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프뉴스가 생각하는 미디어는

한국언론진흥재단과 스타트업얼라이언스가 함께 작업한 해외 미디어 동향 보고서가 나왔다. 셰프뉴스는 한 페이지 가량 소개되었다. 이메일로 문의왔던 당시 답변했던 내용을 이 곳에 기록으로 남긴다.

보고서 다운받기(169MB) : http://www.kpf.or.kr/downloadfile.jsp?num=6369&board_data_id=7824

 

정보전달발전역사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이전 세대의 기술은 매정하게도 세상에서 잊혀졌습니다. 봉화, 전령, 목판인쇄, 타공프린터, 모스부호, 흑백 TV, 모뎀 등 모두 잊혀졌습니다. 인류는 정보전달 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키고 있고, 불과 몇 년 전에 사용하던 전달기술들이 새로운 기술들에 의해 대체되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대적인 환경 속에서 언론사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콘텐츠에 집중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반대의 의견을 내겠습니다. 기존 언론사들이 콘텐츠를 못 만들어서 위기가 왔나요?아닙니다. 지금의 위기는 전적으로 시대적인 현상이며, 언론사 외부의 환경적인 문제입니다. 내부에서는 결국 해답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콘텐츠가 아닌 역할입니다.

이전 세대까지 언론사가 하고 있던 역할은 수많은 대체재에 의해 대체되고 있습니다. 남아 있는 역할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남길 것이며, 다른 서비스에 의해 대체되어버린 분야는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결정은 언론사들이 각자 해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시점일수록 업의 본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현대적인 ‘언론사’의 범위를 넘어, 더 큰 범위를 아우를 수 있는 미디어의 본령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제가 찾은 답은 결국 ‘중간자’, ‘매개자’, ‘연결자’, ‘전달자’입니다. 여전히 연결이 필요한 곳은 많이 있고, 새로운 기술로 그 연결을 더욱 효과적으로 해내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14년 7월 셰프뉴스를 창업하기 전까지 IT스타트업 미디어 비석세스에서 3년 가까이 근무했습니다. 없던 IT산업이 활성화되는 것을 보고 “산업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고 활성화되기 위해서 산업미디어가 필요하다. 산업미디어는 정보를 전달하고, 사람들의 연결을 도모한다.”라는 산업미디어의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이 맥락에서 외식산업은 미디어가 가장 필요한 산업입니다. 테크황무지에 가깝지요. IT기술을 아는 사람은 외식 산업을 이해하지 못해 매번 실패하고, 외식 산업에 속해있던 사람들은 기술을 이해하지 못해 실패합니다.

이 산업에는 총 25종 가량의 오프라인 매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온라인으로 넘어오려는 시도를 안 한 게 아닙니다. 매번 실패했고, 지금도 여러 시도들이 실패되고 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도 많이 있겠지만 공급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라 생각합니다. 외식 산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F&B(Food & Beverage)두 개로 구분하거나, HoReCa(Hotel & Restaurant & Café)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는 모두 공급자 중심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소비자 중심적인 관점에서 매체를 기획하면 산업 종사자를 독자로 설정해야 할 것입니다. 측정 가능한 외식업 종사자가 300만 명이라고 합니다. 이 중에서 주방 근무자는 140만 명입니다. 이들이 볼만한 매체가 있을 법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없습니다. 그래서 시작했습니다. 기존 언론은 “셰프에 관한 뉴스”만들 생각은 하지만, “셰프가 보는 뉴스”를 만들 생각은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몇 년간 ‘버티컬 미디어’라는 어휘가 유행하기도 했는데 소재를 버티컬하게 접근하면 보기엔 그럴싸한 미디어가 만들어지겠지만 역할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독자를 버티컬하게 설정하면 그들이 역할을 알려줄 것입니다. 구인구직서비스도 독자분들이 필요하다고 해서 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셰프뉴스가 지금까지 매체 영향력을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은 저희가 잘해서라기보다 독자의 특이성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리사라는 독자는 다소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있습니다. 하루에 14시간씩 창문도 없는 주방에서 육체노동을 하지요. 잠시 담배를 피러 나와 휴대폰을 보는 게 유일한 세상과의 소통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취미, 특기, 진로가 모두 요리인 삼위일체형 직군입니다. 인생에 요리밖에 없다고 합니다. 다른 매체가 독자들과 가지는 약한 연결고리에 비교하면 훨씬 큰 유대감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미디어는 두 가지로 구분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콘텐츠 생산자(Media as Contents Creator)이며, 또 다른 하나는 채널(Media as Channel)입니다. 콘텐츠를 돈 주고 사보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있으므로 미디어 운영의 목적은 채널을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맥락에서 콘텐츠는 목적이 아닌 철저한 수단이 됩니다.

채널로서의 미디어도 전환(transition)을 일으키지 못하면 아무 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전환도 안 일어나는 채널을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콘텐츠 생산부서는 애물단지 지출부서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셰프잡스에서 수익이 발생하기 전까지 셰프뉴스는 애물단지 지출부서에 해당하므로 1.2명의 최소 리소스만으로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중입니다. 셰프뉴스로부터 전환을 일으켜 셰프잡스에서 수익이 발생하면 셰프뉴스의 미디어 운영 비용을 충분히 회수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입니다. 셰프뉴스의 독자와 셰프잡스의 고객이 같으므로 전환 효율이 아주 높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언론사의 생산성 집착

나는 미디어 운영을 시작한 지난 1년 8개월 동안 몇 번의 죄책감을 느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려면 기자가 저널리즘 정신을 가지고, 소재에 집착하고, 연출과 편집에도 욕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요했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일해 많이 만들어내라는 생산목표를 설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안정적인 운영을 위한 생산성을 강요하고 있었다. 심지어 미디어 운영의 본질은 언론이 아닌 제조업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언론의 측면에서 최소한의 정의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 기대했고,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산업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행동의 방향은 그와 반대로 가고 있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고전경제학에서는 성장을 생산의 문제로 보았다. 적은 비용을 들여 더 많은 생산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달성과제였다. 그래서 경제성장에 필요한 요소로 노동, 자본, 기술 이 세 가지를 꼽았다. 미디어 운영 또한 생산과정에서 비용이 들어가고 생산결과물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제조업과 다르지 않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미 수적으로 과도한 미디어사들의 무지막지한 생산성 경쟁시대, 오늘을 되돌아보자. 생산성 경쟁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 소싱-생산성

