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전, 원시 인류에게 식사라는 행위는 생명을 연명하기 위한 영양소 섭취에 지나지 않았다. 근대 인류에게는 하루 세 끼의 식사가 정기적으로 이뤄지면서 의식이자 생활로 자리잡았다. 이를 넘어서서 식사는 자기만족을 위한 사치이자 문화적인 활동으로, 예술의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요리가 예술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음식은 그저 먹고 맛만 있으면 된다는 주의가 한국에선 더욱 다수의 지지를 얻을 것이다. 다른 예술 작품도 많은데 왜 음식으로까지 예술을 해야 하냐며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의견이 옳고 그른지를 따지고 드는 것은 아니다. 이찬오 셰프의 요리를 보면 그런 생각이 한 풀 꺽일 것을 알기에 그저 그의 화려한 음식을 보여드리고자 한다.
이런 작품들이 정기적으로 올라오는 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훑어 내리고 있자면 마치 미술관에 온 느낌이 든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요리-예술작품에 댓글로 자신의 감상평을 올려 공유한다.
수려한 외모에 화려한 경력, 비쥬얼 좋은 그의 요리들, 대중 매체를 통해 그는 화려하게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포장되어야 할 사람보다는 오히려 포장지를 벗겨버려야 할 사람이다. 그 화려함 뒤에 영글어 있는 고독한 영혼, 무쇠의 뿔처럼 강인했던 사나이의 인내, 세상 풍파를 다 헤치며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간 백전노장(百戰老將) 이찬오 셰프를 소개하고자 한다.
| 시각적인 충격이 그를 요리로 이끌다.
이찬오 셰프를 요리사나 예술가로 소개하고 싶지만 누구나 그를 처음 만나면 운동선수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떡 벌어진 어깨에 넓은 이마, 큰 입과 호탕한 웃음. 테스토스테론 충만해 보이는 이 남자는 수영을 하던 운동선수였고 18살에 호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진 요리와는 전혀 친분도 없던 사람이었다. 집안에 손을 벌리기가 싫어 생활비를 벌겠다며 접시를 닦기 시작한 게 식당과 맺은 첫 인연이었다. 몇 년을 주방 일손으로 보냈으나 요리를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집세를 못 내서 쫓겨났던 적이 있어요. 헤드 셰프의 집에서 일주일 정도 얹혀 살았거든요. 집안에 요리책이 많길래 한 권 꺼내 들었는데, 아! 충격이 어마어마한거에요. 찰리 트로터(Charlie Trotter)의 책이었어요. 그 시각적인 경험은 평생에서 가장 충격적이었어요. 요리가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구나!”
그 때 나이 21살, 책 한 권을 펼침으로 인생의 출발점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다음 날 출근길에 공원에 들려 휴대폰을 멀리 집어 던졌다. 자신의 결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피곤하게 속박하는 사람이었다.
“전 그냥 요리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책 보고 하루 종일 요리하다가 저녁에 다시 책보면서 잠들었으니까요. 인생에 빈틈이 없이 요리로 가득 채워져 있었어요. 요리, 요리, 요리, 요리, 요리. 일주일에 침대에서 잔 날이 한 번도 없었어요. 만날 소파에서 책 보다 잠드니까.”
그 당시 이찬오 셰프가 받았던 돈은 1주일에 700불, 방세와 식비, 교통비를 빼면 300불이 남았다. 거기서 책을 두 권 사면 100불이 남는다. 그 돈을 두 번 모아, 유명한 레스토랑에 가서 혼자 식사를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식당으로 출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요리책을 보다 잠이 든다. 휴대폰도 없이 이 생활을 4년 했다.
“호주에서는 실력이 있으면 인정 받아요. 저는 또 운동을 한 사람이잖아요. 그 때는 체력이 지금보다 더 좋았거든요? 제가 남들보다 단 한 가지도 꿇리지 않는 거에요. 여러 가지 상황에서 제가 휘어 잡을 수 있는 상황이 되었어요.”
