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은 복합 문화의 메카, 새로운 식문화 트렌드를 이끌어나가는 식당들이 가장 먼저 생겨나는 곳, 이태원의 정은빌딩 5층의 한 작은 사무실에는 요리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은 한국 유일의 조리복 전문 제작사인 븟-BEUT 사무실이다. 븟은 순 우리말로 부엌을 뜻한다. 이곳에 들어와보면 여기가 부엌인지 옷을 파는 곳이 맞긴 한지 분간이 안 된다. 현관부터 빼곡히 수납된 조리복은 업무 공간을 침범해 천장까지 쌓여있고 3명의 직원은 조리복 담장으로 단절된, 구석의 어둡고 작은 공간에서 어깨를 부딪히며 업무를 보고 있다.
반면 부엌과 부엌 맞은 편의 손님용 휴식공간은 꽤 쾌적하다. 200여 권에달하는 요리 서적, 음료는 셀프, 요리가 하고 싶을 땐 주방을 사용해도 된다. 요리사들의 열린 사랑방인 이곳에서는 격주로 현업 요리사를 초청해 강연도 진행한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뼛속까지 요리사, 하지만 지금은 요리가 아닌 조리복을 만들고 있는 븟 배세훈 대표. 그의 좌충우돌 창업기를 들어보았다.
| 고집불통 요리사 바라기와 부모님의 반대
15살, 요리에 빠져든 아들을 둔 부모님은 그저 재미 삼아 그러려니 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었고 어릴 때부터 항상 아버지를 따라 경찰관이 되겠다고 말하던 아들이 돌연 요리사가 되겠다며 진지하게 고백을 하니 기겁을 할 지경이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요리학원을 다녔어요. 1년이 지나니까 안양에 처음으로 요리고등학교가 생기더라고요. 그 때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1년을 꿇고 다시 조리고등학교에 입학하겠다, 부모님께 말씀 드렸죠. 그 때 진짜 어버지한테 맞아 죽을 뻔 했어요. 저희 아버진 합이 11단이시거든요”
요리학원에서 요리를 배우고 대학교를 호텔조리학과에 입학하는 것으로 부모님과 타협하며 요리 공부를 계속했다. 요리에 대한 열망은 커져만 갔지만 부모님의 간섭이 따라 커졌다. 부모님은 25살까지 요리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면 요리를 그만 두라며 다른 일을 찾기를 강요했고 결국 끈질기게 아들의 약속을 받아낸다. 어려서부터 지병이 있던 건강히 넘기는 해가 없었던 아들이 강인한 체력을 요구하는 직업인 요리사를 택한다는 것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25살이 되었지만 사회초년생이 무엇을 이루어 놓았을 리 만무하다. 인간의 삶에서 25살이라 함은 본래 본격적으로 무엇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시작하는 시점이 아니던가.
“제가 할 줄 아는 것도 요리 밖에 없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도 요리였어요. 다른 걸 하겠다는 생각도 못 하겠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언젠가 요리로 인정받겠다는 오기가 생겼어요. 제가 요리하는 것을 단 한 번도 응원해주신 적이 없었으니까요.”
항상 자신이 요리를 하겠다는 것에 반기를 드는 부모님 앞에서면 의기소침해졌다. 25살 청년 배세훈은 어머님과의 약속은 뒤로한 채 도망치듯 미국으로 떠난다.
| 호기심 많은 청년의 요리인생, 외국 문물과 장비병
그로부터 6년 동안 외국과 한국을 오가며 수많은 주방에서 일했다. 다양한 국적의 수많은 요리사를 만나봐도 공통적이었던 점은 하나같이 장비병에 걸려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도 장비 욕심이라면 뒤지지 않았다.
“좋은 칼이랑 좋은 장비를 갖고 싶은 건 모든 요리사들의 공통된 욕구죠. 그 때 하도 사모아서 지금도 집에 잔뜩 쌓여있어요. 제 주변엔 특히 매니아적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새 장비를 사오면 우와! 좋구나! 나도 가지고 싶다! 라면서 요리사들이 구경하러 모여들고 감탄하고 그러죠”
2012년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오키친의 주방에 합류했다. 새로운 업장의 개업을 준비하던 팀이었는데 좋은 조리복을 한 번 맞춰 입어보자며 미국에서 제일 유명한 조리복인 셰프웨어(Chefware)를 맞춰 입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에는 감히 살 수 없었던 10만원이 넘는 조리복이었다.
“전에 입던 것보다는 나았지만 제 값어치는 전혀 못하는 옷이었어요. 게다가 외국인 체형에 맞춰져 있어서 사이즈도 다르고 태도 안나요. 제 키가 178인데 SS를 입어야 한다니까요. 멋은 둘째치고 기능적으로도 만족 못했어요.”
좋은 조리복에 대한 욕심이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허탈함에 한동안 친구들끼리 만날 때마다 옷에 대한 불평을 이어갔다. 주변 요리사들도 불편함에 크게 공감했고 “그래 그럼 내가 한 번 만들어보자” 라는 말을 쉽게 뱉어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던 문제를 풀고 싶었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곳이었기에 발벗고 나서고 싶었다고 한다.
| 요리하는 사람에서 옷만드는 사람으로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던가, 그는 이내 옷 만드는 일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첫 샘플을 만드는 데 샘플비로만 800만원을 썼어요. 지금이야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때 2~3벌 테스트하면 원하는 모델을 만들어 내지만 처음 옷 나올 때까지 샘플을 50벌 만들었어요.”
