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일해야 한다.

우리는 글로 일한다. 글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글에는 숨을 곳이 없다. 고민의 크기가 온전히 글로 나타난다. 고민의 허술함이 글에 온전히 드러난다. 글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는 생각하는 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글을 좀 못 쓴다고해서 생각능력까지 혹평하는 것은 억울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방어하는 것이다. 생각을 두 가지로 분류시켜보자. 개인의 머릿통 속에서 타인과 교류될 필요가 없는 생각을 망상으로, 타인과 교류될 필요가 있는 생각만 생각으로 분류해보자. 회사에서는 망상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각의 전달도구로 글이 최고라는 데에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 두뇌와 연결되어 있는 언어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두 개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둘은 생각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음성언어는 시간적으로 일시적이며, 전달매체가 효과적이지 않으며, 다시 읽어드리는 과정에서 linear 재생을 거쳐야 하기에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 또 저장과 관리 분류를 컴퓨터로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규모있는 확장이 불가능하다.

반면 글은 직관적이고, 정리가 가능하며, 편집이 용이하고, 컴퓨터를 통한 처리능력을 확장시킬 수 있고, 시간과 물리적인 한계에 제한되지 않으며, 글을 쓰고 읽는 사람 모두 그 전달속도를 발전시킬 수 있는 등 장점이 무궁무진하다. 때문에 우리는 애초부터 글로 생각해야 한다. 더군다나 우리의 일은 육체노동없는 정신노동만으로 일하고 있다. 정신노동은 곧 생각이고, 생각의 도구는 글이다. 결국 글이 우리의 기본적인 업무도구인 것이다.

강변북로에 버려진 개 한마리

강변북로 도로변에 짐승한마리가 보였다. 차를 바로 세우진 못했다. 그 짐승이 염소인지 개인지도 확실히 몰랐다. 염소여도 말이 안 되고 개여도 거기 있어선 안 될 상황이었다. 근처 한강공원에 차를 대고 찾아 나서니, 강아지 한마리가 내려가지도 나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니 저도 다가오다 막상 겁이 나는지 멈춰서 고개를 휙 돌렸다. 무섭다는 것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너가 무서우면 나도 다가가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개가 놀라 차도로 뛰어들면 큰일이었다. 조심히 한 발씩 뗀다. 꼬리를 흔들면서도 궁댕이 방향을 튼다. 도망갈 준비를 하는듯 나와 뒤를 번갈아 본다. 녀석이 망설이는 사이 손에 닿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냅다 목덜미를 잡았다.

깨갱 소리와 함께 배를 까보였다. 오줌이 질질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를 공격하지 마세요. 이렇게 오줌도 못가리잖아요.”라는 뜻이었다. 뜻을 알았지만 솔직히 개 드러웠다. 진정시키기 위해 궁댕이를 팡팡쳤다. 먼지가 온데 날렸다. 그러고보니 궁디팡팡은 고양이용인데 강아지는 어떻게 만져야 하더라. 머리도 만지고 턱도 만지고 발도 만지고 배도 만졌다. 귀가 앞으로 접히고 턱 주름이 흐물거리는게 똥개는 아닌 것 같고 리트리버인 것 같다. 강아지 특유의 뽀얀 냄새는 나지 않고 개 냄새가 지독했다.

바닥에 내려놓아도 졸졸 뛰어온다. 5분만에 새주인이 되었다. 강변북로에서 발견됐으니 이름은 강북이라 했다. 엎드려 안으면 오줌이 묻을 것 같았다. 개들은 눕혀 안기는 걸 안 좋아하지만 강북이는 아랑곳않았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금새 잔다. 쭈끌쭈글한게 너무 예쁘다. 배가 빵빵하고 뜨거웠다. 잃어버린 것인지 버려진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강북이의 바깥생활은 오늘이 첫날이었으리라 추측했다.

120에 전화해서 유기견 구호후속조치를 안내받았다. 민원을 접수해주셨다. 그러곤 연락이 없었다. 다시 전화했더니 민원이 처리중이며 해당부서로 전달은 되었다고 했다. 나 지금 추운 겨울에 개 데리고 한강공원에 얼마나 기다려야 하냐니 자기도 잘 모르겠단다. 당신 이름이 뭐요 했더니 담당부서로 직접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준다. 담당부서에 연락했더니 민원내용은 이미 들었다더라. 왜 연락을 안주고 마냥 기다리게 하냐 했더니 처리 중이었다더라. 언제 오냐 했더니 그건 잘 모르겠단다. 당신 이름이 뭐요 했더니 아무 말이 없더라. 당신들 일처리를 내가 못믿겠으니 내가 직접 보호소에 배달하겠다 했다. 그제서야 근처 제휴되어있는 동물병원을 알려준다고 했다. 강북이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네 다리를 쭉 펴더니 기지개를 한 번 하곤 그 자세로 계속 잤다.

도시에서 대형견을 키우는 게 걱정됐을까. 리트리버 새끼를 2주차에 분양받고 2달차에 버린 것이 아닐까. 이빨이 나기 시작하자 이것저것 물어뜯는 게 감당이 안 된 것일까. 산책중 실종된 것은 아닐까. 이렇게 느린 개를 잃어버릴 수 있었을까. 강북이가 그 가파른 담벽을 스스로 올라갔을까. 왜 목줄은 없었을까. 밥은 실컷 먹이면서 왜 씻기진 않았을까. 씻겨놓으면 키우는 개인줄 알고 구조되지 못할까봐 그랬을까. 강변북로에서 개를 던지고 간 것이라면 뒷차는 못봤을까. 강북이를 본 차량은 족히 5백대가 넘었을 것인데 우리 말고는 신고가 없었을까. 강북이는 나를 통해 구조된 것일까, 나를 통해 두번 유기당한 것일까. 나는 직접유기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뿐인가. 인간을 위해 개량된 종이 어찌 인간에게 버림받게 되었을까. 보호소에서 안락사당하기까지의 20일, 그 사이에 강북이는 새 주인을 찾을까. 47%의 확률로 생을 마감할까. 대형견이라 그보다 더 힘들까. 이 사실을 알고도 나는 왜 다른 방안이 떠오르지 않을까.

