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 맞는 일, 일에 맞는 사람

일을 지독히도 못하는 조직에 몸 담은 적 있다.
그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을 망치고 있었다.
공통점을 찾으라면 ‘지들 마음대로’
그들은 천성대로 일하고 있었다.

성급한 사람은 아무 소리나 지껄였고,
주장이 강한 사람은 고집을 피웠으며,
소심한 사람은 의견을 숨길 수 밖에 없었고,
권위적인 사람은 결속력을 헤쳤다.

경험삼아 용돈벌이삼아 방학이면 노가다판에 종종 나갔다. 공사장에서는 6시가 되면 조례를 하고, 안전수칙을 외고, 운동으로 몸을 풀며, 서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반복했다. 팔자에 없는 요리를 하느라 주방에서도 몇 년 일했다. 주방에서는 정신을 팔면 손가락이 날아간다. 흉터가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일에 임하기에 적합한 태도와 자세를 익히게 된다.

셔츠입고 출근해 궁둥짝 깔고앉아 모니터 앞에서 하루를 보내는 우리는 육체노동하는 분만큼 일에 적합한 태도와 자세를 갖추려고 할까? 대체로 아닌 것 같다. 일에 임하는 태세가 일의 품질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올바른 태세를 취하지 않고 일을 한다. 가끔 보면 일을 망치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 같다. 아이고! 제 인생 밖에서 망해주세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럽답니다.

일에 완전히 맞아 떨어지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사람에 완전히 맞아 떨어지는 일도 없다.

인간은 본디 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태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업무 능력은 돌 쪼개기, 물건 수집하기, 개구리 사냥하기 따위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업무능력은 현대 인류에게 부자연스러운 과업이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위적 학습과 숙달이 요구된다.

천성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발전하는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해 대체되고 있다. 표면적인 현상으로 경쟁과잉이라 일컫어진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은 지속가능성이다. 결국에는 일자리 소멸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정해진 미래의 역사다.

태생적인 능력과 업무요구자질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질 것이다. 인구의 절반이 농사를 짓던 시대에는 태생적 업무 능력만으로 절반가량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업무는 더욱 전문화될 것이고, 하나의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사전교육과 준비기간도 길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성에 맞는 일을 찾는 것이 평생 과업인 것으로 여긴다. 천성에 맞는 직업을 찾은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특별한 케이스들이 많겠지만, 내 인생계획에 대체로 참고되지 않으니 일반화 시켜선 안 되겠다.

사람에 맞춰진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해선 안 된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진입장벽이 낮은 시장은 쉽게 포화된다. 시장이 포화되면 보상의 크기가 작아진다. 보상이 작아지면 지속가능성이 없어진다. 지속가능성이 없는 일은 1년 뒤에 어차피 망한다.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일이라는 것은 대체로 우리의 습관에 반대한다. 어렵고 불편한 과제다. 하지만 천성을 거스르고 이겨낼 수 있을 때, 그 보상의 크기는 커진다. 어려운 과제일수록 도전하는 사람은 적고, 성공하는 사람은 더 적다. 경쟁자가 자연히 줄어들어 성공확률은 높아진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고유한 가치란 없다. 모든 가치는 관계 속에서만 평가된다. 일하는 사람은 일로 평가된다. 반대로 일 또한 독자적이지 않다. 인간 천성에 맞춰지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지만, 너무 어려워도 달성하지 못한다. 사람을 일에 맞추려는 노력만큼 일도 사람에 맞춰야 한다.

일을 사람에 맞추고, 사람을 일에 맞추려는 노력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노동의 결과물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시대에 가장 확실하게 성과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일을 줄이고 성과를 내자.

일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되다.
일 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성과가 필요한 것이지, 일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은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일이 아닌, 성과를 좇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일은 성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일은 성과가 아니다.
되레 일은 비용이고, 지출이다.

일은 input이고,
성과는 output이다.
적은 input을 들이되, 많은 output을 내어야 한다.
최대 output이 한정적이라면, input을 최소화해야 하며,
요구 input이 고정적이라면, output을 극대화해야 한다.

