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민을 주머니에 넣었다.

숫자를 보지 않기로 했다.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전에 본 풍경들. 이전에 느낀 감정들. 라이더 이은호는 다시 깨어났다. 몇 달 동안 숫자에 묻혀 사느라 잊고 있었다.

모든 숫자엔 의도가 들어가있다.

속도는 더 빠르게
파워는 더 높게
심박은 더 가쁘게
거리는 더 멀리
밸런스는 더 동일하게
평활도는 더 균일하게
주행시간은 더 오래
주행빈도는 더 자주

사실 숫자는 잘못 없다. 해석하는 사람의 잘못이다. 숫자는 그저 보여줬을 뿐이다. ‘더더더더’ 를 붙여 해석한 건 나다. 누구의 잘못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난 너를 주머니에 넣었고, 오늘 저물어가는 저 해와 함께 너의 역할 해임식을 거행할 것이다.

숫자가 나의 라이딩을 결정하지 못하게 하겠다.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유치한 게이미피케이션. 실존하지도 않는 허무하고 과장된 목표를 백개씩 만들어 사람을 옥죈다.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겠다. 설계된 사육을 당하지 않겠다.

스트라바는 나를 위한 서비스가 아니다. 선수 또는 선수를 꿈꾸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나도 선수가 된 것 마냥 세상을 다 씹어먹을 각오로 클릿을 꽂아넣곤 하지만 매일 그럴 순 없다.

가민을 켜고 스트라바에 로그를 올린다는 것 때문에 나의 저녁 라이딩이 레이싱이 되어선 안 될 일이다. 숫자로 타는 자전거는 분명 새로운 세계였지만 내 자전거 세계의 전부가 될 순 없다.

오래 탈 필요도 땀흘릴 필요도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땀띠나는 심박계를 찰 필요도 쫄쫄이를 입을 필요도 없다. 장갑도 안끼고 헬멧도 안썼다. 클릿슈즈도 벗고 빤쓰도 벗고 타려다가 참았다.

오늘도 느긋한 마음에 낙조를 보러 나온 것은 그동안 잊고 살았던 자전거를 되찾기 위함이다.

랜스 암스트롱도 한쪽 부랄을 잃고 나서야 처음으로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는 마실라이딩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랜스 형은 요즘 자전거를 좀체 안 탈런지, 샤방 마실 즐길런지, 존나 빡세게 로라 굴릴지 대뜸 궁금하다. 이 글 본다면 오랜만에 카톡 한 통 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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