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

그러니까네, 사람은 사람의 한계를 규정짓는다 이거지. 한계를 이미 규정지어 놓은 인간이 어떻게 그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겠냔 말이지.

자신의 한계를 이미 규정해 놓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뭐냐면, 그 한계보다 뛰어난 사람은 사람으로 안보고 신과 같은 존재로 취급해버리고 마는거지. 자신도 그렇게 뛰어날 수가 있는데. 더 열심히 할수도 있고 더 많은 발전을 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러니까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쉽게 예를 들어가꼬, 자 보제이.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한계, 그기 뭐이꼬. 내가 생각할땐 일주일에 20시간 공부다. 20학점 듣는게 학교에서 최고로 많이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학점 수준이거든. 그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일주일에 20시간 공부라고 그어 뿌는기다.

일주일에 씨바 시간이 얼마나 많노 24*7은 얼마고 일주일에 148시간 아니가. 그 중에 묵고 자고 빼도 80시간은 안남나. 그서 영화보고 친구 만나도 40시간은 안되나. 왜 공부 못하는데 40시간 동안. 아니 씨바 진짜 마음먹고 공부할라치면 영화안보고 친구 안만나면 일주일에 80시간 공부 안되겠냐 이말이다.

근데 아무도 그래 안한다. 20시간이 한계다. 20시간 공부하고 나면 너나 나나 다 퍼져가지고 일어나도 못한다. 이래가 되긋나.

그런놈들이 대학졸업하고 나면 일주일에 40시간 일하는거 존내 힘들어한다. 노동자 인권보장인가 뭔가 들먹거리 가믄서 최대근무시간 계속 낮추고 있제, 그게 또 사람의 한계를 규정하는기라. 일주일에 40시간 넘게 일하는 놈은 신이라 신. 미친 일중독자로 취급하는기라. 내보다 50살 밖에 안많은 우리 할아버지도 하루종일 밭에 나가고 논에 나가서 농사짓고 일했는데 인간의 한계가 50년만에 딱 절반으로 줄어뿟다. 일안하고 공부안하면 딱히 할것도 없는 놈들이 꼭 딱 그만치만 할라고 졸라 떠들어 댄다이.

진짜 할라고 마음있는놈은 안시키도 다 하고 하지말래캐도 더 한다칸다.

지가 지 발에 족쇄 채우고, 지가 지 손에 수갑 채우는 기다.

근데 암만 남이 머라 해봐야, 그 한계 못 무너뜨린다. 지가 알아야 된다. 근데 니 그거 아나, 코끼리 어째 길들이는지. 코끼리를 어릴때 새끼때부터 발에다 족쇄를 채아가 나뭇기둥에다 묶어놓거든, 그럼 처음에는 벗어날라고 지랄 염병을 틀다가도 몇일 지나고 나면 족쇄가 차였을 때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돼. 그 다음부터는 나뭇기둥 자체가 필요없다. 족쇄만 채워 놓으면 꼼짝 안하고 얌전해진다. 도망 절때 안간다. 다 커서 성인코끼리 되제. 몸무게 한 5톤 이래 나가제. 그래도 족쇄 채우면 도망 못가는 줄로 안다.

그렇게 한계 근처에도 안가본 새끼들이 계속 안된다 안된다 해대라. 그게 진짜 안되는기다. 그게 그냥 금마들의 한곈기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교육이 담당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참 희한합니다. 대학교를 보고 이렇게 비판했다고 하죠. [우리나라 대학들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대학교 졸업생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려 하니 뭣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기구가 원래 학문을 닦기 위한 장소이지 기업을 위해서 노동자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거든요.”

그렇다. 우리나라 대학은 취업준비생들이 먹고 살 준비를 하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취업알선센터가 되어버린 사실이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하다는 증거이다. 누구도 오늘 날 대학이 하는 그 역할이 이상하다 여기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의 그러한 기능에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교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원래 교육이라는 게 부분적으로 그 기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학생들을 이데올로기로 조종해서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게 교육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죠.”