조상님들은 일을 하면 돈은 자연 따라온다 했다.
조상님들은 집을 직접 지었고, 벼를 직접 키웠다.
당시엔 일이 성과로 직결되었다.
당시엔 일을 적게 하면 output이 줄었고,
당시엔 일을 많이 하면 output이 늘었다.
당시엔 input과 output이 정비례했다.
집구석에서 밥만 축내는 삼득이는 input이 0으로 계산되었다.
따라서 output을 늘리기 위해 input을 최대투입하는 게 옳은 계산이었다.

직업의식, 노동정신, 올바른 인간상이 만들어졌다.
피땀흘린 노동은 보람차고, 요령을 피워선 안 되며, 불로소득은 죄악이라 했다.
식충이 삼득이를 생산인력으로 만들 설득논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필요에 따른 이데올로기였을 뿐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일이 성과로 직결되지 않는다.
일과 성과의 거리가 꽤 멀어졌다.
고차 산업에서는 생산결과물이 가시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일을 한다고 해서 성과가 약속되지 않는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다.
성과가 나지 않으면 돈이 따라올 리 없다.

자동차가 나온 뒤 마차는 무의미해졌다.
세탁기가 나온 뒤 손빨래는 무의미해졌다.
농약드론이 보급되면 농약치는 행위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output이 input보다 작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output이 input보다 작아졌다는 것은 생산성싸움에서 졌다는 것을 뜻한다.
정말 지긋지긋하고 숨막히는 싸움이지만 도망칠 길은 없다.

일을 정면으로 응시해보자.

일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과거의 통념을 뿌리뽑아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습관과 행동양식을 교정해야 한다.

일을 좇는 사람은 노예가 되고,
성과를 좇는 사람은 자유인이 된다.
피땀흘린 노동은 미련한 짓이며, 요령껏 효율적으로, 소극적 소득을 추구해야 한다.
최대한 적게 일하고, 최대한 쉽게 일해야 한다.
일은 수단이다.
일은 비용이다.

일에 임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성과가 가장 우선이다.
일은 가장 나중이다.
무턱대고 일에 달려드는 태도는 올바른 순서가 아니다.
일이 무의미해진 시대에 일로 승부를 보려다간 몸이 박살나고 말 것이다.
기대되는 output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input을 따져보아야 한다.
input대비 output이 상회한다면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input대비 output이 2배수라면 짭짤하겠다.
input대비 output이 4배수라면 재미 좀 있을까?
input대비 output을 10배로도 만들 수 있을까?
이미 이긴 게임을 확인하는 과정으로서 일에 임해야 한다.

어떤 일이건 목표는 똑같다.
빨리, 많이, 잘하면 된다.
잘하는 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생략된다.
잘하지 못한다면 속도와 양을 따질 필요도 없이 무의미해진다.
빨리는 input을 줄이라는 뜻이고,
많이는 output을 늘리라는 뜻이다.
이 둘을 합쳐 Quantity라 부르고, 잘하는 것을 Quality라 한다.
잘한다는 전제 하에,
빨리, 많이 하면 된다.

성과가 유의미하고,
일은 무의미하지만,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은 유의미하다.
성과를 높여야 하고,
일은 줄여야 하기에,
일을 줄이기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일을 줄이고,
성과를 내자.

— 덧붙임 —

인생철학 아니다.
게임공략 같은 것이다.

“되게 분석적이시네요”

“되게 분석적이시네요”

칭찬인줄로 알았다.

10년 전쯤, 세상에서 완벽하고 위대한 떡볶이라는 타이틀로 홍보하던 떡볶이 프랜차이즈가 기억난다. 떡, 오뎅,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설탕 등 각각의 재료를 종류별로 비율별로 모두 실험해봤단다. 무려 27,000가지의 경우의 수를 모두 실험했고, 그 중에서 가장 맛있는 떡볶이니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위대한 떡볶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름은 기억은 안 난다. 지금도 안 보이는 것 보면 망한 것 같다.

