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라이딩 커뮤니케이션 개론

▣ 팩라이딩 개요

솔로로 라이딩하면 200W를 써야 30키로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피를 빨면 150W만 써도 30키로를 유지할 수 있다. 그룹 중앙에 서면 130W만 써도 된다.
속도가 높아지면 이 차이는 더 커진다. 선두가 40키로를 유지하기 위해 350W를 써야 한다면 바로 뒤에서 피빠는 사람은 220W만 써도 되고, 그룹 중앙에선 200W만 써도 된다.
무리지어 바람저항을 이겨내는 진영을 활용한다면 FTP가 200W인 사람들이 모여서 FTP 250W인 사람의 솔로 라이딩보다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다. 또는 멀리 갈 수 있다.
모든 이동수단인 본질은 “더 빠르게, 더 멀리”이고, 자전거도 마찬가지다.
효율적인 드래프팅과 팩라이딩 기술을 통해 우리는 혼자 달리는 것 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갈 수 있다.

▣ 드래프팅

가깝게 붙을수록 앞차가 일으킨 난류 속에 내 몸을 집어넣을 수 있다. 주행효율을 높일 수 있는 대신 사고 위험은 커진다. 적당히 빨고 안전을 챙기자.
라이딩 호흡을 맞춰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2m 정도가 적당하다. 서로의 라이딩 패턴이 익숙해졌다면 1m까지 좁혀도 좋다. 하지만 1m보다 가까우면 너무 위험하다.
지그재그로 1m의 거리를 두고 달리면 시야도 확보되고 상황 대처의 거리도 있으며 정지가 필요할 때 좌우로 퍼질 공간도 마련되기 때문에 동호인들에게 가장 적합한 진영이다.

▣ 팩라이딩의 원리

기량의 차이가 크다면 바람을 맞음으로 체력을 의도적으로 소진시킬 수 있다.
기량이 높은 사람이 2~3명 있다면 로테를 돌려도 된다.
로테를 돌리는 선두 중에서도 기량차이가 약간 있다면 60초/30초/10초 씩 로테유지시간을 달리해 체력소진을 배분한다.
5명이서 로테를 돌리되 4,5번은 선두에 서기 힘들 정도로 기량이 떨어진다면 로테방법은 2가지가 있다.
① 60초/30초/10초/0초/0초로 돌리는 방법
② 1,2,3번은 로테가 끝난 후 3번 자리로 껴들어가는 방법

▣ 체력한계 공유의 필요성

팩 구성원 간 서로의 체력한계를 공유해야 한다. 힘에 부치거나, 힘이 남아도는 사람은 자신이 한계에 임박했음을 알려야 한다. 자신의 상태를 알리는 것은 팩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다.
내가 힘이 남는다면 선두에 서서 바람을 맞아 팩에 기여하면 되고, 내가 힘이 부친다면 팩 후미에 서서 최대한 체력을 보존해야 한다.
체력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버리면 나중에 팩에 합류할 때 바람을 직접 이겨내야 하기 때문에 더 큰 에너지 손실을 혼자 감당하게 되고, 장거리 라이딩이 될 경우 피로도는 더욱 누적된다.
결과적으로는 팩 선두로 2교대를 돌린 사람보다 혼자 흘러서 뒤늦게 쫓아온 사람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결과가 될 것이다.
흐르기 시작하면 에너지 소진 격차는 갈수록 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흐름이 반복될수록 팩 전체의 속도를 더 낮추는 결과를 초래한다. 한 번 흘렀다면 속도를 아예 늦춰 최대한 체력을 보존해 합류해야 하는 것이 좋다.
일부 구성원만 바람을 맞는 것을 미안하다거나 불평등하다고 여겨선 안 된다. 내 체력을 보존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라 팩을 위한 이타적인 행동이다.
팩라이딩은 함께 간다는 전제가 있다. 퍼포먼스가 가장 떨어지는 구성원을 기준으로 속도가 결정된다. 따라서 팩의 최저속도를 더 낮추지 않게 하려면 나의 체력을 가장 우선적으로 보존하고 효율적인 주행을 해야 한다.

▣ 팩 찢기

팩의 크기가 너무 크면 아코디언 효과가 발생해 후미의 부담이 커진다. 선두의 가속과 감속이 후미로 전달될 때 증폭되어 급가속과 급감속을 하게 된다. 이는 후미에 급격한 체력부담을 안긴다. 그래서 기량이 부족한 사람은 2~3번째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코스에 변수가 많고, 서로 라이딩 호흡도 익숙하지 않으며, 팩라이딩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껴있거나, 평속 30이상으로 달릴 계획이라면 찢어야 한다.
난 3~5명의 팩이 가장 적당한 것 같다.

▣ 커뮤니케이터의 역할

기량이 부족한 사람은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내야 한다. 말을 끊임없이 하는 것은 팩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다. 타인의 체력한계를 말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챌 사람은 없다.
신호는 후미에서 선두로 전달되어야 한다. 선두는 뒤돌아보기 힘들다. 뒤돌아봐서도 안 된다. 선두는 바람을 이겨내고 도로의 상황을 파악하는 두 가지 역할 이외에는 다른 역할을 맡아선 안 된다.
5명 이상의 팩이라면 중간에 위치한 사람이 커뮤니케이터의 역할을 해야 한다. 뒤에서 중간으로 중간에서 다시 앞으로 신호를 전달해야 한다. 팩이 함께 움직일 수 있도록 페이스 조절을 커뮤니케이터가 지시할 수 있어야 한다.
계속 가도 좋다는 신호 : 붙었다/더더더/오라이/높여
늦춰야 한다는 신호 : 흘렀어/같이가/못붙어/천천히
오라이는 alright을 말한건데 일본어처럼 들렸다면 기분탓이다. 내가 마 경상도 사람이어가…

▣ 솔직한 의사표현의 필요성

힘이 넘치는 굇수도 힘에 부치는 초급도 자신의 의사표현을 확실히 해야 그날의 라이딩 콘셉을 결정할 수 있다.
초급이 굇수에게 맞추려고 무리하는 것도 사고로 이어질 위험이 있으며, 굇수가 초급을 배려하면 불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내게 된다. 달리는 중간에 라이딩 콘셉을 바꾸는 것도 모두에게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 될 것이다.
2019년 오크밸리 그란폰도에서 울분이 폭발해버린 미녀라이더가 기억난다. 처음엔 자신의 완주를 위해 서포트해줄 것처럼 보였던 남성들이 라이딩 도중 변심해 그녀를 버리고 질주한 것이다. 라이딩 시작 전에 솔직하게 자신의 라이딩 목적을 알렸다면 서로에 대한 원망도 아쉬움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달리려고 마음잡고 나왔는데 마음껏 달리지 못하면 아쉬울 수 밖에 없다. 보통 선두가 가장 열심히, 의욕적으로 타려고 하기 때문에 기량 차이가 클수록 아쉬움의 크기는 더욱 커진다.
기량이 부족한 사람의 부족의 정도를 솔직히 공유한다. 서로 기량의 차이가 20%정도일지, 30%일지, 40%이상일지 측정한다.
기량의 부족을 커버하며 달릴지, 커버하지 않고 달릴지는 기량이 뛰어난 사람이 우선 결정권을 가진다.
이 의사결정 방법론은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의 <공리주의>에 의거한다.

▣ 라이딩 콘셉 개요

아래 라이딩 콘셉은 기량차이가 발생하는 상황을 전제로 작성되었다. 기량차이가 없다면 이런 콘셉 구분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기량차이가 없기를 기대할 수도 없다. 기량차이가 난다고 누군가를 원망해서도 안 된다.
자전거 좀 타려고 생업을 미룰 순 없지 않은가. 서로의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하자. 자전거가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 라이딩 콘셉과 코스의 상관관계

기량 차이는 곧 선두의 에너지를 의도적으로 소진시킴으로 좁힐 수 있다.
평지라면 라이딩에 가해지는 저항의 대부분이 공기저항이기 때문에 40%의 기량차이가 나더라도 팩라이딩이 가능하다.
하지만 업힐에서는 저항의 대부분이 중력이기 때문에 누구나 같은 저항을 받고, 때로는 후미가 더 큰 저항을 받는 경우도 발생한다.
때문에 팩 구성원 간 기량차이가 크다면 평지 중심의 코스를 선택하고, 기량차이가 크지 않다면 업힐 위주의 코스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 라이딩 콘셉 제안

[사이좋은 토끼와 거북이] 후미 최저속도 기준 함께가기 라이딩
모두가 가장 느린 페이스로 맞춰 가는 것이다. 선두는 아마 근질근질할 것이다. 후미는 미안해할 것이다. 좋은 콘셉이 아니다.

[그룹1] 오픈과 팩라이딩의 적절한 배분
오픈 구간에서는 버리고 중간 지점에서 모여서 다시 팩을 이루길 반복한다.
선두의 남는 에너지는 평지 바람막이로 소진시킨다.
구성원의 퍼포먼스가 30% 이상 벌어진다면 이 방식으로도 팩을 구성하기 적합하지 않다.

[그룹2] 오픈과 팩라이딩의 적절한 배분 & 선두의 에너지 의도적 낭비
평지에서는 드래프팅 효과로 퍼포먼스가 40% 차이나는 사람도 후미에 붙으면 선두보다 효율적으로 에너지를 사용해 팩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업힐에서는 선두와 후미의 소진 에너지가 크게 차이나지 않기 때문에 언덕을 몇개 넘다보면 선두와 후미의 잔여배터리양이 크게 차이날 수 있다.
업힐에서 발생하는 잔여 배터리양을 선두가 소진시키면 기량차이와 상관없이 함께 체력을 고갈시켜나갈 수 있다.
방법 ① 선두는 업힐을 두번탄다.
방법 ② 선두는 업힐을 오른 뒤 내려온다. 후미를 만나서 다시 꼭대기를 찍는다. 다시 내려온다. 후미를 만나서 다시 꼭대기를 찍는다.
방법 ③ 쉬는 시간에 선두는 혼자 인터벌 5번 친다.

[그룹3] 팩 찢기 & 코스 찢기
대회 코스가 그란폰도와 미디어폰도로 구분되듯이 실력에 따라 코스를 분리시키는 것도 방법이다.
뺑뺑이 코스라면 그룹을 나눠 목표 회차수를 달리 설정할 수도 있다.
후미그룹은 최단직선거리로 코스를 완주하고, 선두그룹은 남은 체력을 소진시키기 위해 의도적 우회용 코스를 추가할 수도 있다.
함께 달린다는 의미가 없어진다는 단점은 있다.

[레이싱] 흐르면 버린다. 버리기 위해 짼다. (더더마 벙)
흐르는 사람을 버리기로 약속하면 각자의 라이딩에 집중할 수 있다. 그리고 비슷한 퍼포먼스의 사람들끼리 묶이게 된다.
팩의 속도가 올라갈수록 후미에게도 요구되는 최소한의 파워가 높아지기 때문에 아무리 선두보다 효율적으로 바람저항의 이득을 보다라도 커트라인이 생겨 흐르게 된다.
피를 빠는 것도 기술이기에 파워와 스태미너가 남아 있더라도 효율적으로 피를 빨지 못해 팩이 분리되는 상황도 발생한다. 높은 저항을 유지하는 지구력도 사람마다 차이가 있어서 팩이 분리되기도 한다. 팩이 너무 길어지게 되면 작은 속도 변화가 후미에서는 크게 증폭되게 된다. 선두 가속에 대한 반응을 즉각 하지 못함으로 격차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며 함께가는 것이 리드아웃이고 이를 이용하여 분리시키는 것이 어택 혹은 BA다.
어느정도 팩이 분리되면 선두와 후미의 실력격차가 크지 않게 된다. 기량의 차이가 크지 않다면 위에 언급한 팩 분리요인들이 적게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팩이 유지될 수 있다.

