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트업’ 어휘의 정의를 찾아서 – What is a Startup?

스타트업이란 무엇인가?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쓰여진지 3년이 채 되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2007년도 이후에야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신조어는 네이버 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오픈사전에서 3줄의 짧은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조금 더 많은 설명을 담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스타트업을 보통 ‘창업’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거나, 기존의 ‘벤처기업’이라는 단어와 혼용하거나, ‘IT업계 초기기업’으로 가두어 지칭하곤 한다. 유사한 듯 보이는 이 세 단어는 스타트업의 뜻과 의미를 잘 표현하지 못하며 많은 오해를 불러낸다. 언어가 사회적 약속이라는 전제하에, ‘창업’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식당 창업을 떠올리게 하고, ‘벤처기업’은 왠지 정부로부터 벤처기업 인증을 받아야 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초기기업’이라고 부르면 설명하는 내용이 제한적이다.

미국에서도 이 신조어에 대한 정의가 정확하게 굳어지지 않아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의 창업자인 폴 그래이엄은 스타트업을 ‘성장‘(한글 번역본 by 윤치형님)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페이팔의 창업자인 피터티엘은 둘도 없는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린스타트업의 저자인 에릭 리스는 스타트업 기업이 가지는 네 가지 속성을 설명하고 있으며, 에릭리스의 스승인 스티브 블랭크는 조금 더 도식화된 설명을 덧붙여 분석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 신조어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쿼라(Quora), 리서치게이트(ResearchGate)를 통해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듯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아직 정의가 확실히 굳어지지 않은, 살아있는 단어이다. 수많은 정의가 공존하는 시점에서 비석세스는 직접 그 뜻과 의미를 찾아 나서기로 했고, 지난 2달에 걸쳐 30여 명의 스타트업 업계 종사자, 멘토들에게 영상인터뷰를 진행했다.

beSUCCESS 근무 당시 제작한 영상 : http://besuccess.com/2014/02/what-is-a-startup/

— 덧붙임 —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이다. 독일의 언어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의미의 집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집도 없고 약속도 없는 상태. 많은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대~충 뜻과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명료하고 흔들리지 않는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이 될 단어에 대한 약속과 의미의 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기 위한 논란은 계속 되고 있다.
의미 정의의 중요성은 모두가 깨닫고 있는 듯.
오해가 없으면 새로운 해석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의미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스타트업에 대한 의견.

나는 지금 가장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금전적인 부분도 아니오, 고용보장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앞으로 60년 더 일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살아 남아야 한다.

노예가 되기 위한 준비

결국 목적없는 준비들은 모두 더 나은 노예가 되기 위한 자격요건을 갖추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타인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노예가 되기 위해서 현대인들은 그렇게들 열심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구조상 60%의 임금노동자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죠.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다행히도 자발적인 노예들이 충분히 있고, 또 유연하게 그 비율을 조정합니다.

취업이데올로기, 스펙이데올로기 따위의 것들이 자발적 노예를 육성하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돈이라는 기준으로 재평가되고 평준화되기 때문에 노예들 간의 계급구조들도 만들어집니다. 계급구조가 만들어진 노예들간의 새로운 생태계는 아주 큰 우물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 안에는 대중문화라는 마약이 존재하죠.

‘정보’가 가진 네 가지 성향

정보는 네가지 성향을 가진다.

‘더 많은 정보를, 더 많은 사람들과, 더 빠르고, 더 효율적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성향

정보의 성향은 인간의 기술을 통해서 더욱 빠른 속도로 실현된다.

정보과잉시대에선 정보전달자가 더이상 우위에 서있지 않다.

광고라는 커뮤니케이션은 보여주는 사람이 유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정보에 대한 편집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달에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광고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지게 되고 사람들이 수용할 한도를 넘어서게 되자 그 우위는 반전되었다.