문득 분석적이라고 한 그 말이 칭찬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환(transition)을 일으키지 못하면 미디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수많은 사람의 끊이지 않는 발걸음, 이슈의 발원지가 되었다는 자부심, 독자들의 감사인사, 사람들이 알아봐 줄 때의 콧대등등함, 발행인으로서 느끼는 사회적인 책임감, 사업화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미한 희망

작은 규모의 블로그를 운영하는 사람, 페이스북 페이지를 운영하는 사람, 대형 언론사에 근무하는 사람 모두 느껴봤을 공통적인 감정들이다. 이 감정들 때문에 밤도 새서 조사하고 연구하고 발로 뛰어 글을 쓴다. 하지만 밥을 벌어먹지 못하면 이 모든 감정과 노력은 모두 헛수고에 불과해진다. 미디어로 밥값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전환이다. 전환transition을 일으키지 못하면 미디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미디어와 콘텐츠 자체가 목적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광고를 수익사업으로 삼는 미디어는 철저한 수단이고, 좋은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전환을 일으키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 AARRR

전환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AARRR에 대한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이 기준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낯설게 들리지만, 오프라인 매장에 비유를 들어 생각해보면 어렵지 않은 개념이다. 온라인에만 국한되지 않고 거의 모든 고객 접점을 대입해볼 수 있다.

Acquisition은 최초노출에 해당한다. 오프라인 매장에 비유하면 손님이 간판을 본 순간이다.
간판을 본 사람 중에서 몇 명이나 상점으로 들어왔는가? 상점으로 들어온 사람을 Activation이라 한다.
그 손님이 또 방문했다? 매장에 관심 있는 물건이 있는지 이것저것 뒤져보면 Retention이다.
상품을 고르고 지갑을 열었다. 돈을 내면 드디어 Revenue가 났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손님이 주변 사람도 데리고 다시 방문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입소문을 내준다. Referral이다.

매 단계를 온라인에 대입해도 맞아 떨어진다. 각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 시점마다 일부분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간다. 이 과정은 선형적이고 이후 단계가 전 단계보다 커질 수는 없으므로 깔때기funnel이라고도 부른다. 다음 단계로 전환시킬 때 이탈하는 사람을 최소화하고, 전환되는 비중을 최대한 높이는 게 관건이다.

 

  • 허무지표

“월간 100만 PV를 기록Acquisition”, “누적 회원 수가 30만 명Activation”, “재방문 비율이 50%Retention”라는 소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위의 숫자들이 얼마로 바뀌건 간에 특별한 의미가 생기지 않는다. 달성해도 내 인생에(우리 회사에) 도움이 안 되는 목표를 허무 지표라 한다. 앞의 세 수치는 허무 지표다.

각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얼마나 전환되는지는 조금 중요하다.
Acquisition에서 Activation으로 상당수의 %가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면 귀를 한 번 기울일 만하다. Activation에서 Retention으로 상당수의 %가 전환이 일어났다고 하면 눈길을 한 번 줄 만하다. 하지만 세 번째 단계인 Retention까지 왔다 하더라도 수고했다고 칭찬하긴 이르다. 간판도 많이 노출되고, 매장도 붐비고, 재방문자도 많지만, 정작 물건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서비스의 성장 가능성은 시간대로 성장하는 허무지표가 아니라, 단계별로 전환되는 %의 성장에 있다. 전환의 %가 예측 가능하고 조절 가능하다면 Acquisition에 돈을 쏟아부었을 때, 깔때기 마지막에 나오는 수량이 얼마나 될지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깔때기 중간이 꽉 막혀있는 상황이라면? Acquisition에 들어가는 비용은 목적 없는 지출이 된다.

정작 중요한 4번째 수익화 계획Revenue이 없으면 앞의 수치들은 전혀 의미 없다. ARPU Average Revenue Per User 또는 ARPPU Average Revenue Per Paying User 가 의미 있는 지표들이 된다.