집에 돌아와 강북이 냄새가 밴 옷을 빨았다. 호두는 개냄새를 탐색하느라 바쁘다.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문자가 왔다. 탐색반이 이촌한강공원 축구장 일대를 수색했으나 유기견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사람에 맞는 일, 일에 맞는 사람

일을 지독히도 못하는 조직에 몸 담은 적 있다.
그 구성원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일을 망치고 있었다.
공통점을 찾으라면 ‘지들 마음대로’
그들은 천성대로 일하고 있었다.

성급한 사람은 아무 소리나 지껄였고,
주장이 강한 사람은 고집을 피웠으며,
소심한 사람은 의견을 숨길 수 밖에 없었고,
권위적인 사람은 결속력을 헤쳤다.

경험삼아 용돈벌이삼아 방학이면 노가다판에 종종 나갔다. 공사장에서는 6시가 되면 조례를 하고, 안전수칙을 외고, 운동으로 몸을 풀며, 서로 조심하고 주의하라고 반복했다. 팔자에 없는 요리를 하느라 주방에서도 몇 년 일했다. 주방에서는 정신을 팔면 손가락이 날아간다. 흉터가 하나 둘 늘어날 때마다 일에 임하기에 적합한 태도와 자세를 익히게 된다.

셔츠입고 출근해 궁둥짝 깔고앉아 모니터 앞에서 하루를 보내는 우리는 육체노동하는 분만큼 일에 적합한 태도와 자세를 갖추려고 할까? 대체로 아닌 것 같다. 일에 임하는 태세가 일의 품질을 결정한다. 그럼에도 올바른 태세를 취하지 않고 일을 한다. 가끔 보면 일을 망치려고 작정하고 달려드는 것 같다. 아이고! 제 인생 밖에서 망해주세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럽답니다.

일에 완전히 맞아 떨어지는 사람은 없다. 반대로 사람에 완전히 맞아 떨어지는 일도 없다.

인간은 본디 일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태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업무 능력은 돌 쪼개기, 물건 수집하기, 개구리 사냥하기 따위일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요구되는 업무능력은 현대 인류에게 부자연스러운 과업이며, 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위적 학습과 숙달이 요구된다.

천성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발전하는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해 대체되고 있다. 표면적인 현상으로 경쟁과잉이라 일컫어진다. 하지만 문제의 근본은 지속가능성이다. 결국에는 일자리 소멸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정해진 미래의 역사다.

태생적인 능력과 업무요구자질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더 벌어질 것이다. 인구의 절반이 농사를 짓던 시대에는 태생적 업무 능력만으로 절반가량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업무는 더욱 전문화될 것이고, 하나의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사전교육과 준비기간도 길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천성에 맞는 일을 찾는 것이 평생 과업인 것으로 여긴다. 천성에 맞는 직업을 찾은 사람은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특별한 케이스들이 많겠지만, 내 인생계획에 대체로 참고되지 않으니 일반화 시켜선 안 되겠다.

사람에 맞춰진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해선 안 된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진입장벽이 낮아진다. 진입장벽이 낮은 시장은 쉽게 포화된다. 시장이 포화되면 보상의 크기가 작아진다. 보상이 작아지면 지속가능성이 없어진다. 지속가능성이 없는 일은 1년 뒤에 어차피 망한다.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한다.

일이라는 것은 대체로 우리의 습관에 반대한다. 어렵고 불편한 과제다. 하지만 천성을 거스르고 이겨낼 수 있을 때, 그 보상의 크기는 커진다. 어려운 과제일수록 도전하는 사람은 적고, 성공하는 사람은 더 적다. 경쟁자가 자연히 줄어들어 성공확률은 높아진다.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고유한 가치란 없다. 모든 가치는 관계 속에서만 평가된다. 일하는 사람은 일로 평가된다. 반대로 일 또한 독자적이지 않다. 인간 천성에 맞춰지지 않은 일을 해야 한다지만, 너무 어려워도 달성하지 못한다. 사람을 일에 맞추려는 노력만큼 일도 사람에 맞춰야 한다.

일을 사람에 맞추고, 사람을 일에 맞추려는 노력의 크기를 키워야 한다.
노동의 결과물을 직접 확인하지 못하는 시대에 가장 확실하게 성과를 추구하는 방법이다.

일을 줄이고 성과를 내자.

일에서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은 헛되다.
일 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성과가 필요한 것이지, 일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일은 성과를 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일이 아닌, 성과를 좇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일은 성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일은 성과가 아니다.
되레 일은 비용이고, 지출이다.

일은 input이고,
성과는 output이다.
적은 input을 들이되, 많은 output을 내어야 한다.
최대 output이 한정적이라면, input을 최소화해야 하며,
요구 input이 고정적이라면, output을 극대화해야 한다.

조상님들은 일을 하면 돈은 자연 따라온다 했다.
조상님들은 집을 직접 지었고, 벼를 직접 키웠다.
당시엔 일이 성과로 직결되었다.
당시엔 일을 적게 하면 output이 줄었고,
당시엔 일을 많이 하면 output이 늘었다.
당시엔 input과 output이 정비례했다.
집구석에서 밥만 축내는 삼득이는 input이 0으로 계산되었다.
따라서 output을 늘리기 위해 input을 최대투입하는 게 옳은 계산이었다.

직업의식, 노동정신, 올바른 인간상이 만들어졌다.
피땀흘린 노동은 보람차고, 요령을 피워선 안 되며, 불로소득은 죄악이라 했다.
식충이 삼득이를 생산인력으로 만들 설득논리가 필요했을 것이다.
필요에 따른 이데올로기였을 뿐이다.

시대가 바뀌었다.
일이 성과로 직결되지 않는다.
일과 성과의 거리가 꽤 멀어졌다.
고차 산업에서는 생산결과물이 가시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일을 한다고 해서 성과가 약속되지 않는다.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일이 너무 많다.
성과가 나지 않으면 돈이 따라올 리 없다.

자동차가 나온 뒤 마차는 무의미해졌다.
세탁기가 나온 뒤 손빨래는 무의미해졌다.
농약드론이 보급되면 농약치는 행위도 무의미해질 것이다.
무의미하다는 것은 output이 input보다 작아졌다는 것을 뜻한다.
output이 input보다 작아졌다는 것은 생산성싸움에서 졌다는 것을 뜻한다.
정말 지긋지긋하고 숨막히는 싸움이지만 도망칠 길은 없다.