교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안했고 학교에서 성적이 나쁜 학생이었다 해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세 개는 배웠을 것입니다.”

교수님은 손가락 세 개를 앞으로 펴 보이며 하나씩 세며 외쳤다.

“권력에 복종하는 법”
“높은 사람에게 굽신거리는 법”
“세상에 존재하는 이치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법”

그러면서 예를 몇 개 들었다.

“아니, 초등학교를 가기 이전에도 유치원에서부터 우리는 먼저 사회질서를 따르는 법부터 배웁니다. 줄서기. 그리고 선생님한테 경례하기”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참 웃긴 건, 학교하고 가정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을 보이기도 합니다.

학교에 가면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집에 오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수업이 끝날 때쯤 나온 이야기였기에, 몇몇 졸고 있던 학생들도 어느새 눈을 번쩍 뜨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학생들 모두 자신이 받았던 교육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과 함께 탄성을 자아냈다.

틀린 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교육의 불가피한 의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교육이 그 일을 담당하지 않으면 좌파 빨갱이라는 소릴 듣고 선생님이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체 인구의 60%에 달하는 임금노동자를 생성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하는 사업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바치고 생계수당을 받아내는 일꾼이 될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법이나 예술을 즐기는 법 따위를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시키는 대로 일만 해낼 수 있는 말귀를 알아듣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초등학교의 ‘바른생활’ 교과서부터 중학교의 ‘도덕’ 교과서 고등학교의 ‘윤리’ 교과서 모두 학생들을 그런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고등학교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배우지 않고 윤리만은 배우는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다. 이번 교육과정에서는 국사가 선택과목이 되어버린 데다 뉴라이트가 교과서를 새로 편찬하는데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뒤집어 버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교육이라는 행위는 정권에 따라 학생들을 조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임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12년의 이데올로기, 거기에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변질되어버린 4년의 대학교육, 거기에 나라의 종이 되기 위한 2년간의 군대교육까지.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여 감사해했던 18년의 그 교육이 나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너무나 괘씸하고 분하다! 특정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모두가 그것이 옳은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따라왔던 길이기에 나 또한 자격이 없다.

하지만 내가 받은 교육에 그렇게 나쁜 면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한 교육이 있었기에 오늘날 4대강 사업을 추진시킬 무뇌한 노가다꾼들이 있을 수 있고, 전쟁나면 총알 받을 예비군들이 있으며, 선거기간에 몇 마디 말로 소중한 표를 받아낼 수 있는 5년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명맛의 국민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않는가.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국가가 존립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젊은이들을 자본주의 국가의 일원으로 열심히 일을 시켜야 국익을 추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속도에 힘을 실을 수 있기 때문에 하찮은 인간노동력들에게 인권이나 여가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어지로울수록 시민들을 다루기가 쉽고, 그들의 밥줄을 끊어서 생명이 위태위태할 때야 말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임금의 뜻을 따르게 된다.

대한민국 청년들이여, 대한민국의 젊은 혈기들이여, 그리고 내 친구들아! 그러니 모든 것을 포기해라. 깨우치지 말아라! 눈을 감고 귀를 닫아라. 그저 남을 위해 일하고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우리는 더 많이 알아봤자 불행해지는 임금노동자이니라. 계속해서 토익공부를 하며 이력서에 한줄 더 그어 넣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라.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의심과 주체의지의 발아

올해 2010년. 내 나이 스물여섯. 20대의 반이 지났다.

스물여섯 살의 나는 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26세 이은호의 모습은 필연적인 결과일까, 우연의 조합일까. 우연도 필연에 속하는 것인가.

나의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내 몸 안에서 꿈틀대는 내 본능과 자의식이었을까, 아니면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 의해서 영향받은 것일까?

나의 모습을 이렇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에 대한 이유 또한 찾지 못할 것이다.

