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과잉시대에선 정보전달자가 더이상 우위에 서있지 않다.

광고라는 커뮤니케이션은 보여주는 사람이 유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이 정보에 대한 편집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달에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광고의 양이 지나치게 많아지게 되고 사람들이 수용할 한도를 넘어서게 되자 그 우위는 반전되었다.

보는 사람이 많은 정보들을 골라서 보게 되고, 유익하지 못한 것들을 골라내는 편집권을 가지게 되었다. 웹2.0이 나타난 시점을 기준으로 다양한 정보에 대한 접근권한도 가지게 되었으므로 이 전세는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광고기피증이라는 단어가 최근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이러한 상황에 대한 심각성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기울어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인지 기업과 고객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새로운 방향으로 진보하게 되었는데, 플랫폼을 통해서 기업과 고객이 더 밀접한 공간에서 더 집중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플랫폼의 예로는, 소개팅 주선자나 구인구직 사이트, 각종 fair 및 세미나, 또 최근에 세상의 흐름을 가장 많이 바꾼 애플의 앱스토어를 들 수 있다.

기존의 커뮤니케이션과 비교되는 플랫폼의 가장 큰 특징은 기업이 나서느냐, 고객이 직접 나서느냐는 점이다.

기존의 광고나 홍보 따위는 기업이 독자적으로 고객을 찾아나서는 과정이었다면, 플랫폼에서는 공통된 욕구를 가진 고객들이 서로 무리를 형성한 뒤 그 장소에 기업들이 찾아 드는 방식으로 플랫폼이 형성된다는 것이다.(이는 플랫폼 설립 순서에 따른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목적이 서로 부합하는 두 집단이 만나서 집중된 커뮤니케이션을 벌이는 곳이 플랫폼이다.

납품형 인간

납품형 인간 [명사]

1. 방송이나 영상제작 업계에서 종사하며 제한기간안에 작품을 제작하여 납품하는 일장단에 맞춰 생활패턴이 결정지어지는 21C신인류의 한 형태. 대체로 게을러 터져서 일을 미루다 미루다 결국 납품기일 3일 전에 내리 밤을 새는 작업을 하곤 한다.

2. 3일 밤샘 작업을 하고 나서도 납품을 했다는 해방감에 술마시느라 하루 더 밤새는 사람. (유) PD, 방송인, 광고인, 프리랜서 듸자이너 등

 

영상판에서의 5개월

지난 해 11월 서울로 올라왔다. 조연출 자리를 하나 얻었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때, 2007년 9월, 내가 2학년 2학기를 재학하던 중에 그 감독님을 처음으로 뵈었다.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었으며, 카메듀서 1세대, 외주 프로덕션 1세대라는 부가설명을 붙일 수 있는 분이었다. 전적으로 그 감독님을 신뢰하고 있었기에 나는 정말 큰 횡재를 했다고 감사함을 느끼며 감지덕지 서울로 올라갔다.

내가 투입된 프로젝트는 공중파에 1시간짜리 특집 다큐멘터리로 나가는 작품이었고 포지션은 조연출. 분에 넘치는 직책과 책임감을 맡은 것 같아서 ‘딴에 뭐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후배들을 모아서 술을 한 잔 샀다.(그것은 실수였다. 후배들은 내가 취업을 한 줄로 알고 연신 축하했고, 무엇보다 나는 조연출 생활 1달 3주를 하면서 고작 120만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달에 60이 조금 넘는 돈이었다. 일당 2만원? 방세를 안냈고 끼니를 모두 제작비로 해결했기에 생활이 가능했었다.)

처음 사무실로 들어서던 그날, 나와 함께 작업을 하게 될 PD, 작가, 막내작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낮술로 반겼다.

12월 25일 방송을 10월부터 아이템조사를 하면서 11월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됐다. 2달에 가까운 기간을 준비만 한 것이다. 방송국 본사에는 ‘외주제작팀’이 따로 있었다. 외주프로덕션이었던 감독님의 회사는 ’어린이재단‘이라는 단체의 의뢰를 받아서 작품을 기획했고 방송국에서 나온 공고에 지원한 뒤, 수주해서 제작에 돌입했다. 제작비의 총액은 8000만원이었다. 1시간짜리 휴먼다큐를 만드는데 8000만원의 제작비가 책정되었다. 그 중 4000만원은 방송송출료로 본사가 떼먹었다. 한 마디로 4000만원을 내면 공중파에 1시간의 방송을 틀 수 있는 권한을 살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남은 4000만원으로 회사가 어떻게든 방송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었으나 방송국 내부 기관 중 ’컨텐츠허브‘라는 부서에서 또 1000만원을 꼭 가져가야 한다고 우겨대서 어쩔 수 없이 강도당하고 말았다. 회사엔 3000만원밖에 남지 않았다.)