세 번째 식당이었던 펠로(PELLO)에 들어가면서 수셰프(Sous Chef)가 되었으나 이내 펠로가 새로운 지점을 열게 되면서 새 지점의 헤드셰프(Head Chef)까지 오르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24살, 요리를 시작한 지 불과 만 3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다. 휘하에 13명의 요리사를 거느렸고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매일 같이 자신이 만들고 싶은 파격적인 메뉴를 진두지휘했다.
| 프랑스 정통 요리를 배우다.
4년의 전력질주 후에도 그의 삶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돈을 조금 더 벌긴 했으나 모인 돈은 없었다. 남는 돈이 있으면 더 좋은 파인다이닝 식당을 찾아 밥을 먹는데 쓰는 사람이었다.
“여러 식당을 돌아다니면서 “뭐, 그냥 그렇네”, “이건 나도 하겠네” 정도로 평가하고 다녔었는데, 시드니에 있는 빌슨스(Bilson’s)라는 레스토랑에 갔다가 완전 깨졌어요. SMH 모자3개(호주의 미슐랭) 받은 곳이었는데, 그 때의 충격이 찰리 트로터 책만큼이나 충격적이었어요. “아,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음식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지는 거 있죠.”
한 권의 책이, 한 접시의 요리가 얼마나 큰 충격을 줄 수 있는지 필자와 같은 일반인이 공감하기는 쉽지 않다. 어쨌거나 위엄이 넘치는 그 한 접시 요리가 그의 인생에 기로가 되었고, 그 접시 앞에서 ‘프랑스에 가서 정통 파인다이닝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이번에도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바로 다음 주부터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분을 속이고 카페로 출근한다. 그렇게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피곤하게 속박하는 사람이었다.
“호주는 기본 시급이 세잖아요. 한 시간 일하면 17불 벌 수 있거든요? 아침 6시부터 11시까지 브런치 카페에서 계란 굽고 빵 굽다가 조리복 입은 채로 버스타고 제 식당으로 12시까지 출근하는 거죠. 6개월 동안.”
살 책을 안 사고 먹을 음식을 안 먹으며 돈을 모으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프랑스 땅에 도착했으나 호주에서의 경력이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24살 어린 나이에 헤드셰프라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청년을 받아주는 곳은 없었고, 어렵게 Comis Chef(영어권에서는 Apprentice에 해당하는 최하위 직급)로 들어가게 된다.
“구시대적인 방식이죠. 자신의 색깔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어요. 식당 용어로는 브레이크다운(Break-Down)이라 부르는 건데, 저도 제 후배들이 백지 상태가 아니면 가르쳐주기 싫거든요. 아니, 가르쳐주려고 해도 다른 색을 입혀줄 수가 없어요.”
배움을 위해 갔던 것이니 직급이 낮아진 것은 어쩔 수 없었으나, 매번 자신의 생각을 담아 창작 요리를 하던 사람이 그 폭발적인 욕구를 잠재우고 살아야 하는 것이 더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이 식당에서 미치광이(그의 표현을 빌어) 셰프의 히스테리와 신경질적인 성격을 버텨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찬오 셰프를 제외하곤 모든 스태프는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됐다. 자연스럽게 빈 자리가 생기면 누구보다 먼저 불려나갔고 주방의 중심 역할에 가까워졌다. 1년이 되는 날 셰프는 이찬오 셰프에게 제안한다. “수셰프로 들어와라.”
“모든 것이 보상 되는 시점이었어요. 그 동안 악으로 독으로 버텼어요. 하루에 최소 16시간씩 일하고 돈도 없어서 거지같이 살았는데, 프랑스까지 와서 포기할 수 없었어요. 프랑스까지 왔는데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잖아요. 그게 드디어 증명된거죠. 해냈다!”
그는 이 1년의 기간이 다신 경험하고 싶지 않은 증오의 시간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시간만큼 요리를 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시간도 없었다고 고백했다.
