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부자가 되기 위한 조건을 정리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야망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경제적인 성공을 이루는 것과 공통점이 많기 때문에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꽤 도움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경제의 구조, 경제의 구성원과 관계, 거래의 기술, 협상의 범위, 가치, 신용 따위의 항목들을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했다. 더 잘 정리된 책이나 자료들은 많이 있지만, 책장에 꽂힌 지식과 소화시킨 지식은 다르기 때문에 어설프더라도 정리하는 것은 도움될 일이다. 이 작업을 통해 경제적인 성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을 따져보았다.
내가 지금 하고있는 서비스 중개업으론 부자가 되기 어렵겠단 계산이 나왔다. 애초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익을 크게 발생시키는 욕심을 내진 않았다. 사업을 통해 경험자산과 지식자산을 관리하는 순환고리를 만들어내는 데에 집중했고, 어느 정도 달성했다. 지금 이 사업으로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선 확장성을 높이거나 사업의 통제불가능요인을 제거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딱히 찾아내지 못했다. 또는 그게 가능하더라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으로 보였다.
부자가 될 수 있는 최소한의 충족요건에 맞아 떨어지는 아이템을 난 이미 갖고 있었다. 라자냐다. 라자냐는 피자와 치킨을 대체시킬 수 있는 배달음식이 될 수 있다. 비싼 양식의 메뉴를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할 방안을 찾아낸다면 지금은 없는 시장을 만들어 고객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등학생 때 땄던 한식조리기능사자격증으로 군대에서 2년 동안 취사병을 했고, 그 기간에 양식조리기능사를 땄고, 호주에 나갔을 때도 주방에서 일하다 온 뒤, 셰프뉴스라는 매체를 3년간 운영하며 국내 외식업계에 있는 사람도 많이 만나고 외식사업에 대해 머리로는 배운 상태이기 때문에 라자냐를 사업화하려는 시도로는 크게 결격사유는 없는 것 같다. 창업도 두 번 했더니 대충 사업이란 무엇인지 감을 잡은 상태라 구상이 빠르게 진척되었다. 최근 나의 일상은 아주 늘어지고 마음이 향하는 프로젝트가 없어서 한동안 방황하고 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온 종일 하나의 프로젝트만 생각하는 완벽한 몰입의 상태에 접어들 수 있었다. 3년만이다.
시장조사를 해보니, 이웃집 라자냐라는 식당 한 곳이 같은 전략으로 라자냐를 9,900원에 팔고 있었다. 처음엔 8,900원에 팔기 시작했던 것 같다. 와우라자냐라는 곳은 6,900원에 파는데 너무 품질이 떨어져 패스트푸드의 대체음식으로 포지셔닝되었다. 두 곳 모두 확장성은 아직 생각하지 못하고 일단 작은 업장을 운영하는 것에 그치거나 배달 및 단체주문을 통해 업장외 수익을 내고 있었다.
내가 라자냐가 확장성이 있다고 생각한 데에는 생산 프로세스에서 효율을 높일 방안이 있기 때문이다. [재료준비/라구소스끓이기/라자냐조립/라자냐굽기/라자냐포션/배식] 총 6단계로 나뉘는 생산공정은 세부액션까지 계산하더라도 29단계밖에 되지 않는다. [라자냐포션/배식]은 생산량에 비례해서 단계가 늘어나지만 그 앞 단계들은 생산량이 늘어나도 양만 늘리면 되기 때문에 단계가 늘어나지 않는다. 라자냐 한 판을 구우면 12개가 나온다. 라자냐 하나를 만들어도 29액션, 12개를 만들어도 29액션이다. 24개를 만들면 31액션, 48개를 만들면 33액션, 120개를 만들면 49액션이다. 물론 실제 노동량은 이렇게 극단적이지 않겠지만, 공정의 개선으로 생산성을 높일 지점은 분명 있는 아이템이다.
공정의 개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확장이 가능하다. 한 개의 업장을 통해 벌어들일 수 있는 한계수익은 어떤 아이템이든 얼마나 잘되든 기대수익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월 천만 원 이상 벌진 못할 것이다. 확장을 해야 하는데 그게 직영방식이든 가맹방식이든 확장을 하려면 공정 개선과 공정 통제가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가맹사업도 포화시장이기 때문에 본사 측에서 웬만한 생산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채로 브랜드만 빌려주는 가맹사업은 존속이 어려울 것이다.