15년 한 해 동안 신규 등록된 온라인 미디어만 6,000개에 달한다. 그렇다고 언론의 목소리가 다양해졌느냐?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다. 베끼고 베낀다. 정보가 부족했던 시대였으면 모를까, 정보가 넘쳐나서 문제가 되는 정보과잉시대. 특종에 열을 올리고 새로운 소재를 잘 찾아내는 매체가 있다면 어뷰징 전문 미디어의 1차 타겟으로 선정된다. 먹성 좋은 대왕고래 턱 밑에 빨판상어가 여럿 붙어있는 모양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버니, 곰이 재주부릴 의욕이 나질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며 너도나도 빨판상어나 되겠다는 것을 대부분의 온라인 언론사들이 전략이랍시고 내세운다. 콘텐츠가 낱낱이 쪼개져 전달되는 지금, 단독속보가 큰 흥행과 보상을 가져다줄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소싱, 소재를 찾아내는 일이다. 80년대에는 9시 뉴스가 조금 일찍 끝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오늘은 특별한 소식이 없어 방송을 이만 마칩니다.” 당시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서가 아니라 아마 언론사의 소싱능력이 제한적이었던 게 그 이유였을 것이다. 30년 전과 비교해보면 소싱할 수 있는 창구가 훨씬 많아졌다. 세계 주요 도시에 특파원이 파견되어 있고, 기관이나 기업의 홍보부서에서 내용을 정리해주는 담당자가 따로 있다. 블랙박스나 스마트폰 영상도 소재거리가 된다.

소싱이라는 작업을 위해 제보창구를 열어 두고, 편집기준에 딱 맞아 떨어지는 정보를 하루에 수백 건씩 제보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페이스북 페이지 ‘오늘뭐먹지?’와 같은 선순환 구조가 나오는 경우는 아주 희귀한 경우다. 소싱이라는 작업은 유사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하는 것이기에 머리를 조금만 굴리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관련 키워드를 몇 개 골라 네이버 뉴스 검색에 입력하고, 그 결과창의 RSS소스를 긁어 피들리에 등록해놓으면 매번 키워드를 새로 입력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 클릭 한 번만으로 사전에 입력한 키워드에 대해 실시간으로 언론에서 노출되는 기사들이 검색되어 보여진다. 지니뉴스 앱에도 맞춤뉴스라는 비슷한 기능이 있다. 영상 콘텐츠를 같은 방식으로 투어할 수 있는 앱 vodio가 있어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다. 1차적으로 검증된 콘텐츠를 참고하는 것도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 영어를 할 줄 안다면 해외의 관련 매체 50여 개 정도를 모니터링 할 수 있다. 해외의 매체들도 나름의 편집기준, 소재 검토 기준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보 공해를 걸러내 줄 필터 역할을 해준다. 한국 F&B 산업 소식은 홍보팀이 작성한 신제품 나왔다거나 메뉴가 바뀐 소식, 자본이 관여되어 인위적으로 작성된 기사, 방송리뷰기사, 먹어보니 맛있더라는 감동도 재미도 근거도 없는 이야기 등이 대부분이라 해외 매체를 참고하는 것이 더욱 성과가 좋다. 이 작업도 일주일에 2회만 한다고 했을 때 총 4시간 정도면 훑어보기에 충분하다. 페이스북의 친구를 지속적으로 관리해 뉴스피드에 어떤 소식들을 띄울지를 세팅하는 것도 검증된 뉴스를 소싱받을 수 있는 보조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다.

내가 다루는 콘텐츠의 경우 위의 작업과정을 통해 1,000개 정도의 기사 제목을 훑어보면, 20개 정도는 읽어볼 법하고, 그 중에서도 5개 정도만 소재거리가 될 법하니. 이 작업의 핵심은 효율성이 아니라 “편집기준에 부합하는 콘텐츠를 찾아내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방식들로 정보에 쉽고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작업 환경을 만들 수는 있지만, 아무리 효율성이 좋아져도 이미 생성된 정보를 조회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NEWS를 만드는 올바른 접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선 평생 OLDS밖에 못 만들어낸다. 콘텐츠 생산자에게 달성목표를 양적인 수치로 설정한다면 시간에 쫓겨 효율성이 높은 일만 좇고자 하게 되거나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이 순간부터 보도자료를 들추고, 전화벨이 울리기만 기다리고, 온라인 뉴스를 큐레이팅하는 일만 하게 될 우려가 있다. 취재관행이 생긴 순간, 사실상 기자는 산 송장이 된 것과 다름없다. 적은 리소스를 들여 생산량을 높이는 것을 우선시해선 안 된다. 새로운 영역, 미개척 분야를 끊임없이 탐험하고 취재해내는 것이 본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소싱 작업을 빠르게 반복함으로 효율성을 높이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시스템에 갇혀 발이 묶여선 안 된다.

진정 보석 같은 소재, 편집기준에 꼭 들어맞는 소재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발굴’ 수준의 소싱을 하기 위해서는 기자가 곡괭이 들고 땅파러 나서는 수 밖에 없다. 좋은 소재를 찾아내는 데에 미치는 요소는 오직 기자의 적극성과 집요함 말고는 없다. 기자의 덕목으로 술을 잘 먹어야 한다는 점을 내세우는 데에도 다 발품을 잘 팔기 위한 데 있다. 수습 3개월 동안 경찰서 옆 쪽방에서 잠도 안 재우고 취재시키는 것도 발품의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메이저 언론사의 기자들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효과적으로 소재 소싱할 방법에 대해 물었지만, 그들도 특별히 다른 방도를 알지 못했다. 기사는 결국 발로 쓰는 것이기 때문일까. ‘발로 쓴다’는 건 열심히 뛰어다니는 것만 의미하진 않는다. 스스로 취재처를 관리하고 정기적으로 전화를 돌리거나, 먼저 제보가 들어올 수 있도록 관계를 만드는 것 또한 모두 발품에 해당할 것이다. 기자 지망생 중 기자가 글 쓰는 직업인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내가 볼 땐 소싱 작업이 기자에게 주어진 일의 8할이다. 소싱만 제대로 된다면 제작이야 일사천리로 이뤄진다.