정통 프랑스 요리의 원칙을 배울 수 있었던 배움의 시간,
공든탑을 무너뜨리고 다시 쌓기를 수 차례 반복한 수행의 시간,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수 백 번 각오를 다잡으며 자신의 강인함을 증명해 낸 인내의 시간.
| 마라톤 코스를 전력질주하기, 완주 후 쉼 없이 다시 달리기.
이찬오 셰프의 과감하고 성급한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듣는 사람의 숨이 다 가빠질 정도다. 마치 42.195Km의 마라톤 코스를 100m 달리기 하듯이 전력질주 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제서야 마라톤 코스의 마지막에 다다랐구나 싶을 때쯤, 새로운 달리기가 또 시작된다.
수셰프로 와달라는 제안을 보기 좋게 거절하고 향한 곳은 네덜란드의 헤이그(Hague). 요리사 친구가 있어서 무작정 버스를 타고 그 도시에 들렸다. 5년의 긴 요리 인생도 되돌아볼 겸, 곧 군대도 가야 하니 휴식을 할 참이었다. 마음속의 로망이었던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가보고 유럽의 파인다이닝 식당 투어나 해볼 참이었다.
“스타타그(Statig)! 도착해서 시내 구경 하고 있었는데 스타타그라는 레스토랑에 셰프 구한다고 써있는 거에요. 왜 그럴 때 있잖아요. 아무 이유도 모르겠지만 그 장소가 꽂힐 때도 있잖아요. 문 열고 들어갔다가 그 날부터 바로 헤드 셰프로 일하게 됐어요.”
1년 동안 억눌렸던 창작욕구를 마음껏 터뜨렸고, 아시안-프렌치 요리로 매일 같이 파격적인 메뉴를 선보였다. 네덜란드 현지 사람들이 맛보지 못했던 식재료도 등장했다. 불고기 양념, 미역, 미소된장. 이찬오 셰프는 6개월 만에 헤이그에서 선정한 TOP20 레스토랑 반열에 스타타그의 이름을 올려놓는다.
“마누(이찬오 셰프의 영어이름)는 모짜르트 같이 요리하는 사람”
“누구의 요리도 마누의 것이 아니며, 마누의 요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비평가들의 극찬이 끊이지가 않았다. 자신의 요리에 대한 리뷰를 받는다는 만족감이 컸다. 지난 5년 동안의 모든 고생이 보상되는 시간이었다. 누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악바리처럼 살았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과의 싸움이었다고 답했다.
“나와의 싸움이고, 내가 기대하던 싸움이었어요. 제가 동경하던 사람들을 목표로 세우고 닮거나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거에요. 고든 램지를 닮고 싶은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마코 피어 화이트는 33살에 처음으로 미슐랭 스타를 받았다고 하던데 나도 33살에 미슐랭 받아야지. 마코도 했는데 마누가 못할 건 뭐 있냐고.”
참 피곤한 삶의 방식임을 본인도 인정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에 불만족하는 것, 끊임없이 더 높은 목표를 새로 세우는 것,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기에 어떤 힘든 상황도 이겨내고 마라톤 코스를 전력질주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 순수함을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
로네펠트 티하우스의 정원에 들어서면 입구가 어디인지 찾기가 쉽지 않다. 오른쪽 편에 보이는 건물의 기괴한 분위기의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2층의 식당이 나온다. 1층은 이찬오 셰프가 작업실로 쓰는 곳.
이 작업실을 보면 비로소 이찬오 셰프의 다른 면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토록 험난하고 역경 가득했던 요리 인생을 산 이찬오 셰프가 지금과 같이 정갈하고 미학적으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음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유가 조금은 이해된다.
지금의 이찬오 셰프의 삶은 예전처럼 그렇게 요리로 가득 차있지는 않다. “이제는 좀 일주일에 3일만 일하고 싶어요.”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지만 그 속에는 삶의 여백을 음악과 예술로 채우겠다는 뜻이 들어있다. 아버지는 조각가, 어머니는 재단사, 동생은 보석세공사, 그리고 예술을 하는 친구들이 항상 옆에 있었다. 빈틈없이 빡빡했던 요리 인생 아래에도 예술이라는 문화적인 코드가 깊이 깔려있었고 그의 요리에 꾸준히 베어 나오고 있다.