뱉은 말을 주워 담지 못하고 개인 빚까지 내며 사업을 진행했지만 고민과 걱정은 날로 늘었다.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많아졌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몸이 약한 그가 요리와 옷 만드는 일을 병행하다 보니 과로로 몸에 병이 다시 생겼다. 미국 생활도 이태리 생활도 1년을 채 넘기지 못한 것도 같은 지병 때문이었다.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주방에서는 일을 못하고 잠시 쉬고 있던 때였어요. 건강 회복하려고 자전거를 가끔 탔는데 어느 날 크게 넘어지면서 어깨가 땅에 닿았어요. 쇄골 골절이었는데 병원에 2주 동안 입원했죠. 그런데 그거보다 더 심각한 게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교통사고가 났어요. 뒤차가 들이받아서 골절 치료용으로 대어놓았던 철판이 완전히 휘어버렸어요.”
너무 오랫동안 병가를 내어버린데다 무게가 있는 걸 들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다시 주방으로 돌아갈 순 없게 되었다. 이 상황을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할까, 사면초가라고 해야 할까. 더 이상 갈 곳도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디자인을 부탁하고 의류 수출을 하던 친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다. 그나마 회사 경험이 있던 부인의 도움을 받아 회사를 설립하고 올 해 2월 사무실까지 차렸다. 미국에서 MBA를 졸업한 친누나, 고등학교 때부터 같이 요리 공부를 시작했던 친구까지 합류했고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었다.
“첫 매출 냈을 때, 이상한 감정이 들었어요. 옷이 나왔다고 신나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데 어떤 셰프님이 덥썩 사겠다며 8만원을 쥐어주고 옷을 가져가는 거에요. 뭔가 느낌이 이상했어요. 기쁘기는 한데 이 돈을 받아야 하는 게 맞나? 요리사는 하루에 수백 개의 접시를 내면서도 음식값을 직접 받진 않잖아요. 그 날 저녁에 혼자 소주 마시면서 울었어요. 고생한 것도 기억 나고 이제는 내가 요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옷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건강이 약하고 사고까지 났던 것은 확실히 불운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새옹지마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븟은 지금까지 23종의 상의 조리복, 9종의 하의 조리복, 11종의 앞치마를 자체적으로 만들어냈다.
| 국가대표 조리복 브랜드 븟-BEUT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생산된 조리복은 모두 가운사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성가대의복, 졸업가운, 의사가운 등을 대량으로 만드는 복합 제조사인 가운사에서는 조리사의 하루 일과나 몸의 움직임 등에 대한 깊은 고민없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븟에서 만든 모든 조리복은 등판이 모두 쿨론 메쉬 소재로 되어 있다. 스포츠웨어에 주로 쓰이는, 바람이 잘 통하고 빨리 건조되는 기능성 소재이다. 땀을 많이 흘리고 더운 주방에서 일하는 조리복이라면 당연히 이 소재가 쓰여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뒤 기장도 길게 내려와있어서 쪼그려 앉아 물건을 꺼낼 때 뒤 허리살이 드러나지 않는다. 노트를 자주 해야 하는 조리사들이 휴대하기 편하도록 펜을 꽂는 위치도 섬세하게 조정했고 소매를 걷었을 때 불편하지 않도록 안감 마감 박음질처리가 되어있다. 목에 건 앞치마 목 끈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고무 패킹도 부착되어 있다. 실제로 주방에서 일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생각해내지 못할 부분이다.
그가 가장 욕심을 낸 부분은 카라 부분이다. 모든 나라마다 그 나라의 조리복 브랜드가 하나씩 있기 때문에, 븟 조리복에는 한국적인 느낌을 담아내고 싶었다는 고집을 다시 보여주었다. 지금 가장 대표적인 조리복 모델에는 목 카라는 보기 좋게 오른쪽 어깨까지 뻗어나가 있지만 이 라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시도했던 샘플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실제 제작을 담당하는 공장에서는 븟 배세훈 대표의 깐깐함과 억척스러움에 고개를 가로젓는다. 주문은 복잡하고 종류는 많은데 수량은 적다. 가장 많이 주문했을 때가 100장 밖에 되지 않으니 좋아할 리 없다며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대량생산되는 옷에 비하면 옷값이 비싼 편이다. 주문량이 많지 않아 제작단가가 워낙 높기 때문인데, 사정은 나아지고 있지만 아직 흑자는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한다.
“저는 요리사였던 사람입니다. 요리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함이라 믿고 있고요. 그 마음을 저버리면 사업은 조금 더 나아질 수도 있겠지만 요리사로서의 자존심을 버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고지식한 면이 적잖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고집이 지금까지의 쉽지 않은 창업과정을 버틸 수 있게 해주었고 또 장인정신이 깃든 옷을 만들어 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하는 걸 좋아하는 그의 입에서 하루 동안 나오는 다양한 이야기들의 범주는 ‘요리, 요리사, 조리복’ 이 세가지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직도 그는 사업가라기 보다는 요리사로 보인다. 요리를 직업 할 수는 없으니 요리사를 위한 일을 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낀다는 마음으로 앞으로도 좋은 제품을 개발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