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프랑스 요리에 된장을 조금 썼다고 해요. 그럼 그게 한식인가요? 프랑스 음식인가요? 사람들은 음식을 규정하려고 해요. 기존의 틀에 끼워 맞춰 이해하려고 하는 거죠.”
그 요리는 ‘ㅍ(PIEUP)’의 요리라는 설명 이외에는 불가능하다고 이상필 셰프는 말한다. ‘그럼 ㅍ이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자신의 색깔이 분명한 요리’라며 이미 많은 요리사가 입을 모아 말했던 진부한 모범답안을 내어놓는다. 같은 질문을 계속 던져도 명쾌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속이 답답해진다. 요리사에게 왜 자신의 색깔을 고집하는 것이 중요한지, 요리사의 독창성이 음식에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궁금증은 번진다.
그의 요리인생 13년을 듣다 보니, 그가 찾고자 하는 ‘ㅍ(PIEUP)’의 요리가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한국 요리사로서 전혀 남들과 다르지 않았던 경력을 가진 그가, 자신만의 요리를 찾아내기 위해 대면했던 세상은 어땠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서툴고 대책 없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얼마나 또 멀고 험난할지를 걱정하며 이상필 셰프를 소개한다.
| 문제아 날라리, 담배 연기 사이로 요리의 길을 보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담배를 배우고 일진 친구들과 어울리던 덩치 큰 불량학생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체격 좋은 학생을 발견한 태권도 선생님은 그를 도장으로 데려가 운동을 가르쳐주며 “내가 시키는 대로 운동하면 점심만 먹고 집에 갈 수 있게 해줄게. 대회 나가서 금메달까지 따오면 학교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안 나와도 돼.”라는 말로 꼬드겨 운동을 시작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배운 운동은 주먹질로 이어졌고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퇴학당하고 만다. 실제로 그 짧은 시간 안에 금메달을 따긴 했으니, 금메달을 따면 학교를 안 나와도 된다는 태권도 선생님의 약속은 어느 정도 현실이 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험하게 다루다 부상으로 이어져 더 이상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진로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학교는 그만둘 생각으로 다른 진로를 찾던 참이었다. 어느 날 밤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태우는 데, 연기 사이로 요리학원 간판이 보였다.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격증 두 개만 있으면 대학은 간다더라.”
그 길로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요리학원에 등록했으나 난생처음으로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역량의 사람들을 만나 충격을 받는다. “어떻게 레시피도 안보고 저걸 다 만들지? 나랑 나이도 같은데?” 선천적인 체격의 우월함으로 다소 유리한 상황에서 타인과의 경쟁에서 매번 이겨 왔던 이 청년은 요리도 경쟁시합으로 여겼다. 속에서 화가 치밀었고 승부욕에 불타올랐다. 요리는 그런 전투적인 마음으로 해선 안 되는 것이라며 주변에서 만류했다. 당신은 요리에 재능이 없으니 일찍 그만두는 게 어떠냐는 진심 어린 충고도 들었다.
요리를 배우던 중, 가세가 기울어 학원비를 내기도 녹록지 않았다. 장롱 속 모셔두었던 금붙이를 내다 팔아 학원비를 충당했고 스무 두 살이 되도록 군대까지 미루며 한 길 요리만 팠다. 전국규모의 요리기능대회에서 수상하며 인정받을만한 수준에 올랐다는 만족감이 들었던 시절도 잠시, 우연히 서점에서 발견한 한 권의 책이 새로운 요리의 기준을 제시한다.
그 책은 자연을 접시에 그대로 담아내는 요리사 미셸 브라의 것이었다.
“그 전에 배웠던 요리는 하는 법은 똑같이 정해져 있었어요. 고기는 가운데에, 가니쉬는 뒤에, 소스를 앞쪽으로 보기 좋게 흘러내리도록… 한 순간에 이런 스탠다드들이 다 깨져 버렸어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가르치지도 않는, 아니 본인도 본 적이 없는 책을 들고 다니는 학생이 달갑지 않았다. 그 책을 보기 시작한 이후로 질문만 많아지고 시키는 대로 하지도 않으니 선생님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가르치는 것이나 똑바로 하라는 호통과 함께 그 책은 물이 흥건한 주방 바닥으로 내던져졌다.
