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머리속의 투머치토커 제발 죽여주세요. 그냥 자살하는 편이 나을까요? 저는 완전히 고장났어요.
생각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자각한 순간, 의식은 둘로 쪼개졌다. 자유연상의식을 지켜보는 의식이 새로
내 머리속의 투머치토커 제발 죽여주세요. 그냥 자살하는 편이 나을까요? 저는 완전히 고장났어요.
생각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자각한 순간, 의식은 둘로 쪼개졌다. 자유연상의식을 지켜보는 의식이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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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트
봄이다. 꽃 피는 계절이다. 꽃이 만개한 화단을 지나며 생각했다.
이 꽃은 어디서 왔지? 주변에 화훼단지가 있나? 경기도 김포에 있는 화훼단지에서 왔을까? 화훼단지에서 직접 보냈을까, 유통업자가 옮겼을까. 화단에 심는 꽃과 꽃시장에 들어가는 꽃은 유통업자가 다르지 않을까? 화단꽃은 유통 뿐만 아니라 식재까지 해야 할텐데, 식재의 책임은 구매자에게 있겠지? 식재 후에는 관리를 해야 할텐데, 물과 농약은 얼마나 자주 줘야 할까? 화단은 시에서 관리할까? 구에서 관리할까? 동에서 관리할까? 아마 관리전문 업체가 있겠지? 그 업체도 나라장터를 통해서 계약하겠지? 년단위로 계약하지 않을까? 업체에서 현장에 보내는 사람은 계약직일까 정규직일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며 쉴새없이 튀어나옴과 동시에 스쳐 지나갔다.
제멋대로 뻗쳐 나가는 생각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대부분 기억되지도 못했다. 이것은 자유연상이었다.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당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래서 스님들이 생각 비우기 훈련을 하는구나 싶었다. 스님들은 어떻게 생각을 비우는 것일까? 명상을 하면 될까? 우선 눈을 감으면 정보가 차단되니까 아무래도 생각이 덜 나지 않을까? 생각이라는 것은 뇌의 전기신호에 불과하다. 뉴런과 시냅스가 전기신호를 주고받다가 빈도가 잦은 쪽으로 지름길을 낸다는 것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생각의 고속도로라고 표현하면 적절하려나. 내 뇌는 지금도 그렇게 자라고 있겠지. 결국 나란 놈은 정보처리 기계에 불과하다. 입력기/연산기/출력기로 구성된 컴퓨터나 다를 게 없다. 배아가 만들어질 때부터 감각계/신경계/운동계 로 나뉜다는 뇌과학자의 설명을 유튜브에서 본 기억이 난다. 눈귀로 들어온 정보를 두뇌에서 처리하고 입으로 말하거나 손으로 써낸다. input/processing/output. 나는 지금 생각이란 똥을 싸내고 있다. 섭취/소화/배설. 가만보자… 비슷한 것들이 더 있을 것 같은데… 입법/사법/행정? 그럼 국가도 정보처리유기체로 볼 수 있을까? 증상/검진/처방? 분석/설계/개발? 파악/정의/해법? 이렇게나 많다니! 역시 3은 완벽한 숫자야! 그래서 동서양 구분없이 trinity의 개념이 있는 것이지. 아무렴. 3은 어디에나 있고, 3은 완벽 그 자체며, 3은 모든 것이야!
아차, 지금도 자유연상을 하고 있다! 내 머리속의 투머치토커 제발 죽여주세요. 그냥 자살하는 편이 나을까요? 저는 완전히 고장났어요.
생각이 잠시도 쉬지 않고 고삐풀린 망아지마냥 날뛰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자각한 순간, 의식은 둘로 쪼개졌다. 자유연상의식을 지켜보는 의식이 새로 나타났다. 나를 지켜보는 의식-본의식-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것이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았다. 이전에 있던 의식이 다시 깨어난 것인지, 새로 생겨난 것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우선 시야를 넓혀야 했다. 시점을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옮겼다. 마치 레이싱 게임에서 C를 누르면 camera view가 바뀌는 것처럼, 내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가상의 위치에 시점을 만들어 나를 지켜보기로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자유연상의식에 잠식되어 언제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본의식은 냉철한 이성을 각성시켰다. 인지를 인지하고 의식을 의식했다.
