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드는 것이 삶이다. 만드는 과정이 삶이다. 만든 결과물은 아니다. 결과물은 영원하지 않다. 결과물이 세상에 선보인 후에 얼마 지나지 않아 무가치 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만들던 과정은 값지다. 그 자체로 객관적으로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만들기 위한 노력과 시도가 가장 고상하고 고결한 가치를 가지는 일이다.

내 삶을 값지게 보내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시도하고 노력하는 시간의 비중을 늘려야 한다.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부터 해야 한다. 무엇을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어떻게 만들지 생각해야 한다. 목적과 수단에 대한 생각을 꾸준히 하면 결과물은 만들어진다.

생각은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 아니, 지배를 받는다. 만들기 위해서는 올바른 생각을 지속해야 하고, 올바른 생각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달에 꽤 대단한 것을 만든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을 나는 이렇게 설명했다. “멘탈이 반질반질한 사람” 마음의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분명 그가 만들어낸 결과물 위한 생각, 올바른 생각으로 하루를 가득가득 채워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그렇게 반질반질한 사람은 많지 않다. 나도 그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하니 그 사람의 마음이 날 때부터 티가 없이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인지,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찾아서 인지는 모른다. 대체로 마음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고, 그래야 만들 수 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을 수도 있다.

불안, 비관, 불신, 비난, 부정, 염세, 허무의 마음이 없는 환경을 조성해야 하고
긍정, 희망, 변화, 흥미, 발전, 개선, 칭찬, 격려, 감사, 만족, 자존의 마음이 넘치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다.

모로 가도 한양만 가면 된다. 한양에만 도착한다면 불완전한 탈 것이어도 괜찮다. 애초에 완전하거나 불완전한 것은 없다. 인생은 항해이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일의 연속이다. 완전해 보이는 탈것이라도 시대가 변하면 불완전한 탈것이 된다. 탈것이 아닌 목적지를 중심으로 사고해야 한다.

꾸준히 하는 것만큼 강한 것도 없다. 빠르게 하거나 똑똑하게 하는 것으로 단기간에 성과가 나올 순 있다. 하지만 꾸준함만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 있다. 그 영역에 도달하기위해서는 믿음이 굳건해야 한다.

믿음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희망을 연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중간에 확인해야 한다. 중간 확인 없이 지켜지는 믿음은 믿음보다는 맹신이다. 꾸준함이 아닌 미련함이다.

나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다. 의심이 많다는 것은 불신이나 회의적인 태도와는 다른 현명함이다. 현실을 올바르게 직시하는 눈이다. 현명하고 의심많은 사람의 믿음은 좀체 쉽게 생기지도 않지만 한 번 생기면 굳고 단단해서 여간 흔들리지도 않는다.

나는 믿는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믿는다. 내가 이해한 세상이 실제 세상의 모습에 가깝고, 내가 찾아낸 공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나는 선하고 이로운 사람이고 현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는다.

나는 미디어 전공자이다. 비가시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미디어로 사람들의 행동을 유도하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사업적인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능력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가치의 유무는 그 자체로 고유하게 평가할 수 있지만, 쓸모의 유무는 철저하게 시대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된다.

경제체제 속에서 어떤 활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재정적 흑자 상태가 지속되어야 한다. 밥벌이를 하지 못하면 그 능력이 아무리 고상해도 존재할 수가 없다. 결국 이루어낼 수 없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가치만이 지속될 수 있고 이루어질 수 있다. 쓸모를 충족시키지 못한 가치는 안타깝지만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일단 거래를 하기로 했다. 거래가 모여 시장이 되고, 시장이 모여 산업이 되고, 산업이 모여 경제가 된다고 했으니 최소 단위인 거래를 깨우쳐야겠다. 거래를 단기간에 가장 많이 경험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래보다 더 작은 단위가 있음도 알게 되었다. 신뢰였다.