 

  • 제작-생산성

글은 참 종류도 많다. 크게 문학적인 글과 비문학적인 글로 구분하지만, 기사의 종류만 세어 보아도 스트레이트, 단신, 가십, 르포, 해설, 인터뷰, 사설, 칼럼, 독자투고 등으로 다양하다. 콘텐츠가 어떤 포맷을 갖추는지와 상관없이 일반적인 글쓰기 능력은 모든 콘텐츠 제작에 요구된다. 뉴미디어 시대에는 새로운 포맷의 콘텐츠가 많이 등장했다. 카드뉴스, 동영상 해설기사, 멀티미디어 콘텐츠가 복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면서 기자에게 글쓰기 이외의 콘텐츠 생산을 주문한다. Snowfall 기사가 퓰리쳐상을 받자, 언론사들이 앞다투어 기획기사를 웹사이트 하나 개발하는 규모로 만들어내는 유행이 불었다. 이내 막대한 제작비에 비해 얻은 트래픽의 활용가치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유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드뉴스도 요즘은 왠지 눈에 많이 띄지 않는다. Snowfall은 12명이 6개월 동안 겨우 기사 하나만 만들었을 뿐이다. 미디어사의 규모가 크고 작고를 막론하고 제작 효율성은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04년도에 영상전공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 방송현장에서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조직 개편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피디, 조연출, 작가, 촬영감독, 음향감독이 떼를 지어 나가 촬영하던 과정을 없애고 카메듀서(Cameraman + Producer)에게 어떻게든 혼자 말아오라고 주문했다. 예전만큼 높은 수준의 방송을 만들어 내긴 어려우니 질을 포기하고 저렴한 양을 선택한 것. 이때 자리 잡은 포맷이 VJ특공대다. 카메듀서 8명을 고용해 한 사람당 2주에 1편씩 만들어라 하면 1주에 4개의 꼭지를 제작할 수 있다. 스튜디오에서 그럴싸한 소개액션을 보여준 뒤 13분짜리 꼭지를 4개 틀어주면 1시간 방송을 채울 수 있다. 88만 원짜리 조연출 경력을 2년 정도 거치면 120만 원짜리 꼭지피디로 입봉하는 코스가 보통이 되었다. 장비는 조악하고, 지원도 열악하고, 경험과 경력 또한 부족하다. 다룰 수 있는 소재는 제한적이고, 콘텐츠 포맷은 획일화되어 개성을 잃는다. 3포세대 제작자가 이 구조 안에서 저널리즘을 추구할 리 만무하다.

종편에서 패널토의 형식의 보도가 유행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순발력 좋은 사회자가 전문성 갖춘 패널을 초청해, 한 시간 노닥거리면 몰입도 높은 방송이 완성된다.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키워드인 MCN, 유튜버와 1인 콘텐츠 제작자들이 연합함으로 기존에 다루지 못했던 콘텐츠들도 커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또한 ‘효율성 높은 생산공정의 혁신’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BJ나 인기 유튜버와 같은 1인 영상물 창작자들을 묶어 편집부를 꾸리는 구조. 인기 유튜버는 이미 콘텐츠 기획력, 콘텐츠 생산능력, 흥행까지 모두 검증된 보증수표다.

최근 미디어 업계에서 주가 분석 기사를 작성한 로봇기자에 대한 소식이 화두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사람이 하게 되고 자동화가 가능한 영역은 로봇이 대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로봇이 쓴 기사를 읽어보니 사람이 쓴 것보다 정확해 놀랐다. 하지만 여전히 그 콘텐츠가 매력적인지에 대해선 의문이 들었다. 뉴스의 대체재는 다른 뉴스가 아니다. 증권 정보를 바로 볼 수 있는 앱서비스가 많다. (앱서비스에서는 증시 그래프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고, 회원들끼리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다.) 콘텐츠의 전달채널은 이미 모바일 디바이스로 인해 직접적인 연결이 이뤄졌으므로 필요가 없어졌다. 해석 또한 자동화가 가능해졌으니 굳이 인간이 그사이에 들어가서 불필요한 coding – 발행 – 구독 – decoding의 복잡한 단계를 거칠 필요가 없다.

대체 가능한 콘텐츠 생산자는 대체된다면, 대체 불가능한 콘텐츠 생산자는 어떤 모습인가. 나는 얼마 전 우연히 자동차 전문온라인미디어 모토그래프의 유튜브 채널에서, 김한용 기자의 25분짜리 자동차 리뷰를 한 편을 보게 되었다가 살 능력도 없는 차 리뷰 영상을 몇 십 편 이어보다 새벽 4시까지 잠을 못 잔 경험이 있다. 어찌 모든 표현이 그렇게도 맛깔 나는지, 여간 자동차 덕후가 아니고선 만들 수 없는 콘텐츠라는 생각을 했다. 2년마다 부서를 옮겨 다녀야 하는 기자에게선 저런 콘텐츠가 나올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결국 기자도 생산라인에 선 생산자로 본다면 공장에서 인형 눈알을 붙이는 작업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로봇이 대체 가능할 수 없는 기자의 자질을 구별해내야 한다. 전문 분야에 덕후인 기자는 로봇은 물론 어떤 기자와도 대체 불가능하다. 전문매체, 버티컬 미디어에서 요구하는 기자는 기자로서의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자질을 갖추었냐 보다는 한 분야에 깊이 있게 몰입했는지, 그 콘텐츠의 값어치를 스스로 이해하는지, 생산의 과정 자체에서 직무 만족을 느끼는지 등이 우선 요구된다.