보는 사람이 많은 정보들을 골라서 보게 되고, 유익하지 못한 것들을 골라내는 편집권을 가지게 되었다. 웹2.0이 나타난 시점을 기준으로 다양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한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 전세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광고기피증이라는 단어가 최근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심각성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기울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인지 기업과 고객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보하게 되었는데, 플랫폼을 통해서 기업과 고객이 더 밀접한 공간에서 더 집중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플랫폼의 예로는, 소개팅 주선자나 구인구직 사이트, 각종 fair 및 세미나, 또 최근에 세상의 흐름을 가장 많이 바꾼 애플의 앱스토어를 들 수 있다.

기존의 커뮤니케이션과 비교되는 플랫폼의 가장 큰 특징은 기업이 나서느냐, 고객이 직접 나서느냐는 점이다.

기존의 광고나 홍보 따위는 기업이 독자적으로 고객을 찾아나서는 과정이었다면, 플랫폼에서는 공통된 욕구를 가진 고객들이 서로 무리를 형성한 뒤 그 장소에 기업들이 찾아 드는 방식으로 플랫폼이 형성된다는 것이다.(이는 플랫폼 설립 순서에 따른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이 서로 부합하는 두 집단이 만나서 집중된 커뮤니케이션을 벌이는 곳이 플랫폼이다.

납품형 인간

납품형 인간 [명사]

1. 방송이나 영상제작 업계에서 종사하며 제한기간안에 작품을 제작하여 납품하는 일장단에 맞춰 생활패턴이 결정지어지는 21C신인류의 한 형태. 대체로 게을러 터져서 일을 미루다 미루다 결국 납품기일 3일 전에 내리 밤을 새는 작업을 하곤 한다.

2. 3일 밤샘 작업을 하고 나서도 납품을 했다는 해방감에 술마시느라 하루 더 밤새는 사람. (유) PD, 방송인, 광고인, 프리랜서 듸자이너 등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 왜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문제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되물어 보겠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사물은 발전할수록 사물은 본질에 가까워진다.

내가 디지털영상을 배우는 학교엔 암실이 하나 있다. 흑백사진을 인화하는 곳이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필름 소비량은 줄어만 가는데 사진과에서도 배우지 않는 암실수업이 영상전공 학과에 떡하니 있다. 사진과에서 고지식한 교수 하나가 넘어왔는데 영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머라도 가르친다고 가르쳤던 게 검은 방에서 약품냄새 풀풀 풍겨가며 사진 현상하는 수업이었다.

DSLR 카메라의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암실수업은 필요한가? 난 필요 없다고 말해보겠다.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 우리 교수님께선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실 게 눈에 선하다. “사진이 발전해온 역사를 배우지 않고선 사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거나 “정성들여 사진을 한 장씩 인화해 본 사람만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디지털편집이 보급화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테이프 두 개를 동시에 기계 안에 넣고 복사를 했던 ‘리니어 편집’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컴퓨터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넌-리니어 편집’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에 비하면 너무 고생을 덜 한다는 이유였다. 고생을 하지 않는 편집,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태우지 않는 편집은 편집자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술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마 ‘오리지널’과 ‘본질’의 차이점을 오해하는데서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리지널’은 그야말로 시간상에서 앞서 존재했던 것들을 말하지만, ‘본질’은 그 사물의 존재의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이다. 위의 사람들은 두 개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고지식한 아저씨들을 보면서 원시인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구석기인들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차례대로 맞으면서 기술의 발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돌도끼를 쓰던 중, 청동도끼가 나오니 돌도끼를 버리고 쇠도끼가 나오니 청동도끼를 버렸다. ‘Orignal’이라는 단어에는 ‘기원이 되는’ 이나 ‘최초의’ 라는 좋은 뜻도 담겨 있으나 동시에 ‘구식의’라는 뜻도 함께 담겨있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새 기술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한 구식에 정을 떼질 못한다. 이유는 사실 기술이 너무 급속도로 발전하다 보니 자신들은 그 기술을 따라갈 자신이 없는 거다. 나이가 어린것들이 순식간에 배워버리는 그 기술이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정체는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상대적인 퇴보를 겪게 되니 난감하여 헛소리가 저도 모르게 세어 나오는 것이다.

