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수염이 아닌건 다행이지만 생각할수록 열받네?

그제 저녁부터 배가 아팠다. 열도 조금 났다. 온 옆구리가 뻑적지근해지더니 골반을 움직이는 것도 불편해졌다. 통증은 우측 하복부로 집중되었다. 하루 반나절 정도에 걸쳐 통증은 심해졌다.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통증이라 검색을 통해 병을 찾아보았다. 충수염의 증상과 흡사했다. 흔히 맹장염으로 알려진 병이었다.

나는 충수염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이 병은 48시간 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터져버려 더 큰 문제로 번진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당일 수술을 하고 이틀간 입원을 한게 될 터이니,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모래도 새걸로 갈아주고 밥도 가득 채웠다. 물도 두통을 채워 두고 간식을 잔뜩 줬다. 배낭가방에 이틀간 지낼 수 있도록 물품을 쌌다. 그리고 아침 일찍 병원을 갔다.

 

오늘 만난 외과의사는 아주 특이한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정해둔 레퍼토리대로 진료가 이뤄져야만 했다. 의사가 권위적인 것은 알았지만 이 사람은 좀 달랐다.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 노트해둔 것을 보려고 휴대폰을 켰더니 휴대폰은 내려두고 자신이 물어보는 것에만 질문하라는 것이다. 불필요한 정보는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기실에 사람이 전혀 없는 이른 아침이었다. 시간을 어떻게 아껴 쓰는지는 각자의 몫이니까 내가 간섭할 순 없는 일이기에 그의 지시를 따랐다.

진단은 아주 전문적이었다. 내러티브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스크립트로서는 완벽했다. 진단 근거도 들어가 있으며, 의학적인 근거도 있고, 자신이 판단을 내리게 되는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투명하게 설명함으로 신뢰를 주기도 했다. 초음파 검사는 60%의 정확도로 병을 진단할 수 있고, 자기같은 전문가가 손으로 눌러서 검진하는 것을 이학적 검진이라 부르는데 85%의 확률로 병을 맞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간에 질문도 하나 던졌다. 85%의 확률이라는 것이 높은건지 낮은건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는 높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다. 60%와 비교하듯 물었으니 상대적으로 높다고 생각할 수 밖에. 틀린 답을 내기를 바라고 던진 질문이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지적함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자신의 권위는 높이는 대목이었다. “85%의 확률이라면 15%는 놓친다는 뜻입니다. 100명이면 15명 1,000명이면 150명의 환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충수염 환자를 5,000명을 수술했는데 그럼 750명의 환자를 놓친다는 뜻입니다.” 캬~ 다시 생각해도 감탄이 터져나오는 치밀한 스크립트다. 답변을 듣는 사람은 순식간에 멀쩡한 사람 750명의 배를 갈라버린 나쁜놈이 된다. 그저 배가 아파서 병원을 방문했던 환자는 민망함을 넘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그의 치밀한 스크립트에 오류가 발생했다. 내가 “사람 배때지를 칼로 째기에는 낮은 편인 것 같네요”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난 반응을 접하면 당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언짢아했다. 자신의 질문에 항상 ‘높다’라는 답변이 들어왔고 그에 대한 counter 대본만 있었는데, ‘낮다’라는 답변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 상황을 모면할 융통성이나 순발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화의 맥락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그는 스크립트를 그대로 읊었다.

 

스크립트 낭독이 끝난 뒤, 85%보다 정확도가 높다는 CT를 찍으러 갔다. 개인병원에는 CT기계가 없어서 인근 영상의학과를 다녀왔다. 사진이 잘나오려면 핏속에 어떤 액체를 섞어야 한다는데 혈관이 계속 터져버려 바늘을 네 번이나 꽂아야 했다. 팔에 구멍이 네 개 난 채로 다시 외과에 돌아오니 의사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미 영상은 컴퓨터로 받아본 상태고, 내가 이동하는 동안 또 스크립트를 준비해두었나보다.

이 의사는 결론부터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짜둔 내러티브와 극적인 연출포인트를 아주 중요시 여기는 듯 했다. “이건 게실이고요, 게실이 이런 상태인데요, 게실은 보통 이래요. 게실이 이렇게 되면 이런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건 충수인데요, 충수도 염증이 번진 상태에요. 그런데 여길 보면 공기가 들어가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막혔다기보다는 염증만 번진 상태인 거죠”

그가 준비한 4분간의 스크립트 낭독이 모두 끝나갈 때까지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설명만 있고 해석은 없었다. 답답했던 나는 중간에 껴들었다. “그럼 충수를 제거해야 하는 수준은 아니네요?” 그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며 양 손을 펼쳐 손바닥을 나에게 보였다. “의사가 말을 하면 좀 끝까지 들으세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나는 충수염인지 아닌지 빨리 말해줬음 좋겠는데. 아니 그러니까 충수염인지 뭔지 하는 병이 존재하는지도 나는 어제 처음 알았을 뿐이고, 지식을 전달해주는 건 좋은데, 당신이 말해주는 그런 요약된 지식은 이미 인터넷에서도 내가 다 보고 온건데. 스크립트 낭독자야 뭐야. 사람이 앞에 있으면 사람이랑 대화를 해야지. 오늘 입원을 해야 하는지, 내일 출근은 할 수 있는 건지, 병원비는 얼마 나올지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대본 읽는 기계야 뭐야.

그의 스크립트는 그의 입장에서는 완벽했을지 몰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상황에 대한 해석이 없다. so what이 빠져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당신 잘난건 알겠는데 나더러 어쩌라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되물으면 언짢아하니 물어볼 수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신 것만큼 상태가 나쁘진 않습니다.”, “이런건 좀 주의하셔야 합니다.” 와 같은 환자가 이해하기 쉬운 말은 그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진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백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기만족을 위해 쓰여진 대본이었다. 이 사람은 대화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통제집착이 심한 사람인데 의사는 오죽할까. 당신은 또 얼마나 피곤한 하루를 살아갈까. 환자란 자신이 명령에 의해 맨살을 보이는 존재이고, 자신은 그 살을 메스로 갈라도 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태도가 대화의 모든 문장에서 묻어났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4분간의 스크립트 낭독이 끝나자 약 처방을 해줄 테니 5일간 먹고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쫓겨났다. 두 번 혼이 났던 나는 시키는 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문 밖으로 나오고 세 걸음을 옮겼을 때, 뭔가 놓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다시 물었다. “저기요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네” “무탄고단 식단을 하는 게 이번 염증에 원인이 아닐까요?” “문제 없습니다”

so what이 결여된 그의 스크립트를 지적이라도 하듯 대화를 연장시켰지만 그는 눈도 마주치치 않은 채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도 모른 채로 살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의 식단을 보았다. 이틀 연속 식이섬유 하나도 없이 단백질만 먹은 기록이 있다. 장 내 변이 게실과 충수에 무리를 줄만했다. 게실염에 대해 찾아보았더니 지금과 같은 식이섬유 부족 식단이 주요 원인이 된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이 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총 세번이나 의사에게 전달하려고 했고 세번 모두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