나 또한 그랬고, 많은 언론사가 허무지표만을 목표로 삼았다. 왜 이토록 중요한 전환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까? 내부에 수익전략Revenue이 없기 때문이다.

 

  • 전환 빌려주기 = 광고

전통적으로 언론사는 자체적인 판매 상품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에 익숙지 않다. 자체적으로 수익전략을 가지기보다는 수익전략을 가진 외부 파트너를 도와주는 일을 해왔기 때문이다.

외부 파트너를 도와주기 위해 미디어 트래픽을 빌려주는 것을 광고라 한다. 트래픽을 빌려주는 단계에서도 전환이 일어나는데 내부적으로 전환을 일으킬 때보다 외부로 전환을 빌려줄 때, 대체로 전환율이 낮다.

언론사의 관점에서 Acquisition을 빌려주는 것을 광고시장에서는 CPI Cost Per Impression이라 부른다. 언론사의 관점에서 Activation을 빌려주는 것을 광고시장에서는 CPC Cost Per Click이라 부른다. AcquisitionActivation은 직접적인 Revenue로의 전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광고 효율이 불확실하다. Acquisition만으로 광고효과가 나던 시대에는 광고주가 KBS건물에 두 바퀴를 돌아 줄을 섰다는 전설이 내려 전해진다. 하지만 콘텐츠 과잉시대에 접어든 이상, 그런 시대가 다시 오길 기대할 수 없다.

언론사가 내부적으로 수익전략이 있었다면 Revenue에 직결되는 전환전략을 세워놓았을 것이다. 그런 전환전략이 있었다면 외부에 빌려줄 때도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론사는 그런 준비가 안 되어 있고, 외부에서 요청하는 AcquisitionActivation만 빌려주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광고주도 AcquisitionActivation만 빌리는 데 높은 비용을 지불할 수 없다. 외부의 요구에 따라 전환을 빌려주니 실제 트래픽 보유 가치보다 평가절하해서 팔 수밖에. 이제 시장가격을 광고주가 정한다.

온라인 광고시장은 언론사를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한국의 웹사이트 중 트래픽 상위 50개 중에서 언론사는 3곳이다. (22동아, 30조선, 40중앙) 반면 커뮤니티 사이트는 8곳이다. (14디씨, 15SLR, 17일베, 25베스티즈, 29인벤, 33오유, 34뽐뿌, 37인스티즈) 연봉 5,000만원의 엘리트 기자가 쓴 기사와 커뮤니티에 자발적으로 올라온 콘텐츠가 동점으로 평가되니 콘텐츠 생산 비용에서 큰 손실을 본다.

 

  • 전환은 전략이 아닌 태도

세상에는 세 가지의 거짓말이 있다고 한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통계. 이 중에서 통계가 가장 나쁜 이유는 스스로마저 속이기 때문이다. 동접자 수를 보며 뿌듯한 마음에 취해있던 나, 허무지표를 엑셀에 넣고 돌려 어떻게든 J커브를 산출했던 나, 데이터를 자신을 속이는 데 사용했던 나를 반성한다. 3달 전 나는 개별 계정으로 Google Analytics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시켰다. Google Analytics는 손실이라는 고통을 망각하게 해주는 진통제다. 페이스북 페이지 인사이트도 같은 놈이다.

“방문자와 회원 수는 없는 것보다 있는 게 좋잖아요? 전환은 나중에 생각해도 되지 않나요?”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이 또한 틀린 생각이다. 전환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허무지표는 없애야 한다. 허무지표는 돈을 쓰면 나올 수밖에 없다. 공짜로 밥 주고 술 주는 이벤트를 매일 하는데 매장에 손님이 끊길 리 있겠는가?

