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 방송을 통해 소개된 레스토랑은 총 105개인데, 모든 레스토랑이 어쩜 그리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망하고 있는지 매번 시청자를 놀라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고든 램지 셰프가 가장 고전한 레스토랑이 있는데, 시즌 6에 나온 에이미의 베이킹 컴퍼니Amy’s Baking Company편이다.
이 레스토랑은 부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는데 부인은 주방을, 남편은 홀을 담당하고 있다. 제작진은 램지 셰프가 현장에 투입되기 하루 전날 찾아가 평소의 모습을 촬영한다. 홀과 주방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탓에 한 손님은 피자를 1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불만을 표하자 남편은 “기다리기 싫으면 꺼져! 그런데 돈을 내기 전에는 절대 나갈 수 없어”라는 상식에 어긋난 발언과 함께 손님과 승강이를 벌인다.
다음날 램지 셰프가 방문했다. 다른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레스토랑과는 달리 깔끔하게 정돈된 주방, 훌륭한 디저트를 맛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아챈다.
저녁 서비스 시간 동안 손님의 입장이 되어 함께 보낸 램지 셰프. 잘못된 음식을 돌려보냈으나 주방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직원이 팁을 받자 계산대에서 그 팁을 빼앗는 업주의 모습을 보고 램지 셰프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램지 셰프의 조언은 이 부부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부부는 마음을 여는 듯하다가도 다시 마음을 닫았다. 부부는 문제의 원인이 본인들이 아닌 외부에 있다고 주장하는 방어적 태도를 보인다. 손님과 직원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다. 촬영 중에도 종업원 한 명이 해고되는데, 제작진은 이전에 같이 일했던 직원을 찾아 만나 인터뷰하면서 지금까지 100명 넘는 직원이 해고되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한다.
책임을 회피하고 합리화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비스가 제대로 되었을 리 없다. 예정보다 일찍 서비스를 마치고 부부와 고든 램지는 대화를 시도한다. 평소의 방식인 폭언과 욕설의 충격요법이 먹히지 않자 램지도 흥분을 가라앉히고 “왜 조언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느냐?”라고 물었고, 부인은 “나에게 필요한 조언이라면 최선을 다해 변하도록 할 것”이라고 답했다.
그녀의 대답을 믿어보기로 한 램지는 다음 날 아침 레스토랑을 다시 찾는다. 하지만 부부는 출근하지 않았고 레스토랑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든 램지를 가장 당황케 한 이 부부의 이야기는 아래 비디오를 통해 직접 볼 수 있다.
100편 가까이 촬영한 램지 셰프가 처음으로 조언과 컨설팅을 중도 포기한 에피소드라는 것이 알려지자, 수많은 리뷰와 패러디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한 시청자는 “이 부부에게는 램지 셰프가 아니라 정신과 의사가 필요했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본 방송 이후 레스토랑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제작진이 다시 찾아간 비하인드 스토리 영상(보기)도 공개됐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에게 공격을 받자 이들은 더욱 방어적인 태도로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벽을 쌓아올렸다. 램지 셰프, 키친 나이트메어 제작진, 악플러, 손님들 모두 다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합심하고 있는 것이라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이 부부의 모습은 시청자와 네티즌의 비난을 받았지만, 수많은 레스토랑 경영자에겐 ‘절대 따라 하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가 되어 큰 교훈을 남겼다. 램지 셰프도 에이미의 베이킹 컴퍼니를 떠나며 낙담의 클로징 멘트를 남겼다.
“물론 당신은 당신의 방식대로 경영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변화하길 원하지 않는 당신에게 그 어떤 충돌이나 언쟁도 필요 없다. 어떤 비판도 들으려 하지 않는 상대를 도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스터셰프코리아. 2년 만에 돌아온 이번 시즌에는 요리에 인생을 걸어 도전하는 9,000명의 지원자가 모였다. 자신을 ‘요리하는 돌아이’로 소개한 윤남노 지원자. 예선전 요리를 준비하며 “다 죽이러 왔어요”라고 말하는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이목을 집중시켰다.
“출연자 중에 잘난 척한다는 소문이 자자해서, 혼낼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먹어보니 너무 맛있는 거예요. 칭찬 한마디 했더니 펑펑 울어요. 알고 보니 선생을 잘못 만나서 칭찬 한마디 못 듣고 맘고생을 많이 했더라고요.” – <‘마셰코’ 심사위원 김소희, 김훈이, 송훈 셰프> 조선일보 인터뷰 중(보기)
조리하기 어려운 오리가슴살 스테이크를 먹어본 심사위원은 “TOP5로 봅니다” “키워주고 싶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칭찬을 처음 들어 그토록 서럽게 울었던 것일까? 악덕업주를 만나 심적으로 힘들어져 요리까지 그만두게 되었다는 고백이 거짓일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만났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1년 동안 요리를 쉬었어요. 쉰 게 아니라 포기했던 거죠. 제가 너무 순진했어요. 순수하게 요리만 사랑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독을 조금 품어야 하더라고요.” 그는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요리했고 앞으로는 독하게 살겠다는 다짐과 함께 입을 열었다.
윤 씨는 중학생 때 요리 자격증을 다섯 개 땄다. 요리대회만 나가면 상을 탔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공부를 너무 안 해 부모님과 선생님 속을 썩였지만, 전문대학교에서 주최하는 요리대회에서 우승해 전액 장학금을 받고 조리과로 진학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실력을 좋게 평가받아 국내 최고급인 S호텔 외식조리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기대했던 요리사의 업무와는 많이 달랐다. “일이나 진로에 관한 충고는 없이 자신을 따르길 강요하는 선배들이 많았어요. 처음엔 그 분들을 따르는 것이 일을 잘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하루 종일 양파와 과일만 썰고 있다 보니까 제가 배우고 싶은 요리를 할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움의 열망이 너무 컸던 그 때, 더 큰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마침 친분이 있던 선배로부터 새로 준비하는 레스토랑의 오픈팀에 들어오라는 러브콜을 받았다.
하루 최대 18시간 근무, 받기로 한 급여보다 적게 지급되는 일은 이 업계에 만연한 문제라 생각했기 때문에 감안했다. 폭언이나 가벼운 체벌도 주방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요리사 중 요리할 때 완전히 딴사람이 된다고 무서워하는 후배요리사들도 있어요. 그런데 바뀌는 건 당연해요. 저도 그래요. 어떤 직업인이든 자기 일에 엄격해지고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잖아요. 그리고 일이 끝나면 다시 일상적인 관계로 돌아오는 거죠.”
윤씨가 요리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이 기간, 주방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고용주가 수면제를 타오라고 시켰어요. 혼자 살 수 있는 양이 적으니 직원을 시키는 거죠. 나중에는 제가 데려온 동생한테 다이어트 약을 먹였어요. 동생이 어지러워하면서 눈을 억지로 치켜뜨고 버티니 집에 보내야 했어요. 의사 처방이 필요한 약을 싫다고 하는 애한테 장난으로 먹여놓고 재밌어 하는 거예요. 술 마시고 여직원을 성추행하기도 했어요. 한 번은 교통사고를 냈는데 유리한 쪽으로 증언하라고 목격자로 동원돼서 거짓증언도 해야 했어요.”
(윤씨의 이야기만 들어서는 사실판단이 어려워 전화통화를 시도했지만 지난 고용주와는 전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윤 씨는 합류한 지 6개월 만에 자신의 발로 레스토랑을 걸어 나와야 했다. 그만둔 후 못 받은 두 달 치 월급을 달라고 연락했을 땐 “어디 가서 요리한다고 하지 마라. 내가 한국에서 너 발 못 붙이게 하겠다”라고 되려 협박받았다.
요리나 주방의 일로 문제가 생겼으면 어떻게든 이겨내고 싶었으나 자신이 손 쓸 수 없는 문제가 계속 발생하니 낙담이 컸다.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상황이 계속되었는데 어째서 6개월 동안이나 그만두지 못했냐는 기자의 질문에 “무조건 잘하고 싶었어요. 저도 진짜 요리를 배우고 싶었거든요. 그 사람이 저에게 희망을 심어준 것도 있고요. 내 밑에서 3년만 일하면 잘 클 수 있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었어요. 업계에서 계속 일할 각오를 해서 누구에게도 밉보이기 싫었거든요.”라 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지금껏 만난 최고의 스승은 그 6개월 동안 같이 일했던 헤드셰프였다.
요리사가 일하고 싶은 환경, 요리사가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환경이 공존했던 모순적인 상황. 윤 씨의 경험을 단순히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분쟁으로 여겨야 할까?
좋은 고용주, 좋은 스승을 만나지 못해 좌절했던 요리사는 마셰코에 지원하는 것을 계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좋은 멘토를 만나서 열정적으로 일하고 싶어요. 적어도 5년 동안 한 스승 아래에서 일하며 배우는 게 지금의 목표에요.”
가스를 많이 마셔서 폐병에 걸리기 쉽다거나, 무거운 조리기구를 다루느라 어깨와 손목에 염증이 생긴다거나, 근로기준법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직업 고유의 고단함은 많이 알려졌다. 수많은 사람이 이를 이미 알고 도전하기에, 요리사가 진로를 포기하는 이유가 열악한 처우 때문만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더 성숙한 외식업계가 되기 위해, 요리사의 열정과 재능이 올바르게 쓰일 수 있는 건강한 근무 환경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생각해볼 시점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한다. 요리사도 예외 없다. 아니, 요리사는 다른 직업보다 그 고민의 깊이가 더욱 깊을 것이다. 열악한 근무환경, 주변인의 만류, 정보의 부족, 다양한 근무 경험, 불안정한 생활, 낮은 보수…. 와 같은 현실적인 조건을 끊임없이 극복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꿈과 열정만으로 요리한다는 말은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래서인지 요리사가 되겠다는 꿈은 마음속에 품고 있지만, 선뜻 실행에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호주에서 요리 공부를 하고 있는 4명의 여성을 만났다. 네 명의 공통점은 호주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요리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한가지 공통점 이외에는 모두 달랐다. 나이도, 전공도, 배경도, 환경도, 학교도 달랐다.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솔직한 이야기. 깊이 있는 진로 고민을 들어보았다.
본격 요리사로서의 진로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이들이 살아가고 있는 오늘에 대한 기록이 현실적으로 도움될 것이라 생각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녀들의 4인 4색 인터뷰 시작한다.
간단히 자기소개 해주세요!
최민아(30대 후반) :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다가 이제 3년차 요리사에 접어들었습니다. QTHC 다니고 있고, 2년 과정 중 1년을 마쳤습니다.
김해인(21세) : 이화여대 휴학하고 에볼루션 다니고 있습니다. 1년 6개월 과정 중에 1년 남았습니다.
전미미(28세) : 6년 다니던 삼성전자 그만두고 요리유학 준비 중입니다. 8개월 후 윌리엄블루 입학 예정입니다.
박주영(30대 후반) : 디자인 일을 오래했고 지금은 르꼬르동블루에서 빠티셰리 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1년 6개월 과정에서 6개월 지났습니다.
다들 요리를 시작하기 전에 다른 일을 하셨군요?
어떻게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나요?
박주영 : 저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해서 컴퓨터 작업을 많이 했는데, 10시간씩 앉아 있는 게 힘들었어요. 디자이너로 4~5년 정도 일했어요. 20대 끝자락에 호주로 워킹 왔을 때, 직업을 바꾸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에 돌아와서는 미술선생님 일을 잠시 했고, 지금은 이렇게 요리 공부를 하고 있네요. 요리에 대한 열정이 강했다기보다는, 그냥 집에서 즐겨 만드는 수준이었어요. 빠티셰리 과정을 배우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밀가루 한 번 제대로 만져본 적이 없었어요.
전미미 :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요리사가 멋있어 보였어요. 직업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한 적은 없어요. 정말 막연했고, ‘나중에 크면 요리사가 될 거야’라고 장래희망 란에 적어내곤 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한국을 탈출하고 싶어서 우선 호주로 왔었어요. 아무런 준비 없는 워킹홀리데이였어요. 이 나라가 나와 맞는지 맞춰 보고 싶었는데, ‘집 떠나니 고생’이라는 말이 어떤 뜻인지 깨달았죠. 그 뒤로 요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기까지 6년이 걸렸네요.
최민아 : 저는 교육대학교를 나왔고 초등학교 선생님이었어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삶이 값지다고 항상 생각해왔어요. 학교 선생님을 그만두고는 중동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는데, 중동이라도 기름이 나오지 않는 나라는 정말 가난했고, 그 악순환을 풀기 위해서는 교육이나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레스토랑 사업 능력이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요리 공부를 시작한 게 33살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요리는 좋아했어요.
김해인 : 고등학생 시절 내내 입시 준비만 했어요. 경제학이나 경영학부로 진학하려고 했는데 정작 전공 선택할 때에는 가능성이 열려 있는 자율전공학부를 선택했어요. 대학 입학하고 나니까 약간 의욕이 상실되었어요. 수능 끝내고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땄어요. 공부만 하느라 하고 싶은 일 못한 자신에게 주는 선물 같은 의미로요. 그 뒤로 주말마다 요리봉사를 나가게 됐고, 실제 요리사분도 많이 만났고, 점점 요리에 빠져들었어요. 주말에는 요리봉사, 주중에는 학교에 나갔어요. 학교 수업 중에도 “나는 무엇을 가장 좋아하나?”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고, 매 순간 요리라고 대답이 나왔어요.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게 있다면 하는 게 맞다 생각해서 무작정 왔어요.
요리사라는 직업인으로서 진로를 세우는 데 확신이 있었나요? 어려움은 없었나요?
박주영 : 디자인도 그렇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도 그렇고, 젊을 때만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요. 이전에 했던 일들이 요리와 관련이 없는 것도 아니라 생각하거든요. 저는 기술을 배워서 오래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요리를 하고 싶어요. 우리는 기술이 좋은 세대에 태어나서 120살 까지 살 거에요. 앞으로 반 평생을 먹고 살아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직업을 찾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기회비용은 아깝지 않은 것 같아요.
