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람회는 165년간 거의 바뀌지 않았다.

세계 최초의 박람회는 1851년 영국에서 개최되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해 프랑스 파리에서는 세계 최초의 백화점 몽마르쉐가 개점한다. 같은 시기에 인간의 욕망은 규격화되고 체계화되었다. 산업 내에서 거래를 활성화시킬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인 형태를 찾은 이 두 가지 포맷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로부터 165년이 지났다. 산업박람회가 위기란다. 이는 미디어의 위기와 같은 종류의 것이다. 굳이 전시행사에 오지 않더라도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대체재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정보가 부족해서도 아니고, 전시 콘텐츠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오히려 많아서 생긴 문제다.

전시회도 하나의 플랫폼이다. 정보가 연결되지 않던 시대에 정보를 압축적이고 집중적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이점을 가졌다. 모든 정보가 연결된 시대에는 그 역할이 바뀔 수 밖에. 정보를 체계화시켜 탐색의 기회비용을 줄여줌으로 값어치가 생겼던 게 박람회인데, 지금과 같은 시대에 고민없이 부스 수백개 때려박고 수금하는 박람회는 더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산업의 관성에 의해 몇 년간 더 현상유지하더라도 한순간에 전환점을 맞을 것이다.

전시회는 더욱이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한계도 가진다. 이런 한계점은 다른 플레이어들에 의해 개선되어 새로운 형태의 플랫폼으로 분과될 것이다. 공급자 중심적인 접근법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런 단점을 극복하거나 보완할 것이 아니라 더욱 물리적이고 제한적인 시간에만 체험할 수 있는 콘텐츠에 집중해야 한다.

콘텐츠의 형식을 바꾸는 게 어찌 혁신이란 말인가?

미디어 혁신이랍시고 소개되는 사례들이 죄다 이런 식이다. 미디움에서는 7분짜리 글이 가장 많이 본다더라, 카드뉴스가 트래픽이 높다더라. 이번엔 동영상이 대세라더라. 이제껏 안 다루던 주제를 다뤘다더라. 페북에서 따봉을 쓸어담는다더라. 유튜브에서 조회수 찍고 돈 벌었다더라…. 표면적인 수치에 혈안이 되어 플랫폼의 알고리즘 변화에 우르르 몰려다닌다.

콘텐츠 형식을 바꾸는 것은 마치 초콜릿을 만드는 것과 같다. 초콜릿은 작은 블록으로 쪼개어 먹는다. 한 조각만 먹어도 행복함을 느끼며, 단기간 포만감을 준다. 지금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정보가 그렇다. 잘게 쪼개져 있고, 각각의 조각들이 극도의 단맛과 포만감을 준다.

초콜릿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온라인에서는 분노, 유머, 경이로운 콘텐츠가 압도적인 시선 장악을 이끈다. 이런 소재를 플랫폼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재편집해서 발행하면 흥행은 보장되어 있다. 기술적으로 어려울 게 없어서 진입장벽이 낮아 플레이어는 더 늘어난다. 이제껏 인류가 새로운 매체를 발견할 때마다 해왔던 매체 최적화 과정일 뿐이다. 중요한 건 이 흥행의 값어치다.

사람의 눈알 개수는 그대로인데, 정보의 개수는 수백 배 늘어난 것 같다. 인류의 정보 소비효율이 급속도로 늘었단 말인가?  한 사람이 소비하는 콘텐츠의 양이 수백 배까지 늘어났단 뜻일까? 그럴 리 없다. 콘텐츠를 작은 단위로 쪼개서 유통하고 있어서 많아 보일 뿐이지, 전체 소비 텍스트의 양, 시간은 늘어나지 않았다. 미터자로 재던 것을 센치미터자로 재고 있을 뿐이다.

탄수화물을 섭취하기 어려웠던 인간은 단맛을 좋아하는 DNA를 몸속에 심어 놓았다. 생존에 도움이 되던 이 DNA가 풍요로운 현대에서는 비만과 성인병이라는 부작용을 유발한다. 인간의 행복 추구도 과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호르몬을 외부에서 투입시키면 중독이 심각하고 건강에도 나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마약으로 구분해 금지시킨다.

정보도 마찬가지다. 초콜릿 콘텐츠를 독자들이 좋아한다고 마구 퍼주는 게 올바른 일일까? 이런 무책임한 태도를 ‘독자 최우선’이라고 포장해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만큼 사회에 나쁜 영향도 없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곧 권력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오해이자 오만이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전파의 책임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여, 그 책임의 무게를 잊지 말자.