그 때 내 나이 33살 이었다. 특정한 고객과 특정한 공급자가 거래할 수 있도록 돕는 시장을 만들었다. 이 시장을 운영하며 밥벌이를 했고 생계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단히 감격할만한 성과는 아니었다. 굶어 죽을지도 모를 상태에서 벗어난 게 35살이니 남들보다 늦어도 훨씬 늦었다. 재정적으로는 늦었어도 야전에서 자생했다는 점은 높게 살만하다. 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상황 속에서도 자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게 된다.

보통 부유함은 개인의 안위와 풍요를 위해 추구된다. 성공이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보편적으로 추구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천박하고 저급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이미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고 싶은 곳을 가는 데 제약이 없는 풍요의 시대다. 새 시대가 열렸는데 어찌 과거의 결핍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가. 부유해지려면 우선 이전의 가치관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쓸모를 충족시켰다고 해서 가치를 추구하는 단계로 접어든 것은 아니다. 더 쓸모있어져야 한다. 더 부유해져야 한다. 나는 이제 굶어 죽는 단계를 벗어 났을 뿐이다. 더 의미있는 일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더 쓸모있어야 한다. 너무나도 쓸모가 있어서 쓸모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단계까지 가야 한다.

쓸모와 가치는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다. 단계적으로 선후행의 관계에 놓일 뿐이다. 쓸모를 충족시키는 방법과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에는 분명 유사한 기술과 실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게 알기 때문에 당장은 더욱 쓸모있는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데에 집중해도 좋다.

 

— 덧붙임 —

이렇게라도 생각을 뜯어 고쳐 먹어야 돈에 대한 욕심이 생기지 않을까 싶다!!

사업은 시대 속에서, 산업 속에서 존재한다.

나는 거래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시장을 만들 수 있었다.
거래가 계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도록 시스템화했고, 개인에 의존하지 않고도 거래가 계속 창출되는 시장을 만들었다.

거래를 할 줄 알면 시장을 만들 수 있고, 시장을 만들 수 있으면 다음엔 산업을 만들 수 있다.
산업은 밸류체인을 일컫는다. 수직적인 묶음도 수평적인 묶음도 밸류체인이 될 수 있다.
법인의 경영자가 되는 것은, 1985년에 이 세상에 피투된 한낱 개인이 맡을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일이다.

법인의 목적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나의 사업 범위와 법인의 범위를 동일시해도 된다.
사업의 여럿 운영하며 그것을 아우르는 상위 개념을 목적으로 두어도 된다.
사업을 여럿 하자는 것도, 좋은 직장을 만들자는 것도, 좋은 팀웍을 우선시하는 것도, 수익을 최우선으로 두는 것도 다 괜찮다.
정해진 것은 없다. 정하면 된다.
우리 법인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이 법인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이 고민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함으로 찾을 수 있다.

① 어디로 향할 것인가?
② 어떤 도전이 도사리고 있는가?
③ 어떤 과실을 얻게 되는가?
④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

나는 경영자로써 사회와 조직 내부 구성원에게 가치를 제공한다.

① 사회, 경제적인 실익을 가져다준다.
②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은 시기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③ 개인이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것도 추후의 생존에 도움된다.
④ 우리가 하는 일 자체도 재밌고 보람차다.

 

 

—- 덧붙임 —-

법인 전환 7개월차

이렇게 법인 대표가 되어간다.

모두 내던져진 사람들이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는 채로 세상에 내던져진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을 세상으로 내던지기를 반복하며 세상은 이렇게 내던져진 존재들로 벅적댄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른다. 안다고 착각하고 있는 놈들도 사실 아무것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모르지만 같이 달리기나 할까? 뛰고나면 상쾌하거든. 같이 동물원 갈래? 대뜸 기린이 보고싶네. 아 조개구이 먹고싶다. 재미도 있고 맛도 있고 운치도 있는 조개구이. 우리 회사에 있는 인간 말종새끼 뒷담화 좀 들어줄래?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어디로 향하는 지 몰라도 된다. 아무도 모르고 알 수도 없다. 안다고 해서 남은 인생 달라질 것 없다. 모른다고 해서 남은 인생이 무의미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답도 없는 이 질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때 각자의 인생이 갈피를 잡는다.

