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발전할수록 사물은 본질에 가까워진다.

내가 디지털영상을 배우는 학교엔 암실이 하나 있다. 흑백사진을 인화하는 곳이다.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필름 소비량은 줄어만 가는데 사진과에서도 배우지 않는 암실수업이 영상전공 학과에 떡하니 있다. 사진과에서 고지식한 교수 하나가 넘어왔는데 영상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니 머라도 가르친다고 가르쳤던 게 검은 방에서 약품냄새 풀풀 풍겨가며 사진 현상하는 수업이었다.

DSLR 카메라의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암실수업은 필요한가? 난 필요 없다고 말해보겠다. 내가 필요 없다고 말하면 우리 교수님께선 화가 머리끝까지 뻗치실 게 눈에 선하다. “사진이 발전해온 역사를 배우지 않고선 사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거나 “정성들여 사진을 한 장씩 인화해 본 사람만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디지털편집이 보급화 되면서 방송국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테이프 두 개를 동시에 기계 안에 넣고 복사를 했던 ‘리니어 편집’방식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컴퓨터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넌-리니어 편집’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에 비하면 너무 고생을 덜 한다는 이유였다. 고생을 하지 않는 편집, 하루에 담배 두 갑을 태우지 않는 편집은 편집자의 참 모습이 아니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기술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은 아마 ‘오리지널’과 ‘본질’의 차이점을 오해하는데서 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리지널’은 그야말로 시간상에서 앞서 존재했던 것들을 말하지만, ‘본질’은 그 사물의 존재의 목적에 더 가까운 것이다. 위의 사람들은 두 개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나는 이 고지식한 아저씨들을 보면서 원시인들보다도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구석기인들은 신석기, 청동기, 철기 시대를 차례대로 맞으면서 기술의 발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돌도끼를 쓰던 중, 청동도끼가 나오니 돌도끼를 버리고 쇠도끼가 나오니 청동도끼를 버렸다. ‘Orignal’이라는 단어에는 ‘기원이 되는’ 이나 ‘최초의’ 라는 좋은 뜻도 담겨 있으나 동시에 ‘구식의’라는 뜻도 함께 담겨있다.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새 기술에 대해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함께한 구식에 정을 떼질 못한다. 이유는 사실 기술이 너무 급속도로 발전하다 보니 자신들은 그 기술을 따라갈 자신이 없는 거다. 나이가 어린것들이 순식간에 배워버리는 그 기술이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정체는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상대적인 퇴보를 겪게 되니 난감하여 헛소리가 저도 모르게 세어 나오는 것이다.

청동기인들은 새로 나온 쇠도끼를 보고 ‘이것이야 말로 도끼의 진정한 완성형’이라는 생각을 했다. 돌도끼는 도끼의 오리지널이긴 했지만, ‘날카롭고’, ‘단단하고’, ‘사용하기 편한’ 도끼의 본질에는 전혀 거리가 있었던 작품이었던 것이다.

필름 사진기가 사진의 역사에서 오리지널이긴 하겠지만, ‘선명하고’, ‘사용이 편하고’, ‘셔터스피드가 빠르고’, ‘색감이 좋고’ 등의 사진이 지향하는 목적까지 발전하기엔 한계가 있는 기계라는 것이다.

기계뿐만이 아니다. 파피루스나 대나무 또는 천 쪼가리 위에 글을 썼던 옛날에 비하면 오늘날의 책이 ‘기록을 남기기 위한’ 책의 의도나 목적에 가깝다.

성냥보다는 라이터가, 소보다는 트랙터가, 연필보다는 샤프가, 짚신보다는 나이키가,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이, 삽보다는 포크레인이, 디스켓보다는 CD나 USB가, 편지보다는 e-mail이, 브라운관보다는 LED가 제 목적을 잘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술이 인간의 삶의 방향을 결정지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다. 너무나 명백하게 역사적으로 남겨진 사실들이다. 인간이 필요로 하는 기술들은 발전되었고 인간에게 유용하지 않은 기술은 개발되지도 않았다. 기술이 인간을 자유롭게 했고, 자유로운 인간은 더욱 기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까지도 인간과 기술은 뗄 레야 뗄 수가 없다.

한참을 글을 쓰다 보니 나는 얼핏 기술 예찬론자처럼 보인다. 기술의 장점만을 떠들어댔다. 하지만 기술도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위에 나열한 것들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구식의 것을 도태되게 만든 최신기술의 선두주자’ 쯤이 될 수 있다. 오늘날의 기술들이 가지는 한 가지 더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효율’이다.

효율이 대량생산체제를 만들어서 실업자를 무지막지하게 쏟아냈다. 효율이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도록 하였고 일부 인간은 비인간적인 계산기로 만들고 일부의 인간들은 낙오자로 만들어냈다. 효율성을 지향하는 기업이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살리기 위해 사람을 버린다. 자본주의의 폐해는 인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효율에서 나온 것이며, 효율은 기술이 지향하며 달려가는 종착역이다.