미디어는 인간 감각기관의 확장이라 했다. 인간의 세상을 인지하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고, 기술적인 제약사항도 많으니 이를 미디어를 통해 확장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유행하는 초콜릿 콘텐츠들은 인간 감각기관의 확장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다. 미디어들의 겉치레 혁신이 인류를 오히려 퇴보로 이끌고 있다.

언론사의 먹고 사는 문제

언론사의 사업부와 편집부는 수익사업의 정당성을 두고 종종 싸운다. 한 조직이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인데, 그 돈으로 월급 받는 기자들에겐 왜 비난받을까? 저널리즘 추구와 수익사업은 언론사라는 조직 안에서 공존할 수 없는 가치여서일까?

저널리즘이 정신이라면 언론사는 기업형태의 육신에 해당한다. 여느 기업처럼 언론사는 수익창출과 성장을 목표로 하기에 저널리즘의 목표를 저해하고, 저널리즘은 기업의 형태를 빌려야만 존재할 수 있기에 비난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타협점을 찾으려는 모순적인 태도를 보인다.

한 언론인은 이 상충하는 두 가치를 모두 잡기 위해 ‘적절한 수준의 타락’이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어떤 타락들이 있는지, 어느 정도가 허용 가능한 수준인지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 언론 상품 1 – 콘텐츠 제작능력을 판매

올봄, 한국일보에서 기업을 대상으로 카드뉴스를 제작해주겠다는 제안서가 유출되어 논란이 일었다. 제작과정, 비용, 발행의 성과까지 꼼꼼하게 적힌 제안서를 보니 언론사가 아닌 마케팅 대행사에서 만들어진 느낌까지 들었다. (관련 내용)

언론사 사이에서 이 사건으로 인해 비난과 사과가 오갔다. 이내 윤리적인 선을 넘었는지 말았는지에 대한 논쟁으로 커졌다. 사실 언론사들의 비난 뒤에 숨겨진 속뜻은 “이런 상품을 염치없게 공식화시키면 어떡하냐”일지도 모른다.

언론사가 비용을 받고 콘텐츠를 제작해주는 상품은 최근에 발명된 것이 아니다. 잡지 바닥에서는 이를 애드버토리얼이라 부르고, 온라인 언론사들은 네이티브애드라 부른다. 카드뉴스를 만들어준다는 제안 또한 새로운 채널에 형식을 최적화시켰을 뿐, 돈 받고 콘텐츠를 만들어준다는 개념에서 전혀 다르지 않다. 언론사가 보유하고 있는 핵심 인적 자원인 콘텐츠 제작능력을 판매하는 고전적인 대행 상품이다.

올해 초부터 언론사들은 자신들이 지향하는 저널리즘의 정의는 이제 독립성이 아닌 투명성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기업과 거래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투명하게 밝힐 것이니 나쁘게 보지 말아 달라는 뜻이다.

 

  • 언론 상품 2 – 공신력 판매

비슷한 시기에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홍보대행사의 영업 메일이었다. 돈을 내면 언론사에 기사를 내보낼 수 있다며 친절한 가격표도 첨부했다. 조선일보는 35만 원, 동아와 중앙은 30만 원. (보기)

현직 기자에게 보여주니 자신의 회사 이름을 찾아내곤 “우리는 그저 순진한 기자들이네”라며 낯부끄러워했다. 언론인 지망생에게 보여주니 “썩은 줄 알았지만, 이 정도로 썩은 줄은 몰랐다”며 언론고시 때려치우고 적당히 취업이나 하겠단다.

‘언론에 기사를 낸다’라는 표현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언론-홍보계에서는 이를 의도적으로 이용해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오프라인 매체라면 ‘기사를 낸다’는 곧 발행을 뜻했지만, 온라인에서는 발행과 게시는 별개 행위다. 게시 상태의 콘텐츠를 온라인에선 무제한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데, 온라인 게시판에 글 쓰는 것과 개념적으로 다른 게 전혀 없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구세대의 언론광고상품인 지면광고가 채널 영향력을 파는 것이었다면, 이 상품은 매체의 공신력을 파는 것이다. 게시판에 글을 하나 올린 뒤, URL을 광고주에게 보내주면 장사 끝난다. “OO일보가 우리를 알아 봐주고 기사를 다 써줬네~”라고 광고주가 능청스러운 연기를 할 수 있도록 뒷받침 자료를 제공하는 비공식적 사기행각이다.

온라인에서의 발행은 제휴 된 포털에 띄우거나 보유 SNS에 포스팅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또는 자체 웹사이트의 메인화면이나 다른 기사를 보는 독자들에게 연관콘텐츠라며 간접 노출이라도 시켜줘야 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상품으로 판매한 기사는 어떤 발행의 노력도 제공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기사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돈을 받고 게시했지만, 발행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자사의 공신력을 돈과 바꿈으로써 생긴 양심의 가책을 덜기 위한 면책사유가 된다.