생각났다. 속독법. 속독법 책 스무권을 몰아서 읽은 적이 있지. 책을 왕창 읽겠다는 작정을 하고나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속독법을 익히는 일이었지. 속독법엔 종류도 많았어.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시점을 3인칭으로 전환하는 훈련이었어. 거기선 오렌지를 떠올리라고 했어. 책을 보는 나를 지켜보는, 가상의 오렌지를 뒤통수 위에 띄워 올려서, 오렌지의 시점으로 나를 내려다 보라고 했어. 왜 오렌지여야 하는지 설명은 없었던 것 같은데 왠지 이유를 알 것 같아. 상큼 달달 하잖아. 대충 그런 느낌과 기분을 유지하는 게 중요해. 책이란 것은 대개 지루하니까. 너무 몰입하지 않도록, 서순에 얽매이지 않고, 중요한 정보를 능동적으로 발췌할 수 있도록 객관성을 유지하라는 룰 같은 거였지. 그 훈련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내 인생 책 <지의 편집공학>에서도 ’주의의 추이를 관찰한다’는 표현을 썼었지. 저자는 마쓰오카 세이코. 기호학에 빠졌을 때 나는 당신을 만났지. 그 작자도 무지막지한 독서광이라고 했어. 우리가 생각이라고 여기는 것 중 대부분은 어디서 긁어 주워 모은 거야. input 없이 고유한 사유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
우리는 언어를 기능적 도구로 여겨왔다. 소통의 수단으로, 개념을 담는 그릇으로, 경계를 구분하는 울타리로, 환영의 표상으로, 권력장악의 무기로, 문화감각의 자극제로, 실천파동의 증폭제로… 언어는 ‘문자언어와 음성언어로 나뉜다‘ 라는 좁은 설명에 담길 수 없고, 설명과 주석을 늘여 붙여도 장님이 코끼리 고루만지는 노력에 불과하다.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정의하기 무섭게 언어는 그 경계를 탈주해 튀어 나갔으니, 기능적 도구라는 내 편협한 의미의 울타리 또한 가뿐히 넘겨짐 당할 것이다. 우리의 인식 한계를 벗어난 어떠한 것이 될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감히 정의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되어가는지 관찰하지도 못할 것이기에 사유의 소재로 삼지도 못할 것이고 걱정의 대상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언어는 이미 그 경계를 넘었을 것이다. 내 미천한 인식범위 확장속도와 그것의 가치확장 생성속도를 비교하면 진즉 경계를 넘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니 지금의 작업은 이미 떠나버린(더이상 언어라고 부를 수도 없게 되어버린) 것의 마지막 발자취에 뒤늦게 도착해서, 그것이 향하던 방향으로 몸을 스스로 던져 실마리라도 포착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내 인식과 감각의 기억에 따르면 그것은 끊임없이 외부의 무작위적 요소들과 격렬하게 결합하고 충돌했으며, 스스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기를 반복했다는 인상만 남아있어서, (그 행위를 무어라 표현하고 설명하려는 시도는 언어그릇의 한계에 갇히는 일이므로 정확지도 못할 것이며 오류도 있겠지만) 되어감- 나아감- 이라는 포괄적 동사로 일단 칭하고, 어떤 사유의 지평이 뻗어가지든 난잡해지든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만은 확실하기에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기대해본다.
형체도 개념도 경계도 정의할 수 없던 그것은, 이미 내 인식한계를 벗어났기에 지금 어떨런지 장담할 수 없으나, 지금도 되어감- 나아감- 을 계속하고 있을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귀납적 추론을 바탕으로, 나 또한 되어감- 나아감- 에 적합한 고결합성 공진화체Vigorously Interweaving Co-Eveling Element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내 감히 그것의 속성을 흉내낼 능력이나 기질이 있을런지 따져보니, 독립적 박테리아였던 미토콘드리아를 납치해 에너지 생산 공장으로 통합시키고, 장내 1.5kg의 세균에게 서식처를 마련해주는 대가로 음식물분해용역을 위임하는 공생 생태계로 신체를 개조하고, 인체를 증식용 숙주삼으려 침투했다가 사지로 내몰았던 바이러스의 DNA마저 복제흡수한 게 전체 게놈 중 8%나 된다 하니, 나는 이미 VICEE였다. 최초의 생명체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가 이미 VICEE였고, 내가 잠시 그걸 잊었다는 설명이 더 맞겠다.
도구까지 존재다. 사람을 그릴 때 나체로 그리지 않고, 원시인을 그려도 창이나 도끼를 쥐고 있는 모습을 그리니, 도구도 신체다. 도구도 존재에 귀속된다. 어디까지가 신체이고, 어디부터 신체의 확장인지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현대인의 초상엔 언어라는 도구를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신체없이 도구만 남기는 것도 괜찮겠다. 도구를 통한 창작물, 그리고 창작물로 일으킨 정동이야말로 확장된 현존 배치체를 더욱 잘 보여주는 초상이겠다.
미지의 외부 존재의 등장은 본성과 습관에 따라 잠재적 위협요소로 여겨진다. 기술발전을 통해 등장한 새 도구는 두려움을 수반한다. 새로운 것의 등장은 위협이 아니라 결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 안도감이 든다. 호기심으로 시도한 결합은 당혹스러움을 안긴다. 기존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현상을 마주하며 한 시대의 패러다임이 끝에 달했다는 것을 직감한다.