“요리를 통해서 요리의 영감을 받으면 결국 요리로 결론지어져요. 요리, 요리, 요리, 계속 맴돌 뿐이라 생각해요. 제가 지금 추구하는 것은 그냥 요리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영감 받으려고 해요. 미술, 음악, 패션, 색채, 일상, 사건 등에서 영감을 받아서 요리를 하게 되면 결과물이 달라요. 그래서 요즘은 무의미한 요리 공부는 안 하려고 해요.”
그럼과 동시에 그가 추구하는 것은 ‘순수’라는 감성이라고 한다. 순수한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절제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아 항상 마음을 훈련한다고 한다. 그가 요리를 시작하게 된 것이 화려한 요리의 인상이라는 출발역이었다면 종착역은 조금 다른 듯 하다.
| 기억으로의 식사, 그것의 극대화
“파인 다이닝은 그냥 배 채우려고 밥 먹으러 가는 게 아니잖아요. 좋은 시간을 보내거나 특별한 날을 축하하기 위해서 간단 말이에요. 그 시간에 걸맞는 음식이 있어야 하거든요.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수프나 파스타를 먹어야 할 게 아니라, 그 특별한 시간을 강렬하게 기억에 남길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한 거에요.”
그는 기억에 강렬하게 오랫동안 남길 수 있는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음식 뿐만 아니라 주변의 상황, 분위기, 음악, 개인적으로 가지는 식사의 의미 등등이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상상에 빠지듯이 음식을 보면서도 상상할 수 있잖아요? 맛과 향, 분위기, 특별한 시간이라는 요소들이 더해지면 감정이 극대화되는 거에요.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 거죠. 왜 특별한 음식을 먹은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 당시의 상황이랑 주변 사람들과 나눈 대화, 그 당시에 느꼈던 감정들이 떠오르는 거.”
음식의 본질은 먹어서 없애는 것이고 기억의 본질은 오랫동안 남는 것이다. 이찬오 셰프의 요리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자 하는 음식이다.
요리사라는 사람들은 본디 창조하는 것을 좋아한다. 짧은 시간에 무엇인가를 탄생시키고 즉각적인 결과를 보는 것, 이 작업을 하루에 수십 번 반복하는 요리사는 예술가와 닮은 점이 많이 있다. 창작활동을 통해 사람들과 소통고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 끝나지 않은 그의 달리기, 또 한번의 마라톤을 준비하며
그는 한국의 다이닝 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소비 성향이 달라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파인 다이닝이 무엇인지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 그 이유다.
“일식집 최고급 코스 60만원짜리를 먹으면 무엇이 나올 지 상상되죠? 고급 중식도 몇 십 만 원짜리 코스 요리를 먹으면 뭐가 나올지 대충 안단 말이에요. 그럼 양식이라고 불리는 곳에서는? 사람들은 그냥 파스타 나오고 스테이크 나올 걸로 기대해요. 거기에 몇 십 만원 쓰겠단 생각을 못하는 거죠. 그 스탠다드부터 깨져야 돼요.”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며 10년 후에는 어떤 모습이면 좋겠냐는 질문에 일관적인 대답을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술적인 요리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지만, 다시금 자신을 피곤할 정도로 속박하는 그 모습으로 돌아갔다.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셰프가 될 거에요. 목표는 크게 가져야 해요. 그런데 이런 목표는 속으로만 계속 되 뇌여요. 밖으로 말하면 진짜 지켜야 하니까요.(웃음)”
웃음이 섞인 그의 대답에선 눈치를 보거나 겸손하고자 하는 가식도 없이 당당하게 답변이 나왔다. 경솔하다는 느낌도 전혀 없었다. 그토록 고독하고 다사다난했던 요리-인생마라톤을 계속 달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에 불만족하면서 높여 세운 목표 덕이었으리라. 이찬오 셰프는 자신을 이끄는 법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증명해내고 있다.