“원래대로의 코스를 밟았다면 호텔에서 충분한 월급을 받으면서 서른에 대리를 달고 마흔에 과장을 달았겠죠. 대학교로 가서 석, 박사 코스를 밟았다면 교수가 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겠죠.”
세계 무대로 진출할 꿈이 생긴 젊은 요리지망생에게 이제껏 해왔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작게만 보였다. 속으로는 자신의 큰 야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언젠가 앞지를 것이라는 독한 마음을 품고 주변에서 뭐라 하든 상관치 않은 채 자신만의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여든 살이 되어서도 젊은 요리사들과 경합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죽기 직전의 모습까지 다 그려놓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색깔을 찾아내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 “저는 10년 전의 호날두입니다. 당신은 퍼거슨입니다. 저를 영입하시겠습니까? ”
2006년, 허허벌판 사막 위에 도시를 짓겠다며 전 세계의 자본이 중동으로 투자되던 시점이었기에 호텔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도 급격히 늘었다. 중동의 한 호텔에서 한국인 요리사를 8명 채용한다는 공고가 떴고, 한국인 요리사 50명이 단체로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한국인 요리사 50명은 면접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대기하는 중이다. 하나같이 정장을 빼어 입었는데 마지막 번호를 받은 지원자는 급하게 온 것을 티라도 내려는 것인지 혼자 조리복을 입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서야 선배의 추천을 받아 잠시 외출 나온 것이라고 변명한다.
모든 지원자에게 간단한 질문과 대답이 오간 후에 이 마지막 번호를 받은 지원자에게도 차례가 돌아왔다. 청년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했다. 기본 조건인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대답은커녕 질문도 이해하지 못해 기회가 물 건너가는 듯했다. 이 청년은 대답은 않고 밖으로 뛰어나가더니 “영어 할 줄 아는 사람 있어요?” 외치며 한 층을 떠들썩하게 돌아다닌 후 급조한 통역관을 통해 다짜고짜 말을 전하는 것이었다.
“저는 10년 전의 호날두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퍼거슨입니다. 지금 저를 사면 싸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10년 뒤에? 아무도 나를 살 엄두조차 내지 못할걸?”
그렇게 이상필 셰프가 처음 해외로 떠난 곳이 중동 카타르의 리츠칼튼 호텔이다. 배짱 좋게 뱉은 말과 강렬한 눈빛으로 면접관을 사로잡아 해외의 주방에서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으나 생각만큼 만만하진 않았다.
타지에서는 모든 것이 서툴고 힘들었다. 견습생이란 언제나 불려다니기에 바쁜 인력이어서, 담배를 필 짬이 잠시라도 생기면 밀렸던 담배와 앞으로 못 피게 될 것까지 감안해 3~4까치를 줄줄이 태웠다. 그의 승부욕은 화를 불렀다. 견습생 사이에서 지기 싫어하는 독한 녀석으로 인식이 굳었다. 겉으로는 씩씩한 척을 했지만, 숙소에 돌아오면 외로움에 못 이겨 혼자 이불을 덮어쓰고 울었다.
“매일같이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런데 하루하루 참으면서 지내다 보면 어느새 휴일이 찾아오고, 그러다 한, 두 달씩 시간이 흐르고 있는 걸 깨닫는 거죠. 어차피 지금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배우는 것이라도 제대로 배워가자는 마음에 노트를 사서 채워 넣기 시작했어요.”
그런데도 밀려 들어오는 주문을 빼내는 데에는 누구보다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말로 이해가 안되면 그림으로 그려서 이해했다. 모든 메뉴를 그려넣고 아이디어 스케치와 레시피를 뒤죽박죽 섞으며 노트를 채워나갔다. 요리사는 기본기가 충실해야 한다는 정석적인 배움을 받아들이고 수련의 시간으로 여겼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음에도 프랑스 주방으로 들어가 굳은 일을 뺏어 맡으며 프랑스 요리의 기본기도 수련했다.
| 멘토이자 인생 동반자로 세계적인 셰프 상훈 뒤샹브르를 지목하다.