생은 어느 순간 강제로 종료된다. 나의 의지가 전혀 개입할 수 없이 종료된다. 죽음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깨달음으로 이 질문 자체가 내 삶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영문도 모른채 시작되어버린 이 삶에도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달리기가 개꿀맛. 달리고나서 먹은 밥도 개꿀맛. 이제 누워서 개꿀잠. 자기 전에 롤토체스 한 판 해야딩 히히

2010년의 생각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에서 드디어 해방

운동을 쉬면 퍼포먼스가 떨어진다. 꾸준히 하면 오르고 멈추면 떨어진다. 이 컨디셔닝의 공식이 얼마나 정직한지 오늘날 운동생리학자들은 이를 수치화해서 정확하게 예측해낸다. 강도,빈도,지속시간 세 요소를 측정해 총 운동성과를 수치로 나타내기도 하고 각 요소의 비중이 얼마나 다른지 분석해 성과마다의 특성을 회귀도출하기도 한다.

성장의 속도란 어느 정도 달성한 후로는 그 속도와 기울기가 점차 완만해진다. 정비례해서 계속 증가할 순 없다. 정말 일분일초의 낭비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쏟아놓는 인간의 최선의 노력까지 쥐어짜내고 전세계인이 주목하는 상황에서 정신력까지 극도로 끌어올려 초월적인 능력까지 발휘하는 올림픽리스트의 신기록이 한계라고 한다면 그것에 근사해질수록 차이는 작아진다. 이 상태에서는 최대한의 노력을 들이부어도 성장은 이뤄지지 않고 현상유지만 할 수 있다. 노력과 성과가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

그래서 정체기를 만나면 재미가 없다. 더 나아져야 재미를 느끼는데 열심히 해도 보상이 이뤄지지 않으니 외적동기와 내적동기가 모두 상실된다. 계단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믿어서 조금은 버틸 수 있지만 한동안 지나도 그 성장마저 보이지 않는다면 노력대비 성장은 불가하고 심지어 최대한의 노력을 들여도 퍼포먼스는 오히려 하락하는 경우도 가끔 발생한다.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역치값은 계속 높아지기 때문에 성장을 이끌기 위해 들여야 하는 점진적으로 과부하의 정도는 계속 커지기만 한다.

온 종일 운동만 하는 전문스포츠맨이 아닌 우리들은 생업을 꾸리느라 운동빈도가 뜸해질 때가 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퍼포먼스의 한계치가 빠르게 찾아온다. 게다가 추워지는 겨울이면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생기니 좋은 변명거리 삼아 운동을 쉬고, 어김없이 초기화가 진행된다.

초기화가 있기에 급진적인 성장의 기울기와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자기효능감을 반복해서 느낄 수 있다. 한 종목의 달인이 되어버리면 성장의 재미를 느끼기 위해 종목을 바꾸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거의 모든 종목을 다 섭렵해버려 성장쾌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운동하는 것만으로 다시 가파른 성장을 할 수 있다. 초기화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제로점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은 얼마나 다행인 것인가.

초기화를 받아들일 때 초기화 전의 최대 퍼포먼스를 기준으로 잡으면 안 된다. 그건 작년의 최대치였다. 그 결과는 4,000키로의 라이딩 마일리지라는 인풋이 있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아웃풋이었다.

아예 운동을 하기 전의 시점을 제로점으로 잡자. 너무 처음보다는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 즈음, 그러니까 자전거라면 클릿슈즈를 처음 꽂던 시점, 달리기라면 런닝팬츠를 처음 산 시점 정도가 되겠다.

