까.

집에 돌아와 강북이 냄새가 밴 옷을 빨았다. 호두는 개냄새를 탐색하느라 바쁘다.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문자가 왔다. 탐색반이 이촌한강공원 축구장 일대를 수색했으나 유기견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더듬이

더듬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머리끄덩이를 잡아 붙여다가 소통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 송신속도도 높아지고 데이터 손실률도 줄어들 것이다. 또는 스타트렉의 벌컨족처럼 얼굴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기억과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도 괜찮겠다. 아쉽게도 난 그런 첨단 더듬이를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말과 글을 통해 소통한다.

언어란 게 다 뭔가? 내 머리통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타인의 머리통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거치는 과정이다. 여러 전달 수단 중 말과 글이 있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면 입이 아프고, 글을 많이 쓰면 손가락이 아프다. 더듬이가 여러 측면에서 우월하다. 말이라는 게 얼마나 원시적이고 제한적인 소통 수단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증명된 셈이다. 더듬이가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속이 터지지만 어쩔 수 없다. 차세대 첨단 더듬이가 테크크런치에 소개되고, 실리콘밸리 머니를 투자받은 후, 임상시험을 거치고, 시중에 유통되어 얼리어답터들의 피드백을 반영함으로, 3번째쯤 버전으로 고도화된 뒤, 중국에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가격안정권에 들어서야, 나 같은 천민도 구매할 수 있을 텐데 이번 생에 구경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말이나 글이라도 제대로 활용해야겠다.

언어의 다양함은 사고의 폭을 넓힌다. 반대로 언어의 제한적인 활용은 사고의 폭을 좁힌다. 감정의 폭도 좁힌다. 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어휘의 단조로움은 미개함이다. 야만이다. 문명의 적이다. 인간 문명의 발달이 언어의 발달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문명의 방향은 어휘를 잘게 쪼개는 쪽으로 향한다.

아이는 꿀밤을 맞으며 말을 배운다. 한 아이가 옆집 아저씨를 “아빠”라 불러 엄마에게 꿀밤을 한 대 맞는다. 사람을 칭하는 단어가 ‘아빠’, ‘엄마’ 뿐인 줄로 알았던 탓이다. 그제야 집에 사는 남자는 ‘아빠’, 집 밖에 사는 남자는 ‘아저씨’라는 개념을 습득한다. 다음날 만난 한 고등학생을 “아저씨”로 불렀다가 한 대 더 맞는다. 집 밖에 사는 남자가 늙었으면 ‘아저씨’, 젊으면 ‘형’이라고 개념을 쪼갠다. 개념을 쪼개지 못하는 것은 신생아의 미숙함이다. 야만이다. 문명의 적이다.

 

바이럴 영상

영상제작 거래중개를 시작한 지 8개월이다. 제출되는 포트폴리오 대부분 제목 뒤에 ‘바이럴 영상’이라고 붙어 제출된다. 800개 중 300개가 자칭 바이럴 영상임을 주장한다. 이 어휘는 죽었다. 사용할수록 의미가 정의되긴커녕 모호해진다. 의미를 쪼개고 구체화하긴커녕 허상으로 포장된다.

바이럴 영상이라는 표현은 분별력을 잃었다. 이젠 거의 모든 것에 바이럴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배우가 출연하는 광고부터 모션그래픽 광고까지, 형식을 불문한다. B급 유머코드 광고부터 울음유발 공감 광고까지, 스타일을 불문한다. 판매촉진 비디오커머스부터 기업 브랜드 CF까지, 장르를 불문한다. 2억 규모 제작비에서 50만 원 싼마이까지, 너도나도 바이럴을 갖다 붙이기 바쁘다.

바이럴 영상의 본래 정의는 ‘소비자에 의해 자발적으로 확산되는 영상’이다. 자발적 확산을 이루지 못했다면 바이럴 영상이 아니다. 이 표현은 결과를 나타내는 용도보다 미래 지향적인 용도로 더욱 자주 사용된다. “자발적인 확산을 목표로 하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가 너무 길기 때문에 줄여 말한다. 이런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목적 달성에 실패한 영상까지도 바이럴 영상으로 불릴 때 문제는 발생한다.

자칭 바이럴 영상이라 주장하는 영상 100개 중에서 실제로 바이럴 성과가 있었던 것은 1개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가 워너비에 파묻혔다. 1개의 실제 바이럴 영상을 바이럴 영상이라 부르면 나머지 99개의 영상과 동급으로 여겨진다. 실제 바이럴 영상을 칭할 방도가 사라졌다. 타인의 성공을 빌어 입고 자신을 포장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끝내 한 단어를 죽이고 말았다. 이기적이었던 그 사람들을 찾아내서 꿀밤을 때리고 싶다. 정의(定義)의 꿀밤으로 어휘의 세분화를 거치도록 강제하고 싶다.

개념 정의 기능이 부족한 어휘는 성장을 멈추고 소멸하는 게 보통이다. 또는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 죽을 때를 한참 넘긴 어휘가 왜 아직도 펄펄 날뛰는지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방대한 개념의 어휘 때문에 곤혹스럽다. 미스케이션이 난무한다. 의사 소통 단계가 늘어난다. 업체 검증 기간이 길어진다. 제작 회의는 난항을 겪는다. 실컷 만들었더니 이건 아니랜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댄다.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기가 막힌 작품을 기대하라더니 웬 엉뚱한 걸 만들어 놨댄다. 프로젝트는 파멸로 향하고 각자 민사소송을 준비한다. 그 지경을 겪고도 어째서인지 언어습관은 바뀌지 않는다.

떠들기만 하는 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캤다. 영상산업의 언어 정화를 위해 발을 벗는다. 적어도 내가 만든 플랫폼 안에서는 모호한 어휘의 남용을 허용치 않는다. ‘바이럴 영상’을 적폐로 공표하고 척결에 나선다. 300개에 육박하는 자칭 바이럴 영상의 제목을 일일이 수정한다. ‘웹 CF’, ‘소셜미디어 최적화 영상’, ‘병맛나는 연출’, ‘공감유도영상’으로 더욱 세분된 명칭을 부여한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값진 야근을 했다. 사회적인 약속을 파기하는 언어 습관을 일부라도 정제시켰다. 첨단 더듬이가 없는 이상, 이게 나의 최선이다.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에 집착이
지나칠 정도로 까탈스러운 원칙주의자가 운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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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드폴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