뉴미디어라는 간판이 무슨 벼슬인지, Revenue전환의 전략도 의지도 없이 수백만의 다운로드와 억소리나는 허무지표를 성과라고 자랑스럽게 인포그래픽까지 만들어 공개하는 곳이 있다. 너도나도 뛰어드는 MCN사업자들도 마찬가지다. 직원은 200명인데 하루에 나오는 콘텐츠 수는 고작 20개란다. “버는 돈은 없는데 쓰는 돈은 많아요”라는 뜻인데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내뱉는 말의 뜻을 잘 모르는 것 같다. 다들 좀… 취하신 것 같다.

 

허무지표를 집어치우고 Revenue를 위한 전환전략을 찾아내자. 전환을 자유자재로 드리블할 수 있는 기술을 내재화하자. DNA에 새기자.

‘스타트업’ 어휘의 정의를 찾아서 – What is a Startup?

스타트업이란 무엇인가?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쓰여진지 3년이 채 되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2007년도 이후에야 쓰이기 시작했다. 이 신조어는 네이버 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그나마 오픈사전에서 3줄의 짧은 설명을 찾을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조금 더 많은 설명을 담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스타트업을 보통 ‘창업’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거나, 기존의 ‘벤처기업’이라는 단어와 혼용하거나, ‘IT업계 초기기업’으로 가두어 지칭하곤 한다. 유사한 듯 보이는 이 세 단어는 스타트업의 뜻과 의미를 잘 표현하지 못하며 많은 오해를 불러낸다. 언어가 사회적 약속이라는 전제하에, ‘창업’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식당 창업을 떠올리게 하고, ‘벤처기업’은 왠지 정부로부터 벤처기업 인증을 받아야 하는 듯한 느낌을 주며, ‘초기기업’이라고 부르면 설명하는 내용이 제한적이다.

미국에서도 이 신조어에 대한 정의가 정확하게 굳어지지 않아 많은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와이 컴비네이터(Y Combinator)의 창업자인 폴 그래이엄은 스타트업을 ‘성장‘(한글 번역본 by 윤치형님)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페이팔의 창업자인 피터티엘은 둘도 없는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정의내리고 있다. 린스타트업의 저자인 에릭 리스는 스타트업 기업이 가지는 네 가지 속성을 설명하고 있으며, 에릭리스의 스승인 스티브 블랭크는 조금 더 도식화된 설명을 덧붙여 분석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 신조어를 정의하려는 시도가 쿼라(Quora), 리서치게이트(ResearchGate)를 통해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렇듯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아직 정의가 확실히 굳어지지 않은, 살아있는 단어이다. 수많은 정의가 공존하는 시점에서 비석세스는 직접 그 뜻과 의미를 찾아 나서기로 했고, 지난 2달에 걸쳐 30여 명의 스타트업 업계 종사자, 멘토들에게 영상인터뷰를 진행했다.

beSUCCESS 근무 당시 제작한 영상 : http://besuccess.com/2014/02/what-is-a-startup/

— 덧붙임 —

언어는 사회적인 약속이다. 독일의 언어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의미의 집이다” 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면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집도 없고 약속도 없는 상태. 많은 사람들은 지레짐작으로 대~충 뜻과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명료하고 흔들리지 않는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아니다.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이 될 단어에 대한 약속과 의미의 집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기 위한 논란은 계속 되고 있다.
의미 정의의 중요성은 모두가 깨닫고 있는 듯.
오해가 없으면 새로운 해석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의미있는 다양한 사람들의 스타트업에 대한 의견.

나는 지금 가장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다.

금전적인 부분도 아니오, 고용보장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앞으로 60년 더 일하며 살아야 하는데, 그 기간 동안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안정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무너져도 나는 살아 남아야 한다.

노예가 되기 위한 준비

결국 목적없는 준비들은 모두 더 나은 노예가 되기 위한 자격요건을 갖추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타인의 삶을 더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노예가 되기 위해서 현대인들은 그렇게들 열심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회구조상 60%의 임금노동자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죠.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다행히도 자발적인 노예들이 충분히 있고, 또 유연하게 그 비율을 조정합니다.