청동기인들은 새로 나온 쇠도끼를 보고 ‘이것이야 말로 도끼의 진정한 완성형’이라는 생각을 했다. 돌도끼는 도끼의 오리지널이긴 했지만, ‘날카롭고’, ‘단단하고’, ‘사용하기 편한’ 도끼의 본질에는 전혀 거리가 있었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필름 사진기가 사진의 역사에서 오리지널이긴 하겠지만, ‘선명하고’, ‘사용이 편하고’, ‘셔터스피드가 빠르고’, ‘색감이 좋고’ 등의 사진이 지향하는 목적까지 발전하기엔 한계가 있는 기계라는 것이다.

기계뿐만이 아니다. 파피루스나 대나무 또는 천 쪼가리 위에 글을 썼던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의 책이 ‘기록을 남기기 위한’ 책의 의도나 목적에 가깝다.

성냥보다는 라이터가, 소보다는 트랙터가, 연필보다는 샤프가, 짚신보다는 나이키가,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이, 삽보다는 포크레인이, 디스켓보다는 CD나 USB가, 편지보다는 e-mail이, 브라운관보다는 LED가 제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술이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너무나 명백하게 역사적으로 남겨진 사실들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은 발전되었고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은 기술은 개발되지도 않았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했고, 자유로운 인간은 더욱 기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인간과 기술은 뗄 레야 뗄 수가 없다.

한참을 글을 쓰다 보니 나는 얼핏 기술 예찬론자처럼 보인다. 기술의 장점만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기술도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위에 나열한 것들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구식의 것을 도태되게 만든 최신기술의 선두주자’ 쯤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술들이 가지는 한 가지 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효율’이다.

효율이 대량생산체제를 만들어서 실업자를 무지막지하게 쏟아냈다. 효율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도록 하였고 일부 인간은 비인간적인 계산기로 만들고 일부의 인간들은 낙오자로 만들어냈다. 효율성을 지향하는 기업이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린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효율에서 나온 것이며, 효율은 기술이 지향하며 달려가는 종착역이다.

인간의 손을 통해서 실현되지만, 전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기술은 인간의 친구인가? 적인가? 기술이 앞으로도 계속 효율을 따지며 자가발전 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정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 인정해야 할 암흑시대의 임박이다.

글을 쓰는 중에 글의 의도가 많이 바뀌어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되었다. 시간도 늦었고 어딜 손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글은 이만 줄인다.

애초의 의도는 ‘기술은 발전하는 만큼 교육자는 퇴보한다.’는 의도였다.

몇일 전에 썼던 글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예술도 발전한다.’ 와 대칭되는 글이다.

20100614 새벽

한계

그러니까네, 사람은 사람의 한계를 규정짓는다 이거지. 한계를 이미 규정지어 놓은 인간이 어떻게 그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겠냔 말이지.

자신의 한계를 이미 규정해 놓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뭐냐면, 그 한계보다 뛰어난 사람은 사람으로 안보고 신과 같은 존재로 취급해버리고 마는거지. 자신도 그렇게 뛰어날 수가 있는데. 더 열심히 할수도 있고 더 많은 발전을 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러니까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쉽게 예를 들어가꼬, 자 보제이.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한계, 그기 뭐이꼬. 내가 생각할땐 일주일에 20시간 공부다. 20학점 듣는게 학교에서 최고로 많이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학점 수준이거든. 그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일주일에 20시간 공부라고 그어 뿌는기다.

일주일에 씨바 시간이 얼마나 많노 24*7은 얼마고 일주일에 148시간 아니가. 그 중에 묵고 자고 빼도 80시간은 안남나. 그서 영화보고 친구 만나도 40시간은 안되나. 왜 공부 못하는데 40시간 동안. 아니 씨바 진짜 마음먹고 공부할라치면 영화안보고 친구 안만나면 일주일에 80시간 공부 안되겠냐 이말이다.