일을 정면으로 응시해보자.

일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과거의 통념을 뿌리뽑아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습관과 행동양식을 교정해야 한다.

일을 좇는 사람은 노예가 되고,
성과를 좇는 사람은 자유인이 된다.
피땀흘린 노동은 미련한 짓이며, 요령껏 효율적으로, 소극적 소득을 추구해야 한다.
최대한 적게 일하고, 최대한 쉽게 일해야 한다.
일은 수단이다.
일은 비용이다.

일에 임하는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성과가 가장 우선이다.
일은 가장 나중이다.
무턱대고 일에 달려드는 태도는 올바른 순서가 아니다.
일이 무의미해진 시대에 일로 승부를 보려다간 몸이 박살나고 말 것이다.
기대되는 output을 달성하기 위해
요구되는 input을 따져보아야 한다.
input대비 output이 상회한다면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input대비 output이 2배수라면 짭짤하겠다.
input대비 output이 4배수라면 재미 좀 있을까?
input대비 output을 10배로도 만들 수 있을까?
이미 이긴 게임을 확인하는 과정으로서 일에 임해야 한다.

어떤 일이건 목표는 똑같다.
빨리, 많이, 잘하면 된다.
잘하는 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생략된다.
잘하지 못한다면 속도와 양을 따질 필요도 없이 무의미해진다.
빨리는 input을 줄이라는 뜻이고,
많이는 output을 늘리라는 뜻이다.
이 둘을 합쳐 Quantity라 부르고, 잘하는 것을 Quality라 한다.
잘한다는 전제 하에,
빨리, 많이 하면 된다.

성과가 유의미하고,
일은 무의미하지만,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일은 유의미하다.
성과를 높여야 하고,
일은 줄여야 하기에,
일을 줄이기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일을 줄이고,
성과를 내자.

— 덧붙임 —

인생철학 아니다.
게임공략 같은 것이다.

더듬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바이럴 영상의 죽음)

더듬이

더듬이 같은 게 있으면 좋겠다.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머리끄덩이를 잡아 붙여다가 소통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 송신속도도 높아지고 데이터 손실률도 줄어들 것이다. 또는 스타트렉의 벌컨족처럼 얼굴에 손가락을 갖다 대고 기억과 감정을 전달하는 방법도 괜찮겠다. 아쉽게도 난 그런 첨단 더듬이를 달고 태어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말과 글을 통해 소통한다.

언어란 게 다 뭔가? 내 머리통 안에 들어있는 정보를 타인의 머리통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거치는 과정이다. 여러 전달 수단 중 말과 글이 있는 것이다. 말을 많이 하면 입이 아프고, 글을 많이 쓰면 손가락이 아프다. 더듬이가 여러 측면에서 우월하다. 말이라는 게 얼마나 원시적이고 제한적인 소통 수단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은 것만으로도 부족함이 증명된 셈이다. 더듬이가 있었다면 이런 글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속이 터지지만 어쩔 수 없다. 차세대 첨단 더듬이가 테크크런치에 소개되고, 실리콘밸리 머니를 투자받은 후, 임상시험을 거치고, 시중에 유통되어 얼리어답터들의 피드백을 반영함으로, 3번째쯤 버전으로 고도화된 뒤, 중국에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가격안정권에 들어서야, 나 같은 천민도 구매할 수 있을 텐데 이번 생에 구경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말이나 글이라도 제대로 활용해야겠다.

언어의 다양함은 사고의 폭을 넓힌다. 반대로 언어의 제한적인 활용은 사고의 폭을 좁힌다. 감정의 폭도 좁힌다. 라고 믿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어휘의 단조로움은 미개함이다. 야만이다. 문명의 적이다. 인간 문명의 발달이 언어의 발달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가정했을 때, 문명의 방향은 어휘를 잘게 쪼개는 쪽으로 향한다.

아이는 꿀밤을 맞으며 말을 배운다. 한 아이가 옆집 아저씨를 “아빠”라 불러 엄마에게 꿀밤을 한 대 맞는다. 사람을 칭하는 단어가 ‘아빠’, ‘엄마’ 뿐인 줄로 알았던 탓이다. 그제야 집에 사는 남자는 ‘아빠’, 집 밖에 사는 남자는 ‘아저씨’라는 개념을 습득한다. 다음날 만난 한 고등학생을 “아저씨”로 불렀다가 한 대 더 맞는다. 집 밖에 사는 남자가 늙었으면 ‘아저씨’, 젊으면 ‘형’이라고 개념을 쪼갠다. 개념을 쪼개지 못하는 것은 신생아의 미숙함이다. 야만이다. 문명의 적이다.

 

바이럴 영상

영상제작 거래중개를 시작한 지 8개월이다. 제출되는 포트폴리오 대부분 제목 뒤에 ‘바이럴 영상’이라고 붙어 제출된다. 800개 중 300개가 자칭 바이럴 영상임을 주장한다. 이 어휘는 죽었다. 사용할수록 의미가 정의되긴커녕 모호해진다. 의미를 쪼개고 구체화하긴커녕 허상으로 포장된다.

바이럴 영상이라는 표현은 분별력을 잃었다. 이젠 거의 모든 것에 바이럴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배우가 출연하는 광고부터 모션그래픽 광고까지, 형식을 불문한다. B급 유머코드 광고부터 울음유발 공감 광고까지, 스타일을 불문한다. 판매촉진 비디오커머스부터 기업 브랜드 CF까지, 장르를 불문한다. 2억 규모 제작비에서 50만 원 싼마이까지, 너도나도 바이럴을 갖다 붙이기 바쁘다.

바이럴 영상의 본래 정의는 ‘소비자에 의해 자발적으로 확산되는 영상’이다. 자발적 확산을 이루지 못했다면 바이럴 영상이 아니다. 이 표현은 결과를 나타내는 용도보다 미래 지향적인 용도로 더욱 자주 사용된다. “자발적인 확산을 목표로 하는 영상을 만들고 싶다”가 너무 길기 때문에 줄여 말한다. 이런 의도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되지 않는다. 목적 달성에 실패한 영상까지도 바이럴 영상으로 불릴 때 문제는 발생한다.

