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자-함. 고작 살아 숨쉬는 것만이 목표인 존재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암만 먹고 살기 힘들다지만, 어떻게든 밥을 먹고들 산다. 굶어 죽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상태를 인생의 지향점으로 삼는다. “뭐 해먹고 사나”를 입에 붙였다.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살고자-함이었다면 어떤 동기보다도 강한 에너지를 뿜을 것인데, 자신의 삶과 환경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낙담한 존재는 원초적인 생-의지를 표출하는 것에도 순수한 동기를 잃었다. 현대인의 살고자-함은 생존본능이 아니라 타협, 변명, 자기합리화에 가깝다.
하고자-함. 행위의 동기를 내재화시키면 수십 배 강한 존재로 거듭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을 배로 해야 하듯이, 나에게 주어지는 일은 완전히 자기목적적이지도, 완전히 외부기인적이지도 않다. 놀이의 연장선상에 놓인 행위. 일과 휴식의 구분은 필요치 않다. 노동이 곧 삶이다. 행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의식을 망각하는 수준에 다다른다. 그 순간에는 자아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행위를 성취한 이후에는 자아감이 더욱 충만해진다. 이를 반복하며 성취 중독을 이어간다. 이 상태를 경험해본 강한 존재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진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 따위에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다.
되고자-함. 되고자 하는 자는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하다….
라고 세 문단으로 글의 구조를 짰다. 마지막 문단의 내용을 채워 넣지 못한 채로 두 달이 지났다. 세 번째 문단의 주장이 내 생각과 틀려서는 아니다. 근거를 찾지 못한 탓이다.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라는 철학적으로 보이는 명제는 “커서 뭐 될래?”라는 유치한 질문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나는 청년기 이후로 이 질문을 주기적으로 던졌고, 아저씨가 된 32살의 나이에 이 글을 씀으로 한 번 더 시도했다.
나는 자신의 되고자-함을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살아지는 대로 살아놓고, 살아보지도 않은 인생까지도 한 데 묶어 정의 내리곤 했다. 되고자-함을 성급히 말하는 부류는 대체로 허튼소리만 늘어놓았다.
결국 내가 찾아야 할 답 아닌가. 나는 지난 6년 동안 꽤 열심히 무엇인가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존재에 대한 추구는 아니었나 보다. 사회생활 첫 2년은 팀원으로, 다음 2년은 팀장으로, 최근 2년은 회사대표가 되려고 아득바득한 것 같다.
나는 이번에도 성급히 답을 내리기보다는 보류를 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