본격적인 촬영을 위해 차를 한 달간 대여하고, 장비도 대여했다. 차는 렌트카회사에서 빌렸고 장비는 여의도의 한 장비대여업체에서 빌렸다. (여의도에는 방송에 관련된 모든 업체가 모여 있는 곳이다. 장비 대여업체부터 외주프로덕션들, 종편실, 녹음실까지 모여있다.) SONY의 Z-5, 와이어리스 마이크, 트라이포드, 도시락(포터블데크)가 빌린 장비였다. DV테잎은 30개를 샀다. HDV1080i로 촬영했다.

촬영이 끝났다. DV테잎은 총 45개 정도를 썼던 걸로 기억한다. (진행하는 중에 아이템이 두 번 엎어졌었기 때문에 그것까지 다 더하면 총 70개가 넘었다.) 방송이 나가는 25일을 3주 앞두고 편집에 들어갔다. 종로에 있는 맥킨토시 전문 업체에서 맥프로를 한 대 빌렸다. 한 달에 40만원, 깎아서 30만원에 빌렸다. 부산에서는 PD님이 혼자 촬영을 마무리짓고 있었고,(사실 이 때쯤 되니 현장성이니 사실성이니 진정성 따위의 것들은 전혀 고려할 문제가 아니었다. 1시간짜리 이야기를 이끌어 내야 하는데 그 스토리를 이어가기에 부족한 부분들이 너무나 많았다. 작가언니는 계속해서 논리를 끼워 맞추기 위해서 필요한 장면이나 소재들을 PD에게 부탁하고 PD는 그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애쓰고, 정 안되면 솔직하게 털어놓고 연출을 하는 경우도 생겼다.) 나는 혼자 회사 사무실에서 맥킨토시를 설치한 뒤 캡쳐를 떴다. (부산역에 KTX직송 택배가 있다. 그것을 이용하면 부산에서 서울까지 6시간 만에 물건 배송이 가능하다.)

부산에서 올라온 DV테잎을 나는 계속 캡쳐했다. 테잎 45개를 캡쳐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45시간이다. 물론 1시간마다 제 때 테잎을 갈아줄 경우에 말이다. 나는 유난히 잠이 많은 편인데 의자에 앉아서 1시간마다 울리는 알람에 테이프를 갈며 3일을 보냈다. 3일 째, 테잎을 거의 다 떠갈 때 쯤 FCP를 확인한 PD에게 혼났다. HDV로 찍은 테잎을 캡쳐뜰 때에는 FCP에서 기본적으로 레코딩버튼을 누른 시점을 기준으로 모든 클립이 잘려져서 캡쳐된다. 나는 그것이 문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PD에겐 큰 문제가 되는 부분이었다.

내가 캡쳐를 뜰 동안 막내작가는 도시락(포터블데크)를 가지고 프리뷰를 한다. 몇 번 테잎에는 무슨 내용이 찍혀있으며 등장인물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두 녹취하고 카메라 앵글은 어떻게 변하는지 따위를 모두 기록하는 것을 프리뷰라고 한다. 프리뷰노트에는

              Tape 2

0000             칼라바

0030    FS     경윤이가 윤정이를 쳐다본다.

0045    OS    경윤 : 꽈자줘.

와 같은 식으로 모든 것을 기록한다. 앞의 숫자 0000네자리 중 앞의 두 자리는 분을 표시하고 뒤의 두 자리는 초를 표시한다. (1348은 13분 48초이다.)

 45개의 테이프를 모두 확인하면서 편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프리뷰노트를 책처럼 인쇄해놓고 노트에 표시하고 적어가며 전체적인 구성을 짜는 것이다. 이 과정은 작가가 주도한다. 이 과정에서 모든 클립이 쪼개져있으면 (8번 테이프의 13‘48“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을 수가 없다면) 쓸 데 없는 시간이 소비되는 것이다. 나는 3일 간의 캡쳐를 다시 시작했다. (사실 시퀀스를 하나 만들고 그 위에 나눠진 클립들을 줄줄이 올려 놓은 뒤 인,아웃점을 잡고 Make Subclip 기능을 사용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지만 PD는 자신이 모르는 기능을 이용할 바에야 내가 잠을 안자고 수고하는 편을 택했다.)

또 3일이 지났다. PD도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PD가 편집하는 동안 나는 멍한 정신으로 그저 뒤에 앉아서 졸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존다고 혼났다. 인간의 신체가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고 우리의 몸속 유전자에 140만년 동안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역행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는 편집하는 중에는 일주일에 20시간을 못잤다. (그만큼밖에 못잔다는 건 나에겐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동시에 PD에겐 조연출새끼가 그만큼이나 처잔다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160시간이나 되는 일주일에 10시간, 20시간을 짬내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바쁜 것이 아니라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고 또 혼나고.. 감독님과 PD님은 나란 녀석이 ‘커트가 어떻게 붙고 있는지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지켜보는 열정을 가진 조연출’이 되길 바랐지만 나는 혼이 나더라도 조금 더 자는 것을 택한 게으른 녀석이었다.