전미미 : 고등학교 때 저는 야자 빼고 요리학원 다녔어요. 제과 제빵 쪽 수업을 듣고 자격증도 땄어요. 딱 거기까지. 요리 전문 고등학교도 가려고 했었는데 어머니께서 말리셨어요. 여느 어른들이나 그러잖아요. 요리사라는 직업에 대한 반대는 아니었어요. 기본적인 교육이나 교양수업이 이뤄져야 나중에 많은 사람들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하셨어요. 평범하고 일반적인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공감대가 생기기 어려울 거라고 걱정해주셨어요.
저도 “요리가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아”라는 정도의 강한 고집이 있던 건 아니었거든요. 좋아하던 일의 연장이었죠. 제가 삼성에 들어갈 때는 마침 운 좋게 사람을 많이 뽑던 해였어요.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장이 생겼기 때문에 고민은 계속 있었어요 삶이 안정적이니까 계속 일하고,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살 생각도 했어요. 안정적이죠. 그런데 안정적인 게 전부였어요. 그리고 그 안정적인 삶도 길어야 40대 초반까지만 보장되거든요. 직장생활을 할수록 “나는 한국에서 못살겠다” 확실해졌어요.
주변 사람들 특히, 부모님께서 반대하시진 않았나요?
박주영 : 전 아직 젊으니까 외국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했어요. 그게 서른 후반의 나이에 할 말이냐면서 부모님은 노발대발했어요. 늦은 나이에 결혼도 안하고 간다는 것에 대해서 많이 우려했어요. 제가 고집을 부렸죠.
김해인 : 처음엔 반대하셨는데 설득시켰어요. 마음을 돌리는 데 한달 정도 걸렸어요. 제가 하고 싶어 하니까 막을 수는 없죠. 대신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 책임도 저에게 있어요. 부모님께서는 반 년 동안의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해 주셨어요. 그 이후의 필요한 생활비와 학비 모두 제가 벌어서 충당하고 있어요. 부모님께서는 지금도 한국으로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으세요.
최민아 : 저희 부모님께서는 자식들이 원하는 것을 하도록 독립적으로 키우신 편이었어요. 그래서 믿어주는 면들이 많아요. 동의하거나 지지하진 않더라도, 너의 선택이 그러하다면, 너가 행복하다면 하라는 분위기요. 정말 가까운 친구들이나 지인들은 저를 오히려 부러워해요. 한국 여성들은 애기 낳고 나면 산후우울증도 겪고 심리적으로도 위축되거든요. 사회적으로도 약간 고립되고요. 그런 친구들은 저를 통해서 오히려 대리만족하고 있어요. 자녀를 키우는 엄마로써의 삶도 아름답지만, 자신을 위해 공부하고, 투자하고,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는 것은 친구들에게는 비현실적인 일이거든요. 그런 저를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많아요.
전미미 : 부모님이 제 선택을 지지해준 건 완전한 독립을 했을 때부터였어요. 그 전에는 철없는 딸의 투정으로 받아들이셨어요. 요리사라는 직업에 발을 담그기까지 오래 걸렸어요. 부모님은 한국에서 대학교 갈 게 아니라면 직접 벌어서 가라고 했어요. 그래서 3년을 모았는데, 또 다시 막으셨어요. 지금 모은 돈으로는 학비를 내고 나면 남는 돈이 하나도 없다. 수중에 돈이 없으면 돈 버는 재미도 없고, 지칠 것이다. 일이 잘 안 풀려서 한국에 다시 돌아오게 되면 직장도 없고 빈손일 텐데, 완전히 제로베이스로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완충장치가 될 수 있는 목돈을 마련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일리가 있는 것 같아서 3년을 추가로 돈을 모았어요.
부모님께서 지원해주시는 분들 보면 부러워요. 우리 부모님은 독수리 부모님이에요. 자립심을 키워주려고 하거든요. 저는 20살이 되는 순간부터 모든 지원이 끊겼어요. 20살에 호주 워킹 올 때 비행기 티켓값, 어학원 3개월치를 마지막으로 지원받은 게 없어요. ‘쉽지 않구나’라는 걸 처절하게 느꼈어요. 나에게 맞는 계획을 세우지 못하면 유학은 어려울 것 같아요. 목돈을 만들지 않고 3년 전에 왔다면 저는 굉장히 불안했을 것 같아요.
요리를 실제로 해보니 어떻던가요? 어렵거나 힘들진 않았나요?
전미미 : 셰프라는 직업은 아직 안 해봤지만, 셰프크루 커뮤니티 사람들 얘기 들어보면, 몸이 너무 힘들다고 해요. 사실 어떤 직업이든 정신적인 힘듦은 어디에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다니던 대기업도 이직률이 굉장히 높았거든요. 스트레스가 엄청나다는 뜻이에요. 돈을 거저 주지 않더라고요. 저는 그 때 일하면서 저 자신을 직장에 갈아 넣어야 했어요. 어떤 직업이든 힘들거나 힘들지 않다거나 말할 순 없을 것 같아요.
박주영 : 이걸 직업으로 삼으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체력적으로도 힘들겠다고 생각해요. 요리를 고상한 취미생활로 즐기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집에서 식사를 챙기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았어요. 여기서는 생활비뿐만 아니라 학비도 벌어야 돼서 일도 병행하고 있어요. 학교 입학 전부터 카페 일자리를 찾았어요. 저는 두 번째 오는 호주라서 어렵지 않지만 어린 친구들은 이런 생활 계획적인 부분에서 힘들어할 수도 있을 거에요.
“나는 요리만 해. 나는 만들기만 할거야”라는 생각으로 오면 안 돼요. 그 외적인 과제, 자발적인 학습이 정말 많아요. 어린 친구들은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중도 포기도 많이 해요. 학교잖아요. 어느 학교든 숙제가 있고 과제가 있어요. 저도 이렇게 과제가 많을 줄 몰랐어요. 실습만 따라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그룹과제, 문제해결, 시험도 많아요. 시간 관리 잘 해야 돼요. 저는 일도 하면서 학교도 다녀야 하니까, 학기 중에는 4~5시간씩 밖에 못 잤어요.
김해인 : 한국에서 요리봉사를 통해 제가 만났던 요리는 나눔의 의미로서의 요리였어요. 그 때에는 요리에 대한 환상이 약간 있었던 것 같아요. 요리는 무조건 좋은 거라고만 믿었거든요. 여기서 만난 요리는 조금 달라요. 저는 경제학 분야에서 자본주의 폐해를 지적하는 부분에 공감을 했거든요. 제 3세계의 경제 발전을 위한 정책이나 공정무역을 통한 사회운동들에 관심을 가졌었어요. 그걸 한동안 망각하고 있다가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너무 많은 음식들이 버려지는 걸 보고 다시 생각났어요. 예쁜 모양, 완벽한 퀄리티의 요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버려지는 재료가 너무 많았어요. 제가 처음 시작한 요리의 의미로 보거나, 제 가치관에서 보더라도 올바른 요리는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새로운 고민이 많이 들어요. 제 소신과 충돌하는 데에도 시키는 대로 일하는 주관없는 요리사는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생각도 뒤늦게 들기도 해요.
최민아 : 제가 체력이 강한 편이 아니에요. 겁이 많이 났어요. 주변에서 저를 아시는 분들은 만류했어요. 여자에다가 체력도 약해서 다 못할 거라고 말했어요. 오기가 생겼어요. 어쩌면 정신적인 싸움일 수도 있겠다. 버텨봐야지,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 그리고 한국에서 2년 정도 일을 했는데 들어가는 것부터 쉽진 않았어요. 주방장들도 다 저보다 나이가 어리니까, 저를 써주기가 한국 문화상 어려운 거에요. 그래서 호텔조리학과 교수님을 통해 소개 받아서 첫 취업을 했었어요.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강도의 일이었어요.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살지?” 생각이 들었어요. 다리뿐만 아니라 온 몸이 붓고, 집에 오면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몸이 아픈 거에요. 선배들이 2~3달이면 몸이 적응한다고 얘기했는데 3달 지나니까 거짓말같이 다리도 안 아프고, 몸이 견딜 만 해졌어요.
취미로서의 요리는 선택사항이에요. 직업으로서의 요리는 의무사항이에요. 정해진 시간, 열 시간 때로는 열여섯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하고, 식사시간도 정해지지 않고, 어떻게 보면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기본적인 권리마저 다 포기해야 하는 상황들이 닥치기도 해요. 나는 요리를 정말 하고 싶은데, 나에게 요구되는 것은 반복적인 과업들이에요. 감자 70키로를 씻고 자르고를 반복해요. 이 반복되는 과정의 무의미해지고 지루한 일상을 견뎌내는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이런 시간들을 겪게 되면서 스스로는 더 강해지고, 육체적으로도 강해져요. 이런 과정을 겪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칼질, 손놀림, 요리기술이 쌓이는 직업 같아요. 저는 지금도 주방에서는 경력 3년차의 막내에요. 5년차가 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자신을 내려 놓고 겸손해지고, 밑바닥이 어딘지 알면서 머물러야 하는 시간인 것 같아요.
요리유학을 갈 수 있는 여러 나라가 있었을 것 같은데,
왜 호주를 선택하게 되었나요?
박주영 : 호주에서 1년을 살아봤기 때문에 고민없이 호주로 정했어요. 다른 나라에 가면 그 나라에 대해 배우고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잖아요? 저에게 호주는 그런 시간을 세이브할 수 있는 나라인 거죠. 한국에서는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은데 여기는 그런 면은 적어요. 한국에서는 “그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여자가 요리사 한다고? 너보다 나이 어린 상사 밑에서 일하려고?”라는 얘기를 듣게 되죠.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인데도 사회적 통념에 반대되는 듯한 충돌을 겪어요. 요리를 한국에서 시작하면 새 직장을 잡는 게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호주에 왔어요. 내 비즈니스를 하더라도 경험이 충분히 쌓여야 할 텐데, 그 경험은 호주에서 쌓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저는 한국에 다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오고 나니까 이 곳에 계속 살고 싶다는 생각이 커져서 영주권을 따는 것도 생각하고 있어요.
최민아 : 호주는 정말 매력이 많아요. 자연이랑 가깝고, 신선한 식재료가 많고, 관광산업이 발전해서 외식업도 수준이 높아요. 세계적인 레벨의 레스토랑도 많아요. 요리교육 사업도 같이 발전되어 있어서 선택할 수 있는 학교도 많아요. 여러 측면에서 다 매력적이라 생각해요. 저는 외국에서 계속 생활할 생각을 갖고 있어서 영어가 좀 더 준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에서 요리 공부를 할 수도 있지만, 이왕이면 영어도 같이 공부해서 국제적인 적응력을 갖추면 좋잖아요?
유학 준비 중에서도 영어 부분에서 어렵진 않았나요?
어학원을 다녔다면 어떤 코스, 커리큘럼을 거치고 있나요?
박주영 : 영어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우선 한국에서 IELTS 점수를 땄어요.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한국에서 준비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어학시험을 쳐본 게 8년 전 토익이 전부라서 공부 계획을 세우는 데에만 2달 정도 걸렸어요. 부산에 살다 보니 서울에 비해 어학원도 많지 않았고 수업 시간대도 맞지 않았어요. 일하면서 공부해야 하니까 독학할 수 밖에 없었어요. 어학원 비용을 조금이라도 줄여서 요리학교 학비에 보태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고, 입학 가능 점수 만드는 데에 약 5~6개월 정도 걸렸어요.
김해인 : 저는 미국보단 유럽이나 호주권으로 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IELTS시험을 준비했어요. 가장 빠른 시험부터 신청한 뒤 공부를 시작했어요. 당시 대학교 1학년 중간고사 기간이었는데 학교 공부는 안 하고 한 달 내내 IELTS 공부만 했어요. 점수는 7.0을 받았어요. 점수를 받은 상태로 유학 방안을 찾다가 셰프크루를 만나게 되었어요. 종로에서 진행하는 유학설명회에 갔는데, 영어를 그렇게 강조하더라고요. 저는 영어 점수가 있으니까 그 부분이 문제가 안 되잖아요? 유학설명회 끝나고 바로 전화통화로 추가로 상담받고 바로 입학신청 절차 들어갔어요. 수속까지도 2달이 안 걸렸어요. 입학시기를 맞추느라고 조금 기다렸는데 총 4달 걸렸어요.
전미미 : 어학 공부 효율을 따진다면 한국에서 공부하면 훨씬 효율적이에요. 저렴한 가격에 정말 잘 가르쳐줘요. 점수만 올려두고 현지 적응을 위해 어학원은 잠시 다니는 게 비용적으로나 시간적으로 효율적이에요. 그런데 저는 어학원을 10개월 동안 끊었어요. 수업은 IELTS 점수가 없이도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EAP(대학진학준비코스English for Academic Purpose)를 밟고 있어요. 이 코스도 별도의 시험은 쳐야 되요. EAP 코스를 들으려면 하이인터High Intermediate레벨 수업을 들어야 해요. 그 정도면 IELTS 5.0 정도 나오는 수준이거든요. 시험에 대한 압박이 적을 뿐이지, 영어 공부를 덜하거나 장벽이 낮은 건 아니에요.
어학원 다니는 기간에는 영어에만 집중하려고요. 워킹홀리데이하면서 느꼈던 건데, 일과 공부,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는 것은 쉽지 않아요. 간혹 가다 한 분씩 보여요. 하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저는 제 자신을 알아서 그렇게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요. (웃음)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어서 그렇게 될 수 없어요”라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계획을 무리하게 세워서 실패해선 안 되잖아요?
최민아 : 저는 IELTS시험은 미리 쳐두었기 때문에 점수는 문제가 안 됐어요. 그런데 영어는 아직도 저에게 큰 숙제에요. 현장에서 정말 빠른 속도로 일하려면 말들을 알아듣고 반응해야 하는데, 아직도 항상 긴장하고 있어요. 우리가 외국인이라고 해서 배려하고 봐주지 않아요. 영어 공부는 지금도 틈틈이 하고 있어요.