 

  • 언론 상품 3 – 브로커를 통한 음성적 거래

정상적인 방법으로 언론에 홍보하고자 하는 기업의 홍보담당자나 홍보회사도 있지만, 비공식적이고 음성적인 방법으로 언론사와의 연결을 중재하는 브로커도 있다.

어떤 브로커가 한 식당 사장님에게 3,000만 원을 받고 유명 일간지에 특집기사가 실리도록 작업했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한 브로커는 1,000만 원을 주면 주요 일간지 셋 중에 적어도 한 곳에는 1면에 나갈 수 있도록 해보겠다고 제안했다. 나가는 것을 100% 보장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노력해보겠으니 나의 실력을 믿어달라고 말하는 투가 왠지 께름칙했다.

그 막대한 기사 발행 비용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짐작하건대 언론사의 공식수입으로 잡히진 않았을 것이다. 사측에서 이 사실을 알면 화들짝 놀라 그 기사를 작성한 기자와 발행을 허락한 편집장을 문책하고 징계할 것이다.

받아먹은 돈은 회사에 토해내라고 하고 싶겠지만, 그러면 윤리적으로 문제가 생긴다. 기업의 홍보비를, 브로커가 삥뜯어서, 편집장과 나눠 가진 것을, 다시 회사에서 삥뜬는 꼴이 아닌가? 그렇다고 받은 돈을 퍼뜩 돌려주라고 할 수도 없다. 언론사의 체면이 뭐가 되나? 이미 기사는 발행되어 채널 영향력과 공신력을 다 퍼줬는데, 돈까지 돌려주면 자진해서 호구로 전락하는 게 아닌가?

브로커를 통한 음성적 거래는 부정청탁관계로 콘텐츠를 발행한 것과 돈도 못 받고 핵심역량을 뺏겼다는 두 가지 측면에서도 문제가 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언론으로서 통제능력을 강도당했다는 점이다.

시대가 바뀌면 많은 것이 변한다. 콘텐츠형식, 유통채널, 사업전략, 업무방식이 변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언론사에 주어진 게이트키핑의 역할과 책임이다. 브로커에게 이용당한 언론사는 게이트키핑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했다.

브로커에게 이용당했다고 언론사가 피해자가 되는 게 아니다. 이 모든 일은 어떤 소식을 발행할지 말지를 통제해야 하는 게이트키퍼의 책임을 가진 언론사가 그 책임을 직무유기했기에 일어난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브로커가 아니라, 브로커가 판치도록 방조한 언론사들이란 말이다. 파리를 쫓을 게 아니라 개똥을 치워야 한다.

 

  • 음성적 거래의 양성화

기업과 언론이 맺고 있는 깊은 유착관계에 대해 나는 경험해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기업의 홍보팀에는 언론사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예산이 별도로 책정되어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국가가 나서서 이런 음성적인 거래를 제재하기 시작했다. 청탁금지법에 언론인이 대상으로 지정된 것은 밥값을 규제하는 게 아니라, 언론인으로서 지켜야 할 게이트키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는 것을 규제하겠다는 뜻이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이라 했으니, 언론이 이에 대해 도덕적으로 자각하는 수준은 이미 바닥까지 떨어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성 언론사의 수익사업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분들은 내가 미디어사업을 시작했다고 하자, 역사는 골프장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하나같이 음성적인 거래의 필요성을 충고한 것이다. 언론사가 지금까지 양성화된 수익사업인 후원이나 구독료로는 충분히 돈을 벌지 못했단다. 협박, 뒷거래, 명분팔이, 여론유도와 같은 음성적인 방법으로 수익을 내는 게 보통이었다고 그들은 충고했다.

음성적 거래를 해오던 습관은 결국 언론사의 미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고 있다. 생존을 위해 양성화된 수익사업을 확대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음성적인 거래를 양성화시키는 타락 과정에서 ‘적절한 수준’을 찾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일까?

윤리적인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다. 사업부를 속물취급하며 비판하던 편집부마저도, 기자는 밥 좀 얻어먹어도 되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모순되는 상황 같다.

언론사의 어떤 수익사업도 저널리즘-수익창출의 모순되는 상호대립가치 사이에서 겪어야 할 괴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게이트키핑의 책임까지 저버려선 안 될 것이다. 저널리즘은 곧 정신이고, 그 정신은 언론사라는 기업 형태의 육신에 담겨 존재한다. 하지만 기업의 생존만을 위해 게이트키핑의 책임까지 저버리게 되는 순간, 그 육신에는 올바른 정신을 담아둘 수 없을 것이다.