지난 새벽 5시까지 깨어있던 것은 기억하는데 책상에서 눈을 뜨니 7시였다. 게다가 PD님이 사라졌다. 2시간이나 엎드려 자다니.. 또 혼나겠구나, 각오를 하고 전화를 걸었다. 어디냐고 물으니 용산에 와있다고 했다. 왜갔냐 했더니 외장하드가 날라 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본체 옆에 있던 외장하드가 없었다. 3시간 뒤에 PD님은 새 외장하드를 들고 돌아왔고 PD는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일주일이 날아갔다. 또 다시 3일간의 캡쳐가 시작되었다.

PD가 새우잠을 자거나 사우나에 잠시 갔다오는 동안 나는 막내작가와 함께 예고편을 만들었다. 예고편을 만들고 난 뒤에는 중요한 몇 몇 장면들만 골라 6mm에 떠서 방송국 본사로 갖다 줬다. ‘이어서’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방송국의 한 편에는 프리미어 컴퓨터가 설치된 방이 여러 개 붙어있었는데 그 중에 한 명은 ‘이어서’ 편집기사였다.(“이어서 ~~프로그램이 방영되겠습니다.”만 하루 종일 만드는 사람)

방송까지 정확히 5일 남은 날의 새벽이 또 밝았다. 나는 여전히 졸린 상태이고, 사무실은 담배연기로 꽉 차있었다. 가편이 끝난 프로젝트 파일을 외장하드 통째로 들고 여의도로 향했다. 보통 6mm테잎에 떠서 가져가거나 DigiBETA테잎으로 가져가야 하지만 편집실에 FCP가 가능한 곳을 갔기 때문에 외장하드를 가져가서 바로 열어 수정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그 편집실은 3일에 100만원이었던 것을 70만원으로 협상했다.) 그 편집실은 방이 여러 개 있었으며 항상 밤샘하는 실장들이 있었다. 실장들을 대부분 나이가 어렸으며 레귤러방송(매주 1시간씩 나가는 주기적인 방송)을 주로 편집하는 듯 했다.

종편실에서는 FCP작업과 DigiBETA작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실장은 FCP로 작업할 수 있는 부분까지(갖가지 Transition들과 프롤로그 이미지 만들기, Color Collection, 모자이크)만 손본 뒤 디지베타 테잎으로 떴다. 그 편집실엔 자막실이 따로 있었는데 자막을 치는 아가씨가 5여 명이 있었고 2교대로 24시간 대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막은 프리뷰노트를 제작했던 우리의 막내작가가 만들어서 가져갔었고, 어떤한 프로그램을 써서 자막 폰트설정과 데코레이션 설정하는 것이 순식간에 가능했다. 1시간짜리 자막을 모두 만들어 내는 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이미 여러 가지 컨셉과 프리셋을 미리 만들어 놓고 적용만 시키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막파일들은 targa확장자로 출력했다. (학교에서는 포토샵에서 뒷 배경이 없이 타이포 레이어만 띄운 뒤 PNG파일로 저장하여 FCP에서 가장 윗 트랙에 자막을 얹히는 식으로 작업했었다.)

리니어 편집실 안에서는 실장, 보조, 자막팀 그리고 PD 총 네 명이 나란히 기계 앞에 앉아있었다. (나는 뒤에 쇼파에 앉아서 또 졸았다. 보아하니 보조하는 분도 실장눈치를 보며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FCP에서 가편을 끝낸 뒤 바로 출력한 테잎을 ‘클린본’이라고 불렀다.(순수하게 컷만 붙어있고 CG나 자막 따위의 것들이 들어있지 않은 테잎.) HD였기 때문에 HDCAM테잎을 썼다. (하지만 녹음실에는 HDCAM이 지원되지 않아 녹음/믹싱작업만을 위한 DigiBETA 테잎으로도 클린본을 만들었다.) 클린본 테잎을 기계에 넣고 리니어 기계에서 실시간으로 테잎을 재생하면서 PD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순간마다 자막을 넣고 뺀다. 실시간이기 때문에 더욱 효율적이며 호흡을 조절하는데 특히 훌륭한 시스템이었다. FCP에서 모든 자막을 마우스로 조정하려 했다면 무척 시간도 오래 걸렸을 것이다.(물론 FCP에서도 실시간 재생을 하면서도 자막이 들어갈 타이밍을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방송을 틀 수 있을 준비가 된 테잎이 나왔다. 이 테잎은 ‘마스터’테잎이라고 부른다. 방송국 본사에 마스터 테잎을 넘겨줄 때 외주제작국 팀장과 여러 사람들이 더 모여 테잎을 한 번 확인한다. 모자이크가 더 필요한 부분은 없는지, 자막에 오타는 없는지 따위를 6여 시간에 걸쳐 수정했다. 이 날 방송국 본사의 심의 총 책임을 맡은 본부장님(?)정도의 분이 작업하기 전에 커피나 한 잔 하자면서 커피 심부름을 시켰다. 다들 아메리카노를 시켰고 본부장님은 카페라떼를 시켰다. 나에겐 먹고 싶은 것을 먹으라 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안될 것 같게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았다. 대신 각설탕을 많이 챙겼다. 전날 한 끼만 대충 챙겨먹었던 나는 각설탕 여섯개를 넣은 커피를 입 데이는 줄도 모르고 마셨다.