자칭 바이럴 영상이라 주장하는 영상 100개 중에서 실제로 바이럴 성과가 있었던 것은 1개밖에 되지 않는다. 실제가 워너비에 파묻혔다. 1개의 실제 바이럴 영상을 바이럴 영상이라 부르면 나머지 99개의 영상과 동급으로 여겨진다. 실제 바이럴 영상을 칭할 방도가 사라졌다. 타인의 성공을 빌어 입고 자신을 포장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끝내 한 단어를 죽이고 말았다. 이기적이었던 그 사람들을 찾아내서 꿀밤을 때리고 싶다. 정의(定義)의 꿀밤으로 어휘의 세분화를 거치도록 강제하고 싶다.

개념 정의 기능이 부족한 어휘는 성장을 멈추고 소멸하는 게 보통이다. 또는 다른 표현으로 대체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미 죽을 때를 한참 넘긴 어휘가 왜 아직도 펄펄 날뛰는지 나는 이해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방대한 개념의 어휘 때문에 곤혹스럽다. 미스케이션이 난무한다. 의사 소통 단계가 늘어난다. 업체 검증 기간이 길어진다. 제작 회의는 난항을 겪는다. 실컷 만들었더니 이건 아니랜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댄다.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기가 막힌 작품을 기대하라더니 웬 엉뚱한 걸 만들어 놨댄다. 프로젝트는 파멸로 향하고 각자 민사소송을 준비한다. 그 지경을 겪고도 어째서인지 언어습관은 바뀌지 않는다.

떠들기만 하는 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캤다. 영상산업의 언어 정화를 위해 발을 벗는다. 적어도 내가 만든 플랫폼 안에서는 모호한 어휘의 남용을 허용치 않는다. ‘바이럴 영상’을 적폐로 공표하고 척결에 나선다. 300개에 육박하는 자칭 바이럴 영상의 제목을 일일이 수정한다. ‘웹 CF’, ‘소셜미디어 최적화 영상’, ‘병맛나는 연출’, ‘공감유도영상’으로 더욱 세분된 명칭을 부여한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값진 야근을 했다. 사회적인 약속을 파기하는 언어 습관을 일부라도 정제시켰다. 첨단 더듬이가 없는 이상, 이게 나의 최선이다.

 

명확한 커뮤니케이션에 집착이
지나칠 정도로 까탈스러운 원칙주의자가 운영하는
영상제작 거래중개 서비스
비드폴리오

영상제작 거래중개서비스를 창업한 8개월의 기록

비드폴리오를 시작한 이유와 접근방법을 기록하기 위해 쓴다.

영상제작 거래중개에 궁극적으로 최적화되며 이상적인 방법을 찾을 수 있을까? 앞서 6개 이상의 사업체가 실패했다. 나라고 몇 달만에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몇 년은 걸릴까? 현실적인 계획을 세워보자.

시장에 맞는 중개 방식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시장에 뛰어드는 것이다. 누구보다 깊게 바닥까지. 탐험의 깊이에 따라 성공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2년 정도. 큰 투자 없이 시작할 수 있다. 앞서 진행된 시도들처럼 탐험 후 빈손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탐험 중 끼니라도 챙기면 도전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되며, 보상은 그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

2017년 8월 17일 첫 장사가 시작됐고, 10월 1일 사업자를 냈다. 지금까지 8개월이 지났다. 잠시 발을 들여본 결과, 앞서 출발했던 선발대의 탐험지역은 해안가의 일부에 불과했단 걸 깨달았다. 나는 진득하게 눌러앉는 데에는 자신이 있다. 지구상에서 누구보다 영상제작 거래과정을 깊이있게 들여다 보는 사람이 될 것이다. 잘 되면 스타트업이 되어 버티컬 중개 플랫폼으로 성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되지 못하더라도 에이전시 형태로 입에 풀칠을 할 것이다.

중개가 가능한 거래의 조건을 따져보자. 일정 규모 이상의 거래가 발생하는 시장이어야 한다. 인력시장과 부동산시장은 중개자가 직업으로 인정받는 대표적 시장이다. 인력 중개는 건당 규모가 작지만 양적으로 많은 처리가 가능하고, 부동산 중개는 한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에 오랜 기간과 노력이 소요되지만 건당 규모가 크다. 영상제작 분야는 중개자가 존재할 수 있는 거래규모 조건은 우선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유통단계는 최소화되어야 하고, 미들맨은 없어져야 한다고들 말한다. 역사적으로 그래왔고 앞으로는 중개자가 더욱 필요없어질 것이라 한다. 정말일까? 지나치게 일반화된 이야기인 것 같다. 먼 미래도 모르겠고, 당분간만 내다보더라도 특정 산업에서는 미들맨을 통핸 거래가 더욱 필요해질 것이다. 산업의 복잡도는 계속해서 증가하게 될 것이니까. 산업의 복잡도가 증가할수록 중개자는 필요해진다. 그리고 물론 중개자가 필요하다는 것과 중개사업의 전망이 밝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소비자는 거래를 확정하기까지 두 단계를 거친다. ‘정보 수집’ 단계와 ‘정보 검토’단계다. 인력시장과 부동산시장은 각 시장에서 활약하는 역할의 종류가 다르다. 인력시장의 중개자는 정보 수집을, 부동산시장의 중개자는 정보 검토를 더 중점적으로 제공한다. 수집단계는 기술의 발전과 네트워크의 발달로 인해 효율이 증대될 수 있다. 하지만 검토 단계는 효율과 속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중개자를 필요로 하는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정보의 수집이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소비자가 매 거래를 발생시킬 때마다 정보를 수집하지만, 이를 재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중개자가 이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 유지, 관리해서 재사용하는 것만으로 산업 전체적인 효율을 높일 수 있다.

중개자는 정보수집 및 정보검토를 대신 수행해 도와준 대가를 직접 받기 어렵다. 정보의 질이 압도적으로 괜찮다하더라도 수단에 그친다. 궁극적으로 소비자는 공급자를 만나는 미션을 달성하면 되는 것이지, 공급자를 만나는 과정에 비용을 지불할 의사는 없다.