나 어릴 적엔 학교에서 꿈에 대해 적어내라고 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때 잘만 적어냈던 친구들이 여전히 그 꿈을 가지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 글을 한번 끄적여 본다.

왜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꿈꾸는 학생들을 좋아할까?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뭔가 위대한 삶을 살길 바랐던 것일까? 사실 선생님들도 그 작은 아이들이 커서 양아치나 공사판 인부가 되거나 잘해봐야 박봉의 월급쟁이 아저씨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어느 날, 형이 갑자기 유리병을 들고 와가지곤 타임캡슐을 만들자며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는 게 기억난다. 타임캡슐이 뭔질 몰랐는데 형의 설명에 따르면 그 당시의 기억을 담아서 흙 속에 묻어두고 한 십년 지나서 파보면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아주 좋은 거였다. 그러면서 형은 허겁지겁 유리병 속에 뭘 처넣기 시작했다. 사실 그 속엔 아주 소중한 것들이나 그 당시를 기억시킬 수 있는 의미심장한 아이템들이 들어가야 하는데 별로 쓰지도 않고 소중하지도 않았으며 유리병 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장난감 몇 개를 골라 집어넣었었다. 그리고 공책을 북북 찢어서 ‘나는 커서 이 되겠다.’라는 꿈을 한 장씩 적어 넣기로 했다. 그 당시 형은 뭘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전까지 한 번도 커서 뭐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다. 형은 빨리 타임머신을 묻어야 한다며 재촉했다. 5분간의 고민 끝에 ‘소방관은 타죽을 수도 있으니까 경찰관이 되어야겠다.‘며 “나는 커서 10년 후에 경찰관이 되어있겠다.”라고 적어서 넣었다. 그 후 그 타임캡슐의 행방을 찾아본 적도 없지만 아마 지금 가보면 그 때 살던 집 뒤의 작은 마당엔 새로운 건물이 올라와있을 것이다.

그 다음 년도에 6학년으로 올라가서 만난 담임선생님은 꿈에 무척 집착했다. 모든 학생들이 장래희망 카드를 만들어 게시판에 붙이는 난리법석을 떤 것이었다. 그것도 부모님들이 찾아오는 가을운동회 직전에 말이다. 나는 그 때까지 13년의 인생을 살면서 장래희망이라는 것에 생각해봤던 적이 작년 5학년 때 5분 동안 생각해봤던 게 전부였는데 이젠 6학년이니 더 진지해봐야겠다며 머리를 싸맸었다. 밤이 새도록 고민해서 만들어간 나의 장래희망 카드에는 ‘샐러리맨’이 적혀있었다. 평범한 학생들을 부풀리고 과장시켜 학부모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담임선생님의 허영심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고민하던 나를 떠올려 보면 나는 커서 별로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장래희망카드를 제출하고 난 뒤에도 그 카드가 게시판에 붙고 난 뒤에도 가을운동회 때 엄마가 와서 내 카드를 보고 혀를 찼을 때에도 나는 샐러리맨을 꿈이라고 적은 것을 무척 후회했다. 그렇게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는 도무지 무엇을 꿈으로 가져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고3이 되었다. 고 3이라면 이미 장래계획과 진로설정이 다 되어서 수능공부에만 집중해야 할 시기이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게도 이제까지 18년의 인생을 살면서 장래 희망에 대해 생각해봤던 적이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두 번 밖에 없었다.

고3 야자시간에 떠들던 녀석들이 단체로 야단맞던 중 훈육에 한창이던 ‘김갑상’선생님이 한숨을 푹푹 쉬며 “느그들 도대체 꿈은 있나?” 라고 물어봤었다. 단체로 야단맞던 애새끼들이 10명 쯤 되었는데 나를 포함한 두 명을 제외하곤 다른 친구들은 자신들의 꿈이 무엇인지 대답했고 꿈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한 나와 그 친구는 꿈도 미래도 희망도 없는 한심한 잉여인간 취급을 받았었다.