현지 생활은 어떤가요?
전미미 : 저희 집은 부자는 아니지만, 부족함은 크게 못 느끼면서 살았어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할 수 있었고, 편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20살이 되면서 호주로 처음 자립했을 때 느꼈어요. “내가 편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부모님의 희생이 있어서였구나” 나는 그 편함을 포기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어요. 호주에 있으면서도 독방을 쓰고 싶었고, 취미활동도 많이 하고 싶었고, 여행도 자주 가고 싶었어요. 이런 것을 즐기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가 힘들더라고요. 저는 지금 어학원을 조금 넉넉한 기간으로 다니고 있는데, 요리 시작하면 얼마나 힘들지 알기 때문에 미리 쉬어두는 것이기도 하고, 지난 6년 동안 수고했던 저를 위해 보상해주는 시간이기도 해요.
박주영 : 한국에 다시 갈 생각으로 왔는데, 여기 오고 나니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서, 영주권 딸 수 있는 쪽으로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여기서 지내는 중에도 이민법이나 비자법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정책들을 염두에 둬야 해요. 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김해인 : 호주에 한 달 살고 나서, 현지 생활이 적응될 즈음부터 일을 시작해서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었어요. 처음엔 의사소통 문제도 많았어요. 호주 영어만 할 줄 알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주방에는 다국적 요리사들이 많이 모이거든요.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당시에는 모든 것이 처음이다 보니 위축된 상태로 일을 시작했어요. 그래도 한국인 셰프들이 주변에 많아서 극복할 수 있게 서로 도움을 많이 줬어요.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신 분은 두 분인가요?
두분 모두 1년 가까이 일하셨다고 들었는데, 현지 요리사 생활은 어떤가요?
최민아 : 학교 2년 기간 중에 1년이 끝났어요. 입학하고 나서 1달 만에 일을 구했어요. 제가 한국에서 2년 동안 모은 돈이 학비와 생활비에 급속도로 빠져 나가고 있었거든요. 마음이 급해지더라고요. 처음에는 이력서를 70군데 돌렸어요. 그 중에서 트라이얼까지 이어진 곳이 4곳이고, 그 중 한 곳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작은 레스토랑이었는데 5개월 일했어요. 겨울에 저는 근무 시간을 더 늘리고 싶었는데 연말 휴일이 되자 손님이 적어서 늘려주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식당으로 옮겼어요. 두 번째 식당은 셰프만 마흔 여섯 명 있는 큰 주방이에요. 이 곳에는 6개월 동안 일했고, 극한 체험 중입니다.
김해인 : 학교마다의 커리큘럼은 조금씩 달라요. 저는 1년 더 다녀야 하는데 실습부터 우선 끝나고 이론만 남은 상태에요. 지금까지 2곳의 레스토랑에서 일했어요. 같은 벤틀리의 계열사이긴 한데 주방 환경은 많이 달라요. 처음 8개월 일한 씨러스는 파인다이닝 음식을 하는 곳이고, 지금 4개월 째 일하고 있는 모노폴은 바 형태에서 간단한 음식을 내보내고 있어요. 콜드 라더 섹션에 있었는데, 그렇게 한 두달 일하다가, 디저트 섹션이 너무 즐겁게 일하는 것 같은 거에요. 그래서 총주방장에게 디저트 파트로 옮겨달라고 말했어요. 말할 때 긴장해서 떨면서 말했는데, 그냥 흔쾌히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요리를 전공하고 있지만 디저트, 케이크, 페스트리 쪽이 더 많은 관심이 생겨요.
첫 식당은 주방에 15명이 일했고, 지금은 5명이서 일해요. 이전 업장에서는 맡을 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작은 주방 내에서 다른 동료들은 무엇을 필요로 하고, 나는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서비스는 어떻게 나가고 있는지 등 전체적인 흐름을 배울 수 있는 곳인 것 같아요. 요즘은 5일 일하고 2일 학교 가요. 휴일이 없어요. 계속 이렇게 일하게 될 것 같아서, 일주일 동안 여행가게 휴일 달라고 말해놓았어요.
유학 준비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전미미 : 저는 19살 때 진로 고민할 때부터 정보를 찾았어요. 당시 10대인 제가 찾을 수 있는 정보는 너무 적더라고요. 인터넷이랑 박람회가 전부였어요. 찾아보면 모두 좋은 얘기만 반복했어요. 꿈과 희망을 주는 얘기들. “이렇게 하면 당신도 할 수 있어”, “좋은 학교야, 졸업하면 취업해, 취업하면 영주권 나와”라는 얘기만 있었어요. 그런 게 신뢰가 가지 않았던 거죠.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요. “요리학교 졸업하면 일자리 구해야 할텐데, 주방에서는 경력자만 찾는데, 경력도 없는 널 누가 써주겠어?”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주는 곳이 없어요. 그래서 직접 가보는 수 밖에 없었어요. 20살에 호주에 와서 살면서 문화 차이도 느꼈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다는 것을 몸으로 겪었어요.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회사를 다니는 중에도 정보는 꾸준히 수집했어요.
최민아 : 저는 요리 경력과 레스토랑 사업 경험을 쌓아서 중동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어요. 학교를 다니고 경력을 쌓으려고 했는데, 학비가 너무 비싸니까 순서가 바뀌었어요. 일을 먼저 했고, 요리학교는 요리를 시작한 지 3년차가 되었을 때 진학할 수 있었어요. 호주의 요리학교는 기술학교다 보니 비싼 편이에요. 한국에서 2년 요리사로 일하니까 호주 요리학교 1년 학비를 겨우 모을 수 있었어요.
중동에 있을 때 르꼬르동블루가 레바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알아봤었어요. 중동 쪽 유학원 정보는 전혀 없더라고요. 한국 유학원을 인터넷으로 찾아서 연락했고 알아봤어요. 레바논에 있는 학교를 몇 곳 추천해줬는데, 정작 수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제가 원하는 수업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호텔경영이랑 외식경영 이론수업만 있는 학사과정이더라고요.
외국에서 준비할 때에는 너무 막연해요. 유학원들은 수속을 시키는 것만 목적이기 때문에, 깊이 있는 상담이나 자세한 사실 확인 등은 제쳐두고 의뢰자에게 동기 부여해서 빨리 수속 절차 밟도록 유도하려는 게 너무 티 나거든요. 한국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여러 유학원을 검토하다가 셰프크루 블로그도 발견하게 됐었죠.
박주영 : 저는 유학원만 세 번 거쳤어요. 제가 좀 꼼꼼한 성격이라서 유학원에서 요청한 서류나 문서를 빠짐없이 챙겨 줬는데, 유학원에서 작은 실수가 너무 잦았어요. 나는 큰 결심을 하고 가는 일인데, 내가 생각하는 절박함만큼 일처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주더라고요. 수속 절차에서 생긴 실수로 학교에서 입학 거부당하면 제 계획이 모두 틀어지잖아요.
첫 번째 유학원에서는 에볼루션에 지원했는데 오퍼 레터를 받지 못했어요. 화상통화까지 진행했는데도 경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어요. 경력있는 사람만 요리 학교를 들어가야 하나요? 아니잖아요? 없으니까 가는 거잖아요? 모르니까 배우러 가는 거잖아요? 학교 측에서 왜 그런 답변을 보냈는지도 모르겠고, 유학원은 왜 저의 적극성을 어필해주지 않았는지도 이해가 안 돼요. 결국 서류상에서 충분히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거든요. 이 학생이 입학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학교 측에 어필해주면 좋은데, 전혀 그런 노력을 해주지 못해요.
두 번째 유학원에서는 빠티셰 학교로 지원했어요. 그 때가 12월 말이었는데, 호주에는 연말 휴일이 길어서 일들이 많이 미뤄졌어요. 거긴 수속비도 별도로 요구해서 냈었어요. 그런데 제이 셰프 만나서 들어보니 수속비는 원래 없다고 말하더라고요? 두 번째 유학원에서도 진행을 제대로 못했기 때문에 수속비는 다시 받아냈어요. 그렇게 유학원만 찾아보면서 시간을 두 세 달 낭비했어요.
저는 나이도 있고, 비자도 거절될 확률이 높다는 상황 때문에, 모든 우려 사항을 염두에 두고 있거든요. 다른 어린 친구들처럼 어려서 신청하면 대부분 비자가 나오면 저도 걱정 안 했을 거에요. 결국 유학원에서 대행을 해주더라도 결국 신청자 이름은 제 이름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모든 신청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는 제 책임이거든요.
김해인 : 저는 셰프크루 알기 전에는 유학원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요. 검색하면 요리대학교 다 찾을 수 있고, 웹사이트에 연락처도 다 나와 있잖아요. 요리대학교 국제학생부에 직접 연락하면 방법도 알려주더라고요. 각 학교 교무실이나 행정실에 연락해서 내 상태를 알려주고, 어떤 조건으로 진학할 수 있는지, 커리큘럼은 어떤지, 장학금 제도는 있는지, 기숙사 여부도 일일이 따졌어요.
그럼 셰프크루를 통해 유학을 진행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있나요?
어떤 점이 다르던가요?
김해인 : 현지 요리사 출신이라서 다른 점을 모두 제외하고, 기본적인 은행 계좌 개설, 휴대폰 개통 같은 현지 적응도 도와줘요. 셰프크루 모임에 정기적으로 나가면 같은 또래의 친구들이나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요. 선후배도 만날 수 있고요. 한국을 떠나서 요리를 배우러 왔다는 것만으로 친해질 수 있고 공감대가 생겨요. 이게 가장 큰 도움되는 부분 같아요.
전미미 : 몇 년 동안 유학 관련 정보를 찾다 보니, 내가 받아들여야 할 정보와 걸러내야 할 정보가 구분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셰프크루를 접하게 됐어요. 유학원 중에서 유일하게 안 좋은 얘기를 올려 놓은 곳이었어요. 블로그에 올려 놓은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니까 구체적으로 짚어주는 디테일한 부분에 공감이 됐어요. 진정성이 보였어요. 이 정도면 내가 비자를 맡기고, 이 곳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것이 괜찮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속하기 전까지 설명회 열릴 때마다 3번 찾아가니까 그만 찾아오라고 하더라고요. 첫 설명회 갔을 때에도 입학 예정일은 1년 6개월 뒤로 잡고 계획하고 있었거든요. 매번 똑 같은 얘기를 하는데 자꾸 오냐고 묻길래 “셰프님 보러 왔죠~ 팬이에요~” 하면서 계속 찾아갔어요.
박주영 : 셰프크루는 유학설명회에서 처음 만났어요. 다른 유학원을 통해서 입학 신청하던 상황을 설명하고 제 고민을 털어놨어요. 답변은 시간 낭비일 거라는 거였어요. 첫 유학원에서 실패한 것처럼 안 될 거라고. 나이도 많고, 워킹 경력도 있기 때문에 법이 바뀌는 시점에서 비자가 안 나올 수도 있다고 말해주더라고요. 비자가 거절되는 것은 입학 거절보다 더 큰 문제거든요. 이민성에서 거절되면 아예 호주로 유학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거든요. 르꼬르동블루로 입학한 것은 비자 발급 안정성 때문이에요. 학비가 비쌌기 때문에 고민이 안 된 것은 아니에요. 더 저렴한 학교도 고려했는데, 전 확실한 계획이 필요했어요.
최민아 : 셰프크루 블로그에는 미사여구가 없어요. ‘세계 최고’, ‘세계 유일’ 이런 표현들이 없어요. 오히려 그런 학교의 혜택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경우도 알려줘요. 르꼬르동블루 출신인 사람이 자신의 모교를 설명할 때에도 그렇게 얘기하니까, 진심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죠. 이 사람은 진심으로 후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글 읽는 중에 들어요.
서울에 왔을 때 직접 만났어요. 돈은 얼마나 준비되었는지, 영어 점수는 받아왔는지를 따지더라고요. 제가 세운 계획도 다 무너졌어요. 이름있는 곳에서 제대로 된 출발을 하고 싶었거든요. 유명한 학교를 들어가는 게 현실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고, 투자 대비 얻을 수 있는 게 작다고 말해주더라고요. 적정한 수준의 학비와 적정한 교육이 제공되는 학교를 찾았어요. QTHC라는 학교가 애들레이드에서 시드니로 분교를 내려던 차에 전교생에게 5천불 가량 장학금 지급 프로모션 시즌이 있었어요. 저는 다행히 혜택도 받았어요.
학교에 대한 기대감은 줄이는 게 필요해요. 내가 좋은 학교를 나왔다고 해서 사람들이 알아봐줄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에요. 학교에서 제공하는 것은 정말 기초적인 지식이에요. 어떤 학교든 그 정도는 제공해요. 중요한 것은 오랜 시간 수련을 통해 얻게 되는 기술이에요. 학비가 비싼 학교는 좋은 재료를 써서 좋은 실습 환경이 주어지지만, 그 비용대비 현장 실무에 크게 도움되진 않아요. 업장의 스타일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어차피 새로 배워야 하거든요.
셰프크루 사람들 끼리도 자주 모이나요?
최민아 : 셰프크루는 요리유학만 집중적으로 하기 때문에 행정력도 좋고 수속이나 여러 절차에서 일처리가 깔끔해요. 일은 일대로고, 셰프크루는 유학원이라기 보다는 동료의식이 뭉쳐있는 끈끈한 공동체에 가까워요. 같은 학교에도 한국인이 많은데, 셰프크루를 통해서 온 사람들은 한 번씩 봤던 사람들이니까 더 가깝게 생각해요. 다른 유학원에서 온 친구들은 놀라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유학원만 같을 뿐인데, 어떻게 저렇게 친하지? 개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팔로업해주는 곳은 없거든요.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이야기들, 만남을 추구하는 곳이에요. 이런 건 상업적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인지 여기서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아요.
전미미 : 타지에 나와서 셰프크루 커뮤니티를 통해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엄청 큰 경험이에요. 다른 사람들의 유학 후기 글도 읽다 보면,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이 몇 있는데, 실제로 만나볼 수 있다는 것. 셰프크루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건 정말 도움되고 매력적이에요.