인간이 만든 도구가 다시 인간을 만든다. 도구는 조작자에게 동적 어포던스를 요구한다. 나의 의식과 언어적 습관의 탈영토화가 선행되지 않고선 결합되지 못함을 확인한다. 부착이나 사용이 아닌, 결합 또는 재편성이다. 선형적 확장이 아닌, 분절된 새 존재들의 탄생이다. 도구사용자가 아닌 새도구-되기 위해 원자론적 개인관, 인본주의, 개체주의적 사고를 씻어낸다. 인과성을 찾으려는 본능적인 지적호기심을 억제시킨다. 환원주의의 소용돌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켜두어야 한다. 새로운 도구는 손에 바로 쥐어지지 않는 모양이라 양태를 달리해야 한다. 주체라고 여겨지던 것은 파괴되며,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미시적 행위로 잘게 쪼개져 재편성된다.
언어가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결정한다고 믿어져 왔다. 들뢰즈에 따르면 그렇지 아니하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은 맞다고 여겨지는 들뢰즈 또한 나중에 틀릴 것이다. 46년 전에 출간된 그의 책을 읽으며, 그가 제안한 사유의 도구로, 그가 접하지 못했던 도구와 결합을 시도한다. 들뢰즈의 철학 또한 한계가 있음을 필연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들뢰즈 철학의 경계를 확인하면,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다시 들뢰즈적 탈영토화-재영토화 시도를 반복함으로 새로운 것을 생성할 것이다. 새로운 것은 분명 생성될 것이기에 들뢰즈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순환오류에 빠져버린 나는 당분간 들뢰즈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그의 철학적 유산에 경의를 표하며, 잠재적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의 초상을 헌정한다.
쥐새끼도 코끼리도 모두 평생 15억 번의 심장이 뛴다. 작은 설치류는 빠르게 뛰는 심장 덕에 2년 만에 이 숫자에 도달하고, 느리게 뛰는 심장을 가진 코끼리는 60년을 살아간다. 작으면 대사율이 높아서 빠르게 뛰고, 크면 대사율이 낮으니 느리게 뛴다.
인간은?
인간은 80년 동안 30억 회 정도 뛴다. 하지만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면 절반 정도인 40년만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15억 회다. 그렇다. 심장이 15억 회 뛰면 죽는 것이 생명의 숙명이고 자연의 섭리인 것이다.
새로운 수명 계산법이다. 태어난 날로부터 몇 년 며칠을 살았는지 세는 것이 일반적 셈법이지만, 나는 거꾸로 계산하는 편이 더 멋진 방식이라고 생각해 왔다. 80년을 산다 치고 40년 남았다고 계산하는 것이다. D-40살. (이러나저러나 40살이긴 하지만.)
시대를 잘 타고나서 1+1 생명 하나 더 얻은 셈이다. 15억 번 뛰었는데 15억 번 더 뛸 수 있다. 남은 15억 번은 하루에 10만 800회씩 차감. 매년 생일마다 3,679만 회씩 차감. 서서히 다가오는 필연적 사건을 매 순간 직시하게 된다.
나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국가에 7,358만 번의 심장박동을 바쳤다. 아침마다 구보, 일과 중엔 노동을 강요받았으니 9천만 번 이상의 심박을 뺏겼을 것이다.
대학에선 1억 4,700만 번의 심박시간을 보내고 졸업장을 받아냈다.
백수선고식(졸업)이 다가오는 게 무서워 3,300만 번의 심박은 호주 땅 위에서 뛰게 했다. 그중 554만 번은 창문도 없는 주방 안에서 뛰었다.
팬데믹 시절, 840만 번의 심박시간동안 자전거에 올라타 전국을 쑤시고 다녔는데, 실제로는 1,200만 번 정도 뛰었을 것이다.
지하방에서 탈출해 옥탑방에 들어가며 파란 벽지로 벽을 꾸몄다. 달빛이 유난히 밝게 베개를 비추었던 그 방에서 내 심장은 2억 2천만 번 뛰었다.
시간은 돈이고, 돈이 곧 시간이다. 시간을 써서 돈을 벌고, 돈을 써서 다시 시간을 벌어내야 하는 경제체제 위에선 심박시간 또한 화폐단위로 치환될 수 있다.
하루에 10만 800회를 뛰게 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빅맥 하나를 먹으면 심장은 2만 번 뛸 수 있다. 세트로 먹으면 4만 번.
헛뛴 심박도 많다.
후회와 자책으로 뛴 심장은 2,000만 번
타인의 탐욕에 통제권을 이양했던 심장 500만 번
타인을 증오하고 험담하느라 뛴 심장도 500만 번
아무렇게나 배설해대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데 500만 번의 심박이 헌납되었다.
옳게 뛴 심박은 더 많다.