인간은 본디 학습에 재미를 느낀다. 모르는 정보를 아는 것도 그 정보를 통해 내 사냥실력이 늘어는 것도 재미를 느낀다. 그렇게 배움에 재미를 느낀 조상들만 살아남아서 700만년동안 대를 이어왔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배움이 재미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현대 교육 때문이다. 배움을 교육과 학습으로 구분해보자. 사전적 정의는 다르지만 나는 이 둘을 능동수동으로 구분한다. 학습주체가 능동적이면 학습이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교육이다. 교육은 선생이 있어야하고 학습은 스스로가 선생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쪽이든 배움은 본디 재밌는 것이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전공은 다양해져서 사람마다 배움의 성과가 덜나오는 분야를 재미없게 느낄 뿐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잘 맞는 분야를 찾기만 한다면 누구나 배움에서 재미를 느낀다.

집중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아이들도 공부엔 집중 못하지만 게임엔 누구보다 집중을 잘한다. 공부는 적성에 맞기 어렵지만 게임은 누구에게나 적성이 잘 맞다. 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게 문제일 뿐. 게임이 적성에 잘 맞는 이유는 그렇게 디자인되었기 때문이다. 게임기획자들은 인간이 어떻게 재미를 느끼는지 철저하게 분석하고 연구해 게임의 요소로 구현해낸다. 그리고 그 요소 중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가 배움과 성장이다. 재미있을 수 밖에 없도록 겨냥해서 디자인했으니 재미가 없을 수 없을 수 밖에.

그런 게임에서도 초기화 개념은 있다. 육성과 성장에 한계를 느끼는 것을 알게 되자 게임 기획자들은 한 캐릭터를 계속 성장시키기보다 매 게임마다 반복성장시키기로 했다. 매판 1렙부터 새로 키워야 하는 롤은 매판 짜릿해 최고야 늘 새로워. 성장을 통한 만족감이 가장 특화된 게임은 idle장르다. 자원을 캐서 그 돈으로 업드레이드하고 효율을 높여 다시 자원을 더 모으길 반복하는, 또는 전투력을 키우길 반복하는 이런 유형의 게임은 게임의 작동원리가 어느 정도 파악되기 시작한 순간 재미가 없어진다. 게임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눈에 들어오는 순간 현타가 오더라.

직선적인 게임 진행방식을 정기적으로 초기화시켜 같은 게임도 새로운 게임이 되는 것이다. 열배나 많은 세계를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콘텐츠로 열 번을 반복시킬 수 있으므로 생산성도 좋다. 모두 초기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라이트유저는 세계에 발을 담궈본 것만으로도 충족시키고, 헤비 유저는 초기화를 반복하며 열배의 플레이타임을 즐겨도 만족스럽게 게임할 수 있다. 이전과 똑같은 반복을 하게 된다면 재미가 없겠지만 이전에 어렵게 깬 것을 쉽게 깨부수게 되면서 자기효능감을 느낀다. 1.5배 정도 강해지게 해주는 것만으로 엄청 만족스러워진다. 환생 개념도 초기화고 부케 생성도 초기화고 시즌제로 돌리는 것도 초기화다.

초기화를 시킨 다음엔 게임의 양상이 달라진다. 성장결과의 정도가 아니라 성장의 기울기, 즉 성장의 속도에 재미를 느끼게 된다. 초기화도 반복하다보면 초기화를 극복하는 데에도 속도가 붙는다. 초기화를 극복하는 데 처음에는 3주가 걸렸다면 그 다음 초기화극복엔 보름밖에 걸리지 않고 그 다음엔 열흘 정도면 본격적인 운동강도를 받아낼 정도의 몸 상태가 준비될 것이다. 잔차 타는 사람들은 이걸 몸이 올랐다고 표현하더라.

그러니 초기화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 일인가. 초기화가 없다면 우리는 성장 기울기가 완만해져버린 영역 속에서 아무리 과부하를 먹여도 보상은 조금밖에 못 얻는, 게임을 할수록 재미가 없어지는 삶을 살아야 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성장의 연속이다.
내 삶에 생기를 다시 불어넣기 위해 지난 5개월 유산소를 끊었었다.
게을러서 안 뛴게 아니라니까요?

후회할 것이다. 분명 후회할 것이다. 또는 후회의 마음을 덮기 위해 합리화할 것이다.