제이리 셰프는 어떤 사람인가요?
전미미 : 셰프크루는 요리유학에 있어선 현실을 바라보게 해주는 유학원, 정신차리게 해주는 유학원이에요. 삼성전자 그만두고 요리유학 갈 거라고 했을 때 들은 얘기가 “미쳤어요?”였어요. 본인이라면 절대 안 간다고 하는 거에요. 유학원 대표라는 사람이.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요?
박주영 : 제이 셰프는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솔직하게 얘기해줘요. 그걸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고,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어요. 다른 유학원에서는 절대 얘기해주지 않는 얘기들이 많거든요. 여러 정보들을 받아들이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을 찾아내는 게 당사자에겐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제이 셰프가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받아들이길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고객이니까 극진한 서비스를 받고 싶어하는? 그런 사람들은 좋은 말만 해주는 다른 유학원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최민아 : 호주에 오고 나서는 제가 바빠서 자주 보지 못하고 있지만, 어렵고 고민있을 때는 연락하면 언제든 시간을 먼저 내주고 진심으로 고민을 들어줘요. 자주 보지 못하더라도 그런 사람이 항상 있다는 건 큰 도움이 돼요. 마음을 기댈 언덕 같은 거죠.
요리유학을 준비 중인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자면?
전미미 : 셰프크루 설명회에서 알게 된 20살 동생은 정말 준비를 많이 하고 있더라고요. 요즘 애들은 정말 생각도 깊고, 고민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반면 간혹 가다 꿈만 꾸고, 청사진만 크게 그리는 친구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겐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집에서 지원을 해주면 좋지만, 지원이 안 된다고 해서 조바심 가지지 않고 계속 준비했으면 좋겠어요. 저도 6년 걸려서 왔잖아요.
김해인 : 저는 1년 전의 저에게 조언을 해보자면, 오라고 할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말고 오라고 할 거에요. 지금도 한국으로 돌아갈지, 여기서 요리를 더 할지, 다른 공부를 할지 여전히 걱정이에요. 지금 당장 요리를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무작정 왔어요. 대학교도 버리고, 힘들게 본 수능점수도 버리고, 부모님과 친구들도 다 제쳐두고 왔어요. 뭔가 많이 포기한 것 같지만, 요리라는 분야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기고, 스스로에 대한 용기도 생길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부딪혀 봐야만 답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부딪히라고 할 거에요.
박주영 : 유학설명회든 상담이든 아무 고민 없는 상태에서 찾아가봐야 도움 안 돼요. 내가 조사하고 공부한 뒤에 부족한 것을 물어야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정말 기본적인 질문을 하는 건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영어는 어느 정도 해야 하나요?” 같은 질문이 실제로 나오더라고요. 찾아볼 수도 있고, 굳이 물어보지 않더라도 스스로 생각해봐도 뻔히 답을 찾을 수 있는 얘기잖아요. 본인 인생이고, 본인 공부인데 스스로 알아보고 뽑아 먹으려고 해야 더 얻을 수 있어요.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 해선 안 돼요. 다른 유학원이든 셰프크루든 본인 인생을 대신 책임져줄 곳은 어디에도 없어요.
최민아 : 용기 있게 선택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선택하기 전에 본인이 이 일을 끝까지 할만한 준비가 된 사람인지도 점검해봤으면 좋겠어요. 요리사가 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한 뒤, 다른 길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이 생겨요. 그 시간은 아깝고 비용도 많이 드는 선택이기 때문에, 이 과정을 사랑하고 끝까지 지켜 갈만한 열정이 있는지 스스로 점검하면 좋을 것 같아요. 현실은 상상하시는 것보다 냉혹하고 정말 어렵다는 것 알려주고 싶어요. 한국인들은 성실하고 일 잘한다고 알려져 있죠? 저도 많이 들었던 얘긴데요, 호주 와서 보니까, 유럽 친구들, 호주 친구들, 우리와 비교 안 될 정도로 열심인 애들 넘쳐요. 체력도 좋아서 혀를 내둘러요. 이런 친구들 사이에서 살아 남으려면 정말 많은 준비가 필요해요. 그리고 그만큼 이 일을 좋아해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주방에서 일하는 건 운동경기 피크타임 같아요. 정말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스피드를 올려서 식재료를 만지고 요리로 창조해내죠. 이런 급박한 상황 뒤에는 누군가가 먹어 준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안도해요. 이런 상황이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사람이라면 맞지 않을 거에요. TV에 나오는 요리사의 포장된 모습은 찰나적 순간이에요. 그런 모습에 미혹되지 않고, 이런 요리사의 일상들이 자신의 삶으로 이어졌을 때 견뎌낼 수 있는 인내와 지구력이 있어야 주방에서 일할 수 있어요. 이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용기있게 선택하실 수 있을 거에요.
다른 비즈니스 분야처럼 레스토랑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상품을 팔 수 있을지 고민한다. 이윤 없이는 레스토랑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고, 자연히 사람들이 쉽게 속을만한 전략을 동원할 수 밖에 없다. 물론 다른 비즈니스 분야에서도 통할 방법을 동원해서 말이다. 오늘은 영악한 방법으로 고객의 돈을 더 쓰게 만드는 레스토랑의 비법을 소개한다. 반대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입장인 독자에게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간단한 전략이 될 수도 있다.
레스토랑 메뉴판에는 화폐 모양($)을 볼 수 없다.
간혹 몇몇의 레스토랑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는 화폐 단위를 표시하지 않고 있다. 고객이 화폐 단위를 보는 순간 비용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은 고객이 돈을 신경쓰게 만들지 않는다. 오로지 음식에만 관심을 갖게 한다. 화폐 표시를 보이지 않는 사소한 심리적 트릭을 사용하는 것만으로도 꽤 높은 수준의 지출을 유도할 수 있다. 고객은 아마 이전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출했음에도 더 사고 싶다는 충동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숫자로 눈속임을 잘한다.
사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1000원짜리를 990원에 팔면 사람들은 훨씬 더 경제적인 선택을 한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에서는 아예 985원으로 더 싸게 판매하는 것처럼 포장할 때도 있다. 사람들이 더욱 싼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바쁠수록 사소 차이에 지갑을 연다. 그러나 최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이런 수준의 눈속임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차피 비싼 레스토랑에 찾아오는 사람들은 많은 돈을 쓸 각오를 하고 찾아오기 때문이다.
‘가족’이라는 정서적 공감대를 사용한다.
사실 그냥 ‘초콜릿 쿠키’ 보다 ‘추운 겨울 할머니가 직접 구워준 따듯한 초콜릿 쿠키’라고 설명하면 더 맛있을 것 같지 않은가? 많은 사람들이 할머니와의 추억을 갖고 있을 것이고,구매한 사람들은 그 쿠키가 실제로 할머니가 만들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매개로 손님의 구매 의도를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추억과 감성이 구매에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케이스다. 실제로 패밀리 레스토랑일수록 이런 수법을 잘 사용하곤 한다
해외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은 각 해당 국가의 언어로 메뉴를 설명한다.
이탈리아 음식점을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보게 되는 언어가 바로 이탈리어다. 해당 국가 언어로 메뉴를 표시하게 되면 음식점의 전문성을 의심하지 않게되는 효과가 있다. 예를 들어 ‘쉬림프 스파게티’를 ‘쉬림프 스캄피 탈리아탈레 Shrimp scampi tagliatelle’로 표시하는 식이다. 당신이라도 일반적인 스파게티보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공수했을 법한 ‘탈리아탈레’를 먹고 싶어하지 않겠는가? 탈리아탈레는 이탈리아어로 ‘국수’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요즘에는 ‘구글’에서 다 알아볼 수 있다.) 이런 현지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음식점의 전문성을 광고하는 데에 있어 굉장히 효과적이다
때로는 메뉴에 유명 브랜드를 노출하기도 한다.
티지아이 프라이데이 TGI Fridays에서는 잭 다니엘 BBQ소스를 사용한다. 위스키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브랜드를 자사 메뉴에 그대로 노출시킨 것이다. 브랜드를 노출시키면, 그 메뉴는 순간적으로 ‘쿨’하고 ‘힙’한 메뉴로 둔갑된다. 고객의 클레임도 급격히 줄어든다. 사람들은 이전에 들어봤던 브랜드에서 갖게 된 신뢰를 자신이 시킨 메뉴에도 그대로 대입한다. 그리고 브랜드가 노출된 이유만으로 구매를 하게 된다
그들은 터무니 없이 비싼 메뉴를 일부러 만든다.
레스토랑은 일명 ‘미끼 아이템Anchor item’라고 불리는 비싼 음식을 일부러 만든다. 두번째로 비싼 음식을 주문하도록 유도하기 위함이다. 좀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1만원 짜리 스테이크와 2만원짜리 스테이크 중 어떤 것이 더 나은 선택일까? 또 2만원과 3만원짜리 스테이크를 생각해보자. 어떤가? 3만원짜리 스테이크가 더 나은 선택일까? 헷갈린다. 이럴때 엄청나게 비싼 6만원짜리 스테이크가 존재한다면, 3만원짜리 스테이크는 대부분의 고객에게 합리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속임수는 레스토랑에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제일 비싼 음식은 중간 가격의 메뉴 근처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별한 메뉴가 있음을 따로 구분해 알린다.
이런 작업은 보통 중간 가격대의 레스토랑에서 많이 한다. 메뉴를 보면 사진과 맛있어 보이도록 또는 특별한 메뉴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치장한다. 대표적인 예로 ‘셰프 스페셜’ 메뉴가 있다.메뉴 한 구석을 따로 떼어 셰프 특별 메뉴가 있음을 알려주고, 더 비싼 가격을 책정한다. 그러나 비싼 메뉴를 파는 곳에서는 잘하지 않는 방법이다. 뭔가를 더 비싸게 팔려는 억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레스토랑은 두 번째로 비싼 와인을 주력으로 판매한다.
대부분의 고객은 비록 자신에게 많은 돈은 없지만, ‘없어보이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인지 레스토랑에서 두 번째로 비싼 와인을 가장 많이 주문한다. 결국 레스토랑은 두번재 와인의 가격을 올리게 되고, 사람들은 더 비싼 가격의 ‘두 번째로 비싼’ 와인을 사게 된다. 그러나 이런 와인 선택은 결코 좋은 선택이 될 수 없다. 여전히 두 번째로 비싼 와인일 테지만.
레스토랑은 가격을 비교하기 어렵도록 메뉴를 구성한다.
대부분의 저가 레스토랑에서는 메뉴를 구성하는 일에 복잡한 과정이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메뉴 구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레스토랑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설명 오른쪽에 가격이 적혀있다. 이런 방식은 가격을 비교하기가 쉽다. 하지만 비싼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에서는 가격 보기가 그리 간편하지 않다. 가격의 폰트도 다르고, 위치도 메뉴마다 다르다. 한눈에 알아보기 힘들게 될수록 가격을 비교하기도 힘이 든다. 비싼 레스토랑에서는 보통 메뉴의 설명을 가운데로 줄맞춤을 하고, 가격은 모든 메뉴의 설명을 읽은 뒤에야 발견할 수 있도록 꾸민다. 메뉴를 차근차근 읽은 손님일수록 비싼 음식를 고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레스토랑은 불필요한 미사어구를 자주 사용한다.
메뉴에 적힌 글귀를 천천히 읽어 본적이 있는가? 아이스크림에는 항상 “달콤하고 부드러운”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버팔로 윙에는 “연한 살과 육즙이 가득한 또는 맛있고 강렬한 소스” 따위의 형용사가 존재한다.
레스토랑은 어떻게하면 고객이 통큰 결제를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한다. 당연히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할 것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는 극명하게 갈린다. 레스토랑은 당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의 아이스크림을 적나라하게 메뉴에 그려 놓을 것이고, 당신은 메뉴의 설명을 읽자마자 아이스크림이 얼마나 맛있을지 상상하게 될 것이다. 입에 침이 고이면 고일수록 고객의 지갑은 얇아질 테니까.
제일 비싼 메뉴 근처에 가장 마진이 많이 남는 메뉴를 보여준다.
위에서 ‘미끼’메뉴에 대해 설명했다.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싼 메뉴를 적어 놓고선 차안으로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는 메뉴를 근처에 적어 놓는다. 이런 눈속임은 의외로 쉽게 통한다. 고객들은 값비싼 메뉴에 놀라게 되고, 그 사이 훌륭한 대안이라고 속을 만한 음식을 재빨리 발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레스토랑은 가장 많은 이윤을 남기게 된다.
레스토랑은 쓸데없는 단어를 더 넣어 설명함으로써 이국적인 느낌을 받도록 한다.
레스토랑에서 메뉴에 거품을 끼게 하는 가장 흔한 방법 중의 하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비트 뿌리Beet Roots로 만든 어쩌고 저쩌고 스테이크~” 비트는 원래 뿌리채소다. 의미가 중복된 쓸모없는 단어지만, 사람들은 ‘이 레스토랑의 비트는 내가 지금까지 먹던 비트와 다를 것’이라고 착각한다. (비트는 비름과의 식물이며, 보통 음식점에서 먹는 아삭한 식감의 비트는 뿌리에 해당한다.)
레스토랑은 당신이 메뉴판의 어느 부분을 가장 먼저 보는지 알고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메뉴판의 오른쪽 상단부터 보는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왼쪽 하단은 가장 마지막에 살피는 구석이다. 그래서 레스토랑의 메뉴판에는 오른쪽 상단에 대부분 비싼 음식이, 왼쪽 하단에는 가장 싼 음식이 적혀있다. 게다가 싼 음식은 글씨도 작게 적는다. 그리고 어김없이 오른쪽 상단에는 ‘미끼 메뉴’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략’을 사용한다.
레스토랑은 고객이 원하는 메뉴(다른 말로 팔고 싶은 메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여러가지 노력을 한다. 가장 이윤을 많이 남기는 메뉴에 특별한 구분칸Boxes을 그리는 방식이 가장 흔하다. 이런 방법은 간단하지만, 강력한 효과가 있다.