▣ 마무리

구성원간 퍼포먼스가 30%이상 차이난다면 선두는 선택해야 한다.
후미를 찢고 레이스를 할지, 레이스는 포기하고 서포트 모드로 라이딩할지.
어떤 선택지든 장단점이 공존하고 선두가 결정할 일이다. 최선을 다해 체력의 한계에 몰아붙이는 것의 장점이 있다면 동료와 함께 가지 못하는 단점이 있고, 동료와 함께 달리는 즐거움의 장점이 있을 땐 만족스러운 운동이 되지 않는 단점이 있다.
어떤 선택에도 만족스러운 부분이 있다면 반대로 아쉬운 부분도 남기 마련이다. 우리 인생의 모든 선택이 그러하다고 법륜스님이 얘기했다. 때문에 콘셉을 한 번 정했다면 마음의 미련을 버려야 한다.

충수염이 아닌건 다행이지만 생각할수록 열받네?

그제 저녁부터 배가 아팠다. 열도 조금 났다. 온 옆구리가 뻑적지근해지더니 골반을 움직이는 것도 불편해졌다. 통증은 우측 하복부로 집중되었다. 하루 반나절 정도에 걸쳐 통증은 심해졌다. 한번도 겪어본 적이 없는 통증이라 검색을 통해 병을 찾아보았다. 충수염의 증상과 흡사했다. 흔히 맹장염으로 알려진 병이었다.

나는 충수염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이 병은 48시간 내에 수술하지 않으면 터져버려 더 큰 문제로 번진다.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당일 수술을 하고 이틀간 입원을 한게 될 터이니, 집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고양이 모래도 새걸로 갈아주고 밥도 가득 채웠다. 물도 두통을 채워 두고 간식을 잔뜩 줬다. 배낭가방에 이틀간 지낼 수 있도록 물품을 쌌다. 그리고 아침 일찍 병원을 갔다.

 

오늘 만난 외과의사는 아주 특이한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정해둔 레퍼토리대로 진료가 이뤄져야만 했다. 의사가 권위적인 것은 알았지만 이 사람은 좀 달랐다. 정확한 정보를 주기 위해 노트해둔 것을 보려고 휴대폰을 켰더니 휴대폰은 내려두고 자신이 물어보는 것에만 질문하라는 것이다. 불필요한 정보는 듣지 않겠다는 것이다. 대기실에 사람이 전혀 없는 이른 아침이었다. 시간을 어떻게 아껴 쓰는지는 각자의 몫이니까 내가 간섭할 순 없는 일이기에 그의 지시를 따랐다.

진단은 아주 전문적이었다. 내러티브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스크립트로서는 완벽했다. 진단 근거도 들어가 있으며, 의학적인 근거도 있고, 자신이 판단을 내리게 되는 합리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투명하게 설명함으로 신뢰를 주기도 했다. 초음파 검사는 60%의 정확도로 병을 진단할 수 있고, 자기같은 전문가가 손으로 눌러서 검진하는 것을 이학적 검진이라 부르는데 85%의 확률로 병을 맞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간에 질문도 하나 던졌다. 85%의 확률이라는 것이 높은건지 낮은건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는 높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도록 장치가 되어 있었다. 60%와 비교하듯 물었으니 상대적으로 높다고 생각할 수 밖에. 틀린 답을 내기를 바라고 던진 질문이다. 상대방이 틀렸다고 지적함으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고 자신의 권위는 높이는 대목이었다. “85%의 확률이라면 15%는 놓친다는 뜻입니다. 100명이면 15명 1,000명이면 150명의 환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충수염 환자를 5,000명을 수술했는데 그럼 750명의 환자를 놓친다는 뜻입니다.” 캬~ 다시 생각해도 감탄이 터져나오는 치밀한 스크립트다. 답변을 듣는 사람은 순식간에 멀쩡한 사람 750명의 배를 갈라버린 나쁜놈이 된다. 그저 배가 아파서 병원을 방문했던 환자는 민망함을 넘어 죄책감까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그의 치밀한 스크립트에 오류가 발생했다. 내가 “사람 배때지를 칼로 째기에는 낮은 편인 것 같네요”라고 대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예측에서 벗어난 반응을 접하면 당황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언짢아했다. 자신의 질문에 항상 ‘높다’라는 답변이 들어왔고 그에 대한 counter 대본만 있었는데, ‘낮다’라는 답변이 들어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그 상황을 모면할 융통성이나 순발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대화의 맥락에 전혀 맞지 않았지만 그는 스크립트를 그대로 읊었다.

 

스크립트 낭독이 끝난 뒤, 85%보다 정확도가 높다는 CT를 찍으러 갔다. 개인병원에는 CT기계가 없어서 인근 영상의학과를 다녀왔다. 사진이 잘나오려면 핏속에 어떤 액체를 섞어야 한다는데 혈관이 계속 터져버려 바늘을 네 번이나 꽂아야 했다. 팔에 구멍이 네 개 난 채로 다시 외과에 돌아오니 의사는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미 영상은 컴퓨터로 받아본 상태고, 내가 이동하는 동안 또 스크립트를 준비해두었나보다.

이 의사는 결론부터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짜둔 내러티브와 극적인 연출포인트를 아주 중요시 여기는 듯 했다. “이건 게실이고요, 게실이 이런 상태인데요, 게실은 보통 이래요. 게실이 이렇게 되면 이런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이건 충수인데요, 충수도 염증이 번진 상태에요. 그런데 여길 보면 공기가 들어가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막혔다기보다는 염증만 번진 상태인 거죠”

그가 준비한 4분간의 스크립트 낭독이 모두 끝나갈 때까지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설명만 있고 해석은 없었다. 답답했던 나는 중간에 껴들었다. “그럼 충수를 제거해야 하는 수준은 아니네요?” 그는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며 양 손을 펼쳐 손바닥을 나에게 보였다. “의사가 말을 하면 좀 끝까지 들으세요”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 나는 충수염인지 아닌지 빨리 말해줬음 좋겠는데. 아니 그러니까 충수염인지 뭔지 하는 병이 존재하는지도 나는 어제 처음 알았을 뿐이고, 지식을 전달해주는 건 좋은데, 당신이 말해주는 그런 요약된 지식은 이미 인터넷에서도 내가 다 보고 온건데. 스크립트 낭독자야 뭐야. 사람이 앞에 있으면 사람이랑 대화를 해야지. 오늘 입원을 해야 하는지, 내일 출근은 할 수 있는 건지, 병원비는 얼마 나올지나 알았으면 좋겠는데 대본 읽는 기계야 뭐야.

그의 스크립트는 그의 입장에서는 완벽했을지 몰라도 듣는 입장에서는 최악이었다. 상황에 대한 해석이 없다. so what이 빠져있다. 그래서 나더러 어쩌라고. 당신 잘난건 알겠는데 나더러 어쩌라는건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되물으면 언짢아하니 물어볼 수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걱정하신 것만큼 상태가 나쁘진 않습니다.”, “이런건 좀 주의하셔야 합니다.” 와 같은 환자가 이해하기 쉬운 말은 그의 입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진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독백이었다.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자기만족을 위해 쓰여진 대본이었다. 이 사람은 대화에 능숙한 사람은 아니었다. 나도 통제집착이 심한 사람인데 의사는 오죽할까. 당신은 또 얼마나 피곤한 하루를 살아갈까. 환자란 자신이 명령에 의해 맨살을 보이는 존재이고, 자신은 그 살을 메스로 갈라도 되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태도가 대화의 모든 문장에서 묻어났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4분간의 스크립트 낭독이 끝나자 약 처방을 해줄 테니 5일간 먹고 증상이 호전되지 않으면 다시 오라는 말과 함께 쫓겨났다. 두 번 혼이 났던 나는 시키는 대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문 밖으로 나오고 세 걸음을 옮겼을 때, 뭔가 놓친 게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다시 물었다. “저기요 선생님, 질문이 있습니다.” “네” “무탄고단 식단을 하는 게 이번 염증에 원인이 아닐까요?” “문제 없습니다”

so what이 결여된 그의 스크립트를 지적이라도 하듯 대화를 연장시켰지만 그는 눈도 마주치치 않은 채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도 모른 채로 살 것이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동안의 식단을 보았다. 이틀 연속 식이섬유 하나도 없이 단백질만 먹은 기록이 있다. 장 내 변이 게실과 충수에 무리를 줄만했다. 게실염에 대해 찾아보았더니 지금과 같은 식이섬유 부족 식단이 주요 원인이 된다고 나와 있었다. 나는 이 정보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총 세번이나 의사에게 전달하려고 했고 세번 모두 거절당했다.

앱 삭제(유튜브, 롤토모바일, 고급유머, 인스타)와 가상현실에 대한 고찰

디지털기술의 발달로 우리의 삶은 확장되었다. 가상의 공간이 마련되었다. 그 공간은 물리적으로 실존하진 않지만 기능적으로는 작동한다. 오히려 시간한계와 물리한계가 없기 때문에 확장을 넘어서 역전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확신하는 편이다. 역전의 특이점은 이미 왔을지도 모른다. 그 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그곳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한다.

공간의 확장이 일어났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인지, 내가 이렇게 쉽게 삶의 터전을 그 방향으로 확장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비판적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조상님 중에서는 가상의 공간에서 삶의 터전을 시작한 사람이 없으실 뿐더러, 나도 시골에서 자란 非-digital native 이기 때문에 급작스런 터전의 변화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 우려가 된다.

우선 당장의 문제만 보자면 나는 가상의 공간을 도피의 공간으로 쓴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들을 보고 있다. 그 시간은 죽은 시간이 된다. 사라진 시간이 된다. 그 시간이 현실 세계에 도움을 주지도 못한다.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라면 물리적으로 현실세계라고 느낄 수 있는 모니터 앞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진행해야 한다.

핸드폰이라는 매체는 신체에 너무 가깝다. 가상현실이라고 하면 대부분 VR기기를 덮어 쓴 뒤 현실세계를 차단하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럴 필요가 없다. 그런걸 뒤집어 쓰나 안 쓰나 어느 정도 가상현실에 깊이 빠지게 되는가를 따지면 될 일이다. 그래픽이 더 좋다거나 덜 좋다고 몰입의 차이가 발생하는 게 아니다. 경험 주체가 어느 현실에 발을 딛였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면 모든 현실의 감각기관을 off시키게 된다.

반명 노트북을 키는 것은 현실에서 가상으로 접속한다는 개념이기 때문에 완전 몰입되진 않는다. 의식이 각성되어 있는 상태로 가상의 공간을 탐험하고 활용할 수 있다. 여전히 의식은 실제 세계에 머무른다. 키보드와 마우스라는 정보입력장치는 우리 신체기관의 확장으로 여겨진다. 별도의 도구를 조작하지 않고 화면을 터치한다는 것이 큰 차이를 만들어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상현실로 도피했다. 꽤 오래된 것 같다. 일을 하지 않으면 가상현실로 도망쳐있었다. 그곳에서 뭔가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활동이 이뤄진다고 스스로를 속였다. 개뿔 아무것도 없다. 나는 심하게 망가졌다. 현실감각이 많이 사라졌다. 집안에서 물건을 자주 잃어버렸다. 가끔 방이 낯설게 느껴진다. 물리적인 힘을 들여서 책상위의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은 가상의 세계에서 이뤄지는 정리보다 너무 버거운 일로 여겨졌다.

터치 UX는 나에게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버렸다. 신체부위가 직접 가상현실을 조작하는 도구로 연결되어 있으니 나의 욕망을 억제할 단계도 장치도 없다. 아 심심해 > 앱 키면 심심하지 않아진다.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나 > 인스타 피드 보면 뭔가 세상 소식을 들은 것 같다. 실제로는 어떤 방향성도 가지고 있지 않고 정보의 흐름에 떠밀리고 있을 뿐이다.