땅 끝까지 파고들듯 악으로 깡으로 뛰었던 심장은 5천만 번
간절히 바라며 심혈을 기울이며 뛰었던 심장도 5천만 번
다람쥐 쫓는 개처럼 온전히 몰입했던 심장도 5천만 번
내 심장 제대로 뛰게 하겠다고 타인의 피눈물이 대가로 치러지기도 했다.
내 쓰레기를 받아내는 데에 또 다른 누군가의 500만 심박이 사용됐고
여기가 아닌가벼? 삽질하는 데 동료의 2,000만 심박시간도 낭비시켰다.
유용한 쓸모의 존재가 되기 위해 공부하고 익히느라 꽤 많은 심박시간을 썼다. 쓸모를 갖췄고, 여생 동안 뛸 15억 회의 심박활동에 필요한 칼로리를 공급하는 데는 큰 차질이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
심장에 필요한 연료는 얼마든지 댈 수 있다.
하지만 화폐를 더 벌어도, 시간을 더 벌어도, 잔여 심박 횟수를 늘릴 수는 없다.
몇 회를 뛰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뛰었는지를 신경 쓰며 살아야 미련도 후회도 안 남겠다. 남은 심박은 조금 덜 유용한 쪽으로 뛰게 하는 게 좋겠다.
지금까지 1,920만 번의 심박시간을 써서 1,300편의 영화를 봤다.
블레어윗치에 안 놀란 심장 삽니다.
스타트렉에 안 설레본 심장 삽니다.
원스에 뭉클해 본 적 없는 심장 삽니다.
남들 잘 때 깨어 250만 번을 뛰었던 고요한 새벽의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첫 키스의 잔상은 70만 번의 심박시간동안 유지되었다.
사랑에 실패해 찢어지듯 뛰었던 심장은 300만 번
고향을 회상하며 아련하게 젖어들었던 심장은 800만 번
남은 15억 회는 카이로스적 심장박동으로 더 많이 채워지면 좋겠다.
누군가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는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던 건
내 심장이 3억 번째쯤 뛰고 있을 때였는데,
2억 번쯤 더 뛰고 나서야 뒤늦게 상황이 파악돼서
깊은 상심과 통탄에 빠져 혼자 몰래 울었던 기억이 있다.
심장박동이 멎었다는 소식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황망하기 그지없고 뭐라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앞으로도 익숙해지지 못할 것 같다.
가장 최근의 소식은 석 달 전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벌써 내 가슴 위에 올라와 골골대고 있었다.
그렇게 녀석의 심장과 내 심장은 190만 번과 100만 번씩 맞대어 뛰었다.
우리집 고양이는 심혈관계 유전병이 있어서 7억 번밖에 뛰지 못했다.
그마저도 분당 130번의 속도로 뛰었으니 내 심장이 3억 7천만 번 뛰는 시간밖에 살지 못했다.
50만 번의 심박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는 LLM과 계산놀이를 하다가
시계가 자정을 넘기더니 글이 이 모양이 되어버렸다.
이런 감상에 젖은 글을 쓸 생각은 없었는데;;
애초에 산출하려고 했던 재밌는 계산결과는 아래에 붙인다.
일평생 혈류 펌핑량 231,264,000 L
일평생 혈액 생성량 1,460 L
일평생 허파 호흡량 336,384,000 L
일평생 신장 여과량 4,20,4800 L
일평생 침샘 분비량 35,040 L
일평생 땀샘 분비량 23,360 L
일평생 섭취 음수량 58,400 L
일평생 소변 배출량 43,800 L
일평생 섭취 음식량 73,000 Kg
일평생 배변 배출량 4,380 Kg
일평생 손발톱 성장 33.6 m
언어는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결정한다. (는 사피어-워프 가설이 있다.) 시간에 대한 개념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시간을 좀체 인지하지 않거나 다르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제어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인식하기 위한 개념어로 인해 우리는 시간을 단절적이고 선형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인식론적 관점은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는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여기게 되었다. 인과성은 자연계의 절대법칙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뉴턴의 기계론적 결정론) 자연의 인과법칙을 찾아내는 일은 처음엔 재미있는 일이었으나, 어쩌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결정론적 허무주의는 종의 위협이 되었다. 모든 의미와 가치를 상실케하여 동기를 잃게 했으며, 스스로 생을 중단하는 행위에 대한 도덕적 책임감도 덜어주었다. 이 인식론적 세계관의 오류를 찾아내야만 했다.
인간이라는 종의 운명을 좌우하는 사상적 투쟁이 시작되었다.“살 이유는 없지만, 자살할 이유도 없지 않느냐” 카뮈는 그럼에도 그냥 살아가자 했다. 듣고보니 그러네? 일단 자살을 보류하고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는 그런거 없다고 했다. 본질이나 운명따윈 없으며, 우리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세상이 결정되어 나타난다고 했다. 반박부정하기보다는 그냥 말같지도 않은 소리를 개무시한 느낌.