절반 사이즈의 음식은 절대 절반 가격이 아니다.
이 방법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만약 레스토랑에서 일반 사이즈의 샐러드와 절반 크기의 샐러드를 고를 수 있다면, 아마도 절반 사이즈를 선택하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실 원래 한 개의 사이즈와 절반 사이즈의 양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합리적일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레스토랑은 이런 점에 착안해서 절반사이즈의 가격을 높게 책정한다. 결국 더 비싼 값을 내게 만드는 것이다. 더 합리적인 선택이 무엇인지는 고객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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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Note: 해당 콘텐츠는 해외 매체 Lifehack.com의 콘텐츠를 번역, 편집했음을 밝힙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미식가일 수 있다. 시어머니의 “국이 짜다”는 나무람부터 점심시간 된장찌개를 먹고 나오며 하는 “이 집은 생각보다 별로네”라는 이야기까지. 모두가 미식을 논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신이 인간을 먹어야만 살 수 있게 만들어 놓는 순간부터 이런 행동은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인류는 그래서 지금까지 미식을 욕망해왔다.
미식에 대한 관심은 근래 한국에서 급팽창했다. 맛집 앞에 줄을 서는 일은 물론이고 아직 정복하지 못한 음식을 보기 위해 그렇게도 뚫어져라 화면을 보는 일이 자연스럽다. 문득 18세기 사바랭의 “새로운 요리의 발견은 새로운 천체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는 문장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한국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맞춰 천재적인 요리사 3명이 한국을 방문해 맛의 혁명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했다. 그들 각자는 자신의 요리 철학과 앞으로의 프로젝트 등을 설명하고 한식의 성장에 관한 견해를 패널 토의를 통해 밝혔다.
지난 18~19일 양일간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제3회 글로벌 리더스 포럼2015’에는 맛의 혁명이라는 순서를 마련, 총 5명의 유명 미식 관련인이 초청돼 강연을 진행했다. 5명의 연사 중 3명의 셰프는 코리 리 Corey LEE, 상훈 드장브르Degeimbre, 알버트 아드리아Albert Adria다. 이들 모두는 세계적인 명성을 보유한 셰프들로서 각자 미국과 유럽에 자신의 레스토랑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각 레스토랑은 미슐랭 가이드에서 별 2개 이상을 받았다.
셰프 외의 연사로는 이탈리아 명품 커피 브랜드 일리커피Illy caffe의 부회장 프란체스코 일리Francesco Illy와 스텔라 디 캄팔토Stella Di Campalto 와이너리가 있다. 세션의 전체 진행은 유명 칼럼리스트 장 피에르 가브리엘Jean-Pierre Gabriel 씨가 맡았다.
| 셰프 3인의 키노트 스피치
이날 세션 5의 패널은 총 5명이었다. 이 중 셰프 3명의 키노트를 소개한다. 세계 최고 권위를 인정받는 레스토랑 평가서 미슐랭 가이드가 선정한 셰프가 맛은 온몸으로 느끼고 감각 속에 기억으로 간직된다는 것을 이야기 했다. 이어 그들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맛을 만들어 냈는지 비결을 공개했다.
코리 리Corey Lee – Benu(☆☆☆)
한국계로는 처음으로 미슐랭 가이드 3스타를 획득한 코리 리 셰프. 그는 2010년 자신의 레스토랑 베누Benu를 개점했고, 개점 4년만에 3스타를 받았다. 그는 대학을 나오지도, 정규 요리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지만, 끈질긴 노력으로 요리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베누를 열기 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셰프 중의 한명인 토마스 캘러와 함께 일했으며 프렌치 론더리The French Laundry, 퍼셰Per Se에서 수석 셰프로서 명성을 쌓았다.
오늘 키노트 스피치에서는 자신의 레스토랑 소개와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의 특징,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과의 협업 소식 등을 알렸다.
“샌프란시스코는 다양한 인종 특히 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차이나 타운 중 가장 큰 규모의 아시아인이 살고 있는 곳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스마트 폰을 통해 음식과 친해지고 소식을 쉽게 접하고 있다. 셰프도 더 많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다. 음식을 통해 즐기는 것은 쉽고 재미있다. 하지만 실제로 음식을 즐기고 레스토랑을 찾는 것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 음식 자체를 경험하는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음식은 보는 것보다 먹고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민자의 도시이자 거대 농업 지역인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는 지구상 가장 혁신적인 도시 중의 하나이다. 실리콘밸리에는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탄생하고 있다. 음식 관련 많은 앱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들어졌다”
“게다가 이 도시는 음식점의 밀도가 미국에서 가장 높은 도시다. 매일 다른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도시 전체 음식점을 다 다니려면 50년이 걸릴 정도다.”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기관이며, 예술을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전파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이번 협업은 세계 여러 도시에 있는 요리사의 음식을 전시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음식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계획 중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셰프에게도 연락하고 있다. 각 지역의 특징과 음식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할 계획이다.”
상훈 드장브르Sanghoon Degeimbre – L’Air du Temps(☆☆)
시간의 향기라는 뜻의 레스토랑 ‘레르 뒤 탕’의 한국계 셰프 상훈 드장브르. 그는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주방에서 정확한 데이터와 치밀한 계산의 의한 레시피를 선보인다. 1997년 처음 문을 연 레르 뒤 탕은 2000년 첫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았고, 2009년 별 두개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 별을 유지하고 있다.
다섯 살에 벨기에로 입양된 상훈 셰프는 18세에 독립, 대도시에서 소믈리에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벨기에 최고 소믈리에를 뽑는 경연대회에서 두 차례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후 독학으로 요리를 배우고 지금의 레스토랑을 열었다.
자신만의 요리 철학과 주변 동료 요리사들과 함께 일하면서 사람의 중요성 그리고 토지를 개간해 직접 농장을 꾸리며 알게 된 식재료의 중요성 등을 키노트 발표에서 확인했다. 또한 한식을 사랑하고 한식의 중요한 부분인 발효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밝혔다. 한식에 대한 관심 덕분에 그는 2010년 한식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잠재력이 있다. 창의력, 지식, 공유에 대한 것이다. (잠재된 능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내가 누구인지 분석을 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분석하는 과정을 가졌다. 나는 관심, 흥미, 경청, 흡수, 배움, 이해, 창의 이런 단어를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마음heart에서 시작하고 마음은 결국 모든 것들의 동력이 된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꿈이 많았다. 실제로 많은 일을 했다. 정육점에서 일하기도 했고, 약사로 일해보기도 했다. 요리를 하게 된 것은 내가 웨이터로 일하면서부터다. 셰프가 되고 싶었지만, 누구도 내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와인을 마시는 일은 미각을 훈련하기 위한 굉장히 좋은 수단이 됐다.”
“1997년 처음 레스토랑을 열던 순간이 내 인생 최고로 행복했던 시간이다. 당시 나는 전혀 (요리)경험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와인을 잘 알고 있어서 페어링하는 것을 기초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와인과 어울리는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18년간 요리를 해보니 요리는 의외로 간단했다. 요리에는 3가지가 중요한데, 첫번째가 테크닉. 두번째가 제품(재료)이다. 세번째가 감성인데, 감성은 사람이기 때문에 감성을 줄 수도 있고 받을 수 있다. 앞으로 요리의 트렌드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것이 사람이 될 것이다. 당신 스스로가 트렌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앨버트 아드리아Albert Adria – Ticket(☆☆)
앨버트 아드리아는 레스토랑 ‘티켓Ticket’의 셰프이자 세계 미식의 혁명을 이끈 페란 아드리아의 친동생이다. 1985년 15살의 아드리아는 당시 ‘엘 불리 el Bulli’의 셰프였던 친형 페란 아드리아의 영향으로 요리계에 입문했다. 엘 불리에서는 페이스트리 부분을 담당했고 엘불리를 떠난 뒤에는 엘불리의 쿡북 제작과 실험실 ‘엘 탈레’의 일원이었다.
2006년 아드리아는 ‘엘 탈레’와 ‘엘불리’를 떠나 친구와 함께 바르셀로나에 레스토랑을 오픈, 스페인 전통 음식을 만들었고 2011년 엘 불리의 폐업 후 페란과 지금의 타파스 바인 ‘티켓’을 오픈했다. 현재 이 타파스 바는 바르셀로나의 유명 식당이 됐다.
그는 오늘 스피치를 통해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어떤 생각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등을 알려줬다. 현재 그는 6개의 레스토랑을 동시에 운영하고 있으며, 한번에 여려 개의 음식점을 운영할 수 있는 비결도 말했다.
“엘 불리가 세계 정상에 올라있던 시기인 2011년 폐업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나중에 권위를 잃고나서 폐업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결정이었기 대문이다. 그리고 이후의 일을 결정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점을 정했다. 바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행복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누군가의 이목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인지도는 차후에 생각해도 된다.”
“6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할 수 있었던 이유는 10명의 자문위원이 각 레스토랑에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모든 비용은 내가 지불하고, 각각의 레스토랑은 자문서비스를 받으면 된다. 이렇게 한꺼번에 여럿 레스토랑을 운영하다보면 경쟁력을 활용해 시너지 효과도 창출할 수도 있다.”
| 패널토의
5명의 패널이 각자 스피치를 마친 뒤에는 강민구 셰프와 주식회사 샘표 소속의 최정윤 과장이 참여한 패널 토의가 진행됐다. 토의는 초청 패널에게 질문을 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사회는 장 피에르 가브리엘 칼럼리스트가 맡았다. TV조선은 패널 토의 영상을 제공하지 않는다.
Q 보통 레스토랑 운영하다가 성공하게 되면 안주하게 되는데,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 인상깊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음식과 와인 산업이 거대한데, 가족경영으로 사업을 진행하면서도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점이 인상 깊었다. 비결은 무엇인가? A프란치스코 일리 – 무엇보다 호기심을 갖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 ‘혁신은 전통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스텔라 디캄팔토– 제가 생각했을 때는 중요한 것은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코리 리 – 사실 창의력은 어려운 과정이고 외로움으로 오는 고통이 뒤따르는 작업입니다. 이런 과정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다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데, 다양성과 문화의 융합을 중요시 하는 나라인데, 그 부분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레스토랑에서도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분위기입니다.
Q 앨버트 아드리아 셰프가 봤을 때 한국 음식이 다른 나라와 다른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 다양한 음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고유한 음식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 이미지를 음식으로 대변하고 있다고도 본다. 그러나 한국만의 미식 정보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Q 한국 음식 문화가 다른 나라에서는 어느정도로 알려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A코리 리 – 미국에서는 5개 도시에 한국인이 몰려 있다. 로스앤젤레스, 워싱턴, 뉴욕, 샌프란시스코, 남쪽에도 많아지고 있다. 미국인들은 아직까지 한식을 잘 모른다.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그래서 뉴욕에 한인 음식점이 많기는 하지만, 한식을 모르는 사람은 의도하지 않은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결국에 한국 음식을 인정하고 좋아하는데에는 더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상훈 드장브르 – 벨기에는 한국인이 5000명 정도 밖에 없다. (한식은)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다. 독일에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다. 한국 식품기업과의 협업으로 유럽에 한국 제품을 많이 제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보다 먼저 한국 음식에 대한 교육을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부분이 빨리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장 피에르 – 페루에 갔을 때 놀랐던 점은 다른 음식 문화가 많이 들어와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한식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A강민구 – 여러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중인데, 이미 길게는 10년 짧게는 5년 전부터 한식의 변화가 시작됐다. 그래서 많은 젊은 요리사가 해외에 나가서 요리를 배우고 돌아왔다. 이전에는 요리사가 단순히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업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평생 업으로 삼고 지내는 젊은 요리사들이 많아지고 있다.
젊은 셰프가 배워온 경험과 한국적인 것을 감안해서 만들어낸 음식은 지금까지의 한식과 다른 맛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미식으로 앞서갔던 나라에서 있었던 과정이고 그런 절차를 우리도 밟고 있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정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가 누구고, 누리고 있는 식문화가 어떤 것인지’ 아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항상 모든 것은 전통에서 비롯되기에 그렇다. 하지만 그 전통도 단순히 오래되었기 때문에 또는 향수 때문에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비판적으로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강민구 – 동감한다. 이 일은 요리사뿐만 아니라 생산자, 그리고 특히 대한민국에만 있는 전통 식재료를 발견하는 분들의 발전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경험은 하나의 아침, 그것을 통해 미지의 세계는 밝아 온다. 경험을 쌓아 올린 사람은 점쟁이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당신이 오너라면 유명 레스토랑에서 허브 정리나 잔기술을 배운 사람보다 작은 곳이라도 재료를 다듬고 불을 다뤘던 일을 한 사람 중 누구를 채용하겠는가? 요리사는 경험이 곧 스펙이다. 오감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실제로 그 맛을 구현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초등학생 6만 3,862명을 대상으로 장래 희망을 조사한 결과 여학생은 3위, 남학생은 6위에 요리사를 꼽았다. 요리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요리유학을 가고 싶어 유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
호주는 요리 유학을 많이 오는 나라 중에 하나다. 유학원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요리학교에 들어가기만 하면 스타셰프가 된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쳐보면 괴리감은 상당하다.
이홍규 셰프는 호주에 온 예비 요리사들의 꿈을 설계해주는 요리사다. 일반적인 유학원에서는 대접받는 학생들이, 그를 만나면 혼이 나곤 한다. “도대체 왜 요리를 하려고 하세요? 요리사는 프로페셔널한 세계로 들어오면 너무나 힘든 직업이에요. 그래도 하겠다면 헛된 꿈은 버리고 오세요.” 실제 주방에서 일을 하지 않고선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다. 호주 주방에서 10년째 활동하고 있는 그와 동료들이 후배 요리사들을 위해 뭉친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은 호주로 요리 유학을 가는 요리사 지망생의 선배로써 의무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 유학 상담, 제 2의 삶을 살다.
직접 현장에 뛰어들어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이 배움이 빨리 느는 경우도 있다. 많은 요리사들은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해외 유명 레스토랑에서 스타지Stage를 통해 경험을 쌓고 있다.