근데 아무도 그래 안한다. 20시간이 한계다. 20시간 공부하고 나면 너나 나나 다 퍼져가지고 일어나도 못한다. 이래가 되긋나.

그런놈들이 대학졸업하고 나면 일주일에 40시간 일하는거 존내 힘들어한다. 노동자 인권보장인가 뭔가 들먹거리 가믄서 최대근무시간 계속 낮추고 있제, 그게 또 사람의 한계를 규정하는기라. 일주일에 40시간 넘게 일하는 놈은 신이라 신. 미친 일중독자로 취급하는기라. 내보다 50살 밖에 안많은 우리 할아버지도 하루종일 밭에 나가고 논에 나가서 농사짓고 일했는데 인간의 한계가 50년만에 딱 절반으로 줄어뿟다. 일안하고 공부안하면 딱히 할것도 없는 놈들이 꼭 딱 그만치만 할라고 졸라 떠들어 댄다이.

진짜 할라고 마음있는놈은 안시키도 다 하고 하지말래캐도 더 한다칸다.

지가 지 발에 족쇄 채우고, 지가 지 손에 수갑 채우는 기다.

근데 암만 남이 머라 해봐야, 그 한계 못 무너뜨린다. 지가 알아야 된다. 근데 니 그거 아나, 코끼리 어째 길들이는지. 코끼리를 어릴때 새끼때부터 발에다 족쇄를 채아가 나뭇기둥에다 묶어놓거든, 그럼 처음에는 벗어날라고 지랄 염병을 틀다가도 몇일 지나고 나면 족쇄가 차였을 때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돼. 그 다음부터는 나뭇기둥 자체가 필요없다. 족쇄만 채워 놓으면 꼼짝 안하고 얌전해진다. 도망 절때 안간다. 다 커서 성인코끼리 되제. 몸무게 한 5톤 이래 나가제. 그래도 족쇄 채우면 도망 못가는 줄로 안다.

그렇게 한계 근처에도 안가본 새끼들이 계속 안된다 안된다 해대라. 그게 진짜 안되는기다. 그게 그냥 금마들의 한곈기다.

나 어릴 적엔 학교에서 꿈에 대해 적어내라고 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때 잘만 적어냈던 친구들이 여전히 그 꿈을 가지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 글을 한번 끄적여 본다.

왜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꿈꾸는 학생들을 좋아할까?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뭔가 위대한 삶을 살길 바랐던 것일까? 사실 선생님들도 그 작은 아이들이 커서 양아치나 공사판 인부가 되거나 잘해봐야 박봉의 월급쟁이 아저씨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어느 날, 형이 갑자기 유리병을 들고 와가지곤 타임캡슐을 만들자며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는 게 기억난다. 타임캡슐이 뭔질 몰랐는데 형의 설명에 따르면 그 당시의 기억을 담아서 흙 속에 묻어두고 한 십년 지나서 파보면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아주 좋은 거였다. 그러면서 형은 허겁지겁 유리병 속에 뭘 처넣기 시작했다. 사실 그 속엔 아주 소중한 것들이나 그 당시를 기억시킬 수 있는 의미심장한 아이템들이 들어가야 하는데 별로 쓰지도 않고 소중하지도 않았으며 유리병 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장난감 몇 개를 골라 집어넣었었다. 그리고 공책을 북북 찢어서 ‘나는 커서 이 되겠다.’라는 꿈을 한 장씩 적어 넣기로 했다. 그 당시 형은 뭘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전까지 한 번도 커서 뭐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다. 형은 빨리 타임머신을 묻어야 한다며 재촉했다. 5분간의 고민 끝에 ‘소방관은 타죽을 수도 있으니까 경찰관이 되어야겠다.‘며 “나는 커서 10년 후에 경찰관이 되어있겠다.”라고 적어서 넣었다. 그 후 그 타임캡슐의 행방을 찾아본 적도 없지만 아마 지금 가보면 그 때 살던 집 뒤의 작은 마당엔 새로운 건물이 올라와있을 것이다.