언론이 없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전달자로 공통적인 요건을 갖춘 사람을 찾았다. “빠르게 달릴 수 있고, 정확하게 수집한 뒤, 그 내용을 흥미롭게 다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능력은 전적으로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생산이 목적인 제조기업이라면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기업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이겠지만, 언론사가 생산성 향상이라는 정량적인 지표에 매몰되면 어뷰징회사가 되고 만다. 시상식에서 여배우의 치마가 펄럭였고 7미터짜리 갈치가 잡혔다는 소식을 누가 그냥 지나칠 수 있나. 그런 콘텐츠도 조회수 1, 좋아요 1, 우리의 생계에 연관되는 정치적 사안에 관련된 심층 분석 기사도 조회수 1, 좋아요 1로 동점 카운트하는 것은 공정한 평가 기준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기자정신이 투철하거나 체류 시간이 길다고 해서 수익이 늘어나질 않는다. 정량적인 지표가 공정하지 않다면 정성적인 지표는 통용될 수 있을까? 미디어의 평판, 신뢰, 독자와의 끈적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정성적인 지표는 참으로 달달하게 들리는 표현이지만, 자율경제 시장논리가 이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면접을 보러 왔던 한 친구는 이름 꽤 알려진 언론사에서 두 달의 인턴 기간을 격주로 출근했다고 말했다. 왜 격주로 나갔냐 했더니 인턴은 4명인데 책상은 2개밖에 없어 격주로 돌아가며 자택근무를 했다고 고백했다. 인턴 책상값도 아껴가며 하루에 3개씩 방송리뷰기사를 꼬박꼬박 받아낸 언론사가 콘텐츠의 무지막지한 양산에 전력을 다하는 데에는 온라인 광고시장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언론사가 생산성에 이토록 집착하는 것은 온라인 광고를 주요 수익원으로 삼은 이후 더욱 가속화되었다. CPC 또는 CPM방식의 광고비 책정은 실시간 경매 방식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광고비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자연스럽게 균형점을 찾아간다. 이걸 전체적으로 계산해보자면; (모든 클라이언트의 광고 집행비)를 (생산된 모든 콘텐츠의 수)로 나눈다. 이 값이 콘텐츠 하나당 가져갈 수 있는 광고비이다. 비용 대비 생산량을 경쟁사보다 배로 달성하게 되면 당장 이익은 배로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콘텐츠 하나당 수익은 줄어들게 된다.

시장논리는 미디어사에 양적생산을 요구하고, 양적생산은 광고비 하락을 초래한다. 광고비가 하락하니 수익을 높이기 위해 다시 양적 생산을 늘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세계 경제가 저성장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한다. 생산되는 물품은 넘쳐나는 데, 소비할 사람이 늘어나진 않으니 공급 과잉의 문제를 겪는 것이다. 지금의 미디어 시장은 콘텐츠 공급 과잉 시대로 볼 수 있는가. 그렇다면 미디어 시장에도 머지않아 고통스러운 디플레이션이 찾아올 것인가.

기득권이 아닌 나는 걱정보단 기대가 앞선다. 디플레이션 이후에 새롭게 열릴 시대가 궁금할 뿐이다.

식당 정보서비스가 안 되는 이유

네이버도 윙버스를 인수해 윙스푼으로 운영하다 13년 12월 18일 서비스 종료.

Yelp는 12년 IPO 했지만, 15년 5월 8일 M&A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왜 다 망하나.

 

  1. 날것의 정보 자체가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

백종원 아저씨가 2010년에 쓴 책 <초짜도 대박 나는 전문식당>에서는 상권을 3가지로 나눈다. 1차 상권은 걸어서 갈 수 있는 지역을 뜻한다. 2차 상권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동네를 이동하는 정도다. 3차 상권은 미디어에 나온 소식을 듣고 도시를 이동하는 정도다. 서비스가 전국구를 대상으로 하려면 아주 극단적으로 로컬한 정보를 다루거나 3차 상권에 대한 정보를 다뤄야 한다. 이 상권 구분은 장사하는 사장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지만, 각 상권 고객마다 필요로 하는 정보의 종류가 달라진다는 게 내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부분이다.

한국 도시의 음식점들은 고밀도로 밀집해 있으므로 아무리 데이터를 빠르고 정확하게 모은다 한들, 1차 상권에서 거리를 걸어 다니는 것보다 나은 경험을 제공할 수 없다. 가로수길이 흥했다가 2년 만에 죽고 경리단길이 또 떴다가 식어가는 변화는 얼마나 빠르며 한 지역 내에서도 개폐업은 얼마나 잦은가. 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2010년도 올라웍스에서 내어놓은 스캔서치의 사용자 경험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빨라진다. 손바닥만한 아이폰 안에서 재현되는 virtual layer에 published된 정보는 2~3개의 상점이지만, 두 눈으로 실제 세계를 맞이하면 50개의 간판을 읽을 수 있다. ‘후보 식당의 리스트 확보’라는 가장 우선적인 사용자 경험단계에서 큰 실망을 안겨준다.

식당정보서비스는 모바일기기에서 실행되는 앱서비스가 출시되기 전에도 ‘맛집추천’이라는 키워드로 네이버에 검색하면 104개의 맛집소개 플랫폼들이 나왔을 정도로 많았다.(자체조사, 2011년) 블루리본서베이는 10년째 식당정보를 묶어 책으로 발간하고 있으니 식당정보서비스는 새로운 서비스라고 할 수 없다. 어떤 형태로 어떤 디바이스를 통해 전달되는지완 상관없이 제공되는 정보의 종류들은 대충 이러하다. 식당의 이름, 식당의 위치, 식당의 사진, 음식 사진, 메뉴명, 음식가격, 연락처, 비전문가나 전문가의 리뷰…. 이러한 정보들은 사람들의 발길을 움직이게 하거나 지갑을 열게 만들 수 없다. 데이터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를 생성해낼 수 없다. 3차 상권 사람들이 이 정보들을 보고 식사 경험까지 이어지도록 유도하기에는 너무나 생기가 없는, 발굴 상태 그대로의 static 정보다.

 