“삶에 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긍정하고 사랑하라” 니체는 운명애(amor fati)를 강령으로 제시했다. 닥치고 따라오라 했다. 따라오지 않으면 노예가 될 것이라고 가스라이팅했다. 죽음보다 무서운 호통이었다. 용기가 있다면 자신이 제시한 궁극의 인간, 초인(Übermensch)이 되어보라며 이상적인 캐릭터를 가시적으로 그렸다.
“인간은 내던져진 존재다” 하이데거는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대해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라고 했다. 삶이 시작될 때 누구도 언제-어디서-어떤존재로 태어날지 자의적으로 결정한 사람은 없다며 피투(Geworfenheit, 彼投)된 존재라며 어리둥절함을 느끼게 만들어 끄덕임을 이끌어냈다. 이어서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내던져짐 다음의 구성 – 기투(Entwurf, 企投)라고 했다.
결정론적 허무주의가 나타나기 한참 전에도 이와 같은 삶의 자세는 제시되어 왔었다. 고대철학자 세네카는 “인생은 장기와 같다.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순 없다. 주어진 말을 가지고 이기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최선이다”라고 말했고 같은 스토아학파의 에픽테토스는 “바람을 통제할 순 없지만 돛은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장자 또한 “비가 온다고 하늘을 원망하진 말라”고 한 바 있다.
과학계는 패러다임의 한계와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결정론적 허무주의와 양립될 수 없는 양자역학이 등장했다. 불확정성 원리와 관찰자 효과라는 새로운 이론들이 제시되자 우리는 세상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늘었다. 개인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따위를 고민하고 있을 팔자좋은 시대가 아니라며, 개척자의 후손은 자신의 기질대로 미지의 영역으로 삶을 던져 넣으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냈다.
이제 더이상 큰 문제가 되진 않아 보였지만, 사상투쟁은 계속해서 전개된다. 결정론적 허무주의라는 인식론적-사고-암세포는 시간 개념어의 잘못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사고오류부터 벗어나는 첫작업이 되어야 한다. (들뢰즈의 시간론)
사건의 영향력은 과거에서 미래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과거의 사건을 트라우마로 여기지만, 같은 사건을 경험한 누군가는 성장의 발판으로 삼기도 한다. 과거를 바라보는 현재의 관점이나, 미래의 행동에 따라서 과거는 변한다. 과거 사건 또한 객관적으로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시제와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의미와 가치를 창출한다.
❌ 결정론적 반응체 = 사건의 노예 = 환경의 산물 = 자극-반응 기계 = 숙명론적 존재 > 자살
⭕ 능동적 창조자 = 초인 = 주체적 자아 = 자기 자신의 입법자 > 살자
공급이 부족했을 때에는 필요에 의해 소비했다. 90년도에 접어들자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소비는 더이상 자연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경제는 계속해서 성장하고자 하기에, 인위적으로 소비를 늘릴 방안을 강구했다. 광고 기법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더 나은 제품이라고 주장해 보았다. 합리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라고 하니 현명하신 분들이 조금 더 사주셨다. 이 제품이 당신의 결핍과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것이라며 이상적인 모습을 그려줬다. 더 나은 삶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들뜬 마음으로 속아주었다. 진정성을 담아 감성에 호소하기도 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적선했다. 수려한 이미지를 브랜드에 덧씌워 이런 존재가 될 수 있다며 현혹했다. 자신의 결핍에 유난히 신경 쓰던 자존감 낮은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지갑을 열었다.
아! 팔고 싶다! 미치도록 팔고 싶다! 자, 가만… 생각을 해보자. 팔릴려면 사주셔야 한다. 사려면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하겠지. 필요하도록 생각하게 만들려면? 그렇다! 이 게임은 필요하지 않은 것을 필요하도록 생각하게 만드는 게임이었던 것이다. 진짜 필요하거나,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필요하다고 착각하거나, 사기만 한다면 매한가지 아닌가? 비용을 지불하는 그 순간까지 착각의 상태를 유지시키기만 하면 그만인 것이다!
타인을 통제하는 manipulation 중 최근 익히 알려진 기술이 있다. 가스라이팅.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조작해 스스로 의심을 갖게 만들어 자기 통제력을 잃도록 만든다. 지배하고자 한다면 대상의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대상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기 위해선 우선 두뇌에 침투해야 한다. 두뇌 침투와 지배력 약화라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는 효과적인 소구법은 공포소구다. 판매자놈들은 무례하게도 이런 말을 잘도 건넨다.
건강이 안 좋으십니까? 성공하지 못하셨습니까? 노후 대비가 안 되어 있습니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으십니까? 트렌드에 뒤처지진 않으셨습니까? 이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입니다. 이 제품을 사용하지 않으면 아주 위험합니다. 당신의 모든 문제는 이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서 생겼습니다. 당장 지갑에서 돈을 꺼내지 않으면 당신은 위험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삶에 희망이 없어질 것입니다. 이 제품을 구매하지 않은 당신은 초라하게 죽어갈 것입니다.