“꿈이 없으면 공부를 할 이유가 안 생긴다. 내일까지 당장 꿈부터 가지도록 해라.”

정말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그렇긴 해도 내일까지 당장 꿈이 생기길 바라셨던 것은 일리가 없는 말씀이었다.

꿈이 없었기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나는 대충 수능을 쳤고, 나온 수능 점수에 맞춰서 원서를 적어보기 시작했다. 대학교들에서 날라 온 찌라시들과 복잡하게 분석된 적성검사표,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대학원서라는 백지장에 그려 보려니 막막했다.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는지도 전혀 몰랐다.

그런 복잡한 심정으로 또 다시 한번 꿈에 대해 고민하던 중에 바쁘신 고3담임선생님의 귀한 시간을 뺏어서 5분 동안 상담을 받았다. 그 때 추천해주신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대학 디지털콘텐츠학부 디지털영상전공’(가장 이름이 길어서 눈에 튀었다.)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그 쪽으로 원서를 넣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아직도 나는 내 꿈이 뭔지 모르겠다. 이러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휴학한 뒤 호주로 도망 와 있는데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꿈이 생기긴 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사실 사람들이 꿈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도 가지고 있긴 한데, 나의 꿈은 특정한 직업이나 인생계획 따위로 세워놓진 않았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정직하게 사는 것,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 정도로만 세워 놓았다. 인생의 기로가 어떻게 바뀔 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호주에 오기로 한 것도 한 달 만에 결정한 것이고 브리즈번을 떠나 멜버른으로 가야겠다는 결정도 저번 주에 했다.

알지도 못하는 앞으로의 인생을 꿈이라는 황급한 계획을 세우면서 가능성을 모두 닫아버릴 수는 없잖아.

헛되고 헛되도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시발 살아서 무엇하나 80년 뒤 뒈져버리는데 뒈지는게 허무해서 씨라도 많이 뿌려볼까 한들 그자식들 또한 내가 아니며 나의 일부조차 안되기에 헛된 노력이다 세상에 책이라도 몇권 써놓고 가면 보람차려나 생각해봐도 30억년 뒤에는 태양이 너무 커져서 지구를 삼켜버릴 텐데 50억년뒤에는 지구를 먹어버린 태양조차 터져버릴 것이고 60억년 후에는 우리 은하가 안드로메다 은하와 충돌해서 모든게 혼란에 빠진다 빅뱅 이후로 우주의 모든 요소들이 멀어져 가고 있는데 우리 은하군은 다른 은하군과 멀어져 가므로 인력이 약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은하 자체의 인력도 줄어들어감으로 모든 개체들간의 거리가 멀어지고 인력이 줄어들게 되어 최소단위 원자, 그안의 양성자 중성자 까지 인력이 없어지게 된다 모든 것이 언제 존재했었냐는 증거도 못남기고 사라져버릴 것인데 이 내 짧은 인생 얼마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가 시발

 

—- 덧붙임 (2015.12.18) —-

사회에 나오기가 무서워 허무주의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인간 지각의 한계를 벗어난 경험