현실세계의 감각이 떨어지고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보입력도구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정보입력도구가 VR이나 터치UX처럼 직관적이지 않았을 때에도 이런 사람들은 있었다. 나보다 훨씬 증세가 심각해서 문제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20년 전에도 있었다. 이런 현상은 비단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을 것이고, 그 중 일부는 현실 감각이 떨어져서 현실 생활이 어려워지게 되는 사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가상현실로 주된 삶의 터전을 옮기려는 의도, 또는 그곳으로 도피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일이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상태라고 가정했을 때,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은 가상현실로 도피하는 길목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단계도 없고 장치도 없다. 그러니까 이건 신경망을 끊는 것과 같다. 이미 내 욕망은 앱과 연결이 되어 있어서, 욕망이 앱을 작동시키는 사이에 나의 이성이나 의식이 개입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단순히 앱을 지운 것이 아닌 신경망을 끊은 것이다. 현실에 집중하자.

블로그에 글을 끄적이니 건강해짐을 느낀다!

나는 건강하다!

 

 


덧붙임 (21년 2월 25일)

언어는 두 종류다.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언어는 머릿속의 개념이 문자나 음성으로 표현되는 과정을 거친 뒤 전달되어 다시 해석되는 일련의 시스템이다. 개념을 언어로 담아내는 coding의 과정과 해석하는 decoding의 과정이 이뤄진다.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직관적이라는 측면에선 좋은 점이다.

터치 UX는 언어인가. 터치UX는 언어가 아니다. 주어진 객관식의 답변에서 선택하는 것이다. feedback일 뿐이고 reaction일 뿐이다. coding을 하지 않는다. 주체성이 없는 인터랙션이다. 터치 UX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수동의 상태가 된다. 주체성을 잃는다. 모바일은 작은 PC가 아니다. PC는 발언자의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만 모바일은 주체성을 잃게 만든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짐승도 외부의 자극에 반응한다. 반응의 종류와 수준을 제외하면 구조적으로 반응자라는 점에서 짐승과 다른 점이 없다. 자극을 주는 자여야 한다. 터치UX의 상태로 미디어를 활용하는 것은 하이테크 문명의 혜택을 받는 게 아니다. 야만 상태로의 회귀다. 수동적인 짐승의 인생을 살아도 괜찮은 것이 아니라면 모바일 기기의 활용빈도를 줄여 나가야 한다.

자가피팅을 고집하는 사람의 개똥철학

나의 머신은 이미 한 명의 무릎을 박살냈다. 전주인은 이번 생엔 더이상 자전거를 탈 수 없게 되었다며, 자전거를 나에게 넘겼다.

그렇게 로드바이크에 입문한 지 2년이 되었다. 난 20대 초엔 MTB를 탔다. MTB를 타듯이 로드 탔더니 온몸이 아팠다. 대부분의 통증은 일시적 사건으로 지나갔다. 몸이 적응한 것이다. 하지만 무릎 통증은 전혀 잡히지 않았다. MTB를 십년 넘게 타면서도 무릎이 아팠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로드는 왜?

무릎이 박살난 전주인은 문제가 뭐였는지 정확히 모른다. 몇 가지 단서를 가지고는 있었다. 『실내에서 고정된 로라를 오래 탔다. 저회전 고파워 페달링을 사용했다. 안장을 높이고 당기는 근육을 너무 많이 썼다. 클릿의 유격을 넉넉하게 줬어야 했다… 』 하지만 어떤 단서가 치명적인 대미지를 입혔는지 확신하진 못했다. 원인이 하나일 수도, 여럿이 복합적인 문제를 일으켰을 수도, 또는 파악하지 못한 다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잦은 무릎 통증을 걱정하는 지인들의 피팅 권유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가피팅을 고집하고 있다.

피터가 내 무릎 통증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도 못할 것이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의 피팅-서비스는 3가지 꼭지점의 적정 위치를 찾아주는 데에 그치기 때문이다. 정상범주 피팅은 어렵지 않다. 책도 있고 구글도 있고 유튜브에도 있다. 모르는 내용은 찾으면 금새 나온다. 나도 정상범주를 벗어났던 피팅을 교정함으로 통증을 해결해왔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새로운 종류의 통증이 발생했다. 피팅이 안 맞아서가 아니다. 피팅이 안 맞는 것이 문제라면 육각렌치만으로도 해결되었어야 할 일이다.

피터가 내 무릎 통증에 대한 해법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난 해법만 덜컥 받고 싶진 않다. 과정까지 알아야 하겠다. 피터가 내린 처방이 어떤 이론적 배경과 추론을 통해 도달한 것인지 나는 알아야 하겠다. 피터는 피팅 다 받았으면 자전거 갖고 빨리 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내가 이것저것 물어보면 피터는 버럭 화낼 것이다. 내가 당신 선생이냐며,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왜 왔냐고 할 것이다.

이번 통증에 대한 처방을 받아 오더라도 머지않아 새로운 통증이 발생할 것이다. 지금까지 내 무릎 통증에 영향을 미치는 수십가지 단서를 찾았다. 어제도 새로운 통증이 나타났고 새로운 단서를 찾았다. 다음달에 통증이 발생한다면 어제와는 다른 원인으로 인한 새로운 문제일 것이다. 누구도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통증까지 예측하고 예방할 순 없다. 그렇다고 매번 새로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피터를 찾을 수도 없다. 왜 또 왔냐고 버럭 화낼 것이다.

결국 내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피팅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외부의 존재에게 의존하려는 태도. 그것은 나약함이다. 나는 강해지기 위해 자전거를 탄다. 타인에게 의존하면서 강해지고 싶지 않다. 그것은 모순이다. 그것은 강해진 것이 아니다. 자력으로 생존이 불가능해진 원숭이일 뿐이다.

오소리는 착한 원숭이의 먹이를 빼앗을 목적으로 꽃신을 선물했다. 원숭이는 꽃신이 다 닳아 다시 맨발로 다니려고 했지만 이미 꽃신에 익숙해져 맨발로는 발이 아파서 걸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오소리는 처음과 달리 꽃신을 선물로 주지 않고 값을 올려 비싸게 판매하려 하였다. 결국 더 이상 꽃신을 살수 없게 된 원숭이는 오소리의 종이 되어 ‘내힘으로 살아갈수 없게 된 것’을 후회한다. ─ <원숭이 꽃신>의 줄거리, 1977, 정휘창

 

    • 피팅의 3가지 꼭지점 : 안장 / 페달 / 핸들

안장의 종류 : 내 척추가 snake / cameleon / bull 셋 중 어떤 타입인지
안장의 위치 : 안장이 높다 / 낮다 / 앞으로갔다 / 뒤로갔다 / 각도가 내려갔다 / 각도가 올라갔다

페달 : 페달의 종류(평페달 / MTB클릿 / 시마노 / 스피드플레이 / 룩)
페달의 위치 : 앞으로갔다 / 뒤로갔다 / 안으로갔다 / 바깥으로갔다
페달의 각도 : 안짱으로모으냐 / 팔자로벌리냐 / 유격이몇도냐

핸들 : 좁냐 / 넓냐 / 깊냐
스템 : 머냐 / 가깝냐

    • 3가지 꼭지점으로 인해 결정되는 신체의 각도

상체와 팔의 각도
골반과 허벅다리의 각도 (가장 높을 때, 가장 낮을 때)
허벅다리와 종아리의 각도 : 무릎 (가장 높을 때, 가장 낮을 때)
종아리와 발의 각도 : 발목 (펴졌을 때, 당길 때)

    • 피팅 : 원인 >> 증상 >> 처방

3가지 꼭지점으로 적정 위치를 찾아내는 피팅은 어렵지 않다. 의사가 진료를 볼 때 증상을 통해 원인을 추측하고 처방을 내린다. 똑같이 [원인 >> 증상 >> 처방]의 틀에 넣어보면 해법이 정리된다.

3시 방향 무릎이 페달보다 앞에 위치 >> 무릎 앞 통증 >> 안장 위치 뒤로 or 클릿을 슈즈에서 앞으로
3시 방향 무릎이 페달보다 뒤에 위치 >> 무릎 뒤 통증 >> 안장 위치 앞으로 or 클릿을 슈즈에서 뒤로
큐팩터를 너무 좁힌 문제 >> 내측관절부하 >> 슈즈에서 클릿 안쪽으로 밀기
슈즈와 클릿의 나사가 헐거워져서 플로팅 발생 >>무릎 전체 통증 >> 나사 죄기

일반적인 피팅-서비스는 [꼭지점세팅 > 신체각도구현] 두 가지 요소로 이뤄진다고 했다. 더 포괄적인 의미의 피팅을 구현하기 위해선 신체특이성과 주법이라는 요소도 포함시켜야 한다. 네 가지 요소의 상관관계를 순서를 바꾸면 다양한 조합이 만들어질 수 있다. 피팅을 접근하는 방법이다.

① [꼭지점세팅 > 신체특이성 > 신체각도구현 > 주법]
② [신체특이성 > 꼭지점세팅 > 신체각도구현 > 주법]
③ [주법 > 꼭지점세팅 > 신체특이성 > 신체각도구현]
④ [주법 > 신체특이성 & 신체각도구현 > 꼭지점세팅]

①번은 이상적인 꼭지점을 세팅한 뒤 자세를 교정해서 신체각도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 접근법은 경험이 없는 입문자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다양한 주법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말고 기본부터 잘해라.
②번은 신체에 특이사항이 있거나 뒤틀림 정도가 심각해 피팅에 반영해야 하는 경우다. 안장 또는 신발을 체형에 맞는 것으로 고른다거나, 다리길이의 차이를 반영하기 위한 스페이서를 꽂는다거나.
③번은 라이더의 주법을 유지한 채로 세팅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라이딩 습관이 몸에 익어버렸거나, 습관을 바꿀 계획이 없는 사람에게 제공되어야 한다. 더 이상 강해질 욕망이 없는 나약한 존재들.
④번은 새로운 주법을 위해 머신 위에서의 이상적인 신체각도를 먼저 구상한 뒤 꼭지점을 맞추는 방식이다.

①②③번은 공통적으로 [꼭지점세팅 > 신체각도구현] 순서를 따르고 있다. 자전거에 몸을 끼워맞추는 것이다. 자전거에 몸을 끼워 맞춰야 한다는 생각은 지극히 플라톤주의적이다.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현실이 이상을 넘어설 수 없다. 꼭지점과 신체각도를 맞추는 것만이 이상이라 생각한다면 자전거의 세계를 너무 좁게 본 것이다. 이런 태도는 성장가능 퍼포먼스 한계를 스스로 봉인시키는 꼴이다. 이 세상에 절대피팅이상주의자들만 가득했다면 스파이더 댄싱 같은 건 탄생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④번은 [신체각도구현 > 꼭지점세팅]순으로 이뤄진다. 이게 맞다. 자전거의 세팅은 나중에 따라와야 한다. 자생력을 잃은 원숭이들은 ①②③번 피팅 서비스를 받으면 되고 나같은 야생의 라이더는 ④번 피팅을 통해 성장할 것이다. 퍼포먼스 향상에 적합하도록 자전거를 세팅하는 접근방식은 지극히 상식적이다. 오르막만 줄창 타는 코스라면 안장을 앞으로 당기고 코를 낮출 것이다. 공기를 뚫어야 하는 평지라면 스템을 길게 빼고 안장 코는 약간 올릴 것이다. 산에서는 MTB가, 장거리 오프로드는 그래블바이크가, 평지에서는 에어로가 적합한 것처럼 피팅도 상황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는 상식처럼. 자세와 주법에 자전거가 따라와야 한다.