불과 2년 전만해도 이홍규 셰프는 요리유학 컨설팅 그룹인 셰프 크루Chef Crew의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우연히 걸려온 전화 한 통화에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날이었어요. 밤에 술 한잔 하고 자려고 누웠는데, 어느 여학생이 울면서 전화가 온 거에요.” 여학생은 호주에 도착한 지 두 달이 넘도록 직업을 구하지 못했던 요리사 지망생이었다. 영어도 잘 하지 못했고 성격도 내성적이었던지라 직업을 구하지 못한 시간이 계속 길어지고 있었고, 블로그에 적힌 글을 보고 용기 내서 전화했다고,
이홍규 셰프는 여학생을 일주일 만에 취업시켜 준 후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제일 큰 규모의 유학원을 통해서 왔는데도, 사무적인 일만 계속 처리해주는 유학원에서는 실정에 맞는 지원을 제대로 못해주고 있구나.” 그리고 “이거 내가 하면 잘 할 수 있겠다!”
그의 유학원이 다른 유학원과 차별되는 점은 모두가 요리사 출신이라는 것이다. 비자를 신청해주고 유학 절차를 진행하는 건 어느 유학원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현직 요리사들은 학교 정보 같은 획일적이고 누구나 얻을 수 있는 정보가 아닌, 주방의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일반 유학원은 서류를 보내면 끝이에요. 하지만 저희는 학기가 시작되면 진짜 일이 시작돼요. ‘진로 계획’, ‘실무에 대한 조언’, ‘기타 개인적인 고민’도 들어줘요. 이 시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죠.” 요리 유학생들에게 건네는 말은 곧 이홍규 셰프가 과거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주방의 세계로 들어오다.
그의 요리 인생은 무지(無知)상태로 시작했다. 요리에 ‘요’자도 몰랐다. 심지어 외삼촌도 ‘너가 요리사가 되면 난 대통령이 되겠다’라고 할 정도였다. 지방 4년제 학교를 나와 미래를 고민하던 택한 길은 어학연수였다. 일반 유학원의 말만 믿고 세계 3대 요리학교인 르 꼬르동 블루에 입학했다.
그에게 있어 요리는 관심 밖이었다. 재능도 없었다. 실습 자체가 그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것들이었다. 요리학교의 이론수업은 영어로 진행하기 때문에 숙제나 발표에 대해 스트레스가 쌓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요리를 가장 못하고 가장 어렸어요. 첫 날에 손까지 베어서 3일동안 요리를 못할 정도였어요. 형들한테 꾸중도 많이 듣고, 그 때 당시 돈도 필요해서 새벽 청소 하고 오면 학교 생활을 잘 못했었죠”
졸업 후 2개월 동안 칼을 잡지 않았다. 다른 일을 하려고 찾아 다녔지만 영어라는 장벽에 가로 막혀 쉽지 않았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그는 제이미 올리버, 테쓰야, 고든 램지 같은 요리사가 되고 싶은 생각을 점점 키워갔다. 하지만 주위에는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야말로 맨 땅에 헤딩이었다. 그날부터 호주를 돌며 거의 모든 레스토랑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 중엔 이력서를 100번도 넣은 곳도 있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선정되는 세계 최고 레스토랑 리스트에는 빠지지 않고 상위권으로 등장하는 테쓰야Tetsuya 레스토랑이다.
경력이 없어 아무 곳에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던 그에게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체력이라도 길러야 되겠다는 생각에 매일 아침 조깅을 하던 날이었다. 활짝 열려 있는 테쓰야 레스토랑 철문은 그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잠시 둘러보고 나가려 했는데 그만 문이 닫혀버렸어요. 3시간을 꼼짝없이 갇혀 있다가 첫 출근하는 셰프한테 들켰죠.” 그의 간절함은 한참을 기다려 만난 헤드셰프에게 비로소 통했다. “헤드셰프는 3주동안 스타지 하면서 생각해보자고 했어요. 선배들에게 혼도 나고 3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몰라요. 헤드셰프는 조용히 사무실로 불러서 말했어요. Welcome to my team!” 그는 한국인 최초로 전쟁같이 치열한 테쓰야로 들어갔다.
테쓰야에서 일하는 남녀 종업원을 합치면 25명, 코스는 11개이거나 12개까지 나간다. 하루에 오는 손님은 약 380명이다. 이 모든 걸 요리사 25명이 하루에 준비한다. 아침 7시 반부터 시작해 새벽 1시까지 일을 한다. 중간에 쉬는 시간은 단 30분이다.
이홍규 셰프는 주방에서 나이도 많고 영어도 유창하지 않아 무시 당하기 일쑤였다. “남들에게 안 밀릴려고 그 때부터 요리공부, 영어공부를 제일 많이 했어요. 2년동안 일이 끝나도 매일 집에서 2시간씩 책을 쌓아 놓고 봤어요. 그날 공부한 거는 무조건 가서 아는 척했어요.”
| 레스토랑 ‘소통’에서 매력을 찾다.
“비결은 커뮤니케이션 능력이었어요.” 수많은 후배를 상담하고 호텔이나 레스토랑 담당자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이 주업무가 된 요즘, 그는 워낙 말을 좋아했던지라 천직을 찾은 것 같다고 말한다. 심지어 요리하는 것보다 훨씬 재미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주방에서 일할 때에도, 그는 누구보다 말하길 좋아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사람이었다.
호주 주방에는 특히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가진 요리사들이 있다. 그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선 모든 사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소통의 능력이 아주 중요하다. “요리에서 가장 중요한 거는 팀이 있어야 돼요. 20명의 셰프들이 있는데 말썽을 안 피울 수가 없어요. 그들의 문화를 알고 이해하는 것 가장 커요.안 되면 팀이 하나가 될 수 없어요.” 이홍규 셰프는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도 사람들과의 소통이었다고 말한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서 그는 요리 외에 전반적인 레스토랑 경영Management도 배워갔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좋은 재료를 구입하는 것부터 시작되기에 돈과 결부를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누가 어느 팀에 얼만큼 맞고 누가 어디서 일하면 어떻게 팀이 굴러가고 틈틈히 살펴야 되고 회계, 메뉴에도 신경써야 되기 때문에 헤드셰프와 플로워랑도 관계를 잘 이어가야 돼요”
요리사는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경력을 쌓기 때문에 인적 네트워크는 자연스럽게 넓어지게 된다. 세계적인 레스토랑에서 일하게 되면 얻는 것은 무엇일까? ‘퀄리티가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다’, ‘경력에 도움이 된다’, ‘돈을 많이 번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동료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가 생기고, 그들에게서 열정을 배우고, 그들로부터 전혀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동료 셰프들에게 자극을 많이 받았고 많이 배웠어요. 무엇보다도 너무 창피했어요 제 자신한테.”
| “꿈을 버려라. 차근차근 순서를 밟자.”
칼도 제대로 잡지 못했던 그가 2012년도 호주 영셰프대회에서 한국인 최초로 한식을 선보여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주 TOP3 안에 입상했다. 지금은 호주에서 유명한 한국인 셰프가 된 그가 이제는 후배 요리사들의 멘토가 되어 도움의 손길을 건넨다.
그는 후배 요리사들에게 세 가지 조언을 가장 많이 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호주 유학은 영어를 밑바탕에 두어야 한다. “영어는 학교를 들어가기 위해서 하는 공부보다, 현지에서 하는 영어를 더 중요시 여겨야 돼요. 현지에서 ‘문화’ 라는 영어를 체험하고 경험해야 요리유학이 값어치가 있어져요.” 호주에서는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기 때문에 직접 부딪칠 기회가 많다.
학비를 벌어서 학교를 다닐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학비가 비싼 학교에 다니면 학업과 일을병행하기엔 부담이 크다. “반드시 유명한 학교를 다녀야만 요리사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졸업한 뒤 좋은 곳에 취직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학교는 학교일 뿐이에요. 학교가 셰프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셰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죠.”라고 그는 말한다.
이홍규 셰프가 호주로 유학을 갔을 때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인기로 요리유학의 붐이 일었다. 지금도 스타 셰프 열풍이 불면서 많은 사람들이 셰프들에 대해 환상이 커지고 있다.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버릴까 걱정하는 그는 “꿈을 버려라.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그 순서에 맞추어서 꿈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것이 바탕이 되어야 해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계획을 세우기 보다, 할 수 있는 당장의 것들에 자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요리사의 활동 영역도 넓히고 있다. 그는 호주 한국인 조리사 협회 대표이기도 하다. 호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많은 선후배요리사들이 자신의 경험과 정보를 공유하며 예비 요리사들의 멘토 역할을 해주고 있다. 또한 이들은 요리라는 공통적인 묶이는 만큼 전통 한식에 새롭게 발전된 요리 기술을 적용하여 모던 코리안 퀴진 개발과 한식의 세계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업장 내 주방은 틀에 갇힌 공간이잖아요? 여기 있으면 일반 요리사들보다 더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예를 들면, 한국에 없는 소스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테스트해 볼 수 있다는 거?” 라며 지난 4월 중국 네슬레 북경 출장 중에 가져왔다며 곧 한국에 출시를 검토 중인 소스를 몇 개 꺼내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글로벌 식품기업에 근무하면서 기본적인 레시피가 여러 요리사들에 의해 다양하게 활용되는 사례를 보고 배울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13년도부터 네슬레 프로페셔널Nestle Professional(롯데 네슬레 코리아)의 사업부 셰프로 근무하고 있는 정지선 셰프를 만났다.
그녀는 중식계에선 몇 안 되는 현역 여성 요리사 중 한 명이다. 그녀도 이미 주방의 법칙에 익숙해졌다.
17일부터 SBS에서 <강호대결 – 중화대반점>이 방영되고 있다. 같은 팀으로 참여하는 최형진 셰프에게 그녀에 대해 물었다. “어유~ 독종이에요, 독종. 남한테 지는 걸 죽는 것보다 싫어해.”
요리를 계속하고 있는 사람이든, 요리가 힘들어 포기한 사람이든, 누구나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인 주방을 맞이하는 순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정지선 셰프도 “텔레비전에 보던 요리는 접시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첫 출근을 해보니 하루 종일 쉬는 시간 없이 서서 일해야 하는 막노동이라는 걸 알고 이틀 동안 무단결근을 한 경험이 있어요”라고 고백한다. 높은 노동 강도 때문에 주방에서 여성이 근무하기란 쉽지 않다는 이야기는 이미 보편적인 사실이다. 현업 요리사라면 누구든지 이런 현실을 받아들여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임이 분명해 보인다.
| 여성 요리사가 주방에서 살아남는 법
딸만 셋인 집안에서 둘째로 자랐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이 집을 비우는 시간이 길어 세 딸은 청소, 빨래, 요리를 분담해야 했다. 학교에서 국·영·수 교과서를 아무리 봐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단 레시피만은 예외였다. 한 번만 봐도 모든 것이 그려지면서 기억돼 그 길로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방에선 남녀 구분하지 않아요. 살아남으려면 실력은 물론 체력에서도 밀리면 안 되고, 눈치와 순발력도 있어야 해요”라고 말하는 정지선 셰프는 좋아하는 요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여자라는 이유로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남들보다 1년 늦게 조리과로 진학해 중식을 선택했는데, 그 당시 일식과 중식이 상대적으로 선호도가 낮았다고 한다. 한 주방에서 한 명의 스부(師父)만 모시며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정통 비법을 물려받는 도제식 수련이 일반화된 이곳에서도 정지선 셰프는 일반적이지 않은 길을 택했다. 중국요리의 깊이와 이해가 필요해, “더 공부하자. 유식해지자. 중국에 가서 배우고 와야 정통 중국 요리의 깊이와 뜻을 알 수 있겠다.”
대학교 졸업식 날, 학교에 가지 못하고 비행기에 몸을 실어 중국으로 가야 했다는 그녀는 쉴 새 없이 배우러 다녔다. “저는 학비가 아까워서 수업을 빡빡하게 다 신청해서 들었어요. 아침 여덟 시에 나가서 오후 다섯 시까지 수업을 다 채워 듣고 방과 후에는 조각 학원도 따로 다녔어요.” 미리 수업을 들어 놓아 4학년이 되었을 땐 지역 최대규모 연회시설인 영빈관에서 근무할 기회를 얻었다. 주방에만 80명이 근무하는 규모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딤섬 파트에서 만두만 빚다가 끝나는 6개월의 인턴 기간이지만 여러 부서를 경험할 수 있게 배려받았다. 양주대학교에서 흔치 않았던 외국인인데다 중국요리를 배우러 왔다는 열정을 현지인들은 높이 샀다.
방학 때면 한국에 돌아와 선배의 도움을 받아 단기적으로 일을 구할 수 있었고, 한국에 완전히 돌아와서도 주방 인원이 적은 곳, 배달전문점, 중식-양식 퓨전 요리를 도전하는 오픈팀 등,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 일했다.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쌓고, 남자들과의 경쟁에서 지지 않고 살아남겠다는 각오가 지나쳐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다. 또 동료와의 다툼으로 번진 적도 많았다. “선배들은 저를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쉬게 내버려 둔 건데, 저는 ‘왜 나를 따돌리냐’며 대들고 싸우기도 했어요. 조금 재수 없었겠죠?(웃음)”
| 공유의 매개체가 된 그녀
중식에도 여자셰프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일부러 모임이란 모임은 다 따라 나섰다. 그 결과 인력사무소를 차려도 좋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인맥의 중심이 되기도 했다. “급하게 일손이 필요하거나, 사람을 구할 일이 있으면 저한테 먼저 연락이 와요. 저는 그걸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죠.” 한 곳에서 오래 일하는 것이 모범적인 사회생활이며 정통된 가르침인 업계에서도 그녀의 다양한 경험과 인맥이 필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 소개에만 그치진 않는다. 중국 유학생활과 다양한 업장의 경험을 가진 그녀에겐 선후배 가리지 않고 레시피를 가르쳐달라는 요청도 끊이지 않는다. 레시피를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자신의 자산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정지선 셰프는 “이걸 사람들에게 풀어야 다시 저에게 더 큰 재산으로 돌아오거든요, 누군가가 써줘야 이런 자료들도 빛을 보지, 내 거라고 가지고 있으면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죠.”라고 덧붙인다.