생산 프로세스의 효율을 높인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제거와 통합의 의도로 접근한다. quantity이다.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은 효율을 우선적으로 따지지 않는다. Quality다. 이 둘은 대립적이다. 어중간하게 중간에 타협점을 찾으려면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 가성비로 싸게 팔려면 quantity로 접근해야 하고, 비싼 값에 높은 고객만족도를 얻으려면 quality로 팔아야 한다. 결국 내가 정할 일이 아니고, 고객의 수요가 있는 지점을 공략해야 하지만.
8,900원짜리 라자냐로 연매출 3억을 올리고 1억의 이익을 남기려면 개당 마진 5,000원으로 하루에 300개를 팔아야 한다.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루에 300개는 하나의 업장에서도 달성하기 어려운 상태이긴 하지만, 라자냐를 통해 부자가 된다는 것은 이보다 더 많은 라자냐가 자동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도록 하되 내가 라자냐의 공급라인을 확실히 가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대략 하루에 3,000개의 라자냐가 어떤 방식으로 팔리는 상태를 라자냐로 부자가 된, 라자냐 왕의 상태라고 설정해보자.
라자냐를 통해 부자가 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출발은 여러 방식으로 시작할 수도 있다. 프로젝트의 출발점과 목적지를 구분해보자면 목적지는 하나, 출발지는 여럿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임대주방에서 배달로만 시작하는 방법도 있고, 동네 골목에서 1차상권 사람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며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또는 59쌀피자나 피자스쿨이 폐업한 업장을 인수받아 (조리설비를 거의 그대로 쓸 수 있으니) 시작하는 방법도 있다.
어떤 방식으로 출발하든 거쳐야 하는 중간 목표들이 있다.
하나의 업장에서 300개를 판매하는 것 > 직영이든 가맹이든 판매 접점을 5배로 늘리는 것 > 생산공정의 중앙화를 이루는 것이다.
여전히 풀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저가의 라자냐 판매점들은 조리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고객의 불만족을 떠나 회전률의 한계가 발생한다. 라자냐의 조리는 슬로우푸드지만 배식은 패스트푸드처럼 빨라야 한다. 배식의 효율성을 높일 방안을 찾아내지 못하면 판매접점 확장은 이루지 못할 것이다.
생산공정의 중앙화는 반조리상태로 판매점에 납품되는 것을 말하는데, 고객입장에서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양식이란 해외의 르꼬르동 같은 어려운 이름의 조리대학교를 나온 젊은 사람이 점잖게 내어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조리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 하물며 패스트푸드도 각 매장마다 직접 조리가 이뤄지는데.
생산공정 / 포지셔닝 / 마일스톤 / 수익화계획도 대충은 산출할 수 있었다. 이정도 사업성을 따지는 데에 불과 2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업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어 아무도 칭찬하지 않았음에도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라자냐를 통해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질문은 “할 수 있냐, 없냐”가 아니다. “할 거냐, 말 거냐”
내 마음이 답을 해야 한다. 라자냐 왕이 된다는 것은 이런 이성적인 계산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라자냐 왕이 되기까지의 5년의 기간동안 나는 라자냐에 미쳐야 할 것이다. 초기 창업의 2년 동안은 육체 노동에 시달려 하루에 5시간 이상 못 잘 것이다. 이후 3년은 내가 해보지 못한 사업적 확장과 경영적 도전들로 인해 난관을 겪을 것이다. 그것을 할 것인가. 결정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러니 라자냐로 부자가 된다는 것은 라자냐 왕이 될 것인지에 대한 각오가 있어야 한다. 라자냐 왕이 되는 것을 인생과업으로 여긴다면 앞선 마일스톤을 달성하는 것과 요구되는 자원, 맞이하게 될 난관 모두 극복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의 극복의지가 나에겐 있을까? 없다. 지금의 사업도 매진하지 않고 지난 6개월 동안은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하면 다 한다. 그리고 해내는 것이 일이기 때문에 해내지 못하면 일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얼만큼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는지도 어느정도 알고 있다. 할 수 있냐 없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장대한 장대한 여정을 하기로 결정할 것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성공한 부자는 자신의 일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니 아이템도, 사업성계산도, 단계구상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누구도 인생을 두 번 살 수 없고, 두 배로 살 수도 없다. 그 분야에 전력을 다할 것인가. 이것이 가장 중요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사업구상의 진도를 이틀 동안 빠르게 진척시킨 것만으로 충분하다. 라자냐 왕의 꿈은 이렇게 접었지만, 너무나 통쾌하고 시원하다. “너 그럼 식당차려라”라는 얘길 자주 들었다. 그럴 때마다 “식당일은 나이 50먹고 할 거 없을 때나 해야지”라고 답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틀린 답변이었다. 50먹고 식당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 본업에 집중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