취업이데올로기, 스펙이데올로기 따위의 것들이 자발적 노예를 육성하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돈이라는 기준으로 재평가되고 평준화되기 때문에 노예들 간의 계급구조들도 만들어집니다. 계급구조가 만들어진 노예들간의 새로운 생태계는 아주 큰 우물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그 우물 안에는 대중문화라는 마약이 존재하죠.

존재의 이유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철학이라는 말만 꺼내도 내가 사주팔자 점집을 차릴 작정을 한걸로 오해를 해서 이상하게 쳐다보곤 한다. 그런 친구들도 10여 년 전에는 지독한 철학자였다. 모든 사람은 사춘기를 거치면서 철학적 사유를 시작한다. 자신의 자아를 깨닫고 ‘나는 누구이며, 내가 살고 있는 우주는 어디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들을 던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답을 찾지 못한 단기 철학자들은 모두 평범한 학생으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풀지 못해 포기한 ‘존재의 이유’라는 문제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명쾌한 해답을 일찍이 내놓았다.

‘존재의 이유’나 ‘왜 사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 가정을 꾸려 후손을 잘 기르고 싶다든지 연봉을 5천만원정도 주는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서라든지 장원급제하여 가문의 영광이 될 것 이라는 대답들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대답들은 자신들의 꿈이자 인생계획일 뿐이지 정답이 아니다. 게다가 본인이 세상에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도 될 수 없다.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은 개인의 존재이유를 넘어서 세상 만물의 존재이유까지 물어보는 질문이다.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답 중에서 틀린 답들을 모두 제거하고 나면 ‘살기위해 산다.’라는 동어반복적인 답만이 남는다.

쇼펜하우어는 ‘살기위해 산다.’라는 것을 ‘will to live’(생의지)라고 말했다. ‘will to live’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의 원천이다. ‘will to live’가 사람을 하루세끼 밥을 먹게 만들고 짝을 맺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이 생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어떤 이는 자신이 의지에 의해서 행동한다는 것을 부정할지도 모른다. 이는 개념의 혼동이 있기 때문인데, 흔히 ‘의지’라는 단어는 뇌의 이성적 사고를 통하여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사전에서는 자신의 의도를 입각하여 자기결정을 하는 목적을 추구하는 작용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쇼펜하우어가 말한 ‘will to live’는 이보다 좀 더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의지를 뜻한다. 그것에는 우리의 이성이 개입되지 않는다.

생의지는 뇌가 계산한 결과가 아니고 잠재의식 속에 숨어 있는 것도 아니다. 생의지는 내 몸속 100조 개의 세포 안의 유전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유전인자가 달성하려는 궁극적인 목적은 종족 보존이다. 인간이 종족 보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밥을 먹어야 하고 이성을 만나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헌데 인간이 귀찮다고 식음을 미루고 짝을 맺지 않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문제점을 예방하기 위해 우리 몸속의 유전인자는 쾌락이라는 당근을 줘서 사람을 조종한다. 인간의 미각 구조는 이 쾌락원칙을 철저히 따르기 때문에 대체로 몸에 필요한 음식은 맛이 좋고 몸에 해로운 음식은 맛이 없다.

인간의 모든 욕구의 바탕에는 생의지가 넓게 깔려있다. 그리고 그 생의지 위에는 고차원적인 욕구들이 피라미드처럼 쌓여있다. 이 피라미드는 하위단계에 있는 결핍욕구와 그 위에 있는 성장욕구로 나눠볼 수 있는데 하위단계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으면 상위단계의 욕구를 추구하지 못한다.