방송이 나간 뒤, 나는 제작비 정산을 하게 되었다. 장비대여 업체와 편집실, 녹음실에 나간 돈은 얼마이며 인건비로는 얼마가 들었는지 따위를 모두 정리함과 동시에 제작 기간동안 영수증을 모두 정리해야했다. 수백 개가 되는 영수증을 엑셀로 내역과 액수를 정리하여 대표님께 전달했다.

방송이 나간 뒤, 프로젝트가 완전히 끝났기 때문에 PD도 작가언니도 막내작가도 다 흩어지게 되었다. 작은 프로덕션에서 진행하는 이런 프로그램은 프로젝트가 끝나자마자 제 갈길을 알아서 가야한다.

나는 갈 곳이 없어 다시 부산으로 내려갈 지, 다른 외주프로덕션에 들어가 볼지를 따져보았다. 미디어자과 사람인 사이트를 통해서 외주프로덕션 몇 개를 알아봤으나 주변에서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않았다. (주변의 인맥을 통해 아름아름 사람을 구할 수 없는 ‘평이 좋지 않고 왕따를 당하는’프로덕션만 온라인 구직사이트에 정보를 올려 사람을 뽑고 있다는 것이 선배들의 충고였다.) 내 첫 사수는 6mm 꼭지물로 여의도바닥에 이름을 꽤나 날린 PD라고 소문이 나있었다. 옆에서 보기에도 그런 것 같기는 했다. VJ특공대와 무한지대Q를 오랜 기간 동안 했다고 들었다. 내가 사고도 많이 치고 잠도 졸라 처자고 했지만 갈 곳 없는 내 처지를 불쌍하게 여겼는지 자신이 예전에 일했던 곳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자신이 무조건 입사시켜 줄 수 있는 파워는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는 6mm를 한 번 잡게 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겁먹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침방송이나 6mm프로그램들을 보면 보통 1시간짜리 프로그램이 4개의 ‘꼭지’로 이루어진다. 한 꼭지는 14~15분으로 이루어져있으며 보통 1년 정도의 조연출수련생활을 하게 되면 한 꼭지를 맡을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된다.)

내 사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는데 편집기간 동안 가끔 사무실에 왔었기 때문에 인사를 하고 지내게 되었다. 다행히 그 PD분에게는 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었는지 나를 데려다 쓰겠다고 했다. 부산 촌놈이 강남바닥을 처음 가보게 되었다.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인턴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선배가 한 명도 없었기에 헛소리를 제 맘껏 내뱉은 것이었다. 난 비싼 등록금을 내면 학교를 다니면서 수업을 들으면서 지식과 교양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란 곳이 취업알선센터가 아닌데 왜 인턴따위를 나가서 미리고생 사서고생을 해야 하냐고 반박했다.

필드에 나와 보니 시발, 이거 뭐 다 처음 듣는 소리에다가 가르쳐주는 PD도 아카데미 나온 녀석보다 아는 게 없으니 ‘시발 이새낀 도대체 뭐야 아는 게 하나도 없다’며 귀찮아했다. 대학교가 취업알선센터로 변해가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나처럼 대학교를 4년 동안 다니면서 그 후의 삶에 대해서 전혀 준비하지 않는 놈은 문제가 정말 큰 것 같다.

그래서 후배님들은 얘기라도 좀 들어보라고 뭘 적어봤어요. 이어지는 이야기는 강남의 포스트프로덕션 이야기입니다.

제가 필드 경력이 5개월 밖에 안되서 지금 자리가 잡힌 게 아닙니다. 공식적으론 아직도 백수상태죠. 학교에서 전화도 와요. 그거하지 말고 다른데 알아봐 줄테니 4대보험 되는 데로 가서 우리 학교 취업률 높이잡디다. 저는 아직도 선배들이 뭐할래, 연출할 생각은 있는거지? 꿈이 뭐니? 라고 물어보면 대답을 못합니다. 그러니 제 주관적인 감정이 있는 것들은 그대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방송일 영상일 힘든 것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일인들 어디 쉽고 편한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떻게 다르며 후배님들은 어떤 준비를 하는 게 옳을지 고민하는데 참고가 되기만을 바랍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 왜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문제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되물어 보겠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두개이상의 요소들이 만나서 생성되는 이미지들

It’s getting hot.
Don’t get me wrong.
Get off at the next station.
She hasn’t got any excuse.

