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요리사 3명은 한국에 무슨 얘기를 남겼나? –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가 한국에 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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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19일 롯데호텔에서는 피에르 가니에르, 조안 로카, 르네 레드제피가 글로벌 리더스 포럼에 참여해 한 자리에 모였다. “세계 3대셰프에게 음식의 길을 묻다”세션은 한식재단의 후원과 참여로 진행되었다. 그 내용이 한국의 식문화 발전, 더 나아가 한식의 세계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기에 기록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한다.

이틀간 진행되는 글로벌 리더스 포럼의 6가지 세션 중 하나로 ‘요리사’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이에 주최측은 “요리는 삶의 방식이고 민족성의 중심이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즐기는 문화적 수단이다”라고 말하며 “높은 경제력을 위해서 관광산업의 호황과 그를 뒷받침할 수준 높은 식문화가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이 날 참석한 셰프들은 세계적인 식문화를 선두함으로 국가의 관광산업을 활성화에 식문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해냈으니, 셰프는 그저 요리를 하는 사람을 넘어 국가 경제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리더임이 자명해졌다.

이 세계적인 세 명의 셰프는 공통적으로 한식과 연관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먼저 분자요리계의 선구자로 불리며 “요리계의 피카소”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피에르 가니에르는 한국에 그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오픈했다. 파리, 도코, 홍콩에 이어 네 번째다.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전통시장을 돌며 식자재를 파악할 정도로 한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프랑스 요리에 한식을 과감히 조화시킨 ‘김치 마멀레이드’, ‘쌀과 샴페인을 가미한 비스크’등을 선보이고 있다.

조안 로카의 레스토랑 ‘엘 세예 데 칸 로카’는 3형제가 운영하는 곳이다. 맏이는 요리를 맏고, 둘째는 와인을,막내는 디저트를 담당한다. 그의 주방은 물리학자나 화학자의 실험실에 가깝다. 전통적인 방식과 현대기술을 접목한 요리로 스페인 요리를 세계 최고 자리로 이끌어 놓았다. 그의 레스토랑에서는 한국의 된장과 간장으로 맛을 낸 양고기 요리와 파스타가 있다. 2009년 우연히 한국 장을 처음 접한 뒤 그 감칠맛에 매료돼 꾸준히 장을 이용한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고 한다.

르네 레드제피의 노마(NOMA)는 북유럽 요리를 뜻한다. 노마는 세계적인 요리 트렌드가 ‘분자요리’의 흐름을 친환경적이교 재료 본연에 집중한 음식으로 돌려 놓은 곳이다. 작은 식당이 중소기업 이상의 연매출을 올리는데 3개월 단위로 예약을 받는 자정은 개시 직후 마감이 된다. 8년 전에는 16명의 손님이 전무였지만 지금은 하루에 1500명이 찾는다. 이런 노마에서도 발효음식에 관심이 많아 한국에서 된장을 공수해 연구했으며 주방에 ‘발효 숙성실’을 만들어 견과류를 이용한 노마식 장을 제조해 만들고 있다.

세 명의 셰프가 각자 키노트 스피치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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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에르 가니에르

한국에 정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문화가 달랐고 식재료가 달랐고 소비자들의 성향이 달랐다. 오늘 이 자리는 내가 요리사로써 걸어온 길을 정리해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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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요리와 일하는 모습을 사진 슬라이드로 넘겨 보여줬다.)

내 인생을 이렇게 사진으로 담아놓으니 자연 사진도 없고 바깥 활동하는 사진도 없다. 이게 바로 내가 걸어온 길이다. 나는 생업을 위해 요리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식당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무감으로 가업을 이어 받았다.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처음에 나는 요리가 즐겁지 않았다. 그 상황에 대해 질문도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재미없던 10년이 지나갔다.

“정말 재미도 없고 관심도 없는 데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매년 똑같고 반복적인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 상황을 폄하할 이유는 없다. 그것도 굉장히 멋진 수준이긴 했으니까. 그러던 중 한 칼럼을 읽음으로 ‘요리는 사람의 관계를 이어준다’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요리를 계속 해왔지만 정작 요리의 의미에 대해선 몰랐던 것이다.

b3나는 날렵하지도 않았고 기교가 많지도 않았으며 두뇌가 특출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뭔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 에너지가 넘치기 시작했다. 1981년에 처음으로 나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그 주변은 상업도시였고 생활형편이 넉넉치 않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명성을 가지기에 적합한 위치는 아니었으나 일을 열심히 할수록 현지인들은 오기 힘들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

그렇게 찾아온 손님들에게 무엇인가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예술을 하고 싶었다. 메뉴판에 없는 메뉴를 추천하기를 즐겨 했고, 추천한 메뉴를 먹겠다고 하면 주방으로 돌아오는 순간 또 마음이 바뀌어 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곤 했다. 나는 요리하는 그 순간에 충실 하려고 한다. 메뉴는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성이며 그 당시의 열정을 요리로 담아내는 것이다.