자전거를 타는 것은 단순히 정해진 자세로 페달을 열심히 굴리는 것이 아니다. 같은 자세로 페달만 굴려선 퍼포먼스를 일정 수준이상 높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자세로 다른 근육을 쓰는 방법들이 개발되었다. 새로운 주법을 익히는 것은 곧 새로운 근육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주법이 다양해질수록 엔진은 강해진다. 6기통에서 8기통 정도로, 차츰차츰 주법을 다양하게 숙달시키면 12기통정도까지는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절대피팅이라는 만들어진 이상은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피터들도 피팅을 하며 피드백을 귀담아 들으며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다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피팅만사해결주의로부터 좀 벗어나자. 피팅은 상품이 아니다. 한 번의 구입으로 제공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아니다. 자전거에 대한 이해다. 정비 상식, 근육성장에 대한 이해, 훈련에 대한 이해와 같은 주제들인 것이다. 자전거와 함께 하면 자전거 라이프가 풍성해지는 주제들.

나는 MTB를 10년 넘게 타면서 잘못된 자세와 습관이 몸에 익었다. 습관대로 타기 편하게 세팅하게 된다면 정상적인 라이딩 자세를 취하지 못할 것이고, 나의 성장한계는 딱 거기까지. 선이 그어질 것이다. 정상적인 라이딩 자세를 취하거나 더 좋은 주법을 익히지 않으면 성장은 없다. 성장 과정에서 통증이 발생할 수 있고 몸이 적응하는 기간도 가져야 할 것이다. 단번에 급작스럽게 바꿀 수도 없는 일이다. 무릎통증은 현명하게 극복할 문제지, 피할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나의 피터가 되어야만 가능하다.

원리와 인과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내 자전거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무릎 통증의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하는 것. 이 문제는 정말 재밌고 보람차다. 도전의식도 끓어 오른다. 이 문제를 풀어내는 것이 북악 PR을 단축하는 것보다 더 큰 성취감을 가져다준다.

롤토체스를 하며 배운 것

롤토체스에 빠져버렸다. 협곡엔 재능이 없고 체스를 좋아하던 사람도 아니었다. 롤토체스가 이렇게 재밌을 줄 몰랐다. 나는 지난 6개월 간 롤토를 500판을 넘게 한 것 같다.

게임을 플레이한 시간을 말할 때마다 인생을 허비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괜히 나는 그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었다고 강조한다. 이런 내 얘기를 듣던 상대방은 괜한 부연설명에 적잖이 당황해한다. 그럼 나는 더욱 변명처럼 들리는 구체적 설명을 덧붙인다. 단순히 게임이 재밌어서 추천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인생을 그만큼 할애해도 전혀 아깝지 않을만큼 값어치가 있다고 설명을 한다.

구차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게임에 대한 태도가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게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나는 아직 혼란스럽다. 인간은 생산을 해야 한다고 배워왔는데 게임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시간을 생산에 쓰지 않고 게임에 썼다는 것에 죄책감이 생기는 것이고, 지레 제발저려 생산에 도움이 된다고 변명을 해대는 것이다.

롤토는 생산적인 게임일까. 게임이기에 생산적일리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겐 생산의 원리를 알려주었다.

사람개 in lolchess.gg

시즌 1은 골드1로 마무리했고
시즌 2는 플레1까지 찍었다.

나는 그렇게 게임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즌 2가 시즌 1보다 랭크가 올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공부도 하고 유튜브도 많이 본 것도 분명 도움이 되었겠지만, 게임을 학습하는 나만의 방법을 시도했다는 데에 의의를 둔다.

그러니까 나는 게임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도 플레1밖에 못 갔으니 그냥 아주 게임상병신이다.

 

단계 1 –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않는 멍청이

멍청이의 상태로 게임을 했다. 라운드 준비시간 30초 동안 아무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멍하니 감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갑다. 싸우면 싸우는갑다. 이기면 와 이겼다 좋아하고, 지면 아 졌구나 안타까워한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에 대해 내가 관여하지 않고 관람만 한 것이다. 그래픽을 보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있었다. 그러다가 시너지를 맞추고 챔프를 고르고 아이템 계획도 세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뇌는 정지했다. 창고는 항상 꽉 채웠다. 왜냐면 계획이 없으니까. 뜨는대로 가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선택을 하지도 못한 채로 수많은 패배만 맛보았다. (다른 아이디로) 100판 할 때까지는 실버 이상 오르지 못했던 것 같다.

뜨악!

 

단계 2 – 뭐라도 일단 정리하기 시작

하루는 잠이 안 오는 것이다. 롤토의 챔프들이 막 머릿속에서 시너지가 맞춰지느라. 그래서 폰에 적기 시작했다. 얘랑 얘랑 같이 들어오면 시너지가 어떻게 나올지를 계산했다. 며칠을 이 짓을 반복하니 시너지를 다 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구글닥스를 하나 켜서 이것들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양이 많아지자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게임에 임하기 전에 내가 어떤 덱과 전략을 사용할지 정해야 하는데, 여전히 게임의 진행에 내가 반응하듯이 하려니까 이런 아카이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임을 진행하는 급박한 시간흐름 속에서 다른 도구의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오픈북 테스트여도 책 읽을 시간이 없을 뿐더러 책 내용도 엉망인 것이다.

그래도 노트를 정리하는 데에 나름 몇 가지 규칙은 있다. 모든 챔프의 이름을 두글자로 줄여서 적는다. 내가 쓰는 것도 쉽지만 읽는 것도 쉽다. 가독성과 직관성이 높아진다.

그래서 lolchess.gg의 시뮬레이터로 조합을 만들어서 아카이빙해보았다. 오히려 더욱 보기 힘들었다.

 

단계 3 – 경험의 축적

바둑기사가 대국을 끝낸 뒤 복기를 하듯, 이 게임 또한 복기될 수 있다. 복기노트를 만들었다. 게임의 진행경과를 파악할 수 있도록 간단한 항목들을 기입하고, 무엇을 배웠는지 적는다. 너무 주절대거나 결론이 없으면 안된다. 복기의 과정을 어떻게 거치든 간결한 1줄 교훈으로 최종 정제한다.

교훈 중에는 너무 당연하고 기본적인 rule도 있었다. 이것마저 모른채로 게임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복기를 하고 나서야 이런 기초적인 내용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나란 놈에겐 정말 직관이란 게 없는걸까?

> 갖춰진 시너지 중에 약한 시너지가 있다면 버려라.
> 시너지에 집착해서 2성작을 등한시하지 마라
> 롤토는 강해지는 게임이지 시너지를 맞추는 게임이 아니다.

그리고 몇 교훈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알려주는 듯한 명언처럼 나왔는데 꽤 마음에 든다.

> 이기고 싶다면 매드무비를 꿈꾸지 마라.
> 가지기 위해선 비워라
> 더 유동적으로, 더 융통성있게
> 계획이 없다면 지금의 최선만 생각해라.

이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나는 롤토체스가 어떤 게임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복기할 내용이 너무 많다보니 부담스럽고 몇 판은 빠트리게 되었다. 그래서 양식을 간소화시켰다. 기록만 남기는 데에 집중하고 중요한 교훈이 있다면 다른 곳에 적기로 했다. LOG를 검토하고 정리하는 것은 게임이 끝나고 여유가 있을 때 몰아서 하면 되니까.

 

단계 4 – 나만의 시너지북 만들기

내가 직접 전략을 개발하는 것보다 세계적인 랭커들이 개발한 전략이 더 강하고 승률도 높았지만, 왠지 남이 개발한 것을 베껴 쓰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난 실력을 키우고 싶은데 컨닝만 하고 있는 느낌이란 말이지.

하지만 사람들은 달랐던 것 같다. 유튜버들이 새로 발견한 덱을 소개할 때면 3~4명의 덱이 겹치는 판도 허다했다. 게임을 꼭 승리하기 위해서만 하는 것인가. 나는 배움의 과정이 즐겁다는 뜻을 나이를 먹을수록 이해하게 된다.

롤토를 배워가면서 가장 재밌었던 때가 이 때다. 시너지북을 만들 때. 롤체지지 족보를 그대로 가져와서 구글닥스에 옮겼다. 그리고 Ctrl+C,V를 통해서 카드 형태의 시너지 묶음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조합을 개발하고 연구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그나마 쓸만했던 재밌게 연구했던 덱이 깔끔세나덱과 시너지천국덱(지옥타일한정)이다. 강하고 완벽한 덱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덱이 엄청 좋았으면 나도 꿀빨아서 랭크가 더 올라갔겠지.

하지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의 랭크 위치도 아니오, 이번 게임의 승패도 아니다. 게임이라는 비생산적 행위를 하면서도 생산적인 결과물을 냈다는 뿌듯함에 도취되어 있는데 더이상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단계 5 – 아이템

시너지를 한참 연구하고나니 시너지로 게임의 승패가 갈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코스트 유닛이 얼마나 많은지, 2성작이 얼마나 되었는지, 아이템이 적절히 사용되었는지의 요인들도 중요했다. 중요함을 비교하자면 일반적으로 시너지가 가장 덜 중요하고 아이템이 제일 중요했다. 시너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아이템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롤체지지 시뮬레이터에 들어가서 챔프마다 가장 효율이 좋은 아이템을 다 끼워넣은 뒤에 캡쳐해서 저장해두었다. 그리고 아이템들간의 시너지도 중요했기 때문에 아이템의 조합을 미리 묶어보는 시도도 해보았다.

 

단계 6 – 몰빵형 설계

위 과정을 거치면서 아래와 같은 모습으로 덱 전략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떤 덱으로 갈지는 아이템을 기준으로 결정해야 한다. 챔프도 시너지도 바꿀 수 있는데 아이템은 못 바꾸기 때문이다.

시너지는 시너지일 뿐 조합이 아니다. 조합이라 함은 싸움을 더 잘하는 팀이 좋은 조합인 것이다. 그래서 시너지 정보는 제거해버렸다.

연구를 마치며

게임은 너무 어렵다. 나는 게임을 너무 못한다.
이렇게 열심히 하고도 플레1밖에 못 갔으니 그냥 아주 게임상병신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롤토는 너무 재밌다. 히히

연구의 결론은 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는 데에 다다랐다. 위에 연구한 것들 외에도 게임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너무 많다.연구 과정을 통해 시도되었던 보조도구들은 게임에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 그리고 머리를 써야 하는데 두뇌 밖에 있는 보조도구로 게임을 하려 하니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두뇌 밖에 있는 어떤 보조도구에 의존하려는 태도부터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요즘은 이 구글닥스에 안 들어간다. 복기도 안한다.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 다시 멍청이의 상태로 게임을 할 때도 있다. 그것도 뭐 나름 재밌다. 유행하는 덱을 따라해도 재밌고, 자다가 생각난 나만의 전략을 실험하다가 쓰디쓴 패배를 맛 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다. 게임이니까 재미가 있고 재미있으려고 게임을 한다.

 

이야기의 끝을 재미가 아닌 생산으로 맺어보자면 ;

난 이 연구 과정을 통해 여러 연구 방법을 익혔다. 복기를 한다거나, 설계의 방법론을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낸 과정은 게임이 아닌 실제 세계에서 일어나는 프로젝트에서도 써먹을 수 있는 강력한 기술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뿐더러 강한 확신이 있다.

버리기 위한 티켓팅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얻게 될까? 이 질문은 틀렸다. 바꿔보자. 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버리게 될까? 조금 더 지금 상황에 맞아 떨어진다. 그렇다. 나는 무엇을 취하기 위해 나서는 것이 아니다. 도피여행이다.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고 했으니 어느 쪽이건 지금은 버리는 데에 집중하자.

 

지난 해 가을, 부모님을 데리고 스위스에 갈 뻔했다. 어른이 되고 나니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졌고 나도 그런 상황에 익숙해졌다. 딱히 싫지 않다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처리하는 것이 어른의 자세였다. 내가 시작한 계획이지만 내가 갈망한 여행은 아니었다. 부모님도 자식이 보내주는 여행에 함께하고 싶어 응했을 뿐이었다. 둘 다 스위스에 이상과 환상이 없었으므로 여행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에 비하면 이번 여행은 자의적이고 독립적이다. 완전히 독립적일 순 없겠지만 상대적으로 그러하다. 이번 여행의 시작ㅡ티켓의 구입ㅡ부터 인과관계를 끊어내려고 했다. 나는 여행지가 어느 나라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 채 티켓을 샀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별다른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일단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 여행이 내 일상과 관련된 모든 인과관계에서 독립적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자식의 의무를 저버리기 위해 설 연휴를 끼웠다는 점에서 여전히 독립적이지 못하지만.