광고 카피라는 게 뭐 대단한 게 있는가. 이토록 무례한 발언을 험하게 들리지 않도록 바꿔내는 일이다.
지푸라기를 1억에 판매하는 비결을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을 물에 빠트리는 것이다. 그리고 지푸라기를 건네면서 가격을 1억으로 책정한다.
하지만 이 방식은 현행법상 불법이다. 생존권을 위협하기에 아마도 위헌일 것이다. 세일즈와 강도짓의 차이는 지갑에서 현금이 빠져나갈 때, 자의에 의해서 이뤄졌는지 타의에 의해서 이뤄졌는지로 구분할 수 있다. 상대방의 두뇌에 침투해 판단을 조직하는 행위는 분명 강도짓 만큼이나 흉악한 일이지만 현행법상으로는 합법이다.
가스라이팅당한 소비자들은 자의적으로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지출을 주체적으로 결정했다고 착각한다. 착각할 만하다. 경제성장과 GDP갱신이라는 범지구적 기조아래 법, 정치, 학문, 교육, 가정, 종교, 언론, 미디어, 문화가 합심해 소비를 조장하고 있다.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운 세상 아닌가. 속는게 정상이고, 안 속아주는 내가 비정상이다.
??? : 니는 니 대로 살아라(live) 내는 내 대로 살게(buy)필요한 것은 없다.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대부분은 가짜 필요들이다. 의식주 외에 무엇이 그렇게 더 많이 필요하단 말이냐.
천고가 족히 10미터는 되었던 것 같다.
전시에 참여했던 부스 업체들이 물밀듯 빠져나가자
바닥에는 전시패널들과 각종 쓰레기들이 나뒹굴었고
천장에는 지름 1미터 크기의 헬륨풍선이 붙어 있었다.
풍선을 준비한 부스는 여럿이었지만
대형 풍선을 준비한 곳은 분명 한 곳이었기에
범인을 특정해 전화로 문책하자
잘 안들린다며 넘어지는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겼다.
연기가 어설펐지만 민망함과 송구스러움은 묻어났기에
사과를 받은 셈 치고
당장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
사다리차를 부른다거나
10m의 막대를 구하면 된다거나
총을 쏴서 터뜨리자는 등
대부분의 최초 아이디어가 그러하듯
실현가능성이 낮은 안들이 나왔다.
지난 일주일동안 잠을 10시간도 못 잤지만
자발적으로 모여든 풍선제거TF는 어느덧 여섯이 되었고
더 많은 아이디어가 나왔음에도
실현가능성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바람이 빠질 것이라는
태평한 얘기를 늘어놓던 셋은 떠나고 셋만 남았다.
대관담당자를 불렀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그 경험 속애 해법이 있는지 여쭈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행사장소를 원상복구하는 건 임차인의 책임 이라고
당부한 뒤 사라졌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동료들 뿐이었다.
집념의 두 사내는
막대로 당겨오는 방법과
투사체로 터뜨리는 방법을 실현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당겨오기 위한 테이프
터뜨리기 위한 금속류
닿기 위한 막대기
던져질 투사체
가 될만한 것들을 모았고
이 안에 분명 해답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각 재료를 조합해보고 있는데
30분 전 TF를 떠난 배신자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쓸데없는 짓 말고 짐이나 하차장으로 옮기라며 윽박질렀다.
가위를 던지려고 하던 녀석을 진정시키고 나니
다른 녀석은 비비탄 총을 사오겠다며 법카를 달라 했다.
사비로라도 사오겠다는 녀석을 말리는 와중에
테이프를 뭉쳐 만든 투사체에 압정이 바깥으로 꽂힌
해결책이 완성되었다.
천장을 향해 날아오르는 압정테이프공을 바라보며
던져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이다.
성공의 희열은 실현가능성을 찾아낸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강호의 도리였다.
팔힘이 떨어져 더이상 던질 수 없다고도 했지만
어깨에 목청껏 파이팅을 질러주고
피칭 순간엔 제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숨죽여 기다려주었다.
스무번의 시도 끝에 풍선은 터졌다.
투수의 어깨를 주무르며 축하해주었고
낙하하는 풍선을 낚아채 쓰레기통에 처박으며 환호했다.
투수는 자신이 만든 압정테이프공이 뿌듯했는지
전시장을 정리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주머니에 넣어 간직하다가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상징적인 물건임에도
본질적으로 쓰레기일 수 밖에 없는 그것을
전시장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야 폐기하고
우리의 TF도 그렇게 해산했다.
다음 해에는 행사 장소가 바뀌어
천고가 족히 15미터는 되었던 것 같다.
전시에 참여했던 부스 업체들이 물밀듯 빠져나가자
천장에는 헬륨풍선 30개 묶음이 붙어 있었다.