부도가 나서 재산을 모두 잃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걱정을 크게 하진 않았다. 부도의 원인이 내 요리 때문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 파리에서 식당을 열었고 큰 성공을 거뒀다. 식당을 런던에 열자는 무모한 계획도 진행했는데 이 또한 성공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불행인지 행복인지 모르겠다. 나는 돈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장인이 되고 싶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을 뿐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제안과 도움을 받았고 지금까지 총 15개의 레스토랑을 가지고 있다.

해외의 레스토랑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는 팀원을 존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외의 레스토랑에 전수할 수 있는 것은 요리 기술이나 재능이 아니다. 정신과 태도를 전수해야 한다. 매일 매일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 고객에게 충실하는 것, 이 정신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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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안 로카

우리(그는 계속해서 ‘나’가 아닌 ‘우리’로 표현했다.)가 사는 곳은 산악 지역이다. 인구가 9만명인 작은 도시이고 주로 노동자가 살고 있는 곳이다. 아버지는 스페인의 전통 음식인 카탈루니아 지역 음식(이하 카탈란)을 선보이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음식을 파는 일을 3대째 하고 있고 3형제가 함께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큰 행운이라 생각한다. 형제가 함께 일을 시작한 것은 26년째다.

우리가 하는 일은 꿈이라고 생각한다. 요리라는 것에 만족감을 느끼고 싶었다. 20년 동안 노력한 끝에 7년 전 새 장소로 이전했다.

요리사는 만족을 모르는 사람이다. 항상 창의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고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상상력을 가지고 시작했고 그 열정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창의성이다. 창의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연구실을 만들었다. 연구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창의그룹으로 계속 새로운 생각과 시도를 하고 있다. 그 결과물들이 메뉴가 되기도 한다.

식당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인턴을 하러 온 사람도 있고 함께 일하려고 온 사람도 있다. 한국인 ‘최’도 있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이 창의성을 불러일으켜주는 원천이라고 볼 수 있다. 20명의 웨이터와 전문 셰프들로 팀이 이뤄져 있으며 15~17개 국적의 음식을 선보이고 있다.

‘스탭’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 2년 전부터는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을 휴식하기로 했다. 가끔은 점심시간 서비스를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창의적인 시도를 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고, 결과물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서비스하는 시간 외에도 많은 경험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여행을 아주 좋아한다.

12한국은 스페인과 공통점이 많다. 기온도 비슷하고 사람들과 성격도 비슷하다. 한국인은 따뜻하고 친절하다. 한국에 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 중 하나가 붕어빵이었다. 붕어빵을 활용해 에피타이저를 만들어냈다. 한국에서의 인상적인 경험을 담은 전채요리다. 손님들은 가보지 못한 한국이지만 우리가 가봤기 때문에 소개해드리고자 이 메뉴를 만들었다. 지구의 모습이 프린트 된 덮개를 씌우고 노래는 “We Are The World”를 틀어준다.

여행을 하는 중, 그 국가에서 느꼈던 풍미를 어떻게 음식으로 담아낼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한다. 이제껏 한국을 두 번 방문했는데 보쌈도 큰 영감을 줬다. 한국의 전통 장이 사용되고 김치도 곁들여지기 때문에 인상적이었고 이를 담아낼 메뉴를 개발했다. 식용유를 사용해 밀가루 반죽을 튀겨내고 그 속에 튀긴 삼겹살, 김치, 장을 넣어서 보쌈처럼 쌓인 듯한 느낌으로 메뉴를 만들었다.

한국의 흑마늘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도 있다.

이건 한국인 ‘최’가 한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중탕기계다. 우리는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편이다. 처음 접하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고 겁을 먹는 게 아니라 호기심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지금 중탕기는 발효용으로 쓰고 있다.

b2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어떻게 요리를 하는지, 어떤 재료를 사용하는지, 맛을 풍부하게 만드는 방법이 무엇이 있는지를 계속 찾아낼 수 있다. 5주동안 레스토랑을 닫고 라틴 아메리카의 많은 국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38명의 스탭이 함께 갔다. 보고타, 멕시코시티 등 여러 도시를 거쳤는데 각 나라의 음식을 살필 수 있었던 경험이었다. 멕시코에서 자주 사용하는 옥수수라는 재료를 한국의 중탕기를 사용해 발효를 시킨 뒤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냈다. 한국과 멕시코에 가보지 않았다면 이것을 어떻게 만들어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여행은 중요하다.