네개의 문장에 쓰인 동사는 모두 같다. Get. 하지만 의미는 모두 다르다. 한 단어의 뒤에 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의미가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은 한국어에서도 예를 찾을 수 있다.

사람을 때리다.
문자 한통 때리라.
아, 골때리네.

여기서도 ‘때리다’라는 동사는 여러가지 의미로 쓰였다. 이 동사 뒤에 ‘치다’, ‘보내다’, ‘아프게하다’라는 세개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머리가 아파진다.

사실 기호의 뒷면에는 어느것도 없다. 기호는 양면이 아니다. 기호의 모습은 보이는 것 그대로이다. 더 이상도, 더 이하도 아니다.

기호의 의미가 때마다 달라지는 이유는 뒤에 여러가지 의미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기호들을 만나면서 조합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영상에서도 한 컷, 한 컷이 다른 컷들과 만나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기호들은 서로 만나 연결되면서 문맥을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시간의 2차원 선상에 올려놓아진다. 그리곤 해석을 기다린다.

기호들이 만나면서 생성되는 이미지들은 얼마나 많은 경우의 수가 가능한지 알 수 없다. 한계를 보지 못할 정도로 광범위한 창작가능의 장이다.

인간들도 사회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요소로 간주한다면, 인간들과 인간들이 만나서 생겨나는 새로운 이미지들은 얼마나 또 많을까. 백명의 사람을 만나면 백개의 인간관계가 생겨나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새롭고 개성있는 색깔의 만남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 인간관계에서는 이 이미지 생성의 가능성이 적절하게 대입되지 못하는 것 같다. 모든 인간관계가 전형적이다. 나는 아직 타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그 타인은 이미 나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 결정해 놓았다.

철학을 철학하자.

철학을 철학하자. 너무 빡세다. 쉬었다 가야겠다.

난 철학도사도 아니고, 철학공부를 열심히 하지도 않았다. 뒤늦게 머리가 다 굵어지고 나서야 지적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 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철학공부를 한다고 해서 모두 철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더라.

수천 년 간 인류가 발전시켜 온 생각의 역사를 몇 년 안에 배우려니 훑어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걸러내지도 못하고 우적우적 귀로 눈으로 처먹었다. 이것저것 다 옳은 말로 들린다. 살다 간 사람들이 남겨놓은 말들을 한참 듣다보니 내 머릿속엔 이은호는 어디로 가고 철학자들만 가득차서 시끄럽게 떠들어댄다.

20년간 생각 없이 살고, 2년간 군대에 있었다. 22년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생각’을 하려고 한다. 무리가 올 수 밖에.

철학은 ‘Learn to Unlearn’ 이라고 한다. 이미 배워서 내가 알고 있는 사실들 중 틀렸거나 모순된 부분들을 제거하고 수정하기 위한 공부인 것이다. 들어있는 것도 별로 없는데 모순을 찾고 틀린 부분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결국엔 뒤늦게 시작한 철학과 주워들은 논리들, 그리고 내 몸이 기억하고 있는 나의 본능이 남게 된다. 타인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인줄로 착각하고 떠들어대는 한마리의 동물이 남게 되겠지.

나의 생각을 하자.

 

—- 덧붙임 (2015.12.18) —-

평생을 ‘자아’ 없이 살았음을 반성하기 시작했다.그로부터 고작 5년이 지났을 뿐이다.

사물은 발전할수록 사물은 본질에 가까워진다.

내가 디지털영상을 배우는 학교엔 암실이 하나 있다. 흑백사진을 인화하는 곳이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필름 소비량은 줄어만 가는데 사진과에서도 배우지 않는 암실수업이 영상전공 학과에 떡하니 있다. 사진과에서 고지식한 교수 하나가 넘어왔는데 영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머라도 가르친다고 가르쳤던 게 검은 방에서 약품냄새 풀풀 풍겨가며 사진 현상하는 수업이었다.

DSLR 카메라의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암실수업은 필요한가? 난 필요 없다고 말해보겠다.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 우리 교수님께선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실 게 눈에 선하다. “사진이 발전해온 역사를 배우지 않고선 사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거나 “정성들여 사진을 한 장씩 인화해 본 사람만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디지털편집이 보급화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테이프 두 개를 동시에 기계 안에 넣고 복사를 했던 ‘리니어 편집’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컴퓨터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넌-리니어 편집’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에 비하면 너무 고생을 덜 한다는 이유였다. 고생을 하지 않는 편집,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태우지 않는 편집은 편집자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술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마 ‘오리지널’과 ‘본질’의 차이점을 오해하는데서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리지널’은 그야말로 시간상에서 앞서 존재했던 것들을 말하지만, ‘본질’은 그 사물의 존재의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이다. 위의 사람들은 두 개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고지식한 아저씨들을 보면서 원시인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구석기인들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차례대로 맞으면서 기술의 발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돌도끼를 쓰던 중, 청동도끼가 나오니 돌도끼를 버리고 쇠도끼가 나오니 청동도끼를 버렸다. ‘Orignal’이라는 단어에는 ‘기원이 되는’ 이나 ‘최초의’ 라는 좋은 뜻도 담겨 있으나 동시에 ‘구식의’라는 뜻도 함께 담겨있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새 기술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한 구식에 정을 떼질 못한다. 이유는 사실 기술이 너무 급속도로 발전하다 보니 자신들은 그 기술을 따라갈 자신이 없는 거다. 나이가 어린것들이 순식간에 배워버리는 그 기술이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정체는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상대적인 퇴보를 겪게 되니 난감하여 헛소리가 저도 모르게 세어 나오는 것이다.