정보 검토 단계가 사업의 핵심이 된다면 확장성에 문제가 생긴다. 정보처리기술을 활용하거나 기계적 알고리즘을 통해 일련의 연산시스템으로 서비스를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게 쉽게 만들어낼 수 있는 서비스라면 고객의 만족도 또한 높지 않을 것이다. 전문가가 일일이 상담해주는 것도 고객 만족을 높여줄 수는 있겠지만 확장성에서 문제가 생긴다. 고객의 서비스 만족도를 충족하자니 확장성을 포기해야 하고, 확장성을 지향하자니 고객 서비스의 퀄리티를 다소 포기해야 한다. 상반되는 명제의 적정선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상반되는 두 명제를 충족시킬 방안을 찾아야 한다.

아무래도 공급자의 풀이 더 넓은 곳에서 적합한 공급자를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 하지만 경쟁 플랫폼의 갯수는 계속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지속적인 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렵다. 유사 플랫폼과 비교해서 공급자의 양이 압도적이지 않다면 정보 수집 단계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히가 힘들다.

정보는 적어도 문제고, 많아도 문제다. 적으면 수집의 문제, 많으면 검토의 문제가 생긴다. 이상적인 것은 많은 정보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많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검토하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이 든다. 필요한 것은 기준이다.

숙박업계 중개 플랫폼은 이미 포화되어 경쟁이 치열해진 나머지, 선두권 업체들은 상호 제휴를 맺어 공급자 공유를 한다. 동시에 후발주자의 플랫폼에 가입한다면 공급자 자격을 박탈시키겠다며 조항을 내건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방증이다. 정보의 검토가 중요하지 않은 공급자이거나, 혹은 소비자가 직접 정보 검토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이렇게 중개자에게 정보 수집의 역할만 요구한다. 배달업체정보서비스도 마찬가지다. 이런 정보서비스는 양적으로 많은 정보를 처리가능하지만 정보검토의 역할을 위임받지 못하기때문에, 광고 모델을 수익사업으로 채택한다.

영상제작 거래중개 서비스의 필요성과 어려운 점이 모두 여기서 발생한다. 영상제작은 업체 정보만 있다고 해서 이뤄지지 못한다. 정보의 수집도 고역이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정보의 검토과정과 기준이 없는 것이다. 많은 잔소리꾼들이 플랫폼인데 탈플랫폼 현상에 대해서 왜 그렇게 방임하고 있냐는 얘기를 하지만, 정보 검토에 대한 요청이 있는 이상, 고객이 이탈할 이유는 없다.

시장의 필요는 너무 당연하다. 중개자는 거래량을 창출할 수도 없고, 거래금액을 조정할 수도 없다. 소비자의 필요는 받아들여야 하는 현상 그 자체인 것이다. 중개자가 해야하는 일은 운영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문제는 시장이 아닌 나에게 있다. 처리가능 중개량의 최대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시장에서 허용하는 중개수수료의 크기는 갈수록 낮아진다. 중개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제법 똑똑해지고 업무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허용 수수료 하락속도를 중개자의 업무효율성이 따라잡아야 한다. 따라 잡았다면 역할이 창출될 것이다. 따라잡지 못했다면 자연히 소멸할 것이다.

“가벼운 거래는 가볍게, 무거운 거래는 무겁게” 앞으로의 중개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저관여 중개를 하게 되더라도, 우선은 극고관여 중개를 진행해야 한다. 탐사하는 모험가의 실제 하루는 종일 엑셀을 돌리느라 충혈된 눈이다. 모든 과정을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올바른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없다. 결론은 나의 주관, 영감, 창의성이 내리는 것이 아니다. 방대한 경험의 양과 집요한 조사를 통해 나올 것이다. 이렇게 귀찮고 지루한 과정을 통해 도달된 결론은 결과적으로 ‘통찰’이라는 짧은 단어로 축약될 것이다.

고관여 중개를 하며 제작사를 찾고 선택하는 과정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새로운 방법도 착안해내었다. 지금까지 전형 과정을 7가지 만들어냈다. 기존 사업체가 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사업을 실패한 이유는 중개자의 필요성을 인정받을 만큼 일을 효율적으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전에 효과적으로 해내지도 못한 사업체가 대부분이다. 앞서 실패한 사업체들은 어땠는가? 7가지 전형 과정 중 1가지 아이디어에 심취되어 모든 것을 내던졌고, 효율성을 내지 못하고 사업은 성장을 멈췄다. 효과적으로 커버리지를 넓혀내 증명하기보다는 작은 시장의 필요에 집착하고 공급자와 수수료 비율로 싸움을 벌였다. 그들이 해법이라 믿고 선택했던 아이디어는 현재 내가 사용하는 7가지 방식 중에서 가장 산업에 적합하지 않은 방식이다.

이제껏 영상제작 거래중개를 시도한 곳은 독점 플랫폼 통제 전략을 취했다. 그 누구도 정보를 독점할 수 없다. 10년 전에 이미 유행이 지나버린 모델이다.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해야겠다는 목표는 추구하지 않고, 불필요한 단계를 추가로 거치라고만 근거없이 주장하니 거래가 일어나지 못한다.

요란한 기술을 사용하지 않는다. 정보는 결국 간단한 것이니까. 정보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처리과정을 다듬어낼 수 있어야 한다. 웹기술은 포기한다. 회원가입과 로그인기능을 만들만한 기술조차 없지만, 그것들이 있다 하더라도 이용자들에게는 결국 새로보는 환경일 뿐이다. 빠르게 새로운 전형방식을 개발해내고 적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든 소비자 인터페이스마저 생략된 구조로 일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비드폴리오라는 프로젝트가 매력적인 이유는 정보의 순환과 배움의 크기에 있다. 프로젝트의 최종적인 성공을 떠나, 그 과정에서 수많은 회사와 마케팅 담당자를 접하는 기회를 얻는 것만으로 즐겁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는 포지션이라 어깨가 우쭐해진다. 발주 과정을 배우는 것도 값지다. 결국 협업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다. 내부 팀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외부 협력자와의 커뮤니케이션도 모두 중요하다. 발주도우미를 한다는 것은 앞서 다가올 협력의 시대에 필요한 경쟁력을 학습할 좋은 환경이 된다.