절대적인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란 어떤 방향에서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이 사건이 후회스러운 일이라도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합리화의 태도로 해석할 수도 있다. 후회스러운 사건을 다시 떠올렸을 때 후회스러운 마음이 자책으로 이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합리화하는 것은 어쩌면 마음을 다독이는 기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스스로 합리화를 하면서도 그것이 완전히 후회되지 않는다고 속일 순 없다. 대충이나마 결론을 내리고 덮어두어 새로운 사건들 속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건으로 미뤄내기를 반복할 뿐이다.

나는 후회하는 것이 겁나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훗날 이 사건이 후회스럽게 여겨지거나, 과거의 나 – 그러니까 지금의 나 – 를 미래의 내가 자책하고 원망할까봐 겁이 난다. 타인도 아닌 내가 나를 미워한다는 것은 자기파괴적인 상황이다. 나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녀석이란 걸 알기에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사건이 발생할 당시에 최선이었다면 후회할 일 없다. 최선이 아니었어도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면 그것도 후회할 일이 아니다. 시궁창 같은 결론으로 향했어도 당시에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었고 당시의 노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면 후회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늦은 밤 잠을 자지 않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시늉만 하는 것 만으로도 더 나은 선택을 찾을 수 있는 상황인데 아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어떤 사건은 절대적인 사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이란 어떤 방향에서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그래서 우리는 사건과 그 결과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 그 사건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 사건을 대했던 나의 태도에 대해서 후회한다.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는 갖은 사건들은 사건 저마다의 규칙이 있다. 목표도 다르고 공략하는 방법도 다르다. 한 가지 사건이라도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이번 사건을 운전미숙으로 볼 것인지, 교통사고로 볼 것인지, 보험과 법체계의 작동원리를 직접체험해보는 경험으로 볼 것인지, 우리 인생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사건들을 어떻게 대비하고 대처하는 방법으로 볼 것인지, 그동안 갈고 닦은 협상 실력을 겨뤄볼 실전으로 여길 것인지 여러 관점으로 게임을 정의할 수 있다.

이번 게임이 우리 인생에서 몇 차례 발생하지 않으면 – 반복숙달하거나 특별히 경험을 통해 배울 것이 없다면 – 빨리, 쉽게, 적은 감정을 써서 사건을 흘려 보내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 돈 백만원의 차이가 발생하더라도 내 평생에 거쳐 내 주머니에 들어오고 나갈 전재산의 총액에 비하면 극히 소량의 금액이기 때문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다시 복귀해서 그 시간에 내가 주력하는 본업으로 그만큼의 금액을 벌어들여 손실을 메우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일 수도 있다.

오늘이 저물어가는 지금 생각해보니, 이 게임은 다른 게임이 아니라 ‘강도를 대하는 우리의 태세’를 다잡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의도적으로 손해를 입히고 자신은 최대한의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점에서 강도와 다를 바가 없다. 거기에 사회적 자존감과 인간적 존엄까지 챙기려 하는 개쌍놈새끼는 돈만 뺏아가는 강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놈은 아니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다. 도덕이 바닥을 칠 때 법이 필요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법으로 판단되는 결과가 도덕성을 OO하지 못한다.

나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나약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착취, 강탈의 의도를 가지고 접근해올 때 그 의도를 뻔히 알아채고 있으면서도 두눈뜨고 강탈행위가 강도의 뜻대로 완수되도록 허락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자애의 부족이다. 단순히 강도당하는 것으로 사건이 끝나지 않는다. 총도 들지 않은 강도에게 지나치게 겁먹은 나의 비겁함에, 일말의 저항을 하지 않은 소극성에 나를 자책할 것이다.

“그건 제가 결정할 일이고요”라고 말했듯이 누구나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범위의 일이 있다.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결정의 범위를 포기하게 만들고 자신이 쥐려고 하는 것은 현대적 강도질의 첫 수순이다. 내 주체성을 타인에게 넘기는 일이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은 돈이 아니다. 시간이나 조건도 아니다.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켜낼 방어체계다.