통제와 약속

“이거 하면 대박 날 것이다”, “저 아이템은 이제껏 없던 혁신이다” 따위의 이야기들에 진절머리가 난다. 사업은 도박이 아니기 때문에 한 번의 시도에 모든 것을 걸어선 안 된다. 성공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성장이라도 이뤄 내려면… 아니, 그보다 앞서, 최소한의 밥벌이라도 하려면, 실행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

오늘 할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통제가능성이 높아야 하고, 통제가능성을 높이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곱씹기 위함이다.

성과를 낼 수 있겠단 확신이 들면 통제가능성이 높다.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면 통제가능성이 낮다고 말할 수 있다. 성과를 내기 위해 시간, 자본, 인력, 지식, 인프라 따위를 쏟아 붓는데, 인풋 대비 아웃풋을 예측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통제가능성을 알지 못하면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 무작정 시작하더라도 제대로 끝내지 못한다.

첫 창업에서는 통제가능성이 높게 나오지 않는다. 처음 해보는 일 투성이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시간을 들여야 하는지, 어느 능력을 사용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태. 개발/생산/인사/전략/영업… 언제 어디서 사건사고가 터질지 모른다. 심지어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어떤 일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통제가능성이 낮기 때문에 성공확률도 낮다.

사람의 일자리를 로보트가 대체해나가고 있다. 인간보다 생산성이 뛰어난 이유도 있지만, 로보트는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전력이 공급되는 한 약속을 지킨다. 성능이 일정해 비용, 시간, 성과를 사칙연산만으로도 쉽게 도출해낼 수 있다. 마음 같아서는 모든 일을 로보트에게 맡기고 싶지만, 로보트가 맡을 수 없는 영역의 일이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예를 들어 로보트를 만드는 일?

나는 꽤 로보트처럼 일하고자 하는 타입이다. 내 역량과 속도, 체력을 파악하고 있으면 내가 맡은 일의 성과를 미리 계산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안정감이 든다. 내게 주어진 일은 내가 실력을 키운다면 통제가능성을 높여 완수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와 함께 일해야 한다면? ‘인성이 바르고, 적극적이며, 업계 경력을 보유하고, 특정 툴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의 인재상을 충족시킨 사람이라도 일은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사람은 약속을 종종 어기고, 아무래도 로보트보단 통제하기가 어려운 것 같다.

사람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을 더 치밀하게 세우는 것은 어떨까? ‘거짓말 안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가정환경이 화목했던 사람, 취미 특기가 요란하지 않은 사람’ 따위의 항목을 추가하는 것이다. 또는 동기부여가 중요하다고들 하니, 매일 아침 조례를 통해 희망의 연설을 하는 것은? 아쉽게도 이런 방법들이 먹히지 않는 걸 경험했고, 또 전해 들었다.

생각해보면 꽤 간단한 일이다. 사람을 통제할 순 없어도 사람과의 약속은 통제할 수 있다. 약속을 한 번 지킨 사람은 앞으로도 약속을 지킬 확률이 높고, 약속을 자주 어긴 사람은 앞으로도 약속을 자주 어길 것이다. 처음에는 신뢰가 낮기 때문에 주고받는 약속의 크기가 작지만, 약속을 지킨 횟수와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그 약속의 크기를 키워나갈 수 있다. 사회에서 어디 일방적인 약속이 있는가? 조금 더 기대했다가 더 받아 내고, 더 받았으니까 더 주고, 더 준 것에 비해 다시 더 큰 걸 받고… 약속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게 사장이 할 일인가 싶다.

나는 누군가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꽤 관대했던 편이다. 쓴소리하는 걸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약속을 어기는 사람과는 그 이상의 관계를 안 가지면 그만 아닌가?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약속 관계가 꽤 복잡하게 얽히다 보니, ‘그만 아닌가?’라는 이야기를 쉽게 할 수 없게 되었다. 누군가 나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음으로 인해, 내가 다른 이와 맺은 약속도 어겨지는 구조에 놓였다.

내가 약속을 지키는 것 뿐만 아니라 상대가 약속을 지키도록 만드는 것 또한 중요하다.

살고자 함, 하고자 함, 되고자 함.