 

 

트래픽의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들

나는 매체를 운영했다. 하루에 2만 명씩 들어왔다. 서버 전송 트래픽은 일 50기가에 달했다. 팬 수는 쌓여 7만 명의 팔로워가 생겼다. TAT지수도 아주 높았고 좋/댓/공의 비율도 타 채널과 비교해 아주 높게 유지됐다. 핵심 독자 층이 어느 매체보다도 높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확보한 이 트래픽의 값어치가 대단히 가치있는 것인 줄 알았다. 트래픽 장사치였던 나는 그렇게 믿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을 속였다.

트래픽 측정 단위를 이해하지 못한 탓이다. 각각의 전환에 대한 값어치를 계산해보자. 일반적인 계산법이 없으니, 나의 지난 3년 경험을 토대로 상대 비교 공식을 마련해본다.

 

PV (Page View)

PV는 가장 낮은 트래픽 측정 단위이다. 한 페이지가 보여졌다는 조회 기록이다. 어떤 이는 2분 동안 정독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페이지에 들어오자마자 3초만에 나갔을 수도 있다. 또 해킹 로봇에 의해 공격 당해 증가하기도 한다.

1PV

좋아요 / ♡ / 공감

콘텐츠를 단순히 보고 지나치는 게 아니라, 한 번의 클릭을 통해 자신의 감정반응을 남긴다. 10PV가 발생하면 그 중 1/10의 사람이 피드백을 남긴다. 10PV는 1좋아요와 맞먹는다.

10PV = 1좋아요

댓글 / 공유

댓글과 공유는 단순한 클릭 피드백보다 높은 단위이다. 텍스트를 입력해야 하고, 공유시 소개할 멘트를 새로 생각해야 한다. 피드백을 남기기 위해 더 큰 수고와 시간을 요한다. 10좋아요는 1댓글 혹은 1공유와 맞먹는다.

100PV = 10좋아요 = 1댓글(공유)

도달

Social Network Service는 네트워크 서비스다. 이름대로 연결을 촉진시키는 것이 그들의 임무다. 그들이 연결을 많이 발생시키기 위해 쓰는 전략으로 트래픽을 쪼개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PV보다도 낮은 단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미리보기 콘텐츠를 만들어 냄으로 콘텐츠의 목차를 만들어낸다. 세분화된 프리뷰 콘텐츠를 묶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빠르게 다수의 콘텐츠를 검토할 수 있도록 사용자 환경을 제공한다. 페이스북의 ‘도달’이 대표적이다. 자발적으로 퍼져나가는 아웃링크 콘텐츠는 도달>PV 전환비가 5:1 수준이지만, 광고 콘텐츠의 경우 100:1이하의 전환이 일어나기도 한다. 평준화하기에는 너무 폭이 크지만, 트래픽 계산이 필요한 경우가 대부분 광고이기 때문에 조금 후하게 쳐서 10도달이 1PV와 맞먹는다 하겠다.

1,000도달 = 100PV = 10좋아요 = 1댓글(공유)

메시지

매체 운영자 혹은 콘텐츠 게시자에게 직접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은 댓글 혹은 공유보다 높은 트래픽 단위이다. 댓글에 친구를 소환하거나 시덥잖은 농담을 남기는 것보다 적극적인 피드백이기 때문이다. 상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면 메시지의 비중이 아주 높을 것이다. 나는 콘텐츠 배포가 주요 활동인 매체를 운영했기 때문에 메시지로의 전환은 낮은 편이었다. 나의 경험에 따르면 100개의 댓글이 달리면 1개의 메시지가 왔다.

100,000도달 = 10,000PV = 1,000좋아요 = 100댓글(공유) = 1메시지

메일 / 전화문의

메일을 받았다면 메시지를 받는 것보다 10배 기쁜 일이다. 메시지는 SNS에서 연결을 늘리기 위해 마련해둔 여러 장치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증폭된 트래픽이기 때문이다. 페이지 관리자의 메시지 응답률 및 평균 응답시간을 노출시킴으로 메시지가 활성화되길 넛지 유도한다. 메일을 보낸다는 것은 이런 인위적인 공작활동과 상관없이 진정 연락하고 싶은 강한 의지가 있어서 연락하는 것이다. 메시지는 ‘하이, 헬로, 저기요’라고 구어체로 말을 해도 되지만, 메일은 자기소개와 함께 비즈니스 매너를 갖춰 맥락에 맞춰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역시 요구되는 시간과 노력 측면에서도 차이 난다. 전화문의는 메일과 거의 동일한 무게를 가진다. 나는 메시지 10개를 받으면 메일은 1통 정도 받았다.

1,000,000도달 = 100,000PV = 10,000좋아요 = 1,000댓글(공유) = 10메시지 = 1메일(전화)

대면 미팅

나는 매체를 운영함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도달되었다. 동시에 온갖 세상 뜨내기들과 연결되었다. 댓글도 보고, 메시지도 주고 받고, 메일도 주고 받고, 전화 통화도 온 종일 하는데, 실제로 쓸모있는 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는 점이 의아했다. 직접 대면미팅으로 이어질 정도로 강한 관계는 없이, 상대가 별 생각 없이 엄지손가락으로 10초 만에 남긴 피드백에 내가 10분씩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 억울했다. 각 트래픽 마다 무게가 다르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서 서로의 손을 쥐며 인사하고, 커피를 서로 사겠다며 다투는 정도의 인연은 10통의 메일 혹은 전화를 받으면 1회 발생했다.

10,000,000도달 = 1,000,000PV = 100,000좋아요 = 10,000댓글(공유) = 100메시지 = 10메일(전화) = 1미팅

 

따라서, 내가 당신을 만나 커피를 한 잔 마신다는 것, 그 관계는 페이스북에서 1천만 명에게 도달하고, 10만 명에게 따봉을 받는 것과 같은 무게를 가진다.

이 외에도 술자리를 갖는 관계의 무게 X10, 메말라빠진 디지털 시대에 쓰여진 아날로그 감성 손편지의 무게 X10,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는 관계의 무게 X10로 측정해보려고 했으나 무리수인 것 같아 그냥 관둔다.