이미지 공부를 한 지 한 달이 조금 지나던 어제였습니다. 어젯밤 저는 정말 잊을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을 했습니다. 보는 것에 집착이 너무 심했던 요즘 꿈속에서도 무엇인가가 등장해서 보였습니다. 이제껏 본적이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꿈속이 아니면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인간의 시각능력으로는 볼 수 없는 다른 세상의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눈을 통해 들어온 이미지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제가 보았던 그 풍경에는 거리에 상관없이 초점이 맞아있었습니다. 모든 눈알과 카메라에는 초점이 있어서 가까운 곳에 초점이 맞으면 멀리 있는 곳은 흐리게 보이고 먼 곳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운 곳은 초점이 안 맞게 됩니다. 제가 꿈에서 경험한 풍경에는 모든 곳에 초점이 다 맞아 있었습니다. 보이는 모든 것이 모두 선명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시야각 120도를 초월한 풍경이었습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공간을 저는 시각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보았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알았다고 표현해야 더 적당할 것 같습니다. 보는 과정도 없었고 이미지를 읽는 과정도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고 아무런 감각적 자극도 없었습니다. 다만 내가 그 안에 있었고 내가 보고 싶은 것이 아주 선명한 이미지로 저에게 다가왔을 뿐입니다. 봄과 동시에 이미지의 이미지를 느꼈고 물체의 상은 그 뒤에 저의 머릿속에 새겨졌습니다. 눈을 감고 상상력을 통해 본 꿈속의 세계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기업이 사람을 잡아먹네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인 친구를 만났다. 모 회사의 인사부 행정직으로 6개월 째 일하고 있다는 그녀는 겨우 반년 만에 300명이던 직원의 수가 90명으로 줄어든 것에 허희탄식했다. 이제까지 해고당한 200명의 직원들을 생각만 하면 너무 미안하다며 특히 40~50대의 아저씨들은 이직할 곳도 마땅찮아 생각 날때마다 입맛이 씁쓸해진다고 했다. 내 친구가 직원들 월급을 챙겨주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해고통보를 날려야 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보람보다는 자책감을 많이 들게하는 나쁜 직장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런 일을 하는데도 돈을 많이 챙겨줘서 좋은 직장이라고도 했다.

직원들을 해고한 이야기를 계속 하다보니까 그들을 누가 해고시킨 것인지가 애매해졌다. 회사에서 잘려나간 직원이 불과 반 년 만에 200명. 설마 입사 6개월 경력밖에 없는 내 친구가 자른 것인가? 최후통첩을 날리고 직원들을 자른 것에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으니 정말 내 친구가 자른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 회사 안에 있지 않았더라도 200명의 직원들은 잘려질 운명을 갖고 있었으니 내 친구의 탓은 분명 아닐게다.

그럼 회사의 우두머리인 사장이 잘라낸 것인가? 회사의 직원들이 나가서 회사의 규모가 작아지면 가장 안타까워 할 사람은 사장이 아닌가. 또 잘라놓고 가장 미안해 할 사람또한 사장이다. 애플사를 설립했던 스티븐잡스는 직원들과 트러블이 생겨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니 기업에서 쫓아내는 사람이 사장이라고 말하면 안되겠다.

그럼 자른 사람은 없단 말인가? 잘린 사람은 수두룩한데 자른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Give and Take, 액션과 리액션, 작용과 반작용, 자극과 반응이라는 인과법칙을 기본으로 하는 많은 자연현상들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있으면 따라서 자른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자른 사람이 없나? 아무래도 자른 사람은 어디에도 안보인다!!

자른 회사는 있는데 자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가 잘랐지 어떤 사람이 자른 것은 아니다. 잘린 사람들도 ‘여보, 나 회사에서 잘렸어. 엉엉’ 이라고 말하지 ‘여보, 인사과장 그새끼가 마침내 나를 잘라버렸어’ 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내 친구가 자른 것은 아니지만 내 친구의 직위인 인사과 행정직이 자른 것은 맞다. 그 회사 사장은 자르고 싶지 않아지만 사장이라는 자리가 직원들을 쳐낼 수 밖에 없었다. 기업의 조직적 체계가 기업원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 목적으로 기업에 들어갔던 신입사원들도 기업이라는 조직에 흡수되고 자부심을 느끼며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입사하는 순간부터 명함에는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회사의 이름이 더 화려하게 나온다.

분명 회사를 세운 것은 사람들인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회사라는 조직의 구성원이나 일부 부품 따위로 취급되고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이라는 체계에 이끌려 다니게 된다.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따위가 이성이나 감성이 있을리가 없고 인간과의 정이 통할리도 없다.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를 빌려 존재하는 기업체는 냉철하게 자신의 번식과 생존만을 목표로 인간을 동력원 삼아 부피를 키워간다. 어쩌면 SF영화에서 벌어질 법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과 같은 일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덧붙임 (2015.12.18) —–

2010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 진출하는 게 겁이 났던 나머지 이렇게 변명의 글을 쓰곤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 도피를 목적으로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죠.