한국의 쌀 뻥튀기도 인상적이었다. 스페인의 전통음식 카탈란에는 쌀을 이용한 요리가 많은데 우리가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곡창지대에서 나는 쌀을 활용해 뻥튀기를 만들었고 요리를 얹어내는 받침으로 사용하기 적합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육지와 바다가 접해 있는 곳이다. 육해공이 한 접시에 담긴 조화로운 음식을 만들어내고 싶었다. 돼지고기 위에 정어리 껍질을 덮었다. 생선처럼 보이지만 돼지고기다. 여기에 진한 향이 나는 간장을 소스로 사용했다.

이렇게 한국의 재료들이 스페인의 전통음식과 접목되고 있다. 여전히 이건 카탈란 전통음식이다.

한국의 음식은 굉장히 흥미롭고 가치가 높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정통성을 보다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이 창의적으로 찾아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잠재력이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높게 승화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법을 더 다양화하고 현대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다. 그것이 음식을 국제화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잘 팔리는 음식을 만드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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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르네 레드제피

한국에서 초청을 4번 넘게 받았는데 이제서야 한국에 왔다. 그 동안 자식을 3명이나 낳느라 바빴다. 양해해달라. (객석 웃음) 청년기에 모두 축구선수나 아이돌 사진을 방에 걸어놓지 않나? 나는 알랭 뒤카스와 같은 요리사의 사진을 벽에 걸어두고 자란 사람이다.

난 과거에 머무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야기를 하기 위해 12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의 우리는 젊었고 이상주의자들이었다. 한 창고를 개조해 식당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의 경관, 덴마크의 문화를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사하는 사람들에게 식사라는 경험과 시간을 최대한 부각시키려고 했다. 그 순간을 맛볼 수 있게 하자. 그래서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선배들이 항상 했던 것처럼. 우리 정체성을 찾아서 음식에 담아내는 것을 하고 싶었다.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는 것은 서슴지 않았다. 항상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왜 이렇게만 해왔을까? 왜 여기서 벗어날 순 없을까? 틀을 깰 순 없을까? 다른 음식문화로부터 배울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 많은 질문들보다 우선은 맛이 중요하다. 맛이 있다는 조건 하에 이 다양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했다.

과거를 찾아내고 미래를 비추어보자는 것이 우리가 가졌던 사명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접시 위에 시공간과 경관을 담자는 의견에 회의감을 보였다. 아니, 거의 반발 수준이었다. 노마와 발음이 비슷한 ‘고래 음경’ 또는 ‘물개 생식기’로 이름을 바꿔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고래 음경을 먹어보긴 했지만 맛이 썩 나쁘진 않았다. (객석 웃음)

당시 비판하던 사람들의 의견은 이러하다. “왜 캐비어같이 인정받은 고급 음식을 등한시하고 생소한 음식을 찾으려 애쓰냐?” 당시 주변의 쟁쟁한 레스토랑을 보면 정통 프랑스 요리를 선보이고 있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음식이 있었다. 소소한 변화가 있을 뿐 서너 가지 주요 메뉴를 계속 복제해내는 곳들에 불과했다.

도심지에서 벗어나 요리를 하면 조금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시도했지만 멸시는 계속되었고 실제로도 처음의 시도는 그렇게 괜찮지 않았다. 크렘블레에 와인을 넣는다든지, 화이트와인을 넣어야 할 곳에 사과발효주를 넣는다든지, 이런 시도들을 하면 뭔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

크렘블레가 지상 최고의 요리라 하더라도 그건 프랑스 요리이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현장성을 크렘블레에 담는 것은 무리였다. 그 실패가 노마에겐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우리는 더 많은 생산자와 만나기 시작했다. 산타클로스와 똑같이 생겨서 클로스라고 불리는 농부아저씨, 깊은 수심에 직접 잠수해 성게를 캐어오는 잠수부를 만났다. 식당의 좌석이 반도 채우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런 노력은 계속했다.

기존에 배운 것들을 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계속 고집을 밀어붙였고 수개월이 지났다. 우리는 강인해졌다. 예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요리들이 탄생했다. 실험을 계속하면서도 우리는 스스로의 기준을 높여 잡았다. 일정 수준이 나올 때까지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했다.