 

난 3년간 매체를 운영했고, 3달 전부터는 거래 중개일을 하고 있다. 다시금 확인한다.

10만 개의 페이스북 좋아요 보다 10만원 짜리 거래 한 건이 훨씬 중요하다.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일까? 물질적 풍요는 충족되지 못했을 때 추구하는 것이다. 사회적 관계 또한 결여되어 있을 경우 좇게 되는 것이다. 예술적 창조성은 내면에서 분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양한 경험은 배움을 갈망하는 자가 원하는 것이다. 욕구가 없는 내 인생은 갈 곳을 잃었다.

욕구가 없는 내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 욕망의 대상을 가지는 것이다. 2. 역할을 통해 의무와 책임에 구속되는 것이다. 3. 내면의 창조성을 일깨우는 것이다. 4. 가장 순수한 내 모습을 찾는 것이다.

직업이란 종종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단순히 여겨지고 있지만, 어쩌면 이 네 가지, 순수한 욕구를 일깨우는 일이다.

나는 나의 진실된 모습을 발견할수록 나의 추악함에 실망하고 경명감을 느낀다. 인간은 아름답지 않으며, 나는 그 인간들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한, 어울리고 싶어 하지 않은 별종인 셈이다. 인간적이지 않으며 더 우월하다고 착각하지만 전혀 그렇지도 않은, 그저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먹고, 보고, 반응하는 기계로서의 인간에 그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지만 그 이상의 존재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도망쳤다. 기계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 도망쳤고, 생존의 위협에서 도망쳤다. 월세 30만 원짜리 지하방에서 도망쳤고, 싫은 놈들로부터 도망쳤다. 싸움과 분쟁이 있으면 도망쳤으나 내가 간 곳에 평화와 이상이 있는 곳 또한 아니었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달린 적도 있었으나, 이내 달성하고 지루해져 탈출하고자 안달이 난다.

기계단계에 그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다. 기계로서의 인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기계 내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켰다. 기계적 인간 단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더욱 정교하게 기계화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복잡해진다 한들 일련의 자극-반응 과정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천천히 우연적으로 일어나던 반응이 더욱 빠르고 실수없이 일어나는 쪽으로 인간이 향해가고 있다면, 아마 우리의 미래는 우리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지능일 것이다.

그렇다고 경이로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기계적으로 계산된 쾌락 알고리즘이 나에게도 장착되어 있으므로,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거나, 미녀를 마주하거나, 동물을 만지거나, 새로운 풍광을 보고, 음악을 듣고, 스토리를 듣는다. 특정한 감정을 활성화하는 자극들은 도처에 널려있기 때문에 손만 뻗으면 언제나 취할 수 있다.

미션 달성을 통한 만족감, 성취감은 그보다 더욱 크다. 나는 사회적 관계에서 이런 성취를 느끼지도 않고, 창작물을 통해서 느끼지도 못한다. 두 목표는 내가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나의 욕구가 향할 곳을 찾지 못했다는 혼란스러움을 고백한 바에 따르면, 나는 성취를 통한 쾌락도 충족이 어려운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쉽고 빠르게 성취를 느낄 수 있는 인스턴트 성취를 좇는다. 게임이다. 미션이 주어지고, 단시간에 몰입 가능하며, 내 노력에 의해 결과가 결정되고, 성취를 통해 합당한 보상이 주어진다. 정신적 쾌락이 엄청나다.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것이 쾌락이 아니라, 어떤 숭고한 가치는 있을까? 과연 있을까? 이렇게 염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에게도 그런 가치가 있을까?

 

— 덧붙임 (21.02.24) —

이놈의 허무주의가 또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네. 이 에너지를 추구와 탐구를 향하게 해야 한다. 이놈에게 잠식당해선 안 된다.

기업의 입장에서 본 ‘브랜드 저널리즘’

  • 정보 전달 방식의 시대적 변화

정보전달 매체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 정보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던 시대에는 정보 중개를 전문으로 담당하는 언론사가 정보 유통의 관계를 독점했다. 기술적인 진입장벽도 높았고, 비용도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편이 사회 전체적으로도 효율적인 정보를 공유 방법이었다. 언론사를 중심으로 일련의 정보 유통 규약과 문법이 생겨났다.

시대는 바뀌어 모든 사람이 웹이라는 완전 개방 정보생태계에 접속될 수 있게 되었고, 인터넷을 손에 쥐고 다니게 되자 정보와 정보소비자가 직접 연결되었다. 이런 환경의 변화로 인해 기존의 규약과 문법은 파괴되고 있다. 매체는 간소화되었고, 특정 분야별로 버티컬화가 진행된다. 정보는 파편화되어 독자 입장에서 다시 재배열되는 정보 맥락의 변화 또한 생긴다.

 

  • 기업 입장에서 브랜드 저널리즘이란

기업은 여러 타겟에게 기업의 활동을 알림으로 관계를 맺고자 한다. 그 타겟으로는 고객, 잠재고객, 사업파트너, 내부 직원, 경쟁사 등 다양하다. 각각의 타겟과 관계를 맺기 위해 기업은 마케팅 부서와 홍보 부서를 운영했다. 두 부서의 업무는 약간 다르지만 외부의 정보 플랫폼, 광고 솔루션을 빌려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던 기업의 메시지 전달을 내재화할 수 있게 되었다.

미디어 환경이 다변화되고 복잡해지자 이를 트리플 미디어 전략으로 묶어내고 있다. 기존의 광고 홍보 방식을 페이드 미디어(Paid Media), 자체적으로 미디어를 운영하는 것을 온드미디어(Owned Media), 사회관계망을 겨냥한 독자 중심의 콘텐츠 전략을 언드 미디어(Earned Media)로 분류한다. 타깃에 접근할 방안은 갈수록 다양해지므로, 성격이 비슷한 것들 것 묶어 분류하는 것으로 거시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전략을 통일시킬 수 있다.