살고자-함. 고작 살아 숨쉬는 것만이 목표인 존재는 어떤 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다. 암만 먹고 살기 힘들다지만, 어떻게든 밥을 먹고들 산다. 굶어 죽는 일은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상태를 인생의 지향점으로 삼는다. “뭐 해먹고 사나”를 입에 붙였다.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살고자-함이었다면 어떤 동기보다도 강한 에너지를 뿜을 것인데, 자신의 삶과 환경을 바꿀 수 없다고 믿는 낙담한 존재는 원초적인 생-의지를 표출하는 것에도 순수한 동기를 잃었다. 현대인의 살고자-함은 생존본능이 아니라 타협, 변명, 자기합리화에 가깝다.

하고자-함. 행위의 동기를 내재화시키면 수십 배 강한 존재로 거듭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하기 싫은 일을 배로 해야 하듯이, 나에게 주어지는 일은 완전히 자기목적적이지도, 완전히 외부기인적이지도 않다. 놀이의 연장선상에 놓인 행위. 일과 휴식의 구분은 필요치 않다. 노동이 곧 삶이다. 행위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의식을 망각하는 수준에 다다른다. 그 순간에는 자아를 의식하지 못하지만 행위를 성취한 이후에는 자아감이 더욱 충만해진다. 이를 반복하며 성취 중독을 이어간다. 이 상태를 경험해본 강한 존재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라는 진부한 이분법적 사고방식 따위에 마음을 흔들리지 않는다.

되고자-함. 되고자 하는 자는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하다….

 

라고 세 문단으로 글의 구조를 짰다. 마지막 문단의 내용을 채워 넣지 못한 채로 두 달이 지났다. 세 번째 문단의 주장이 내 생각과 틀려서는 아니다. 근거를 찾지 못한 탓이다.

“나는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라는 철학적으로 보이는 명제는 “커서 뭐 될래?”라는 유치한 질문의 다른 버전에 불과하다. 나는 청년기 이후로 이 질문을 주기적으로 던졌고, 아저씨가 된 32살의 나이에 이 글을 씀으로 한 번 더 시도했다.

나는 자신의 되고자-함을 찾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렇게나 살아지는 대로 살아놓고, 살아보지도 않은 인생까지도 한 데 묶어 정의 내리곤 했다. 되고자-함을 성급히 말하는 부류는 대체로 허튼소리만 늘어놓았다.

결국 내가 찾아야 할 답 아닌가. 나는 지난 6년 동안 꽤 열심히 무엇인가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은데, 존재에 대한 추구는 아니었나 보다. 사회생활 첫 2년은 팀원으로, 다음 2년은 팀장으로, 최근 2년은 회사대표가 되려고 아득바득한 것 같다.

나는 이번에도 성급히 답을 내리기보다는 보류를 택한다.

말에 대한 이야기

주관이 담긴 글의 첫 시작은 인용을 피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영향을 피한다는 것. 내 인생에서는 절대 불가능하겠지. 이 글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글이다. 마음이 허하기 보단 인생이 무의미하여 조금의 목적이라도 생길까 쓰는 그런 글. 좋은 글은 간결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담는다. 좋은 글에 평생 달하지 못하겠지만 (태어나길 그렇게 태어났으니), 그래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채로 아무렇게나 떠도는 것을 볼 수 없으니. 무엇을 부여할까 생각해본다. 가벼운 이야기가 좋겠다. 심오한 것은 사실 알고 보면 가장 실 없고, 별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말에 대한 이야기를 쓰자. 말이란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것 중 하나니까, 적절하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말하는 법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말 많은 사람들은 거의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어찌보면 가장 동정심이 드는 사람들 아닌가. 다양한 유형이 있을 수 있지. 첫째, 상황이나 상태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 둘째, 존재를 부각하거나 드러내야 하는 사람. 셋째, 지지와 칭찬, 애정 따위의 것들을 갈구하는 사람.

나는 마지막 유형의 인간을 가장 경멸하면서도, 내 존재가 그런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증오가 향하는 것 역시 내 자신의 가장 숨기고 싶은 치부, 그 치부가 그 사람의 모습으로 드러나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으면 답은 정해져 있다. 양육. 양육의 문제. 뻔하고 무책임한 이유지만 팔십의 인생이 십여년의 유아기로 결정된다는 데에는 살아갈수록 더 공감하게 된다. 미성숙한 단계, 다 자라지 못한 그 자리에 머물러서 끊임없이 지지와 애정을 바라는 존재.

