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요리사를 위한 구인구직 서비스를 기획했다. 요리를 위한 매체를 운영하고 있었기에 그럴싸한 계획이라 생각했다. 경쟁 서비스는 17년 전에 만들었으므로 내가 새로 만들면 당연히 더 나을 것이고 사람도 끌어모을 수 있을 거라 막연히 기대했다. 하지만 나는 서비스를 제대로 만들어내지도 못하고 게임을 접었다. 싸우기도 전에 졌다. 링 위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최근 구인구직 서비스를 하나 더 기획했다. 어느정도 윤곽이 보이자 서비스를 공개하기 부끄러웠다. 이 서비스 또한 링 위에 올리지 않았다. 5년 전 발생한 사건과 너무 흡사해서 스스로 놀랐다. 나는 이 분야에서 하나도 나아지지 못했구나. 생산의 결과는 공정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므로, 같은 공정을 거치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또한 유추 가능하다. 이번 복기는 내가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공정에서의 잘못들을 되돌아보기 위한 복기이다.
복기를 하기에 앞서서, 복기에 대한 생각부터 정리한다. 복기는 보통 같은 종류의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할 때 적용하면 좋은 패턴 파악 방법이다. 게임이나 운동에 적용하기 좋다. 형식이 제거된 게임의 규칙이란 대체로 단순해서 궁극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목적지와 그 경로를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사업은 상대적으로 복합적이다.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그 원인이 다양하게 작용했을 수 있다. 따라서 복기를 하더라도 정확한 원인이나 개선방향을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상황을 해석하려고 하더라도 내가 개입되었던 사건이기 때문에 객관적일 수 없다는 문제도 있다. 또한 현재의 내 마음이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에 따라, 현재의 결정이 옳다고 판단내리기 위해 과거를 해석하는 관점에 투영되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인과관계를 파악하려는 태도는 불가지론에 어긋나며, 복기를 통해 큰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것도 성급한 결론 도출로 이어지거나 사소한 사안을 과장해서 받아들이려는 중요도 파악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사업을 되돌아볼 때에는 복기를 하더라도 구체적인 결론을 찾아내진 못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접근해야 한다. 결론을 찾지 못하더라도, 절차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것이다. 실제 세상은 체계적이지 않기 때문에 성급한 체계화와 규격화로 인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최소한의 복기의 틀은 마련되어야 한다. 과정으로서의 복기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해법을 찾지 못했더라도, 나중에 내공이 더 쌓인 나를 위해서라도 틀에 맞춰 사태를 객관화시켜야 한다. [문제정의/개선]의 2가지 구성이 일반적이겠다.
확장과 초심의 문제
한 번 형성된 서비스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가 변경되긴 어려웠다. 덕지덕지 붙이는 것도, 억지로 늘여 넓히는 것도 올바른 운영방식이 아니었다. 특정 고객의 수요를 특정 조건을 충족하는 공급자와 연결하는 서비스의 콘셉이 바뀔 수 없었다. 그래서 확장 계획을 성급하게 몇 가지 생각했다. 에딧폴리오(구인구직) 에딧팜(직접공급) 하지만 이 두 계획은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결에 맞지 않았다. 한 그릇에 담기지 않았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서비스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란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 지금껏 3년 8개월 동안 축적한 경험과 경쟁력이 신사업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접근이였다. 실행되더라도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 비드폴리오의 초심은 아래 세 글에 잘 쓰여져 있다. 초심을 지키면서, 산업 내에서의 역할을 지키면서, 중개자의 철칙을 지키면서도 서비스를 확장할 방법은 나온다. 까다로운 조건이 설정되어 오히려 더욱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비드폴리오 창업 동기 (파트너스 편지) http://vidfolio.kr/?p=6251
비맴심서(比買心書) – 비드폴리오 매니저가 갖춰야 할 마음가짐 http://vidfolio.kr/?p=7483
영상제작 거래중개서비스를 창업한 8개월의 기록https://leeunow.mycafe24.com/?p=781
내가 만든 세상에 스스로 갇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가진 것이 세상에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내가 가진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욱 깊게 들여다보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잘 만들었다고 만족스러울 때면 멋드러진 이름을 붙이고 흐뭇해했다. 그럴수록 애착이 생기고 이것은 어떤 의미인지 곱씹어보며 자화자찬을 내뱉으며 구성원의 공감을 억지로 이끌어냈다. 그럴수록 내가 만든 세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 가진 것에서부터 생각하는 잘못. 나의 solution은 고작 수단일 뿐인 기능이나 필요에 따라 형성된 절차들일 뿐이었다. 생각의 출발은 고객이어야 하고 생각의 끝도 고객으로 향해야 한다.