기업의 브랜드 저널리즘은 트리플 미디어 전략 중에서 온드 미디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자체적으로 미디어 브랜드를 구축해 정보를 직접 소싱, 제작, 발행하는 것은 여러 장점이 있다. 빠르게 실행하고 대응할 수 있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손실이 적다. 맥락 통제권을 직접 가질 수 있다. 원하는 타겟을 직접 설정하고 겨냥할 수 있다. 독자의 문법에 최적화된 콘텐츠를 직접 기획할 수 있다. 피드백을 직접 받고 관리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장점을 찾을 수 있겠다.

 

  • 브랜드 저널리스트가 갖춰야 하는 태도

브랜드 저널리스트는 바깥으로는 독자를 바라보되 귀는 안으로 기울여야 한다. 정보 생산은 소싱, 제작, 유통의 과정이 거치기 때문이다. 좋은 정보는 올바른 소싱으로부터 나온다. 미디어의 체계와 발행 전략이 수립되고 나면 콘텐츠는 소싱에서 8할이 결정된다. 좋은 콘텐츠는 좋은 소싱에서 비롯된다.

브랜드 저널리스트는 내부인이면서 외부인의 관점을 가져야 한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유는 전달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이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메시지를 전달받는 독자의 입장이 되어 객관적으로 기업을 바라볼 수 있는 롤플레잉 시뮬레이션을 반복해야 한다. 좋은 브랜드 저널리스트라면 구축한 브랜드와 콘텐츠가 외부의 시선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저널리즘에 대한 이해와 정의는 각각 달라지고 있지만, 넓게 ‘전파에 대한 책임’이라고 포괄할 수 있다. 정보 중개자라면 응당 가져야 할 자세다. 기업이 미디어를 직접 운영하더라도 기존의 언론사가 추구하던 저널리즘의 정신은 지켜질 필요가 있다. 언론이 사회와 가지는 관계의 성과는 영향력으로 측정되지만, 이 또한 신뢰가 구축되지 않고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다. 브랜드 저널리즘 또한 신뢰 구축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미디어 운영과 기사 작성 과정에서 객관성, 독립성, 투명성을 지향해야 한다.

내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진다는 것

성인이 된 직후, 난 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다. 내 몸속에 그와 관련된 것이 있다면 다 끄집어내려고 했다. 그도 모자라 주변 사람들의 믿음마저 틀렸다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나는 무신론자라는 타이틀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신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의 무신無神이긴 하지만, 신이 있건 말건 무신 상관이냐는 무신無信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여 반신反神론자나 불신不信론자로 불러 달라 했다.

그리곤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논리를 챙겨 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종교를 가진다는 것이 세계관을 선택하는 것인 줄로 알았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나는 당연히 과학의 편에 서야 한다고 믿었다. 과학은 세상의 거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만, 종교의 관점으로는 모순되는 부분이 너무 많다는 게 나의 근거였다.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다르니, 종교인과의 세상 이해 방법에 대한 논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된 적이 없다. 나도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 외엔 별 목적도 없었다. 내뱉은 이야기가 서로의 고막까진 닿았을까? 주워들었던 논증을 더듬거리며 끄집어낼 뿐이었다.

 

난 오래 지나지 않아 반신론자가 아닌 불가지론不可知論자가 되기로 했다. 겸손해졌다기보다는 허무함이 들어서였다. 말할 수 있는 것들은 말을 함으로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은 말할 수 없기에 침묵해야 했다. 세상의 방대함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 하찮은 존재였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하찮은 나 따위가 감히 판단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내가 가졌던 믿음에 대해서도 의심해보았다. 아구가 좀 잘 맞아 떨어졌을 뿐이지, 과학 또한 상당 부분 가설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인지하고 있는 세상은 제한적임에도, 그마저도 불확실한 감각기관에 의존해 읽어 들이고 있었다. 세계관에 대한 고집은 자연스럽게 꺾였다.

난 검증되지 않은 것을 추종했고 맹신해왔다. 종교를 극복한 게 아니었다. 과학과 이성을 그 대상으로 택해 종교 삼은 것이었다. 타인을 비방하는 데 바빴던 나는 정작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삶에 대한 성찰이나 감사함이 결여되어 있었기에 내가 비방하던 이들보다 나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생긴 신념의 공백 상태는 다행히도 금세 다시 채워졌다. 먼저 살다간 분들이 샘플 삼을만한 신념을 책에 많이 남겨둔 덕이다. 적극적으로 복제하기도 하고 나의 그릇에 담기지 않는 신념은 다시 내뱉기도 하면서. 그리고 깨달았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가 아니라, 내가 세상을 살아갈 태도라는 것을.

 

핸들을 잡지 않은 인생은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하다. 결국 내가 잡아야 할 핸들이지만, 가끔 겁이 난다. 핸들을 잡으면 피곤해도 졸 수 없고, 신경 써야 하는 게 어찌 그리 많은지. 주행 경험도 없을뿐더러, 사고가 났을 때의 책임을 생각하면 사는 게 너무 버겁다.

신념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주변에서 보이는 대로 아무거나 주워 담기도 한다. 내가 과학을 기반으로 한 atheist의 논리를 주워 담았던 것처럼. 비단 종교뿐만 아니라 부모, 선배, 친구, 소속된 사회에 제 핸들을 떠넘긴다.

나약해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누군가가 내 인생의 핸들을 잡아주길 바라는 것. 나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는 것. 책임을 떠넘기면 당장은 홀가분하지만 이내 손해 보는 장사라는 것을 깨닫는다. 책임과 권한은 언제나 쌍으로 붙어 다니기에 권한도 함께 넘어간 탓이다.

이는 결과적으로는 내 삶의 통제권을 타인에게 이양하는 셈이다. 이렇게 먹고 살기 힘든 치열한 시대에, 핸들을 선뜻 잡아주겠다고 나타난 사람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독재자의 야욕, 자본의 탐식, 절제 없는 욕망 따위의 것들이 아니고서야 타인의 핸들에 관심 가질리 없다. 한 번 타인에게 넘긴 핸들은 다시 되찾아오기가 어렵다. 권한도 책임도 없는 평안한 상태에 너무 익숙해진 것이다.

나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삶의 통제권과 책임을 모두 내가 쥐게 된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하고 겁도 났다. 이제는 내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건 사고를 고용주의 탓으로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역시나 무겁다. 그런데 묘하게 안정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