다양한 경험을 한 것이 네슬레 프로페셔널의 자문 셰프로 일하기에 더없이 좋은 경험이 되었다고 말한다. “한국에서는 네슬레가 네스카페라는 커피 브랜드로 많이 알려져있거든요. 푸드 솔루션도 있다는 활동을 하는 거잖아요? 저는 이미 이런 것들을 중국에서 접했고, 학생 때부터 써왔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이 역할을 맡으면 잘 표현할 수 있겠단 생각을 했어요.”
| 중국 정통 요리와 한국식 중국 요리에 대해
광활한 중국의 영토에서는 지방마다 기후, 풍토, 산물이 다양했고 지난 4,000년간 그 조리법들이 다양하게 발전했다. 중국인은 네 다리가 달린 것이라면 책상 빼고 다 먹는다는 그들의 식성을 빗대는 속담이 있을 정도다.
식문화가 다양해지고 있는 만큼 한국의 중식당에서도 사용하는 제품군이 다양해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공부를 안 하면 거지가 된다고 믿거든요?(웃음) 그만큼 학구열이 어마어마해요. 경쟁도 뛰어나고 공부양도 많은 만큼 제품도 다양한 것 같아요. 국내에 판매되고 있는 시즈닝 소스도 중국에서는 동네 슈퍼에서만 10가지 이상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예전 한국중식당의 우육탕면도 그냥 간장을 그을러서 불의 맛과 향을 낸 후에 육수만 넣어서 끝내는 분들도 많았거든요. 시중에 나와있는 제품이 많지 않으니까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죠. 요즘은 중국의 다양한 제품이나 조리법이 들어오면서 중국본토의 맛에 가깝게 발전되어가고 있어요.”
| 글로벌 회사 네슬레 프로페셔널 한국 담당 셰프로서
“이전의 국내 중국요리의 맛의 대부분이 굴소스가 중심이 되어있었다면, 지금은 식문화가 많이 바뀌면서 소스가 다양하게 개발되고 있어요. 해외에서 소스류가 수입되면서 다양한 맛을 찾는 소비자를 위해 음식도 다양해지고 있죠.”
예전엔 대부분의 중식요리에 기본으로 쓰이던 육수를 우려내는 것조차도 쉽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닭 육수를 하루 종일 끓이는 데 정성을 쏟는데, 네슬레 프로페셔널에서는 고급요리에 필요한 감칠맛, 풍미를 가지고 있는 스톡 제품도 있어서 일손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장맛이 다른 것처럼, 더 많은 제품을 사용할 수 있어야 메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새로운 맛과 메뉴를 만들어내기 위해 새로운 재료를 찾는 게 중요한 만큼 소스도 많이 공부해야 해요. 최근엔 제품에 대한 편견도 많이 사라지고 있어요. 토마토소스도 이탈리아 요리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중식에도 많이 쓰이고 있거든요.”
이어 정지선 셰프는 매기 시즈닝MAGGI Seasoning 제품을 예로 들며 쉽고 다양한 사용법을 설명한다.
“매기 시즈닝 소스는 만들어진 지 100년이 넘었는데, 기본적으로 웍소스로 사용되고요, 설탕을 넣어서 한식 불고기 소스, 식초를 넣어서 향이 풍부한 딥핑 소스로도 사용할 수 있어요.” 레시피는 절대적인 비술이 아니라는 그녀의 주장이 쉽게 이해되는 순간이다.
좋은 제품을 선별해내는 것도 요리사에겐 꼭 필요한 능력이다. 요리사의 일손을 덜어준다는 제품을 사용하더라도 결국 요리는 요리사의 머릿속에서 나온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제품이 나올 수록, 단순히 반복해야 하는 일이나 고된 육체 노동에 쓰이던 에너지가 더욱 창의적인 요리를 하는 데 쓸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의 중식 식문화 발전을 위해 앞으로 더욱 많은 제품을 통한 레시피가 개발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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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슬레 프로페셔널은 소비자 만족을 위해 늘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식음료 솔루션을 연구하는 식음료 파트너로서 레스토랑, 카페, 베이커리, 패스트푸드, 레스토랑, 바, 호텔, 연회를 비롯하여 테마파크, 대학교, 항공사 및 오피스 등과 같은 다양한 채널에 최상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역사를 알면 미래가 보인다.’ 라는 말이 있다. 학자는 과거를 들여다보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 미래를 내다본다. 김태윤 셰프가 그렇다. 사학을 전공한 그는 요리사의 길을 걷기 전에 ‘맛’ 탐구의 길을 떠났다. 맨몸으로 실크로드를 거쳐 동남아시아,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지중해를 돌아 유럽까지 여행했다.
그의 발길을 머물게 한 지중해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둘러싸인 바다로 고대로부터 에게 문명과 그리스, 로마 문명의 발상지다. 유구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한 문화권들과 수많은 나라가 생성되고 소멸하여 갔던 곳이고, 현재에도 수많은 나라의 물자가 오고 가는 세계적인 무역지대다.
| 한국 제철재료에 지중해 조리법을 녹여내다
그의 여행 일정에는 반드시 시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장 입구부터 풍겨온 강렬한 향신료의 내음, 진귀한 요리가 그를 사로잡았다. 지중해 요리는 남유럽과 레반트(근동)지역, 북아프리카를 아우르는 광범위의 지중해 연안 지역의 음식을 뜻한다. 대표적으로 그리스, 레바논, 모로코에서는 올리브유, 발효 식품, 신선한 채소를 주재료로 삼아 요리한다. 스페인, 이탈리아 요리에는 허브와 마늘 등이 어우러진 요리가 특징이다.
“그동안 제가 배웠던 것들과 전혀 달랐어요. 지중해 요리는 음식에 대한 접근법이 다른 거죠. 그게 굉장히 매력적이었고 우리나라 음식과 닮아 있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풍부한 일조량과 연중 따뜻한 기후를 가진 지중해에서는 재료 본연의 맛을 지키는 것이 최고의 기술이다. 김태윤 셰프는 지중해에서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요리의 정체성을 찾았다. 그는 한국에 돌아와 재료의 큰 변화를 주지 않는 지중해 조리법을 한국 제철 재료에 녹여내는 ‘현지화’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먹물 라바쉬 위에 올린 영광 굴비 브란다드 브란다드는 염장한 대구를 이용해서 감자와 생크림을 섞어 으깬 프랑스 전통 음식이다. 한국에서는 염장한 대구를 구할 수 없어 굴비로 대체했다. 이란에서 먹는 무발효 빵인 라바쉬는 먹물을 넣어 만들었다.
울릉도 전호나물과 모레스카 올리브오일로 맛을 낸 통영 비단가리비 와인찜 통영에서 나는 비단 가리비와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전호나물을 이용한 요리다. 두 가지 재료를 최상급의 올리브 오일과 화이트 와인만 넣고 찐다.
판나코타 스타일의 쪽파 비쉬소와즈와 강릉 성게알 비쉬소와즈는 리크leak로 만드는 차가운 스프지만 쪽파로 대체했다. 이탈리아의 판나코타 스타일로 만들어 성게알을 올렸다.
까넬리니빈 샐러드를 곁들인 낙지 그릴구이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낙지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토종콩을 사용해 화려한 색감과 맛을 구현한 요리다.
| 전통주와 국내산 치즈의 재발견
김태윤 셰프는 요리뿐만 아니라 전통주 페어링에도 영역을 넓혔다. 한국 술에는 인공감미료 aspartame가 들어가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술이 많다. 그는 음식의 맛보다 더 강한 맛을 내는 단술을 제외한 전통주를 연결하기로 했다. 전통주 페어링은 정보가 거의 없어 맞는 짝을 찾기 어렵다. 작업은 오래 걸리지만 지름길은 없다. 그의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주 지역적인 유럽 음식을 먹었을 때 전통주가 너무 잘 어울리면 손님들도 깜짝 놀라거든요. 그런 의외성을 주는 게 좋아요. 식사에 재미를 더 주잖아요. 페어링이라는 작업에서 한계나 규정은 없다고 봐요” 많은 사람에게 다이닝의 새로운 경험을 주고 싶은 그는 국내산 치즈를 발굴하는 작업도 손을 댔다. 한국에는 깊은 맛이 나는 생유로 만든 수입 치즈가 들어올 수 없다. 유통에 대해 고민을 한 김태윤 셰프는 국내산 치즈의 맛을 재발굴했다. 현재 국내산 치즈를 이용한 레시피를 연구 중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사람들이 최고의 시설에서 수입재료를 가지고 이탈리아 피자를 만들어도 나폴리에서 먹는 맛이 절대 안 나와요” 김태윤 셰프가 자신의 요리를 줄곧 ‘현지화’라고 말하는 이유다. 어느 요리사나 마찬가지로 맛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도 역시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이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먹으면 지중해 요리를 제일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이다. 하나의 재료를 두고 지중해의 다양한 조리법을 시도한다. 그 중에 한두 개가 맞을 수도 있고 재료의 특징이 너무 강할 경우엔 하나도 맞지 않을 때도 있다.
“좀 지루하면서도 도전적이기도 하지만 어울리는 맛을 찾았을 때 희열이 되게 커요. 좋은 거는 저만 찾을 수 있는 거잖아요. 제가 찾는 게 1번이에요.” 그는 유일무이한 이 작업을 즐기고 있다. 경우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요리사로서 기쁨은 배가 되어 돌아간다고.
| “맛으로 기억되는 요리사가 되고 싶다”
김태윤 셰프가 운영하는 7PM 레스토랑은 서촌에 자리 잡은 지 4년이 됐다. 7PM의 메뉴는 지금까지 8번 바뀌었다. 재료가 철이 지나면서 6개월에 한 번, 1년에 두 번씩 메뉴가 크게 바뀐다. 주방 안에서는 메뉴로 팔기 전까진 테스트가 계속된다. 외국 음식을 어려워하는 손님들에게 최대한 쉽게 풀어내기 위해서다.
“내가 즐겁지 못하고 너무 많은 고민이 들어가 있는 요리는 이제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힘주지 않고 만들어야 음식을 먹는 사람들도 편하거든요. 음식이 고급 기술에 묻히기보다는 맛으로 기억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김태윤 셰프는 본토에 가까운 레시피를 있는 그대로 선보이고자 한다. 그가 이토록 맛에 대해 집착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그가 일본 동경 핫토리 영양전문학교와 두바이 버즈 알 아랍 호텔에서 배웠던 요리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비교적 손이 많이 가는 요리들이었다.
그는 뼈와 살이 되는 요리 경험을 한 동시에 본질적인 맛에 대한 괴리감을 느꼈다. 겉만 화려한 음식은 요리사에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중해의 레스토랑에서 만드는 음식과 가정에서 만드는 음식의 경계가 명료하지 않다. 그만큼 장소에 구분 없이 편안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손님들은 7PM의 음식을 유럽식 가정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7PM과 멀지 않은 곳에 가게를 확장한다. 9월 말에 오픈할 예정인 ‘주반(酒飯)’은 이름 그대로 밥과 술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김태윤 셰프가 여행을 다니면서 미각의 폭을 넓혔던 스파이스 푸드를 선보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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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사가 없어도 주방이 스스로 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얼마나 편할까? 먹고 싶은 음식을 요청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만들어 내는 주방 말이야. 오늘 저녁엔 멕시칸 타코를 먹고, 내일 아침엔 이탈리안 브런치를, 저녁엔 인도 스타일 카레를 먹을 수 있다면 좋겠어.
누구나 해봄 직한 상상이다. 우리가 어려서 읽은 과학 만화에도 자주 등장했던 소재로, 미래를 배경으로 상상한 이야기가 있다면 자동화된 스마트 주방은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어설프게 그려져 있던 미래의 주방을 실제로 만들어내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지난 5월,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가전 전시회 CES에서 가장 주목받은 제품 중 하나인 몰리 로보틱스Moley Robotics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충족활동이나 지루한 작업을 로봇이 대신 처리해줌으로 인간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주방의 자동화나 업무 효율 향상에 대한 시도는 인류 역사와 함께 꾸준히 이뤄져 왔다. 현대의 주방은 탈피기, 블렌더, 식기세척기 등과 같이 갖은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선 음식을 만들어낼 수 없을 정도로 기기 의존도가 높다. 무엇 하나 고장이라도 난다면 그 날 주방은 마비되고 만다. 뭐, 이미 초밥도 컨베이어벨트가 대신 나르는 시대가 아닌가.
자동화에 능한 로봇이 새로 개발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인간의 일자리 대체 문제’도 함께 나온다. 컴퓨터기술과 로봇기술이 발달해 2030년이면 지구 상에서 20억 개의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한다. 단순 반복 작업이라면 더욱 대체되기 쉬워 요리사도 단골로 등장한다.
몰리 로보틱스의 설립자 마크 올리니크Mark Oleynik, 영국의 컴퓨터 과학자이자 로봇전문가인 그가 한국에 들렀다는 소식에 찾아 나섰다. 그는 지난 11일, 상암동 누리꿈 스퀘어에서 개최된 미래창조과학부의 주최 ‘K-ICT VR Festival 2015’에 초청되었다.
청중은 몰리의 작동원리나 기술만큼,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는 것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다. 마크 올리니크는 인간이 지루하고 단순한 반복 업무에서 벗어나야 삶의 질이 더 높아질 수 있다며, 인간의 영역을 대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활동 가능성을 더 넓힐 수 있도록 몰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Q. 몰리는 어떤 요리를 할 수 있나? 인간의 팔 동작을 흉내 내는 것으로 몰리는 모든 종류의 음식을 재현해낼 수 있다. 세상에는 120종류의 음식문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이를 전파하려면 요리사가 다른 요리사에게 조리법을 가르쳐주고 교육과 연습을 시켜야 한다. 몇 년이 걸릴 일이지만 로봇은 이를 복제하는 데 제한사항이 적다. 같은 재료만 제공된다면 어떤 나라의 음식도 세계 전역에서 복제해낼 수 있다.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에서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곳의 메뉴는 일 년에 두어 번 바뀔 뿐이다. 몰리는 제한 없이 메뉴를 바꿀 수 있다.