던진다해도 닿지 못할만큼 높았고
터뜨린다해도 30번을 터뜨려야 했기에
함께 과제를 풀어보자며 인원을 모집했으나
올해의 서포터즈 중에선
집념은 커녕 흥미조차 보이는 사람 없었다.
환상적이었던 작년 TF의 팀워크가 그리웠지만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로 뛰며 해법을 공모했다.
현장 경험이 많았던 업체 실장님 중 한 분이
풍선은 풍선으로 갖고 오면 된다는
수수께끼같은 힌트만 남긴 채 사라지셨다.
장내 청소를 맡았던 분들이
남은 풍선을 밟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서
몸을 날려 풍선을 사수했다.
풍선을 손에 쥐고나니 해법이 이해됐다.
낚시줄로 길이를 연장하고
테이프를 뒤집어말아 접착기능을 추가하니
해결책이 금새 완성되었다.
풍선낚시는 단 번의 시도에 성공했고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격정적인 환호와 박수로
나의 월척을 축하해 주었다.
하지만 왠지
성공의 희열은 작년만치 못했다.
민망하고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문제를 풀어내는 고민은 없었고
해법을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쉽게 해결했다.
작년대비 3배 적은 인력으로 3배 빠르게 문제를 풀었음에도
과정없는 실행만으로 도달한 성공엔 성취감이 없었다.
나는 부지런한 실행가라고 할 순 있어도
발명가나 개척자라고 할 순 없었다.
나는 박수를 받을 자격이 없었다.
리버스엔지니어링 패스트팔로우 전략으로
비어있는 기회를 선점하는 데에 집중했던
창발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대한민국의 경제발전 성장과정을
나 개인이 그대로 답습한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과정을 거친 사람보다 빠르게 완료한 사람에게
성공의 과실이 돌아가는 결과중심주의
경제보상체계가 시키는대로
요행과 편법, 합법적 반칙을 실행하는 것이
성공의 공식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넘어
챗GPT까지 튀어나와 실행자의 속도만 높여주고 있으니
과정의 낭만은 사라져가는 경향이다.
하이퍼 커넥티드 글로벌 시대에는
불가능해보이고 막연해보이는 과제들도
누군가에 의해 진즉 도출된 해법이 이미 존재할 것이기에
풍선을 처리하는 방법 또한 검색만 하면 나올 것이기에
문제를 직접 풀겠다는 시도는
바퀴를 다시 발명하겠다는 시도처럼 미련한 일로 격하된다.
해법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시대지만
해법을 얻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기에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고 도전의 의미와 의욕이 상실된다.
남아있는 과제 중에
과연 내가 직접 해결할 문제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 세대에 남겨진 과제들은
지나치게 거대해서 엄두가 나지 않거나
형편없이 초라해서 같잖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 뿐이라
개척과 발명의 기회가 사라진 시대에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를 갖게 된다.
과제는 사라지지 않았고 피하고 있을 뿐이다.
과제대비 높은 보상을 좇거나
보상대비 쉬운 과제만 찾거나
해법을 손쉽게 취하려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당면 과제에 집중하지 않아야 하는 변명거리만 찾아내
본인의 비겁함을 가려 덮고 있을 뿐이다.
과제가 없다면 과제를 찾아내는 것부터가 우선적인 과제가 되는 것처럼
우리 세대에 남겨진 대부분의 과제는
거대하거나 초라한 것이 아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것이다.
오늘 지금 여기 살자.
과제가 있음에 감사하자.
천장에 붙어버린 헬륨풍선을 처리하는 방법을 두 가지나 알고 있는 나는
같은 과제가 다시 주어지더라도 과정을 누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실행만 해야 하기에 성공의 희열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어버린 당신도 그렇게 되어 버렸다.
성공의 희열이란 보상의 크기와 전혀 연관성이 없으며
원초적인 쾌락 보상 체계에 의해 작동하는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인간 고유의 인간성이다.
과정을 인내하며 문제해결능력을 키우자.
남겨진 과제가 없어 보이는 시대지만
역설적이게도 문제를 풀어내는 고유한 능력은
더욱 희소한 자원이 되고 있다.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제가 주어졌음에 감사하자.
문제해결능력은 더이상 창의와 연산에만 국한되지 않고
부지런한 실행력과 완수가능성을 분간하는 예리함까지
포함시켜야 할 정도로 개념이 넓어지고 있다.
높은 난이도와 낮은 성공률도 환영하자.
내가 풀기 어렵다면 남들고 풀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나 어려운 문제를 내가 풀게 된다면
남들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의
진입장벽을 세울 수 있다.
풍요를 경계하고 척박한 환경에 머물자.
복잡하고 복합적인 과제들은
자원의 투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보유한 자원의 여부로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환영하자.