목표 동기화의 문제
추상적인 미션은 있으나 구체적인 목표가 가시화되지 않았다. 실행 계획들이 미션에 전혀 일치하지 않음에도 수행하는 이유는 alignment를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한참이나 진행된 후에야 많이 어긋나있음을 알게 되었다.
>> 목표를 가시화해야 한다. 가시화란 눈앞에 선히 보인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구체적이어야 한다. 숫자로 표현되면 가장 구체적이다.
필요 역량의 파악 문제
모른다는 것은 두 가지다. 알지 못하는 것과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뉜다. 온라인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나는 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온라인 서비스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역량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번 실패를 통해 기획자, CPO, 디자이너, 코더의 역할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 (당연하게도) 필요한 역량을 끌어오거나 직접 갖추어야 한다. 필수조건이다.
투자(도전)에 대한 태도 문제
7년 전, 사업을 시작할 때 보험이 될만한 장치나 완충지대가 없었다. 나는 쫄보 기질이 강했다. 때문에 리스크 최소화의 태도로 사업에 임했다. 최소한의 자원으로 적은 보상을 확보하는 low risk low return을 불가피하게 택했다. 이런 태도가 장기화된 습관이 되었다.
>> 이런 궁상맞은 태세는 적은 비용으로 실패의 경험을 사는 데에는 적합하겠지만, 어느 정도 여건이 갖춰진 뒤에는 리스크를 감안하는 도전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 위험감수와 비용절감은 다른 것이다. 제프 베조스는 누구보다 큰 위험을 감당하지만 여전히 문짝책상을 쓴다.
필요 역량의 공급 문제
‘자원을 적게’라는 것이 우선 조건으로 걸리다보니 선택지가 좁아졌다. 쉽고 빠르게 결과를 낼 수 있는 솔루션이라는 방법을 우선 결정했다. 그리고 구인구직 사이트를 기획했다. 그리고 시장이 받아들이기를 기도했다. 시장이 원한다고 믿으며 그 증거를 수집했다.
>> 정반대의 순서로 접근했다. [시장의 수요 > 수요의 서비스화 > 서비스의 수행]의 순서로 전개되어야 올바른 서비스의 기획이다.
공정의 문제
나는 꽤 훌륭한 기획자라고 자부하지만 웹 기획의 영역에선 얘기가 달랐다. 웹 기획자의 영역에서 보자면 3개월차보다도 못할 것이다. 웹 기획의 분야에서 올바른 공정은 따로 있으나 나는 알지 못했다. 백지의 PPT를 켜서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만으로 서비스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총체적인 서비스는 여러 기능과 시스템이 통합되어 제공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프론트 이지만 각각의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겉모습만 흉내내어 만들어낸 서비스는 경쟁력이 있을 리 없으며 ‘영원한 베타’ 정신과 정반대로 향하는 것이다.
>> 끊임없는 개선을 추구해야 한다. [현상 및 현황파악 > 착상의 파편 기록 & 정제 > 기획(실현계획수립) > 실행] 네 단계를 거치도록 기획의 절차를 마련했다. 오래 걸리더라도 이 과정을 거쳐야 올바른 제품을 만들 수 있다.