상대의 눈을 딱 마주하고 팡하며 쏠 수 있는 자신감이 없는 사람들. 좋은걸 좋다, 필요한 것을 달라, 나는 이렇게 잘났다, 네가 싫다. 한 마디, 열 자 내외로 정리할 수 있는 게 마음이다. 좋으면서 싫다도 마찬가지. 복잡한 감정이라는게 대체 무엇인가, 다차원적인 인간이라는 게 존재하느냔 말이다. 말 많은 자들은 타인의 미움을 두려워하여 직격탄을 팡 날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무 의미 없는 이 글이 길어지는 이유도 그러하다. 매해 신년에 세우는 한 해 목표는 몇 년째 ‘관용(寬容)’이다. 네가 하는 이야기에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봉하고 서고 싶지만 사실은 네가 나다. 너와 너의 말을 관용한다는 것은 나와 나의 말을 관용한다는 것이다. 관용의 이유는 단순하다. 너를 밀어냄으로써 나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의 관용은 내가 너와 같은 미성숙의 단계에서 벗어나야 가능할 것임을 알고 있다.

 

— 덧붙임 —

이렇게 재밌는 글을 써놓고,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어 지워 버리겠단다. 그래서 내가 대신 올린다.

Game of D.Camp 1기 셰프뉴스의 지난 4.5개월 결산

셰프뉴스팀은 지난 연말을 기점으로 동면기에 접어들었다. 겨울 동안 광고주도 얼어붙고, 남은 자금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3명일 때 1달 반, 1명일 때 6달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에 조직 축소의 결정을 내렸다. 빚을 내면서까지 버티는 것은 원칙에 어긋났다.

GoD 1기에 붙었다. 동면해제.

합격해서 기쁘거나, 공간이 생겨 다행이라는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지원해주는 디캠프가 고맙고 미안해서라도 성과를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급해졌다.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좌불안석한 마음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물리적인 공간이 아무리 편하더라도 총 12팀 중 일부는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걸 직접 보게 되니까.

GoD에 붙기 전에는 스스로를 스타트업이라 생각지 않았다. 기술기반도 아니고, 혁신적이지도 않으며, 지금의 비즈니스모델로는 투자 대상도 아니었다. 디캠프에 들어오면서 스타트업이라 할만한 회사, 투자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핏을 맞춰보려고 했다. 독립사무실을 쓰면서 먹고사니즘 고민만 하던 때보다 생각의 속도가 다섯 배는 빨랐던 것 같다.

12페이지 피칭덱 형식에 맞춰 비전과 비즈니스를 우겨 넣는다. 잠재 파트너에게 업데이트를 보내고 진부한 답변을 받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캐내고, 투자유치 경험담을 찾아 듣는다. 오피스아워에 다섯 번 신청했다가 네 번 거절당한다. 발표 스크립트를 수십 가지 버전으로 만들어본다.

이 과정에서 좌절하거나 상처를 입는다고들 한다. 투자를 받으려면 모든 리소스를 올인하고, 아니라면 아예 사업에만 집중하라는 조언들이 많았다. 투자자에게 심사대상이 되기 위해 노력한 이 경험이 나에겐 정말 의미있었다. 너무나 당연히 생각해야 할 부분들을 많이 빠트리고 있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투자자가 사업이 되고 안되고를 판단하는 기준들은 정말 합리적이라는 생각이다.

그 기준들 앞에서 완벽한 팀은 많지 않다. 우리 팀을 포함해 세 팀은 개발자가 내부에 없었다. 개발력은 뛰어난 데 아이템을 한 달에 한 번씩 바꾼 팀도 있었다. 문제점 인식은 명확한데 비즈니스 모델이 완성되지 않은 팀도 있었다. 현금이 부족한 팀도 있을 것이고, 오픈했는데 사용자 확보가 예상보다 느린 팀도 있었을 것이다. 매출은 나는데 운영 비용이 이익보다 큰 팀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게 다 좋은데 시장이 작은 팀도 있을 것이다.

너무 흔하고 뻔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초기기업의 어려움이다. 그런데 그게 다 내 얘기인 줄 몰랐다. “난 지금 뭘 해야 하지?”, “앞으로 중장기적으로 뭘 해야 하지?”, “우리 회사의 정체성은 뭐지?”와 같은 1인칭적 사고만 했다.

지난 4.5개월 동안 좁았던 사고의 틀이 깨진 것 같다. 혼신의 힘을 다해 박치기 하는 식의 태도에서 벗어나 이성을 좀 찾은 느낌이다.

20160628_174903_HDR

DSC03187

20160628_173908_HDR

사업의 정체성 찾기

기술기반도 아니고, 혁신적이지도 않았으며, 비즈니스 모델도 명확하지 않아 좋은 투자대상도 아니었다. 따라서 스스로를 스타트업이라 하지 않았다.