청동기인들은 새로 나온 쇠도끼를 보고 ‘이것이야 말로 도끼의 진정한 완성형’이라는 생각을 했다. 돌도끼는 도끼의 오리지널이긴 했지만, ‘날카롭고’, ‘단단하고’, ‘사용하기 편한’ 도끼의 본질에는 전혀 거리가 있었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필름 사진기가 사진의 역사에서 오리지널이긴 하겠지만, ‘선명하고’, ‘사용이 편하고’, ‘셔터스피드가 빠르고’, ‘색감이 좋고’ 등의 사진이 지향하는 목적까지 발전하기엔 한계가 있는 기계라는 것이다.

기계뿐만이 아니다. 파피루스나 대나무 또는 천 쪼가리 위에 글을 썼던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의 책이 ‘기록을 남기기 위한’ 책의 의도나 목적에 가깝다.

성냥보다는 라이터가, 소보다는 트랙터가, 연필보다는 샤프가, 짚신보다는 나이키가,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이, 삽보다는 포크레인이, 디스켓보다는 CD나 USB가, 편지보다는 e-mail이, 브라운관보다는 LED가 제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술이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너무나 명백하게 역사적으로 남겨진 사실들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은 발전되었고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은 기술은 개발되지도 않았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했고, 자유로운 인간은 더욱 기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인간과 기술은 뗄 레야 뗄 수가 없다.

한참을 글을 쓰다 보니 나는 얼핏 기술 예찬론자처럼 보인다. 기술의 장점만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기술도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위에 나열한 것들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구식의 것을 도태되게 만든 최신기술의 선두주자’ 쯤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술들이 가지는 한 가지 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효율’이다.

효율이 대량생산체제를 만들어서 실업자를 무지막지하게 쏟아냈다. 효율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도록 하였고 일부 인간은 비인간적인 계산기로 만들고 일부의 인간들은 낙오자로 만들어냈다. 효율성을 지향하는 기업이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린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효율에서 나온 것이며, 효율은 기술이 지향하며 달려가는 종착역이다.

인간의 손을 통해서 실현되지만, 전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기술은 인간의 친구인가? 적인가? 기술이 앞으로도 계속 효율을 따지며 자가발전 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정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 인정해야 할 암흑시대의 임박이다.

글을 쓰는 중에 글의 의도가 많이 바뀌어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되었다. 시간도 늦었고 어딜 손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글은 이만 줄인다.

애초의 의도는 ‘기술은 발전하는 만큼 교육자는 퇴보한다.’는 의도였다.

몇일 전에 썼던 글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예술도 발전한다.’ 와 대칭되는 글이다.

20100614 새벽

줄넘기 달인

50, 촥, 촥, 51, 촥, 촥, 52, 촥, 촥…

문득 고등학교 때 줄넘기를 하던 기억이 났다. 나는 점심시간에 줄넘기를 하곤 했다. 02년도 강서고등학교 2학년 4반 교실 뒤편에서 나는 인간의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던 2단 뛰기 50개를 성공한 뒤 쓰러져서 한동안 숨을 헐떡였다. 친구들은 쓰러져 있는 나를 일으켜 세우며 대단하다는 존경심을 표하며 내가 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부축해주었다. 내가 50개 신기록을 세우면서 줄넘기는 반에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친구들도 내 기록에 도전했지만 50개는 커녕 30개를 성공하는 친구도 없었다. 그 당시 옆 반의 한 친구가 유일한 경쟁상대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친구는 2단 뛰기로는 내 기록을 깨기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3단 뛰기로 11개를 성공해서 이목을 끌었다. 그것은 2단 뛰기 50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며 나는 무시했고 내가 줄넘기의 최강자라고 우겼다. 그렇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세상에서 2단 뛰기를 가장 잘하는 사나이가 되었다.