  1. 괜찮았던 서비스들

한국에선 쓸 수 없는 서비스지만, Yelp의 사용자 만족도는 어찌 그렇게나 좋았는가? 2013년 가을, 촌놈이 미국 땅을 처음 밟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거긴 땅이 넓어서 1차상권이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 동부(뉴욕)는 한국의 서울처럼 지하철도 있고 마천루가 빼곡한 도심지가 컸지만, 샌프란시스코의 다운타운은 서울 강남역-역삼역 사이의 테헤란로 거리 정도가 전부였다. 숙소가 있던 서니베일, 40분 걸리던 도심지, 그 외에도 팔로알토와 산호세를 매일같이 옮겨 다니며 끼니를 해결해야 했으니, 동네마다 먹을만한 식당을 헤맬 때 yelp에서 제공하는 저런 static한 정보들도 가뭄에 단비같이 느껴졌다. 밥을 먹으려면 어차피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으니 안 쓸 이유가 없었다. 아침을 제외하고 하루에 2번, 보름 동안 30번 yelp의 도움을 받았다. 확보된 데이터도 많고 음식 범주도 넓어 새로운 음식을 explore하는 데 더없이 좋은 서비스였다. 한국의 서비스보다 어뷰징 이슈가 적어 정보신뢰도 또한 높았다. 별 4개짜리를 받은 식당이 실망을 안겨 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위시랜드는 2011년도부터 사업을 시작했는데 공격적인 영업력으로 서울지역의 50개 식당과 계약을 맺었다. 앱에서 보이는 식당 리스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었다. 나는 그 뚜렷한 편집(또는 선별)기준이 좋았다. “연인과 함께 특별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곳, 파트너사와 미팅을 잡아도 가오가 떨어지지 않는 곳, 오랜만에 가족끼리 근사하게 식사할 곳”을 찾는 사람이 2인 기준 4~10만 원 사이에서 식사할 수 있는 식당들이었다. 상권으로 구분하면 3차 상권 중에서 특정 목적을 가진 고객만으로 더 좁힌 것이다. (“모든 사람을 위한 제품은 누구를 위한 제품도 아니다”라는 교과서에 나오는 말씀segmentation을 잘 따랐다.) 이 고객의 가장 우선적인 사용자 경험인 ‘후보 식당의 리스트 확보’를 훌륭하게 충족시켰다. 나는 여길 통해 예약을 3번 정도 했다. (위시랜드 통해서 예약하면 30% 할인받을 수 있다는 파격적인 조건은 소셜커머스와 같은 개념이었다.) 하지만 그다음 해부터 제휴업체 확장을 위해 샤브샤브집, 쇠고기구이집등을 무리하게 집어넣으면서 나에겐 그 리스트들이 무의미해졌고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확장을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엔 지금만큼 파인다이닝 시장이 크지 않았다. 위시랜드는 2년 전 서비스를 종료했다.

 

  1. 왜 돈을 못 버나.

식당에 대한 정보, 먹을 것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나 넘쳐난다. 페이스북에도 하루에 몇 번씩, 인스타그램에는 종일 먹고 마셨다는 소식이 원치 않는데도 보인다. 대중매체에서는 방송과 기사가 앞다투어 먹거리에 대한 정보를 쏟아낸다. 내가 원하면 블로그를 찾거나 친구에게 물어보거나 수많은 앱 서비스에서 리스트를 받아볼 수 있고, 책을 사도 되고 나만의 리스트를 만들거나 직장 동료들끼리 리스트를 공유하기도 한다.

식당정보서비스를 ‘정보플랫폼’이라고 정의할 때, 정보 자체가 경쟁력을 갖춰야 하는데 그러기 힘들다. 그 이유를 정보 자체에서 찾으면 안된다. 누구도 정보를 독점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그 이유다. 모든 종류의 식당정보가 서로의 경쟁 상대가 된다. 경쟁앱 뿐만 아니라, 새로 출간되는 책도, 생생정보통도, 생활의 달인도, 블로거도 경쟁 상대가 된다. 앱 정보가 부족한 시대라면 모를까, 정보가 넘쳐나서 다른 정보들을 제치고 턱 밑에까지 정보를 밀어 넣어줘야 겨우 정보를 받아먹는 정보과잉시대에는 정보독점을 하겠다는 목표 자체가 잘못된 설정이다. (최근 앱서비스 대다수는 이미 존재하는 정보를 긁어모아crawling서 빅데이터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재정렬된 것이기 때문에 이 목표를 지향하진 않을 것이다.)

이 문제가 심각한 이유는 정보를 독점하지 못하면 플랫폼이 수익전략을 구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정보를 독점하면 상위노출, 순위조작의 고전적인 방법으로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지만, 대체재가 넘쳐나는 지금 봉이 김선달식 전략이 먹힐 리 없다.

 

  1. 그럼 돈을 어떻게 벌까?

‘미디어가 돈 벌기 힘든 이유’와 공감대가 생긴다. 콘텐츠를 생산해도 재화로 교환할 수 없다. 정보이용자가 많아도 직접 돈을 내진 않는다.

돈을 ‘어떻게’보다 돈을 ‘어디서’부터 고민해보자. 고객이 누구인지부터 설정해보자. ①식당주인에게 받을 것인가? ②식당에 가는 손님에게 받을 것인가? ③아니면 이 두 집단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는 제 3자에게서 받을 것인가?

미디어에선 기본적으로 ③번 고객에 해당하는 광고주에게 돈을 받는다. 정보과잉시대라 광고효율과 광고비가 낮아지고 있다. 예전엔 ②번에 해당하는 독자에게 유가지로 돈을 받았지만, 지금은 선물을 얹어주며 공짜로 보라 해도 구독률이 떨어지는 현상을 막기가 힘들다. ①번에게 돈 받고 홍보기사 쓰는 건 누구나 아는(?) 업계의 비밀(?)이었으나 강도질도 금고에 돈이 있을 때 수익이 나는 법이다. SK최회장이 언론사에 삥뜯기기보단 커밍아웃을 택한 최근의 사건은 이 수익모델이 앞으로 더욱 작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복선이 될 것이다.

옐프는 ①번을 택해 sponsor마크 붙이고 상위에 노출시켜 주었다. Yelp의 시도는 네이버에 검색되던 104개의 맛집추천 플랫폼과 같이 작동하지 않았다. 식당 사장님들을 잘 사기쳐설득해 노출강화 광고상품을 팔았다 한들 플랫폼 신뢰도를 스스로 떨어뜨리고 사용자 경험을 저해한다. 광고한 식당은 ‘우리 가게 장사 안되니까 좀 와주세요’라고 외치는 꼴이 되고 만다.

Open Table은 ②번 고객에게 돈을 받는다. 엄밀히 말하면 돈나오는 구멍은 ①번과 ②번 사이에 있는 관계에서다. 예약과 결제과정을 대행할 수 있어야 중간자가 수수료를 청구할 명목과 권리가 생기는데 Open Table에선 이것이 작동한다. ‘pay first, eat later’이라는 캠페인이 먹힌다. 파인다이닝 식당 중에서 예약은 무조건 open table로만 받는 곳도 많다. 이곳은 식당정보제공은 뒷전이고 포스기를 제공해서 고객(식당)의 사용경험개선, 손님의 예약과 결제를 포함해 관련된 모든 활동을 한 큐에 지원하고 있다. 한국은 노쇼에 대한 이슈가 이제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달엔 조선일보에서 천박한 시민의식 훈계하듯 1면에 기사를 냈고, 최근 셰프님들 노쇼 때문에 얼굴이 늙어간다며 연합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윙스푼도 옐프도 ①번과 ②번 사이에 있는 관계를 잡진 못했다.