산업에 대해 잘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발을 들이려 미디어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창업한 지 만 2년이 다 되어간다. 이 쯤되니, 스타트업이고 말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나는 도대체 뭐 하는 놈일까? 라는 궁금증이 든다. 그래서 기록을 남겨보자면;

 

2014년 06월 온라인 큐레이션 매거진 & 페이스북 페이지
2014년 07월 식품산업의 MICE 활동을 온라인화
2014년 09월 셰프를 소재로 하는 버티컬 미디어 – 셰프에 관한 뉴스, 셰프가 보는 뉴스
2014년 12월 F&B 관련 업체들이 함께 쓰는 코워킹 스페이스
2015년 01월 미식 콘텐츠 기업 – 식품기업 홍보 & 마케팅 대행
2015년 03월 요리사에게 가장 신뢰받는 온라인 미디어
2015년 05월 주방근무자를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
2016년 02월 News & Jobs 모델로 F&B의 산업인력을 위한 구인구직 서비스
2016년 04월 레스토랑의 수발주 시스템 – 외식산업의 B2B 시장 47조 중 음식점납품은 27조
2016년 06월 ….

 

이렇게 많은 일을 벌이고, 조사하고 그림 그리기를 반복한다. F&B 산업은 테크황무지라는 것은 명확한데, 내가 어떤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 수 있겠단 확신이 없으니까 계속 헤매는 것이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 기술을 내재화해야 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2000년도에 쓴 <소유의 종말>에서 이미 온디맨드를 정의하고 있다.

접속 중심 구도에서 기업의 성공은 시장에서 그때그때 팔아 치우는 물건의 양보다는 고객과 장기적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점점 좌우된다. 상품과 서비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데 유념해야 한다. 산업 시대에는 소비자에게 상품을 팔면서 무료 애프터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거꾸로 되고 있다. 요즘은 후속 서비스를 통해 고객과 장기적 관계를 맺겠다는 계산으로 상품을 아예 공짜로 제공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소비자의 의식도 소유에서 접속으로 서서히 기울 것이다. 값싼 내구재는 여전히 시장에서 거래되겠지만 가전 제품이라든지 자동차나 집 같은 고가품은 공급자에 의해 소비자에게 단기 대여, 임대, 회원제 같은 다양한 서비스 계약의 형태로 제공될 것이다.

앞으로 25년 정도만 지나면 소유에는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고 구태의연하다는 인식이 기업과 소비자 사이에서 일반화될 것이다. 소유는 모든 것이 휙휙 바뀌는 풍토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느려터진 생각이다. 사람들은 물적 자산이나 재산을 일정 기간 이상 보유하는 것이 이롭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소유를 한다. <가진다>, <보유한다>, <축적한다>는 생각은 그 동안 금과옥조로 떠받들어졌다. 하지만 과학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경제 활동이 어지러울 만큼 빠르게 진행되는 세상에서 소유에 집착하는 것은 곧 자멸하는 길이다. 주문 생산이 일반화되고 끊임없는 혁신과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지며 제품의 수명이 점점 단축되는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퇴물이 된다. 변화하지 않는 것이라고는 변화 밖에 없는 세상에서, 소유하고 보유하고 축적하는 태도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간다.

접속의 시대를 지배하는 경영학적 전제는 시장의 시대를 지배하던 전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새로운 세계에서 시장은 네트워크에게 자리를 내주고 판매자와 구매자는 공급자와 사용자로 바뀐다. 사실상 모든 것이 접속된다.

완전히 성숙한 시장 경제에서도 아직 상업성은 주기적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판매자와 구매자는 잠깐 만나서 상품과 서비스의 인도 조건을 협의하지만 그 다음에는 각자의 길을 걷는다. 나머지 시장은 시장과 상업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문화적 시간-상품화되지 않은 시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접속 관계에 치우친 하이퍼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우리의 시간이 거의 모두 상품화된다. 가령 소비자가 자동차를 살 때 그가 자동차 판매상과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런데 똑 같은 자동차를 임대의 형태로 빌릴 경우 사용자와 공급자의 관계는 지속되며 계약 기간 동안에는 중단되지 않는다. 공급자는 소비자와의 <상품화된 관계>를 선호한다. 얼마든지 갱신할 수 있고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영속적인 교분을 맺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임대, 가입, 등록, 수임료 등을 통해 이런저런 형식으로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모든 시간은 영리적 시간이 되어버린다. 문화적 시간은 기울고 인류는 영리적 고리를 통해서만 문명을 지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탈근대 사회의 위기이다.

셰프뉴스가 생각하는 미디어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함께 작업한 해외 미디어 동향 보고서가 나왔다. 셰프뉴스는 한 페이지 가량 소개되었다. 이메일로 문의왔던 당시 답변했던 내용을 이 곳에 기록으로 남긴다.