59, 촥, 촥, 60, 촥, 촥…

나는 이미 내가 세웠던 2단 뛰기의 기록 50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숨은 차오르기 시작했지만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2단 뛰기의 최고신기록 보유자가 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다물지 못할 만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내가 줄넘기 할 때마다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던 서경진이라는 녀석이 갑자기 줄을 잡더니 필요 이상의 점프를 하며 2단 뛰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점프를 높게 하면 에너지 소비가 커서 20개도 채 못할 것이라고 떵떵거렸다. 그런 나를 무시하듯 20개를 거뜬히 넘기고 30개가 되어서야 콧소리를 조금 내면서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서경진은 절대 내 기록을 깨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붉어진 얼굴은 더 이상 붉어지지 않았다. 호흡도 규칙적으로 리듬감을 찾아갔다. 불안정한 점프였지만 사방팔방을 다 활보하고 있었지만 어떻게든 2단 뛰기를 성공해내고 있었다. 좀체 멈추지 않는 줄넘기 소리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경진이에게로 모였다.

71, 촥, 촥, 72, 촥, 촥…

경진이는 그렇게 첫 도전에서 74개의 기록을 세웠다. 나는 그 당시 너무 충격이 컸던지 코웃음이 나왔다. 줄넘기에선 나를 능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을 거라 자부했는데 너무나 쉽게 깨지고 말았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서경진은 줄넘기의 신이다. 인간의 한계는 50개이고 신의 한계는 75개쯤 되나보다.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생각 하면서 나는 인간으로서 2단 뛰기의 최고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74, 촥, 촥, 75, 촥, 촥…

그 이후로 내가 줄넘기 할 때 시선을 주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다.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줄넘기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이렇게 경진이의 기록을 넘어섰다. 줄넘기의 신을 능가했다. 신의 한계인 75개도 넘었다. 얼마나 더 할 수 있을지 나는 장담할 수 없었다.

83, 촥, 촥, 84, 촥, 촥…

나는 이미 내 몸의 한계를 넘었다는 걸 깨달았다. 산소 공급이 많이 안되는지 팔 끝이 저려오기 시작했고, 눈 앞도 차츰 캄캄해져 갔다. 이제껏 오래달리기를 할 때에도 줄넘기를 할 때에도 이렇게 힘들어본 적은 없었다. 내 몸의 모든 부분들이 고통을 부르지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턱을 처들려 졌다. 거울 위에 적혀있는 ‘투지’와 ‘집념’이 눈에 들어왔다.

89, 촥, 촥, 90, 촥, 촥…

10개만 더 하면 100개다. 벌써부터 나의 뛰는 폼은 서경진이 뛰던 폼보다 훨씬 불안정해져 있었다.

92, 촥, 촥, 93, 촥, 촥…

단 몇 개만 더하면 100개를 성공할 수 있고 세자리 숫자라는 값진 의미의 신기록이 된다. 나는 숨을 참았다. 눈도 감았다. 입도 다물었다.

97, 촥, 촥, 98, 촥, 촥, 99, 촥, 촥, 100!

줄넘기가 나의 발아래를 빠져나가자마자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100개를 성공했다! 나는 인간의 한계도 넘었고 신의 한계도 넘은 2단 뛰기에 있어선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최강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고등학생 때 고작 50개를 해놓고 저질렀던 서툰 오만을 나는 반성했다. 그럼과 동시에 더 이상의 최고기록은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또 확신했다.
한참을 숨을 고른 뒤 여전히 쓰러진 채로 외쳤다. 누군가와 이 희열을 공유하고 싶었다.

“관장님!! 헉, 헉, 100개 했습니다! 100개! 헉헉.”

관장님이 대답했다.

“뭐.”

관장님은 내가 그렇게 열심히 2단 뛰기 신기록을 세우는 동안 신경을 쓰지도 않으셨나보다.

“헉헉헉. 2단 뛰기 백개 했습니다! 백개!”

관장님이 대답했다.

“그래, 열심히 해라.”

어리둥절해 했다. 관장님은 2단 뛰기를 한 번도 해보지 않으신 것일까. 얼마나 힘든 것인지 왜 모르시는 걸까. 관장님은 담배를 한 대 태우고 오시더니 다시 말씀했다.

“열심 해라, 열심. 막 300개도 하고 그래야 된다. 초딩들 300개 막 쉽게 한다. 열심 해라.”

속독법 찬양

내가 몇권의 속독책을 읽은 결과 모든 속독법 책에서 말하는 바는 같은 내용이었다. 빨리 읽으면 좋은 이유를, 그리고 빨리 읽을 수 있는 요령들을 많이 소개해놓았다.

나는 그 요령들을 제대로 연습하지 않아 완전히 속독법을 습득할수는 없었으나 문자를 빨리 읽는 새로운 개념과 방법들을 아는 것만으로 독서속도를 세배나 증가시킬 수가 있었다. 읽는 속도는 세배 빨라졌지만 독서의 깊이또한 두배나 깊어졌다. 속독법을 익힘으로 책과 친해지고 더 많은 정보를 얻을수가 있게 되었다.

우리는 가나다라를 외우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글을 읽는 속도가 향상되어 왔다.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한번 분석해보자.