이도 저도 못했다면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④번을 누구보다 빨리 찾아내야 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나는 지금 이 순간 왜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이 문제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되물어 보겠지만 끝내 답을 찾지 못할 것을 알고 있다.

한계

그러니까네, 사람은 사람의 한계를 규정짓는다 이거지. 한계를 이미 규정지어 놓은 인간이 어떻게 그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겠냔 말이지.

자신의 한계를 이미 규정해 놓은 사람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뭐냐면, 그 한계보다 뛰어난 사람은 사람으로 안보고 신과 같은 존재로 취급해버리고 마는거지. 자신도 그렇게 뛰어날 수가 있는데. 더 열심히 할수도 있고 더 많은 발전을 할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

그러니까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쉽게 예를 들어가꼬, 자 보제이.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한계, 그기 뭐이꼬. 내가 생각할땐 일주일에 20시간 공부다. 20학점 듣는게 학교에서 최고로 많이 들을 수 있도록 허락하는 학점 수준이거든. 그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일주일에 20시간 공부라고 그어 뿌는기다.

일주일에 씨바 시간이 얼마나 많노 24*7은 얼마고 일주일에 148시간 아니가. 그 중에 묵고 자고 빼도 80시간은 안남나. 그서 영화보고 친구 만나도 40시간은 안되나. 왜 공부 못하는데 40시간 동안. 아니 씨바 진짜 마음먹고 공부할라치면 영화안보고 친구 안만나면 일주일에 80시간 공부 안되겠냐 이말이다.

근데 아무도 그래 안한다. 20시간이 한계다. 20시간 공부하고 나면 너나 나나 다 퍼져가지고 일어나도 못한다. 이래가 되긋나.

그런놈들이 대학졸업하고 나면 일주일에 40시간 일하는거 존내 힘들어한다. 노동자 인권보장인가 뭔가 들먹거리 가믄서 최대근무시간 계속 낮추고 있제, 그게 또 사람의 한계를 규정하는기라. 일주일에 40시간 넘게 일하는 놈은 신이라 신. 미친 일중독자로 취급하는기라. 내보다 50살 밖에 안많은 우리 할아버지도 하루종일 밭에 나가고 논에 나가서 농사짓고 일했는데 인간의 한계가 50년만에 딱 절반으로 줄어뿟다. 일안하고 공부안하면 딱히 할것도 없는 놈들이 꼭 딱 그만치만 할라고 졸라 떠들어 댄다이.

진짜 할라고 마음있는놈은 안시키도 다 하고 하지말래캐도 더 한다칸다.

지가 지 발에 족쇄 채우고, 지가 지 손에 수갑 채우는 기다.

근데 암만 남이 머라 해봐야, 그 한계 못 무너뜨린다. 지가 알아야 된다. 근데 니 그거 아나, 코끼리 어째 길들이는지. 코끼리를 어릴때 새끼때부터 발에다 족쇄를 채아가 나뭇기둥에다 묶어놓거든, 그럼 처음에는 벗어날라고 지랄 염병을 틀다가도 몇일 지나고 나면 족쇄가 차였을 때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돼. 그 다음부터는 나뭇기둥 자체가 필요없다. 족쇄만 채워 놓으면 꼼짝 안하고 얌전해진다. 도망 절때 안간다. 다 커서 성인코끼리 되제. 몸무게 한 5톤 이래 나가제. 그래도 족쇄 채우면 도망 못가는 줄로 안다.

그렇게 한계 근처에도 안가본 새끼들이 계속 안된다 안된다 해대라. 그게 진짜 안되는기다. 그게 그냥 금마들의 한곈기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교육이 담당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참 희한합니다. 대학교를 보고 이렇게 비판했다고 하죠. [우리나라 대학들은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대학교 졸업생들을 데려다 일을 시키려 하니 뭣하나 제대로 하는게 없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기구가 원래 학문을 닦기 위한 장소이지 기업을 위해서 노동자를 양성하는 곳이 아니거든요.”

그렇다. 우리나라 대학은 취업준비생들이 먹고 살 준비를 하고 그것으로 돈을 버는 취업알선센터가 되어버린 사실이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하다는 증거이다. 누구도 오늘 날 대학이 하는 그 역할이 이상하다 여기지 않고 불평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의 그러한 기능에 고마워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교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하지만 원래 교육이라는 게 부분적으로 그 기능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학생들을 이데올로기로 조종해서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끼치도록 하는 게 교육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죠.”

교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아무리 공부를 안했고 학교에서 성적이 나쁜 학생이었다 해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세 개는 배웠을 것입니다.”

교수님은 손가락 세 개를 앞으로 펴 보이며 하나씩 세며 외쳤다.

“권력에 복종하는 법”
“높은 사람에게 굽신거리는 법”
“세상에 존재하는 이치에 맞춰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법”

그러면서 예를 몇 개 들었다.

“아니, 초등학교를 가기 이전에도 유치원에서부터 우리는 먼저 사회질서를 따르는 법부터 배웁니다. 줄서기. 그리고 선생님한테 경례하기”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참 웃긴 건, 학교하고 가정에서 짜고 치는 고스톱을 보이기도 합니다.

학교에 가면 부모님 말씀 잘 들어라, 집에 오면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

수업이 끝날 때쯤 나온 이야기였기에, 몇몇 졸고 있던 학생들도 어느새 눈을 번쩍 뜨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학생들 모두 자신이 받았던 교육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과 함께 탄성을 자아냈다.

틀린 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것은 교육의 불가피한 의무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교육이 그 일을 담당하지 않으면 좌파 빨갱이라는 소릴 듣고 선생님이 쫓겨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체 인구의 60%에 달하는 임금노동자를 생성해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하는 사업을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바치고 생계수당을 받아내는 일꾼이 될 학생들에게 생각하는 법이나 예술을 즐기는 법 따위를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시키는 대로 일만 해낼 수 있는 말귀를 알아듣는 수준이면 충분하다.