보고서 다운받기(169MB) : http://www.kpf.or.kr/downloadfile.jsp?num=6369&board_data_id=7824

 

정보전달발전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이전 세대의 기술은 매정하게도 세상에서 잊혀졌습니다. 봉화, 전령, 목판인쇄, 타공프린터, 모스부호, 흑백 TV, 모뎀 등 모두 잊혀졌습니다. 인류는 정보전달 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키고 있고, 불과 몇 년 전에 사용하던 전달기술들이 새로운 기술들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적인 환경 속에서 언론사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콘텐츠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반대의 의견을 내겠습니다. 기존 언론사들이 콘텐츠를 못 만들어서 위기가 왔나요?아닙니다. 지금의 위기는 전적으로 시대적인 현상이며, 언론사 외부의 환경적인 문제입니다. 내부에서는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콘텐츠가 아닌 역할입니다.

이전 세대까지 언론사가 하고 있던 역할은 수많은 대체재에 의해 대체되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남길 것이며, 다른 서비스에 의해 대체되어버린 분야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언론사들이 각자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시점일수록 업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현대적인 ‘언론사’의 범위를 넘어, 더 큰 범위를 아우를 수 있는 미디어의 본령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찾은 답은 결국 ‘중간자’, ‘매개자’, ‘연결자’, ‘전달자’입니다. 여전히 연결이 필요한 곳은 많이 있고, 새로운 기술로 그 연결을 더욱 효과적으로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4년 7월 셰프뉴스를 창업하기 전까지 IT스타트업 미디어 비석세스에서 3년 가까이 근무했습니다. 없던 IT산업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고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활성화되기 위해서 산업미디어가 필요하다. 산업미디어는 정보를 전달하고, 사람들의 연결을 도모한다.”라는 산업미디어의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이 맥락에서 외식산업은 미디어가 가장 필요한 산업입니다. 테크황무지에 가깝지요. IT기술을 아는 사람은 외식 산업을 이해하지 못해 매번 실패하고, 외식 산업에 속해있던 사람들은 기술을 이해하지 못해 실패합니다.

이 산업에는 총 25종 가량의 오프라인 매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온라인으로 넘어오려는 시도를 안 한 게 아닙니다. 매번 실패했고, 지금도 여러 시도들이 실패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도 많이 있겠지만 공급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외식 산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F&B(Food & Beverage)두 개로 구분하거나, HoReCa(Hotel & Restaurant & Café)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공급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소비자 중심적인 관점에서 매체를 기획하면 산업 종사자를 독자로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측정 가능한 외식업 종사자가 3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주방 근무자는 140만 명입니다. 이들이 볼만한 매체가 있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기존 언론은 “셰프에 관한 뉴스”만들 생각은 하지만, “셰프가 보는 뉴스”를 만들 생각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몇 년간 ‘버티컬 미디어’라는 어휘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소재를 버티컬하게 접근하면 보기엔 그럴싸한 미디어가 만들어지겠지만 역할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독자를 버티컬하게 설정하면 그들이 역할을 알려줄 것입니다. 구인구직서비스도 독자분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셰프뉴스가 지금까지 매체 영향력을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잘해서라기보다 독자의 특이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리사라는 독자는 다소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14시간씩 창문도 없는 주방에서 육체노동을 하지요. 잠시 담배를 피러 나와 휴대폰을 보는 게 유일한 세상과의 소통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취미, 특기, 진로가 모두 요리인 삼위일체형 직군입니다. 인생에 요리밖에 없다고 합니다. 다른 매체가 독자들과 가지는 약한 연결고리에 비교하면 훨씬 큰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는 두 가지로 구분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콘텐츠 생산자(Media as Contents Creator)이며, 또 다른 하나는 채널(Media as Channel)입니다. 콘텐츠를 돈 주고 사보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있으므로 미디어 운영의 목적은 채널을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콘텐츠는 목적이 아닌 철저한 수단이 됩니다.

채널로서의 미디어도 전환(transition)을 일으키지 못하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전환도 안 일어나는 채널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콘텐츠 생산부서는 애물단지 지출부서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셰프잡스에서 수익이 발생하기 전까지 셰프뉴스는 애물단지 지출부서에 해당하므로 1.2명의 최소 리소스만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중입니다. 셰프뉴스로부터 전환을 일으켜 셰프잡스에서 수익이 발생하면 셰프뉴스의 미디어 운영 비용을 충분히 회수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입니다. 셰프뉴스의 독자와 셰프잡스의 고객이 같으므로 전환 효율이 아주 높을 것으로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