 

나란 인간의 문제는 무엇일까? 추구의 열정이 사라진 문제일까? 무념 상태의 지속이 문제일까? 염세적이고 허무한 관점이 문제일까? 부수고 다시 세우는 폭력성이 문제일까? 불만족과 본능적 개선의지가 문제일까? 환경을 원망하는 태도가 문제일까? 지금도 끊임없이 문제만 찾는다. 문제를 찾으려는 습관이 문제일까? 이런 나의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문제에 대해 너무나 쉽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옆에선 뻔히 보이지만 정작 자신만 못 보는 그런 멍청한 상태에 빠져버렸다. 훈수를 두는 이가 있더라도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무엇이 옳은 훈수인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요 몇 년 새 나의 생각 체계엔 오류가 발생했다.

내가 추구하는 상태는 얼마나 가치 있는가? 짐승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다. 짧고 허무한 시간을 살아가는 중에 조금의 가치라도 찾아보려고 발버둥친다. 없는 것에 비하면 무한에 가깝지만, 무한하고 절대적인 가치에 비하면 제로에 가깝다. 내 인생은 무한하면서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내 인생은 아무런 가치도 없지만 무한한 가치가 있다. 그제 본 영화 애드아스트라는 이 안건을 우주와 인간사회의 대비함으로 다룬다. 영화는 “나가봐야 별 거 없어. 진정한 가치는 네 곁에 있었잖아. 바보야.”라는 나이브한 결론을 맺으며 끝난다. 허무주의에 빠진 우울증 환자들의 자살촉진 트리거로 원망받지 않을 유일한 스토리라인 이었을 것이다.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의 생각은 극중 주인공처럼 비합리적인 과정으로 결론에 도달해선 안 된다.

 

인간의 삶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무한한 가치를 가진 것은 여럿이다. 난 그 중 신, 우주, 시간 세가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하나, 신은 인간의 한계를 알려주고 오늘의 삶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선과 덕을 제시한다. 추구해야 할 지향점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둘, 우주는 무기력을 안겨준다. 알면 알수록 정복할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되고, 심지어 제대로 지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지각하게 해준다. 개척자였던 우리 조상님들의 DNA를 물려받은 우리들은 무기력을 느끼게 된다. 셋, 나는 시간을 평면적이며 선형적인 것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영상편집기의 타임라인이나 프로젝트 일정관리양식이 내 시간 인식의 관점이 되었다. 관점이 좁으니 좁은 세상을 산다. 시간을 통제하려고 했으나 시간에 통제당한다. 시간을 인식할 때 모든 것이 다 결정되어 있는데 미래의 과거인 현재는 왜 이렇게 아득바득해야 하는지를 납득하지 못하고 허무함을 느꼈다.

셋 중에서 삶에 도움되는 것은 종교다. 불행하게도 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나는 줄곧 좇는 대상 없이 쫓기면서만 살았다. 무기력과 허탈함을 느끼게 된다.

 

내 나이 올해 36이다.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흐른 내 인생은 2/5가 훌쩍 지났다. 난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엄습한다. 내 인생의 대부분 결정되어 있다는 허무함에 사로잡힌다. 내 인생에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작다. 태어나는 나라도, 시기도, 인종도, 신체도, 부모도, 친지도, 어릴 적 친구도, 어릴 적 선생님도, 유년기에 영향을 미친 모든 성장환경을 나의 의지는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채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오늘의 내가 있다. 1/5정도의 기간 동안 받은 영향으로 4/5가 결정되는 것이 싫어서 아득바득하며 벗어나고 싶어했다. 남들은 1/5은 자식으로, 2/5는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3/5는 부모로 산다. 누군가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그 트랙을 나는 벗어나려고 시도해보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때가 좋았다. 자의식이 없던 어린 상태가 행복했다. 가라고 해서 갔던 학교가, 학교에서 가니까 따라간 수학 여행이, ‘이거 한 뒤, 저거 해라’고 알려주고 지시해준 커리큘럼이 좋았다. 편했다. 행복하거나 편한 것은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다. 불행과 불편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고 반대의 극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도피의 대상과 추구의 대상이 설정되는 과정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면 생각을 멈추면 될 것이고,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마약에 빠지면 그만이며, 인생의 목적이 편의라면 누워서 종일 잠만 자면 될 것이다. 인생의 목적을 행복, 쾌락, 편의와 같은 곳에 두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비참한 일이다. 차라리 평생 이 허무함에 몸서리치는 편이 낫겠다. 조금의 가치라도 찾으려고 시도라도 하는 게 낫겠다. 비참해질 순 없으니까.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답은 없으니까.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허무함으로 가득 찬 박스에 머리통을 스스로 처박은 다음 펑펑 슬퍼하는 행위다. 그러니 생각을 멈추고 일단 몸뚱이를 움직여야 한다.

 

어떤 상태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어떤 상태는 취해야 한다는 강박. 그것은 지난 10년간 나를 지배한 생각이다. [광신이 되지 않고 의심해야 한다. 속단하지 않고 충분한 정보를 우선 확보하라. 대중이 되는 것은 비문명과 야만의 상태로 퇴화하는 것이다. 누구보다 빠르게 정보를 처리할 능력을 갖추라. 소비자가 되지 말고 생산자가 되어라. 원망하는 자가 아닌 관용을 베푸는 자가 되어라. 남들만큼 하지 말고 최고효율의 방법론을 활용하라. 만들어진 구조 속에서 이익을 취하지 말고, 이익이 발생하는 구조를 만들어라. 감사함의 크기를 키워라….] 내 속에 있는 강박은 수도 없이 많다. 레이 달리오가 말한 것처럼 이런 원칙들을 세워나가는 것이 정말 옳은 방법일까? 좋은 방법론인 것을 분명하지만, 지금 나에게 옳은 처방인지를 의심한다.

나는 꽤 많은 직업을 경험했다. [요리를 했고, 영상판에서 일했고, 게임회사에 들어가고 싶었고, 남들처럼 대기업에도 취업해보고 싶었다. 해외에서 사는 게 어떨지 생각해봤다. 마케팅 회사에서 일했고, 기자로 수많은 사람을 만났고, 행사기획자로 꽤 큰 성취를 느꼈으며, 시키는 거 다 하는 대행업도 했고, 광고일, 기획일, 중개일, 사장노릇도 하고 있다.] 나의 2/5파트를 회고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내가 겪었던 다른 선택의 기로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존재가 되었을까? 아니다. 명함이 바뀐다고 나의 존재가 바뀌지 않듯이, 내 직업이나 환경적 상태가 나의 존재를 정의하지 않는다. 어떤 상태를 지향하는 상태가 나라는 존재다. 내 인생 2/5는 어떤 상태를 지향하며 산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미완성인 상태로 남는 것이다.

 

어디로 가든 옳은 길로 가게 될 것이다. 몸뚱이를 움직여라.

비드폴리오의 플라이휠

1장 > 경험과 노하우의 순환고리

“최선의 경험을 제공한다” 사업할 때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한 가지만 남기라고 한다면 이것입니다. 너무나 단순하고 상식적인 목표이지요. 어떤 사업이든 고객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목표는 국가, 문화, 산업, 시대, 전략이 달라도 전혀 바뀌지 않는 불변의 목표입니다. 플라이휠의 중심에도 이 목표를 꾸준히 추구하는 것이 있습니다.

출발은 같습니다. 플라이휠이 돌기 전의 상태에는 누구라도 같습니다. 너도 나도 모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누군가가 조금 앞서 시작했고, 경험과 노하우가 조금 있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대로 일하는 곳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사업의 성적은 100점 만점으로 매겨지지 않습니다. 등수로 매겨집니다. 남들보다 조금만 더 잘하면 1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경험과 노하우는 쌓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경험과 노하우를 남들보다 빠르게 쌓지 않으면 남들이 하는 만큼의 경험만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남들보다 나아질 수 없고, 1등을 할 수 없습니다. 플라이휠은 성장에 관한 것이고, 성장의 핵심은 속도입니다. 남들보다 잘한다는 건, 경험과 노하우를 어떻게 남들보다 빠르게 쌓을 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영상발주연구소 #LearningBook #LearnFromFailure #복기 #월단위결산 #응대의정석[고객편] #응대의정석[장르편] #응대의정석[기술편] #지식의자산화 #영상발주대백과

 

2장 > 확장의 고리

“어떻게 우리 고객으로 전환시키는가?” 사업할 때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두 가지 남기라고 한다면 두 번째가 이것이 됩니다.

고객에게 최선의 경험을 제공했다면 매출과 이익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 이익은 더 많은 고객을 확보하기 위한 기회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객의 유입보다 우선적인 것이 고객 전환입니다. 전환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업체라면 아무리 많은 고객이 유입되더라도 이탈될 것이고, 마케팅 비용을 높일수록 낭비만 커질 것입니다. 또 실망한 고객이 늘어난다면 앞으로의 성장에 장애물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활용해 고객 전환율을 높여야 합니다.

#고객전환율 #ConversionRate #응대계획머리맞대기 #적합매니저분배 #응대전응대계획수립 #고객응대마스터모듈 #협상의시스템화 #킬링멘트

3장 > 생산성 향상

시장의 활성화 정도는 결국 돈으로 평가됩니다. [객단가*거래수량=총거래액]을 늘려야 합니다. Output을 늘리기 위해선 Input을 줄여야 합니다. 프로젝트 한 건을 매니징하는 데에 들어가야 하는 노력과 시간을 줄이지 못한다면 총거래액을 높일 수 없을 것입니다. 총거래액을 높인대도 늘어난 Input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Input은 결국 비용입니다. 비용은 결국 우리 사업체의 경쟁력에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사업체들은 30%의 수수료를 책정하고도 유지하지 못한 사업입니다. 비드폴리오는 절반까지도 줄여서 흑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익을 높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시장끼리도 경쟁을 합니다.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비용을 줄여야 합니다.

#LessInputMoreOutput #더적은자원으로 #더많이더빠르게 #응대의기록 #CDB노트 #DCB노트 #체계화 #구조화 #지표 #템플릿 #묶어내기 #재활용 #디지털시대의복제 #업무자동화 #스마트워크 #Mise-En-Place #치트 #컨닝 #합법적반칙 #Data처리자동화 #단순반복행위의대체 #마음비용줄이기 #커뮤니케이션혁신 #어휘의약속 #자비스 #매크로

4장 > 파트너의 확보와 마케팅 자동화

양면시장 플랫폼은 수요와 공급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이 둘은 닭과 달걀의 관계와 같습니다. 적합한 공급자원을 확보해야 고객에게 최선의 경험을 제공할 수 있고, 공급자원은 고객이 있어야 플랫폼에 합류하고자 합니다. 고객을 전환시킬 수 있다면 공급자는 자연적으로 확보됩니다.

우리의 잠재고객은 비드폴리오에 등록된 3,000여 개의 콘텐츠를 검색 중 만나게 되어 웹사이트에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웹사이트는 자료조사를 할 수 있도록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체류시간이 늘어나고, 그 중 고객으로 전환되는 고객도 늘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3,000개의 콘텐츠를 우리가 직접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마케팅 자동화와 SEO전략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듭니다. 공급자의 포트폴리오를 정제해서 콘텐츠화함으로 공급자도 직접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고, 우리도 고객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다른 플랫폼들은 탈플랫폼현상을 막기 위해 공급자의 정보를 제한적으로 공개하지만 우리는 모두 공개해 마케팅 비용을 현저하게 줄여냅니다.