우리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를 들어갈 즈음부터 글을 배우게 된다.

처음에 ㄱㄴㄷㄹ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한 어린아이는 가나다라처럼 자음과 모음이 합쳐져 소리를 낼 수 있다는걸 배우며, 그 형태소들이 모여 단어를 만든다는 것도 이해하게 된다. 단어를 이해한 학생은 문장 문단의 개념까지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나비라는 단어를 말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보도록 하자.

맨 처음 ‘나비’라는 단어를 해체하여 ㄴ+ㅏ + ㅂ+ㅣ로 구성되어있다는 것을 분석한 뒤 ‘ㄴ’이 어떤 소리를 내는지 ‘ㅏ’가 어떤 소리를 내는지를 떠올린다음 여러번 시도 끝에 “느으아아뷔이이”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다.

글에 조금 더 익숙해진 아이라면 ‘나비’라는 단어는 나+비로 이루어져 있다고 인식한다. ‘나’라는 형태소가 ㄴ+ㅏ 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과정은 생략하게 된다.

학교를 계속 다녀 ‘나비’라는 단어를 여러번 마주쳤을 경우 그 학생은 ‘나비’라는 단어를 보고 습관처럼 ‘나비’라고 말할수가 있다. 또 학생이 ‘나비’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경우 머릿속에는 팔랑거리며 날아다니는 나비의 이미지가 떠올라 문자로이루어진 단어와 음성발음과 머릿속에 떠오른 나비가 같다는걸 이해할 수 있다.

단어를 많이 알면서 또 글을 많이 접한 사람은 단어 뒤에 일정한 형태의 조사가 온다는 것을 무의식중에 알고있다. ‘나비를’, ‘나비가’, ‘나비도’ 와 같이 단어와 조사의 결합형태까지 한번에 인식할수 있게 된다.

우리 대부분은 단어를 인식하는 정도나 단어 뒤에 붙는 조사나 접미사들을 한꺼번에 인식할 수 있는 정도에 도달하면 글공부를 그치게 된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인간이 한 번에 인식할 수 있는 문자양의 최대단위가 단어라고 단정지은적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석한 우리들은 그 이상의 독해능력을 키우는 시도조차 해보지 않는다.

문장의 형식을 여러가지로 나눌 수가 있지만 대부분이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위대한 한글의 큰 틀은 S+O+V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단어+조사,접미사’를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단계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것이 문장의 형태를 분석하고 그 안에 들어가는 성분을 유추해낼 수 있는 정도이다. 이전 단계에서는 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눈으로 읽어나가지만, 이 수준까지 도달하게 되면 문장 전체구조를 먼저 파악한 후 그 안에 어떤 단어들이 있는지 인식하고 머릿속에서 문장의 의미를 한 번에 이해하게 된다.

이 단계까지 올라가는 것은 무척이나 오랜 시간과 많은 연습이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문장의 패턴을 많이 분석하여 알고 익숙해지는 것이 중요한데 문장을 주어와 목적어, 수식어로 나누어 인식하던지 또는 적당한부분을 너댓마디 정도로 끊어서 인식하는 연습을 하는게 우선이다.

창의력이 좋은 사람이라면 이쯤에서 눈치 챘을지 모르겠지만 이 정도 수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속독이 있다.

문장을 한번에 인식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 다음과제는 문단을 한번에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경지에 오른 속독법은 이것 말고도 꽤 많다.

  • 좌우로 눈알을 굴리는 안구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
  • 두줄씩 또는 서너줄씩 한번에 읽는 것
  • 한페이지를 왼쪽 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대각선으로 읽는 것
  • 정 중앙에 세로로 한번 그어내려 읽는 것
  • 두괄식과 미괄식 형식의 글이 많은것을 이용하여 앞 뒷부분만 읽는 골라읽기
  • 페이지를 아예 사진으로 찍어버리는 포토리딩

이 정도의 속독법을 익히게 되면 200페이지 책 한권을 30분안에 독파할 수 있고, 포토리딩을 마스터 한 사람은 5분만에 한권을 다 읽는다. 1분에 10만개의 단어를 읽어버리는 수준이다. 제대로 단련된 속독법은 읽는 속도는 물론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 또한 천천히 읽는것보다 훨씬 이해도가 높다.

나는 창의력이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라서 책에서 소개된 위의 속독법 보다도 효과적인 방법을 창안해내어 더 높은 경지의 책읽기 방법을 터득하였는데, 그것은 목차만 보고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나는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다. 3일 전 나는 책 제목만 보고 책의 모든 내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어 도서관에 가서 뱀처럼 책장사이를 기어다니며 3일만에 도서관에 있는 책의 1/3을 다 봐버렸다.

조금만 더 갈고 닦은 후에 전국의 각 도서관들만 찾아다니며 도서관 입구에 앉아 도서관 간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독서법을 깨우칠 계획을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