존재의 이유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철학이라는 말만 꺼내도 내가 사주팔자 점집을 차릴 작정을 한걸로 오해를 해서 이상하게 쳐다보곤 한다. 그런 친구들도 10여 년 전에는 지독한 철학자였다. 모든 사람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다. 자신의 자아를 깨닫고 ‘나는 누구이며, 내가 살고 있는 우주는 어디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들을 던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을 찾지 못한 단기 철학자들은 모두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풀지 못해 포기한 ‘존재의 이유’라는 문제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명쾌한 해답을 일찍이 내놓았다.

‘존재의 이유’나 ‘왜 사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 가정을 꾸려 후손을 잘 기르고 싶다든지 연봉을 5천만원정도 주는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서라든지 장원급제하여 가문의 영광이 될 것 이라는 대답들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답들은 자신들의 꿈이자 인생계획일 뿐이지 정답이 아니다. 게다가 본인이 세상에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도 될 수 없다.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개인의 존재이유를 넘어서 세상 만물의 존재이유까지 물어보는 질문이다.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답 중에서 틀린 답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살기위해 산다.’라는 동어반복적인 답만이 남는다.

쇼펜하우어는 ‘살기위해 산다.’라는 것을 ‘will to live’(생의지)라고 말했다. ‘will to live’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의 원천이다. ‘will to live’가 사람을 하루세끼 밥을 먹게 만들고 짝을 맺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생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의지에 의해서 행동한다는 것을 부정할지도 모른다. 이는 개념의 혼동이 있기 때문인데, 흔히 ‘의지’라는 단어는 뇌의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사전에서는 자신의 의도를 입각하여 자기결정을 하는 목적을 추구하는 작용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쇼펜하우어가 말한 ‘will to live’는 이보다 좀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의지를 뜻한다. 그것에는 우리의 이성이 개입되지 않는다.

생의지는 뇌가 계산한 결과가 아니고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생의지는 내 몸속 100조 개의 세포 안의 유전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전인자가 달성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종족 보존이다. 인간이 종족 보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고 이성을 만나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헌데 인간이 귀찮다고 식음을 미루고 짝을 맺지 않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문제점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 몸속의 유전인자는 쾌락이라는 당근을 줘서 사람을 조종한다. 인간의 미각 구조는 이 쾌락원칙을 철저히 따르기 때문에 대체로 몸에 필요한 음식은 맛이 좋고 몸에 해로운 음식은 맛이 없다.

인간의 모든 욕구의 바탕에는 생의지가 넓게 깔려있다. 그리고 그 생의지 위에는 고차원적인 욕구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있다. 이 피라미드는 하위단계에 있는 결핍욕구와 그 위에 있는 성장욕구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위단계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상위단계의 욕구를 추구하지 못한다.

생리적 욕구, 안전과 안정 욕구, 사랑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 존경 욕구, 자기실현 욕구의 단계로 쌓여있는 욕구위계 피라미드는 Abraham Harold Maslow가 발견해 낸 모델로 에피쿠로스가 나눈 3단계의 생존, 성욕, 성취욕보다 더 정밀하다.