초등학교의 ‘바른생활’ 교과서부터 중학교의 ‘도덕’ 교과서 고등학교의 ‘윤리’ 교과서 모두 학생들을 그런 길로 인도하기 위함이다. 고등학교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을 배우지 않고 윤리만은 배우는 것도 모두 그러한 이유다. 이번 교육과정에서는 국사가 선택과목이 되어버린 데다 뉴라이트가 교과서를 새로 편찬하는데 우리의 역사를 우리가 뒤집어 버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교육이라는 행위는 정권에 따라 학생들을 조정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임이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12년의 이데올로기, 거기에 사회로 진출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변질되어버린 4년의 대학교육, 거기에 나라의 종이 되기 위한 2년간의 군대교육까지.

나를 위한 것이라 생각하여 감사해했던 18년의 그 교육이 나를 조종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너무나 괘씸하고 분하다! 특정한 누구를 탓할 수도 없다. 모두가 그것이 옳은 것이라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고 나조차도 따라왔던 길이기에 나 또한 자격이 없다.

하지만 내가 받은 교육에 그렇게 나쁜 면만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한 교육이 있었기에 오늘날 4대강 사업을 추진시킬 무뇌한 노가다꾼들이 있을 수 있고, 전쟁나면 총알 받을 예비군들이 있으며, 선거기간에 몇 마디 말로 소중한 표를 받아낼 수 있는 5년마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명맛의 국민들이 존재하는 것이지 않는가.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국가가 존립하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젊은이들을 자본주의 국가의 일원으로 열심히 일을 시켜야 국익을 추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류의 문명이 발전하는 속도에 힘을 실을 수 있기 때문에 하찮은 인간노동력들에게 인권이나 여가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회가 어지로울수록 시민들을 다루기가 쉽고, 그들의 밥줄을 끊어서 생명이 위태위태할 때야 말로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임금의 뜻을 따르게 된다.

대한민국 청년들이여, 대한민국의 젊은 혈기들이여, 그리고 내 친구들아! 그러니 모든 것을 포기해라. 깨우치지 말아라! 눈을 감고 귀를 닫아라. 그저 남을 위해 일하고 생계를 위해 몸을 파는 우리는 더 많이 알아봤자 불행해지는 임금노동자이니라. 계속해서 토익공부를 하며 이력서에 한줄 더 그어 넣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어라.

존재의 필연성에 대한 의심과 주체의지의 발아

올해 2010년. 내 나이 스물여섯. 20대의 반이 지났다.

스물여섯 살의 나는 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26세 이은호의 모습은 필연적인 결과일까, 우연의 조합일까. 우연도 필연에 속하는 것인가.

나의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내 몸 안에서 꿈틀대는 내 본능과 자의식이었을까, 아니면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들에 의해서 영향받은 것일까?

나의 모습을 이렇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앞으로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에 대한 이유 또한 찾지 못할 것이다.

나 어릴 적엔 학교에서 꿈에 대해 적어내라고 한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 때 잘만 적어냈던 친구들이 여전히 그 꿈을 가지고 있는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이 글을 한번 끄적여 본다.

왜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꿈꾸는 학생들을 좋아할까? 자신들이 가르치는 학생들이 뭔가 위대한 삶을 살길 바랐던 것일까? 사실 선생님들도 그 작은 아이들이 커서 양아치나 공사판 인부가 되거나 잘해봐야 박봉의 월급쟁이 아저씨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어느 날, 형이 갑자기 유리병을 들고 와가지곤 타임캡슐을 만들자며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는 게 기억난다. 타임캡슐이 뭔질 몰랐는데 형의 설명에 따르면 그 당시의 기억을 담아서 흙 속에 묻어두고 한 십년 지나서 파보면 추억이 새록새록 솟아나는 아주 좋은 거였다. 그러면서 형은 허겁지겁 유리병 속에 뭘 처넣기 시작했다. 사실 그 속엔 아주 소중한 것들이나 그 당시를 기억시킬 수 있는 의미심장한 아이템들이 들어가야 하는데 별로 쓰지도 않고 소중하지도 않았으며 유리병 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장난감 몇 개를 골라 집어넣었었다. 그리고 공책을 북북 찢어서 ‘나는 커서 이 되겠다.’라는 꿈을 한 장씩 적어 넣기로 했다. 그 당시 형은 뭘 적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 전까지 한 번도 커서 뭐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적잖게 당황했다. 형은 빨리 타임머신을 묻어야 한다며 재촉했다. 5분간의 고민 끝에 ‘소방관은 타죽을 수도 있으니까 경찰관이 되어야겠다.‘며 “나는 커서 10년 후에 경찰관이 되어있겠다.”라고 적어서 넣었다. 그 후 그 타임캡슐의 행방을 찾아본 적도 없지만 아마 지금 가보면 그 때 살던 집 뒤의 작은 마당엔 새로운 건물이 올라와있을 것이다.

그 다음 년도에 6학년으로 올라가서 만난 담임선생님은 꿈에 무척 집착했다. 모든 학생들이 장래희망 카드를 만들어 게시판에 붙이는 난리법석을 떤 것이었다. 그것도 부모님들이 찾아오는 가을운동회 직전에 말이다. 나는 그 때까지 13년의 인생을 살면서 장래희망이라는 것에 생각해봤던 적이 작년 5학년 때 5분 동안 생각해봤던 게 전부였는데 이젠 6학년이니 더 진지해봐야겠다며 머리를 싸맸었다. 밤이 새도록 고민해서 만들어간 나의 장래희망 카드에는 ‘샐러리맨’이 적혀있었다. 평범한 학생들을 부풀리고 과장시켜 학부모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담임선생님의 허영심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고민하던 나를 떠올려 보면 나는 커서 별로 대단한 사람이 될 것 같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장래희망카드를 제출하고 난 뒤에도 그 카드가 게시판에 붙고 난 뒤에도 가을운동회 때 엄마가 와서 내 카드를 보고 혀를 찼을 때에도 나는 샐러리맨을 꿈이라고 적은 것을 무척 후회했다. 그렇게 후회하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는 도무지 무엇을 꿈으로 가져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은 흘러 고3이 되었다. 고 3이라면 이미 장래계획과 진로설정이 다 되어서 수능공부에만 집중해야 할 시기이지만 나는 여전히…..