인간의 손을 통해서 실현되지만, 전혀 인간을 고려하지 않는 기술은 인간의 친구인가? 적인가? 기술이 앞으로도 계속 효율을 따지며 자가발전 할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부정해야 할 미래가 아니라 인정해야 할 암흑시대의 임박이다.

글을 쓰는 중에 글의 의도가 많이 바뀌어 이도 저도 아닌 글이 되었다. 시간도 늦었고 어딜 손봐야 될지도 모르겠다. 글은 이만 줄인다.

애초의 의도는 ‘기술은 발전하는 만큼 교육자는 퇴보한다.’는 의도였다.

몇일 전에 썼던 글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예술도 발전한다.’ 와 대칭되는 글이다.

20100614 새벽

자본주의사회에서 교육이 담당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참 희한합니다. 대학교를 보고 이렇게 비판했다고 하죠. [우리나라 대학들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대학교 졸업생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려 하니 뭣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기구가 원래 학문을 닦기 위한 장소이지 기업을 위해서 노동자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거든요.”

그렇다. 우리나라 대학은 취업준비생들이 먹고 살 준비를 하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취업알선센터가 되어버린 사실이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하다는 증거이다. 누구도 오늘 날 대학이 하는 그 역할이 이상하다 여기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의 그러한 기능에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교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원래 교육이라는 게 부분적으로 그 기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학생들을 이데올로기로 조종해서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게 교육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죠.”

교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안했고 학교에서 성적이 나쁜 학생이었다 해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세 개는 배웠을 것입니다.”

교수님은 손가락 세 개를 앞으로 펴 보이며 하나씩 세며 외쳤다.

“권력에 복종하는 법”
“높은 사람에게 굽신거리는 법”
“세상에 존재하는 이치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법”

그러면서 예를 몇 개 들었다.

“아니, 초등학교를 가기 이전에도 유치원에서부터 우리는 먼저 사회질서를 따르는 법부터 배웁니다. 줄서기. 그리고 선생님한테 경례하기”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참 웃긴 건, 학교하고 가정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을 보이기도 합니다.

학교에 가면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집에 오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수업이 끝날 때쯤 나온 이야기였기에, 몇몇 졸고 있던 학생들도 어느새 눈을 번쩍 뜨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학생들 모두 자신이 받았던 교육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과 함께 탄성을 자아냈다.

틀린 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교육의 불가피한 의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교육이 그 일을 담당하지 않으면 좌파 빨갱이라는 소릴 듣고 선생님이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체 인구의 60%에 달하는 임금노동자를 생성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하는 사업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바치고 생계수당을 받아내는 일꾼이 될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법이나 예술을 즐기는 법 따위를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시키는 대로 일만 해낼 수 있는 말귀를 알아듣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초등학교의 ‘바른생활’ 교과서부터 중학교의 ‘도덕’ 교과서 고등학교의 ‘윤리’ 교과서 모두 학생들을 그런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고등학교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배우지 않고 윤리만은 배우는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다. 이번 교육과정에서는 국사가 선택과목이 되어버린 데다 뉴라이트가 교과서를 새로 편찬하는데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뒤집어 버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교육이라는 행위는 정권에 따라 학생들을 조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임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12년의 이데올로기, 거기에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변질되어버린 4년의 대학교육, 거기에 나라의 종이 되기 위한 2년간의 군대교육까지.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여 감사해했던 18년의 그 교육이 나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너무나 괘씸하고 분하다! 특정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모두가 그것이 옳은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따라왔던 길이기에 나 또한 자격이 없다.

하지만 내가 받은 교육에 그렇게 나쁜 면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한 교육이 있었기에 오늘날 4대강 사업을 추진시킬 무뇌한 노가다꾼들이 있을 수 있고, 전쟁나면 총알 받을 예비군들이 있으며, 선거기간에 몇 마디 말로 소중한 표를 받아낼 수 있는 5년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명맛의 국민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않는가.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국가가 존립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젊은이들을 자본주의 국가의 일원으로 열심히 일을 시켜야 국익을 추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속도에 힘을 실을 수 있기 때문에 하찮은 인간노동력들에게 인권이나 여가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어지로울수록 시민들을 다루기가 쉽고, 그들의 밥줄을 끊어서 생명이 위태위태할 때야 말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임금의 뜻을 따르게 된다.

대한민국 청년들이여, 대한민국의 젊은 혈기들이여, 그리고 내 친구들아! 그러니 모든 것을 포기해라. 깨우치지 말아라! 눈을 감고 귀를 닫아라. 그저 남을 위해 일하고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우리는 더 많이 알아봤자 불행해지는 임금노동자이니라. 계속해서 토익공부를 하며 이력서에 한줄 더 그어 넣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