maslow

생리적, 안전, 사랑, 존중 에 대한 욕구는 결핍욕구로 이 욕구가 기본적으로 충족되어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해지게 되면 우리는 더 발전하고자 하는 성장욕구를 추구하게 된다. 먼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야만 알고 싶어 하는 욕구와 자아를 실현코자 하는 욕구, 그리고 심미적 욕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생의지는 피라미드의 아래단계에 있는 결핍욕구에 더 가깝다고 단정 지을 지도 모르나 단순히 생의지가 하위단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생의지는 모든 욕구에 넓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생의지는 모든 인간행동의 원천이다. 생의지는 인간의 생존에 관여하여 안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사랑을 받아 종족을 번식하고자 하는 욕구도 가지게 하며 훌륭한 사람이 되어 훌륭한 개체로 진화하고자 하는 욕심도 만들어 낸다. 더 나아가 자아를 실현하는 것 또한 자신의 객체를 인식하고 주체로서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생의지는 모든 욕구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생의지는 인간이 가지는 모든 욕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욕구들 중에 아주 강력하고 원초적인 것이 있다면 생존욕구 다음으로 성욕을 들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종족보존을 위해 자연적으로 왕성한 성욕을 가지게 된다. 성욕이 없는 존재는 일찍이 대가 끊기고 멸종하였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는 성욕이 왕성하다.

인간 또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동성동본간의 결혼과 근친상간을 금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관습적인 규제가 아니었다. 근친상간을 하면 기형아를 낳고 열등한 2세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친지를 사랑하지 않고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만들 수 없는 이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인간은 본인과 다른 형질의 가진 이성에게 끌리게 된다.

우리는 흔히 난자에 1등으로 도착하는 정자가 수정에 성공한다고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자 한마리가 난자에 1등으로 도착해도 바로 문이 열리지 않고 100마리쯤 둘러싸인 이후에야 문을 열어 단 한 마리의 정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최근 보고된 사실이다. 1등으로 도착한 정자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난자는 100마리의 정자를 모두 둘러본 뒤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와 다른 형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정자를 받아들이는 선별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원생동물의 하나인 짚신벌레가 있다. 꼭 짚신마냥 생긴 짚신벌레는 날씨가 좋은 한여름에는 아메바와 같이 몸이 갈라짐으로써 번식을 한다. 그러나 가을이 찾아와 쌀쌀한 바람이 불어 올 때면 두 놈이 슬쩍 만나 도둑 키스를 한 번 하고, 살그머니 헤어진다. 하등한 종족 주제에 무슨 꼴불견이냐고 하겠지만 겨울이 닥쳐오면 짚신벌레 키스의 신비가 드러난다.

날씨가 사나워지면 스스로 몸이 갈라져 태어난 홀아비의 새끼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죽어 버리는데 키스를 통해 태어난 후손들은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많은 수가 생존한다. 짚신벌레는 키스만 한 것이 아니라 두 몸이 합치는 동안 개개의 이질적인 염색체의 일부를 교환함으로써 생존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 볼수가 있는데 서로 다른 형질을 가진 부모가 낳은 혼혈아는 성장과정에서 인종차별을 받기는 하나 결국에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가 있었다.

생의지는 인간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인간은 의지라는 것에 영혼이 저당 잡힌 존재라고 해도 문제가 없겠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생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 만물이 존재하게 만들어 준 진리보다 더 높은 진리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을 해야 마땅하다.

데카르트가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

곰곰히 생각해봤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을 해야 마땅하다.”

 

비가 내린다고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대국이 힘들다고 장기의 규칙을 탓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쓰촨성 지진이 일어나면서 30만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지진은 남아시아 대륙판이 유라시아 대륙판을 밀어 올려 발생한 것이라고 한다. 중국인은 대륙이동설을 알고 있고 자신이 살고 있는 위치도 알고 있었음에도 대비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지진이 일어나기 몇 일전 개구리들이 힌트를 줬다고 한다. 쓰촨성 부근에 있는 모든 개구리가 튀어나와 온 도로를 덮었고 차에 밟히면서도 어디론가 황급히 이동하였다는데, 동물들은 이런 본능이 있어 지진을 알아채고 대피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진이 일어날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지진이었기에 타격을 입은 사람들에겐 애석하지만 하늘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 인간의 무지는 무척 슬픈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은 재앙이 너무나 많은 나라라서 일본에서 지진이 일어났다고 하면 큰 이슈거리도 되지 않는다. 매번 일어나는 일본의 대지진은 일본의 건축력을 발달시켜 주었다. 우리나라 또한 매년 여름에 태풍은 찾아오는 것이라 당연히 여기고 철저한 대비를 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태풍이 몰아치고 홍수가 났다며 불평하는 일이 없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홍수가 들일이 없는 높은 곳에 집을 짓고 바람이 불면 덤덤하게 테이프를 창문에 바른다. 그리곤 어떤 영화를 보며 태풍을 보낼지를 고민한다. 반면 미련한 사람들은 TV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에 호들갑을 떤다. 100년만의 폭설이니 50년만의 대지진, 30년만의 무더위라는 등등 말이다. 어떤 이들은 지구가 멸망할거라며 마당에 소금을 뿌리고 굿판을 벌이기도 한다.