그 다음 년도에 6학년으로 올라가서 만난 담임선생님은 꿈에 무척 집착했다. 모든 학생들이 장래희망 카드를 만들어 게시판에 붙이는 난리법석을 떤 것이었다. 그것도 부모님들이 찾아오는 가을운동회 직전에 말이다. 나는 그 때까지 13년의 인생을 살면서 장래희망이라는 것에 생각해봤던 적이 작년 5학년 때 5분 동안 생각해봤던 게 전부였는데 이젠 6학년이니 더 진지해봐야겠다며 머리를 싸맸었다. 밤이 새도록 고민해서 만들어간 나의 장래희망 카드에는 ‘샐러리맨’이 적혀있었다. 평범한 학생들을 부풀리고 과장시켜 학부모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담임선생님의 허영심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고민하던 나를 떠올려 보면 나는 커서 별로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장래희망카드를 제출하고 난 뒤에도 그 카드가 게시판에 붙고 난 뒤에도 가을운동회 때 엄마가 와서 내 카드를 보고 혀를 찼을 때에도 나는 샐러리맨을 꿈이라고 적은 것을 무척 후회했다. 그렇게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는 도무지 무엇을 꿈으로 가져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고3이 되었다. 고 3이라면 이미 장래계획과 진로설정이 다 되어서 수능공부에만 집중해야 할 시기이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게도 이제까지 18년의 인생을 살면서 장래 희망에 대해 생각해봤던 적이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두 번 밖에 없었다.

고3 야자시간에 떠들던 녀석들이 단체로 야단맞던 중 훈육에 한창이던 ‘김갑상’선생님이 한숨을 푹푹 쉬며 “느그들 도대체 꿈은 있나?” 라고 물어봤었다. 단체로 야단맞던 애새끼들이 10명 쯤 되었는데 나를 포함한 두 명을 제외하곤 다른 친구들은 자신들의 꿈이 무엇인지 대답했고 꿈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한 나와 그 친구는 꿈도 미래도 희망도 없는 한심한 잉여인간 취급을 받았었다.

“꿈이 없으면 공부를 할 이유가 안 생긴다. 내일까지 당장 꿈부터 가지도록 해라.”

정말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그렇긴 해도 내일까지 당장 꿈이 생기길 바라셨던 것은 일리가 없는 말씀이었다.

꿈이 없었기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나는 대충 수능을 쳤고, 나온 수능 점수에 맞춰서 원서를 적어보기 시작했다. 대학교들에서 날라 온 찌라시들과 복잡하게 분석된 적성검사표,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대학원서라는 백지장에 그려 보려니 막막했다.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는지도 전혀 몰랐다.

그런 복잡한 심정으로 또 다시 한번 꿈에 대해 고민하던 중에 바쁘신 고3담임선생님의 귀한 시간을 뺏어서 5분 동안 상담을 받았다. 그 때 추천해주신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대학 디지털콘텐츠학부 디지털영상전공’(가장 이름이 길어서 눈에 튀었다.)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그 쪽으로 원서를 넣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아직도 나는 내 꿈이 뭔지 모르겠다. 이러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휴학한 뒤 호주로 도망 와 있는데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꿈이 생기긴 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사실 사람들이 꿈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도 가지고 있긴 한데, 나의 꿈은 특정한 직업이나 인생계획 따위로 세워놓진 않았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정직하게 사는 것,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 정도로만 세워 놓았다. 인생의 기로가 어떻게 바뀔 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호주에 오기로 한 것도 한 달 만에 결정한 것이고 브리즈번을 떠나 멜버른으로 가야겠다는 결정도 저번 주에 했다.

알지도 못하는 앞으로의 인생을 꿈이라는 황급한 계획을 세우면서 가능성을 모두 닫아버릴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