부끄럽게도 이제까지 18년의 인생을 살면서 장래 희망에 대해 생각해봤던 적이 초등학교 5학년과 6학년 두 번 밖에 없었다.

고3 야자시간에 떠들던 녀석들이 단체로 야단맞던 중 훈육에 한창이던 ‘김갑상’선생님이 한숨을 푹푹 쉬며 “느그들 도대체 꿈은 있나?” 라고 물어봤었다. 단체로 야단맞던 애새끼들이 10명 쯤 되었는데 나를 포함한 두 명을 제외하곤 다른 친구들은 자신들의 꿈이 무엇인지 대답했고 꿈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한 나와 그 친구는 꿈도 미래도 희망도 없는 한심한 잉여인간 취급을 받았었다.

“꿈이 없으면 공부를 할 이유가 안 생긴다. 내일까지 당장 꿈부터 가지도록 해라.”

정말 일리가 있는 말씀이었다. 그렇긴 해도 내일까지 당장 꿈이 생기길 바라셨던 것은 일리가 없는 말씀이었다.

꿈이 없었기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나는 대충 수능을 쳤고, 나온 수능 점수에 맞춰서 원서를 적어보기 시작했다. 대학교들에서 날라 온 찌라시들과 복잡하게 분석된 적성검사표,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계획을 대학원서라는 백지장에 그려 보려니 막막했다. 세상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는지도 전혀 몰랐다.

그런 복잡한 심정으로 또 다시 한번 꿈에 대해 고민하던 중에 바쁘신 고3담임선생님의 귀한 시간을 뺏어서 5분 동안 상담을 받았다. 그 때 추천해주신 ‘경성대학교 멀티미디어대학 디지털콘텐츠학부 디지털영상전공’(가장 이름이 길어서 눈에 튀었다.)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그 쪽으로 원서를 넣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를 다니고 있고 아직도 나는 내 꿈이 뭔지 모르겠다. 이러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큰일 날 것 같아서 졸업을 한 학기 남기고 휴학한 뒤 호주로 도망 와 있는데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꿈이 생기긴 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사실 사람들이 꿈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도 가지고 있긴 한데, 나의 꿈은 특정한 직업이나 인생계획 따위로 세워놓진 않았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정직하게 사는 것,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 정도로만 세워 놓았다. 인생의 기로가 어떻게 바뀔 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호주에 오기로 한 것도 한 달 만에 결정한 것이고 브리즈번을 떠나 멜버른으로 가야겠다는 결정도 저번 주에 했다.

알지도 못하는 앞으로의 인생을 꿈이라는 황급한 계획을 세우면서 가능성을 모두 닫아버릴 수는 없잖아.

기업이 사람을 잡아먹네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인 친구를 만났다. 모 회사의 인사부 행정직으로 6개월 째 일하고 있다는 그녀는 겨우 반년 만에 300명이던 직원의 수가 90명으로 줄어든 것에 허희탄식했다. 이제까지 해고당한 200명의 직원들을 생각만 하면 너무 미안하다며 특히 40~50대의 아저씨들은 이직할 곳도 마땅찮아 생각 날때마다 입맛이 씁쓸해진다고 했다. 내 친구가 직원들 월급을 챙겨주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 해고통보를 날려야 되는 임무를 담당하고 있어서 보람보다는 자책감을 많이 들게하는 나쁜 직장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런 일을 하는데도 돈을 많이 챙겨줘서 좋은 직장이라고도 했다.

직원들을 해고한 이야기를 계속 하다보니까 그들을 누가 해고시킨 것인지가 애매해졌다. 회사에서 잘려나간 직원이 불과 반 년 만에 200명. 설마 입사 6개월 경력밖에 없는 내 친구가 자른 것인가? 최후통첩을 날리고 직원들을 자른 것에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으니 정말 내 친구가 자른 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 회사 안에 있지 않았더라도 200명의 직원들은 잘려질 운명을 갖고 있었으니 내 친구의 탓은 분명 아닐게다.

그럼 회사의 우두머리인 사장이 잘라낸 것인가? 회사의 직원들이 나가서 회사의 규모가 작아지면 가장 안타까워 할 사람은 사장이 아닌가. 또 잘라놓고 가장 미안해 할 사람또한 사장이다. 애플사를 설립했던 스티븐잡스는 직원들과 트러블이 생겨 회사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니 기업에서 쫓아내는 사람이 사장이라고 말하면 안되겠다.

그럼 자른 사람은 없단 말인가? 잘린 사람은 수두룩한데 자른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Give and Take, 액션과 리액션, 작용과 반작용, 자극과 반응이라는 인과법칙을 기본으로 하는 많은 자연현상들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있으면 따라서 자른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자른 사람이 없나? 아무래도 자른 사람은 어디에도 안보인다!!

자른 회사는 있는데 자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회사가 잘랐지 어떤 사람이 자른 것은 아니다. 잘린 사람들도 ‘여보, 나 회사에서 잘렸어. 엉엉’ 이라고 말하지 ‘여보, 인사과장 그새끼가 마침내 나를 잘라버렸어’ 이라고 말하진 않는다. 내 친구가 자른 것은 아니지만 내 친구의 직위인 인사과 행정직이 자른 것은 맞다. 그 회사 사장은 자르고 싶지 않아지만 사장이라는 자리가 직원들을 쳐낼 수 밖에 없었다. 기업의 조직적 체계가 기업원들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기업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그런 목적으로 기업에 들어갔던 신입사원들도 기업이라는 조직에 흡수되고 자부심을 느끼며 열심히 일하게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입사하는 순간부터 명함에는 자신의 이름보다 먼저 회사의 이름이 더 화려하게 나온다.

분명 회사를 세운 것은 사람들인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회사라는 조직의 구성원이나 일부 부품 따위로 취급되고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이라는 체계에 이끌려 다니게 된다. 형체도 실체도 없는 기업따위가 이성이나 감성이 있을리가 없고 인간과의 정이 통할리도 없다. 차가운 철근 콘크리트를 빌려 존재하는 기업체는 냉철하게 자신의 번식과 생존만을 목표로 인간을 동력원 삼아 부피를 키워간다. 어쩌면 SF영화에서 벌어질 법한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는 상황과 같은 일인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 덧붙임 (2015.12.18) —–

2010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로 진출하는 게 겁이 났던 나머지 이렇게 변명의 글을 쓰곤 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현실 도피를 목적으로 호주에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