그가 ‘ㅍ’PIEUP(피읖) 이라는 특이한 아이콘을 가지게 된 데에는 상훈 뒤샹브르(Sang hoon deguimbre)의 영향이 컸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셰프로 꼽는 상훈 뒤샹브르는 한국인이지만 벨기에에서 자랐고 레르 뒤 땅(L’air Du Temps)의 셰프이다. 둘의 첫 만남은 2011년이었다. 서울고메의 연사자로 초청받은 상훈 뒤샹브르가 한국에 왔다.
이상필 셰프는 오래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를 본 적이 있었다. 고집이 분명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자신의 요리를 꿋꿋이 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요리에 자신의 고집을 부릴 수 있다니, 새로운 관점이었다. 동질감을 느꼈고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깟게 뭔데 세계적인 요리사와 동질감이 드네 마네야? 그 사람은 너를 알지도 못하잖아.”
동료의 비아냥거림을 한 귀로 흘려 듣고 주방에 사정해서 조퇴한 후 행사장을 찾았다. 운 좋게도 5분의 시간을 얻어 한 잔의 커피를 대접할 수 있었다. 요리사진과 포트폴리오가 들어있는 USB와 이력서를 건넸다. 짧은 시간 동안 친절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내고 싶었어요. 선망하던 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가 영상으로 본 그 사람이 내가 그리던 사람이 맞는지, 5분 동안 받은 느낌이 사실과 다름없는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근무하던 호텔주방으로 돌아와 대책없이 사표를 던졌다. 상훈 뒤샹브르 셰프는 아무런 답을 주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사표를 던져버렸다. 뒤늦게 답장이 돌아왔다.
“비자는 못 내준다. 여행자 보험을 들려면 네가 알아서 내라. 법적으로 따지면 무허가노동이니 돈도 줄 수 없다. 대신 레스토랑 위에 있는 작은 방은 내어 줄 수 있다. 정 오고 싶으면 와라.”
무턱대고 다시 올라탄 두 번째 외국행 비행기,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낯선 땅에 발을 디뎠고 공항에는 상훈 셰프가 마중 나와 있었다. 단 5분간의 만남이 전부였던 견습생을 배웅하기 위해 세계적인 셰프가 마중을 나오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따뜻한 포옹 뒤에 헤드셰프가 핸들을 잡은 자동차의 조수석에 앉아 설레는 마음으로 시내로 향했다. 한 시간쯤 지나 도착한 곳은 숙소가 아닌 주방이었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겠다고 하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대뜸 앞치마와 칼 한 자루를 던져 주는 게 아닌가. 이내 레시피가 적힌 종이도 던져졌다. “30분” 별다른 설명도 없이 미션은 시작되었다.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배웅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어디 쓸만한 녀석인지 아닌지 시험하기 위해 데려간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시험에서 자신이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3개월 동안 레르 뒤 땅에서 일할 수 있었죠. 그저 동질감을 느끼고 선망하던 셰프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시간을 보냈어요.”
자신의 색을 찾기 위해 떠난 여정은 쉽지 않았다. 요리학원 선생님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이 내던졌을 때부터 타지의 고향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 견습생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밤낮으로 경쟁할 때까지 쉽지 않았다.
“저는 쭉 왕따였어요. 카타르에서 일할 때에도 동양인인데다 영어도 잘 못했기 때문에 주방에서 일만 죽어라 했었는데 여기서도 팀원들과 친해질 겨를은 없었어요. 배우러 왔는데 주방에서 일하다 보면 눈코 뜰 새 없이 시간이 훌쩍 가잖아요?”
경쟁심에 긴장감이 맴돌던 팀원들과 함께 친해질 수 있었더 계기는 풋살 경기에서 첫 골을 넣었을 때였다. 처음으로 서로를 부둥켜 안고 환호했다. 인간적인 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었던 주방에서 느끼지 못했던 희열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타인의 체온, 그 때 머리 속에 들었던 생각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오늘 오후에 장사 진짜 즐겁게 할 수 있겠구나.”