10시계를 다시 오늘로 돌려보자. 그 당시 하나의 식당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100명의 직원이 있는 5개의 식당이 되었다. 박사학위를 딴 사람, 인류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음식을 배우기 위해 노마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함께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서비스와 음식 준비를 도와주고 있지만 노마에도 실험을 전담하는 주방이 있다. 이 실험실을 우리는 ‘직감의 방’이라고 부른다. 이 방에서는 무조건 신메뉴만 생각하고 갖은 실험을 한다. 직감의 방에 들어가면 보통 99%의 실패를 맛본다.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해야 한다. 이 과정이 있기 때문에 발전을 할 수 있고 창조가 일어날 수 있다. 6년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공간이고, 지금도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끝없이 푸쉬하고 있다.

최근에는 어떻게 곤충을 식재료로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 여러 문화권에서는 이미 영양이 풍부한 식재료로 이용되고 있다. 개미의 아삭한 식감을 알고 난 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왜? 하필 개미야?”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싶다. 객석에 계신 분 중 꿀 드시는 분?

자 보다시피 모두 꿀을 먹는다. 사실 꿀은 벌의 토사물이다. 벌이 꽃의 수분을 빨아먹었다가 다시 토해내는 게 꿀이 아닌가. 새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미보다 훨씬 징그럽게 생겼다. 개미를 발견한 순간 “아, 우리는 바보가 아니었을까? 왜 개미를 먹을 생각을 못했지?” 항상 옆에 있던 개미였는데, 지역에 대해 놀라운 발견을 한 순간이었다.

b1노마에서는 발효음식도 연구하고 있다. 한국처럼 덴마크의 겨울은 무척 춥고 혹독하다. 5~6개월 동안 계속되는 겨울 동안 발효라는 것은 무척 중요한 것이다. 발효가 있기에 빵, 와인 등을 누릴 수 있는 게 아닌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한국인들이니 발효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예전에 버려야만 했던 채소의 갖은 부분들은 육수로 끓여낼 수도 있고 식초에 절여 먹을 수도 있다. 발효를 이런 곳에 적용할 수 있다. 얼마 전 30년 된 4개의 컨테이너를 구입해 발효공간으로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모든 음식을 썩히고 있다. 맥젓, 미소된장 등 모든 음식을 썩혀본다.

현재 노마는 점심과 저녁 모두 만석이다. 2주 전 점심 웨이팅 리스트에 4000명이 이름이 올랐지만 40명 밖에 대접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 일을 이룰 수 있었나?”라는 질문을 주최측에서 했다. 창의성을 가지고 일을 하려 했다는 답변은 당연한 소리다.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는 음식 말이다. 이런 중요한 것을 놓치고 기존의 방식에 따랐다면 노마는 수많은 발견을 놓쳤을 것이다.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도 이 일을 했기에 다른 곳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셰프쟈켓과 앞치마를 매야 한다는 규율도 파괴했다. 편안하게 요리하고 손님은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지금은 주방에 일본, 호주, 한국사람이 더 많다. 현재 4명의 한국인이 함께 일하고 있다. 동료 중 데이비드 창 이라는 셰프가 있는데 이 사람의 독창적인 생각이 전 세계로 퍼져나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레스토랑의 메인 홀을 닫았다. 메인 홀에서 가장 많은 돈이 나왔는데 이걸 닫아버렸다. 셰프들에게 메인 홀은 끔찍한 곳이다. 대규모 연회를 매일같이 연달아 하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메인 홀의 큰 테이블을 갖다 놓고 스탭들이 밥을 먹을 수 있도록 장소를 바꿨다. 노마가 계속 바뀔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질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높아졌다 식음료업계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뤘다고 생각한다. 이런 변화가 있었기에 하버드를 나와서도 음식을 하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도 생긴 것이다. 예전엔 학교를 중퇴했거나 범죄자들이 주방에서 일을 했다. 지금은 인간적인 존중이 있고 창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는 공간으로 바꼈다.

코펜하겐은 음식으로 유명한 곳이 아니다. 음식 역사에서 소외된 곳이 부각되고 있다. 어느 논문에서 말하기를; 지난 5년간 덴마크의 관광산업이 12% 성장했는데 그 이유가 음식 덕분이라 했다. 이건 놀라운 수준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이 많다만 막 걸음마는 뗀 단계이고 곧 청년기를 겪을 것이다. 노마도 훗날 지루한 어른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질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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