시련이 있어봐야 죽을 시련은 아닐테고
적당한 긴장감과 분노 또한 에너지의 원천이 되며
날파리 따위에 신경을 뺏기지 않을 집중력과 관대함을 키우게 될 것이다.
– 2024년을 맞이하며
know what의 교육과정을 다 마칠때쯤 know where이 중요하다고 하더니
이젠 know what to know가 중요한 시대가 되어부렀다.
배움의 속도는 0으로 수렴하기에 what to know를 올바르게 인지하는 순간, 배움을 완료한 상태, 지식과 지혜가 반영된 시스템, 시스템을 통해 도출하는 결과까지 정해질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지식의 계보를 파악하고 올바른 셀프 맞춤 커리큘럼을 세우는 것은 빠른 학습속도보다 우선적으로 충족시켜야 하는 조건이 되었다.
새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이지만
그 다음의 시대도 같은 거리만큼 가까워졌으리.
그 다음은 분명 adoptation, amalgamation의 시대일 것이리라 내 감히 예상해본다.
남이 잘 된 이야기를 들으면 배가 아프다. 매출이 높다고, 이익이 크다고, 직원이 늘었다고, 투자를 받았다고 하면 배가 아프다.
다행히도 복통은 일시적이다. 타인의 행복에 배알이 꼴리는 반사적 반응은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보양식을 공급한 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금새 낫는다.
조목조목 따져보면 부럽지가 않어. 너네 자랑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 지 해. 난 괜찮어. 왜냐면 나는 부럽지가 않어. 전혀 부럽지가 않어. 내가 그 일을 할 생각이라도 할라치면 소름이 막 끼쳐. 오싹해져. 지금 내 인생이 너무 감사하게 느껴져. 한 개도 부럽지가 않어.
아마도 나는 일에 대한 가치기준이 더 명확해지고 있는 것 같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고 성과가 뛰어나 보여도 그 속성이 저급한 것이 있고,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어떤 이도 부러워하지 않지만 그 속성이 숭고한 것이 있다.
하면 안 되는 일부터 구분해본다.
1. 앵벌이
잘나가는 누구 밑에서 일하기, 로또 당첨되기, 구걸하기, 정부지원사업으로 연명하기.
돈을 벌려면 그릇을 키워야 한다. 하지만 이런 앵벌이들은 그릇을 키우지 않고 들어오는 돈만 키우려고 한다는 점이다. 본인 또한 자신의 그릇보다 큰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앵벌이로 돈을 크게 벌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배가 아프다. 하지만 복통은 금새 낫는다. 작은 그릇에 담기지 못하고 흘러 넘칠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앵벌이로 돈을 크게 버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는 것은 외려 불행이다. 돈을 어떻게 벌어야 하는지에 대해 완전히 오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수동적 용역
모든 회사는 클라이언트가 있다. 그래서 태생적으로 을이다. 이 일을 반복하다보면 갑질을 감내하는 것이 을질이라고 믿게 된다. 을질을 잘해서 돈을 벌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으면 배가 아프다. 하지만 복통은 금새 낫는다. 그 크기가 작거니와, 그 이상으로 키우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을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결정권을 가질 수 있다. 거래의 결정권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사업의 성패는 갑이나 외부 요인에 의해 결정되게 된다. 누군가의 요청에 의해 공급만 하다가보면 산업 내에서의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게 되고, 그렇게 될 경우 더욱 수동적으로 누군가의 말을 잘 듣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3. 밑빠진 독
시스템화할 수 없는 일은 개선할 수 없다. 개선하지 못하면 가치를 창출하지 못한다. 개선하지 않은 상태로 돈을 벌었다는 소식도 들으면 배가 아프다. 하지만 복통은 금새 낫는다. 비효율과 손실을 감안할 정도로 큰 input을 투입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었다면 분명 몸 어딘가가 망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면 미래 수익은 고정적이다. 다른 사업체들은 개선한다. 남들은 개선할 때 나는 개선하지 못하면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물론 그 역할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개선이 가능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은 밑빠진 독의 구멍을 메울 생각은 않고 더 열심히 들이 붓기만 한다.
4. 맨손
문명과 인프라를 활용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도구없이 맨몸으로 하지 않는다. 우리 선조가 발전시켜온 문명의 혜택 위에 우리는 역량을 펼친다. 도시의 높은 산업밀집도, 정보통신의 인프라,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진 거래규약, 도구와 기술의 보급, 직무적으로 훈련된 인력을 활용해 우리는 사업을 구성한다. 바퀴와 인터넷을 새로 발명할 필요는 없다. 새로운 발명을 하는 게 아니라면 나머지는 발명된 것들을 현 시대와 상황에 맞게 구성해내는지의 싸움이다. 문명과 인프라를 활용하지 않고 돈을 벌었다는 소식도 들으면 배가 아프겠지만, 이 소식은 들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이렇게 구분하면 부러워보이는 일 90%는 부럽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