벨기에의 3개월 체류 기간 무임금 스타지 생활의 마지막 날이 되었을 때, 그는 사진을 한 장 남겼다. 돈을 챙겨주지 못했으니 책이라도 한 권 준다며 상훈 뒤샹브르 셰프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 2권 중 한 권을 이상필 셰프에게 선물했다. 셰프에게 직접 책을 선물 받은 사람은 아마 자신이 처음일 것이라며 뿌듯해 한다.
그리고 셰프에게 CDP(Chef De Party)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는 추천서를 받았다. 이후 자신의 요리를 찾기 위해 한국의 호텔과 레스토랑, 싱가포르의 조엘 로부숑(Joel Robuchon)과 잔(Jaan)을 거쳐 여정을 계속 이었다. 32살까지 배움을 목적으로 스타지 여행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자금 부족의 이유로 한국에 돌아온 때가 올해 1월이다.
| 나만의 요리 색을 찾다. ㅍ(PIEUP) 다이닝의 시작
이상필 셰프는 자신만의 요리를 설명할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해 ‘ㅍ(PIEUP)’이라는 신조어를 붙인다.
“제 요리를 본 사람들은 꼭 이 이야기를 해요. 어디선가 너의 냄새가 난다. 그것이 뭔지를 잘 설명하진 못하더라도 저만의 특별한 음식이 만들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상필 셰프는 84년생 쥐띠, 올해 32살이다. 2015년 한 해도 스타지 투어를 할 계획이었으나 인연이 닿아 3~4월 두 달간 서대문구 부암동의 ILOT에서 자신의 이니셜 ‘ㅍ(PIEUP)’ 을 내건 팝업 레스토랑을 선보이고 있다.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요리를 선보이는 이상필 셰프의 각오는 가볍지 않다.
“내가 제일 기본으로 생각하는 것으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각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있잖아요? 이탈리아 음식이 최고라거나, 부모님이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는 등. 저는 제가 한 요리가 제일 맛있거든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요리를 선보인다는 것은 곧 ‘손님만족에 깃댄 자기만족’이라고 표현한다.
이상필 셰프가 요리를 만들 때 중요시하는 것 중 가장 우선 적인 세 가지는 ‘맛있을 것’, ‘손님을 배려할 것’, ‘놀라움을 선사할 것’이다. 다이닝 문화가 활성화되지 못한 한국에서 두, 세 번째의 조건이 9가지 요리가 나오는 코스요리를 먹는 경험의 가치를 설명해줄 수 있을 듯하다.
“많은 사람이 좋은 음식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식재료의 맛을 잘 살려야 한다는 것을 꼽아요. 식재료의 맛을 가장 잘 살리려면 식재료를 그냥 날것으로 먹으면 돼죠. 요리사는 재료의 본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식재료의 맛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는 사람이죠.”
이상필 셰프는 2월 중순부터 보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팝업레스토랑을 준비하며 하루에도 몇 번씩 한계를 맞닥뜨렸다. 9가지 코스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엔 하나의 기성품도 쓰지 않았고, 도움받을 유통업자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용할 수 있는 불은 2개밖에 없었고 접시를 데울 워머가 없어 피자 굽던 화덕으로 접시를 데운다. 7명이 모인 팀원은 불과 2주 만에 4명의 핵심멤버만 남았다. 한계는 계속 맞닥뜨리는 것이며 자신은 이를 정면으로 극복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다양한 경험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흔치 않다고 생각해요.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도요. 저는 치열하게 기본기를 닦았고, 또 저만의 색깔을 찾아 나가고 있어요. 앞으로도 누구보다 앞장서서 요리하고 싶어요”.
담배 연기 사이로 요리학원 간판을 보며 급히 시작한 요리였지만 어느새 그 각오와 목표는 세계 수준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세상도 5년 이내로 ‘ㅍ(PIEUP)’을 인정하고 주목하게 될 것이라는 호언장담에는 가식도 없었다.
| 레스토랑 ㅍ(PIE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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