#파트너스신규가입 #P1 #P2 #포트폴리오등록 #포트폴리오카테고리 #SEO #제목학원 #콘텐츠상태점검

5장 > 유효 파트너

총거래액을 늘리기 위해 고객을 데려오더라도 그 고객이 만나야 하는 제작사가 부족하거나, 수행능력을 초과해버리면 결국 시장에서의 거래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한계수량을 늘리기 위해 유효 파트너스도 충분히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파트너스의 수보다 중요한 것은 유효 파트너스의 수입니다. 유효 파트너스의 수를 높이기 위해서는 파트너스의 활동기간(파통기한)을 늘려야 합니다. 파트너들이 오랫동안 활동하기 위해서는 활동기간 중 겪는 상실감을 줄여야 합니다.

파트너스의 수만 늘리는 것은 고객에게 최선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과 거리가 있습니다. 고객을 위해서라면 유효 파트너스만 확보하면 됩니다. 하지만 유효 파트너스를 확보하기 전에 파트너스의 수를 높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며, 또 파트너스의 수를 늘리는 것이 장기간에 걸쳐 고객의 유입을 증대시키는 사전작업이 됩니다.

유효 공급자를 파악하고 선별해 지속 관리하기 위해 우리는 대면 인터뷰를 진행합니다. 같은 인터뷰가 수백 번이 넘도록 반복적으로 이뤄졌기 때문에 그 경험과 노하우는 다시 인터뷰 질문지와 방법을 개선하는 데에 적용되었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판단된 정보들을 Refining하고 DB화 해서 사용합니다.

#신규파트너스 #파트너인터뷰심사 #파트너관계설정 #파트너DataRefining #풀적합성 #고객응대맥락동기화 #1군파트너 #상실감관리 #파통기한 #셀링포인트 #3줄요약

6장 > 커뮤니케이션의 콘텐츠화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는 text로 변환시켜야 합니다. 글은 가장 가볍고 포괄적이며 범용적이고 접근성이 좋은 매체입니다. 그리고 한 번 생성된 콘텐츠는 전달하고 읽어 들이는 데에 어떤 시간과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한 번 생성된 콘텐츠는 앞으로 10년 동안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을 모두 제거해버릴 수 있기에 생산성을 효과적으로 높일 수 있습니다.

콘텐츠는 고객유입을 증대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환율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잠재고객은 유효고객으로 전환되기까지 판단하기에 필요한 정보를 찾고 있습니다. 그 시기에 우리의 전문성과 서비스 퀄리티, 강력한 의지를 나타낼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면 신뢰를 가지고 고객으로 전환됩니다. 유효 고객으로 전환된다는 것은 구조나 테크닉이 아닙니다. 신뢰입니다.

최근의 경험이 기억 속에서 휘발되지 않도록 정기적으로 Refining시키는 작업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고 한 분야나 주제에 대해 완전히 통달한 경지에 달한다면 완결된 한 편의 글로 발행시켜야 합니다. 축적은 순방향으로, 끝맺음은 역방향으로 이뤄져야 합니다.

#지식의자산화 #영상발주연구소 #제작후기 #실패사례 #커콘대 #Partners_Private #YouMayNeedThis #자비스메일템플릿 #ContentsArchive #영상발주대백과

7장 > 웹사이트 사용성 개선

비드폴리오의 공고는 어떤 고객, 장르, 기술, 특성이든 구분없이 모두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입니다. 프로젝트의 시작을 알리는 문서라면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공통적인 요소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공통요소만 사용한다면 매니저의 적극적이고 진심어린 휴먼터치가 요구됩니다. 휴먼터치를 유지하기 위해선 비용이 듭니다.

비용을 줄이며 고객의 입장에서 서비스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웹사이트의 사용성을 개선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고객정보취득>고객정보파악>고객분류]의 순으로 이뤄집니다. 고객을 미리 분류할 수 없기에 고객이 제출하는 정보와 우리가 처리하는 정보의 양이 많습니다. <영상발주대백과>를 모두 집필한 다음에는 [고객분류>고객정보제출>정보파악]의 순서로 진행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고의최적화 #공고의최적화 #비드폴리오매니저코멘트 #고객등록창구최적화 #Nudge #Ready-Made-Experience #채널

 


23년 3월 개정

단순화합니다.

이은호의 《자본론 : 돈이 시키는 대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멸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가 우려하던 부작용은 여전히 가진 채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세상을 집어삼켰다. 돈이 사람 위에 군림하고 돈이 사람행세를 한다. 사람은 되려 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다. 개인의 의지와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아진다. 흐름의 방향에는 더욱 가속이 붙고 관성은 커진다. 패러다임 쉬프트의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한 두 건의 사건만으로 이 관성이 바뀌진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고쳐나가자는 사람은 있어도, 자본주의를 엎어버리자는 극단적인 사람은 없다. 그만큼 우리는 모두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위에 삶의 터전을 쌓아 올렸다.

 

  • 시작과 방향

이 모든 사건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다. 돌도끼를 만들고, 바퀴를 만들고, 옷을 만들어 입으며 시작되었다. 만드는 행위가 인간에게 풍요를 가져다 주었으니 인간은 만드는 능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도구를 가진 부족은 생존확률이 높아졌다. 만들지 못하는 부족은 자연 도태되었다. 살아남은 부족은 만드는 능력을 후대에 물려주었고, 후대는 다시 발전시키는 것을 반복하며 인간은 더욱 잘 만드는 존재로 거듭났다. 만드는 존재, 지금 경제가 가지고 있는 벡터의 시작이다.

만들어진 물건을 교환하며 경제가 생겨났다. 경제의 가장 작은 단위는 교환이며, 중간 단위는 시장이고, 가장 큰 단위가 경제다. 교환을 쉽게 하고자 조개 껍데기로 환산하던 약속이 발전해 돈이 되었다. 돈은 노동가치를 환산하는 사회적 약속이다. 만드는 데에 12시간 들어간 의자는 12시간 동안 포획한 생선과 같은 값어치를 가졌다. 노동이 있으면 돈을 벌어낼 수 있고, 돈이 있으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 돈은 노동본위제다.

시장에서 살아남는 비결, 승리하는 비결은 간단하다. “고객 중심” 돈을 가진 자의 번영과 풍요를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하면 그만이다. 돈을 가진 자의 게으름과 탐욕을 위해 모든 것을 최적화하면 그만이다. 혁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도 공통점이 있다. 더 많은 양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효율적으로, 더 적은 자원으로, 더 빠르게, 더 직관적으로, 더 편리하게, 더 쾌적하게,  더 더 더 더 더 뒤에는 무엇을 붙여도 맞는 말이 된다. 더 하기만 한다면 승리의 전략이 된다.

 

  • 최적화

경제에는 세 가지 구성원이 있다. 생산자, 소비자 그리고 중간자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이어지기 어려우니 연결의 역할만 하는 중간자가 생겨났다. 재화시장에서는 유통업자라 불리고 서비스 시장에서는 중개업자라 불린다. 교환은 가치의 이전이다. 가치는 고유하지도 절대적이지도 않다. 교환이 이뤄질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가치다. 가치의 차이를 통해 이익을 발생시키는 것이 실질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보다 쉬운 방법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높은 가치의 상품을 싸게 사거나 낮은 가치의 상품을 비싸게 팔면 이익이 남았다. 포장, 설득, 제안, 협상 능력이 생산능력보다 중요해졌다.

생산자와 중간자는 돈 맛을 봤다. 신이 나서 손을 잡고 춤을 췄다. 하지만 어느 순간 예전만큼 팔리지 않았다. 필요에 대한 공급은 포화되었다. 욕망에 공급하니 조금 더 팔 수 있었다. 오래가지 않아 필요도 욕망도 포화되니 더이상 팔 것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시장은 더 더 더 관성을 유지하고 싶어했다. 시장의 합인 경제는 더 더 더욱 그러했다. 국가도 나선다. 생산자, 유통자, 국가가 함께 손을 잡고 미친듯이 소비자를 만들어냈다.

모든 것이 포화되었다 싶으면 침체가 찾아왔다. 몇년 주기의 소침체, 기십년 주기의 대침체를 겪고 나면 경제는 다시 일어서서 가던 길을 갔다. 지구의 땅덩이는 좁고 인구는 무한정 늘어날 순 없으니, 소침체 대침체는 넘겨도 기백년 주기의 태침체는 넘기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드디어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는가?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나왔다. 실체는 없어도 거래가 가능하다는 주장. 어떤 상품도 서비스도 없다. 알맹이는 가라. 껍데기는 남고. 거래의 형식만 남겨라. 가상의 가치를 교환하자. 희망과 불안이란 감정에 팔자. 실존하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돈만 오가면 그만이니까. 금융시장 얘기다. 실존하지 않음에 거래는 더욱 폭발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물리적인 제약도 시간적인 제약도 없다. IT기술이란 부스터도 달았다. 거래의 속도는 더 빨라지고 거래가능한 품목의 수량도 무제한에 가깝게 늘어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다. [객단가*거래수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 비판

생산 도구로서의 인간 값어치는 하루가 다르게 무의미해진다. 결정된 미래이기에 이미 무의미해졌다는 미래완료시제를 써도 틀리지 않다. 생산성 측면에서 인간은 로봇에 한참 못미친다. 이 이유로 사람을 해고해도 비난받기는 커녕 우수한 경영자라고 상을 준다. 만 명의 일자리를 없앤 사람도 백 명의 일자리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면 상을 받을 수 있다.

유통업자와 중개업자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같다. 중간자는 곧 시장이 된다. 시장의 앞면엔 번영과 풍요가 그려져 있다. 뒷면엔 인간의 게으름과 탐욕이 그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모든 시장은 앞면의 모습으로만 보여지길 바란다. 활기 넘치는 건강한 시장의 모습이지만,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미친 자본의 사회를 가속화시키는 것도 시장이다. 연결이 조금만 천천히 되었다면 지금의 방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인류가 적응할 시간을 조금은 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인간의 의지로 돌아가지 않는다. 돈의 의지로 돌아간다.

나에게도 다른 대책은 없다. 내일도 출근하면 돈이 시키는대로 직원의 생산성을 측정하고 평가해 키워내라고 닦달할 것이다. 인간의 고유한 가치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한없이 나이브하고 비생산적인 낭만주의자로 취급받겠지만. 빨리 이 자본주의 룰속에서 게임을 승리시킨 뒤에 여생을 보장할 만큼의 현금 다발을 쥐고 낭만을 찾아 세속을 뜨고 싶다. 낭만의 세계는 성과로 측정되지 않으니 낭만을 찾지 못해도 괜찮다. 적어도 그 곳에선 미친 자본이 나의 의지와 판단을 조정하진 않을 것이다.

 

  • 그리고

게임의 룰이 그렇다. 이익을 조금 취하면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익을 많이 취하면 나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나쁜 것이다. 하지만 게임의 룰에 따라 이겼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더군다나 개인의 안녕과 풍요, 가족의 안녕과 풍요를 위한 일이기에 선한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폐해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있으니 악한 것이다. 거래상대는 상대적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하지만 이 사회는 타인을 위해서가 아닌 개인의 욕망, 이익추구, 이기심이 부딪혀가는 곳이라는 배웠기에 나쁜 것은 아니다. 한 건의 거래에도 좋거나 나쁘거나 하는 잣대를 들이대면 이렇게 복잡해진다. 이곳엔 윤리가 없다.

가치판단이다.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없다. 대립하는 사상을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 모순되는 가치관을 한 사람의 좁은 마음에 품어낼 순 없다. 누구든 치우친다. 치우친 상태로 대립하고 혼돈에 빠져 허우적 대는 것이 한낱 개인의 최선이다.

치우치면 편할 것을, 선택하면 편할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이렇게 정리해보려고 글을 쓴다. 돈을 벌고자 한다면 부자의 가치관과 생각구조를 따르면 될 것이고, 다른 곳에 삶의 의미를 두고 있다면 그것을 따르면 될 일이다. 선택한 사상 이외의 가치관은 배척하고 부정하면 될 일이다. 굳이 모순되는 가치관을 내가 다 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나는 선뜻 택하지 못한다. 모순만 발견했다. 나는 오늘도 치우치지 못했다.