Q. 몰리는 어떻게 작동하나? 영국의 마스터셰프 우승자인 팀 앤더슨Tim Anderson의 동작을 보고 학습하고 있다. 앤더슨은 카메라 앞에서 같은 요리를 20회 이상 반복했고, 그 과정의 손동작을 센서로 기억해 재현하는 방식이다. 로봇팔에 장착된 20개의 모터, 24개의 관절, 129개의 센서가 정확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요리 장면을 재편집, 이를 디지털 알고리즘으로 변환한다.
Q. 요리사의 영역을 대체하는 것인가? 두 종류의 고기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고기가 더 좋은 고기인가?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 이건 절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니다. 가치 판단이 다를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선 로봇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기계 자체가 똑똑해지기란 어렵다. 여전히 셰프의 영역은 남아 있다.
Q. 왜 휴머노이드인가? 왜 인간의 팔을 흉내 내는가? 로봇이 인간의 모든 시중을 들고 있다면? 로봇이 피아노를 치고 있다면? 로봇이 이런 일을 대신 일을 해준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해지진 않는다. 하지만 베토벤의 연주를 똑같이 재현해내는 로봇이 있다면? 피카소의 붓터치를 한 획 한 획 재현하는 로봇이 있다면? 이런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모두 감성적인 영역이다. 우리는 그저 복제품만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작업 과정이 통째로 들어가 있는 과정도 받을 수 있다. 요리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손동작을 그대로 기억해야 요리하는 당시에 셰프의 영감과 감정상태를 그대로 기억할 수 있다.
Q. 아무래도 인간의 행동을 기억해야 범용성이 넓어지겠다. 주방을 작은 공장에 비유해보자. 이미 자동화 기계는 많이 나와 있다. 초밥을 만드는 기계라거나, 국수 면발을 뽑아내는 기계라거나, 라면을 끓여내고 피자를 구워내는 기계는 많이 있다. 하지만 그 기계들은 한 가지 요리밖에 만들어내지 못한다. 1,000가지의 요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주방에 1,000대의 기계를 설치해야 할 것이다. 자동화 기술이라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복잡한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가장 단순하게 일하는 것이다. 기존의 자동화기기들이 맛의 표준화를 이뤄낸 반면, 몰리는 고급 음식의 대중화를 이룰 수 있다.
Q. 로봇만이 할 수 있는 장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안전함과 편의를 추구한다. 로봇이 요리하면 어린아이가 주방에서 펄펄 끓는 냄비를 쏟을 가능성을 줄여준다. 보호 유리창으로 조리공간이 모두 막혀 통제되기 때문에 안전하게 조리할 수 있다. 같은 수준의 음식을 효율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따라서 에너지도 절감시킬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조리과정을 최대한 간소화시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들어가는 에너지의 총량은 줄어든다.
Q. 10명밖에 안되는 회사라 들었는데, 어떻게 그 많은 기술을 다 만들어 냈나? 많은 파트너와 함께 일하기 때문에 빠른 시간에 개발할 수 있다. 식기세척기, 인덕션 등 모든 기기는 기존의 제작사와 협력해서 그들의 기술을 넣고 있다. 로봇팔 또한 18년간 로봇을 개발해온 전문업체 섀도우 로봇 컴퍼니Shadow Robot Company에 의뢰해 제작했다. 우린 로봇 자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로봇이 쓰일 가능성을 찾고 있다.
아직 한계점도 많이 남아 있다. 로봇은 녹화 당시의 요리사 동작을 흉내 내기에 재료가 제자리를 벗어난다면 조리과정에 문제가 생긴다. 식재료의 신선함을 검사하는 것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몰리 로보틱스는 2018년도까지 시제품을 출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세계 각국의 레시피를 입력해 놓으면, 사람들은 스마트폰에 앱을 다운받듯이 레시피를 설치할 수 있다. 레시피는 한 번 입력해 놓으면 그 이후로는 무제한 공유가 가능하니 전 세계와 주고 받을 수 있는 디지털 레시피 창고가 만들어진다.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있다. 다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
몰리 로보틱스라는 미래 주방이 널리 사용되는 게 5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는 아직 모른다. 요리사 대신 몰리가 주방에서 일을 하는 레스토랑이 생기거나, 신혼부부들이 혼수품으로 하나씩 장만하는 유행을 불 수도 있지 않을까?
셰프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유명한 학교의 졸업장? 유명 레스토랑에서 근무한 10년 정도의 경력? 손에 남겨진 수많은 흉터? 누구나 인정할 만큼의 고단했던 수련 과정? 무엇이 셰프를 셰프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들까? 누구나 공감할만한 기준이 있기나 할까?
지금 미국 뉴욕의 한 식당은 개업을 며칠 앞두고 셰프의 자질을 거론하는 문제가 커지고 있다. 전국적인 논란의 주인공은 고작 16살.
“어머님은 요리에 흥미가 없었어요. 요리를 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러려고 노력하지도 않으셨죠. 어느 날 푸드 네트워크 채널에 나오는 방송을 보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할 수 있겠더라고요.”
11살 때부터 요리 영재로 주목받은 플린 맥개리Flynn McGarry. 그는 뉴욕 타임즈에서 차세대 다이닝 시장을 이끌 셰프로 잡지의 전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요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싶었던 아이는 서점에 들러 가장 두꺼운 요리책을 집어 들었다. 첫 요리책이 토마스 켈러의 <더 프렌치 런더리>였다. 그 요리를 하나둘씩 흉내 내기 시작했다.
요리에 두각을 나타내는 영재를 발견한 부모님은 아들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열 한 번째 생일에는 인덕션을 선물 받았고, 크리스마스에는 진공포장기를 선물 받았다. 플린도 자신이 아끼던 기타를 팔아 수비드 머신을 장만했다. 조리공간이 협소하자 침실을 개조해 주방으로 사용했다. 전기 공사도 새로 했고 고급 그릴을 집안에 들였다. 거실에 테이블을 놓기에 좁아 벽을 허물고 옷장을 뜯어냈다. 몇 개의 코스요리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을 때, 11살의 나이에 18코스의 메뉴를 선보이는 팝업 레스토랑을 열어 비평가의 호평을 받기도 했다.
“저는 언제나 창의적이고 싶었고, 저만의 요리를 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죠.” 가족을 위해 하던 요리가 점점 발전하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선보였다. 학교는 뒷전이었다. 인터넷 강의로 대체해 수료한 후, 얼리니아Alinea, 일레븐 메이슨 파크Eleven Maidson Park, 알마Alma를 거쳐 현업 경력도 쌓았다. 집에서 열리던 팝업 레스토랑은 베버리 힐즈Beverly Hills에 있는 비어비슬Bier Beisl로 옮겨 40명의 손님을 대상으로 12코스를 160불에 파는 큰 이벤트로 바뀌었다.
그는 전국 규모의 팝업 레스토랑 프로젝트 유레카Eureka를 기획했다. 8~10개의 테이스팅 메뉴를 맛볼 수 있는 유레카는 이미 로스엔젤레스LA와 샌프란시스코SF에서 이벤트를 치렀다. 오는 12일에는 뉴욕 웨스트 빌리지West Village지역에서 개점될 예정이다. 미식의 도시 뉴욕에서는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다. 뉴욕의 유레카는 일주일에 3일 오픈하며, 올 연말까지 계속할 예정이다.
일각에서는 이 유레카 뉴욕지점의 개점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팝업까지는 그러려니 했건만 16살짜리가 오너셰프로 활동하는 꼴은 도저히 못 봐주겠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비판은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적고, 여러모로 셰프의 모자를 쓰기엔 아직 고생을 덜 했다.’로 축약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논란을 불러 일으킨 건 셰프 데이비드 산토스David Santos다. 그는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플린의 음식은 160불을 받을 가치가 없다며 “플린이 오너 셰프로 불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수많은 셰프를 모욕하는 일이 된다.”라고 언급했다. 글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정말 미안하지만 플린이 오너셰프가 된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라 믿어. 오늘은 아침엔 변소에 다녀왔는데 그 16살짜리 꼬마가 알고 있는 것보다 많은 양을 배설하고 왔어. 미디어도 플린을 셰프라고 띄워주는 데 나는 문제가 많다고 생각해. 셰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얻을 수 있는 훈장이야. 훌륭한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못 볼 꼴, 험한 꼴을 다 경험해야 하지. 부모가 깔아준 길을 잘 가는 방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진정한 셰프라면 바닥에서부터 피땀 흘려 요리사가 된 사람과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당신을 똑같이 대할 수는 없어. 이런 식으로 160불의 음식값을 받는다? 난 그보다 값진 음식을 만들어내는 진짜 셰프의 이름을 수도 없이 댈 수 있어. 언젠가 당신도 훌륭한 셰프가 될 수 있겠지.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냐. 하지만 진짜 셰프의 반대편에 서려면 그에 상응할 수 있는 경험을 쌓아야지. 일주일에 3일만 장사하면서 테이스팅 메뉴 몇 개 만들어내는 건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을 거야. 그것마저 못한다면 완전 쓸모없는 녀석이겠지. 창의적인 요리를 하고 영감 받는 척하기 전에 주방의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을 대하고 관리할 줄 알아야 해. 혼란 속에서 요리를 실수 없이 내보낼 수 있어야 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의 지식을 활용해 시너지를 낼 줄도 알아야 해. 이게 바로 셰프가 하는 일이야. 그럴싸해 보이는 음식 플레이팅만 하는 게 아니라고.
이에 플린은 “누구나 전면에 나서는 사람은 욕을 먹게 되어 있다.”라며 덤덤히 대응하고 있다. 미국 뉴욕의 미식전문지인 그럽 스트리트Grub Street는 플린과 인터뷰를 나눴고, 플린은 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수많은 의심과 비판에 대해 답변했다. 주요한 답변 여섯 개를 추렸다.
Q 오너셰프를 왜 이렇게 일찍 시작하려고 하나? “왜 더 기다려야 하나?”라는 질문이 있으면 “왜 지금 하면 안 되나?”라는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저도 10년 더 기다렸다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그렇게 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요리사가 되는 길을 간다고 해서 셰프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뛰어들어야죠. 어떤 일이든 마찬가지 아닌가요? 네, 물론 저도 지금 이 시도가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아요. 그건 좋은 점이죠. 언젠가 저는 제 레스토랑을 가지게 된다면 지금의 이 시도가 경험으로 쌓여 있을 테고, 그 때에는 이미 실패하지 않는 한 가지 방법을 배운 상태겠죠. 지금 시도하는 것을 미래의 관점에서 본다면 연습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으로 서류 작업을 해보고 있고, 식재료 비용 관리에 대해서도 배우고 있어요. 커리어를 쌓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죠. 그나저나 왜 일반적인 방법만으로 해야 하는 거죠?
Q 수많은 네티즌의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와서 드세요! 100가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기사만 읽고 있지 말고요. 저는 요리를 사랑합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이건 정말 단순한 거에요. 저는 매일 밤 24명을 위해서 요리할거에요. 누군가는 와서 드실 수 있고, 어떤 바보는 그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네요.
Q 160불이라는 다소 비싼 음식 가격에 대해 네, 여전히 비싼 가격입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선보일 메뉴의 식재료 값에는… 캐비어와 푸아그라가 포함되어 있죠. 그 외에도 고급 식재료가 많이 있어요. 오늘 아침엔 청과물시장에 가서 사과를 샀는데 1파운드에 5불을 달라고 하더라고요. 좋은 음식은 싸게 살 수 없어요. 저는 쓰레기 재료로 70불짜리 음식을 만들 바에는 최고급 식재료로 160불짜리 음식을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식사는 14코스로 이뤄져 있어요.
Q 데이비드 산토스의 의견에 대해 저는 저 스스로를 셰프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셰프로 불리면 안 될 이유도 없잖아요? 데이비드의 초점은 이거죠. 사람들은 정말 고단하게 일하면서 형편없는 삶을 살고 있어요. 맞아요, 인정합니다. 그런데 왜 그 고단한 삶이 요리사 인생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요리사가 되려면 누구나 끔찍한 삶을 살아야 하고, 가족과의 약속은 모두 포기해야 하고, 10년이 넘도록 가축만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건가요? 왜 그게 셰프가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는 거죠? 그걸 인정하는 건 그저 인생의 쓴맛만 더 느낄 뿐입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악의는 하나도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이 그와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대중들에게 물어보세요. 나를 왜 셰프라고 불러야 하는지, 달리 방법이 있나요?
Q비판과 비난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쉽지 않았을텐데 때로는 불안했고 심란하기도 했습니다. 요리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만으로 저를 존중하지 않았죠. 그리고 제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오해도 많았습니다. 완전히 사실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어린 시절을 좀 보낼 필요가 있어.”라고요. 왜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어린 시절을 보내야 하죠? 저는 이미 저만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르네 레드제피Rene Redzepi도 처음엔 코펜하겐의 모든 사람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몇 년 걸렸죠. 다행히도 터널의 끝에 다다르면 빛이 보인다고 합니다. 데이비드는 저에게 호통을 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는 훗날 같은 길을 가고 있을 거라는 점이에요. 둘 다 요리를 하고 있겠죠.
Q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이야기에 대해 저는 12살 때부터 레스토랑에서 일했어요. 거의 5년이 되었네요. 말인즉슨, 제가 그저 아이디어만 가지고 이 일에 뛰어든 게 아니란 것입니다. 저는 요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시작했고, 여전히 요리를 사랑하니까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왜 사람들이 화를 내는지는 압니다. 모든 이야기는 저희 부모님이 돈이 많았다는 전제하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저희 부모님은 부자가 아니에요. 저희 부모님은 예술가인데, 그저 앞 뒤 가리지 않고 저를 지원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