오늘날 환경운동가들은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운동을 벌이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해 이산화탄소량을 줄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인데, 사실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높아져서 지구의 온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온도가 높아져서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는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지구가 따뜻해지는 것은 인간의 탓이 아닌 지구의 운명에 가깝다고 한다. 그리고 지구가 따뜻해지면 바다가 넓어져서 땅이 잠기기는 하겠지만 따뜻하고 비옥한 토지도 늘어나 풍요로워 질 것이다. 환경운동가들은 물에 잠기는 땅만을 강조하며 객관적이지 못한 관점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다. 환경운동가들은 과학적이지 못하고 객관적이지 못하며 감정적이다. 그런 환경운동가들에게 모든 자연현상은 불안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는 오늘도 내일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게 된다. 100년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고 200년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니 우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마땅하다. 빙하기가 있었던 적도 있는데 조금 춥다고 난리를 쳐서야 되겠는가? 사실 지구의 10억년 역사동안 이렇게 평화롭고 안정적인 적도 없었을 건데 말이다.

우린 이런 당연한 일들에 대해서 실망도 하고 분노도 치밀었다가 좌절하기도 한다. 세상은 내 맘대로 되는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믹스가 아닌데도 말이다.

나는 물건을 잘 잃어버린다. 하루에 열쇠를 두 번씩 잃어버렸다가 두 번을 찾아낸다. 열쇠가 어디론가 숨어서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사실 지갑은 무생물이라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열쇠가 어디론가 숨어있어 내가 화가 난 것은 맞지만, 나의 화를 돋우기 위해 열쇠가 숨바꼭질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잠금장치를 전자식으로 바꾸어 열쇠가 필요 없어졌다. 문명의 발달은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어 나의 분노를 줄여주었다. 문명의 혜택에 감사를 느낀다.

이와 같은 이치로 태풍 또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곯려주려는 속셈은 없다. 단순한 에너지의 순환일 뿐이다. 쓰촨성 아래의 땅덩이가 제 위에 사람들이 버글거리니 귀찮아서 몸부림을 친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진동이 이는데 마침 사람이 그 위에 살림을 꾸린 것이다.

인간은 이를 잘 이해하여 살기 좋은 곳으로 옮겨 다녀야 마땅하다. 하지만 인간은 역사와 전통, 문화를 너무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미련을 가진다. 본인이 자신의 발에 족쇄를 채웠다면 그에 따른 피해가 생겼을 땐 스스로 책임져야 마땅하겠다.

한 사람의 인생은 주사위놀이보다는 장기판에 가깝다. 포가 왜 하나를 건너뛰어야만 이동할 수 있고 차는 왜 수직으로밖에 못 움직이는 지에 대해 불평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이 너무나 당연한 룰에 대해 불평을 하게 될 경우 인간은 불행해지게 된다. 세네카는 장기판의 룰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한마디 항의 없이 최후의 장군을 받아들였다. 장기판 위에서는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수들이 존재한다. 예측하지 못한 수를 통해 자신의 말이 먹히게 된다면 슬프고 억울하여도 받아들여야 한다. 최악의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대처할 수가 있고 또 말이 먹히더라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다.

장기를 잘 두는 고수처럼 인생을 잘 살기 위해서는 먼저 최악의 수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