가슴 뛰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온 삶을 소명에 향하도록 하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그 시작은 너무나 강렬하고 확실한 성공의 기세이기 때문에 발동시키기만 하면 그 끝엔 풍족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으며 그 과정 또한 가슴 뛰며 매일이 즐거울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부터 그 상태가 되겠다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발동되지 않는다. 내 의식이 그렇게 단순하게 이뤄져 있진 않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에 울림이 있어야 한다. 그 보다 깊은 아랫배에서 욱하고 올라와야 한다. 잠재의식에서도 갈망하면 자는 중에도 그것을 원하고 궁리하게 된다. 잠결에 해법을 생각해낼 정도로 그것을 열망해야 한다. 그것을 열망해야 한다. 열망해야 한다. 열망. 그렇다. 열망.

나는 열망하는 방법을 잊었다. 무엇을 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이 그런 것인 줄로 알았다. 하고 싶은 것은 참고, 갖고 싶은 것은 미루고, 내 욕망보다는 상대의 욕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어른만이 가질 수 있는 기술이고 지켜야 할 품위로 배웠다. 그렇게 나를 훈련시켰다. 나를 움직이는 것은 책임과 의무 밖에 없었다. 내 마음에 귀를 기울여 보아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 머리로만 생각한들 내면에서 반응이 전혀 생길 리 없었다.

 

◾열망하는 법을 되찾자. 마음이 가는 곳이 무엇이라도 있다면 그대로 직진해보자.

◾ 마음을 드러내보자. 마음을 글로 말로 표현해보자. 더 많은 사람에게 내 마음의 상태가 어떤지 그대로 드러내보자.

◾ 마음을 다스려보자. Mind Routine을 통해 건강한 마음을 갖자. 긍정희망-마음이 열정-행동을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행동이 의식을 만들기도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자.

우리는 조상에게 감사할 줄을 모른다. 지금의 우리를 존재케 해준 최초의 생명체, 뭍으로 올라왔던 물고기, 호모 사피엔스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배은망덕함은 우리 후손들에게도 물려질 것이다. 그들도 우리에게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원시적인 모습을 하찮게 깔보며 웃음거리로 여기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먼 미래에는 지금의 종과는 전혀 다른 post-human이 만들어질 것이다. post에는 여러 뜻이 있다. 시기적으로 후대에 오는 것이 일차적인 의미지만, 후대는 선대를 부정하면서 발전하기에 반대한다는 의미가 있고, 선대의 한계점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벗어난다는 의미가 있다. 포스트 휴먼은 신체적 한계를 극복할 것이며, 효율과 속도 측면에서 우월할 것이고, 현대인이 인지하는 것보다 초월적인 차원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현생인류가 미래인류보다 저급한 존재라는 사실에 낙담하는 것은 잘못이다. 3,000년대에 미래인류로 태어났다고 해보자. 미래 인류가 되었다는 사실에 만족할까? 비교와 낙담의 태도가 여전하다면 4,000년대의 미래인류에 비해 저급한 존재라는 사실에 낙담하고 있을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는 오만한 욕심이자,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는 불만족으로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의 오류가 대물림되지 않도록 허무주의라는 장치가 있다. 허무주의에 빠진 존재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고, 삶의 목표를 잃고, 스스로 생을 마감하게 만든다.

과거의 조상도, 현생 인류도, 미래 인류도 변치 않는 공통점은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하는 개선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개선의 의지가 지금에 다다르게 했고, 미래인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짧은 현생을 살아가는 중에도 조금씩의 진척이 이뤄지고 있는데 다음 네 가지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 같다.

있는 것을 더 잘하게 한다.
있는 것을 대리수행하게 한다.
없는 것을 보완한다.
차원이 다른 개념으로 transform한다.

각각 구체적인 예를 들면 너무 당연하고 심심한 얘기가 되어 썼다 지운다. 슈퍼히어로에 이 개선의 의지가 모두 투영되어 보여지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