생리적 욕구, 안전과 안정 욕구, 사랑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 존경 욕구, 자기실현 욕구의 단계로 쌓여있는 욕구위계 피라미드는 Abraham Harold Maslow가 발견해 낸 모델로 에피쿠로스가 나눈 3단계의 생존, 성욕, 성취욕보다 더 정밀하다.

maslow

생리적, 안전, 사랑, 존중 에 대한 욕구는 결핍욕구로 이 욕구가 기본적으로 충족되어 기본적인 생존이 가능해지게 되면 우리는 더 발전하고자 하는 성장욕구를 추구하게 된다. 먼저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해야만 알고 싶어 하는 욕구와 자아를 실현코자 하는 욕구, 그리고 심미적 욕구를 추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생의지는 피라미드의 아래단계에 있는 결핍욕구에 더 가깝다고 단정 지을 지도 모르나 단순히 생의지가 하위단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생의지는 모든 욕구에 넓게 깔려있기 때문이다. 생의지는 모든 인간행동의 원천이다. 생의지는 인간의 생존에 관여하여 안전해야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사랑을 받아 종족을 번식하고자 하는 욕구도 가지게 하며 훌륭한 사람이 되어 훌륭한 개체로 진화하고자 하는 욕심도 만들어 낸다. 더 나아가 자아를 실현하는 것 또한 자신의 객체를 인식하고 주체로서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생의지는 모든 욕구에 깔려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생의지는 인간이 가지는 모든 욕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욕구들 중에 아주 강력하고 원초적인 것이 있다면 생존욕구 다음으로 성욕을 들 수 있다. 모든 생명체는 종족보존을 위해 자연적으로 왕성한 성욕을 가지게 된다. 성욕이 없는 존재는 일찍이 대가 끊기고 멸종하였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모든 생명체는 성욕이 왕성하다.

인간 또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애를 쓴다. 하지만 여기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일찍이 동성동본간의 결혼과 근친상간을 금하였는데, 이는 단순히 관습적인 규제가 아니었다. 근친상간을 하면 기형아를 낳고 열등한 2세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친지를 사랑하지 않고 너무 어리거나 너무 나이가 들어 아이를 만들 수 없는 이성에게 성적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인간은 본인과 다른 형질의 가진 이성에게 끌리게 된다.

우리는 흔히 난자에 1등으로 도착하는 정자가 수정에 성공한다고 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정자 한마리가 난자에 1등으로 도착해도 바로 문이 열리지 않고 100마리쯤 둘러싸인 이후에야 문을 열어 단 한 마리의 정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최근 보고된 사실이다. 1등으로 도착한 정자에겐 아쉬운 일이지만 난자는 100마리의 정자를 모두 둘러본 뒤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와 다른 형질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정자를 받아들이는 선별 과정을 거치는 것이었다.

원생동물의 하나인 짚신벌레가 있다. 꼭 짚신마냥 생긴 짚신벌레는 날씨가 좋은 한여름에는 아메바와 같이 몸이 갈라짐으로써 번식을 한다. 그러나 가을이 찾아와 쌀쌀한 바람이 불어 올 때면 두 놈이 슬쩍 만나 도둑 키스를 한 번 하고, 살그머니 헤어진다. 하등한 종족 주제에 무슨 꼴불견이냐고 하겠지만 겨울이 닥쳐오면 짚신벌레 키스의 신비가 드러난다.

날씨가 사나워지면 스스로 몸이 갈라져 태어난 홀아비의 새끼들은 거의 전멸하다시피 죽어 버리는데 키스를 통해 태어난 후손들은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많은 수가 생존한다. 짚신벌레는 키스만 한 것이 아니라 두 몸이 합치는 동안 개개의 이질적인 염색체의 일부를 교환함으로써 생존력을 강화시킨 것이다. 인간의 경우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아 볼수가 있는데 서로 다른 형질을 가진 부모가 낳은 혼혈아는 성장과정에서 인종차별을 받기는 하나 결국에는 미국의 대통령이 될 수가 있었다.

생의지는 인간을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원동력이다. 인간은 의지라는 것에 영혼이 저당 잡힌 존재라고 해도 문제가 없겠다.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생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세상 만물이 존재하게 만들어 준 진리보다 더 높은 진리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생각을 해야 마땅하다.

데카르트가 말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한다.”

곰곰히 생각해봤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을 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