세상이 그러하듯 나 또한 카오스모스다. 괜찮다. 혼란과 대립이 존재하기에 당신은 균형의 상태다. 그저 엔트로피가 조금 높을 뿐이다.

 

— 덧붙임 —

생각숙제1 : 생산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무가치해진 시대, 인간의 가치는 0인가 null인가.

생각숙제2 : 비생산의 영역에서 인간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생각숙제3 : 노동은 이미 무의미해졌는데(미래완료), 왜 돈은 여전히 노동본위제일까?

 

— 덧붙임 210619 —

경제가 시키는대로 움직이다보니 존엄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였다. 정반대로 향하려는 가치 사이에서 고민했다. <존엄하게 산다는 것>이 답을 주었다. 존엄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경제활동을 추구하면 된다.

일의 단위화

  • Mission / Job / Work / Task

전형적인 상하위 hierachy구조, 피라미드 구조다. 이 구분법은 “그 일은 너무 중요하지 않아.” 혹은 “그 일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와 같이 현실적으로 오늘 당장 집중해야 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구분할 때에 자주 쓰인다. 또는 미래 계획을 세울 때에 너무 구체적인 실행단계로 빠져들지 않기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실행에 집중해야 할 때에 근원적인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을 막아야 할 때에도 도움된다. 하지만 일의 계층을 구분하고 레벨을 구분하는 것은 추상적으로 도움될 뿐, 실무에 바로 적용하기 어렵다.

  • 일의 단위화

일을 Chunk로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가 모두 파악된 상태라는 것이다. 일에 대한 파악은 [현황파악 > 문제정의 > 해법제시 > 실행방안] 네 단계로 진행한다. 지금 비드폴리오의 구성원들과의 협업관계에서는 일을 Chunk단위로 만드는 단계가 생략되어 있다. 현 구성원들은 일을 Chunk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Chunk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현황파악 > 문제정의]을 제시해야 한다. 현황파악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불평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렇더라, 저렇더라. 보이는 대로 씨부리면 그것이 현황파악이다. 현황과 문제를 구분하는 이유다. 우리가 풀 수 있는 문제, 풀어야 하는 문제를 구분해야 한다. 문제를 구분해내지 못하는 단계에서 현황만 지껄여대는 것은 도움 되기는커녕 정보의 공해를 만들어 훼방을 놓는다.

때문에 정의되지 않은 현황, 정의된 문제, 완성된 Chunk의 과업은 모두 구분되어야 한다. 현황은 쏟아 내고 끄집어 내야 한다. 문제의 정의는 파고들어야 한다. 각각의 행위가 다른 것임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하며 구성원들의 role playing도 정의되어야 한다. 업무 논의, 기록 공간 또한 각 행위에 최적화되어 마련되어야 한다.

완성된 Chunk의 과업은 따질 게 많다. 완성된 일의 성과가 얼마나 큰지, 소요 자원은 얼만큼 들어가는지 input과 output을 비교해 가치를 판단한다. 해법이 얼마나 적합한지도 따져야 한다. 실현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도 따져야 한다. 해당 일을 담당하는 사람의 역량도 따져져야 한다.

  • 로드맵을 짭니다.

실행하는 사람의 로드맵은 실행자 각자 짜여져 있어야 합니다. 실행자의 로드맵이 없는 상황에서 상관, 상부 관리자는 어떤 판단과 지시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로드맵의 부재는 부하의 문제입니다.

  • Priority Management

상관은 종합적으로 판단합니다. 부하는 판단기준과 판단방법을 배웁니다. 상관의 판단과 부하가 판단이 일치해지는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상호 노력합니다.

  •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빠지지 않습니다.

[문서냐 이메일이냐 노션이냐 GDSS냐 카톡이냐 대면맞짱이냐 커피타임이냐 이면지낙서냐 단체회의냐 좌장주도지시냐 상명하복하달이냐 실무자의바텀업이냐 브레인스토밍이냐 연구조사냐 R&D냐 정보취합이냐 데이터기반통계냐 머신러닝이냐 MECE냐 귀납이냐 연역이냐 린스타트업이냐 해커톤이냐 역할게임이냐 OO학원이냐 스프린트냐]에 상관없습니다. 그건 그저 매개체일 뿐입니다. 실행방안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방법일 뿐입니다. 도구일 뿐입니다. 뭐든 어떤방식으로 하든 문제가 문제해결의 틀에 맞춰져야 합니다.

GDSS(구글스프레드시트)로 고객응대시스템 구축하기

부제 : [개발자없는 개발팀의 개발블로그] 비용 안 들이고 시스템 구축하기

 

  • 시작하는 말

IT 스타트업 생태계 언저리에 몇 년 기웃거렸지만, 나는 코드 한 줄도 못 쓰는 사람이다. 정보처리기술이 없다는 것에 대해 항상 부족함을 느꼈다. 엑셀을 중급 수준으로 할 수 있었고, 워드프레스로 웹사이트를 몇 개 만들어본 게 전부인 상태였다. 구글은 지난달 GDSS(Google Docs Spread Sheet)를 통해 앱을 만들 수도 있다고 발표했다. 클라우드-엑셀을 넘어서, 누구나 응용하면 정보처리엔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사용방안을 소개하고 있다.

나에겐 두번째 사업인 비드폴리오를 운영하면서, 아웃풋에 대한 기대치를 낮추는 대신 인풋을 몇 배나 더 줄이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잡았다. 초경량 린스타트업의 태도를 지향한 것은 나의 일습관이나 비용절감에 대한 집착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시장규모가 나오지 않는 환경이 더욱 근본적인 이유다. 버티컬 중개 플랫폼의 경우, 적은 자원으로 사업체를 궤도에 올려야 하는데, 적은 자원으로 시스템을 구축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아무런 시스템이 없던 2개월차, 밤낮없이 일을 해도 동시관리 프로젝트 5건 넘기기 힘들었다. 지금은 매니저 1인당 동시응대 가능수량이 40건까지 올라갔으니 생산성이 최소 8배 이상 증가했다고 가늠할 수 있겠다. 임시방편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GDSS는 저렴한 비용과 관리효율성 측면에서 아주 만족스럽다.

물론 더 고도화된 시스템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요리를 못하는 사장님이 식당을 운영하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개발자가 1명이라도 있으면 적자가 날 정도로 매출규모가 적은 상황인데, 그 인원의 공백이 생겼을 때 무거운 시스템을 내가 다룰 수 없다면 사업이 위태해지기 때문이다. 어설프지만 사업운영에 필요한 핵심자원을 내재화했다는 데에서 안심이 된다.

근본없는 시스템을 공개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이 글을 정리하는 이유는 우선 나를 위해서다. 얼마 전부터 생산성 증대의 정체기가 왔는데, 개선의 여지를 파악하고 싶다. 또 혹여나 GDSS를 유사한 방식으로 응용해 정보처리시스템을 구축한 사람이 있다면 연결되어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겉으로 보이기엔 이래요

 

  • 구글닥스로 고객응대 처리시스템 구축하기

비드폴리오 최초의 웹사이트를 만드는 데에는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고, 광고를 게시하자마자 30분만에 고객의 전화가 걸려왔다.

고객이 전화를 한 이유는 나에게 연락할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객의 정보를 더 수월하게,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form을 만들어 삽입했다. form 서비스 중에서 손에 가장 손에 익었던 Google form을 4개월 정도 사용했다. 더 나은 서비스를 찾다가 form서비스의 시조새 격인 wufoo를 구입했다. 하지만 서베이몽키로 인수된 이후 몇 년째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고 실망이 너무 커서 환불 받았다. 워드프레스 플러그인으로 연동되는 form 중에서 Caldera Form을 선택해 적용했다. Caldera Form은 TOP5에도 못 드는 비주류 폼이지만 내가 필요한 기능들을 가장 다양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고객이 자신의 정보를 제출하는 방법은 총 7가지다. 전화, 이메일, 채널톡, Form 4가지다. (채널톡은 섬세한 설정 없이 채팅창만 열어두는 것은 오히려 비정형 대화로 유도하는 격이기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다.) 다양한 채널로 들어온 고객의 DB를 모두 개별적으로 관리하기는 힘들었다. 일부는 고객이 직접 제출한 정보인 RawData가 있었지만, 전화나 이메일로 받은 고객은 매니저가 직접 입력해야 했다. 때문에 통합적인 고객DB인 CDB(Client Data Base)시트를 만들었다. 고객이 직접 제출한 정보가 자동으로 연동되진 않고 매니저가 일일이 옮겨야 한다. DB를 직접 입력하고 만져야 하기 때문에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 정상적인 데이터베이스라면 입력기와 뷰어가 별도로 있어야 할 것이다.

RAW DB가 CDB로 바로 연동되지 않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두 정보는 어차피 분절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고객이 직접 제출한 정보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며, 그 정보만으로 거래를 진행시킬 수도 없다. 때문에 전담 매니저가 개입하고 판단해 고객의 프로젝트를 정제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특성이 있다. 고객이 최초에 제출한 정보는 고객의 주문사항이 아니라, 고객을 파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정보로 여겨진다. 고객이 진짜 원하는 것을 정의해내는 것은 결국 전담 매니저의 몫으로 남는다. 때문에 CDB는 단순히 통합Intergrated되었다는 의미보다는 정제Refined되었다는 의미가 더 강하다.

정제된 고객의 정보를 관리하는 CDB의 최초 버전에는 고객의 컨택포인트와 2~3칸의 노트만 있었다. 어떤 종류의 정보를 받고, 기록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고객이 수십명을 넘어가자 관리가 힘들었다. 그 고객이 어떤 상태이고, 어느 매니저가 배정되었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했다. 고객의 상태를 분류했다. [응대중/전형중/제작중/완료/취소] 5가지 색상의 약속을 정하고 상태가 바뀔 때마다 다시 바꿔 칠했다. 색상표시가 안 되어 있으면 찾아내기 힘들었으나, 색상을 일일이 표기하는 것은 번거로우며 휴먼에러도 발생할 수 밖에 없었다. 조건부서식으로 상태표기숫자에 따라 해당 행이 자동으로 색상이 적용되게 설정했다. 고객상태 분류 방법은 총 9가지로 늘어났다가, 13가지로 늘어났다가, 지금은 16종류가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늘릴 필요는 없어 보인다.

CDB의 모습

 

조건부서식 색상 적용

 

CDB시트의 칼럼 종류는 [정보취득창구/담당매니저/방문목적/고객입력정보/응대방향/공고제목/공고경로/비밀번호/적합제작사대상] 등 추가하며 사용하고 있다. 입력기와 뷰어가 별도로 없는 상황에서 데이터베이스를 직접 확인하고 입력하고 있다 보니 칼럼 종류가 너무 많아지면 매니저의 업무 직관성에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

고객을 응대한다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집중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과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이메일로 주고받았던 내용들만이라도 우선 표준화시켜야 했다. 매일 메일을 작성하는 데 3시간을 넘게 들였기 때문이다. 이전 고객에게 제공한 고객 경험을 미래 고객에게도 재사용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고객의 상황이나 상태를 분류해야 했다. 고객을 응대한 경험이 100회를 넘어가자 중요하거나 자주 쓰였던 메일을 한 곳에 모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 아카이브에 접속하면 유사한 메일을 작성할 때 참고할 수 있었으므로 일을 조금 더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 이후에는 각 단계마다 메일의 템플릿을 만들어 특정 부분만 변경해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보냈던 이메일을 쌓아두었던 시트는 FUW(Frequently Used Wordings)라고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작성하는 데 3시간씩 걸렸던 메일도 10분만에 베껴쓸 수 있게 되었다. 메일의 템플릿이 규격화되고, 고객마다의 정보를 특정위치에 입력하는 과정을 로봇처럼 반복하다보니, 문득 이 과정을 기계에게 위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성하는 내용중 매번 들어가는 공통요소가 있었고, 변경이 필요한 정보를 입력하는 위치 또한 항상 일정했기 때문이다. 고객의 정보를 고정적인 위치에서 불러낼 수 있으면 메일을 자동으로 생성할 수 있어 보였다.