>> 첫 삽 뜨기 전에 설계도부터, 악셀 밟기 전에 네비부터, 칼 들기 전에 레시피부터
공정이 해답이라 생각하는 문제
생산성을 10배 높이는 과정에서 공정과 방법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루틴한 업무들은 공정을 개선하거나 루틴한 절차를 만들어내면서 운영효율을 높일 수 있었다. 이 방법으로 재미를 보다보니 만능해결책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갈수록 공정과 방법론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집착이 커지는 과정에서도 많은 공정과 방법론을 시도했으므로 약간의 성과는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성과가 0으로 수렴해가고 있었고 더 이상 시스템에 의존하는 태도로는 혁신은 커녕 개선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 실전에 뛰어들기 무서워 대타를 내보내는 비겁한 태도다. 공정이나 절차를 통해 효율을 높일 수 있는 분야도 있겠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 땐 공정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공정을 파괴하고 기존의 방법을 버리면서 개선이 일어난다. 이 몹쓸 태도는 나의 의식의 전원을 꺼버린다. 동물적인 감각을 아예 잃어버렸다.
분류집착
분류를 잘한다고 사용성이 좋아지진 않는다. 분류를 하는 입장의 사람은 명확한 개념의 구분이나 더욱 상세한 구분, 범주의 레벨조정 등을 신경쓰지만 그런 요인을 신경쓸수록 실제 사용자의 직관성과는 멀어지는 경향이 있다.
>> 분류불안있는 분류병자 정신차려. MECE는 도구이지 만능이 아니야.
MVP와 Prioritize
MVP를 겨냥하지 않았다. 기획자의 스위치를 켜면 망상이 시작되고 5개월은 족히 걸릴만한 규모의 프로젝트를 그리고 있었다.
>> 책임감이라곤 1도 없는 겁쟁이 기획자가 실언하도록 허용하지 말아라.
>> Prioritize는 하던 방식으로 하면 된다. “Reset Everyday, Reset Everyweek.”
합리적인 당나귀는 굶어죽는다
언젠가부터 일은 하지 않고 옳은지 그른지 판단만 한다. 하루 종일 생각을 하고 하루 종일 정리하고 하루 종일 판단을 내려도 한 발짝도 나는 나아가지 않았더라.
>> 복기도 이정도면 과한 것 같다.
몰입 가능한 환경의 조성 문제
몰입할 대상이 없었다. 시스템화와 위임을 너무 지향한 나머지 내가 풀어야 할 문제도 모두 넘기게 되었다. 내가 넘겨버린 문제를 구성원이 풀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그들이 풀거나 풀지 못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넘기는 것이 문제였다. 문제를 넘기고나니 나에겐 더 이상 문제가 남아있지 않았다. 더 이상 어떤 문제도 없는 삶은 비참했다. 존재의 가치를 잃었다. 몰입의 대상이 없는 삶. 허무함과 우울함이 밀려왔다. 무엇이 문제인지 당시엔 몰랐다.
>> 내가 무엇인가를 만들었던 경험을 되돌아보면 모두 초 과몰입 상태에 빠졌었다. 몰입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대로 된 것을 만들어내기는커녕 올바른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비단 사업뿐만 아니라, 앨범을 만들어내는 뮤지션에게서도, 기록을 갱신하는 운동선수에게서도, 복잡한 문제를 풀어내는 학자에게서도 몰입의 상태가 발견된다. 나는 과몰입을 통해 자아를 잊어버릴 지경에 다다를 때에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이다. 자아를 상실할 정도로 대상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팀으로 일한다면 팀 전체의 자아가 망각시켜야 한다.
인사의 문제
사람을 고치려고 한 문제. 문제를 특정한 사람의 특정한 요인으로 정의하는 문제.
>> 기계의 문제는 깊이 들여다보아도 된다. 깊이 들여다볼수록 좋다. 모든 행위를 미분하고 작동원리를 파악해 오류를 수정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사람은 깊이 들여다보면 안 된다. 깊이 들여다본다고 타인을 고칠 수 없다. 오히려 한 걸음 두 걸음 열 걸음 물러서야 한다. 열 걸음 쯤 물러서서 우리가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우선 확인해야 한다.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면 부딪히더라도 어깨를 부딪히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은 것이다.
>> 노동이 사라진 시대, 판단만 남은 시대에 필요한 것은 역량 평가가 아닌 케미다.
>> <구심점>으로 추가 심층 복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