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learn에 걸린 2년

내려 놓았다.

도통 무엇을 해야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수 개월이 아니라 년 단위를 넘어섰다. 출근해서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데도 개선의 진척이 없으니 나는 방향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출근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자전거를 탔다. 동네에서 자전거를 제일 잘 타는 놈이 되었다. 출근자덕보다 무직자덕이 아무렴 잘 타야 했다. 일의 성과는 내지 못했지만 운동으로 만들어낸 성과를 확인하며 자존감을 지켜냈다.

다른 회사에 출근도 해봤다. 지식도 능력도 요령도 많은 나같은 일꾼이 일하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국가적으로 산업경쟁력에 손실이 발생하는 낭비이기도 하고 새로운 환경에서의 내 모습도 관찰해볼 겸 회사도 다녀봤다.

기세를 몰아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기로 했다. 모든 역할을 직원에게 위임했다. 출근하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모든 책임을 내려 놓는다고 명문화해 사인까지 하고나니, 완전한 자유인이다. 평소라면 전혀 만날 일이 없던 호화궁상을 만나보고 철학공부를 유튜브로 2달 내내 하기도 했다.

그렇게 바깥으로 돌았다. 갇혀버린 상태에서 벗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고 알차게 보냈다. 장장 2년의 기간이었다. 열심히 노력했던 시간만큼이나 모든 것을 내려 놓아본 시간 또한 지금의 내가 만들어지기에는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사람도 떠났다.

부친상을 당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여읜 후의 감상을 공유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덧붙였다. 사람들은 으레하듯이 나에게 상실을 위로했지만 나는 요상한 해방감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공유하고자 했던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되었다. 부친상은 조부모상과 분명 달랐다. 나는 비로소 내 삶을 긍정하게 되었다. 좋으나 싫으나 내 존재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미친 모든 것을 긍정하게 되었다. 트라우도 흑역사도 짧은 인생의 덧없음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인다. 나는 더이상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가장 오래 일한 직원도 떠났다. 국가는 무엇이고 기업은 무엇이며 개인은 무엇이고 존재란 무엇인가. 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은 때로는 아주 중요하기도, 때로는 결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기도 한다. 혼자서 달성해낼 수 없는 목적이기에 여럿이 모이고 조직을 형성한다. 또 다른 구성원의 조합으로 또 다른 조직이 되어 또 다른 도전에 새로운 방법으로 시도한다.

 

유사 서비스도 생겼다.

매해 서너개씩 나왔지만 궤도에 오른 것은 그동안 하나도 없었다. 다들 모냥새만 흉내내다 요구되는 비용과 자원과 시간과 복잡성에 손을 들고 떠났다. 미련한 사람이 이기는 게임에서 나만큼 미련한 사람은 없었다.

실행의 싸움도 기술의 싸움도 디자인의 싸움도 마케팅의 싸움도 효율의 싸움도 자본의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개념파악의 싸움이다. 누가 다음 개념을 찾아낼 수 있을 때까지 미련하게 들러 붙어 있을지의 싸움이다.

적어도 나는 창조자가 아니다. 정리하는 사람에 가깝다. 지저분한 귀납적 현상들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이고 정제하고 재분류하고 정의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해내는 정보처리기계이다. 이전보다 나은 다음을 한 단계씩 만들어내며 도달한 게 지금의 문명이다. 오늘도 분야마다 한 단계씩 다음 모습을 찾으려고 아둥바둥거리는 게 현대 문명인의 책무다.

나 또한 앞선 서비스의 시도를 오답노트삼아 만들어낸 유사서비스였다. 그리고 더이상 참고할 성공사례도 실패사례도 없을 때 나는 정체기를 맞았다. 앞서 존재한 서비스를 내가 이겨낸 것이 아니다. 앞선 서비스의 시도가 있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했기에 유사 서비스들이 또 나올 수 있었다. 나 또한 유사 서비스 덕분에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다.

이렇듯 동시대를 살아가며 교류하는 모두를 진심으로 존중하며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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