이것이 작동되기 위해서는 고객의 정보를 CDB에서 불러낼 수 있어야 했다. 고객의 정보가 300개를 넘어갈 즈음이었다. 고객 마다의 고유 번호는 입력된 순서대로 매겨져 있었지만, 이를 ProjectCode를 부여하기로 했다. 컴퓨터가 고유의 Data를 구분할 수 있으면서, 사람이 보더라도 간략하게나마 직관적으로 코드를 파악할 수 있도록 년월일6자리에 고유번호2자리를 붙이기로 약속을 정했다. 19052703은 19년 월 27일 3번째로 들어온 프로젝트를 칭하는 식이다.

이제 FUW에서 ProjectCode만 입력하면 십수개의 이메일이 자동 생성되고, 그 중에서 골라서 발송하면 된다. GDSS에서 제공되는 부가기능인 Mail Sender를 사용하면 Gmail로 가지 않고도 바로 발송시킬 수 있지만 상황별로 메일의 종류가 80개를 넘어가는 경우엔 큰 도움이 되지 않아서 나는 사용하지 않았다.

고객 기본응대문구 자동생성기

시스템의 도움없이 중개를 하던 과정에서 가장 복잡하고 어려웠던 것은 미팅일정을 조율하는 일이었다. 한 번 작성하는 데에 최소 30분씩 걸렸고, 미팅시간이 잘못 조율되면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으려 발송 전에 2번씩 체크하느라 정신이 날카로워질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 들어가는 시간뿐만 아니라 정신노동의 부담을 덜어내는 것이 과제였다. 미팅일정 안내메일 생성기가 작동하려면 파트너스의 정보도 단번에 불러들일 수 있어야 했다.

파트너스의 Code는 숫자가 아닌 닉네임을 부여하기로 했다. 주식시장의 기업코드의 형태로 할지, 중복이 없이 이메일로 할지 고려했으나, 모두 직관성이 떨어졌다. 매니저가 Code를 외우거나, 조회하는 별도의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부르는 구어로 닉네임을 쓰기로 했다. 닉네임은 회사이름을 단순화시킨 것인데 [무조건 한글로 적을것, 띄어쓰기는 없앨 것, ㈜없이, ‘프로덕션’이나 ‘스튜디오’는 제외]의 약속을 지켜 입에 잘 붙는 것으로 정했다.

FUW_미팅조율메일생성기

GDSS로 만들어진 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은 유지보수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이다. 고객에 대한 데이터규격이나 파트너스 평가기준을 업데이트하는 일은 일반적인 개발팀에서는 주 단위의 작업이 요구될 것이다. 나도 연동된 시트들이 늘어날수록 주요 구조 변경에 따른 부가작업이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여전히 계획만 확실하다면 반나절만에 리팩토링을 끝낼 수 있다.

파트너스의 정보도 처음에는 구글form으로 받았다. 서비스 공급자인 파트너스가 제출한 정보 또한 거래중개에 바로 쓸 수가 없다. 온라인 상에서 심사를 강화하거나 form을 더 정교하게 만들어도 불가능하다. 근본적으로 일을 받고 싶은 공급자 입장에서는 무조건 자신들이 잘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중개 플랫폼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려는 공급자가 너무 많은 탓에 정보보다는 노이즈가 더 많았다. 노이즈를 제거하는 일은 받은 정보와 기록하는 정보의 분절로 해결한다. 모든 파트너스는 방문심사를 거쳐야 하며, 이 과정에서 파트너스의 DB를 정제Refined해서 관리하게 되었다. 중개자는 단순히 연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검증과 심사의 역할까지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제된 파트너스 정보에는 파악, 분류, 평가, 심사, 활동기록 등 여러 가지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다. 세부 항목들을 따지면 40가지가 넘는다. 처음에는 제작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위주로 측정했다. 지금은 제작실력은 3가지 항목으로 줄여버렸고 사업안정성과 서비스가치제안능력 등 고객만족요인에 더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중이다. 이 과정은 내 예상보다 훨씬 어려웠고, 할 일도 많았으며, 복잡했다. 지금까지 7차 업데이트가 이뤄졌다. 시스템 구현의 문제도 있었지만 내 주관적 평가가 개입되는 문제도 있었다. 인문대학원을 나온 친구에게 사회조사방법론을 1일 과외받고 객관적 지표를 만드는 법을 흉내냈다.

서비스 공급자를 평가하는 과정은 네 단계에 걸쳐 개선되었다. 처음에는 각 제작사의 사무실을 방문해 백지의 노트에 대화내용을 기록해나갔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필수 질문을 몇 가지 만들어서 공통적으로 활용했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필수 질문과 선택적 질문을 구분해서 대화가 풍부해지도록 유도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인터뷰하는 도중에도 실시간으로 파트너스를 평가할 수 있도록 Refiner를 만들었다.

파트너스 Refiner

좌측의 리파이너에 입력하면 Refined DB의 데이터 순서와 일치된 data set이 생성된다.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게 여긴 일이지만, 최초 제출된 RawDB가 관리되지 않고 소실되던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았다. Caldera Form의 Processor기능을 활용해 GDSS의 특정 시트로 데이터를 누적시킬 수 있었다. 이전의 방법대로라면 웹사이트 상에서 제출된 고객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 [워드프레스관리자 > form플러그인설정 > form선택 > 데이터확인] 과정을 거쳐야했기에 시간과 단계가 오래 걸렸는데 클릭을 몇 번이라도 더 줄였다. Caldea Form은 한국어를 인식하지 못하는지 데이터를 엑셀에서 불러들이면 깨지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GDSS에 직접 연동하자 해당 문제를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form에 정보가 입력되는 순간, 관리자에게 메일을 자동으로 발송하는 기능도 설정했다. 덕분에 Gmail의 검색창으로 고객 정보를 조회할 수 있었다. 모바일 디바이스에서 GDSS 앱을 켜고 접속하는 데에는 로딩이 느려 20초 이상 걸렸는데 Gmail 앱을 켜고 들어가면 10초 내외로 찾아낼 수 있었다. 메일을 자동으로 보내게 하려면 WP Mail SMTP라는 것을 설정해야 했다. 어떻게 한 건지 기억은 안 나지만, 3일 정도 걸렸으며 당시 너무 무섭고 어려웠었다는 기억은 선명하다.

RAW 데이터가 차곡차곡

데이터 관리의 자동화는 소홀했던 편인데, 데이터가 자동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놓으니 몇 가지 통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우리 플랫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벌어간 제작사, 지원은 적게 했으나 승률이 높은 제작사, 고생은 많이 하고 돈은 못 번 제작사 등을 솎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재밌는 통계를 내는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하지만, 우리의 생산성 향상에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작업은 진행하고 있지 않다.

서비스 공급자 입장에서 자신과 상관없는 프로젝트 알림을 받게 되면 그 또한 스팸으로 여기게 된다. 어차피 계약을 맺는 곳은 한 업체니, 그 과정에서의 경쟁을 줄여야 공급자의 출혈경쟁을 방지하고 오랫동안 플랫폼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장려할 수 있다. 때문에 비드폴리오에 등록되는 프로젝트는 매니저들의 검토를 거쳐 10~20곳의 제작사에게 배포된다. 서로의 시간을 5분씩 빌리는 것은 큰 수고가 아니다. 이 과정은 사람 매니저들이 상호 의견을 주고 받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매니저들이 프로젝트에 적합한 공급자를 추려내는 데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조도구를 만들고, 선정된 제작사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편하도록 이메일 묶음을 만들어주는 추출기도 만들었다.

이메일 추출기

=index(Refined_DB!$1:$259,match(C5,Refined_DB!B:B,0),3)

매니저는 하루에도 전화를 20통씩 한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자주 오는데, 기존 고객인지, 감독님인지 파악할 수 있도록 번호 조회기도 만들었다.

전화번호 검색기

ProjectCode를 해체하면 날짜를 추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 숫자일 뿐, 서식상에서 날짜로 인식되는 정보가 아니다. 19052703에는 년/월/일/순번의 정보만 있기 때문에 주 단위의 구분은 불가능하지만 월간 단위로는 끊어낼 수 있다. 일련을 규칙대로 개수를 세어 데이터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리고 이 표를 직관적인 차트로 바꾸면 플랫폼 운영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DASHBOARD가 된다.

DASHBOARD 1
DASHBOARD 2

이 외에도 제작중 특이사항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별도의 시트를 만들었고, 비용처리하는 시트도 만들어 회계업무를 간소화시켰다. 월단위로 쏟아져 나오는 마케팅 데이터들도 연동해 성과를 측정할 수 있다. 꾀를 좀 부려 응용하고자 한다면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지만 너무 시스템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 같아 요즘은 지나친 고도화에 집착하진 않으려 자중하고 있다.

10년 전, MIT에서 콜라병을 따서 잔에 부어 마시는 과정을 147단계로 구분했다는 발표를 듣고 충격 받았다. 당시엔 왜 그런 연구를 무엇을 위해 한 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연속 동작이 그렇게나 많은 최소 행위 단위로 분절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만 했다. 요즘은 반대의 의미로 놀란다. 그렇게나 많은 행위의 묶음을 의식하지 않고도 인간의 두뇌는 연속 행위로 인지하고 처리해낸다는 사실.

내가 수행하던 과업을 시스템에 위임해 생략시키려는 시도는 매번 순탄하진 않았다. 그 행위가 가시적이며 측정가능하고 선형적으로 이뤄져 있다면 별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세상은 정성적이며 비체계적이고 순서상으로 일관성없는 행위가 더 많았다. 그런 영역의 업무는 당분간 인간이 계속 수행해야 할 것이며, 그런 영역의 일이라면 집중력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거나 판단을 돕는 보조도구를 통해 정신노동의 생산성을 높여야 할 것이다.

 

  • 맺음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두번째 사업을 하고 있다. 시간도 1년 10개월이 지났다. O2O로 불리다가 온디맨드로 불리기도 하는 이런 종류의 사업 유행이 한풀 꺾이고 있다. 대부분 사라지고 일부는 남았다. 흑자로 전환하지 못하고 사라진 사업체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결국 문제는 생산성이다. 애초부터 생산성이었고 앞으로도 생산성일 것이다. 생산성은 온전히 나에게 달린 문제다.

1년만 일렀어도 지금의 시스템은 구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3년쯤 후라면 유사한 수준의 생산효율을 낼 수 있는 방법론과 보조도구들이 일반화될 것이다. 놀랄 일도, 새로운 현상도 아니다. 10년 전에는 수천만원 들었던 웹사이트를 지금은 몇 만원에도 만들어낼 수 있다. 수기를 문서로 작성하던 시기에 타자기가 도입되고, 다시 워드프로세서로 넘어간 흐름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나는 시기적으로 혜택을 받은 것일 뿐이며, 머지않아 이 또한 보편화될 것이다.

GDSS에 대한 이야기를 했지만, 적은 자원으로 정보처리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일 뿐이다. 이 것은 보조도구일 뿐, 정보처리방법의 유일한 해결책도 아니다. 이 외에도 도움될 수단과 방법이 있다면 확보해 정보처리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정보처리능력 또한 플랫폼 운영의 전부가 아니다. 그리고 플랫폼 운영 또한 회사의 전부가 아니다.

 

비드폴리오는 이렇게 일하고 있습니다. 마케팅 담당자 채용 중입니다. 사업기획분야도 채용중입니다. 플랫폼 사업을 운영하며 축적되는 경험자산을 토대로 추가 사업을 검토중입니다. 영상광고시장에 뜻과 비전이 있는 분이라면  robin@vidfoli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